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성옥터 → 영광순교자기념성당 → 고창개갑장터순교성지 → 김제순교성지
95Km 18Km 78Km
5. 영광 순교자 기념 성당
1801년 신유박해 직전 영광 지역 신자로 붙잡혀 처벌을 받은 신자들로
이우집, 이종집, 오씨, 이화백, 윤종백, 남조이와 그녀의 남편 김득겸 등 7명이 있다.
이 가운데 이화백과 복산리의 양반 오씨만이 신유박해 때 영광에서 순교하였고,
김치명과 유문보는 병인박해 때 공주와 나주에서 각각 순교하였으며,
배교자 이우집은 신유박해 때 전주에서 처형당했다.
영광성당은 영광 출신 이화백과 양반 오씨(성명 미상)가
신유박해 때 영광에서 순교한 것을 기리고자
2010년 순교자 기념 성당으로 지정되었다.
순교자 기념문은 영광 순교 성지의 상징으로 네 개의 칼 모양의 기둥은
영광의 순교자 4인(이화백, 복산리 오씨, 김치명, 유문보)을 의미한다.
네 개의 기둥이 서 있는 모습은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배의 돛과
죽은 자를 슬퍼하고 기리는 만장의 이미지로 순교를 말한다.
가로보의 가운데 올려져 있는 칼 형태의 십자 순교자상은
조선시대 죄인의 목에 씌우는 칼과 십자가를 조합한 형상으로
영광 순교자들을 상징한다.
전라도는 한국 천주교회 창설 직후에
전주의 유항검(柳恒儉, 1756∼1801, 아우구스티노)과
진산의 윤지충(尹持忠, 바오로, 1759∼1791)이 천주교를 받아들여
신앙공동체를 형성한 뒤 전라도 각지로 복음을 전파 시켜나갔다.
영광에는 유항검 집안과의 인척 관계를 통해서 복음이 전해졌다.
영광의 월산리는 유항검의 이복동생 유관검의 사촌형의 처가가 있던 곳인데
유관검은 사촌형의 처남인 월산리에 사는 이우집(李宇集) 등에게 복음을 전파하였다.
유항검의 사돈인 영광 사람 이종집(李宗集)도
유관검을 통해서 입교한 것으로 보여진다.
또한 1801년 신유박해때 영광에서 참수형을 당한 양반 오씨도
그의 거주지가 이우집이 살던 월산리에서 가까운
복산(현 장성군 삼계면 부성리 복산마을)이었던 것으로 보아
유관검을 통해 입교한 이우집·이종집 등의 전교로 입교한 것으로 믿어진다.
윤지헌이 사는 고산 저구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집을 출입하며
천주교 교리를 배웠는데 그 사람들 가운데는 고산의 김방통(金方通)·안무산安茂山),
진산의 목서중(睦序中)·박춘지(朴春之), 금산의 김종우(金宗祐)·박맹손(朴孟孫),
강진의 윤제현(尹濟賢) 등과 더불어 영광의 윤종백(尹宗白)이 포함되어 있었다.
고창 개갑 사람 순교자 최여겸은
영광과 이웃 고을인 무장현 동음치면 개갑(현 고창군 공음면 갑촌) 사람으로
무장과 이웃 고을의 사람들을 대거 입교시켰는데
그들 가운데 28명이 신유박해 때 붙잡혔다
그 가운데는 무장에사는 조카 최수천(崔壽千), 금노라고 부르는 조카 최일안,
함평의 남중만(南重萬), 흥덕의 김처당(金處當) 등과 더불어
영광 고을 양반 이화백이 포함되어 있다.
신유박해 직전의 영광 지역 신자들의 숫자는 7명보다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신유박해 때 신문 과정에서 드러난 영광 지역 신자들의 수가 7명으로
전라도에서 세 번째로 많았고 또한 처벌된 신자들의 수도 처형된 자 3명과
유배된 자 2명을 합쳐 모두 5명으로 역시 전라도에서 세 번째로 많았다.
이것은 당시 영광 지역의 교세가 전라도에서 세 번째로 컸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렇기에 유관검이 주문모 신부의 은닉처로 영광 지역 신앙 공동체를 고려했을 것이다.
2백년 전 신앙의 자유를 억압당하는 침울한 시대상황 속에서
주위의 냉대와 박해의 고통을 감내하며 오직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께 의탁하는
영광순교자들의 끈질긴 믿음을 대지의 흙덩어리로 형상화 하였다.
작품의 주제는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마태6,10)이다.
영광의 순교자 네 분(이화백, 오씨 양반, 김치명, 유문보 바오로)을
다양한 십자가를 넣어 비석 형태로 모시고 그 중심에는 영광순교자들에게 바치는
이해인 수녀의 기도시(주제: 핏빛 사랑으로)가 시비에 새겨져있다.
6. 고창 개갑 장터 순교 성지
고창 개갑 장터는 신유박해 때 고창 최초의 천주교 순교자
최여겸(崔汝謙, 1763~1801, 마티아)이 처형된 장소다.
최여겸은 충청도 사도인 이존창에게서 교리를 배우고 영세를 받은 후
고향에서 열렬히 전교하여 그가 입교시킨 사람은 기록상에만 28명이 되며
전라도교회의 중요한 지도자 중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였다.
전주교구의 초대 교회사에서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노, 1756~1801)은 무척 유명하다.
그러나 그의 그늘에 가려 있는 훌륭한 사도는 최여겸이다.
구전에 의하면 무장현에는 호남의 토호 유항검 소유의 토지가 많았고
이를 마름 두 사람이 관리하였다고 한다.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그들은 무장 옥사에서 치명하였다고 한다.
이는 초대 고창 본당 신부였던 김 아오스딩 신부가
마름의 후손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김진소 신부에게 전한 이야기다.
당시 전라도 무장현 동음치면의 개갑 장터는,
전국에서 유명한 우시장이었다.
최여겸 마티아는 박해가 일어나자 처가가 있는
충청도 내포 남쪽 한산으로 피신했다가 1801년 4월 13일
한산 관아에서 체포되어 무장, 전주, 서울 형조를 거쳐
‘해읍정법’에 따라 고향 개갑 장터로 이송되어
8월 27일(음 7월 19일) 39세의 나이로 참수 당했다.
최여겸은 충청도 한산으로 장가를 들었는데
여기서 충청도 사도인 이존창(李存昌, 1759~1801, 루도비코 곤자가)을 만나
그에게서 교리를 배우고 영세를 받아 고향에 돌아왔다.
최여겸은 고향에서 열렬히 전교하여
그가 입교시킨 사람은 기록상에만 28명이 된다.
무장에 사는 조카 최수천, 최일안, 함평의 남중만, 흥덕의 김처당,
영광의 이화백 등 많은 사람을 입교시켜
전라도 교회의 중요한 지도자 중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였다.
《순조실록》 순조 1년 7월 13일 정해조에 보면
“호남의 한정흠(韓正欽, 1756~1801, 스타니슬라오), 최여겸,
노복 천애(金千愛, 1760~1801, 안드레아) 등은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하여
그릇된 방면으로 사람들을 인도하고, 천주를 독실하게 믿으며
교리를 따라붙어 익혀서 십계명을 버리기 곤란해 하고
죽음을 달갑게 받는다고 말하고 있으니 아울러 다시 자백을 받은 뒤
전주 감영으로 압송하여 각각 그 고을에서 사형에 처하소서.”라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최여겸 등 세 사람은 참수 치명한 것이다.
무장 고을과 법성 포구를 연결하는 중간 지점에 위치한
개갑 장터(현재 고창군 공음면 석교리 갑촌)는 조선 시대 각종 산물의 집산지이자
매우 번창했던 장터로 한일합방 후 구한말 의병들의 보급소와
연락처로 활용되면서 일본인들의 미움을 사
물산의 중앙집산지가 아니라는 이유로 폐쇄되었다.
일명 개개비 장터라 불리는 지금의 면소재지에서 서북간 700m 거리에 있다.
◆ 개갑 장터 이야기
조선조 때 이 개갑[개가리(凱歌里)] 장터가 서게된 유래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공음면의 대종을 이루는 성씨는 전주 최씨와 안동 김씨이다.
두 성이 이곳에 정착한 것은 그들의 선조가 임진왜란 때 피난차 머문데서 연유된다.
그중 안동 김씨에는 김질(호 영모당)이라는 효자가 있었다.
진사로서 1496년(연산2년)에 동음치면 개가리(개갑)(현 공음면 석교리)에서
출생한 분으로 효성이 남달리 지극하여 부모상과 조부모상과
조부모 승중상(承重喪)등 도합 12년간을 시묘살이로 일관한 사람이다.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생전에 꿩 고기를 몹시 좋아 하셨기에
그는 매년 12월 제사 날에는 짚신을 삼아 그곳에서 8km나 되는
안장 머리장(안자시장[鞍子市場], 현 해리시장[海里市場])에 가서
짚신을 팔아 꿩을 사서 제물로 쓰곤 하였다.
어느 해 눈이 많이 내려 시장이 서지 않아 제물을 구할 수가 없어서
크게 걱정하면서 그는 그의 불효로 인하여
하늘이 내린 벌로 알고 제사 날을 맞이했다.
그런데 눈이 많이 내린 그날 석양 무렵에
갑자기 꿩 한 마리가 부엌으로 날아 들어와 벽에 부딛쳐 죽어 있었다.
김질은 그 꿩으로 제물을 삼아 제사를 고이 모셨다.
그 다음 해에도 짚신을 등에 지고 눈 길을 헤쳐 제물을 구하기 위하여
안장 머리장에 가는 도중 때마침 무장 원님께서 그 곳을 행차하다가
그의 모습을 보고 이 추운 날씨에 무엇 하러 가는 사람이냐고 물어 보았다.
자초 지종을 듣고 난 원님은 김질의 효성이 지극함을 극찬하고는
그를 위하여 개가리에 저자(시장)를 세워 주게 되어
평생토록 눈 길에 장을 보러 가는 고생을 덜게 되었다.
그 뒤로 퍽 번성해 오던 개가리 시장은 한일 합방 후
구한말의 의병활동을 위한 보급소와 연락처로 낙인이 찍혀
왜인들이 물산의 중앙 집산지가 못 된다는 이유를 내세워
끝내 없애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지금은 장터의 흔적조차 없이 그 이름만 전해오고 있다.
개갑장이 세워진 200년전만 해도 100호가 살았고,
1925년 경만해도 10여 호가 있었다고 한다.
개갑장은 전국에서 유명한 우시장으로 소장달인 7월에는 장관이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강석진 요셉 신부를 만났습니다.
신부님은 성지를 관리하고 계십니다.
부모님은 제주 신창성당에 매일 미사에 참례하시는데
얼마전 어머니가 편찮으셔서 부산 딸 집에서 치료받으시고
아버지 혼자 계셨는데 어머니가 한 달만에 돌아오셨습니다.
강석진 요셉 신부는 최여겸 마티아의 삶과 개갑장터 성지의 영성에 대해
무시, 모욕, 천대를 견디는 십자가의 영성이라고 순교자의 길을 글로 남겼습니다.
‘시끌벅적 새벽부터 사람들이 개갑 장으로 몰려오던 날,
농악대 소리가 시장 입구부터 요란하다,
그 사내의 저고리는 찢겨져 있고 목에 걸린 명패에는 죄목이 적혀있습니다.
사학죄인(邪學罪人), 등에는 큰 북이 얹혀있고
포졸은 미친 듯이 북을 두드려 댑니다.
북소리와 포졸들의 행렬에 맞추어 지친 그 사내는
개갑장을 한 바퀴 또 한 바퀴 돌고 장터에 있던 행인들은
수치심이 뼈 속까지 저려오는 그 사내를 바라 봅니다
사형집행을 알리는 소리와 사형판결문이 낭독되고
그 사내의 이름이 적막을 부숩니다.
최여겸. 사내는 혀로도 말이 없고 눈으로도 말이 없지만
그토록 보고 싶은 늙으신 어머니를 뵙지 못해
이승에서 마지막 절을 드리지 못한 아쉬움 뿐,
하늘 그분께만 자신을 맡긴 채 사형판결문을 들고 있습니다.
손을 뒤로 묶은 채 무릎을 꿇리며 목 앞부분에 나무토막을 대자
최여겸은 몸을 굽혀 땅을 바라봅니다.
오직 천국 본향만을 그리워한 채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
그 순교의 길을 따라갔습니다'
어린 예수님을 업고 있는 성모님의 모습 속에
복자 최여겸(마티아)의 마음을 담았다.
그는 순교 직전 늙으신 어머니를 간절히 보고 싶어 했으나
박해 당국자에게 거절당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 최여겸은 어머니를 만나,
그녀의 등에 업혀 새근새근 잠들어 있다.
7. 김제 순교 성지
전라북도 김제시에 있는 김제 동헌은
하느님의 종 한정흠(韓正欽, 1756~1801, 스타니슬라오)이
1801년 신유박해 때 45세를 일기로 참수 치명한 순교의 터전이다.
호남의 사도 유항검 자녀들의 스승으로
김제에서 태어나 형조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와 순교하였다.
김천애, 최여겸과 함께 한양으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았다.
한정흠은 전라도 김제의 가난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훗날 전주에 살던 먼 친척인 유항검(柳恒儉, 1756~1801, 아우구스티노)의
집으로 가서 그 자녀들의 스승이 되었다.
그가 천주교 신앙을 알게 된 것도 바로 유항검 때문이었다.
유항검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하게 된 한정흠은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제사도 지내지 않았다.
그리고 훗날 주문모(周文謨, 1752~1801, 야고보) 신부가
전주를 방문하였을 때 그에게서 성사를 받기도 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어
그는 유항검과 함께 그해 3월에 체포되었다.
전주 감영으로 끌려간 그는 여러 차례 혹독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조금도 여기에 굴복하지 않았다.
이곳에서 그는 열심한 신자 김천애(金千愛, 1760~1801, 안드레아)와
최여겸(崔汝謙, 1763~1801, 마티아)을 동료로 맞이하게 되었다.
한정흠과 동료들은 그 후 한양으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았지만,
그들의 신앙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형조에서는 1801년 8월 21일 그들에게 사형을 선고함과 동시에
각각 고향으로 보내 처형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따라 한정흠은 고향인 김제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며칠 후 그곳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01년 8월 26일(음력 7월 18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오늘 2일차 순례여정을 마쳤다.
오늘 숙소는 김제에 있는 지평선모텔(온돌 45,000원)이다.
모텔에서 제주 마트에서 구입한 아귀구이를 안주삼아 맥주 2캔 마시면서
내일 묵을 숙소를 찾아보았다.
전주 나비잠한옥호텔에 문의했으나 만실로 방이 없었다.
금요일로 주말이기도 하지만, 인기가 있어 1주일 분이 마감된 상태다.
서둘러 다른 곳을 알아보았지만 쉽지않았고
겨우 조금 비싼 호텔(130,000원)을 잡을 수 있었다.
매일 순례장소를 이동하며 숙식을 하는 것이 42년 전 신혼여행 생각이 난다.
당시에는 설악산 - 도고 - 직지사 - 부여 - 남원 - 전주 - 광주 - 부산으로 다니며
주로 시외버스를 이용한 것 같아.
아내가 떠준 커플 털모자와 목도리를 하고 오징어,땅콩을 먹으면서
추운 겨울날씨에도 즐거웠던 기억이 있다.
오늘 복음을 읽으니 '잃어버린 동전 이야기' 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은 목자처럼, 또 잃어버린 은전 한 닢을
도로 찾은 어느 부인처럼 죄인의 회개를 가장 큰 기쁨으로 삼으신다는 것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을 때, 이른 새벽 레온을 나오면서 있었던 이야기도 생각난다.
레온시를 벗어나려는 곳에서 누가 차 한잔 하고 가라고,
무료라고 한국말로 이야기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았지만 보니 한국인 2명.
외국인들은 그냥 지나쳤지만 난 멈추어 담소
남편은 시각장애인인데 까미노 순례길을 꼭 오고 싶어 해,
전 코스를 걷지는 못하고 주요지점에서 봉사한다고.
이곳에서 며칠 더하다 산티아고에 가서 하고, 바르셀로나를 거쳐 귀국할 예정이라 함
따뜻한 믹스커피를 오랫만에 마시고 곱은 손을 비비며 감사인사 전하자
남편이 하모니카로 '일어나 걸어라' 연주
사진찍고 작별인사.
10여분 걷자 외국인 한명(조금 전 나에게 길 물어본 사람),
내가 커피 마시는 동안 추월해 앞장섰던 분이
길을 되돌아 오며 양말 한 짝(예쁘고 알록달록 색깔있는 -
누가 선물 아니면 떠준 것 같이 소중한 것)을 들고
다른 한 짝 못 봤느냐며 만나는 사람마다 물어오고 있음.
나 같으면 한 짝 포기했을 텐데...
나에게 묻길래 모른다고 하자 포기한 듯 돌아서 내 뒤를 따라옴.
2~3분 걷자 앞에서 환호성
가보니 양말 한 짝이 전봇대에 튀어나온 부분에 걸려있는 게 아닌가.
아마도 발견한 사람이 주인이 찾을 때 찾기 좋도록 걸어놓은 듯
6~7명이 잠시 멈춰 환호와 함께 축하해줌
성경에 잃어버린 동전 하나 찾았을 때의 기쁨을 느낌.
정말 작은 일에도 서로 축하해주는 사랑의 까미노
첫댓글
감사합니다.
컴퓨터 마우스 작동이 안되어 글 작성에 어려움이 있고,
어제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아 격리 중입니다.
2차 여행 준비중인데 걱정이 되지만 잘 되리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