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참이나 멍하니 앉아 있었다. 나를 보시고 “이놈” 하시던 어머니의 그 말씀! 나는 그때까지 한번도 어머니에게 “이놈” 이란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종아리 한 대 맞아본 적도 없었다.
어머니는 내가 막내라고 해서 편애하시거나 특별히 챙겨주지는 않으셨지만 늘 칭찬해주고 웃음을 짓는, 자애롭고 포근한 분이었다.
언젠가 어렸을 때, 밖에서 신나게 놀다가 집에 왔더니 늘 반겨주시던 어머니께서, 어디가 편찮으신지 혼자 방 안에서 앓고 계셨다.
나는 어머니의 이마를 짚어보고 다리도 주무르고 조바심을 치다가 부엌으로 가서 몰래 울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실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얼마나 울었던지….
어머니께선 울다가 잠이 든 나를 꼬옥 끌어안아 주시면서 “걱정 말그래이. 엄마는 안 죽는다”고 하셨다.
등을 톡톡 두드려주며 날 안심시켜주던 어머니께서 나에게 이놈이라고 하셨으니….
나는 놀라움보다도 ‘얼마나 속이 상했으면 나한테 이놈이라고 하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옆방으로 건너갔다.
아버지는 그때까지도 취중이라 세상 모르게 코를 골며 주무시고 계셨다. 나는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아부지예, 지가 잘못했심더. 다시는, 절대로, 그런 말 안 하겠심더” 그렇게 빌었다.
비록 아버지께서 술과 담배를 좋아하고 하룻밤 노름으로 집까지 날릴 만큼 온갖 잡기에 능하셨지만 그런 아버지를 어머니는 지극히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나는 그제야 느꼈다.
내가 아버지를 껴안고 “아부지도 아입니더. 차라리 돌아가셨으면 좋겠심더”하고 악을 썼던 그때, 어머니께서 “하모, 맞다, 맞아. 애비가 애비 구실을 해야 애비지, 저 인간이 애비야? 웬수지!”라고 맞장구를 치셨더라면, 나는 아버지를 사랑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머니도 사랑하고 존경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어떤 사람이 되었을 것인가?
“임자, 고생 많았제?”
무단가출 여덟 해 만에 집으로 돌아오신 아버지는 낮에는 부끄러워 집으로 오실 수 없어 강 건너 나루터의 주막에 누워 천정갈비를 세고 계셨다고 한다.
그때 어머니는 (할머니가 시킨 것이었다고 하지만) 정성껏 푸새해 곱게 다듬질한 아버지의 옷을 가지고 주막으로 찾아가셨다고 한다.
그때, 누워계시던 아버지가 벌떡 일어나 어머니의 손을 덥썩 쥐며 “임자, 고생 많았제?”라고 하셨다는데, 어머니는 아버지의 그 말씀에 마치 새색시처럼 잡힌 손이 떨리고 어찌나 부끄럽던지 고개도 들지 못하셨단다.
내가 군에서 제대를 하고 서울에서 자취를 하고 있을 때까지도 아버지의 주정은 여전했다.
가정 형편상 복학할 엄두도 못 내고 만화를 그리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가까운 친구가 찾아왔다.
나는 그와 저녁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간밤 꿈에 느닷없이 내 이빨이 빠지더라”며 꿈 이야기를 꺼냈다.
그때 주인 아주머니가 황급히 뛰어와 쪽지를 건네주었다. 펴보니 “부 친 위 독 속 래”라는 전보였다.
나는 곧바로 서울역으로 달려가 대구행 기차를 탔다.
아버지는 나를 겨우 알아보셨으나 말씀은 하지 못하셨다. 그저 입만 우물우물하시기에 귀를 바짝 갖다댔더니 들릴락말락하게 “삼시 왔나”고 하셨다.
나는 그때 참 많이 울었다.
아버지는 삼 년 동안 자리보전을 하다가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지극 정성이셨다.
대소변 받아내기는 물론이고 거의 매일같이 씻겨드렸다. 아버지는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시고 말씀도 하실 수 없었지만 편찮으시기 전보다 오히려 더 건강한 모습이었다.
세월이 흘러 손자 녀석을 안고 어르시는 어머니께 내가 이렇게 여쭈어보았다.
“어무이요, 아부지 보시고 싶지예?”
어머니는 손자녀석 뺨에 입을 쪽쪽 맞추시며 “나 보기 싫어서 먼저 간 영감인데 보고 싶기는 뭐가 보고 싶노”라고 하셨다.
그러시면서도 이렇게 덧붙였다.
“아부지는 그 놋그릇에 밥을 담고 국을 퍼드리면 그렇게 좋아하셨는기라!”
아, 그 놋그릇은 내가 중학교 다닐 때 사생대회에서 장원을 해서 받은 상품이었다. (끝)
李 斗 號
● 1943년 대구 출생 ● 홍익대 서양화과 수료 ● ‘소년동아’ ‘소년중앙’ ‘새소년’ 등에 아동 만화 연재 ● 만화집 ‘임꺽정’ ‘머털도사’ ‘객주’ ‘바람소리’ ‘덩더꿍’ 등 ● YWCA 우수만화작가상·한국만화문화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