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기생으로 입학한 것은 분명하지만 운동선수로는 아주 늦은 중3 때 야구를 시작했기에
중학교 야구시절 최고의 기량을 자랑하던 충암고등학교 야구부 창단 멤버들 속에서
출전의 기회를 잡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무명의 신설교를 일약 유명하게 할 방법으로 야구부 육성을 택한 학교재단은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여(등록금, 수업료는 물론, 교복에 운동화까지 제공했다.)
전국에서 '잘나간다는 선수들을 스카웃했는데, 나만 빼고는 모두 훌륭한 선수들이었다,
운이 좋았는지.....
충암고등학교는 지난 40년간 전국대회 11회 우승(랭킹 7위)으로 일약 야구명문으로 성장하여
학교를 널리 알렸음은 물론 학교자체도 '명문대학진학율이 가장 높은' 명문학교로 성장 발전했으니
나는 그 학교 야구부의 특기생으로, 창단멤버로서, 최고위급인 2회 졸업생으로서의 자부심이 쩡쩡하다.
고등학교 1학년 때인 1970년 3월에 창단하여 그해 9월1일에 공식대회에 첫줄전했다.
첫 상대는 당시 전국 최강인 배문고등학교였는데 그해에만 두개 대회를 석권했었다.
배문고는 일본 갑자원대회 우승팀인 사가미(箱模)고등학교와 1승1무1패의 호각을 보이며
일본야구에 전혀 밀리지 않는 대등한 경기를 벌였다.(당시 한 국야구는 일본에 비해 많이 떨어졌다.)
우리는 그 배문고를 1:0으로 셧아웃을 시키며 고등학교야구계에 주목받는 학교로 첫출발을 했다.
그 경기에서 나는 비록 무안타에 그치긴 했으나 당당하게 6번타자 중견수로 출전했다.
그 공식 경기를 앞두고 경기감각을 높이기 위해 몇몇 고등학교와 연습경기를 가졌을 때다,
첫 상대는 배재고등학교였다. 천재훈이라는 투수와 장재철, 이위복 등이 뛰던 배재고등학교는
충암의 에이스 정순명의 직구에 눌려 단2안타의 빈공을 보이며 6:0으로 완패 당했다.
두번째 연습경기는 휘문고등학교였다. 휘문고는 후일 퍼팩트경기를 했던 송범섭이 4번을 치는 등...
북치고 장구치고....1인팀이었다. 휘문고등학교 역시 1안타로 정순명 공에 완전히 눌리면서 4:0으로 완패 당했다.
세번째 경기는 대광고등학교였다. 이동한, 김광득, 배장수, 김재박, 서승대가 뛸 때다.
그제서야 감독님은 내게 출전 기회를 주셨다. 그때까지 벤치에서 졸고 있던 나였기에
'드디어 뽄 때를 보일 때가 왔도다'는 仰天의 기상으로 방방 뜨고 훨월 날며 경기에 출전했다.
6번타자에 우익수로 출전했다.
그러나 나는 첫타석에서 속칭 아리랑볼을 던지는 이동한(1회 봉황대기 준우승 투수였다.)의
슬로우커브에 말려 2-2 상태에서 2루수 땅볼로 물러났고,
두번째 타석에서는 4회부터 구원투수로 나온 김광득의 직구에는 숏플라이 아웃.
세번째 타석은 또 다른 구원투수 서승대에게 단 3구로 스탠딩 스트럭 아웃을 당했다.
아아........
본때고 나발이고, 앙천의 기상이고 나발이고....언제 쫓겨날지 몰라 전전긍긍할 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날 헤맸던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우리팀 선수들 모두가 이동한, 김광득 공은 물론 원래 1루수인 서승대(숏바운드 못잡기로 유명했던)의
직구에도 손을 대지 못하고 6회까지 3안타로 범타 졸공이었다.
그럼에도 대광고가 정순명의 공에 손을 대지 못해 7회까지 경기는 0:0 상태였다.
7회말 수비.....(대광고 공격)
노아웃에 연속 4볼로 주자 1, 2루가 됐고, 후속타자가 삼진으로 물러날 때 더불 스틸로 1사 2,3루....
다음 타자는 포수였던 백화용이 1-0에서 때린 볼이 라이트 선상으로 높게 날라왔다.
수비라도 잘해서 수명을 연장하고자 존나게 뛰었다.
1루수와 2루수가 뭐라고 뭐라고 외치고 벤치에서도(벤치에는 감독외에 후보선수 3명 밖에 없었다.) 외쳤다.
더욱 열심히 뛰라는 격려성 환호로만 알아듣고 100미터를 12초대에 주파하며 파울지역에서 공을 잡았다.
너무나 어려운 공을 너무나 어렵게 극적으로 잡았다.
순간 우쭐........
나이스플레이...나이스캣치 가 나올 줄 알았는데....냉랭, 잠잠, 째림, 욕설........
"잡지마 잡지마 잡지마"소리도 못듣고 야구룰도 제대로 모르고 죽자고 뛰어 잡았던 놈이니......
괘씸죄에 나는 8회초 공격 때 '당연히' 교체됐다.
에이.....
결과적으로는 우리가 8회초, 9회초에 각각 3점씩을 뽑아 6:1로 이기긴했지만,
나는 그날 숙소에 돌아가 감독님에게 '촌놈 플레이에 야구도 모르는 놈' 소리를 들어가며
36인치 노크방맹이로 수십대를 맞고 실신했다.(이틀동안 화장실도 못갔다.)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야구를 그만 뒀다. 재능도 별로 없었지만 집안의 맹렬한 반대가 계속됐기 때문이다.
게다가 교실에서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슬슬 솟기 시작할 때여서
100여대의 탈퇴 빳따를 감수하고 야구부친구들의 '야지' 를 들으며 실신한 채 야구부를 떠났다.
덕분에 비록 2차학교이긴 했으나 재수도 하지 않고 대학에 진학했는지는 몰라도
아직도 '좀 더 계속했더라면.....'하는 야구에 대한 아쉬움은 크게 남아있다.
그래서 요즘도 백대가리를 휫날리며 '주제도 모른 채' 운동장을 헤매는지도 모르겠다.
지난번 대통령배 대회 2회전에서 모교에게 굴욕의 콜드게임을 당했던 원주고등학교 우익수가
40년전 나와 같은 상황에서 전력질주하여 파울플라이를 잡고 한점을 헌납하는 장면을 보다보니......
40년전의 쩍팔리고 황당했던 기억이 떠오르며 나도 모르게 엉덩이로 손이 갔다.
낄낄낄......
![](https://t1.daumcdn.net/cfile/cafe/11781B0D4C0F0CDB60)
사진은 2002년 월드컵4강 진출기념으로 건국대학교에서 주최한 <전국중고체육지도자 초청 일감호 낚시대회>에 <가짜 지도자>로 사기 출전했을 때다. 나를 체육지도자로 둔갑시켜줬던 친구는 나와 고등학교 야구부 창단멤버인 정순명으로 그는 고3 때 청소년대표를 거쳐 대학교 2학년 때부터 10여년간 국가대표로 대한민국의 마운드를 지켰다. 고교때부터 한양대학교-한국화장품-성무(공군)-MBC청룡을 거치면서 MVP(최우수선수)를 총11회를 수상했고, 고교시절에는 <이영민타격상>도 수상했던 한국야구의 당대인물이다.
선수생활을 끝내고 MBC청룡 투수코치, 삼성라이온즈 투수코치, SBS 해설위원, NHK 해설위원과 속초상고, 경동고등학교 감독을 거쳐 4년전부터는 완전 백수다.
*파울볼인 경우, 수비가 놓쳤을 때는 자동으로 <볼 데드>가 되지만,
*야수가 받는 경우에는 <인 플레이> 상태가 지속된다.
*無死, 1死 때 3루 주자가 있는 경우, 깊은 외야 파울플라이를 잡으면 점수 줄 확률이 높다.
*때문에 야수는 '절대 잡지 말아야 하는데' 정신이 빠졌거나 룰을 모르는 촌놈들은 용감하게 잡기도 한다.
*사인미스와 촌놈플레이는 감독이 가장 용납할 수 없는 쩍팔리는 짓으로 여겨지며 어느 감독이든 이를 박살낸다.
첫댓글 ㅋㅋㅋ 그 룰은 나도 알고 있다. 에이 촌노무쉐이야 ~~~ 요즘 야구를 한다기에 취미가 있어서 그런가했더니 충암 야구 역사의 창립맨버 였구먼. 지금은 촌노무.....가 아니겠지. 재미있게 읽고 간다. ^^
고등부야구에선 자주 일어날 수 있는 일이겠지...요즘 프로야구에서도 그런 실수 가끔 나오는데 뭘~ 그래도 멋진 추억이 있어 좋겠다.
잡아야 할 때와 잡지 말아야 할 때를 구별함은 야구만에서만은 아닌 것 같다! 그 투수는 유명하였던 기억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