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사람들<5>박아달라왕
발행일 2022-03-21 09:36:41 댓글 0
백제와 고구려 공격해 서북쪽으로 영토 넓혀
신라 8대 박아달라왕릉은 경주 배동 삼릉에 위치해 있다. 삼릉은 아달라왕릉과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의 릉이 함께 있어 그렇게 부른다. 가장 앞쪽의 릉이 아달라왕릉으로 비정하고 있다.
신라 8대 박아달라왕은 154년부터 30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당시 신라는 주변국과의 전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특히 백제와는 잦은 전쟁을 치러야 했다. 왕이 직접 기병을 이끌고 전쟁에 나서기도 했다.
박아달라왕은 아들이 없어 죽은 이후 석씨계에서 왕위를 이었다. 박혁거세 이후 석탈해왕을 제외하고 8대를 이어오던 박씨왕조는 끝이 났다. 삼국유사는 53대 신덕왕이 즉위한 내용을 두고 박아달라왕의 후손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신덕왕의 아들 경명왕과 경애왕이 3대를 이어 왕위에 오르면서 박씨는 신라시대 10명의 왕을 배출했다.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견훤에게 죽임을 당해 실질적인 신라의 패망에 이르렀다고 보면 신라는 박씨왕조에서 시작하고 끝났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박씨문중에서는 박혁거세부터 경애왕까지 10명의 왕릉을 모두 서남산자락에서 찾아 등록했다. 현대 학자들은 왕릉의 진위에 대해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경주 오릉에서 서남산 순환도로를 따라 승용차로 2~3분 거리에 삼릉으로 진입하는 소나무숲길이 있다.
◆기록 속의 박아달라왕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등의 기록들은 박아달라왕에 대해 왕위에 오른 경위와 전쟁, 당시 발생한 연오랑세오녀 설화까지 다소 길게 소개하고 있다.
신라 8대 박아달라왕은 154년 왕위에 올라 184년까지 나라를 다스렸다. 왕의 아버지는 일성왕이고 어머니는 지소례왕의 딸로 박씨이다. 왕비는 지마왕의 딸인 내례부인 박씨로 8촌 사이다.
박아달라의 족내혼은 당시 박씨왕족이 힘을 규합하려는 세력연합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아달라왕은 백제와 고구려를 공격해 서북쪽으로의 영토를 확장했다.
박아달라왕의 재위 21년부터 31년 사망할 때까지 기록의 공백이 있어 왕실세력의 교체와 관련해 세력다툼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결국 아달라왕은 아들이 없이 죽고 석씨왕계가 즉위했다.
박아달라왕릉이 있는 삼릉 입구를 장식하고 있는 소나무숲.
박아달라왕은 키가 7척이고 콧마루가 우뚝한 기이한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154년 아달라왕 3년 3월에 계원을 이찬으로 삼아 군국정사를 맡겼다. 이어 155년 정월에 왕은 친히 시조묘에 제사를 지내고 죄인들을 크게 풀어주고 홍선을 일길찬으로 명했다.
이듬해에 계림령(현 문경)의 도로를 개척하고, 157년에는 감물(현 밀양), 마산(현 청도) 두 현을 설치했다. 158년에는 죽령의 도로를 개설했는데 이때 왜인이 수교를 위해 신라를 찾아왔다.
160년에는 알천이 범람하는 폭우가 내려 금성의 북문이 허물어졌다. 이듬해에는 메뚜기떼가 농작물을 먹어 곡식 피해가 많았다. 바다에서도 고기가 많이 죽었다.
164년 서울에 용이 나타나더니, 이듬해 165년 아찬 길선이 모반을 꾀하다 발각돼 백제로 도망쳤다. 왕이 국서를 보내 돌려보내 줄 것을 요청했지만 백제가 이를 묵살해 아달라왕이 군사를 일으켜 백제로 쳐들어갔다. 백제는 성문을 굳게 닫아 걸고 나와 싸우지 않았다. 왕은 군량이 다하여 군사를 돌렸다.
167년에 백제가 오히려 군사를 일으켜 서쪽의 두 성을 공격해 백성 1천여 명을 잡아갔다. 노한 아달라왕이 일길찬 흥선에게 군사 1만 명을 주고 백제를 공격하게 했다. 이어 왕이 친히 기병 8천 명을 거느리고 한강 싸움터에 이르자 백제 군사들이 크게 두려워하며 백성들을 돌려보내고 화친할 것을 제안해왔다.
이후에도 백제와의 전쟁이 잦았으며 일본이 꾸준히 사신을 보내와 교류를 이어가는 형국이었다.
아달라왕의 재위 21년부터 죽음에 이르는 재위 31년인 184년 3월까지 행적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 왕위에 오른지 죽음에 이르기 직전 10년간은 박씨와 석씨, 김씨 등의 중앙집권세력들간의 왕권다툼이 치열하게 일어나 아달라왕의 위치가 불안정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파사왕의 아들 신라 6대 지마왕릉. 포석정 남쪽 200m 지점에 있다.
◆역사의 흔적
▶아달라왕릉: 박아달라왕릉은 경주 배리의 사적지로 지정된 삼릉 가운데 하나로 전해지고 있다. 삼릉은 신라 8대 박아달라왕릉과 53대 신덕왕릉, 54대 경명왕릉과 함께 서남산자락에 나란히 조성돼 있다.
가운데 위치하고 있는 신덕왕릉은 일제강점기인 1935년과 1963년 두 차례 도굴을 당했는데 굴식돌방무덤의 형식으로 확인됐다. 왕릉은 할석을 쌓은 장방형의 석실분으로 석실 동서남북면에 흰색과 황색, 붉은색, 청색 등으로 색칠한 것으로 조사됐다.
조사된 릉의 구조로 보아 왕릉의 조성시기는 통일신라시대 전후로 추정돼 박아달라왕릉은 물론 신덕왕릉, 경명왕릉 등으로 지정된 삼릉으로 보기 어렵다는 학자들의 분석이다.
▶지마왕릉: 지마왕릉은 포석정 남쪽 200m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사적지 제221호로 지정돼 있다.
입구에서부터 소나무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지마왕은 파사왕의 맏아들로 112년에 왕위에 올라 134년까지 22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백제와 낙동강유역을 두고 여러 차례 전쟁을 치렀다.
왜구들과 말갈인들이 침략해 들어와 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전쟁터에 나서는 등 잦은 전쟁을 치러야 했다.
박아달라왕의 아버지 7대 일성왕릉. 서남산자락에 3단의 축대를 쌓아올린 위에 조성돼 있다.
▶일성왕릉: 신라 제7대 일성왕의 릉은 사적 제173호로 지정돼 있다. 서남산 해목령 아래 위치해 있다. 일성왕은 지마왕의 아들이다. 기록은 유리왕의 맏아들 또는 일지갈문왕의 아들 등으로 엇갈리게 전하고 있다.
일성왕은 134년에 왕위에 올라 154년까지 20년간 나라를 다스리며 농토를 늘리고, 제방을 수리하게 하는 등 농업을 권장하는 한편 금과 옥 등의 사용을 못하게 하며 검소한 생활을 장려했다.
일성왕릉은 서남산의 경사진 곳에 축대를 3단으로 쌓아올린 후에 봉분을 조성했다. 학자들은 삼국사기 기록 등을 통해 경애왕릉으로 보기도 한다.
일성왕릉으로 진입하는 작은 개울을 따로 조성된 대나무숲길.
◆스토리텔링: 아달라왕의 전쟁
신라가 국가로의 형태를 띠면서 박혁거세가 처음 왕위에 오른 당시에는 박씨문중의 세력이 가장 강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4대 석탈해왕이 즉위하면서 석씨문중의 세력도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또 석탈해왕 이후 김알지가 왕위를 양보하면서 파사왕과 지마왕의 왕비를 김씨문중의 여인으로 간택하게 해 김씨문중도 서서히 힘을 키워가기 시작했다.
박씨와 석씨, 김씨 등의 두드러진 문중간의 세력다툼이 조금씩 표면화되기 시작하면서 일성왕때부터는 박씨문중의 권력 계승을 위해 왕비도 박씨문중에서 간택해 족벌체제 굳히기에 들어갔다.
일성왕릉을 정면에서 보면 하나의 축대로 보이지만 삼단으로 조성돼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세력싸움은 왕권을 오히려 약화시키면서 귀족정치의 발전을 가져오는 계기가 됐다.
아달라왕은 태어나면서부터 풍채가 남다르게 우람했다. 성인이 되어서는 7척에 이르는 거인이었지만 민첩하면서도 완력이 뛰어나 장수라 불리는 사람들 서너 명이 한꺼번에 덤벼도 그를 이기지 못했다.
아달라왕은 한편 성격이 거칠어 외국의 사신들도 쉽게 접근하지 못했다. 이러한 성격 때문에 백성을 위한 정책을 다양하게 펼쳤지만 대신들도 왕을 두려워하면서도 감정적으로 부딪치는 일이 잦아 반란을 꿈꾸는 이들이 늘어났다.
박아달라왕 즉위 10년을 넘어서는 때부터 잦은 외부침략전쟁에 이어 내부반란도 심심찮게 발생했다.
일성왕릉 가는 길은 경주 탑동 나정에서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다 보면 마지막 쯤에 숲길이 나온다.
아찬 길선은 164년 3월 “서라벌에 용이 나타나 백성들이 두려워하며 왕이 바뀔 것이라고 걱정하고 있다”는 보고를 올렸다. 왕이 바뀔 것이라는 여론이 일고 있다는 말에 격노한 아달라왕은 그 자리에서 길선의 멱살을 잡고 내동댕이를 쳤다. 그리고 어전회의에 1년간 얼굴을 드러내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다.
길선은 그길로 집안에 박혀 덕이 넘치는 정치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왕을 갈아치워야 나라와 백성들이 평안하겠다고 생각을 정리한 길선은 세력을 규합하기 위해 무장들부터 하나씩 포섭하며 반란을 꿈꿨다.
모반을 계획하고 실행을 앞둔 165년 10월에 무술이 뛰어나고 정보력을 갖춘 대신 흥선을 포섭하려다 일이 틀어졌다. 결국 아달라왕이 이를 알고 반란군 색출에 나서자 길선은 백제로 도망가버렸다.
아달라왕은 흥선을 일길찬에 임명하고, 군사 2만 명을 주고 백제를 쳐 길선을 잡아오라고 명했다. 흥선은 낙동강을 타고 백제의 성을 하나씩 점령해나가기 시작했다. 치밀한 작전으로 밀고 들어오는 흥선이 이끄는 신라의 병력에 백제는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흥선의 기세에 힘입은 아달라왕은 자신도 기병 8천을 이끌고 전쟁터로 뛰어들었다. 백제 근초고왕은 이전에 점령했던 영토와 신라의 백성들을 풀어주면서 화친을 요청해왔다.
백제와의 전쟁 이후 아달라왕은 뛰어난 병력과 지혜를 갖춘 흥선과 흥선의 지기이면서 훌륭한 인물로 추앙받던 대신 계원이 손잡고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하면서 허수아비왕으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흥선과 계원은 모두 정직하면서도 강직한 성격을 가진 충신이었다. 이들은 모두 부인이 석씨문중이어서 석씨계보의 사람들이 차츰 세력을 키워가는 디딤돌이 됐다.
탈해왕 이후 세력을 키워오던 석씨문중은 아달라왕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왕권쟁탈전에 나서 결국 아달라왕에 이어 석씨문중에서 왕권을 차지했다. 이어 9대부터 16대 흘해왕까지 신라의 왕권은 13대 미추왕을 제외하고는 석씨문중이 계승했다.
*신라사람들의 내용은 문화콘텐츠 육성을 위해 스토리텔링한 것이므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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