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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 셋째 이야기,
과거를 팔아먹은 자, 현재도 미래도 팔아먹으려 할 것이다(3)
[정해랑 연재소설] 노동자 신돌석씨의 하루 (207)
[삽화-백소(白笑)]
정문에서 가장 가까운 제 2, 3묘역에 월남 참전 희생자 묘역이 있다. 거기에는 당시 파월 한국군 사령관의 무덤이 있다. 사병 묘역에 장군 묘소가 있다는 것이 희한하다. 국립묘지에는 장군묘역, 장교묘역, 사병묘역이 따로 있다. 죽어서도 차별을 받는 셈이다. 그런데 이 장군은 자신이 죽으면 사병들의 묘지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에 따라 사병들의 묘역에 묻혀 있는 것이다. 지금은 계급에 따라 묘소에 차별을 두는 것을 금지하고는 있지만, 이 사람의 태도는 차별을 없앤다는 점에서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진짜 차별을 없앤 것은 아니라고 해설자는 말했다. 사병 무덤들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앞에 따로 묘터를 잡았다. 더욱이 정문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맨 앞에 있다면 그의 묘지를 두드러지게 보이려는 의도라고 볼 수도 있다. 그는 5.16쿠데타에는 동참했지만 유신도 반대하고, 독립군 토벌에 참여했던 백선엽이 우리나라 최초의 명예원수가 되는 것도 반대했던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그를 참보수라고 일컫는 이들도 적지 않고, 박정희조차 그를 어떻게 하지는 못하고 견제만 해서 외국 대사로만 돌게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에게는 또 다른 면도 있다. 그는 육사 졸업 후 임관해서 제일 먼저 제주도에 갔다고 한다. 그 결과 4.3항쟁 때 토벌대 역할을 했는데, 그가 상관인 연대장의 무자비한 토벌에 대해 이후까지도 두둔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군이 민간인 학살을 자행하는 것과 연결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물론 그는 100명의 베트콩을 못 잡아도 1명의 양민을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는 모토를 내세웠다고는 한다. 하지만 그렇게 내세우는 것과는 달리 우리 군이 민간인 학살에 동원된 것은 숨길 수 없는 불편한 진실이다.
해설자의 말에 따르면 4.3사건과 베트남 전쟁은 80년 광주와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단다. 80년 광주에서 학살을 자행한 신군부의 지휘관들이 대부분 베트남 전쟁에서 지휘관 노릇을 했던 자들이다. 미국 국방성 정보국의 자료에 따르면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을 이전 군인들과는 달리 베트남전에서 민간인을 학살한 경험을 가진 잔인한 자들이라고 분석했다고 한다. 그럴 듯하지만 사실 미국인들의 교묘한 발뺌이라고 신돌석씨는 생각했다. 4.3사건 때도 그렇고, 베트남 전쟁에서도 우리 군의 민간인 학살을 사주한 자들이 바로 미국인들이라는 것은 이제는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이른바 초토화 작전이라고 하는 민간인 학살은 꽤 역사가 길다고 신돌석씨는 알고 있다. 제주 4.3항쟁에 대해 강의를 들을 때 강사가 그런 말을 했었다. 일본군들이 민간인의 집을 불사르고, 무차별 학살한 것을 배운 자들이 당시 토벌대들이었다. 미군도 인디언들을 무차별 학살한 경험이 있다. 그러면 이것이 외국에서 들여온 것이냐? 우리의 경우에도 임꺽정이 구월산을 근거지로 해서 당시 조선 왕조와 대립할 때 토벌대장 남치근이란 자가 산간마을을 모조리 불살라서 임꺽정 부대의 보급로를 차단했다고 한다. 그들은 그것이 옳은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건너편 묘역으로 갔다. 60년대에 베트남 전쟁에 파병되었다가 희생된 이들의 무덤이다. 그런데 한 자리가 비어 있다. 해설자의 말로는 원래 여기에 묻혀 있었는데 그 사람이 살아서 돌아왔단다. 미군과 함께 포로가 되었다고 한다. 베트남전에서 한국군 포로는 드물었다. 상호 적대감이 심하다 보니 포로가 되기 전에 죽는 경우가 많았고, 포로들을 북으로 보낸 경우도 있단다. 이 사람은 전쟁 말기에 포로가 되었고 미군과 함께 잡히다 보니 포로 교환으로 돌아오게 된 모양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미 그가 전사자로 되어서 무덤이 만들어져 있었다고 한다.
예전에는 시신이 없는 경우에는 유품 등으로 허묘를 만들었다고 한다. 지금은 그것이 법적으로 안 된단다. 그런데 살아 돌아왔으니 어떻게 할 것인가? 일단 무덤은 없앨 수밖에 없다. 그러면 사망 신고된 호적은 어찌해야 하느냐? 해설자가 물으니 어떤 사람이 농담식으로 부활했다고 했겠지요 라고 답했다. 그런데 진짜 그랬다고 한다. 사망신고가 된 호적 밑에 부활이라고 썼단다. 나중에 주민등록이 전산화된 후 찾아보아도 역시 밑에 부활이라고 했단다. 정말 황당하기 이를 데 없다. 그는 예수 이후 최초로 부활한 사람이 되었는데 지금도 살아 있다고 해설자가 말했다.
이번에는 독립유공자 묘역으로 갔다. 거기서 어떤 무덤 앞에 가더니 해설자가 여기 묻힌 사람은 가짜 독립유공자라는 것이 밝혀졌다고 한다. 그래서 유족들에게 이장할 것을 통고했지만 옮기지 않고 있다고 한다. 강제로 파면 되지 않냐고 누가 묻자 우리나라 장묘법이나 장묘문화에서 유족 동의 없이 강제 파묘는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런데 이 사람은 무려 가족 다섯 명이 가짜 유공자란다. 그들이 들통나게 된 사연도 기가 막히다. 자리를 옮겨서 어떤 묘지에 가더니 여기는 가짜가 들어 있다가 진짜로 바꾼 경우란다. 그건 무슨 소리인가?
원래 묘지의 주인공은 중국 하얼빈에서 사망하고 거기 안장되었다. 당시만 해도 한중수교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족들이 한국에 올 수가 없었다. 그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사기꾼이 그 이름으로 유공자 신청을 하고 여기에 자기 가족을 안장되게 한 것이었다. 그런데 한중수교가 되고 진짜의 아들이 노래방에 갔다가 현충원이 나오는 배경 동영상에서 자기 아버지 이름이 있는 무덤을 본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그 아들은 자기 아버지를 무덤까지 만들어서 기린다는 것에 감격해서 한번 찾아가리라 생각했었다고 한다.
[삽화-백소(白笑)]
서울에 올 기회를 잡아서 국립묘지를 찾은 그가 아버지 묘비를 보고 아연실색하게 된다. 가족들 이름이 다른 것이었다. 혹시 동명이인을 잘못 알았나 하고 확인해 보니 본인은 자기 아버지가 맞는데 가족이 아니었다. 그래서 추적을 하게 되었는데 성묘 오는 사람들한테 탐문한 결과 가짜 가족들이 자기 아버지 묘만이 아니라 여러 군데에 성묘를 하고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결국 그가 그 모든 것을 추적해서 다섯 명씩이나 가짜로 유공자를 만들어낸 사기꾼 집단들을 적발해 낸 것이었다. 그리하여 가짜 유골을 이장시키고 진짜 아버지 유골을 하얼빈에서 이장해 왔단다.
사기꾼들이야 찾아내서 이장시키고 처벌하면 된다 쳐도 자신의 신분 세탁을 한 매국노들이 국립묘지에 버젓이 묻혀 있는 경우는 너무나 많다. 이들을 현행법으로는 어떻게 할 길이 없다. 해설자는 그것이 바로 국군묘지에서 출발하여 독립운동가들을 거기에 끼워 넣는 식으로 국립묘지가 된 한계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다 보니 전쟁영웅 등이라는 미명으로 그 이전의 친일행각이 모두 신분 세탁이 되는 것이다. 나아가서 분단이 되고 전쟁이 벌어지고 친일파를 적극적으로 청산하지 못한 것이 이런 현실을 나았다고 볼 수 있다.
그 현장을 보여주기 위해 해설자는 국가유공자 1묘역으로 사람들을 안내했다. 지금까지 완만한 경사를 걷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야 했다. 굉장히 추울 것이라고 했던 일기예보와 달리 그런대로 걸을 만했는데 높은 곳에 오자 갑자기 눈보라가 날리기 시작했다. 몇몇 어르신이 밑에서 기다리겠다고 하면서 돌아섰다. 해설자는 친일파들이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에 했다는 공을 인정받으면서 과거 행적을 숨길 수 있었다고 하였다. 그들을 국가유공자라는 이름으로 예우해 주는데 사실 건국절 논란도 바로 이런 자들의 뜻에 따라 주장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계단을 올라가니 가파른 곳에 여러 무덤들이 있었다. 그 중 몇몇 무덤에 대해 설명했다. 만주군 출신인데 그것은 싹 빼고 해방 이후에 군 혹은 경찰에 근무한 기록만 써놓고 있었다. 그들은 그것을 두고 대한민국 건국에 공이 있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말하는 공이라는 것도 제주 4.3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에 앞장섰던 것이었다. 일단 그런 것은 논외로 하더라도 이들의 친일행적은 너무나 명백하다. 헌법에서 3.1운동으로 건설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하였는데 그에 맞는 새로운 법을 제정해야 할 문제이다.
조금 더 올라가서 옆으로 가니 장군묘역이 있었다. 여기에서는 더 기가 막힌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광복군 출신의 장군과 만주군 출신의 친일군인이 나란히 누워 있었다. 또한 독립운동의 기록이 명백한데 그 뒤 일본군에 체포되고 변절한 이의 묘도 있었다. 정부 주요 인사 경력이 있는 사람들의 묘역에서도 그런 점을 찾을 수 있었다. 제1 장군묘역에 가니 간도특설대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하는 악질 친일파들도 있었다. 정말 영혼이 있다면 독립운동가들에게 후손들이 너무 하는 것 아닐까? 어떻게 친일파, 매국노들과 함께 안장되어 있게 한단 말인가?
현재 국립묘지에는 2009년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중 12명이 장군 묘역과 국가유공자 묘역 등에 안장되거나 안치되어 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무려 74명이나 된다. 국립묘지에 친일행각을 한 자들이 국민세금므로 기림을 받고 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어째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것일까? 해설자는 국립현충원의 친일파 무덤 정리 없이는 친일 청산은 있을 수 없다고 강조하였다. 이에 대해 좀더 구체적인 역사를 알기 위해 해설자는 대통령 묘역으로 발길을 옮기자고 했다.
서울현충원에는 모두 네 명의 전직 대통령이 안장되어 있다.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 김영삼이다. 윤보선 전 대통령은 생전에 독재자와 함께 누워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여 충청도에 있는 가족묘에 안장되었단다. 최규하 전 대통령은 대전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노무현 전대통령은 널리 알려져 있듯이 고향인 봉하마을에 안장되어 있다. 그 밖에 타계한 전직 대통령은 전두환, 노태우인데 이들은 국립묘지에 들어갈 권리가 박탈되었다. 그러므로 오늘 갈 수 있는 곳은 네 명의 전직 대통령 묘소인데 시간상 둘만 가는 것이 좋겠다고 해설자가 제안하였다.
먼저 간 곳은 김대중 전 대통령 묘역이었다. 장군묘역에서 그리로 넘어가는 길에 운구차가 한 대 서 있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시신을 운구했던 차라고 한다. 신돌석씨는 그 이야기를 듣고 기가 막혔다. 박정희가 죽은 지 40년이 넘었는데 아직 그 운구차를 국립묘지에 세워 놓고 있단 말인가? 다른 걸 다 떠나서 자기 딸보다 어린 여자를 끼고 부하 총 맞아 죽은 자를 뭐 그리 애달프게 기리는지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에게 공이 있다고 해도 그가 저지른 죄악은 그것을 한참 덮고도 남는다는 것이 신돌석씨의 생각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묘지는 일반 묘지보다는 조금 크지만 아담하게 느껴졌다. 당시 이명박 정부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유해를 대전 현충원에 안장하려고 했는데, 가족과 측근들이 서울현충원에 모실 것을 강력히 주장하여 관철시켰다고 한다. 땅이 없다는 당시 정부의 주장에 대해 지금의 땅을 찾아내서 정부를 설득한 모양이다. 해설자는 정말 잘 된 일이라고 하였다. 옆에 시비도 있는데, 잘 보라고 하였다. 조금 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묘에 갈 텐데 둘을 비교해 보면 뭔가 느끼는 것이 있을 거라고 하였다.
[삽화-백소(白笑)]
이승만 전 대통령의 묘로 갔다. 규모부터 왕릉 같았다. 해설자의 말처럼 둘을 비교해 보니 규모에서부터 엄청난 차이가 났다. 물론 김대중 전 대통령이 타계했을 당시에는 묘터가 부족해서 부득이 그런 점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이승만 전 대통령은 재직시부터 자신의 묘 자리를 이야기했다는 설이 있다. 묘 옆에 있는 시도 김대중 전 대통령의 묘에는 그가 민주이고, 평화이고, 바로 우리라는 것을 강조한 내용이라면, 이승만 전 대통령 묘 옆에 있는 헌시라는 것에는 마치 그가 우리 민족에 독립을 가져다 준 듯이 써 있다.
여기서 해설자는 어째서 국립묘지에 친일파가 많은지에 대해서 새로운 이야기를 하였다. 해방이 되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이 되면서 1주년인 1949년 8월 15일에 독립유공자를 표창하려고 하였단다. 그런데 이승만이 독립유공자를 우리나라 사람보다 자기를 도와준 외국인에게 주려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미국의 경우 외국에서 훈장을 받으려면 미 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그래서 결국 외국인 표창은 무산되고 1주년인 1949년에는 단 두 명이 건국훈장을 받았다. 그 대상은 바로 대통령인 자신과 이시영 부통령이었다. 해방된 나라가 맞는지 웃기는 일이었다.
해설자는 그 점이 그의 외교론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하였다. 그에게는 무장투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홍범도도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한 안중근도, 윤봉길도 다 의미가 없는 것이다. 오로지 외교를 통해서 나라를 찾겠다고 하는 것이 독립운동이다. 그 과정에서 자기에게 도움을 준 외국인이 독립유공자인 것이다. 결국 이승만이 1960년 물러날 때까지 독립유공자로 서훈한 사람은 자신과 부통령을 제외하면 모두 14명의 외국인이었다. 그들도 모두 자신과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맺었던 사람이었다. 독립유공자는 없고, 전쟁이 나다 보니 그 틈에 친일파가 끼어들었다는 것이다.
요즘 이승만 기념관을 열린송현공원에 세우겠다고 난리다. 개신교 중심으로 동원을 하다시피 하면서 건국전쟁이라는 영화를 보고 분위기를 잡으려 한다. 우리가 헌법 정신에 투철하다면 우리 대한민국은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한 나라가 되어야 한다. 그때 경무대로 향하다 피를 흘린 시민 학생들이 바로 그 근처에서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당했는데 거기에 이승만 기념관이 가당키나 한 것인가? 그리고 4.19혁명의 원인 제공자가 바로 이승만인데, 그를 기리는 것은 반헌법적 행위가 아닌가?
안보를 중시하는 이들도 이승만을 기리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서울을 버리고 자기만 살겠다고 도망갔고, 한강을 일찍 폭파시켜서 수많은 사람을 죽게 하거나 피란을 못 가게 한 자를 정말 기려야 하는지 생각해야 한다. 이승만은 반민특위에 대한 경찰 습격을 자기가 지시했다고 말함으로써 친일 청산에 가장 큰 걸림돌이었음을 자인하였다. 그리고 독립유공자 서훈에서도 볼 수 있듯이 진짜 독립운동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고 자기 명성과 세력만 키우는 외교론으로만 일관한 인물이다. 그의 이런 죄과를 어찌 눈 감고 우리가 기념관을 세울 수 있단 말인가?
신돌석씨는 이승만 묘 앞에서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어제 있었던 3.1혁명 105주년 자주평화대회를 떠올렸다. 광화문 일대에는 수구세력들이 개신교를 중심으로 많이 모였다. 100주년 때처럼 많지는 않았다. 그 중 어떤 발언자가 민노총이 시신을 들고 행진을 하더라고 하였다. 아마도 방영환 열사 장례식을 보고 하는 말 같았다. 그들 뒤에는 마귀가 있고, 자기들 뒤에는 하나님이 있단다. 신돌석씨도 모태신앙이지만 정말 이런 기독교인들이 싫다. 옳고 그름도 이제는 다 잊어버리고 무조건 외세와 독재에 빌붙어 광분을 한다. 그러니 3.1절, 광복절 등에 성조기를 흔들지.
이승만 묘 탐방을 끝으로 오늘의 역사산책을 끝내기로 하고, 다시 만남의 집으로 내려가서 정리 집회를 하였다. 도중에 힘들어서인지 포기하신 어르신 몇과 바빠서 간 한두 명을 제외하면 전부 다시 모였다. 가장 연세가 많으신 분과 가장 어린 학생의 소감을 들었다. 가장 연세가 많으신 분은 무려 86세였다. 그런데도 산꼭대기 장군묘역 있는 곳까지 완주하셨다. 초등학생과 중학생이 한 명씩 소감을 이야기했다. 부끄러워하면서도 유익하였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이어서 해설자가 마무리 발언을 하였다.
저도 이 지역에서 살고 활동하면서도 현충원 같은 데 뭐하러 가느냐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한 번 두 번 오고 관심을 갖고 연구를 하면서 여기도 변하는구나 하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그 사회가 어떤지 알려면 국립묘지를 가보라는 말이 정말 맞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안내를 하면 처음에는 대부분 개탄부터 합니다. 이게 나라냐는 식의 이야기들을 하시죠. 맞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에서 이 사회가 변해 왔듯이 여기도 변해 왔습니다. 그리고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희망을 가지시는 역사산책이 되었다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해설자의 말대로 친일파가 국립묘지를 차지하고 있어도 그들을 쫓아내야 한다는 생각을 시민들이 가지기 시작했고, 그것이 다음 세대로 이어져 간다면 정말 희망은 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알아야 한다. 무지해서 변화를 못 시킨다면 그건 용서받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신돌석씨는 오늘은 정말 유익한 하루였다고 생각했다. 어제 집회와 행진을 했고, 오늘 산꼭대기까지 올라갔다 내려오다 보니 몸은 피로하고 힘이 들었다. 하지만 과거를 팔아먹는 자가 현재와 미래를 팔아먹지 못하게 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된 하루였다는 생각에 매우 흐뭇한 마음이었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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