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KCC 이지스는 현대 농구단을 전신으로 하고 있다. 실업농구 현대는 프로농구가 출범하면서대전 현대 다이넷(1997.1~1999.10)으로 재탄생했고, 현대 걸리버스(1999.10~2001.5)로 잠시 이름이 바뀌었다가 2001년부터는 KCC로 모기업이 바뀌었다. 현대 시절에는 연고가 대전이었고, KCC로 팀명이 바뀌면서 연고지를 전주로 옮겼다.
실업농구 시절부터 현대가(家)의 농구 사랑은 유명했다. 고(故) 정주영 명예회장이 유독 농구를 사랑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왕회장’의 막내 동생인 KCC 정상영 명예회장의 농구사랑도 대단하다. 구단주의 확고한 믿음 때문일까. KCC는 프로농구 출범 이후 현재 추승균 감독을 포함해 역대 감독이 3명(신선우 감독 1997~2005년, 허재 감독 2005~2015년)에 불과하다. 각 감독의 재임 기간이 길었던 만큼 시즌 별로 확고한 팀 컬러를 잘 보여줬던 팀이었고, 굵직한 스타 플레이어에 대한 영입과 대우를 잘 한 팀이었다. 그런 점들이 또한 KCC의 가장 큰 매력이기도 하다.
# KCC의 2015-2016시즌_뒷심의 왕
KCC는 최근 6~7년 동안 한 번도 시즌 초반부터 시동을 걸고 앞서나간 적이 없다. ‘슬로 스타터’라는 별명이 딱 어울린다. 그 이유는 센터 하승진으로 설명할 수 있다. 하승진은 2m21㎝의 압도적인 높이를 보유한 센터지만, 풀타임을 소화할 만큼의 내구력이 모자란 게 약점이다. 또 비시즌 동안 완벽하게 몸을 만들어 놓고 시즌을 시작한 경우가 거의 없었고, 시즌 도중 부상도 잦다. 그러나 하승진이 시즌 중반 이후 ‘몸이 풀리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KCC가 무서운 기세로 질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올 시즌도 비슷하다. KCC는 시즌 초반 중위권에 머물렀다. 하승진은 시즌 초반 뛰지 못했다. 하지만 하승진 복귀 후 KCC의 선수 구성을 보면 빈틈이 없어 보인다. 가드 전태풍과 김태술이 있고, NBA 출신의 테크니션 안드레 에밋이 득점을 책임진다. 여기에 슈터 김민구, 센터 하승진이 버티고 있다. 시즌 도중 공격형 포워드인 리카르도 포웰은 전자랜드로 보내고 안정적인 기량의 정통 센터 허버트 힐을 받는 트레이를 한 것도 ‘신의 한 수’였다. 이들이 제대로 호흡을 맞추기 시작하면서 정규리그 상위권 판도가 들썩였다. KCC는 정규리그 막판 무려 12연승을 질주하면서 결국 정규리그 우승컵까지 거머쥐었다.
#최고의 시절_챔프전에 강한 KCC
KCC의 전신인 대전 현대는 1997~98시즌부터 3시즌 연속 정규리그 우승을 휩쓸었고, 1997~98시즌과 1998~99시즌엔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차지했다. 프로농구 초창기를 지배했던 팀이 바로 현대였다.
재미있는 사실은, KCC가 장기전보다 단기전에서 두드러지게 강하다는 것이다. 현대가 프로농구 초창기에 3시즌 연속 정규리그 우승을 한 이후 KCC로 팀 이름이 바뀐 뒤엔 3차례 챔피언결정전에서만 우승했다. KCC 이름으로 정규리그에서 우승한 건 올 시즌이 처음이다.
KCC 창단 후 첫 우승은 2003~2004시즌에 나왔다. 당시 신선우 감독은 초창기 우승 멤버이자 한때 다른 팀으로 내보냈던 조성원을 재영입해서 챔프전 우승을 일궈냈다. 이른바 ‘이-조-추’로 불리던 이상민-조성원-추승균의 재결합이자, 이들이 주역이 되어 만들어낸 또 한 번의 우승이었다.
당시 KCC의 우승은 시즌 도중 이뤄진 외국인 선수 트레이드 때문에 가능했다. KCC는 무스타파 호프를 하위팀 모비스로 보내고 정통센터 R.F. 바셋을 받아오는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바셋과 찰스 민렌드가 버틴 KCC는 높이와 공격력에서 밸런스를 맞춘 최강팀이 됐다.
하지만 후유증도 심했다. KCC는 바셋을 받는 대신, 다음 신인 드래프트 지명권을 모비스에 넘기기로 합의했다. 2004년 2월 4일 신인 드래프트에서 KCC는 전체 1순위 지명권을 뽑았고, 이때 뽑힌 선수가 양동근이다. 바로 모비스의 전성기를 만들어낸 주인공이자 현재 리그 최고의 가드로 꼽히는 선수다. 어찌 보면 KCC는 2003~2004 시즌 우승과 미래를 바꾼 셈이었다.
뒷얘기를 곁들이자면, KCC는 정상영 명예회장 및 정몽익 구단주가 모두 용산고 출신이다. 우승 때문에 놓친 신인 양동근이 모비스에서 맹활약하고 있고, 바로 그 양동근이 용산고 출신이라는 걸 알게 된 정상영 명예회장이 후에 크게 노했다는 후문이다.
한편 허재 감독의 첫 우승은 2008~2009시즌에 나왔다. 신인 드래프트에서 하승진을 선발한 KCC는 서장훈과 하승진의 조화에 실패, 시즌 도중 하위권까지 추락했다가 서장훈을 전자랜드로 트레이드하면서 강병현을 받아들이고 반전에 성공했다. 이때 KCC는 정규리그 3위에서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해내는 뒷심을 발휘했다.
KCC는 2010~2011시즌 또 한 번 우승했다. 당시 챔피언결정전은 정규리그 3위 KCC와 4위 동부의 대결로, 프로농구 역사상 처음으로 정규리그 1, 2위팀이 모두 탈락한 시즌으로 기록에 남아 있다. KCC는 하승진-전태풍 콤비를 앞세워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하승진과 전태풍은 누구보다 유쾌한 콤비로 기억된다. 서로를 ‘큰 사람’ ‘작은 사람’으로 부르고, 인터뷰에서도 스스럼 없이 솔직하고 재미난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당시 하승진이 쓴 ‘전태풍 탐구생활’ 중 한 토막. ‘승부처 4쿼터예요. 내가 슛을 성공하면 영웅이 되는 것이고 실패하면 허재 감독님이 또 나를 향해 눈빛 레이저를 발사할 게 분명해요.’
# 역사의 키워드_컴퓨터 가드 이상민
현대와 KCC의 역사를 관통하는 단 한 명의 스타 플레이어를 꼽자면, 주저 없이 이상민을 말할 수 있다. 현대와 KCC가 일궈낸 정규리그-챔피언결정전 총 8차례 우승 중 6번을 이상민이 있을 때 해냈다.
이상민은 팀의 주득점원인 외국인 선수의 스타일에 맞춰 상대를 살려주는 플레이에 능했다. 1997~98시즌부터 이어진 우승은 이상민-맥도웰 콤비를 빼놓고 말할 수 없다. 조니 맥도웰은 1997년 외국인선수 드래프트 2라운드에 선발됐고, 이전 리그 경력도 특별하지 않아서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선수였다. 그러나 탱크처럼 저돌적인 돌파와 골밑 플레이는 이상민의 패스를 받아서 더욱 빛이 났다.
이상민은 키 183㎝지만 덩크가 가능할 정도로 운동 능력이 좋았다. 또 리딩 능력과 더불어 외곽 슛 능력, 여기에 가드로서는 매우 드물게 포스트업까지 가능했다. 맥도웰이 2001년 팀을 떠난 후 재키 존스가 이상민과 호흡을 맞췄는데, 존스는 센터로서 3점 슛까지 정확한 선수였다. 신선우 당시 감독이 ‘토털 바스켓’이라는 이름으로 ‘전원 포스트업, 전원 3점 슛’이 가능한 팀 컬러를 만들어 화제가 됐다. 이는 포스트업이 가능한 이상민과 외곽슛이 가능한 존스가 있었기에 탄생한 컨셉트였다.
이상민이 KCC 팬들에게 더욱 애틋하게 기억되는 이유는 본인의 의사와 상관 없이 갑작스럽게 팀을 떠났기 때문이다. 2007년 5월, KCC는 서장훈이라는 대형 FA를 영입하면서 보호선수 명단에서 이상민을 제외시켰다. 삼성은 이를 놓치지 않고 보호선수로 이상민을 지명했다. KCC의 상징과도 같았던 스타의 이적에 팬들은 충격을 받았고, 당사자인 이상민은 “은퇴까지 생각했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공교롭게도 이상민의 선수로서 마지막 경기 상대는 KCC였다. 삼성 유니폼을 입은 이상민은 2009~2010시즌 6강 플레이오프에서 KCC에 패한 것을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현재는 삼성의 감독이다. KCC에는 영구결번이 2개 있는데, 한 개는 이상민의 11번이고 또 하나는 추승균의 4번이다. 만일올 시즌 이상민 감독과 추승균 감독이 플레이오프 단기전에서 만난다면? KCC 영구결번 두 스타의 우승 길목 외나무다리 대결은 언제라도 기다려지는 매치업이다.
# 2015-2016 플레이오프 예상 BEST5 완전 분석
# 찬란했던 육룡의 기억_KCC, 영광의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