2022년 7월 2일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제1독서 : 아모 9,11-15
복 음 : 마태 9,14-17
14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1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16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지기 때문이다.
17 또한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느 형제님으로부터 “이번에는 다이어트에 성공할 것입니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종합검진을 받은 뒤, 체중을 줄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경고 메시지를 받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다이어트를 하겠다고 선언하신 것이지요.
저는 다이어트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물음에 아주 자랑스럽게 말씀하셨습니다.
“곧바로 1년 치 헬스장 이용권을 끊었지요.”
건강에 대한 경고 때문에 열심히 하겠지만,
사실 헬스장 이용권을 끊어놓고도 1년 동안 몇 차례 가지 않는 분을 너무 많이 봤었습니다.
꿈이나 목표는 있지만 이를 실현하기 위한 행동은 하지 않고
성과만 기대하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영어로 대화하고 싶다고 하면서, 영어책만 사놓고
영어 공부는 전혀 하지 않는 경우도 알고 있습니다.
취미를 살려 사업을 시작하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관련 조사는 전혀 하지 않는 경우는 어떨까요?
신앙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열심한 신앙인이 되겠다고 다짐하면서도,
세상일에만 관심이 있고 주님의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면 어떨까요?
실행해야 할 것에 대해서는 계속 미루기만 하는 우리의 게으름을 몰아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작은 실천이라도 성과를 이루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야 합니다.
그래야 게으름이 습관화되지 않고, 어떻게든 행동하려는 의지가
나의 소중한 습관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단식에 관해 질문합니다.
즉, 자기들과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예수님 제자들은 왜 단식하지 않는지를 묻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단식은 하느님 앞에 자신을 낮추기 위해서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단식이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으로 변질했습니다.
율법에 나와 있으니 하는 것이지,
결코 하느님 앞에 겸손한 모습으로 나아가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장차 올 하느님 나라의 기쁨에 어울릴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새 모습으로 복음을 들고 오셨습니다.
그에 반해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는 헌 것이라 할 수 있는 과거의 율법에 매여있습니다.
어떤 것이 하느님 뜻인지를 또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으실지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율법을 무조건 따르면 그만이라고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앞서 헬스장 이용권을 끊었다고 다이어트가 되지 않는 것처럼,
율법을 무조건 따른다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뜻을 철저하게 따르는 사랑의 실천만을 통해서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으며, 영원한 생명도 얻게 됩니다.
상처와 회복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나이 들어갈수록 시가 점점 좋아집니다.
언제나 상처와 상처의 극복, 그리고 희망을 노래하시는
박두순 시인의 ‘상처’라는 시가 오늘따라 마음에 와닿습니다.
나무줄기를 따라가 보면
상처 없는 나무가 없다.
그렇지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눈보라에 시달리지 않는 나무가 어디 있겠는가.
흔들린 만큼 시달린 만큼
높이와 깊이를 가지는 상처
상처를 믿고 맘 놓고 새들이 집을 짓는다.
상처를 믿고 꽃들이 밝게 마을을 이룬다.
큰 상처일수록 큰 안식처가 된다.
‘꽃을 보려면’이라는 시는 또 얼마나 큰 감동을 주는지 모릅니다.
채송화 그 낮은 꽃을 보려면
그 앞에서 고개 숙여야 한다
그 앞에서 무릎도 꿇어야 한다
삶의 꽃도 무릎을 꿇어야 보인다.
‘burnout’이란 단어가 있습니다.
거듭되는 과로와 스트레스로 인한 심신의 탈진상태를 말합니다.
오늘날 많은 현대인들이 이 burnout 증후군으로 고생하고 있습니다.
신체적, 정서적 극도의 피로감은
무기력증이나 자기혐오, 직무 거부로 연결됩니다.
마치 연료가 다 타버린 것처럼
갑자기 일할 의욕을 잃고 업무에 적응할 수 없게 되는 현상입니다.
이럴 때 중요한 것이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서기’입니다.
때로 죽도록 집착하고 갖은 애를 쓰며 견뎌내는 대신
그냥 한 걸음 ‘쓱’ 옆으로 비켜서는 것이 의외의 좋은 결과를 가져다줍니다.
때로 옆으로 비켜선다는 것, 놓아버린다는 것,
참으로 자존심 상하는 일이며, 어려운 일이지만
어차피 우리네 삶이란 것은 ‘놓아버리기’의 연속입니다.
일, 명예, 돈, 사람, 관계, 욕심, 자리...
사실 우리가 그토록 목숨을 걸고, 또 절대적인 것이라고 여기던 것들도
사실 그리 오랜 세월 지나지 않아 상대적이란 것을 깨닫게 됩니다.
진정한 새로움을 발견하고 싶다면,
인생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기를 원한다면
잔뜩 움켜쥐고 있는 것을 놓아버려야만 합니다.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섬을 통해
우리는 아직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미지의 세계로 여행을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새로움 중의 새로움이신 예수님, 너무나 ‘특별하신’ 예수님이시기에
그분을 제대로 받아들이기 위한다면 가급적 많이 비워내야만 합니다.
기존의 인생관, 과거에 큰 의미를 부여했던 것들,
절대적이라고 여겼던 인간적 가치들, 변화무쌍한,
그래서 세월의 흐름 앞에 어쩔 수 없이 빛을 바래 가는
그 모든 것들로부터 나를 이탈시키면 시킬수록
새 포도주이신 예수님께서 더 많이 우리에게 오실 것입니다.
결국 새 포도주이신 예수님을 더 크게 받아들이기를 원한다면
지금보다 자세를 훨씬 더 많이 낮춰야만 합니다.
겸손의 덕으로 우리의 온몸과 마음을 무장해야 할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구 사제 모임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친교를 위해서 관광과 운동이 있었습니다.
하느님과 함께하는 기도와 미사가 있었습니다.
주최한 본당 공동체의 교우들과 미사를 하였고 맛있는 식사를 함께 하였습니다.
이번 교구 모임의 프로그램 중에 가장 좋았던 것은 시노드의 여정을 함께한 것이었습니다.
두 가지 질문이 있었습니다.
그 질문에 응답하면서 각자의 자리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나눌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교회의 공동체는 함께 걷고 있는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교회의 구조와 제도 속에서 사제가 교우들과 함께 걷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라는 응답도 있었습니다.
사제가 결정하면 신자들은 따른다는 분위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5년 있다가 떠나는 교포사목의 사제는 언어 문제도 있고,
현지 적응의 문제도 있기에 함께 가기보다는 따라가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350년 된 성당에서 선교하는 신부님은 꾸준히 신자들과 함께하니
나중에는 신자들이 마음을 열고 본당의 열쇠를 신부님께 맡겼다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함께 걷는 것도 중요하지만, 함께 어디를 향해서 가는지를
생각해야 한다는 신부님의 의견도 있었습니다.
교구 사제들이 함께 만나서 친교를 나누니 힘이 난다는 신부님도 있었습니다.
교회 공동체가 선택적으로 함께 걷고 있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가난한 이, 성 소수자, 장애인, 혼인 조당자, 낙태한 사람’들과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부유한 사람, 능력 있는 사람, 건강한 사람, 봉사하는 사람들과
주로 함께 걷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젊은이들이 함께할 공간이 없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 세리, 죄인, 장애인, 이방인들과 함께 걸었습니다.
그 사람들의 아픔에 공감하셨습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면 교회가 함께 걷는 것이 아니라
권위와 독선으로 이끌고 있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함께 걷기 위해서는 제도와 역할을 분명하게 했으면 좋겠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본당 신부의 역할, 보좌 신부의 역할, 수도자의 역할, 신자들의 역할을 규정하고
교회는 그런 역할이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지원하면 좋겠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가정에서 신앙의 불꽃이 꺼져가고 있다면 가족이 따로 걷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가 속한 공동체와 함께 걷고 있는지,
나는 가족들과 함께 걷고 있는지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두 번째 질문은 ‘함께 걷기 위해서 성령께서 바라시는 것은 무엇인가?’였습니다.
신부님들은 성령의 이끄심을 많이 체험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선교 사제들은 함께하는 데는 언어가 중요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언어가 익숙하지 않았지만, 교우들은 사제들을 위해서 더 가까이했다고 합니다.
성당에 전등이 나가서 걱정하면 누군가 전등을 교체해 주었다고 합니다.
성당에 누수가 있어서 걱정하면 누군가 고쳐주었다고 합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신문홍보를 갈 수 없었습니다.
성령께서는 새로운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3달 동안 사제가 없는 성당에서 미사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팬데믹이 길어지면서 2년 가까이 미사를 함께 하고 있습니다.
제가 도움을 주는 것 같았지만 저 역시 공동체와 함께하면서 많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근심과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너무 익숙해서 잘 느끼지 못하지만, 태양은 언제나 우리를 비추고 있습니다.
공기가 있기에 우리는 숨 쉴 수 있습니다.
마음을 열면 성령께서 늘 곁에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
성직자, 수도자, 교우들이 함께 걷는 것이 새 포도주입니다.
권위와 독선으로 혼자 걷는 것은 낡은 포도주입니다.
타성에 젖어서 현실에 안주하는 것은 낡은 포도주입니다.
무관심으로 공동체의 어려움을 방관하는 것 또한 낡은 포도주입니다.
새 포도주는 어려움과 갈등이 있을지라도 함께 걷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는 이웃의 아픔과 슬픔에 깊은 연민을 갖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는 이해 받기보다는 이해하고,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는 것입니다.
늘 감사하는 것이 새 부대입니다.
언제나 기뻐하는 것이 새 부대입니다.
항상 기도하는 것이 새 부대입니다.
성령의 이끄심을 느끼며 함께 걷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벌어진 곳은 메우고 허물어진 곳은 일으켜서 그것을 옛날처럼 다시 세우리라.
산에서 새 포도주가 흘러내리고 모든 언덕에서 새 포도주가 흘러넘치리라.”
축제 인생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행복하여라, 축제의 기쁨을 아는 백성!
주님, 그들은 당신 얼굴 그 빛속을 걷나이다.
그들은 날마다 당신 이름으로 기뻐하고,
당신 정의로 힘차게 일어서나이다.”(시편89,16-17)
삶은 선택이자 훈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쁨을, 감사를, 찬미를 선택하여 훈련하며 살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고해 인생이 아닌 축제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며칠 전 수도원을 찾았던 분의 물음에 부지불식간 대답해 놓고
더욱 그렇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루하루 어떻게 살아갑니까?”
“하루하루 기쁘게 즐겁게 살아갑니다.”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날마다 좋은 날입니다.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 어디서나 주인이 되어 살아야 합니다.
그 어디나 진리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옛 중국 선사들이 준 말씀이지만 우리 믿는 이들에게도 그대로 공감이 가는 말씀입니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 이 자리에 축제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어제 수녀원 고백성사 때 드린 수녀님들에게 드린 보속도 생각납니다.
출력한 오늘 강론을 묵상하고,
오늘 하루 기쁘게 감사하며 행복한 하루를 사시라는 보속을 드렸습니다.
오늘 하루만 아니라 7월 한 달 내내 그렇게 기쁘게 감사하며 행복하게 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바로 하루하루 축제의 삶을 살라는 말씀이겠습니다.
새벽 강론을 쓰는 이 시간에도 엊그제 온종일 내린 비로
힘차게 흐르는 불암산 계곡물 소리가 들립니다.
어제 써놨던 “찬미는 저렇게 하는 거다”란 시가 생각납니다.
-“찬미는
저렇게 하는 거다
하늘비 내리니
곳곳에서 들려오는
끊임없는
각양각색의 찬미노래들
시냇물
도랑물 흐르는 소리
하늘 은총
내릴 때
저절로 끊임없이 솟아나는
하느님 찬미 노래들
‘나의 혀는
당신 정의를 찬양하리이다.
진종일
당신 찬미를 노래하리이다’(시편35,28)-
끊임없는 “찬미의 기쁨”으로 살아가는 여기 수도자들입니다.
힘차게 찬미 노래 부를 때는 계곡물 흐르는 소리처럼 들립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입니다.
이런 끊임없는 찬미가 하느님을 꿈꾸며 지금 여기서 하늘 나라 축제인생을 살게 합니다.
정말 살 줄 아는 사람들이요, 바로 아모스 예언자가, 복음의 예수님이 그러합니다.
오늘로서 제1독서 아모스서는 끝납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이란 소주제 내용대로 해피엔드로 끝납니다.
언젠가의 그날을, 하늘나라를 오늘 지금 여기서 앞당겨 살았던,
희망의 예언자, 하늘나라 꿈의 사람, 아모스가 참 멋집니다.
말 그대로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로 축제 인생을 살았던 분입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밭 가는 이를 거두는 이가 따르고, 포도 밟는 이를 씨뿌리는 이가 따르리라.
산에서 새 포도주가 흘러내리고, 모든 언덕에서 새 포도주가 흘러넘치리라.
나는 내 백성 이스라엘의 운명을 되돌리리니,
그들은 허물어진 성읍들을 다시 세워 그곳에 살며,
포도밭은 가꾸어 포도주를 마시고, 과수원을 만들어 과일을 먹으리라.”(아모9,13-14)
얼마나 고무적입니까!
이렇게 하느님의 사람들은 긍정적이요 낙관적입니다.
참으로 운명을 바꾸는 찬미의 힘, 하느님의 힘입니다.
참으로 이런 하늘나라를 꿈꾸며 살 때, 하느님의 시야를 지닐 때,
패러다임의 전환, 발상의 전환입니다.
참으로 자유로운 삶이요 본질적 깊이의 삶입니다.
본말전도本末顚倒, 주객전도主客顚倒의 어리석은 삶을 살지 않으니,
저절로 분별의 지혜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참 좋은 모범입니다.
자기들의 수행 세계에 갇혀있는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과
드넓은 하느님 시야를 지닌 예수님과의 대화가
오늘 우리에게 새로운 자극과 도전이 됩니다.
발상의 전환을, 패러다임의 전환을 촉구합니다.
단식의 잣대로 삶을 재단하며 어찌하여 당신 제자들을 단식하지 않는가
추궁하는 요한의 제자들에 대한 주님의 답변입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느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주님과 함께 살아가야 할 기쁨의 축제 인생의 때
왜 고통의 고해 인생을 자초해서 살아가느냐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때가 있는 법입니다. 단식의 때 단식을 하는 것이 삶의 지혜입니다.
단식 많이 해서 구원이 아니라 사랑 많이 해서 구원입니다.
‘안 먹고 교만한 것보다 먹고 겸손한 것이 낫다’는 옛 장상의 명언도 생각납니다.
그렇지 않아도 고통스런 환경에 에워싸여 살아가는 사람들인데
왜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단식을 덧붙여 고해 인생을 자초해서 살아가느냐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 마음에 정통한 천의무봉天衣無縫 대자유인 예수님이십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비유가 참 적절합니다.
꽉 막힌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수행자들의 시야를 넓혀 줍니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로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
이래야 꼰대 소리를 듣지 않습니다.
나이 들어 늙어도 부단한 발상의 전환, 패러다임의 전환으로
의식은 늘 새로운 옷, 새 부대가 되어야 합니다.
이래서 살아 있는 그날까지 부단히 배우고 공부하는 평생 학인의 삶이요,
분투의 노력을 다해야 하는 평생 전사의 삶이요,
이래야 새 옷에 새 천 조각의 삶, 새 부대에 새 포도주의 삶입니다.
“Ever old, Ever new”
'늘 옛 스러우면서도 늘 새로운' 향기롭고 매력적인 삶,
제가 참 좋아하는 영어 말마디입니다.
어제 수도원 고백 신부도 게시판에 붙은 일 말마디를
그동안 유심히 봐왔다면서 감탄을 표현했습니다.
가톨릭교회가, 성서가, 전례가, 성인이 바로 그러합니다.
바로 늘 새 부대에 새 포도주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이러합니다.
이런 이들에게는 늘 새 하늘에 새 땅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영적 쇄신이요 영적 혁명입니다.
끊임없이 내적으로 새로워져 새롭게 사는 일일시호일의 삶,
수처작주 입처개진의 삶이요, 바로 파스카 축제의 삶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 은총이 우리 모두 이런 축제의 삶으로 이끌어 줍니다.
“주님, 천상 은총으로 저희를 빛의 자녀가 되게 하셨으니,
저희가 다시는 오류의 어둠 속을 헤매지 않고,
언제나 진리의 빛 속에 살게 하소서.” 아멘.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유다인들에게 자선과 기도와 단식은 그들의 신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요한 세례자의 제자들은 스승의 영향을 받아 자주 단식을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과 제자들은 별로 단식하지 않았다.
그래서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14절) 물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잘 알고 있는 결혼식을 예로 들어 설명하신다.
그들의 결혼은, 집에 있으면서 일주일 동안 가까운 친지들을 불러 기쁨의 축제를 지냈다.
이때에는 모든 율법의 의무로부터 완전히 해방 되어 즐길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때에는 단식의 의무에서도 해방된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신랑에, 제자들은 신랑의 친한 친구들로 비유하신다.
그러한 잔치에서 슬퍼하며 단식할 수 없다.
그때는 단식할 때가 아니고 즐기는 때이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스승을 빼앗기고 슬퍼하는 것처럼,
예수의 제자들도 신랑을 빼앗기고 난 후 단식을 하게 된다고 하신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 돌아가시고 영광을 입으시고
하느님의 영광 안에 들어가시고 나서 제자들은 단식하기 시작하였다.
초기 교회의 신자들은 수요일과 금요일에 단식하였다고 한다.
우리는 여기서 이것을 생각할 수 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주님과 함께 있다는 것 자체가 기쁨이요 잔치이다.
주님과 함께 있는데 슬픔과 어두움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주님을 모시고 항상 기쁘게 사는 것이 중요하며,
내 잘못으로 주님을 모시지 못했을 때는
우리는 기도하고 단식하며 자선을 베풂으로써, 주님을 다시 모셔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이러한 가르침은 율법에 매인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가르침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16-17절).
수축이 강한 새 천을 찢어서 헌 옷을 깁는 사람도 없지만,
새 포도주도 발효가 심하므로 수축 작용이 거의 없는 가죽 부대는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기쁨을 누릴 수 있으려면,
지금까지의 고정화된 나 자신의 틀인, 헌 옷이나, 낡은 가죽 부대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내 마음의 자세가 근본적으로 새롭게 변화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우리가 모두 복음을 새로운 마음으로 받아들여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한다.
미래지향적인 삶
반영억 라파엘 신부
과거, 현재, 미래가 다 중요하지만,
과거의 허물이 또는 옛 생각이 오늘의 발목을 잡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더 나은 내일을 향하기 위해서는 오늘에 충직해야 하고,
오늘에 충실한다는 것은 희망의 미래가 있기 때문입니다.
미래를 지향하는 만큼 최선에 최선을 다하고 오늘의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옛것에 매여있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오늘에 어떻게 적용해야 할 것인지를 마음 써야 합니다.
껍데기에 치중한 삶이었다면 알맹이를 찾으라는 권고입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우리는 단식을 많이 하는데 왜 스승님의 제자들은 단식을 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는데
사실 단식은 그저 맹목적으로 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단식을 하는 것은 밥을 굶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식할 합당할 이유가 있어서 단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단식을 한다고 자랑할 이유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면 그분과 함께 기쁨을 나누면 되는 것입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잔칫집에서는 함께 웃고 축하하는 것이요,
상가에서는 함께 울고 슬픔을 나누면 됩니다.
슬픈 일이 생기고, 새 삶의 시작을 위해서, 회개와 보속의 삶을 살기 위해서,
이웃과의 나눔을 위해서라면 단식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단식을 통해 새 생활의 틀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지난날의 생활 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 가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에페4,22-23).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단식은 흔히 말하는 다이어트와는 분명 다릅니다.
단식의 정신은 주님의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묵은 생각을 버리고 주님의 말씀으로 거듭나기를 기도합니다.
미래를 지향하는 풍요로운 마음으로 새 술을 새 부대에 담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예고를 미처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분별없이 외적인 형식에 매여 단식을 논하였습니다.
형식도 무시할 수는 없지만, 내용이 중요하고 지향하고 있는 바는 더 소중합니다.
누구 마음에 들기 위해서 단식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면서 심판하신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을 묵상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느님께서 세상의 악에 대해서 대답하신 말씀입니다.
많은 경우에 악에 대해서 하느님이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침묵 중에 계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말씀하시면서 응답하셨습니다.
그 응답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말씀은 사랑이요 자비이고 용서의 말씀입니다.
또한 그것은 심판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면서 심판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면서 심판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만일 내가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인다면 나는 구원됩니다.
만일 내가 그것을 거부한다면 저는 단죄 받게 되는데
이것은 그분에 의한 단죄가 아니라 나 자신이 내리는 단죄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우리를 단죄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사랑하시며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2013년 3월 29일 콜로세오 십자가의 길에서 행한 연설).
단식이란 회개 위 표징이며 용서와 자비의 기다림
박상대 마르코 신부
지난 복음에서 침상의 중풍병자와 세리 마태오와 관련한 주님의 모습에서 보듯이,
질병과 죄의 관념적 유대관계를 깨어버리고 죄인까지도 불러 제자로 삼으시며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공동체를 이루신 예수께서는
분명 이 땅 위에 죄를 용서하시는 권한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죄의 용서는 갈라지고 깨어진 관계와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며,
공동체에로의 복귀를 의미합니다.
사실 이 땅 위에서 예수 외에 어느 누구도 죄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외에 어느 누구도 사람의 죄를 사 할 수 없다는
철칙을 알고 있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예수는 한낱 하느님을 사칭하고 그분을 모독하는 자로만 인식되겠지만,
세상에 대한 예수님의 자기 계시는 오늘 복음에서도 계속됩니다.
예수께서 제자로 삼으신 세리 마태오의 집에서
다른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음식을 나누었던 일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단식에 관한 문제로 시비를 건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단식’은 일정 기간 동안 종교적 수행이나 의료의 목적으로
모든 음식 섭취를 끊는 일입니다.
거의 모든 종교에서 단식은 그 종교의 기본적 수행에 속하는 덕목인데,
요즘은 자신이나 단체의 뜻을 관철 시키려는 수단으로,
또는 건강이나 늘씬한 몸매를 가지기 위한 수단으로 단식이 널리 이용되며,
도교에서는 장생불사하기 위한 수단 방법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단식의 가장 대표적인 예로는 이슬람교의 라마단(Ramadan)을 손꼽을 수 있는데,
라마단은 이슬람력의 9월에 해당하는 절기로서,
이 기간에 모든 무슬림은 일출에서 일몰까지 해가 떠 있는 동안에
한 방울의 물도 마시지 않는 철저한 단식 규정을 지킵니다.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단식은 율법이 규정하고 있는 바,
온 이스라엘이 죄를 벗는 제7월(티쉬리달, 현대력으로는 9월)의 10일에
모든 사람이 단식과 안식을 지켜야 했습니다.
(참조 : 레위 16,29 이것은 너희에게 영원한 규칙이 되어야 한다.
일곱째 달 초열흘날에 너희는 고행을 하고, 일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
본토인이든 너희 가운데에 머무르는 이방인이든 마찬가지다.
사도 27,9 많은 시일이 흘러 단식일도 이미 지났다.
그래서 항해하기가 위험해지자, 바오로는 경고하면서)
유베생활 이후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메시아의 도래를 준비하는 뜻으로 일주일에 두 번(월요일과 목요일) 단식하였고,
신약시대의 직전에는 세례자 요한이 금욕생활을 하였고,
그의 제자들도 스승을 본받아 자주 단식하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루가 18,12; 마르 1,6; 마태11,19)
따라서 오늘 복음에서 논쟁의 대상이 된 단식은 율법이 명하는 공식적인 행사로서가 아니라
사적이고 개인적인 수행으로서의 단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봐야 합니다.
예수와 제자들이 왜 단식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예수께서는 자신을 혼인 잔치에서의 신랑, 새 천 조각,
그리고 새 부대와 새 포도주에 비유하시는데,
혼인 잔치가 벌어지는 동안에 신랑이 손님들과 단식을 하거나 곡을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술과 음식, 여흥과 춤, 기쁨과 웃음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공생활을 바로 혼인잔치가 벌어지는 기간으로 계시하신 것입니다.
이때는 결국 새로운 시대의 개벽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예수님의 오심으로 시작된 하느님 나라의 시대이며, 새로운 계약의 시대이며,
하느님께서 주시는 기쁨의 선물인 구원의 시대입니다.
이때는 이사야가 예언한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는(이사 65,17; 66,22) 시대이며,
에제키엘이 말하는 묵은 심장이 도려내 나가고 새로운 심장이 심겨지는 그런 시대입니다.
(에제 36,26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
단식이란 회개의 표징으로서 용서와 자비의 기다림이며,
구약성서와 유다교에서 단식은 약속된 메시아의 도래와 불가분의 관계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메시아이신 예수께서 이미 도래하셨으니,
예수님의 제자들이 단식을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ipso facto) 모순입니다.
제자들은 물론, 세상이 온통 메시아 도래의 기쁨에 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40일 주야를 단식하셨듯이(마태 4,2)
우리에게도 단식은 필요합니다.
단식은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며,
앞으로 올 것에 대한 준비로는 꼭 필요한 수행이기 때문입니다.
“새 옷 – 낡은 옷, 새 포도주 – 묵은 포도주, 새 부대 – 헌 부대”를 소재로 한 이중 비유는
단식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한층 더 또렷하게 밝혀줍니다.
예수님의 메시아로서의 도래는 하느님나라의 도래를 말하는데,
이제 헌 것은 가고 새 것이 도래한 것입니다.
모든 것이 새로워졌고, 새 하늘과 새 땅(2베드 3,13; 묵시 21,1)이 도래했습니다.
새로이 도래한 하느님 나라를 헌 것을 가지고 맞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향한 준비는 마음의 “어느 한 조각”으로 불가능하기에,
예수께서는 우리들에게 삶과 태도의 전적인 회개와 변화를 촉구하시는 것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