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허스님의 속명은 학수(學洙), 법호는 운허(耘虛), 법명은 용하(龍夏)이다. 청년기에는 일제의 침략에 당당히 맞선 항일투사, 종교인으로서는 불경의 번역가, 교육자로서는 후학의 양성에 전념한 분이셨다.
스님께선 평안북도 정주군 출생으로 어린 시절 고향의 회헌재(會軒齎)에서 사서(四書)를 비롯한 한문고전을 배우고, 1909년 10월부터 1911년 3월까지 평양대성학교에서 2학년까지 수학하셨다. 1912년 1월 미국으로 건너가기 위해 만주를 들렀다가 미국행을 포기하고 그곳에 머물며 봉천(奉天)에 있는 한인교포학교 동창학교 교원으로 재직하셨으며, 같은 해 6월부터 배일단체인 대동청년단에 가입하여 배일정신을 고취하는 등 본격적인 독립운동의 길에 뛰어들었다.
1914년 3월부터 만주 봉천성의 신빈현에 흥동학교를 설립하여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교포아동교육에 전념하셨으며, 1917년 4월부터 배달(倍達)학교를 설립하여 1919년까지 교포아동의 교육을 실시하셨다.
3·1운동 직후 4월부터 12월까지 독립군정기관지인 한족신보(韓族新報) 사장에 취임하여 신문을 간행하였고, 1920년 2월에는 독립운동기관인 광한단(光韓團)을 조직하여 활동하셨다. 그 뒤 국내단체와의 연계를 위해 비밀리에 잠입했다가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강원도 봉일사(鳳逸寺)로 은신하셨다.
독립운동 중에 불문에 들어 오시다
스님께선 봉일사에 은신한 것으로 불가와 인연이 되어 1921년 5월 경송(慶松)스님을 은사로 강원도 고성군 유점사에서 득도(得度)하셨다. 같은 해 6월부터 12월까지 유점사에서 불교초등과를 이수하고 서기를 맡아보았으며, 1924년 동래 범어사에서 사교를 이수하였고, 1926년 청담스님과 함께 전국불교학인대회를 서울 안암동 개운사에 개최하여 학인연맹을 조직하셨다. 1929년 다시 만주로 건너가 봉천 보성학교의 교장에 취임하였으며, 1930년 9월 조선혁명당에 가입하여 조국광복을 위하여 활동했다. 1936년 경기도 봉선사에 홍법강원(弘法講院)을 설립하여 후진양성에 노력하셨다.
해방 후 불교계의 경기도 교무원장에 취임하셨으며, 1946년 4월 남양주시 봉선사 인근에 광동중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에 취임함으로써 ‘해방 후 독립운동은 인재교육’이라는 평소의 소신을 관철시키셨다. 이후 광동중학교는 다수의 중・고등학교로 이뤄진 광동학원으로 발전하여 남양주시와 의정부시 교육의 중추가 되어 스님의 뜻을 구현하고 있다.
경전 한글화의 새벽을 여시다
스님께선 인재교육의 일환으로 한문불전의 한글화를 평생의 원력으로 삼고 1964년 동국역경원을 설립하여 초대원장이 되셨으며, 동시에 활발한 역경작업에 매진하셨다. 1961년 국내 최초로 불교사전을 편찬하신 것은 스님의 실질적 역경작업의 수많은 흔적 가운데 하나로 언급되곤 한다.
스님께선 위대한 역경가로서 당시 대표적인 국어학자인 왕산 박사 등과 활발한 교류를 통해 단순한 개인번역이 아닌 명실상부한 역장(譯場)을 봉선사 등에 꾸리셨으며, 그 결과로 시대를 앞서가는 한글 번역어를 도입함으로써 경전 한글화의 새벽을 여셨다. 초기에 번역하신 다수의 한글대장경내 경전들은 물론이요 ‘이산혜연선사발원문’ 번역 등은 올바른 한글번역의 기준으로 지금까지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데, 스님의 그러한 의지는 조계종 제25교구본사 봉선사의 대웅전이 ‘큰법당’이라는 한글 간판으로 걸리고 큰법당 기둥의 주련들 또한 한글로 되어있는 것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스님께선 1980년 11월 18일 봉선사에서 속랍 89세, 법랍 59세로 입적하였다.
주요저서로는 <불교사전>, <불교의 자비>, <불교의 깨묵>, <한글금강경>, <정토삼부경>, <대교지문>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동국역경원 한글대장경 가운데 다수의 경전 번역물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