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라벌 밝은 달에-15
천황미륵.1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무더위도 한풀 꺾이면서 처용도 특별히 하는 일 없이 이래저래 적응을 해나가고 있었다. 사무를 보는 다른 사람들과 농담을 한다든가 작은 나무 작대기를 가지고 쪼그리고 앉아서 아미에게서 배운 한자를 연습하고는 하였다. 어쩌다 각간과 마주치기도 했지만 그날 이후로 영 떨떠름한 표정으로 처용을 소 닭 보듯 하는 각간이었다. 그러나 처용은 각간을 대할 때마다 극진하게 존경의 뜻을 표했고 반갑게 대했다. 늘 거만하게 인사만 받고 지나가던 각간이 어느 날 갑자기 처용에게 물었다.
“업무는 할 만 하신가?”
“뭐 별로 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대는 음악과 예술에 대단한 소질이 있는듯하니 그쪽에서 일해보고 싶지 않은가?”
“뭐 음악이든 예술이든 모든 게 서툴기만 합니다.”
“그래도 사람이란 모름지기 타고난 소질을 계발해야 하는 거지, 적재적소란 그런 말이야, 적당한 재목을 적당한 장소에 쓴다. 그대는 노래와 춤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재목이야, 내 조카님에게 말해줌세.”
“조카님이요?”
“헌강왕 말일세, 이사람 아둔하기는, 쯧쯧”
각간 김위홍이 혀를 차고는 다시 대궐문 쪽으로 걸어 나갔다. 바람같이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무엇하나 거리낄 것도 없이 오고 싶으면 오고 가고 싶으면 가는 사람이었다. 각간만은 못해도 처용도 자유로운 편이었다. 특별한 업무가 주어지지 않은 까닭에 하루에 한번 얼굴 도장만 찍으면 그만이었다. 그나마 급한 일이 있다고 둘러대면 얼굴도장도 며칠씩 찍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지만 처용은 될 수 있는 한 꾸준하게 입궐과 퇴궐을 반복하였다. 헌강왕도 자주보지는 못하였다. 입안의 혀처럼 끔찍하게 싸고돌던 헌강왕이었지만 그도 각간 위홍처럼 별로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시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섭섭했다. 해가 이슥해지고 처용도 대궐문을 빠져나왔다. 아미의 병세가 많이 호전되었지만 아직 잠자리를 같이 하지는 않았다. 같은 이불을 쓰긴 하지만 아직도 갑자기 벌떡 일어나 살려달라고 소리 지르는 아미를 품에 안고 운우지락을 즐기기에는 이른 감이 있었다. 오월이도 아미가 온 이후로는 눈길이 차가워졌다. 말도 잘 섞지 않았고 묻는 말에만 억지로 대답하곤 하였다. 아미를 위해서 처용을 마다하는 속내를 생각하면 처용은 마음이 짠해지곤 하였다.
“쯧쯧, 얼굴에 근심이 가득하네요.”
젊은 여인이었다. 분홍저고리 노랑치마를 날아갈듯이 입고 머리는 쪽을 지고 있었는데 동백기름 냄새와 지분냄새가 코를 찔렀다. 하지만 화류계의 여인 같지는 않았다.
“저를 아세요?”
“동해용왕의 막내아들인 처용님을 모른대서야 어찌 신라 사람이라 하겠어요?”
여인이 배시시 웃으면서 처용을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여인이었다.
“제가 걱정이 있다는 걸 어찌 아십니까?”
여자가 처용을 찬찬히 바라보더니 말했다.
“미륵님께서 처용님의 걱정을 많이 하십니다.”
“미륵님 이라고요.?”
“네 천황미륵님이십니다.”
천황미륵이라,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저는 그분을 모릅니다.”
“처용님은 그분을 모르지만 그분은 처용님을 아십니다.”
허허허 처용이 헛웃음을 웃었지만 여인은 웃지 않았다.
“한번 만나보시겠습니까?”
“그분은 어디 계십니까?”
“성전에 계십니다.”
“성전이요?”
“예,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여인이 앞장서서 걸었다. 처용은 별 생각 없이 따라 걸었다. 묘한 기분에 자꾸 헛웃음이 나왔다. 쭉 이어진 담벼락을 끼고 한참을 돌았다. 붉은 홍등이 내걸린 거리도 역시 지났다. 서라벌 지리를 잘 모르는 처용인지라 멀리 가는 일이 불안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따라 걸었다. 허름한 변두리로 접어들었다. 다쓰러져 가는 초가집이 기우뚱하게 서있었다. 대문을 여인이 밀었다. 어디선가 은은한 향내가 풍겨오고 있었다.
“쇤네, 일선이옵니다. 처용님을 모셔오셨습니다.”
여인이 문 쪽에 대고 공손하게 외쳤다.
“수고했다. 물러가서 쉬도록 하라.”
문 안쪽에서 굵직한 저음의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여인이 먼지투성이의 바닥에 대고 공손하게 큰절을 올리고 건넌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처용은 어정쩡한 자세로 초가집의 문 앞에 서있었다.
“어서 들어오시오.”
문이 열리고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사내가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다.
“안녕하십니까?”
처용이 몸을 잔뜩 구부리고 문지방을 넘어 방안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촛불 두 개가 좌우에서 훨훨 타오르고 있었다. 벽면에는 그 사내의 초상화가 커다랗게 자리 잡고 있었다. 사내는 평복을 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평복이 그를 평범해 보이지 않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앉으시오.”
눈동자가 쏘는 듯이 형형했다. 묘한 압박감이 처용을 짓누르고 있었다. 처용이 엉거주춤 하게 주저앉았다. 가부좌는 아무리 연습해도 불편한 자세인지라 여자처럼 모로 두 다리를 나란히 하여 주저앉았다.
“뭐 편한 대 로 앉으시오. 다리를 뻗어도 상관없어요.”
처용이 아무렇게나 주저앉았다. 그러자 사내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마치 심장을 두드리는 듯한 강한 파장이 전해져 왔다.
“바다 건너에서 온 사람이라 골격도 크고 또한 신라의 가부좌 자세가 영 힘이든 가보오.”
처용이 흠칫했다.
“설마 내 앞에서도 동해용왕의 막내아들이라고 우기지는 않겠지?”
사내는 어느새 하대를 하고 있었지만 처용은 그런 것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자꾸만 목이 마르고 진땀이 솟았다.
“손님께서 목이 마르신 모양이니 물 한 그릇을 대접하리다.”
사내가 큰 소리로 외쳤다.
“냉수 한 사발 가져오너라.”
문이 열리고 역시 단아한 자태의 젊은 여인이 냉수 한 그릇을 받쳐 들고 들어오면서 말했다.
“오선 냉수 대령하였습니다.”
“수고했소, 물러가도록 하시오.”
사내가 말하자 오선이라는 여인도 역시 정중하게 큰절을 하고는 물러갔다.
“드시지요.”
“감사합니다.”
처용이 냉수를 벌컥 벌컥 들이켰다. 시원하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천황미륵이라 하오.”
사내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처용이 사내의 손을 잡으면서 대답했다.
“저는 처용입니다.”
한동안 말이 없었다. 사내가 불쑥 말했다.
“오늘 저녁 법회에 참석하시겠습니까?”
“법회라고요.?”
“삼일에 한 번씩 법회가 열립니다. 오늘이 그날입니다.”
“뭐가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저랑 같이 식사를 하시고 저녁의 법회에 동참합시다.”
그때 밖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녁 공양을 올릴까요?”
“올리시오.”
사내가 역시 굵은 저음의 목소리로 대답했다.
문이 열리고 김치와 깍두기 콩나물 무침 그리고 잡곡밥 두 그릇에 냉수 두 사발이 놓인 조촐한 상이 들고 들어왔다. 여인이 상을 내려놓자 사내가 여인에게 말했다.
“칠 선녀들도 저녁식사를 하시지요.”
여인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미륵님도 많이 드십시오.”
사내가 허허허 하고 웃으면서 말했다.
“육신을 뒤집어 쓴 까닭에 허기를 달래기야 하지만 과히 먹을 것에 괘념치 마시오.”
“알겠습니다. 삼선 물러갑니다.”
여인이 큰 절을 하고 물러나자 사내의 눈길이 처용에게 멎었다.
“시장하실 텐데 드시지요”
사내가 먼저 숟가락을 들면서 말했다. 마침 배가 고프던 처용인지라 순식간에 밥 한 그릇을 비우고 냉수 한 사발을 벌컥벌컥 들이키고는 벽에 기대어 앉았다. 사내는 아직도 식사 중이었다. 사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처용이 사내에게 물었다.
“저 여자들은 왜 볼 때마다 큰절을 합니까?”
“하하하, 내가 비록 육신의 탈을 쓰고 오긴 했지만 옥황상제의 형님이 되십니다. 따라서 거기에 알맞은 대우를 받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내가 대궐 안에서 헌강왕의 많은 일정을 지켜보았지만 들고 날 때 마다 큰절을 하는 것은 처음 봅니다. 전하보다도 높으신 분입니까?”
“옥황상제의 형님이라니까요?”
“저는 그런 사람 모릅니다. 황제폐하의 숙부 되시는 각간 어른도 예의범절에 초탈하신데 이렇게 들고 날 때마다 큰절을 하는 것은 지나친 듯 싶습니다.”
“처용님께서 뭘 잘 모르셔서 그러는 모양인데 저는 천상에 있는 하늘 님의 조카이면서 옥황상제의 형님이 된단 말입니다. 말하자면 태초에 하늘 님과 내가 천지공사를 했다 이겁니다. 천지공사가 무엇이냐 하면 이 땅과 하늘을 만드는 것이지요. 지금 이 나라 신라는 온통 썩어있어요, 왕과 그 측근들은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다 시피해서 절을 건축하면서 민심을 잡으려 하지만 말입니다. 하늘의 뜻은 신라를 이미 벌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래서 옥황상제의 형님인 제가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서라벌이 불탈 때 건질 착한 사람들을 구하러 왔다 이말 입니다.”
“서라벌이 불탄다고요?”
처용이 얼굴을 찡그리면서 묻자 천황미륵의 유창한 말이 다시 이어졌다.
“마지막 날이 오면 신라 땅은 온통 불바다가 될 터인데, 그때에 살아남으려면 나 천황미륵의 가피를 입어야 합니다. 내 가피를 입으면 그날 불의 사자들이 서라벌과 신라 땅을 온통 헤집고 다니면서 살인을 저지를 때에 보호 받을 수 있습니다. 그때가 되면 헌강왕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모조리 죽고 내 휘하에 들어온 사람들과 칠 선녀가 새 세상을 열 것 입니다. 그때가 되면 처용 당신을 내 오른팔로 쓸 것 입니다.”
천황미륵이 진지하게 말했지만 처용은 여전히 알아듣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그야말로 쇠귀에 경 읽기라는 것이다.
“저는 왼팔의 힘이 더 강합니다. 오른팔은 좀 약해서 팔씨름을 하면 많이 지는 편이지만 왼팔은 강해서 웬만하면 지지 않습니다. 왼팔로 써주십시오.”
처용이 왼팔을 구부려 알통을 만들어 보이면서 웃었다.
“내 뜻에 동참하지 않으면 살인멸구를 할 수밖에 없다.”
천황미륵이 처용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한자 한자 힘주어 또박또박 말했다. 특히 살.인.멸.구.라는 말을 힘주어했다. 너를 죽여서 네 입을 막겠다.
“멸치 회 말입니까? 저는 해심이가 먹어보라 해서 먹어 보았는데 맛 죽입니다. 울산에서는 종종 먹었는데요, 여기 서라벌에도 멸치회가 있습니까?”
“하이고, 이거야 원 바위에 대고 이야기 하는 격일세.”
처용은 다리가 저린지 한참동안 종아리를 주물럭거리다가 말했다.
“아직 서른도 멀었는데 비오기 전날은 여기저기 쑤십니다. 아마 내일비가 올 모양입니다.”
천황미륵이라는 사내가 어이없다는 듯이 허허 웃었다.
“법회가 끝나면 술과 고기를 먹을 수 있나요?”
“..............................”
“참 그런데 말입니다.”
처용이 난처한 표정으로 사내의 얼굴을 살폈다. 사내가 물었다.
“무엇이든 물어보시오. 내 허심탄회하게 대답하리다.”
“근데요, 아저씨는 뭐하시는 분이세요?”
천황미륵이 잠깐 대답할 말을 잃고 우물쭈물 할 때 처용의 질문이 이어졌다.
“칠 선녀라 하면 일곱 명의 여인들이란 말이지요, 하나같이 다 예쁘네요, 근데 무슨 술집도 아니고 점집도 아니고 물질하는 해녀들 집도 아니고 다쓰러져 가는 초가집에 너무 안 어울리는 그림이네요. 정말 아저씨는 뭐하시는 분이세요, 너무 너무 궁금해서 정말 미치겠다.”
“여태까지 내가 설명 드리지 않았습니까?”
“저는 어려운 말은 못 알아듣습니다. 그러니까 뭐하시는 분이냐 이겁니다.”
그때 문이 열리고 삼선이 들어와 큰 절을 올리면서 말한다.
“법회를 열 시간이 되었습니다.”
“참석자들은 많으신가?”
“백 명이 넘는 듯싶습니다.”
천황미륵이 흡족한 표정을 짓더니 벌떡 일어났다.
“이보시게 처용,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백날 이야기해봐야 모를 것 이네, 이 법회에 참석 해보면 내 이야기를 단번에 이해할 것이네.”
천황미륵이 처용의 손을 잡았다. 처용은 손을 뿌리치려다가 가만히 손을 맡기고 일어났다. 손은 눅눅한 습기를 머금고 있어서 꽉 쥐면 살 속의 뼈가 만져질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분명 생전 노동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손이리라는 확신이 처용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천황미륵이 힘주어서 처용의 손을 잡았다. 덜컥 하면서 심장이 내려앉았다. 천황미륵이 손을 놓고 밖으로 나갈 때 문 뒤에 대기하고 있던 검은 옷을 입고 칼을 멘 무사 두 사람이 천황을 호위했다.
“오늘 그대는 하늘의 능력을 보게 될 것이다.”
저 눈빛은 미친 눈빛이다. 저건 정상인의 눈빛이 아니다. 저 미친 자를 따르는 자들이 백 여 명이 넘는다. 태연한 척 따라나서는 처용의 발길이 자신도 모르게 휘청거렸다. 이 미친 놈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미친놈을 따르는 광신도들은 또 어찌할 것인가.
첫댓글 옛날에는 미친놈은 맞아야 고쳐진다던데....
천황미륵이 뭔가 저지를 모양이네요~
뭔가 한수가 있으니까 신도들이 따를텐데 무엇을 보여주려나 궁금궁금
이 시절에도 혹세무민하는 사이비교주가 있었겠지
사이비... 옥황상제의 형님.. 이제나 저제나 시덥지 않는 무리는 꼭 있네요. 재밌게 잘 봤습니다.
즐독했습니다
사이비 교주.... 즐감이요
잘보았습니다.
천황미륵이 일을 저지를 모양...
즐감
즐독
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