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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의 역사
우리가 흔히‘개혁주의’를 말하는데, 이 신앙체계를 역사 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개혁주의는 사전 적 의미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신학적 의미와 역사적 배경을 지니고 있고, 복음에 대한 이해, 사회와 문화에 대한 태도 등 을 함의하는 신학적 용어이기 때문이다. 개혁주의는 특히 16 세기 종교개혁을 통해 대두된 신학적 용어이기 때문에 교회사 전통에서 이해하는 안목이 필요하다.
1. 역사적 정의
우리가 종교개혁 신학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16세기 종교개 혁자들의 개혁운동과 그 신학을 통칭하는 용어로 볼 수 있다. 이 신학은 개신교신학의 근간이 되며, 복음주의 신학 혹은 개 혁 신학의 기초를 이룬다. 그러나 우리가‘개혁주의’1) 라고 말할때그의미는보다한정적이다.넓은의미로개혁주의 라는 말은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의 개혁운동과 그 신학을 통 칭하는 용어로 볼 수 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개혁주의란 쯔빙글리(Zwingli, 1484-1531)와 칼빈(Calvin, 1509-1564) 의 개혁운동을 루터(Luther, 1483-1546)의 개혁운동에 의해 생성된‘루터파’(Lutheran)와 구별하기 위하여 붙여진 이름 이다. 연원적으로 개혁주의는 루터주의와의 구별을 의미한다.
쯔빙글리와 칼빈에 의해 시작된 개혁교회는 스위스에서 독일, 화란, 프랑스, 스코틀랜드 등지로 확산되었는데, 이런 개혁교회의 신학을 보통 개혁주의 신학이라고 부른다. 다시 말하면 개혁주의는 16세기 종교개혁자인 쯔빙글리와 칼빈에 의해 시작된 개혁교회(Reformed Church)의 신학을 의미하 는데, 이 교회는 독일, 화란, 프랑스, 스코틀랜드 등지로 확 산되었고, 17세기 이후에는 미국으로 그리고 19세기 말 한국으로 소개되었다.
앞에서 지적했지만 16세기 종교개혁은 두 가지 형태의 교회, 곧 루터파와 개혁파를 형성하게 되었는데, 개혁파 혹은 개혁교회의 개혁주의라는 말은 일차적으로 루터파의 신학과 구별하는 의미가 있다. 쯔빙글리나 칼빈의 신학을 루터의 신학과 구별하는 이유는 루터파나
개혁파가 다같이 로마가톨릭의 사제주의(司祭主義, sacerdotalism)를 비판하고 성경적 인 교회를 지향하지만 개혁파는 루터파보다 더 철저한 개혁 을 단행했기 때문이다. 더 철저한 개혁을 단행했다고 말할 때 이말은 로마가톨릭적잔재를 배격하는데있어서보다 철저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개혁파교회는 루터파보다 더 철저하게 성경적인 교회를 회복했다는 점을 의미한다.
칼빈의 경우 모든 문제를 성경에 근거하여 철저한 개혁을 시도함으로서 성경적 근거가 없는 로마가톨릭의 전통들, 곧 의식과 관행을 말끔히 제거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교회사 학자인 베인톤(R. Bainton, 1894-1984)은 개혁주의란 반사제 주의(反司祭主義)일 뿐만 아니라 루터주의의 개혁이라고 말 한 바 있다(R. Bainton, The Age of the Reformation, 1956, 39).
2. 개혁신앙원리에 대한 역사적 이해
앞에서 지적했듯이 개혁주의는 루터주의보다 더 철저한 성경 중심적 교회를 지향했다. 그래서 미국 칼빈신학교 교 수였던 클로스터(Fred Klooster)는 개혁주의의 독특성이란 바로‘성경적 원리 ’라고 말한바 있다(Fred Klooster, "The Uniqueness of Reformed Theology," Calvin Theological Journal, Vol.14, No.1, 1979, 39: 성경적 원리란‘오직 성경 만’이 아니라‘모든 성경’의 원리를 포함한다). 개혁주의는 성경에 기초하여 신관과 우주관, 신앙관,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규명한다. 개혁주의는 성경을 신앙과 생활의 절대적인 그리고유일한 근거로 삼기때문에 성경의권 위를 강조하고,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한다. 또 그리스도 인의 문화변혁적 삶을 통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 러내고자 한다. 교회정치제도에 있어서는 인간중심의 위계 제도나 특권층을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로마가톨릭의 사 제주의나 교권주의를 배격한다.
이 개혁주의 신학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 하는 하나님 중심 신학,
성경의 원리를 강조하는 성경 중심 신학,
교회적 삶을 강조하는 교회 중심의 신학'
으로 설명되어 왔다.
우리가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이라고 말할 때 이것은 개혁주의적인 신앙과 삶의 방식을 간명하게 표현 한 것이다.
하나님 중심(God-centered)이란 개혁주의 신학의 근간으로 서, 신학의 중심 주제는 인간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 곧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나타내 시는 하나님, 그리고 성령으로서 주가 되시는 하나님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또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도 하나님을 알고 그를 신뢰하며 그를 영화롭게 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하나님 중심이라는 말을 16세기적 상황에서 말하면 인간이 중심일수없다는점을의미한다.이말을보다직접적으로 말하면 교황이 중심일 수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개혁주의는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을 엄격하게 구별하며, 인간을 특수한 위치에 두는 신학을 용납하지 않는다. 개혁주의는 창 조주 하나님은 자연과 인간과 우주의 통치자이시며,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있음을 강조한다. 이것이 하나님 중심 사상이다.
성경 중심(Bible-centered)이란 오직 성경만이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이란 점을 강조한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구호이 기도 한‘오직 성경’(sola scriptura), 곧 성경 외의 그 어떤 것도신앙의표준일수없고신학의원천일수없다는점을 주장한다. 로마가톨릭은 성경 외에도 소위 성전(聖傳)이라 는‘전통’을 성경과 동일한 권위로 받아드린다. 때로는 이것 을통해성경을해석한다하여전통을성경보다우월한권 위로 받아드렸으나 개혁주의는 모든 전통을 배격했다. 개혁 주의는‘오직 성경’과 함께 성경에 다른 어떤 것을 더하거나 감하는 것을 반대하는‘모든 성경’(tota scriptura)을 강조한 다. 또“성경은 성경 자신이 해석한다”(Scripturae scriptura interpretum)는 원리를 고수한다. 루터나 칼빈 등 개혁자들은 자신이 주장하는 복음주의 혹은 개혁주의 신학이 옳다는 점 을 성경에 호소하였다. 개혁주의는 바로 성경중심주의 신학 이다. 따라서 개혁주의자들은 성경의 신적 권위를 강조한다.
개혁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관심은 하나님의 교회였고, 하나님의 교회 건설이었다. 이것이 교회 중심(Church- centered) 사상이다. 신학은 근본적으로 교회를 위한 학문 이며, 교회를 섬기는 학문이다. 개혁주의 신학은 이 점을 강 조한다. 로마카톨릭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견적 교회 안에 서 실현된다고 하여 가견적 교회와 신국(神國)을 동일시하지 만, 칼빈을 비롯한 개혁자들은 오직 선택된 자들로 구성되 는 우주적인 교회, 곧 무형교회 혹은 불가견적 교회(invisible church)를 말하면서도 선택받지 못한 사람도 회원이 될 수 있는제도적인지상의교회,곧유형교회혹은가견적교회 (visible church)로 구분했다. 지상의 교회는 완전할 수 없다. 개혁주의는 지상 교회의 불완전성을 인정하면서도 완전을 향한추구를경시하지않는다.이것이교회갱신혹은교회 개혁 운동이다. 교회 중심 사상은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사 이에서있는이교회를중심으로신앙적삶을추구하며교 회에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려고 힘쓴다.
개혁주의는 현재의 삶과 무관한 공허한 이념이나 관념이 아니라 실제적 삶의 신학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이 란 하나님의 주권 하에서 사는 삶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 은이땅의삶속에서도하나님의주권이행사되도록해야한 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 속에 살면서도(conform)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transform) 문화적 소명을 지니고 있 음을 고백한다. 그래서 신자의 삶의 궁극적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인데, 이것이 개혁주의 신학의 목표라고 할수있다.
3. 개혁주의와 칼빈주의(Calvinism)
우리는 개혁주의를 칼빈주의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것 은 칼빈이 성경적 가르침을 해설하고 이 신학을 체계화하였 다는 점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비록 쯔빙글리가 칼빈보다 한 세대 앞선 인물이었으나, 칼빈이 보다 선명하게 이 신학을 해설하고 체계화하였기 때문에 이 신학 체계를 칼빈주의라 고 부르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개혁주의와 칼빈주의는 동의 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칼빈주의라고 말할 때 이것을 칼빈 개인의 사상이거나 그의 창착물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나, 사실 은 칼빈은 이사상체계의 한해설자였을뿐이다.따지고보면 개혁주의 곧 칼빈주의 사상은 16세기 개혁자들의 사상에 도 나타나며, 이것은 초대교회의 어거스틴(Augustine, 354- 430)의 사상이었고, 1세기 바울의 가르침이었다. 어거스틴은 칼빈이전의 칼빈주의자인샘이다.이런점에서챨스하 지(Charles Hodge)는‘개혁주의’를‘칼빈주의’라고 부르지 말고‘어거스틴주의’(Augustinism)라고 부르자고 제안한 바 있다. 개혁주의 사상은 16세기에 와서 비로소 형성된 어떤 새 로운 신학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런 제안을 한 것이다. 정리하면, 개혁주의는 칼빈이나 다른 개혁자들의 사색에서 얻어진 결론이나 그 견해들의 집합체라기보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가장 바르게 해설한 신학사상이라고할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개혁주의와 칼빈주의를 동의어로 보아 상호교차적 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종교개혁시대에서는 칼빈주의란 칼빈의 사상을 의미하였고, 개혁주의는 쯔빙글리나 칼빈 및 그들과 비슷한 사상을 가진 사람들의 신학을 통칭하는 의미가 있었다. 즉 16세기 당시 개혁주의라는 말은 개혁파교회와 신학을 의미했고, 루터파 (Lutheran)와 구별하기 위한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 칼빈주의는 칼빈만이 아니라 쯔빙글 리와 칼빈의 사상을 따르는 모든 신학(사상)을 칼빈주의라고 칭하게 되었다. 그래서 종교개혁 이후에는 칼빈주의라는 말 은칼빈의신학과그의교회개혁정신을따르는신학과교 회를 통칭하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약간의 뉘앙스의 차이가 있지만 일반적인 경향은 영미권에 서는 칼빈주의라는 말을, 유럽적 배경에서는 개혁주의에 해 당하는 개혁신학, 개혁신앙 혹은 개혁교회라는 용어를 선호 하는 것 같다. 루터파와 다른 개혁신앙을 표방하는 교회를 유럽에서나 그 후예들의 교회에서는 개혁교회라고 하지만,영미계통의 교회에서는 장로교라고 말한다.
장로교회 중에서도 자유주의 신학을 따르는 교회가 있어 개혁주의라고 부를 수 없는 교회가 있고, 반대로 17세기 영 국에서의 경우처럼‘칼빈주의적인 침례교’도 없지 않았으나 역사적 장로교회가 유럽의 개혁신학과 신앙을 계승해 왔다. 근래의 경향은 칼빈의 이름에서 유래한 칼빈주의라는 말 보다는 개혁주의라는 말이 더 적절하다는 견해 때문에‘개혁주의’라는 용어를 선호하는 것으로 보인다.
4. 개혁주의와 다른(他) 신학체계
개혁주의를 개혁주의가 아닌 신학사상과 역사적 관점에서 비교해 보고자 한다. 개혁주의를 천주교의 사제주의, 루터주 의 그리고 17세기의 아르미니안주의와 비교해 보면 개혁주 의를 보다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 개혁주의와 사제주의
우리가 개혁교회의 신학을‘개혁주의’라고 말하듯이 로마 가톨릭의 신학 사상을‘사제주의’(司祭主義, Sacerdotalism) 라고 말한다. 사제주의란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중보자로서 사제의 역할을 강조하는 천주교회의 교의체계를 의미한다. 교회가 가르치는 보편적인 가르침은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 님께 속해 있으며 오직 하나님만이 구원을 이루시는 분이라 는사실이다.강조점의차이는있을수있으나모든교회는 이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모든 개신교회는 하나님은 직접 적으로 인간의 영혼에 은혜로 역사하시며, 인간의 구원을 하 나님 이외에 어떤 것에도 맡기지 않으셨다고 믿고 있다.
그런데 천주교회는 하나님은 구원사역에 있어서 인간의 영 혼에 직접적으로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역사하 시는데, 하나님은 세우신 기구, 곧 유형 교회를 통해서 역사 하신다고 주장하고, 그 일을 인간의 손에 위임했다고 말한 다. 그 인간이 바로 신부 곧 사제(司祭)인데, 사제는 하나님 과인간사이의중보자로서특별한위치에있다.다시말하 면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통해 일하시는데 성례 제도와 함께 교회 안에 인간의 구원을 위해 성직 곧 사제를 두셨다고 믿는다. 그래서 워필드(B. B.Warfield)는 복음주의와 사제주의의 경계선이란 우리를 구원 하시는 이가 하나님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사제인가의 차이라고 말한바 있다(B. B. Warfield『, 구원의 계획』, 모수환 역, 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1, 60).
사제주의 개혁주의
하나님 하나님
사제(교황)
신자들 신자들
사제의 역할과 관련하여 사제에게는 3가지 특별한 권한이 있다고 보고 있다. 첫째로는 사제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로서의 기능을 행사하며, 둘째는 희생제사를 드리는 권한, 곧 축성권(祝聖權)이 있으며, 셋째는 죄를 용서해 줄 수 있는 권한, 곧 사죄권(赦罪權)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점만 보더라도 사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라는 특 수한 위치에 있음을 알 수 있다.
2) 개혁주의와 루터주의
개혁주의나 루터주의는 다 같이 사제주의를 반대하고 성 경에 기초하여 교회를 개혁하고자 한 점에 있어서는 동일하 지만, 개혁주의는 사제주의의 개혁에 머물지 않고 루터파보 다 더 철저한 개혁을 시도하였다. 흔히 루터파와 개혁파간의 차이를 칭의론(稱義論)과 예정론(豫定論)의 차이로 설명하 는데, 이것은 옳지 않다.‘이신득의’(以信得義)를 강조하는‘칭의론’을 루터주의의 특징으로 볼 수 없다. 이것은 루터만 이 아니라 칼빈을 비롯한 모든 개혁자들의 공통된 주장이자 복음주의 신학의 기초였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은 루터 파의 고유한 사상이 아니라 모든 개혁자들의 공통적인 가르 침이었다. 이신득의, 칭의론 등은 루터파나 개혁파 간의 공 통적인 주장이며 개혁 정신의 본질이었다는 점에서 두 신학 체계를구별해주는개념으로볼수없다.워필드가루터파 와 개혁파사이의 차이점은“종류의 차이가 아니라 정도의 차 이”(Warfield『, 구원의 계획』, 122)라고 말했던 것은 바로 이 런의미에서한말일것이다.
예정론을 개혁주의(칼빈주의)의 중심 사상이라고 말하기 도 하지만 이 예정(predestination)이 칼빈주의의 핵심교리라고 할 수 없다.2) 단지 예정론은 하나님의 주권 사상에서 도출된 논리적인 귀결일 뿐이다. 예정교리에 대해서는 쯔 빙글리, 부써(M. Bucer) 외에도 루터파의 루터나 멜란히톤 (Melanchton)도 칼빈 못지않게 주장했다는 점에서 개혁주 의 사상의 특징으로 볼 수 없다. 존 브랏의 설명과 같이 칼빈 은 예정론교리에 특별한 중요성을두고 강조한것은 아니었다(J. Bratt, The Rise and Development of Calvinism, Grand Rapids: Eerdmans, 1959, 27). 칼빈은 그의 설교에서 이 교 리에대해거의언급하지않고있으며,자신의『기독교강 요』초기 본에서도 이 점에 관심을 표명하지 않았다. 이 교리 에 대해 언급한 경우는 그의 생애 말기였고, 특별히 1551년 볼섹(Jerome Bolsec)과의 논쟁에서 파생된 결과였다. 예수 회의 창시자인 이그나티우스 로욜라(Ignatius Loyola)도 예 정에 대해 말했으므로(Bratt, The Rise and Development of Calvinism, 28) 칼빈의 중심 교리로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실 예정론을 체계적으로 진술한 이는 칼빈이라기 보다 는 멜란히톤이었다. 칭의론이 루터파의 중심 교리일 수 없 듯이예정론이개혁파의중심교리라고볼수는없다.그러 면 루터파와 개혁파간의 차이는 신학의 출발점, 성경관과 전 통, 예배와 의식, 교회-국가관, 성찬관의 차이에서 드러난 20 개혁신앙 아카데미다. 신학사상의 차이를 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신앙고백서 인데 루터파와 개혁파를 구분하기 위해 만든 문서가『하이델 베르크 요리문답서』이다. 이 문서는 양 신학 사상 간의 차이 를 보여주는 중요한 문서이다.
3) 개혁주의와 아르미니안주의
우리가 개혁주의 혹은 칼빈주의를 말하면 많은 사람들은 ‘칼빈주의 5대 교리’를 연상한다. 그러나 칼빈주의 5대 교 리는 17세기 화란의 개혁주의자들에 의하여 작성된 하나의 교의체계(敎義體系)로서 개혁주의 구원관을 설명하고 있을 뿐이지, 칼빈주의 5대 교리가 곧 개혁주의를 의미하지는 않 는다. 칼빈주의 5대 교리란 1603년 레이든(Leiden)대학의 교수였던 야콥 아르미니우스(Jacob Arminius, 1560-1609)가 인간의 자유의지론(自由意志論)을 주창하면서 시작된 아르 미니안 논쟁의 결과로 1618년 도르트(Dordt) 회의에서 채택 된 칼빈주의의 기본 교리일 뿐이다. 칼빈주의 5대 교리란 인 간의 전적인 타락, 무조건적인 선택, 제한된 속죄, 불가항력 적인 은혜, 성도의 궁극적인 구원 교리를 말하는데, 이는 개혁주의 신학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개혁주의가 결코 새로운 사상이 아닌 것과 같이 아르미니안 주의도 결코 새로운 사상이 아니다. 아르미니우스의 사상과 동일 혹은 유사한 사상이 이미 초대교회 때로부터 있어 왔다. 아르미니안주의란 구원론에 있어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주장 하는 입장인데 이것은 합리주의적 신학 체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개혁주의는 아르미니안주의와 어떻게 다른가?
야콥 아르미니우스(Jacob Arminius, 1560-1609)는 목사이 자 유능한 신학자로서 칼빈이 서거하기 4년 전인 1560년 화 란 암스테르담의 데바이트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공동생활 형제단에 의해 설립된 성 제롬학교에서 초기 교육을 받았고, 마부르크대학을 거쳐 1576-1581년까지는 라이덴대학에서 수학하고이학교1회졸업생이되었다.그후그는제네바 로 가서 1582-1586년까지 칼빈의 후계자인 데오도르 베자 (Theodore Beza, 1519-1605) 밑에서 수학하였다. 그 후에는 이태리를 여행한 후 귀국하여 목사가 되었다. 그의 나이 28 세 때인 1588년 암스텔담에 있는 개혁교회 담임목사가 되었 다. 그는 유능하고 학식 있는 칼빈주의적인 성직자였으나 예 정(豫定), 속죄(贖罪), 선택(選擇)에 있어서 개혁교회 교리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지 않음이 점차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특히 그는 예정설에 대해 견해를 달리했는데 그는 하나님의 예정은 인간의 행위에 의존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또 그리 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으며 은혜에서 떨어지는 것 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는 예정론을 받아드릴 수 없다고 보았던 평신도 법률가 코른헤르트(Coornhert, 1522-1590)에게 칼빈주의적 선택과 예정교리를잘설명해주도록요청받았는데그가오히려그 의 입장을 두둔하였다. 아르미누스는 두 가지 입장에서 칼빈 주의자들과 큰 차이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하나는 교리 문제 로예정에관한문제였고,다른하나는국가와교회에대한 관계 문제였다. 그 일로 그는 하이델베르크 신앙문답에 대 해 비판하지 않기로 서약한 일이 있다. 그러나 그는 1603년 에 라이덴(Leiden) 대학 교수로 임용되었고, 이 대학의 신약 교수인 고마루스(Gomarus)와 교리적인 대립을 하기도 했다. 그는 교리적 문제로 인한 토론의 와중에서 1609년 4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아르미니우스가 사망한 후 그의 제자들은 화란정부에 아 르미니우스가 가르친 교리에 기초하여 화란교회의 신조(네 델란드 신앙고백서, 하이델베르크신앙문답에 기초한 교리 표준)를 수정해 줄 것을 요구했는데 이것을‘아르미니안파 의 항의’(Remonstrance)라고 말한다. 따라서 이들은 ‘항의자들’(Remonstrants)이라고 불리기 시작하였다. 이 항의 때 문에 1618년 11월 13일부터 1619년 5월 9일까지 도르트 (Dordt)에서 회의가 개최되었는데 이때의 회의는 개혁교회 의 회의 중 가장 규모가 큰 회의였다. 이 회의에서는 화란뿐 만이 아니고 영국, 독일, 스위스 등의 대표까지 참석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아르미니우스파의 주장이 만장일치로 거부되 고 아르미니안들의 주장을 반박하는 신앙조항을 채택하였는 데 이것이 칼빈주의 5대 교리의 내용이다.
아르미니안주의는 개혁주의 교리로부터의 최초의 심각한 이탈이었다. 이들의 주장은 거부되었고 이를 통해 개혁주의 입장은 보다 선명히 표현되었다. 17세기 화란에서 일어난 아 르미니안주의와의 논쟁을 통해 하나님의 주권, 예정과 선택, 인간의 무능력 등 구원관에 있어서보다분명하게정립되었 다. 즉 개혁주의는 합리주의적인 신학이 아니며, 인간 구원 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한다. 아르미니안들의 교리는 화란에서는 거부되었으나 영국으로 건너가 웨슬리에 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것이 웨슬리의 사상에 기초한 감리 교와 성결교의 신학적 뼈대를 이루게 되었다.
이상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듯이 개혁파나 루터파는 다같이 천주교의 사제주의를 거부하고 개혁을 추진했지만, 개혁주의는 루터주의보다 더 철저한 개혁을 단행하였고, 아르미니안주의와는 달리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무능력, 예정과 선택을 강조하였다.
5. 종교개혁과 개혁주의의
이미 앞에서 말했지만 개혁주의는 16세기 종교개혁을 통 해서 비로소 형성된 어떤 새로운 사상이 아니다. 개혁주의는 종교개혁 이전에도 있었고 거슬러 올라가면 그것은 초대교 회의 어거스틴의 사상이었고, 바울의 가르침이었고, 성경의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개혁주의의 연원을 종교개혁으로부터 보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나 개혁주의 사상이 16세기 종교 개혁을 통해 보다 분명하게, 그리고 체계적으로 정립되었다 는 점에서 16세기 종교개혁운동으로부터 그 역사적 전개와 발전과정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1) 종교개혁
종교개혁은 1517년 10월 31일 독일 비텐베르그(Wittenberg) 대학의 교수였던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 가 대학 게시판에 당시 교회가 가르치는 잘못된 주장에 대해 토론할 것을 제의하면서 라틴어로 된 95개조의 토론문을 게 재한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는 구텐베르크의 인쇄 술이 발명된지 70여년이 지난때 였으므로 루터의항의서 는 2주일이 못되어 독일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불과 한 달이 못되어 전 구라파로 전파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종교개혁, 곧 교회 개혁 운동은 루터를 비롯하여 쯔빙글리(U. Zwingli, 1484-1531), 칼빈(J. Calvin, 1509-1564), 존 낙스(J. Knox. 1515-1574) 등의 개혁자들에 의해 독일, 스위스, 화란, 영 국, 스코틀랜드 등지로 확대되어 갔고 급기야는 중세사회를 붕괴시키고, 근세의 새벽을 여는 세계적 사건으로 발전되어 간 것이다.
종교개혁은 본래적 기독교에로의 회복운동, 혹은 성경적 기독교의 회복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중세의 오도된 기독교신앙과 생활로부터 떠나 성경적 기독교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다.
2) 종교개혁의 전개와 개혁교회의 형성
독일에서 루터의 개혁운동이 전개되고 있을 때 스위스에서 는 쯔빙글리와 칼빈에 의해 이운동이 확산되어갔다.쯔빙 글리는 스위스의 독일어 사용지역인 취리히(Zürich)를 중심 으로 개혁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종교 문제에 대한 토론을 통해 시의회의 인정을 받음으로써 개혁운동을 확산해 갔는 데, 불행하게도 그는 1531년 카펠(Cappel)전투에서 전사하 였다. 그때 그의 나이 47세였다.
스위스에서 불어를 사용하던 지역 곧 제네바(Geneva)의 개혁자는 칼빈이었다. 사실 제네바는 칼빈이 도착하기 전 에 이미 기욤파렐에 의해 개혁이 단행된 도시였다.칼빈은 루터나 쯔빙글리에 비해 한 세대 후배였다. 칼빈은 1533년 프랑스를 떠난 후 바젤(Basel)에서 일시 체류하였고, 1536 년 7월부터는 제네바(Geneva)에서 개혁운동에 전념하였는 데, 1538년 4월부터 1541년 9월까지 3년간 스트라스부르크 (Strassburg)에서 보낸 기간을 제외하고는 1564년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때까지 제네바에서 봉사하였다.
루터의 개혁운동은 루터파(Lutheran)로 발전하였고 스위 스의 개혁운동, 곧 쯔빙글리와 칼빈의 개혁운동은 연합하여 개혁파(Reformed)라는 하나의 교회를 형성하였다. 이상과 같은 개혁자들 외에도 필립 멜랑히톤(Philip Melanchton), 하인리히 불링거(Heinrich Bullinger), 마르틴 부써(Martin Bucer), 데오도르 베자(Theodore Beza) 등 여러 개혁자들이 있었다. 이들의 봉사와 개혁활동을 통해 오늘 우리가 속한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교회가 형성되었는데,‘프로테스 탄트(Protestant)’라는 말이 생겨난 때는 1529년의 일이다.
1526년 여름에 모였던 스파이에르국회(Diets of Speier)에 서 황제 칼 5세(Karl, V)는 종교 문제에 대해 제후 및 제국도 시의 결정권을 인정함으로써 부분적으로 루터파를 인정하였 다. 다시 말하면“그 지역의 종교는 그 지역 지배자(제후)의 종교에 따른다”(cujus regio, ejus religio)고 하여 루터파를 지지하는 제후가 통치하는 지역에서는 루터파를 인정하였 다. 이것은 루터파에 대한 부분적인 인정이었다. 그러나 3년 후인 1529년 제2차 스파이에르 국회에서 황제는 이전의 결 정을 번복하려고 하였다. 이때 루터를 지지하는 제후들이 쉬 말칼텐 동맹을 결성하여 황제에게 항의서를 제출하고 항의 (protest)했는데, 이들을‘항의한 자들’이라고 하여 프로테스 탄트(Protestant)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루터파를 포함한 개 신교도들을 프로테스탄트라고 부르게 된 때는 정확하게 말하면 1529년 4월 19일부터였다.
독일과 스위스 외의 여러 지역에서도 개혁운동은 일어났는데 스코틀랜드의 경우 존 낙스(John Knox)에 의해 개혁 이 단행되어 1560년 장로교가 국교화 되었고, 영국에서의 경우 헨리 8세가 자신의 이혼 문제로 1534년 수장령(Act of Supremacy)을 발표하고 로마 교황청과 행정적 관계를 단절 함으로써 영국교회(Church of England), 곧 성공회로 발전하 였다.
이상에서 말한 종교개혁의 전개를 지역별로 주도적 인물을 중심으로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종교 개혁의 전개
(1) 독일:
'루터 -루터파(Lutheran)
(2) 스위스(독일어 사용지역):
쯔빙글리, 불링거 - 개혁파(Reformed)
(3) 스위스(불어사용지역):
칼빈, 베자 -개혁파(Reformed)
(4) 스코틀랜드:
존 낙스 -장로교(Presbyterian)
(5) 잉글랜드:
헨리 8세- 영국교회
(성공회, Church of England)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종교개혁의 결과로 복음주의 적 신학 계열은 두 유형으로 발전되었는데, 그것이 루터파(Lutheran)와 개혁파(Reformed)이다. 루터에 의해 시작되 었고 멜랑히톤에 의해 계승된 루터파는 독일을 중심으로 하 여 주로 스칸디나비아반도로 확산되어 갔으나, 쯔빙글리, 불 링거(H. Bullinger), 칼빈 등에 의해 형성된 개혁교회는 스위 스, 화란, 독일 등지로 확산되어 갔다.
역사적으로 개혁신학, 곧 개혁주의 사상은 쯔빙글리 지도 하의 스위스에서 시작된 종교개혁에서 찾는다. 개혁사상의 근본원리들은이미그의가르침속에있었다고볼수있다. 그러나 그 원리들이 최종적인 형태를 갖추고 조직적인 발전 을한것은칼빈에의해서라고할수있다.이개혁주의사 상은 스위스와 프랑스로 확산되었고 그리고 라인강을 따라 독일을 거쳐 화란으로 전파되었다. 그리고 동쪽으로는 보헤 미아와 헝가리로, 서쪽으로는 도버해협을 건너 영국으로 전 파되었다. 영국에서는 이 개혁신학을 장로파 혹은 장로교 (Presbyterianism)라고 불렀던 것이다.
3) 칼빈과 칼빈주의
칼빈(John Calvin, 1509-1564)은 1509년 7월 10일, 프랑스 파리에서 동북쪽으로 60마일 떨어진 곳에 위치한 삐가르디(Picardy)현의 느와용(Noyon)에서 다섯 아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칼빈은 어린 시절 다른 형제들과 더불어 꼴레주 데 까페뜨(Collége des Capettes)라는 지방 학교를 다녔다. 1523년 8월에는 대학 교육을 받는데 필요한 라틴어를 배우 기 위해 파리로 가 파리 대학에 있는 마르슈 대학(College de la Marche)에 입학하였다. 이 때가 그의 나이 14세였다. 당 시 이 대학에는 마튀렝 꼬르디에(Mathurin Cordier, 1479- 1564)라는 저명한 인문주의자가 교수하고 있었는데, 그는 후일 개신교로 개종한 분으로서 칼빈에게 훌륭한 스승이 되 었다. 칼빈의 저술에 나타나는 논리의 명료성, 분석의 정확 성등은 이때 받은 교육의 결과라는 주장이있다.
약 1년간 꼬르디에로부터 라틴어와 인문주의 정신을 배 운 칼빈은 보다 유명한 대학인 몽 떼규 대학(College de Montaigu)으로 전학하였다. 칼빈이 이 대학으로 옮겨간 이 유는 분명히 알 수 없으나 존 멕닐(John McNeil)은 아마도 사제가 되기 위한 의도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칼빈 은 이 대학에서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 옥캄(William of Ockham), 비엘(Gabriel Biel) 등 후기 스콜라주의 신학 과 철학을 배웠고 롬발드(Peter the Lombard)의 조직신학 (Sententia)도 배운 것으로 보인다. 인문주의자인 에라스무스도 이 대학에서 수학하였는데, 칼빈은 1528년 초까지 이곳 에서 공부하여 문학석사 과정을 끝냈다. 엄격하고 금욕주의 적경향이 짙었던 이대학은 칼빈의 지성을위한 적절한훈 련소였다.
1528년 초 칼빈은 법률학을 공부하기 위해 오르레앙 대학 (the University of Orleans)으로 옮겨갔다. 칼빈의 아버지는 모종의 불화로 성당참사회및 주교와 심히 다투었고 소송을 하게 되었는데, 1528년 11월 2일에는 불공정하게 파문을 받 았다. 이렇게 되자 칼빈의 아버지는 자기의 아들이 성직자가 되기보다는 명예와 재산을 얻기에 유리한 법률가가 되기를 원했다.
칼빈은 부친의 권유에 따라 1528년 3월 오르레앙 대학으로 옮겨가,이대학의 유명한 법률가였던 피에르태상드레 또알(Pierre Taisan de L'Etoile) 문하에서 법률(civil law)을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이 법과 대학에는 5명의 민법(民 法) 교수와 3명의 교회법(敎會法) 교수가 있었는데, 민법연 구도 중세적 기독교의 테두리를 벗어난 것이 아니었다. 칼빈 은 이곳에서 1년간 체류하면서 인문주의를 배웠다. 그는 성경을 불어로 번역했던 인문주의자 올리베탄(Pierre Robert Olivetan, 1506-1538)의 도움으로 프랑스의 르네상스 인문주의 서클에 소개되었다. 이곳에서 칼빈은 르네상스 정신과 접촉할 수 있었고, 특히 올리베탄으로부터 기독교의 참 모습은 성경에서 찾아야한다는 점을배웠다.이곳에서또칼빈 은 파리에서 온 니콜라스 콥(Nicholas Cop)과 헬라어 선생인 자 친구였던 멜키오르 볼마르(Melchior Wolmar)와 교제하 였다.
1529년 가을에는 부르쥬 대학(College de Bourges)으로 옮겨갔다. 이태리 출신의 교회법학자인 안드레아 알치아티 (Andrea Alciati)에게서 교회법을 배우기 위해서 였다. 그는 당대의 최고의 법률학자로 명성을 얻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이 대학에서 칼빈은 그의 부친이 세상을 떠난 해인 1531년까지 있었다.
1532년에는 다시 오르레앙 대학으로 돌아갔고 이듬해인 1533년에는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당시 칼빈에게 많 은 영향을 준 사람을 볼마르였다. 칼빈보다 3년 연배인자 호 머(Homer)에 관한 책을 저술했던 볼마르는 칼빈에게 헬라어 원어로신약을읽도록가르쳤고성경원전에대한지적열정 을 이끌어 주었다. 아마도 볼마르를 통해 칼빈은 루터의신학을 접한 것으로 보인다. 후일 칼빈이 고린도후서 주석을볼마르에게헌정한것을보면그에게서적지않은영향을받았음을 알 수 있다. 부친이세상을떠난후칼빈은이제자신의희망을따라 인문학을 공부하기로 작정하고 부르쥬를 떠나 콜리지 포르테 (College Fortet)로 옮겨갔는데, 이곳에서 칼빈은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공부하였다. 이상과 같은 칼빈의 지적 여정은 후 일그의생애와저술활동에많은영향을주었다.그의명석 한 두뇌와 학문적 능력은 학자로서의 길을 인도하고 있었다.
칼빈의 최초의 저술은 그의 나이 23세 때인 1532년 4월에 출판된 세네카(Seneca)의『관용론 주석 』(Commentaire du De Clementia)이었다. 당시는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영향 하 에 있었기 때문에 헬라나 라틴 저술가들의 저작을 주해하는 일은 매우 빈번한 일이었고 학계에 공헌하는 일로 여겨졌다. 세네카는 기독교 인문주의자들에게 사랑받는‘선한 이교도’ 였으며 당시 추세로 보아 관용의 문제는 흥미를 불러일으키 는주제였다.그러나칼빈의첫저서는자신의 기대와는 달 리 식자층의 관심을 얻지못했다. 혹자는첫저서에대한실 망스런 경험이 그를 기독교 인문주의자들로부터 떠나 복음 주의자의 반열로 돌아서게 하는 요인이 됐다고 주장한다.
칼빈의 생애에 있어서 하나의 결정적인 전환점이 된 사건은 그가 세네카의 관용론주석을 출판한 후 약18개월이 지난 1533년 10월에 일어났다. 칼빈은 세네카의 관용론 주 석을 출판한 후 오르레앙 지방에 가서 일년간 체류하였고, 1533년 8월에는 그의 고향인 노용을 방문한 후 다시 파리로 돌아갔다. 이때가 1533년 10월이었다. 칼빈은 이곳에서 니 콜라스 콥(Nicholas Cop)과 교제하였고, 1533년 10월 31일, 곧‘모든 성자의 날’(All Saints' day)에 니콜라스 콥은 파리대 학 학장에 취임하게 되었다. 이때의“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 이있나니”라는제목의취임연설문은칼빈의영향하에작 성된 것이었다. 혹자는 칼빈이 연설문을 대신 썼다고 주장하 기도하지만이점은분명치않다.칼빈이어떤형태로든연 설문내용에 영향을 준것은 사실이었다.이사건 때문에 니 콜라스콥과 함께 칼빈은 파리를 떠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 연설문에서는 소르본느 대학과 그 신학자들의 완고함을 비판하고, 에라스무스와 루터를 인용하여 교회 개혁 운동을 동조하였을 뿐만 아니라 복음주의적 신앙을 강하게 표현하 였다. 이것이 문제시 되었다. 칼빈은 자신의 안전을 위하여 파리를 떠나 망명자의 길을 갔다. 칼빈은 일정기간 파리에 숨어 있었으나 1534년 초 가명을 쓰고 루이 뒤 띠예(Louis duTillet)집에은신해있기도했다.이기간동안칼빈은 이뒤띠예의 장서들을 이용하여 지적성숙을 이루어갔다. 이때의 공부는 후일『기독교 강요』를 집필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칼빈이 파리를 떠나 순례자의 길을 가게 되는 1534년 프랑스는 종교적 갈등으로 인한 혼란이 가중되고 있었다. 강력한 로마천주교 신앙을 지켜가며 독일을 중심으로 전개되던 프 로테스탄트 신앙운동을 철저히 차단하려고 힘썼으나, 교회 개혁의기운은프랑스파리에서도점차수면위로그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루터의 개혁운동에 관한 정보는 구라 파각국의국경의경계망을넘어흘러들어갔고루터의작품 들도 암암리에 회람되고 있었다. 정신, 이념 혹은 사상적 통제는인쇄술의발명과더불어점차그위력을상실해가기 시작하였다.
드디어 1534년 10월 18일에는 소위‘플래카드 사건’(The Affair of the placards)이라고 부르는 프로테스탄 트들의 공개적인 저항이 일어났다. 즉 이날 일군의 프로테 스탄트들은“교황제하에서 실시되는 미사의 오용에 관한 조 항 ...”으로 시작되는 벽보들을 파리와 프랑스의 주요도시에 게제하고 신앙적 자유를 주장하였고, 프랑스의 천주교 옹호 정책을 비난하는 거사를 감행하였다. 이때 벽보는 암보아즈 (Amboise)에 있는 왕궁 안의 왕의 침실문 앞에까지 붙이는 기습적인 일이었다. 프랑스 왕 프란시스 1세는 이를 중시하여 프로테스탄트들에 대한 탄압을 구체화하였다. 특히 그는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탄압을 정책적으로 이용하였다.
그는 주교의 저택에서 벌어진 향연에서 천주교를 반대하는 해독을 철저히 제거하겠노라고 장담하기도 했다. 그는 그의 약속을 지키기라도 하듯이 수백 명의 프로테스탄트들을 수 색, 체포하였고 그중 35명을 화형에 처하기까지 하였다. 칼 빈의 친구 안티엔느(Etienne de la Forge)와 칼빈의 친형제 중하나는이때처형된것으로알려져있다.여기에그치지 않고 프란시스 1세는 교황 바울 3세(Paul III)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자기 영토내의 모든 이단을 섬멸하겠노라는 칙령을 발 표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프랑스의 정치적 변혁기에 칼빈은 파리를 떠나 순례자의 길을 떠났고, 스트라스부르크를 거쳐 1535년 1월 에는 바젤로 도피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프로테스탄트의 최 고의 저작이자 16세기 종교개혁 이래로 기독교회의 가장 중 요한 신학적 고전으로 불리는『기독교 강요』를 집필(1535년 8월)하고 출판하게 된다(1536년 3월).
이 책은 1535년 8월에 완성했으나 출판된 것은 이듬해 곧 1536년 3월이었다. 516쪽으로 구성된 이 책은 전 6장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첫 4장에서는 율법, 신경(信經), 주기도문, 성례를 취급하였고 마지막 두 장에서는 다소 논쟁적인 주제였던 천주교의 오도된 성례관을 비판하고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문제를 프로테스탄트 입장에서 요약하였다. 이 책이 프랑스 왕 프란시스 1세에게 헌정된 사실에서 암시되고 있 지만, 이 책은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간명하게 가르치려는 교 육적 의도와 더불어 프랑스의 박해받는 복음주의자들의 입 장을 옹호, 변증하려는 목적으로 썼다.
칼빈은 안전을 위해 스트라스부르그로 가고자 했으나 당시 합스브르그가(家)와 발로이스 간의 전쟁 때문에 스트라스부 르크로직행할수없었다.그래서칼빈은우선제네바로가 서 그곳을 경유하여 최종 목적지인 스트라스부르크로 가는 길을 택했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제네바의 개혁자로 이끌어 가는 계기가 되었다.
제네바의 개혁자는 파렐이었고 그는 다혈질적이고 목소리 가 우렁찬 정열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비록 공식적으로는 제네바시가 복음주의 신앙을 채택하도록 하였으나 신조나 신앙고백의 작성, 요리문답의 재정, 예배형식의 확립, 신앙 교육과훈련,교회조직등그가감당해야할일은산적해있 었다.이런상황에서칼빈의제네바정착을요구하게된것 이다.
제네바에서 칼빈과 개혁자들은‘제네바 교회의 조직과 예 배에 관한 조례’라는 문서를 작성하여 제네바 시의회에 제출 하였다.이문서는개혁의이념과개혁교회조직에관한기 본 이념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문서로서 매주일 예배 때마다 성찬식을 시행해야 한다는 것과 엄격한 치리를 강조하였는 데,이것은성찬의합당한시행과더불어신앙적삶을 지키기위한 동기를 지니고 있었다.또청소년들을위한신앙의 기본적 가르침에 대한 교육을 강조하였고, 예배시에 시편송 (詩篇頌)을 부를 것과 결혼법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특히 이 문서에서 주장한 성찬식의 매주일 진행과 권징권의 문제는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그래서 칼빈이나 파렐이 의도했 던바대로교회의조직과예배에관한규례의시행은순조롭 게 추진되지는 못했다. 결국 성찬식은 월 1회 시행하는 것으 로 타협이 이루어졌으나 출교(파문)권의 문제는 충돌의 원인 이되기도했다.그외에도칼빈은제네바신앙문답서를작 성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폈으나 시의회와의 마찰로 시의회 는 1538년 4월 23일 칼빈과 파렐의 제네바 추방을 결의하고 사흘안에그도시를떠날것을요구하였다.그래서칼빈과 파렐은 베른과 취리히를 거쳐 6월 초에는 바젤로 갔다. 칼빈 이 1536년 7월 제네바에 온 지 꼭 22개월만이었다.
제네바를 떠난 칼빈은 스트라스부르크로 가서 3년간(1538 -41) 체류하였다. 이 기간 동안의 칼빈의 삶과 목회, 연구 와저술은그자신의생애에실로커다란영향을주었다.이 기간 동안의 목회와 연구는 그의성경에대한해박한이해와 신학적 깊이를 더했고, 신앙적 성숙과 더불어 보다 원숙한 지도자적 능력을 개발할 수 있었다. 특히 스트라스부르크에 서부써등개혁자들과접촉함으로써그는많은것을배웠는 데, 예배와 교회론의 영역에서 더욱 그러했다. 이 기간 동안 의사역은프랑스망명객들을위한목회,성경연구와저술 활동, 다른 개혁자들과의 교제, 그리고 결혼이 중요한 일이 었다.
칼빈이 제네바를 떠나 있는 3년간 제네바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곳에서의 정치적인 변화, 사회적 혼란 과 무질서는 칼빈의 귀환을 요구하는 상황을 만들어가고 있 었다. 칼빈은 다시 돌아 올 마음이 없었으나 제네바로부터의 강력한 호소를 듣고 제네바로 귀환하였다. 칼빈이 스트라스 부르크를 떠나 제네바로의 여행을 시작한 날은 9월 1일이었 다. 칼빈은 뉘사뗄과 베른을 거쳐 1541년 9월 13일(화요일) 제네바에 도착하였다. 칼빈 자신은 일정기간, 곧 6개월 정도 만 머물 생각이었지만 이날로부터 무려 23년간, 곧 그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던 1564년까지 제네바에서 일하였던 것 은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특별한 경륜이었다.
제네바로 돌아온 칼빈은 교회규례(1541)를 작성하는 등 규정의 정비를 통해 교회 개혁 운동을 전개하고, 감독회와 권징을 시행하여 장로교 제도를 안착시켰다. 또 청소년 신 앙교육을 위한 규정을 만들고 제네바 아카데미를 설립하기도 했다.
1541년 칼빈이 제네바로 귀환한 이후 전개된 일련의 개혁운동은 많은 반대와 저항에 부딪치기도 했으나, 1555년 에는 엄격한 치리와 질서가 확립된 개혁이 이루어졌고 제 네바는 개혁과 개혁교회의 중심지로 변화되었다. 제네바는 특히그지리적위치때문에개혁운동의구심점이될수있 는 외적요인들을 지니고있었다. 즉 인접해있는여러나 라에서 종교적 박해를 피해온 피난민들이 모여 들었고 복음 적인 개혁 신앙의 본거지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1540년부 터 1564년까지 프랑스, 이탈리아, 화란 등지에서 거의 1천 명이나 되는 이국인들이 신앙의 자유를 선택하여 제네바로 모여들었다. 스코틀랜드의 위대한 개혁자이자 그곳에 장로 교회를 기초 놓았던 존 낙스(John Knox, 1513-1572)도 이 곳에이주해왔던사람중의하나였다.낙스는 제네바에 대해 말하기를 칼빈은‘사도시대 이래 지상에 결코 있어 본 일이 없는 가장 완전한 그리스도의 학교’를 만들었다고 평 가하였다(P. Schaff,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VIII, Grand Rapids: Eerdman, 1910, 518). 제네바는 유럽의 대 지(大地)에 개혁의 빛을 전파하는‘영적인 모국 ’(Spiritual motherland)의 역할을 감당하였다.
칼빈에게 있어서 건강은 그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힘겨운 도전자였다. 그는 모든 과업을 완성하고 1564년 5월 27일 토요일 55세를 일기로 베자의 품 안에서 운명하였다. 칼빈이 남긴 신학적 가르침인 개혁신앙은 개혁파교회를 통해 독일, 프랑스, 화란, 영국 등지로 확산되었다. 로마 가톨릭 신앙은 군사적힘이니정치적강압에의해세력을확장해갔고,영 방교회적 성격을 지닌 루터교도 정치적 힘에 의존하는 일이 빈번했으나, 개혁주의신앙은 그렇지 않았다.
개혁교회는 기독교신앙이 지닌 내적인 힘에 의해 구라파의 여러지역으로 확산되었다. 물론 17세기 화란의 경우 칼빈주의 신앙이 국교적 성격을 지니게 되지만, 초기에는 십자가 아래의 교회라는 이름으로 불리기까지 상당한 박해를 감내해야만 했다. 개혁 신앙이 상당한 탄압과 박해 하에서도 유럽의 여러 지역으로 확산되었던것은 아마도 이신앙체계가성경에기초한바른 신앙이라는 확신을 심어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개혁주의 신앙도 본래의 정신과는 달리 사변화 되거 나 추상화되기도 하고 스콜라주의의 경향을 보인 것도 사실 이지만,시대시대마다새로운도전앞에서그본래적신학과 신앙을 확인해 왔다.
칼빈주의란 칼빈의 사상 자체라기보다는 칼빈주의적신학이라고말하는것이적절할것이다.이말의의미는칼빈의 사상만이 아니라 개혁교회 신앙을 공유하는 칼빈과 동시대 의개혁자들,그리고그이후의성경적기독교신앙의요체 를발견하려는이들의신앙을통칭한다고말할수있다.어 떻든 칼빈은 쯔빙글리와 더불어 16세기적 상황에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이 무엇인가를 해명한 인물로서 중요성을 지닌다.
그렇다면 칼빈이 남긴 기여 혹은 공헌은 무엇일까? 이 점에 대해서 존 브랏은 성경중심주의(Biblicism), 장로교정 치제도(Presbyterian form of Government), 시민사회이론 (Theory of civil society), 도덕의 함양(Moralism), 그리고 신학적 체계(a system of Theology) 등 5가지로 정리하고 있 다(Bratt, The Rise and Development of Calvinism, 29-33). 그의 견해를 수용하면서 필자의 의견을 겸하여 칼빈의 개혁 활동이 남긴 기여에 대해 설명해 보고자 한다.
칼빈이 남긴 첫번째 공헌은 성경에 대한 강조였다.곧성 경 중심 사상이다. 칼빈은 성경에 근거하여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켰고, 성경의 권위와 충족성을 확신했다. 성경에 근 거하지 않는 교리나 전통은 거부했다. 그에게 있어서 성경 만이 신학의 유일한 원천이며 신앙과 삶의 표준이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교부들의문서나교회회의의결정사항, 교황의 칙령을 성경과 동일한 권위로 받아드리는 로마가톨 릭의 전통을 받아드릴 수 없었다. 이것이‘오직 성경’(sola scriptura)사상이다.
이와 쌍을 이루는 것이‘모든 성경’(tota scriptura)인데, 칼빈은 어느 특정 부분만이 아니라 66권의 성경에 나타난“하나님의 모든 뜻”(whole counsel of God, 행20:27)을 해명하고 복음의 풍요로움을 드러내고자 했다. 그는 성경만이 유일한 권위라는 사실을 말했을 뿐만 아니라, 성경에 대한 가감을 경계했다. 한 사람의 개혁자로서 그는 신·구약 성경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그 성경의 빛 가운 데서 그는 오직 하나님만이 율법을 초월해 계시고, 하나님은 피조된 실재에 대한 자신의 말씀에 신실하다는 사실을 인정 했다.칼빈은성경에대한의존사상때문에그의설교는주 해 설교(exegetical preaching)였고, 그의 주석은 이런 필요 를 위한 도구였다. 칼빈의 성경중심사상 때문에 칼빈주의는 루터주의보다 더 철저한 개혁을 단행했던 것이다.
칼빈의 두 번째 공헌은 장로교 정치제도(Presbyterian Form of Church Government)의 확립이었다. 이 점은 그의『기독 교 강요』에서와 제네바에서의 활동 속에 드러나 있다. 성경 에는 어떤 분명한 정치제도를 명시적으로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칼빈은 사도시대에 장로교적 교회 정치제도가 이미 시행되고 있었고, 그것이 가장 성경적인 제도라는 확신 을 갖게 되었다.
칼빈에게 있어서 교회 정치 문제는 두 가지 점에서 중요한 관심사였다. 첫째는 국가 혹은 국가 권력과의 관계에서 교회 의독립성을확보해야했고,둘째는교회내의질서를유지 하고 바른 교회 건설을 위해 필요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국가와 교회와의 관계를 바르게 정립하는 일은 칼빈의 중요 한관심사였다.국가나시의회등국가권력기구는교회문 제에 개입하고자 했고, 교회는 국가기관으로부터 독립성을 유지해야했기 때문이다. 그 단적인 예가 치리권(治理權)의 행사와 관련하여 제네바에서의 시의회와 칼빈과의 대립이었 다.3)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 정치제도는 중요한 관심사였다. 칼빈이 1541년 제네바에서 작성한 교회헌법(Ecclesiastical Ordinances)은 이런 관심의 반영이었다.
국가와 교회와의 관계에서 교회가 국가보다 우선하고 교회는 국가에 대한 지배권을 갖는다는 황제-교황주의(Caesar- Papism)도 옳지 않지만, 반대로 국가가 교회보다 우선한다 는 에라스티안주의(Erastianism)도 옳지 않다. 그렇다면 교 회와 국가는 어떤 관계여야 하는가? 로마 가톨릭은 교회의 세속 지배를 정당화하려 했고, 성공회는 왕이 교회의 수장임 을 인정했다. 루터교는 국가의 교회 간섭을 완전히 배제하지 못했기 때문에 영방(領邦)교회로 발전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칼빈은 어떤 정치제도가 성경에 가장 부합 되는 바른 제도인가에 대해 고심했다. 그는 결론적으로 국 가와교회는각각의고유한기능이있고,국가가교회문제 를 간섭하거나 교회가 국가의 기능을 대치해서는 안 된다 는 점을 인식하고 장로교제도(Presbyterianism)가 가장 성경 적인 정치제도이라는 사실을 확신했다. 비록 성경이 구체적 으로나 명시적으로 장로제를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사도행 전 15장의 할례 문제처리에서 개별 교회가 독단적으로 처리 하거나 어느 한 지도자가 독단적으로 결정하지 않고 예루살 렘 공의회를 소집하여 이 문제를 처리한 것을 보면‘예루살 렘 공의회’는 지금의‘노회’와 같은 기구라고 보았다. 또 디모데전서 4:14의“네가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은 것을 기억하라”에서 ‘장로의회’는지금의노회와같은제도로이해 했다. 그래서 칼빈은 사도시대의 교회는 비록‘장로제’혹은‘장로정치’라는 표현은 쓰지 않았으나 이미 장로제도가 시 행되고 있었다고 확신하였던 것이다. 칼빈의 감독회는 바로 이런 기구였다.
칼빈은 교회론, 예배론, 성찬론에 있어서 스트라스부르크 의 개혁자인 마르틴 부써(Martin Bucer)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장로교 정치제도도 예외가 아니다. 부써는 1538 년『참된 목회에 관하여』(Von der waren Seelsorge)를 출판 했는데, 이것은 장로교 체제를 수립하기 위한 수년간의 노력 의 결창이었다. 칼빈은 이 책으로부터 큰 도움을 입었고, 부써가 1536년에 출판했던『로마서 주석』은 칼빈의『기독교 강요』제2판(1539년 판)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장로교 정치원리는 그리스도의 주권아래서 모든 지체와 지 교회들이 누리는 평등성(equality), 국가기관으로부터 독립 하여 직분자들을 통해서 운영되는 자율성(autonomy), 지교 회의 대표들을 통해 연합하는 연합성(unity)으로 요약될 수 있는데, 이러한 정치제도는 칼빈이 남긴 공헌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권력과 독립하여 교회의 직분자에 의한 치리, 연합을통한교회의통일성,그리고개체목사와장로의평등 성은 장로제의 3대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4)
칼빈의 세번째 공헌은 기독교적 기치에 기초한 사회전반에 대한 개혁이었다. 칼빈은 교회의 개혁자였으나 그의 개 혁은교회내적인문제에만국한되지않았다.그의교회개 혁의 이상은 사회개혁으로 외연 되었고, 이것은 교회 개혁의 자연스런 결과였다.
사회변화에 있어서 루터보다 칼빈의 기여가 컸다. 루터는 근본적으로 보수주의자로서 사회 변화에 대해 역동적이지 못했다. 루터의 신학이 그리스도 중심적이라고 한다면, 칼빈 은 하나님 중심적(Theocentric)이었는데, 그의 신관은 인간 관사회관등신학전반에영향을주었다.이점에대해트릴 취(Emest Troeltsch, 1865-1923)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칼빈주의자들은“어느 곳에서나 사회 전체의 삶을 계획적으로 구축하고자하는노력과일종의‘기독교사회주의’에대한 시도가 있었다. ... 칼빈주의는 교회가 삶의 모든 부분에 관 심을 가져야 한다는 원칙을 세워 놓았고, 루터교처럼 종교적 인 요소와 비종교적인 요소를 분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로마 천주교처럼 몇몇 기관을 세워 두고 간접적으로 참여하는 방식을 취하지도 않았다.”
칼빈은 사회를 성속(聖俗) 이 원론에따라분리하지않았고,사회와그제도를불변의절 대적인 구조로 보지도 않았다.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 속에 모든제도,조직,직업,직위등질서를설정하였으며,이모 든 조직과 제도는 하나님의 통치하에서 그의 뜻을 성취하기 위한 예속된 수종자(servants)로 표현된다. 세상에서 절대적 인것은 하나님의 말씀외에는 아무것도없다.사회를절대 불변의 구조로 보지 않는다는 말은 사회는 타락했고, 타락할 수있다는인식에바탕을두고있다.그래서그사회는개혁 될수있다는점도암시한다.
칼빈은 제네바시를 성경에 부합하는 도시로 만들려는 성경 적 정치(Biblocracy)에 대한 이상을 지니고 있었고, 이런 이 상을 실현하기 위해 치리와 질서를 강조하였다(이상규『, 교 회개혁사』, 서울: 성광문화사, 2002, 171-2). 그가 주 1회 성찬식의 시행을 주장하고 권징을 강조했던 것은 도덕과 윤리적삶을고양함으로성화의삶을살게하기위한것이었 고, 궁극적으로는 사회개혁을 위한 것이었다. 칼빈이 구빈 원을 설치하고, 결혼법을 제정하는 등의 일은 기독교적 기치 를 근거로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동기에서 출발했다. 몽 테르는“제네바 역사에 있어서 모든 길은 결국 칼빈에게로 통한다 ”(William Monter, Studies in Genevan Government, 1536-1605, Geneva: Droz, 1964, 118)고 했는데, 이것은 사 회 전반에 대한 칼빈의 영향력을 지적하고 있다.
칼빈의 네번째 공헌은 도덕의 함양,윤리적 생활을 통해 기독교적 삶을 강조한 것이다.참된의와경건은칼빈 이 추구한 목표였다(Bratt, The Rise and Development of Calvinism, 31). 그렇다고 해서 그가 청교도적 엄격성이나 율 법주의적 준수를 이상으로 여긴 것은 아니다. 칼빈에게 있어 서지속적인윤리적행위에의해드러나는경건한삶은구원 받은 자의 생활 속에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결과였다. 동시에 그것은 하나님의 값없이 주신 구원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칼빈이 경건한 삶을 그처럼 강조했던 것은 도덕적이지 못 하고 윤리적이지 못한 제네바의 사회상에 대한 반응이었다. 프레드 그레이엄(Fred Graham)은“칼빈의 제네바는 그 시 대의모든문제를안고있던도시”라고말했을정도로다양 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W. Fred Graham, The Constructive Revolutionary: John Calvin and His Socio-Economic Impact, Atlanta: John Knox, 1971, 157). 암울한 중세 말기 에 회자되던“성직자의 삶은 평신도의 복음이다(Vita clerici
est evangelium laice)”는 말은 당시에도 여전히 유효했다. 중세 로마가톨릭의 문제는 교리적인 타락과 함께 성직자들 의 윤리적인 부패였다. 역으로 말하면 진정한 교회개혁은 교 리적 개혁(Reform)과 함께 윤리적 각성(Revival)이 있어야 했다. 루터파는 로마가톨릭 성직자들의 도덕적 타락을 비판 하면서,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로마가톨릭 성직자들이 존경 받지 못했음을 지적하면서도 루터교회는 도덕적 변화나 윤 리적 삶을 강조하지 못했다. 실제로 루터의 제자들, 특히 평 신도 가운데서 윤리적이지 못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Bratt,The Rise and Development of Calvinism, 31). 대표적인 한 사람이 루터의 든든한 후원자로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헤세의 필립(Philip of Hesse)이었다. 루터와 그의 동료 개혁 자들은 그가 중혼(重婚)을 하도록 허용하여 방종한 삶을 살 도록 묵인해 주었다.
그러나 칼빈은 이런 점에 있어서 분명했다. 그는 엄격한 치 리를 강조하고 이를 실행했다. 이런 그의 원칙이 제2차 제네 바 사역기 첫 10년간을 어렵게 만들었던 요인이었다. 윌리엄 에스텝(William Estep)이 지적한 바처럼 첫 10년간의‘고투의 기간’은 엄격한 치리의 실행이 빚은 도덕적삶을위한불 가피한 인고였다.
사실 제네바에서의 개혁 추진에는 정치적인 동기가 없지 않았고, 도덕적 상태는 심각했다. 존 브랏에 의하면 파렐은 공권력을 발휘해서라도 시민들의 도덕성을 고양하려고 생각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가 효과적이지 못했고, 개선의 징조가 보이지않게되어 칼빈의제네바정착을강력히 요구했고, 이러한 상태를 타개해 주도록 요청했다고 한다 (Bratt, The Rise and Development of Calvinism, 32).
사실 칼빈은 로마가톨릭 신자들은 물론 루터교 추종자들, 그리고 시민들의 도덕성이 크게 결여되어 있음을 발견하고 경건한삶에대해강조했던것이다.그에게있어서죄라는것은어떤것에대한결핍이아니며,은혜에대한반대개념도아니 라하나님과우리인생을향하신그의거룩한뜻에대한반 역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인간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 의택함받은자로서성령충만한삶을살며,그리스도중심 적인삶을살아야하는또다른책임에대해주의를환기시 켰다. 그에게 있어서 경건한 삶에의 요구는 구원받은 성도 들의 당연한 삶의 방식이었다. 그런 점에서 칼빈은 성화의 신학자였다.
칼빈의 개혁활동이 가져온 다섯 번째 공헌은 신학적 체계, 곧 개혁신학의 확립이었다.
엄밀하게 말해서 칼빈은 신학자 (a theologian)이기에 앞서 개혁자(a reformer)로 살았다. 공 식적으로 말하면 그는 신학이 아니라 법률학 훈련을 받았고, 젊은 시절 망명객이 되었으며, 동료 망명 인사들을 도우며, 교회를 개혁하기 위해 제네바와 스트라스부르크를 왕래했 다. 광범위한 서신 교환을 통해 그는 영국, 스코틀랜드, 폴란 드, 헝가리, 프랑스 그리고 네델란드의 다른 개혁자들을 격 려하기도 했다.5) 이런 그의 활동을 통해 자연스럽게 개혁신 학의 체계를 수립했다. 그의 개혁신학은 근본적으로 어거스 틴 신학의 재진술이었다. 그가 어거스틴과 의견을 달리했던 것은제도화된교회의권위에대한견해였다.그는오직성 경의 가르침을 천착하려고 힘썼고, 그의 신학의 중심 주제인 하나님의 주권, 믿음에 의한 구원, 예정론 등은 자신의 사색 의 결론이 아니라 성경의 사상이었다. 그는 사제주의, 루터 주의, 아르미니안주의와 구별되는 개혁신학을 확립했다. 이 것은 그가 남긴 가장 큰 공헌이었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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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가‘개혁주의’라고 말할 때, 개혁(Reform) 혹은 개혁된(Reformed) 이란 말은 있으나 개혁‘주의’라는 용어는 영어나 독일어 혹은 화란어에는 없다. 우리가 말하는 개혁주의를 영어로는 그냥‘Reformed’로, 독일어에 서는‘Reformiert’로, 화란어에서는‘Gereformeerd’로 쓰고 있어‘개혁된’이라는 형용사만 있을 뿐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에서‘개혁주의’라는 용어가 널리 사용되고 있는 것은 아마도 중국의 영향인 것으 로 보인다. 원래‘리폼드’(Reformed)라는 말은‘개혁신앙’(the Reformed Faith) 또는‘개혁신학’(the Reformed Theology) 등과 같이 특정한 신앙 과 신학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는데, 중국인들이 리폼드(Reformed) 를‘개혁주의’(改革主義)라고 번역하였기 때문에 우리도 이 용어를 쓰게 된 것으로 보인다.
2) 예정론이 칼빈사상의 중심 교리라는 주장은 1844년 알렉산더 슈바이쳐 (Alexander Schweitzer)와 1848년 프레드리히 바우어(F. C. Baur)가 주 장한 이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아왔으나 이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상존한 다. 리츨(A. Ritschl)은 예정론이 칼빈의 중심 사상이라고 보지 않았던 19 세기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반면에 두메르그(Doumergue)는 3가지 교의, 곧 섭리, 의지의 속박, 예정론이 개혁신학의 특징이라고 주장한다. 예정론 에 대한 상반된 견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Francois Wendel, Calvin: The Origin and Development of His Religious Thought (NewYork: Harper & Row, 1963), 255-84를 참고할 것. 독일의 개신교신학자 니젤(Wilhelm Niesel)은 예정론은 칼빈 사상의 핵심 교리로 볼 수 없다는 점을 지적 했다. 빌헬름 니젤『, 칼빈의 신학』(Die Theologie Calvins), 이종성 역 (서울: 대 한기독교서회, 1979), 159.
3) 권징에 있어서 특히 출교권(黜敎權)의 문제로 칼빈과 시의회는 첨예하게 대 립하였다. 이 문제로 제네바 시의회는 1538년 4월 칼빈과 파렐의 추방을 결의하기까지 했다. 취리히의 개혁자인 쯔빙글리(Zwingli, 1484-1531)는 출교권이교회에있지않고정부,곧시의회에있다고보았다.그의후계 자인 불링거(Heinrich Bullinger, 1504-1574)도 출교권은 통치자에게 있 다고보아취리히교회는정부의통제하에있었다.그러나칼빈은권징권 은 교회에 속하며, 교회의 고유한 과업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부써(Martin Bucer, 1491-1551)로부터 온 것이었다. 그는 도덕적인 권 징(moral discipline)을 교회의 고유한 업무로 간주하였고, 가장 중한 권징 인 출교는 정부가 아닌 교회가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부써는 이미 1527년에 출판한『마태복음 주석』에서 교회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주신 과업을 감당하려면 정부의 간섭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한바 있다.
4) 흔히 장로제의 제3의 특징이라고 일컬어지는‘평등성’은 1646년 12월에 발행된『교회정치의 신적 제정』(Jus Divinum Regiminis Ecclesiastici)에 서는 언급이 없다. 도리어 그것은 스코틀랜드의 맥퍼슨과 미국의 찰스 핫 지가 주창했다. 회중정치는 계층구조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교회정치 형태 로서 지역교회의 자율성 (곧 목사의 청빙, 예산의 집행, 치리의 자율적 집 행등)과,교회와교회사이,목사와목사사이의평등을강조하며,어떤형 식의 계층구조도 반대한다. 이들은 교회연합이 계층구조를 취할 수 있다고 보아 교회연합을 반대하고 개 교회주의를 취한다. 그러나 장로교 정치는 회중교회의 자율성과 평등성을 수용하면서도 모든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 라는 사실 때문에 연합해야 한다고 믿고, 치리회로서 당회, 노회 그리고 총 회를 갖는다. 이것이 회중교회 제도와 다른 점이다.
5) Selected Works of John Calvin: Tracts and Letters, edited by Henry Beveridge and Jules Bonnet, Vols 4-7: Part I (1528-1545) and Part 2 (1545-1553), translated by David Constable; Part 3 (1554-1558) and Part 4 (1559-1564), translated by Marcus Robert Gilchrist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83)을 참고할 것.
6)이런 성취에도 불구하고 칼빈에게도 그 시대적 한계가 없지 않았다. 미 국 도르트대학의 John vander Stelt는“칼빈은 아리스토텔레스적 철학, 아퀴나스적 중세 실재론, 오캄적인 유명론, 고대 지향적인(antiquity- oriented) 후기 인문주의, 인간중심적인 르네상스, 신령주의적 재세례파, 루터적인 복음과 율법의 대비, 그리고 개혁파 정통주의에 대해서는 동의하 지 않았다.”그러나 개혁자로서 칼빈의 사역에도 한계는 있었다고 말하면 서,“그도 여전히 그 시대와 전통의 아들이었다. 많은 문제시되던 견해들이 자신이 발견한 새로운 통찰력에 대한 일관된 적용을 방해하기도 했다. 예 컨대, 타락을 인간의 지적인 것(intellect)보다는 의지(will)와 관련시키고, 영혼과 육체를 두 본질로 생각하고, 육체를 영혼의 감옥으로 말하고, 그리 고 그의 인간론에서 헬라적 영혼의 3분관(tripartite view of the soul)과 함께 헬라적“기능심리학”(faculty psychology)을 사용하고, 인간의 감성 (sense), 이성(reason), 상상력(imagination), 그리고 지성(intellect)을 계 층적으로 배열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의 어떤 정신적 본질에 관련시키 고, 요한복음1:4~5, 9에 대한 미심쩍은 이해로 그리스도를 보고, 자연과 초자연적 계시와 창조에 있어서, 중보자로서 로고스와 구원에 있어서 중보 자로서 그리스도, 그리고 비기독교문화에 대한 가치에 대하여 진부한 중세 적 개념을 허용하는 등 그의 신플라톤적인 경향에 분명히 나타난다”고 지 적하고 있다. John vander Stelt, "Theological Education in the 16th Century Reformers and Subsequent Reformed Tradition,『" 한상동목사 와 신학교육』(부산: 고신대학교, 2000), 74, 109.
이상규(고신대학교, 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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