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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13일 오늘의 역사
2022년 북한 코로나 변이 바이러스 확산 방지를 위해 전국 시,군 도시 봉쇄령
2015년 서울 내곡동 예비군 훈련장 총기 난사 사건 발생하여 3명 사망 2명 부상.
2015년5월13일 오전 10시53분쯤 서울 서초구 내곡동 육군 52사단 211연대 예비군 훈련장에서 동원훈련 중이던 예비군 최모(23·서울 송파구 거주)씨가 K2 소총을 난사해 최씨를 포함해 3명이 숨지고 2명이 부상했다.
총기를 난사한 최씨는 현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번 사건은 예비군들이 실탄 10발이 든 탄창을 지급받아 축소사격이 시작된 직후에 벌어졌다. 최씨는 이중 1발을 발사한 뒤 돌아서서 8발의 실탄을 난사했다. 2, 3, 5사로에서 ‘엎드려 쏴’ 자세로 엎드려 사격을 하던 예비군과 옆에서 사격을 돕던 부사수 예비군들이 총탄에 맞았다. 이날 밤 ‘다 죽여버리고 나는 자살하고 싶다’고 쓴 최씨의 유서가 최씨 바지 주머니에서 발견됐다.
최씨는 군 복무 시절 B급 관심병사로 분류돼 부대의 중점 관리를 받았고, 그의 이웃들도 최씨가 평소 동네에서 이상한 행동을 보였다고 증언해 이날 사건이 정신적 문제를 겪던 최씨가 저지른 계획범죄라는 분석이 나왔다.
사격 당시 현장에 있던 통제 장교 3명과 조교 역할을 맡은 사병 6명은 대피한 것으로 조사됐다.
조교들은 최씨가 총을 쏘자 사격장 아래 언덕으로 몸을 던져 피했고, 통제탑 반대편에 몸을 피해 있던 중앙통제관은 난사가 끝나고 최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자 사태 수습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2014년 북한 평양 23층 아파트 건설 중 붕괴
평양 아파트 붕괴사고는 2014년 5월 13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직할시 평천구 안산1동에서 미완공 23층 고층 아파트가 붕괴된 초대형 사고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중앙통신에서는, 사건이 벌어지고 나서 5일이 지난, 동년 5월 18일 처음으로 수백명 이상의 대규모 인명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보도했다.
그러나 붕괴의 구체적인 발생경위와 피해규모는 발표하지 않았다
대한민국 통일부 관계자는 "오후 평양시 평천구역 안산1동의 23층 아파트가 붕괴됐다"며 "북한에서는 건물 완공 전에 입주하는 경우가 일반적인데, 이 아파트에도 92세대가 살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2014년 터키 서부 소마 시 탄광 폭발 사망 301명 부상 486명
2012년 ‘바이올린 명장’ 재일 한국인 진창현씨 별세
경북 김천에서 태어나 14세에 일본으로 건너간 진씨는 메이지(明治)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그는 대학 졸업 후 전공을 살려 영어 교사가 되려 했지만 재일 한국인이란 이유로 차별을 받아 직장을 구할 수가 없었다. 방황하던 그는 우연히 한 강연에서 “20세기 최첨단 기술로도 300년 전 바이올린 명기 스트라디바리우스의 소리를 재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말에 자극받아 바이올린 제작 외길을 걷기 시작했다.
재일 한국인이란 이유로 제자로 받아주는 스승이 없어 막노동을 하며 귀동냥과 독학으로 바이올린 제작 기법을 익혔다. 돈이 없어 건설 현장 폐자재로 바이올린을 만들기도 했다. 그가 만든 바이올린을 당시 일본의 3대 바이올린 연주자로 꼽히던 시노자키(篠崎弘嗣)가 사용하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애국가 작곡가인 안익태(安益泰) 선생도 일본에 연주여행을 올 경우, 진씨의 집에서 머무는 등 교분을 맺었다.
고인은 1976년 제2회 국제 바이올린·비올라·첼로 제작자 콩쿠르에서 6개 부문 중 5개 부문 금메달을 받았으며, 1984년 미국 바이올린제작자협회로부터 감독 및 검사 없이 바이올린을 제작할 수 있다는 ‘마스터 메이커’ 칭호를 획득했다. 마스터 메이커(Master Maker)는 세계에 5명밖에 없다. 그가 만든 바이올린은 동양의 스트라디바리우스로 불렸다. 정경화와 강동석, 아이작 스턴, 헨리크 셰링 같은 세계적 명연주자도 그의 바이올린을 애용했다.
하지만 한·일 국교 정상화 후 고향인 김천을 방문했다고 간첩혐의로 조사받는 등 고초를 겪기도 했다. 진씨는 끊임없이 국적 변경을 권유받았지만, 그는 자식들에게 “너는 재일 한국인이다”라는 점을 계속 주지시켰을 정도로 조국에 대한 사랑이 깊었다.
2012년 애국지사 태윤기 변호사 별세
애국지사이자 법조계 원로인 태윤기(太倫基·94) 변호사가 13일 오후 9시 57분 별세했다. 함남 풍산에서 태어난 고인은 1942년 일본 메이지대학 법과를 나와 한국광복군 제2지대에 입대해 특별간부훈련반을 수료했다. 1945년 한미합작 특수훈련인 OSS훈련 정보·파괴반에서 교육을 받은 뒤 국내정진군 함경도반 1조에 배속돼 대기하던 중 광복을 맞았다. 1955년 육군 대령으로 예편한 뒤 군사독재시절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며 진보당 사건, 10·26 사건, 민청학련 사건 등을 맡았다. 민권수호국민총연맹 상임위원, 민주화추진협의회 부의장, 한국광복군동지회 부회장 등을 지냈다. 건국훈장 애족장과 충무무공훈장 등을 받았다
2008년 인도 자이푸르 힌두사원 인근 시장에서 7차례 연쇄폭탄테러 사망 80명
2006년 '한국의 햄릿'으로 불린 배우 김동원씨 별세
‘한국의 햄릿’으로 불린 배우 김동원(金東園.90) 선생이 2006년 5월13일 오후 6시25분 서울 이촌동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고인은 2004년 6월 뇌경색으로 쓰러져 투병해왔다.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이던 1932년 연극 ‘고래’(연출 유치진)로 데뷔한 김동원 선생은 1994년 ‘이성계의 부동산’(연출 김도훈)을 끝으로 은퇴할 때까지 62년 동안 300여편의 연극에 출연한 한국 현대극의 역사였다.
2001년 인기 댄스그룹 H.O.T. 사실상 해체
인기 댄스그룹 H.O.T. 가 멤버 가운데 세 명이 그룹을 탈퇴, 사실상 해체됐다. H.O.T. 멤버인 토니안(안승호), 이재원, 장우혁은 2001년 5월 13일 기자회견을 열고 “소속사인 SM엔터테인먼트와의 계약이 끝나 5월 11일 ‘예전미디어’와 전속계약을 맺었다”면서 “팬들과 함께 영원히 H.O.T. 로 활동하고 싶었으나 그렇게 하기 어려웠다”고 밝혔다. 이로써 H.O.T. 멤버는 강타, 문희준 2명만 남게 됐으며, H.O.T. 는 1996년 9월 데뷔 이후 4년 8개월 만에 사실상 해체됐다.
H.O.T. 의 해체는 그동안 재계약을 둘러싼 잡음이 커지고 강타와 문희준이 솔로 데뷔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소문만이 무성했으나 이날의 발표로 해체가 사실임이 확인됐다.
한편 H.O.T.의 남은 멤버 강타와 문희준도 6월 27일 기자회견을 열고 “8월과 10월 소속사 SM엔터테인먼트에서 각각 솔로 앨범을 낸다”고 발표함으로 이들의 재결합에 대한 일각의 기대도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
2001년 이탈리아 총선에서 베를루스코니의 야당 승리
2001년 5월 13일 집권 중도좌파 동맹인 `올리브 나무`와 중도우파 야당연합인 `자유의 집`이 맞붙은 이번 총선에서, 언론재벌 실비오 베를루스코니(64)가 이끄는 야당 측이 프란체스코 루텔리(46) 전 로마시장이 이끄는 집권중도좌파에 승리를 거두고 7년 만에 권좌에 복귀했다. 집계 결과 상원은 베를루스코니측이 315석 가운데 177석을 획득했고, 프란체스코 루텔리 전 로마시장측은 125석에 그쳤다.
1997년 북한 안선국 김원형 일가 두가족 서해로 귀순
북한 주민 두 가족 14명이 어선을 이용해 북한을 탈출 1997년 5월 13일 새벽 3시36분 인천항을 통해 귀순했다. 국방부는 이들이 평안북도 신의주를 출발 선박을 타고 남하하다 12일 오후 4시30분쯤 서해안 백령도 서남방 5.7마일 해상에서 표류중 초계중인 우리 해군에 의해 발견돼 13일 새벽 인천항으로 들어왔다고 발표했다. 북한 주민들이 배를 이용해 북한을 탈출 우리측에 바로 귀순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귀순자들은 이 배의 선장인 안선국(49)씨 가족 6명과 기관장 김원형(57)씨 가족 8명이며 성인 남자 5명, 성인 여자 5명과 아이들 4명이다. 이들은 안씨 가족이 먼저 지난 5월 9일 오전 선박을 이용해 신의주를 출발 압록강을 타고 내려와 5월 11일 오후 평북 철산군 통천리 부두에서 김씨 가족과 합류했고, 이들이 타고 온 배는 32t 목조어선으로 귀순을 숨기기 위해 중국 어선군에 섞여 남하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선박을 이용해 우리나라로 직접 귀순한 첫 `보트피플`로 꼽히게 됐다.
1994년 헬륨원소보다 2.5배 무거운 `헬륨10` 세계 최초 발견
일본 이화학 연구소는 질량이 통상적인 헬륨원소의 2.5배로 헬륨의 동위원소로는 가장 무거운 헬륨10 을 세계 최초로 발견했다고 1994년 5월 13일 발표했다.
이 헬륨의 원자핵은 + 전기의 양자 2개와 전기적으로 중성인 중성자 8개로 구성돼 있다. 보통의 원자핵과 달리 헬륨10은 중성자의 비율이 현저하게 높은 것이 특징이다. 자연계에는 헬륨4, 극미량의 헬륨3이 대기 등에 존재하고 있으며 인공 동위원소로 헬륨6과 헬륨8이 발견돼 있다.
우주에 있는 항성의 수명이 다하면 초신성 폭발을 일으켜 중성자성이 생기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중성자성의 지각 부분에는 양자가 약간 남아 있어 헬륨10 과 같은 구성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돼 왔었다. 연구팀은 헬륨10의 수명은 1조분의 1초를 다시 1억분의 1정도로 쪼갠 만큼 짧다고 밝혔다.
1994년 이스라엘, 요르단강 서안의 중심지 예리코시를 팔레스타인 경찰에 정식이양
1993년 독일, 1955년 연방군창설이래 처음으로 유엔소말리아전후복구작전에 파병개시
1993년 일본 사회당, 사회주의노선 포기하고 한국정부의 미-일 안보조약 인정하는 획기적 내용의 당강령 개정초안 마련
1993년 간첩활동으로 수감 중인 황인욱씨, 다른 조직원을 통해 비밀문건을 밀반출 하려다 적발
남한조선노동당 사건으로 구속된 뒤 검찰 수사 과정에서 주체사상을 비판하고 자신의 간첩활동을 참회하는 장문의 반성문을 제출했던 황인욱씨가 영등포 교도소에서 풀려나는 조직원을 통해 안기부의 수사기밀 등을 담은 비밀문건을 밀반출하려다 적발됐다.
1심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항소심 재판 중인 황씨가 1993년 5월 13일 밤 10시쯤 함께 수감 생활을 하다 집행유예를 선고받아 석방되는 조직원 황한석씨(27)의 항문 속에 비밀문건을 넣어 몰래 반출하려다 출감 절차과정에서 적발됐다. 이 문건에는 황씨가 작년 안기부 수사 당시 신문 과정에서 알게된 간첩수사 방법을 비롯, 수사 당국에 적발되지 않은 조직원들에 대한 지령내용이 담겨져 있었다.
특히 주요 사건 관련자 7~8명을 거명, 안기부가 내사중이라며 행동에 조심하라는 경고내용까지 들어 있었다. 황씨는 1987년 서울대 대자보 사건으로 2년 간 복역한 뒤 자신의 형인 중부지역당 총책 황인오에게 포섭돼 중부지역당의 편집국장을 맡는 등 핵심요원으로 활동하다 구속 기소됐다.
1992년 북한 한국전 중 실종된 미군유해 13구 판문점에서 유엔사령부에 인도
1992년 대우그룹 대북교역 발표, 신성통상 통해 북한에서 의류 16,726벌 817,456$에 반입
1990년 `5.9사태` 배후혐의로 김근태씨 검거
1988년 행정개혁위원회 발족
1988년 가락동농수산물시장 개장
1987년 이재형 국회의장 피선
1985년 12대 국회 개원
1983년 정부 수도권정비 기본계획 시안 공개
1981년 교황 바오로2세 총격받고 부상
로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81년 5월 13일 베드로 광장에서 터키출신 극우 테러리스트 메흐멧 알리 아자가 쏜 2발의 총격을 받고 부상했다. 교황은 5시간 반의 긴급수술을 받고 회복됐다.
아자는 현장에서 곧바로 체포됐다.
그는 기독교 세계를 저주하는 회교 광신도적 정신상태에서 범행을 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이 사건은 테러리즘과 황폐한 현대문명에 대한 경종이 되었다.
아자는 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2년후 교황이 그를 방문, 용서해 주었다.
1979년 이란 혁명 최고재판소 전 팔레비 국왕에 사형선고
1975년 긴급조치 9호 선포
박정희 대통령이 `국가안전과 공공질서의 수호를 위한 긴급조치9호` 일명 긴급조치9호를 1975년 5월 13일 선포했다. 이는 앞으로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겪을 시련을 의미했다.
4월 17일 크메르가 공산 게릴라에 항복하고, 4월 30일 월남이 공산화되자 박 정권은 고조된 안보 위기의식에 편승, 총력안보와 국민총화를 굳힌다는 미명 아래 긴급조치9호를 선포, 5년7개월에 걸쳐 민주주의를 짓밟았다.
긴급조치9호는 헌법 비방이나 반대, 유언비어 유포, 허가없는 학생시위ㆍ집회 금지 등을 주요 골자로 이전의 긴급조치1호에서7호까지의 내용을 거의 포괄하고 있었다.
긴급조치9호가 시행됨으로써 한국사회는 전시상태나 다름없는 비상체제로 진입했다. 박 정권은 반정부활동을 언론이 보도하거나 전파하는 일까지 금지했고 조치 위반자에 대해서는 영장 없이 체포ㆍ구금할 수 있게 했으며 이 조치를 비방하는 행위 역시 1년 이상의 징역형에 10년 이상의 자격정지가 부과됐다.
긴급조치9호 발동 후 그 강압적인 기세에 눌려 반정부운동이 잠시 잠잠지는 듯 했으나 같은 해 5월 22일 서울대 ‘민속가면극연구회’ 주동으로 시작된 학생시위를 기점으로 민주 인사들의 ‘민주구국선언’ 등을 통해 다시 일파만파로 커져만 갔다.
결국 긴급조치9호는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사망 후 같은 해 12월 8일 0시를 기해 해제됨으로써 끝이 났다. 5년7개월간에 걸쳐 시행된 이 조치로 1천20명이 연루됐고 이 가운데 5백30명이 구속됐다.
1972년 일본 오사카서 백화점 화재 118명 사망
1971년 통혁당 재건기도 간첩단 11명 검거
1970년 정경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협연
정경화는 서울에서 태어나 5살이던 1953년 바이올린을 시작해 한국방송교향악단, 서울심포니 등과 협연했다. 이화여중에 재학 중이던 1961년 2월 언니 정명화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줄리아드음악원에서 수학했다. 1964년 카네기홀에서 독주를 하고 1965년 메리위도 포스트 국제청소년 콩쿠르에서 한국인 바이올리니스트 김영욱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정경화는 1967년 5월 16일 카네기홀에서 열린 레벤트리트 콩쿠르 결선에서 뛰어난 연주 실력을 발휘해 동갑내기 유대인 연주자 핀커스 주커만과 공동 우승을 차지했다. 콩쿠르 27년 역사상 공동 우승은 처음이었다.
1970년 5월 바이올리니스트 이츠하크 펄먼이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연 직전에 연주를 취소하는 일이 있었다. 비상이 걸린 런던교향악단은 정경화를 급히 섭외했다. 22살에 불과한 가냘픈 아시아 여성 연주자가 리허설 무대에 올라오자 단원들은 골려줄 심산으로 당초 예정되어 있던 차이콥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 대신 까다롭기로 유명한 멘델스존의 협주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사전에 이 사실을 몰라 당황해 하던 정경화가 곧 반사적으로 연주를 시작하자 단원들의 표정에 놀라움이 역력했다. 그렇게 신고식을 마친 정경화는 1970년 5월 13일 앙드레 프레빈이 지휘하는 런던교향악단과 차이콥스키 협주곡 협연을 성공리에 마쳤다.
1965년 동부 파키스탄에 태풍 12,000여명 사망, 이재민 10만
1964년 시경 경향신문 편집국장등 7명 구속
1961년 민자통 주최 남북학생회담환영 및 통일촉진 궐기대회
1958년 알제리 시민들 완전독립을 요구하며 프랑스 정청 습격
1954년 미국 수폭실험 완료 발표
1940년 근대 헬리곱터 원조인 시콜스키 VS300 첫 비행 성공
1930년 일본 소설가 다야마 가타이 사망
1930년 ‘북극 탐험가’이자 ‘난민 인권 외교관’ 난센 사망
1909년에 피어리가 북극점을 처음 정복했지만 북극 문을 처음 두드린 사람은 `진짜 바이킹`이라 불린 노르웨이 탐험가 프리드티오프 난센이었다. 난센은 불굴의 탐험가로 또 외교관으로 `최초`를 개척한 사람이다. 1888년에 52일간 썰매를 타고 세계 처음으로 그린란드를 동서로 가로지른 것도 난센이었다.
난센이 오랫동안 꿈꿔온 북극 탐험에 나선 것은 1893년 6월, 유빙(流氷)에 대비해 배도 자신이 직접 설계했다. 3년 만에 만들어진 배 이름은 ‘프람(Fram)호’, ‘전진’이라는 뜻이었다. 난센은 북동쪽으로 배를 몰았다. 죽을 고비를 몇차례 넘긴 1895년 3월, 1년 9개월 만에 북위 84° 4′, 동경102° 27′ 지점에 내린 난센은 요한센 만을 대동한 채 개썰매와 카약을 번갈아 타며 인류사상 최초로 북극점을 향해 달렸다.
1895년 4월 8일, 그때까지 인간이 도달하지 못한 가장 북쪽 지점인 86° 14′까지 전진했다. 그러나 이상했다. 하루 30km 속도로 달려왔는데도 1주일 전보다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이 달리고 있던 얼음이 서서히 남쪽으로 흐른 탓이었다. 결국 북극점을 포기하고 발길을 되돌린 두 사람은 1년여를 인근 섬에서 지내던 중 마침 그곳을 지나가는 영국 탐험대의 배를 만나 구조됐다.
1896년 8월, 3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이미 노르웨이의 영웅이었다. 탐험가의 길을 접은 후에는 난민(難民)을 위한 인권 외교관으로도 이름을 떨쳤다. 1차대전후 러시아에 수감된 43만명의 독일군 포로를 풀려나게 했으며 난민 신분증명서인 `난센여권`을 처음 창안, 동유럽에서 방랑하는 러시아 난민을 도왔다. 이 공로로 1922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1930년 5월 13일 사망했다.
1926년 조선박람회 열림
1918년 세계최초의 항공우편 우표, 미국에서 발매
1914년 미국의 복싱 선수 조 루이스 출생
1913년 도산 안창호 주도 민족운동단체 ‘흥사단’ 창립
1913년 5월 13일, 흥사단(興士團)이 도산 안창호의 주도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창립됐다. 정치운동을 초월하고 민족부흥운동을 전개하는 것이 창립 취지였다.
일제하에서 인격수양과 실력양성을 강조하다 보니 ‘싸움을 회피하는 준비론’이라는 비판론도 제기됐지만 흥사단은 언제나 있어야 할 곳을 묵묵히 지켰다. 3·1운동 후에는 상하이에 원동위원부를 조직, 독립운동에 힘을 쏟았고, 서울과 평양에는 수양동맹회(1922년)와 동우구락부(1923년)를 결성, 국내에서 합법적인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두 단체는 이후 수양동우회(1925년)로 통합됐다가 다시 동우회(1929년)로 개칭됐으나 1937년에 불어닥친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안창호를 비롯한 200여명의 회원이 검거·투옥돼 강제해산되는 비운을 겪었다. 광복 후에는 본부를 국내로 이전했고 1969년에는 사단법인으로 등록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07년 스웨덴 보통선거 실시
1906년 소설가 현민 유진오 출생
1905년 인도의 대통령(1974-1977) 아메드 출생
1902년 원산에 협무회사 설립
1882년 입체파 발전에 공헌한 프랑스의 화가 브라크 출생
1857년 온들(Oundle) 학교를 재조직한 영국의 교육학자 샌더슨 출생
1856년 사진미학의 이론을 정립한 영국의 사진가 에머슨 출생
1832년 프랑스의 동물학자 퀴비에 사망
퀴비에는 비교해부학과 고생물학을 확립한 사람이다. 비교해부학은 여러 동물의 형태나 구조를 서로 비교 연구하는 학문이고, 고생물학은 화석을 통해 고생물의 구조, 생리, 생태 등의 역사적 변천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퀴비에는 1795년 파리 자연사박물관의 비교해부학 교수를 지냈고, 1799년에는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박물학 교수를 지내기도 했다. 또 그는 나폴레옹1세의 신임을 얻어 장학관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1817년 저술한 `동물계`에서 퀴비에는 동물이 척추동물, 연체동물, 관절동물, 방사동물로 나뉘어져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E.G.생틸레르는 동물계 전체를 한 형으로 보아서 과학아카데미에서 퀴비에와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퀴비에는 다윈의 진화론에 반대한 천변지이설을 주장했는데, 이 이론은 화석이 지층마다 다르다는 것을 보고 지질시대에 천변지이가 되풀이되어 생물군이 절멸되고, 살아 남은 것이 번식하여 지구상에 분포된다는 허술한 이론이다.
1762년 사도세자 뒤주에 갇힌 지 8일 만에 굶어서 세상 떠남
1618년 선조때 정치가 백사 이항복, 유배지 북청서 사망
이덕형과 함께 ‘오성과 한음’ 으로 널리 알려진 백사 이항복이 1618년 5월 13일 유배지 북청서 향년 64년의 나이로 별세했다. 백사 이항복은 임진왜란 당시 피란길에 오른 선조를 의주까지 수행하면서 왕조의 위기를 넘긴 충신이었다. 그는 당시 관료사회에 만연했던 당쟁에 휩쓸리지 않고 끝까지 초연했을 뿐만 아니라 재정·회계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 나라의 어려운 살림을 잘 꾸려 나갔다.
임진왜란 때는 장인인 도원수 권율 장군을 거느리고 병조판서의 소임을 훌륭하게 해내면서 수많은 일화를 남겼지만, 백사 이항복의 진면목은 환갑을 넘어 중풍으로 쓰러져 누운 몸으로 임금(광해군)에게 패륜의 잘못을 직언, 젊은 후학들에게 용기와 바른 길이 무엇인지를 일깨워 주었다는 점이다.
1617년 폐모론이 제기됐을 때, 그는 병석을 털고 일어나 비장하게 임금의 패덕을 비판하고 폐비의 불가함을 지적하고 나섰다. 반신불수로 쓰러져 누워있는 이항복의 상소문…, 상소 내용이 알려지면서 백관들 사이에는 다시 동요가 일었고, 폐모론에 반대하는 신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에 폐모론의 주동자이자 권력의 핵심들은 재빨리 3사의 언관들을 동원하여 이항복을 처벌하라는 상소를 올리게 했다. 결국 이항복은 유배형을 받았고 유배지인 북청 땅에서 세상을 떠났다.
1607년 서애 유성룡 사망(1542-1607)
1127년 북송황제 휘종 금나라 군대의 포로가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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