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방굴사 입구 500여 년 동안 지켜온 노송도 고사
신체 건강한 장병 투입으로 방제작업에 숨통 트여
감귤 수확과 맞물려 농번기 일손부족 한시름 덜어
기사사진과 설명
소나무 재선충병 방제작업에 투입된 해군·해병대 장병들이 19일 오전 제주도 제주시 오등동 야산에서 벌목 전문가가 자른 나무 토막을 옮기고 있다. 제주=이헌구 기자 |
18일 오후 제주도행 항공편에 몸을 실었다. 제주국제공항에 다다랐을 때 창문 밖으로 보인 산야는 온통 붉은색이었다. 마치 가을 단풍이 절정에 달한 것처럼 보였다. 숙소로 향하는 도심 주변 야산 역시 온통 붉은 물결이었다. 소나무 재선충병이 재앙 수준이라는 제주도청 관계자의 설명이 실감났다. 제주도는 현재 소나무 재선충병 ‘방제 전쟁’을 치르고 있다. 그 중심에는 해군·해병대 장병들이 서 있다. 해병대1사단 공정대대까지 투입해 대규모 작전(?)을 벌이는 방제작업 현장을 찾았다.
▶장병 투입 방제작업 숨통
“위이잉~ 위이잉~.”
겨울을 재촉하는 진눈개비가 내린 19일 오전 제주도 제주시 오등동 인근 야산이 요란한 기계톱 소리로 소란했다. 잠시 후 ‘우지끈’ 하는 소리와 함께 수령(樹齡) 100년이 넘어 보이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맥없이 쓰러졌다.
벌목 전문가가 일정한 크기로 소나무를 토막내자 해군·해병대 장병들이 한곳으로 차곡차곡 쌓았다. 나무 토막들은 적게는 수십 ㎏에서 많게는 100㎏이 넘어 보였다.
장병들은 나무 토막을 이리저리 굴리고 단가에 담아 쉴 새 없이 날랐다. 고된 작업에 장병들의 얼굴은 빗물과 땀이 섞여 물범벅이었다. 장병들이 쌓아놓은 토막들은 소각장으로 옮겨 톱밥으로 분쇄하거나 소각한다.
방제작업을 지휘하는 해병대1사단 한명준(중령) 공정대대장은 안전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곳곳을 살폈다. 의무병과 군의관·앰뷸런스도 배치했다.
제주도청 소나무재선충방제대책본부 관계자도 최선을 다하는 장병들을 격려하며 방제작업에 힘을 보탰다.
일부 장병들은 소나무 밑동의 껍질을 벗겨 재선충병 매개충인 솔수염하늘소 번식을 차단하는 그루터기 작업에 동참했다.
장병들이 삽으로 껍질을 벗겨내자 솔수염하늘소 유충이 보였다. 안식처를 드러낸 유충은 더 깊숙이 숨기 위해 발버둥쳤다.
재선충병 감염 소나무에 솔수염하늘소 유충이 하나라도 남아 있으면 인근 소나무에 병을 옮긴다. 장병들은 재빠른 동작으로 유충을 제거해 또다른 소나무로의 감염을 막았다.
해군·해병대 장병들은 “휴식”이라는 외침이 들리자 깊은 숨을 토해냈다. 방제작업은 45분 작업에 15분 휴식을 반복한다.
제주도청 관계자는 “신체 건강한 장병들이 대거 투입되면서부터 방제작업에 숨통이 트였다”며 “장병들이 무사히 복귀할 수 있도록 안전사고 예방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해병대-제주도, 인연 ‘각별’
재선충병에 걸린 소나무를 자르고 유독가스로 살충·살균하는 훈증(燻蒸), 파쇄·소각하는 작업은 제주도 전역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제주도 전역에 퍼진 소나무 재선충병은 한라산국립공원까지 위협하고 있다. 문화재구역인 사람 발자국 화석 산지·용머리 해안·송악산 등에서도 고사목이 늘어나고 있다.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77호 산방산 중턱의 산방굴사 입구를 500여 년 동안 지켜온 노송(松)도 고사했다. 이 때문에 한시라도 빨리 감염 소나무를 제거해야 한다. 하지만 인력과 장비가 턱없이 부족하다.
제주도는 지난 9월 소나무 재선충병과의 전쟁을 선포한 후 공무원·경찰·자원봉사자 등이 방제작업에 혼신을 다하고 있지만 속도가 나지 않았다.
이제는 감귤 수확 시기와 맞물려 농번기 일손부족 현상까지 나타나는 등 엎친 데 덮친 격이 됐다. 제주도민들도 재선충병이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훼손해 관광객이 줄지 않을까 노심초사다.
이러한 상황에서 해군·해병대 장병 투입은 방제작업에 활력소가 되고 있다. 특히 해병대와 제주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특별한 관계다.
1949년 12월 28일 제주도에 도착한 해병대는 도내 치안을 유지하고, 해상감시·경계를 철저히 수행했다. 이를 통해 도민과 두터운 신뢰관계를 구축했다.
수많은 청년들이 해병대 병 3·4기생으로 지원했고, 여학생·여교사 126명을 포함한 3000명이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을 비롯한 대·소 작전에서 용맹을 떨쳤다.
해병대는 이로 인해 제주도를 ‘제2의 발상지’로 부르고 있으며, 장병들이 방제작업에 전투화끈을 질끈 동여맨 원동력이 되고 있다.
한 공정대대장은 “국민의 군대로서 대민지원은 당연히 해야 할 임무 중 하나”라며 “소나무 재선충병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제주도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지키는 데 일조하겠다”고 강조했다.
■ 소나무 재선충병은
솔수염하늘소 몸에 기생하는 재선충 감염에 의해 소나무가 말라죽는 병이다. 일단 감염되면 100% 말라 죽기 때문에 ‘소나무 에이즈’로 불린다.
감염목은 ‘소나무재선충특별방제법’에 의해 다른 지역으로의 이동이 불가하며 훈증·파쇄·소각 처리해야 한다. 아직까지 재선충 자체를 박멸하는 방법은 없다. 따라서 매개충 확산 경로 차단을 위한 항공·지상 약제 살포, 재선충과 매개충을 동시 제거하기 위한 고사목 벌채·훈증 등이 방제법으로 이용되고 있다.
그러나 훈증은 바람이 많은 제주지역 실정에 맞지 않고, 파쇄 또한 장비가 부족하다. 소각 역시 화재 위험이 따라 특정 지역에서만 가능하다.
소나무 재선충병은 1905년 일본에서 처음 보고됐다. 이후 미국·프랑스·타이완·중국·홍콩 등으로 확산됐다. 우리나라에서는 1988년 10월 부산 금정산을 최초로, 현재는 30여 개 시·군에서 발생을 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