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중종과 조광조 ㅡ3 완결편
@읽기전에...
중종과 조광조의 당시 상황을 잠깐 설명하겠습니다.
앞의 글을 읽으신 분들은 패쓰~~
중종은 성종의 아들.
연산군이 중종의 이복 형.
중종은 연산군 시절 목숨이 위태로웠으나 어머니 정현왕후(이후 자순대비)의 보호와 특유의 조심성으로 연산군의 폭정을 피해 살아남았음....
이후 연산군의 폭정이 계속 심해지자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등의 연합으로 마침내 반역(반정)이 일어남.
1506년의 중종 반정 임.
저들의 추대로 하루아침에 진성대군에서 11대 임금으로 등극 함(죽은 후 묘호가 중종이 됨)
반정공신들의 위세에 전전긍긍, 힘겨운 세월을 보내다 저들이 자연사 하자 자신의 정치를 꿈 꿈.
이때(1515) 만난 이가 정암 조광조와 신진 사림 세력들임.
이때부터 약 4년간 정신없는(?) 개혁이 진행 됨.
그러나 너무 빠른 개혁으로 피로감이 쌓임.
사방에서 반발이 일어나고 중종도 지치기 시작함.
이로인해 1519년 마침내 기묘사화라 불리는 참사가 일어나 조광조등 개혁세력이 대부분 죽거나 유배에 처해짐.
이후 조선의 개혁은 물건너 가고 다시 퇴보하고 구습을 답습함.
중종은 38년을 왕좌에 있었으나 이후 이렇다할 업적이 없는 어리석은 임금(혼군昏君)으로 평가 받음.
이글은 오래전 조광조의 입장에서 기묘사화 당시의 입장을 쓴 글에 대한 중종의 입장을 그린 글입니다.
저는 역사를 이렇게 입장에 따라 1인칭화 시켜서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화시켜 보는 작업을 해보고 있습니다.
보는 분에 따라 입장이 다를수 있겠은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광조여, 광조여, 아, 정암이여...3
ㅡ중종의 입장에서 본 조광조 ㅡ
위훈삭제.
오늘의 나를 있게한 훈장이자 정통성의 결여가 드러나는 아픈 상처다.
그대들도 알다싶이 내가 왕이 되고 싶어 되었느냐.
저들 훈구 공신들이 연산을 몰아내지 않았다면 내가 어찌 이 자리에 있을수 있겠느냐.
용상에 앉은 이후에도 정국은 불안하여 한동안 사방에서 반역의 기운이 있었다.
또한 유래없는 자연재해로 조선은 혼란스럽기 그지 없었다.
거기에 근자엔 또 얼마나 큰 지진이 있었더냐.
이 어지러운 시국에 나를 용상에 앉힌 저들의 공을 다시 평가해 훈작을 뺏으라니,
이는 나로서는 선뜻 택하기 어려운 일이다.
다시 혼란속으로 되돌리는 일일지니.
물론 나도 안다.
저들 중엔 공도 없이 줄을 잘 대서 공신이 된 이도 있음을.
이미 반정이 성공한 직후부터도 잘못된 공신 책록으로 다시 평가해야 한다는 주장이 많이 있어 왔다.
그대들이 처음이 아니다.
그들은 몇번 간하다 내가 그 건은 더이상 거론치 않고 싶다는 것을 알자 유야무야 철회하곤 했다.
아직 당사자가 살아있는 일을 나는 다시 논하고 싶지 않았다.
또한 논해봐야 나로서는 득 될 것도 없고 결정권도 없었다.
그들의 훈작을 논하자면 나의 공도 논해야 마땅한 일 아니겠는가.
내 묻겠다.
그날, 반정이 있던 날 나의 공이 있었는가?
나는 반정군이 집 앞에 이르렀을 때 연산이 보낸 군사인줄 알고 두려움에 목을 매려했다.
이런 내가 저들의 훈작을 어찌 묻겠느냐.
뜻은 알겠으나 위훈삭제는 그대들이 양보했어야 했다.
아니 최소한 한 발 양보해 훗날을 도모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대들은 한번 세운 주장을 꺾지 않았다.
무려 보름여를 나를 압박해 결국은 그 뜻을 이루었다.
나는 큰 상처를 입었다.
그대들은 그걸 보지 못했다.
아니 아예 보려고조차 않았다.
결국 117명의 공신들 중 무려 76명의 훈작을 철회해야 했다.
잘잘못을 떠나 하루 아침에 날벼락을 맞은 저들의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미구에 닥쳐올 저들의 반발도 무서웠다.
어차피 연산을 몰아내고 나를 임금으로 앉혔던 세력이다.
무슨 일인들 도모하지 못하랴.
그대들에게 나는 누구인가?
임금인가?
가르쳐 그대들의 세상을 여는 수단인가?
그대들이 공부한 공자께서도
"세번 간해서 듣지 않으면 물러난다."
라고 했거늘
그대들은 어찌 타협이나 양보와는 담을 쌓았는가.
정치란 모름지기 다름을 기반으로 합의점을 찾아야 하는게 아니던가.
저들 훈구세력들이 없으면 오늘까지 그대들의 목숨이 붙어 있으리라 다짐할수 있겠는가.
연산이 사림들을 얼마나 미워했는가.
그대들의 스승 김굉필과 김일손, 김종직 등 숱한 사림들이 그의 광기로 비참히 죽어 들판에 내던져지지 않았는가.
그것을 일러 무오사화라 하지 않는가.
저들이 다 옳지 않음을 나도 안다.
그러나 조선 건국 백년이 조금 넘은 지금껏 얼마나 많은 공신이 있었더냐.
태조 이성계 선왕의 개국 공신은 차치하더라도
태종 선왕의 공신(1, 2차 왕자의 난)과
세조 선왕의 공신(단종을 몰아낸 계유정난)은 또 얼마이겠느냐.
선대의 공신마저 부정하자는 뜻은 아니겠지만,
그대들의 고집은 너무 셌다.
광조,
그대의 선조先祖인 조온 역시 태조의 개국 공신이지 않았더냐.
거기에 후일 정도전을 등지고 다시 태종의 공신이 되지 않았더냐.
2번에 걸처 공신에 오르지 않았더냐.
오늘의 네 신분은 저 때부터 보장되었을 것이다. 조상을 잘 둔 덕 아니겠는가.
선대의 일을 그대에게 물을 일은 아니나 조온의 두 번에 걸친 공신 책록은 과연 옳은 일인가.
그 역시 보는 이에 따라 평가가 다르지 않겠는가.
이미 조선은 저들을 몰아내지 않아도 그대들의 세상이 아닌가.
그대처럼 3년 남짓에 종 2품 대사헌에 오른 일이 이전에 있었던가.
그대가 주창한 현량과를 통해 이미 그대는 충분한 우군을 구축했다.
또한 그대를 따르는 젊은 사림들은 삼사를 골고루 장악하고 언로를 틀어쥐었다.
조정이 온통 그대들 뿐이었다.
이미 훈구 세력들은 뒷방 늙은이 신세 아닌가. 저들은 내게 의견을 고하기도 어렵게 되었다.
이제 그랬으면 저들에게도 숨 쉴 틈을 줬어야 했다.
저들은 궁지에 몰린 쥐처럼 되었다.
끝끝내 씨를 말리자는 생각이 아니었으면 어찌 그리 험하게 몰아 붙이는가.
결국 나도 그대들의 생각에 맞지 않으면 몰아낼 수 있음 아니겠는가.
아니 최소한 꼭두각시처럼 그대들의 말을 잘 듣는 군주로 만들 심산 아니겠는가.
두려웠다.
이미 무소불위의 힘을 가진 그대들은 나에겐 또 다른 정적이 되었다.
이들이 더 커지기 전에 몰아내야 한다.
마음을 굳혔다.
그대들이 몰랐던 내 성정 하나.
나 역시 마음을 먹으면 어떻게든 이루고 마느니.
이른바 훗날 '막후 정치'라 불리우는 내 정치술이 발휘되기 시작했다.
말하기 뭣하지만 이 때부터 내 눈에 벗어난 이들은 반대파들을 불러들여 뒤에서 은밀히 모의해 제거하는 정치술이 본격화 됐다.
그렇게 나의 치세를 이어갔다.
너무 비난하지 말아다오.
힘없는 군주의 비애다.
그대들을 지금 제거하지 않으면 나의 치세는 없으리니.
그대들의 위훈삭제가 통과 되자 사방에서 반발이 일기 시작했다.
그대들을 비판하는 소리가 넘쳐났다.
"온 나라의 인심이 모두 조광조에게 돌아갔다."
"조씨가 왕이 되려한다."
주초위왕의 글씨가 새겨진 나뭇잎이 나에게 받쳐지는 등,
조정은 그대들의 반대 의견으로 넘쳐났다.
심지어는 내명부의 궁녀들과 빈嬪들마저 수시로 그대들을 힐난했다.
이것만으로도 그대들을 몰아 낼 명분이 충분히 쌓였다.
내가 그대들을 모르는가.
그대들이 왕권을 넘보는 반역 세력이 아님은 지난 4년간 봐 왔음에 충분히 알고도 남음이다.
그대들이 사랑스러울 때는 어떤 일도 아름다웠으나
내 이미 그대들에게 마음을 거두었음에 모든게 불경스럽고 염려스럽게 보였다.
염증과 환멸. 그래, 싫을대로 싫어진 것이다.
이것 또한 내가 싫어하는 내 성정이다.
쉽게 동화되고 쉽게 질려 버리는.
이 성정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야 했다.
주초위왕.
소위 조씨가 왕이 된다는 나뭇잎에 새겨진 벌레들의 조악한 글씨.
난들 이게 왜 조작인지 모르겠느냐.
그러나 이미 내 마음을 거두었지 않았느냐.
모두가 그대들의 불충으로 볼 증거가 됐다.
한갓 미물도 내게 그대들의 불충을 알리는 신호로 보았다.
그대들의 운명인 게다.
그렇게 그대와 나의 짧은 인연은 끝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그대들이 위훈삭제로 의기양양하던
그 날로 부터 6일 후.
나의 치세 14년, 1519 년 11월 15일 밤.
궁궐의 비밀 문인 신무문神武門을 통해 몇몇의 공신 세력이 대궐로 들어왔다.
궁궐의 모든 문 열쇠는 그대들이 갖고 있어 궁색하지만 이 문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내가 가끔 은밀히 밖으로 출입하던 비밀스런 문이다.
남곤, 심정, 홍경주 등이었다.
그대들에 의해 훈작이 박탈된 공신들이다.
정확히는 내가 몰래 불러들인 것이다.
그들의 궁지에 몰린 딱한 입장과 내 처지가 절묘하게 맞는 자리였다.
그들은 내 속마음을 정확하게 읽어 그대들을 극심하게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내용은 간단했다.
그대들이 붕당을 조성하여 나라를 어지럽히고 임금을 속였으니 엄히 다스려 달라 함이었다.
내 뜻이 저들과 같았음에 나는 지체없이 그대들을 잡아 들이라 했다.
아니 내가 저들을 조정했다 해도 부인하지 않겠다. 그만큼 내가 절박했음이다.
어제까지 조선의 핵심이었던 그대들은 이제 중죄인이 되었다.
붕당朋黨은,
패거리를 이루어 자기들끼리 권력을 독차지하고 농단함은 사형에 이르는 큰 죄임을 그대도 알 것이다.
이제 더 이상 그대는 나의 측근이 아니다.
한 밤중 창졸간에 붙들려와 의금부에 갇힌 그대들.
그대와 그리고 김정, 김구, 김식, 윤자임, 박세희, 박훈, 기준....
황망했을 것이다.
얼마전까지 그대들과 나는 서로 의지하며 이나라 조선을 유학의 기운이 가득한 도학정치를 하자고 논했었다.
그랬던 그대들이 갑자기 의금부에 모두 갇혔으니 얼마나 황망하고 내게 배신감을 느꼈을까, 심히 짐작할 수 있음이다.
일이 이 지경까지 오게 된 연유를 알고 싶었을 것이다.
나를 간절히 보자한 그대들 청을 애써 무시했다.
내 마음은 이미 얼음처럼 차가워 졌고 돌처럼 굳어졌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라.
영의정 정굉필과 여러 신료들이 죄를 묻는 과정의 부당함을 고했다.
또한 형벌이 지나치게 과하다고 탄원했지만 나는 고집을 꺽지 않았다.
거기에 성균관 유생 1천여 명도 광화문 앞에 모여 그대의 무죄를 호소했다.
그대를 따르는 세력들이 저러했다.
그것은 내겐 또다른 두려움이었다.
더욱더 그대를 축출해야 했다.
그댄 부정할테지만 내 보기엔 분명 붕당이었다.
이미 그대는 저들의 영수였고 저들은 그대를 따르는 세력이었느니.
나의 교지를 내렸다.
조광조, 김정, 김식, 김구는 참형에 처하고 윤자임, 기준, 박세희, 박훈은 장 백대를 때리고 유배에 처하라."
참형斬刑.
죽음에 처하라 한 것이다.
그래, 참담했지만 이게 내 본심이다.
그대를 너무나 사랑하고 의지했다.
이제 마음이 떴고 그대가 미워 견딜수 없게 됐다.
애증愛憎이다.
시간이 지나 내 미움이 옅어지면 그대를 다시 부를까 나는 두려웠다.
내 우유부단이 바뀌지 않듯 그대의 외고집도 바뀌지 않을 터.
차라리 내 권력으로 그대를 참斬해 그리움으로 남겨 두려했는지도 모르겠다.
또한 타협을 모르는 그대와 같은 외고집이 어떤 화를 부르는지 신하들의 본보기로 삼고 싶음인지도 모르겠다.
그대의 죽음은 신료들의 강력한 반대로 잠시 유보됐다.
아직 목숨이 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우선은 전라도 능주로 유배시키라 했다.
그곳에서 그대는 한양을 향해 절하며 내가 불러주리라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변하지 않았다.
아니 변할까 두려웠는지도 모르겠다.
평소엔 그토록 우유부단하고 냉정하지 못한 내가 무슨 고집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질투였을 수도 있겠다.
도저히 따라 잡을수 없는 그대의 학문과 언행일치.
조강지처 외에 소실 조차 두지 않은 도덕적인 삶.
거기에 빼어난 외모와 수려한 말로 어디에 있으나 늘 환희 빛나던 그 당당함.
불과 몇 년만에 이룬 화려한 업적과 세력.
그 모든 것에 군신 관계가 아닌 인간대 인간으로서의 질투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리하여 그대가 유배를 떠난 날로(1519.11.16일)부터 한달여 후,
나는 기어코 그대를 사사賜死시키라고 명했다.
금부도사 유엄은 사약을 들고 그대의 유배지로 갔다.
한양에서 능주까지 나흘이 걸렸다.
12월 20일이다.
유엄은 배소配所에 도착해 사면을 간절히 기다렸을 그대에게 사약을 받으라 했다고 한다.
황망과 절망으로 가득했을 그대를 보는 듯해 마음이 아프다.
그래, 그 해 겨울 그대에게 급하게 내려진 죽음의 전말은 이러했다.
한가닥 희망으로 재기를 꿈꿨을 그대로선 절망적인 결말이었으리.
다행히 그대는 마지막까지 나에게 충성을 보이는 시를 남겨 그 이름을 청사에 길이 남겼다.
뒷 날 죽음을 목전에 두고 쓴 절명시絶命詩를 나도 보았다.
역시 정암, 그대의 성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고백하건데 읽는 내내 고통스러웠느니.
그만큼 그대를 사랑하고 의지했느니.
그대로 인해 새로운 세상을 꿈꿨느니.
그러나 그대의 과격함으로 내 마음이 변했느니.
그 변심의 끝은 이토록 잔인했다....
그대들의 죽음을 사관들은 기묘사화라 명명했고 그대들은 기묘명현이 되었다.
신념을 따르다 죽은 그대들의 이름은 역사에 길이 남았다.
그대들을 참하고 나는 20여년을
더해 38년 동안 용상에 있었다.
그러나 그대들과 같이 한 4여년의 성과를 넘지 못했다.
훈구세력들은 모든 것을 다시 예전으로 되돌려 놓았다.
다시 혼돈이고 저들은 권력을 두고 진흙탕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조선은 다시 암담했다.
가끔 그대가 꿈꾼 새로운 세상이 그리웠다.
그 생각을 읽은듯이
그대의 신원을 회복시켜여 한다는 상소가 계속 올라왔으나 나는 승락하지 않았다.
그대를 복원시키면 내 잘못을 드러내는 일.
그렇게 나의 치세는 다했고
1544년 11월 15일 명을 다했다.
공교롭게도 그대들을 내쫓던 그날과 같은 날이다.
기묘사화라 불리운 일이 일어나던
1519 년 11월 15일.
이또한 묘한 운명이다.
죽음조차 그대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인가?
죽은 뒤 나는 중종中宗이라 명명됐다.
이도저도 아닌 어정쩡한 임금이란 뜻이리라.
오죽했으면 사관들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상은 인자하고 유순한 면은 남음이 있으나
결단성이 부족하여, 비록 일을 할 뜻은 있었으나 일을 한 실상이 없었다.
좋아하고 싫어함이 분명하지 않고 어진 사람과 간사한 무리를 뒤섞어 등용했기 때문에
재위 40년 동안에 다스려진 때는 적었고 혼란한 때가 많아 끝내 소강小康(조금 편안해 짐)의 효과도 보지 못했으니 슬프다."
(중종실록 1544 년 11월 15일)
야박하고 괘씸하도다.
그러나 역사는 이토록 냉정했다.
그대들은 죽어 현신賢臣으로 길이 남고 나는 저렇게 어리석은 임금, 즉 혼군昏君으로 기록됐다.
다만 내 조강지처 신씨에 대한 그리움과 애틋함은 끝내 남아 죽음 직전 그녀를 궁으로 불렀다.
마지막으로 그녀를 보고 싶었다.
지켜주지 못한 지아비의 용렬함을 빌고 싶음이다.
그녀는 그로부터 13년을 더 살고 72세로 한많은 생을 접었다.
1557년 12월이다.
사랑하는 여인 하나 끝내 지켜내지 못한 권력,
그게 내가 가진 권력의 실체였다.
광조여, 광조여, 아, 정암이여....
그렇게 용렬한 군주였다.
그런 나와 확고한 신념의 그대.
우리 둘 사이에 애증으로 점철된 짧은 인연.
이 싸움의 최종 승자는 그대,
정암 조광조로 기록 되었다.
참 다행한 일일지니.
광조, 그대, 부디 원한을 접고 편안히 영면하시라.
(끝)
중종의 어진.
인터넷에서 다운 받았습니다
첫댓글 와우~~~ 역사 무지렁이 재미나게 읽고 갑니다.
미쟁이 님 같은 분의 이런 댓글에 조금이나마 쓴 보람을 느낍니다.
고맙습니다
너무 빨리 끝내신듯해요
아쉬운 마음이 드는거보니 ㅎ
쓰시는분은 얼마나 힘드셨을낀데
고생하셨어요
다음편은?
일단 공부좀 하고요~^^ㅎ
이면을 읽어내시는 언싱누님 같은 분 덕분에 계속 쓸수 있습니다~~^
매번 열심히 잘 읽고 있습니다.
그날 뵈어서 반가웠습니다.
항상 건강에 유의하시고 즐란하셔요. ~^^ _()_
제 글의 열열한 애독자셨던 해골프님,
한동안 뜸해서 걱정스러웠는데
그날 뵈서 너무 반가웠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즐골 하시길~^^
정암선생 유배지가 내 고향인 바 /
오며 가며 무심히 지났더니 /
이번 고향 길엔 다시 들러 /
그 의기와 충심 /
돌아 보아야 겠네
고마우이!!
즉흥시가 조광조의 절명시만큼 멋있네그려~^^ㅎ
고향이 좋은 곳이구먼.
아는만큼 보이고 그때 보이는것은 예전과 다르다!
이건 예사람들의 명언이지.
다시보면 새로을걸세~~^
잘 읽어보고 갑니다
권력의 무상 치세의 역학 여러가지를 엿볼 수 있어 흥미 진진 잘읽었습니다
탁월한 인간애의 묘사 유려한 필치 수고하셨습니다
제가 묘사하려는 부분을 잘 파악해주신 목산님,
깊은 관심 늘 고맙습니다.
또 준비되면 올려보겠습니다
좋아요~~
너무 잘 읽었습니다.
중종...
요새말로 하면, 겁많고 우유부단하고, 몸사리고,,,
게다가 걱정도 팔자고, 잔대가리 엄청...아니구나..ㅎㅎ
암튼, 중종을 알게 해줘서 너무 감사합니다.
또 다른 거 담에 부탁합니다.
수고하셨어요.
중종과 조광조를 다시 생각케 했으니 제가 루마님의 조선사 선생님?ㅡㅋㅋ
늘 긴글 읽어 주시고 댓글 주셔서 글 쓴 보람을 느낍니다.
또 준비해서 써지면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긴글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옛 명현들은 모두 스스로 죽임을 자초하고 또 그 죽음 당당히 받아 들여서 이름 석자를 후세에 남겼나 봅니다
제가 보기에 볼한타스님께서도 골싱의 명현으로 기록될듯~~^^
단 퍼박이랑 붙어서 장렬히 전사한다는 전제조건이...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