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는 반복되는 범죄와 용서의 패턴인가
오랫만에 글을 올려봅니다.
저는 평소 누구와 대화하고 어울리기 보다는
혼자 무엇인가 골몰히 고민(?)하는,
별로 바람직스럽지 못한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혼자만의 독단(?)에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예배 시간이 되면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설교 본문을 함께 읽었는데 설교 방향이 이상하다고 생각되는 경우입니다.
이럴 때 설교는 귀로 들으면서 눈은 대개 성경의 관련 부분을 찾습니다.
이번 정모에서도 잠깐 말씀드렸지만 근래에는 사사기를 많이 찾았습니다.
왜냐하면 설교에서 사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범죄와 하나님의 끝없는 용서를
알려주기 위해 기록되었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설교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음에서 보다시피
제가 가지고 있는 성경이 성서원에서 간행된 것인데
![](https://t1.daumcdn.net/cfile/cafe/998E033D5BCD63CF06)
사사기 첫 부분에 기록 목적이 죄악과 용서의 프레임으로 설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이 프레임으로 행해지는 설교는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아마 이 땅 모든 성경 주석집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외람되게도
저의 눈에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인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범했다고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죄를 범하지 않았다면 용서라는 단어도 맞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가 있은 연후에 처벌이든 용서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이렇습니다.
함께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먼저 사사기 1장의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쫓아내지 못했다’입니다.
유다, 므낫세, 에브라임 등 모든 지파들이
여호수아가 죽은 후 가나안 원주민을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2장 내용으로 이어집니다.
먼저 7-11절을 보겠습니다.
『 7. 백성이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들이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
8.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백십 세에 죽으매
9. 무리가 그의 기업의 경내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 산 북쪽 딤낫 헤레스에 장사하였고
10.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11.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
어떻습니까. 제가 가장 눈여겨 본 부분은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범죄했다가 아니라 ‘악(惡)을 행하여’, 즉 나쁜 행동을 했다는 것입니다.
‘악을 행하였다’는 말과 ‘범죄했다’는 말은 같은 의미라 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다섯 살 어린 아이가 엄마 따라 옆집에 갔습니다.
방에서 놀다보니 무엇인가 반짝이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는 신기하다 싶어 가져왔습니다.
나중에 보니 고가의 다이아반지였습니다.
아이는 훔친 것입니까 아니면 가져온 것입니까?
아이는 훔친 것이 아니라 그냥 가져온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섯 살 아이는 다이아반지가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주인이 알고 아이더러 나쁜 아이라 합니다.
과연 아이가 나쁜 아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아이가 100원짜리 구슬을 가져왔다면 나쁜 아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 대다수 사람들은 아이가 그럴 수도 있다고 하지, 나쁘다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린 아이는 눈에 보이는 대로 행동할 뿐,
아이는 아직 도덕 개념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다이아 반지를 가져갔다고 나쁜 아이라 하는 것은 어른들의 생각일 뿐입니다.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들을 때
전제가 되는 상황을 잘 염두해 두면서 듣습니다.
예컨대 내가 어렸을 때, 내가 하나님을 알기 전에, 또는 내가 군에 있을 때 등입니다.
이러한 전제가 되는 상황을 무시한 채 듣는다면 이야기가 전혀 되지 않습니다.
분명 어렸을 때 이야기라고 했는데 어른이 된 지금 상황으로 받아들인다면
어처구니없는 결론에 이를 것입니다.
이처럼 사사기에서 악을 행했다며 여러 번 반복되는 표현에는
“알지 못했다”라는 상황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사사기 전체를 “알지 못했다”라는 상황 속에서 읽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호와를 알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 신 섬기는 행위를 하나님은 어떻게 여기실까요?
사사기 기자는 “여호와 목전에 악을 행”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목전(目前)’이라는 의미는 하나님 눈앞에서 ‘기어이 행했다’라는 의미보다는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또는 ‘하나님 눈높이로는’ 이런 의미로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은 나쁘지 않다고 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KJV에서는 ‘in the sight of the LORD’ 로 번역되었습니다.
‘하나님 관점에서는’ 정도 될 것 같습니다.
이는 비록 알지 못했다 하더라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악(惡), 즉 나쁜 행위이라는 것입니다.
나쁜 행위라고 하는 것은 가르쳐야 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래서 3장으로 가면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의중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3장 2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 하사 남겨 두신 이방 민족들은 』
그렇습니다.
1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쫓아내지 못했다고 먼저 서술한 이유는
쫓아내지 못한 이방 민족을 통해서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서 첫 번째 사사 옷니엘이 등장합니다.
그러니까 사사기는 범죄와 용서의 관점이 아니라 교육의 관점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교육이겠습니까?
약속의 땅으로 인도는 끝났습니다.
이제는 어떻게 하면 뿌리를 잘 내리고 정착을 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즉 새로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교육입니다.
여호와가 누구인가 하는 초등교육이 아니라
삶의 방식에 대한 보다 업그레이된 중등교육입니다.
예컨대 믿지 않은 사람을 교회로 데려왔습니다.
그 사람은 등록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새 신자에게는 어떤 교육이 필요하겠습니까?
아마 교회로 인도하기 위해 온갖 설득했던 내용을 반복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정착에 필요한 보다 체계적이고 신앙의 실질적인 교육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제는 그토록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며 약속의 땅을 바라보라던
모세의 간곡한 설교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하늘 별들처럼, 바다 모래알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뿌리를 내려 생육하고 번성할 것인가 하는
정착 내지 생존 교육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교육 내용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사사기(士師記)가 아닌가 싶습니다.
적어도 제 눈에는 그렇게 비춰집니다.
그렇게 볼 때 책 제목인 사사기(士師記) 가운데 스승 사(師)가 들어간 것은
대단한 의미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교육을 상징하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영어에서는 사사기(士師記)를 Judges, 우리말로는 보통 판관기(判官記)라고 합니다.
범죄와 용서 개념이 아니라면 판관기(判官記)라는 용어가 적절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알지 못하고 행한 행위를 판단하고 정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도 판관기라는 명칭이 처음에는 조금 황당하다 여겼는데
실제로는 그리 황당해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사사기라는 명칭이 헬라어 70인역 번역에서는
“쇼페팀(Shopetim)” 즉 ‘지도자’라는 의미로 붙여졌다 합니다.
아마 한 지방을 다스리는 지도자의 직책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사사(士師)는 중국 주나라 시절에 지방을 다스리는 지도자의 직책명이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김구 선생님 하듯 재야의 지도자를 선생님이라 부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영어에서 Judge 역시 사사기 시절에는 지도자의 명칭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러니까 오늘날에는 직업이나 직책이 세분화 되다보니 사사와 판관이 전혀 다른 직책으로
보이지만, 사사 시대인 BC1100년 무렵에는 사사나 판관이 같은 지도자의 직책이라는 것입니다.
다만 지도함에 있어서 교육을 중시하느냐 아니면 정의 판단을 중시하느냐 차이일 것입니다.
오늘날은 직업이 너무 세분화되다보니 여기에 맞는 단어를 찾기는 어렵습니다.
네이버 지식 백과에서는 사사기라는 이름을
성경 전체에서 이름을 가장 잘못 지은 책이라 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최고로 적절한 이름이라 여겨지는데 말입니다.
직접 검색해보시고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사기를 바라볼 때 교육적 관점에서 바라보되
명칭은 사사기든 판관기든 오늘날의 관점이 아닌
직업이 세분화되기 이전 그 당시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사사기를
범죄와 용서로 바라보는 관점에서는 여러 사사가 등장하는 것을
범죄와 용서라는 패턴의 반복이라 여기는데,
교육의 관점에서는 여러 사사를 여러 교육 과목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즉 학교에서 국어, 영어, 수학, 음악, 미술 하듯 말입니다.
1교시 국어, 2교시 수학을 어느 누구도 교육의 반복이라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실제로 사사별 메시지는 같은 내용의 반복 메시지가 아니라
전혀 다른 분야별 메시지입니다.
여호수아는 죽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호수아서 마지막에는
대제사장 엘르아살도 죽었다고 기록되었습니다.
한 시대를 대표했던 정치적, 종교적 두 지도자가 죽은 것입니다.
무언가 새 시대, 대 변화를 예고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메시지도 당연 새로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변화에 부응해서 사사기를 바라보아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범죄와 용서라는 율법적 관점이나
하나님이 다 책임져주신다는 광야시대 관점으로는
사사기라는 새로운 시대를 절대 읽어내지 못할 것입니다.
사사별 메시지는 다음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이상으로
이번 정모에서 간략하게 설명했던 부분을 좀 더 확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잘못된 현상 이면에는 잘못된 의식이 있고,
잘못된 의식 이면에는 잘못된 성경 관점이 있을 수 있다는 취지로
정모에서 저의 생각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혹시 다른 의견 있으시어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그냥 어떤 나라의 역사 서술일 뿐입니다. 그것도 어떤 의도를 가진.
'악을 행하였다'라는 서술이 있다하더라도 그건 기록한 사람의 생각일 뿐, 그게 정말 악인지는 검증을 해야지요.
주석은 뭐 사족에 가깝고요.
제가 가진 성경도 핵심어로 불순종, 심판, 회개, 자비를 꼽고 있네요.
사사기의 사사는 가르치는 선생이라는 의미이므로 심판하는 측면은 아니라 보는 것이 맞지요.
하나님은 별의별 모자란이들을 사사로 사용하셨다는 기록이기도 합니다.
사사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재판관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재판관의 기록'이라는 말이 되겠지요.
하나님의 전쟁 가운데 무엇을 기준으로 재판을 하였는가?라는 관점으로도 생각해보게 되네요.
이는 오늘날 영적인 전쟁 가운데 어떻게 싸워야하는지를 생각해보는 관점으로 저는 접목하는바 입니다.
@제자도 아, 그렇군요.. 師事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죄와 죄의 현상들의 기록은 인간의 역사일것입니다.
부지불식중에 행하던 본능으로 행하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은 다 죄입니다.
죄... 하나님께로 방향이 벗어난 것... 과녁이 빗나간것... 말이지요.
인간 합리화의 역사적 관점으로 보면
세상의 영웅호걸들의 등장과 그들을 통하여 이루는 나라에 무슨 문제가 있을까요?
그러나 에노스를 통하여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라는 관점과
아브라함을 통하여 브엘세바에서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는 관점으로 세상을 보노라면
사사기의 기록은 인간 역사의 합리화를 위한 기록이 아님을 보게 됩니다.
가나안 땅을 주겠노라던 언약을 우습게 알고
두려워서 가지 못하고, 그 족속들과 불의의 언약을 하고...
믿는다고 하면서 그의 약속을 버렸던 그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겠지요.
사사기의 말미에 기록된 말씀...
[사사기 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여호와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지 못한 인생들은 이후 인간 왕을 요구합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
이것이 사시기를 이해하는 핵심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제자도 공감하며 좋은글 감사합니다.^^
사사기를 연구해보면 사사기의 내용이 반복되는 죄와 용서의 패턴은 아닙니다.
또한 역사적 순서에 따른 기록도 아닙니다.
사사기 19장 부터의 기록은 오히려 사사시대 초기의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사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본 것은 인생에 한번 뿐인 짧은 지식인지라 많이 배우고 갑니다. 단순 패턴의 반복이 아니라 연단의 과정으로 이해하는게 좋겠군요. 약간 다른 관점이지만 그 약간의 차이가 묵상하는 태도와 방식에서 큰 차이를 낳을듯합니다. 감사합니다.
사사는 보통 어느 한 지파의 정치, 종교, 군사를 총괄하는 지도자로서 중세 유럽의
봉건 영주나 중국 근대시대 군벌에 비교할 수 있다고 봅니다.
댓글로 참여해 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리며
사사(士師)는 중국 주나라 시절 사용한 중국식 표현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한때 우리 민족 지도자였던 김구선생님 연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김구선생님을 정치가로 여기지 학교 선생님으로 여기지는 않잖아요?
그리고 사사시대는 BC 1100 무렵입니다. 그때는 삼권분립 자체가 없던 시대입니다.
재판장이든 통치자이든 같은 의미로
오늘날 스승이나 재판장의 개념으로 받아들이면 안된다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잘 말씀하셨네요.
BC 1100년도에 일어난 일들로 추정되는, 우리나라로 따지자면 고조선 말기에 일어난 일들을 굳이 파헤칠 필요가 있을까요?
저는 사실보다는 후대 사람들의 의견이 더 많이 첨가되어 각색되었을거라 봅니다.
사실판정도 힘들뿐더러 오늘날 사람들이 곧이곧대로 이해하기엔 그 간격이 크다고 보여집니다.
@주형 맞습니다. 성경은 당시의 사실 관계를 이야기 하려고 쓰여진 게 아니라
백성들이 시대를 불문하고 이땅에서 살아가는데 반드시 걸어야 할 길을 제시해준 책입니다.
그러기에 주의 말씀을 '내 발의 등과 내 길에 빛'으로 삼아 늘 살펴보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이유는 단 한가지, 우리가 살기 위해서 입니다.
즉 우리는 이스라엘 고대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살 수 있는 길을 찾아가는 것이지요.
답글 감사합니다.
@작은아이 ㅎㅎㅎ 글로 만보면 위험하신 말씀을...^^
사실이 아니고 역사에 기반한게 아니라면 누군가에게는 믿지 못할 책이 될 것입니다.
'지금 나에게 무슨 의미인가'라는 질문은 어찌보면 반지성적인 태도일수도 있습니다. 그걸 다른 말로는 '의심가지지말고 순종하라' 라고 하지요. 그렇게 방향을 돌리면 정답은 없고 서로 느낀 점을 나누면 되겠지요.
덕분에 옛 생각이 나네요.^^
@주형 오... 그러고보니 주형님은 그럴 리 없겠지만 다른 분들은 거짓이나 조작의 의미로 크게 오해할 수 있겠군요.
제가 '당시의 사실 관계'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오늘날 신문 방송처럼 당시의 상황(사실)을 전달하는 내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문이나 방송에서 기자나 아나운서는 있는 사실 그대로를 전달해야지 개인 생각이 들어가면 절대 아니되잖아요.
하지만 성경은 저자인 하나님의 의도가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있는 사실 그대로를 전달하는 신문 방송처럼 사실 관계를 다루는 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역사, 과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도 실증을 통한 사실 관계에 기반한 학문입니다.
다른 분들 오해 없으시기를...
과녁을 벗어남이 죄이고 하나님과 함께함이 다 복이고 천국이지요!!! 저는 댓글을 읽을때 비슷한해석 인데란 느낌이.... 작은아이님의 깨달음에서 크신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져서 전 너무 좋았습니다 *^^*
본문과 댓글을 통해 좋은 공부를 했습니다
시간 나는 대로 다시 여러번 읽어보고 싶네요......Good...
성경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오직 하나의 말씀을 증거하는 책이며 심판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인것은 그리스도와 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힌것 외에는 다른 설명이 없습니다 바울이 이 말을 하였고 이 말은 진실합니다 그런데 말씀을 사람의 생각으로 읽으면 역사가 되고 도덕이 되고 선행이 되고 악행이 되며 전쟁기록이 되고 육적인 복을 받는 책이 되는 것이죠 그런 믿음에서 돌이키라고 성경 66권이 기록되었고 회개하고 자기것을 버리게 된자가 천국문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 성경의 기록이고 그 증거의 기록된 말씀입니다 모두가 같은 말입니다 다른 말이 되면 진리가 아닙니다 육신의 소욕은 영의 생각을 거스러므로 하나님의
진노가 항상 머물럼있음을 깨달아야 하지만 오직 성령의 계시(내주)가 없으면 이 또한 알지 못하는 것이지요 성령의 계시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깨닫는 것이지요 주를 바로 알게 되는 것이고 그의 구원을 보게 되므로 소원을 이루어 주시는 것이 그 백성들의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오시는 것이지요 그 구원함을 보니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함을 보게 되고 또 그 백성 안에서 이루어 가시는 역사입니다
@홀로아리랑 지금 이 말을 믿으면 구원이 되는 것이 믿는 다는 것은 그의 말씀을 깨닫는다는 것입니다 깨달음은 오직 십자가에서 육의 몸이 죽어야 영의 생명으로 부활되는 것이 깨달음이고 말씀이 육신이되어 오신 비밀한 말씀입니다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정모때 들으면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것 자체가 죄가 아닐까 생각해봤었습니다~ㅎㅎ
성경의 모든 내용이 가르침인 것이고 사사기만의 독특함은 아닙니다
왕이 있기 전의 역사기록의 성격도 있구요 열왕기전서라고 봐야죠
특히나 구약의 당사자인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우리에게는 모두가 교육의 관점이라고 봐야 되지 않을까요?
성경은 죄악과 용서의 구조 속에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고 우리를 향한 어떤 의도를 갖고 계시는지 알게 하시죠 사사기뿐만 아니라 열왕기 역대기 모두 동일 구조인 것이지 사사기만의 독특한 것은 아닙니다
여호와를 바로 알지 못하면 당연히 거짓된 우상신들을 섬기게 되지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다는 말은 우상숭배에 빠졌다는 뜻이라 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바로 알지 못하면 예수라는 이름을 부르면서 온갖 우상들
(세상 영광, 물질에 대한 탐욕, 육체의 쾌락 등등)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바로 아는 것이 신앙개혁, 교회갱신의 길이라 봅니다.
묵상해볼 만한 좋은 내용을 알기쉽게 올려주셨네요. 좋은 사사이십니다^^
읽다보니 대학시절 교회에서 성경공부 모임을 만들어서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이름하고 약자로 '사사모임'이라고 불렀던게 떠오르네요.
혹시 그 모임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기신다면 그 기록도 사사기라 불러야겠네요.. ㅎㅎ
위 내용은 사사기의 시작에 불과한 내용으로 사사기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관점에 관한 생각을 옮겼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사사기에 대한 각자의 생각을 올려주신 분이 많으신데 어쩌면 마지막 부분에서 만날 수도 있겠지요.
아무튼 관심과 애정으로 댓글 달아주신 모든 분들께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