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에 접어들고 있는 제주도는 단풍으로, 억새로 아름답게 물들었다. 단풍은 슬슬 지는 무렵으로 접어들고 있지만, 아직 억새는 한창이다. 10월 말엽부터 두 달간 머물며 늦가을부터 초겨울까지 풍경을 보기 위해 제주도로 내려왔다. 대부분 대중교통을 타고 다니며 뚜벅이로 제주를 여행할 때 도움이 되는 정보들도 써 내려가고자 한다. 여행을 못 가는 분들에게는 이 글과 사진을 통해 잠시나마 떠나는 기분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천아계곡
다른 활동을 할 수 있는 게 없더라도, 오로지 단풍만 봐도 괜찮다면 천아계곡은 제법 근사한 선택지다. 아직 많이 알려진 곳은 아니라서 이름이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나 또한 여행작가 지인을 통해 이곳에 대해 제대로 알았다. 그분도 제주도에 거주하는 지인을 통해 알게 되어 다녀갔을 정도였다. 현지인들에겐 인지도가 있으나 여행객들은 이렇게 입소문을 통해 조금씩 이 계곡의 존재에 대해 알아가고 있다.
나는 뚜벅이이기 때문에, 여기를 갈 수 있을까, 단풍 하나만 보러 가는 건데 괜찮을까 고민을 했다. 그 여행작가의 인스타그램에도 대중교통으로 가기엔 힘들 수 있다고 소개했다. 실제로 지도 앱을 통해 봐도 버스 정류장에서 계곡까지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였다. 하지만 제주 공식 여행 홈페이지인 '비짓제주'에는 충분히 걸어갈 수 있으며 심지어 '좋다'고 되어 있다. 모든 건 직접 가 봐야 아는 것. 노르웨이 북쪽의 외딴 제도도 뚜벅이로 갔다 왔겠다. 과감히 대중교통을 이용해 계곡으로 향했다.
제주 240번 노선
제주시외버스터미널과 중문 ICC 국제컨벤션센터를 잇는 노선. 한라산 자락의 1139번 지방도를 따라 달리기 때문에, 한라산 등산객들에게 편리한 노선이기도 하다. 주요 포인트로는 천아계곡, 어리목, 1100고지, 영실, 서귀포 자연휴양림 등이 있다.
천아계곡 들어가기
천아계곡까지 가려면 한라산둘레길(천아숲길입구)에서 하차하면 된다. 버스에서 내리면 바로 보이는 갈림길(천아수원지)을 따라 약 2.2km를 걸어서 들어가면 된다.
천아숲길입구에서 내리면 바로 진입로가 나온다.
자차로 이동한다면 진입로 입구에 주차하고 걸어가거나, 계곡 앞까지 들어가서 차를 세워도 된다. 하지만 중간에 공사 현장이 있어 대형 화물차가 수시로 다니고, 계곡 앞쪽은 길이 협소해 혼잡한 상황이 반복해서 발생하기 때문에 차량 진입을 자제해달라고 안내하고 있다. 하지만 이날은 어림잡아 계곡 입구에 차가 50대는 넘어 보일 정도로 탐방객이 많아 유명무실했으며, 따로 단속하거나 통제하진 않는다.
버스에서 내려 진입로를 따라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나만 내린 줄 알았는데 나 포함 세 명이 하차해 걸어갔다. 240번 버스가 1시간에 1대꼴로 자주 있는 편은 아니며, 단풍이 절정인 시기라 탐방객이 예상보다 꽤 많았던 점을 생각하면 뚜벅이로 찾아온 사람은 드문 편이다. 하지만 버스 시간만 맞춘다면 곧장 진입로로 들어서기 때문에 접근성이 나쁘진 않다. 아스팔트가 얇게 깔린 임도를 보통 걸음으로 40분은 걸어야 하는 짧지 않은 코스다. 그러나 굴곡이 적은 평지에 가까운 길이고 도로변으로 소나무가 빽빽해 숲길을 걷는 느낌을 들게 한다.
하지만 계곡 입구까지 차가 자주 오가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공사 현장의 대형 트럭이 이따금 흙먼지를 날리면서 달려 오롯이 숲길을 걷는 분위기를 느끼기에는 힘들었다. 차가 지나갈 때마다 비켜서는 것도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곳의 도로 상황을 생각하면 나부터 걸어 들어가는 것이 길게 봤을 때 도움이 될 것이다. 멋진 소나무 숲길을 천천히 느끼는 것도 도보 탐방객의 몫이다(천아계곡 탐방객이 늘며 진입로와 근방 도로가 혼잡해지고 주차난 문제도 발생해 제주시에서도 골머리를 앓고 있는 듯하다. 이곳이 한라산국립공원의 일부이기 때문에 도로 확장이나 주차장 공사를 하긴 힘들다고 한다. 단풍철에만 반짝할 이곳이지만, 별다른 대책이 없다면 그 철에는 더 혼잡해질 가능성이 크다).
천아계곡은 한라산 둘레길 코스의 하나인 천아숲길 초입에 있는 계곡이다. 숲길을 산책하듯 걷다 보면 계곡으로 향하는 내리막길이 나오고, 커다란 바위가 가득한 계곡이 나온다. 그 뒤로 둘레길로 빠지는 길이 나온다. 천아계곡은 항상 마른 모습밖에 볼 수 없는데, 비가 올 땐 계곡에 물이 불어나 입산이 통제되기 때문이다. 비록 물이 흐르는 모습은 볼 수 없지만, 대신 바위에 직접 올라 단풍을 더욱 가까이서 즐길 수 있다. 천아계곡을 찾은 사람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마음에 드는 바위에 자리를 잡고 단풍을 배경으로 멋진 인생 사진을 하나씩 남겼다.
천아계곡으로 들어가는 내리막길
영실 근처 보림농장 삼거리까지 둘레길이 이어진다.
어승생악
천아계곡을 둘러본 후 어승생악을 오르기 위해 어리목으로 향했다.
어승생악 들어가기
240번을 타고 어리목 정류장에서 하차해 약 900m를 걸어 들어가면 탐방안내소가 나온다. 천아숲길입구에서 버스로 한 정거장, 약 5분 거리이기 때문에 함께 묶어가면 좋다. 어승생악 탐방로는 어리목 탐방안내소 옆에서 시작한다. 어승생악 정상까진 편도 1.3km, 약 30분이 소요된다. 다른 코스와 비교하면 등산 거리도, 시간도 짧지만 크게 심호흡을 하고 올라가야 한다. 초반부터 가파른 계단길이 등산로 중반까지 계속 이어진다.
어느새 해가 많이 기울었고, 해발고도 970m에 달하는 한라산의 중턱이라 그런지 늦가을의 어리목 공기는 천아계곡과는 달리 차갑고 날카로웠다. 얼굴을 감쌀 수 있는 비니라도 챙겼어야 했나 싶었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올라가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하산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어승생악을 굳이 오후 늦게 찾아온 이유는 일몰과 노을을 보고 싶어서였다. 어승생악 탐방로는 비교적 짧은 코스라 입산을 통제하는 시간이 오후 5시로 다른 코스에 비해 늦다. 하지만 11월이 되면 2월까지 240번 버스가 단축 운행하고 입산 제한도 오후 5시에서 4시로 앞당겨지기 때문에 사실상 일몰을 보기 힘들어진다. 그 날을 불과 이틀 남긴 시점이었기 때문에, 못 봐도 본전이란 생각으로 올랐다.
어승생악 탐방로 입구
한 5분 정도 올랐을까. 계단에 앉아서 쉬고 있는 한 중년 부부가 정상까지 얼마나 걸리냐고 물었다. 초입부터 꼭대기까지 30분쯤 걸린다고 알려드린 뒤 하산길인지 등산길인지 여쭤봤다. 산을 막 오르는 중인데, 아저씨가 힘들어하셔서 앉아서 쉬며 계속 올라갈지, 돌아갈지 고민이라고 하셨다. 얘기를 들어보니 가파른 계단이 많아 쉽지 않으셨나 보다. 나는 ‘계단이 꽤 많다’고 하면서,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아까운 마음에 슬슬 올라가 보시라고 한 뒤 인사를 주고받고 등산길에 올랐다. 계속 뻗은 계단을 오르며 괜한 말을 했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결국 정상에선 그 중년 부부를 다시 만나지 못했다.)
초반엔 가파른 계단이 이어진다.
중반을 조금 넘으면 굴곡이 적은 구간이 나타난다.
계단길을 따라 계속 올라가면 잠깐 평지 구간이 나온다. 정상으로 가는 마지막 단계다. 평지 구간이 끝나면 다시 다소 가파른 길이 이어진 뒤 사방이 트인 어승생악 정상이 나온다. 어승생악에서는 예전에 올랐던 윗세오름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멀리 건물이 빽빽한 제주 시내가 보이며 군데군데 솟은 오름은 마치 동산처럼 보인다. 제주 시내에서 사람들이 많이 찾는 도두봉과 사라봉, 별도봉도 조그마하게 보인다.
어승생악의 유래(한국지명유래집, 두산백과)
어승생악에서 북서쪽으로 2km 떨어진 지점에 어승생 수원지가 있다.(천아숲길 인근이다.) 오름이며 수원지며 다 어승생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지명의 유래는 조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조 때 이 오름 밑에서 용마가 탄생했는데, 당시 제주 목사가 이를 왕에게 봉납했고 왕은 이를 탔다고 한다. 그래서 어승생(御乘生, 직역-임금이 타는 것이 난 곳)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이날은 하늘은 맑았지만 기대와는 달리 상공이 깨끗하지 못했다. 어승생악을 오른 다른 탐방객은 미세먼지 때문인가 하며 약간 아쉬워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날 미세먼지 수치는 아주 좋았다. 천문학을 전공하는 동생한테 물어봤다. 해가 질 땐 햇빛이 대기층을 두껍고 길게 통화하면서 산란이 많이 일어나 어두워지고, 보는 대상이 멀면 그만큼 흐려 보일 수 있다고 했다. 나름 고등학교 때 지구과학을 열심히 공부했으나 지금은 다 잊어버려 그 말이 맞는지 장담할 수 없다.
맨눈으로 봤을 때도 사진처럼 뿌옜다. (보정 전)
안개처럼 뿌연 사진을 보정해주는 라이트룸의 디헤이즈 기능을 활용했다. (보정 후)
그러나 다른 쪽 풍경을 보면 동생의 추측이 맞는 듯했다. 한라산을 직접 오를 땐 보지 못했던 산의 풍채를 어승생악에선 아주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었다. 아직 울긋불긋한 기운이 남아 있는 산림과 정상을 향해 완만하지만 우직하게 뻗은 능선, 그리고 그 정상에 솟은 백록담까지 금방이라도 손에 잡힐 듯 맑게 보였다. 어승생악의 주변에는 억새가 활짝 피어 가을 느낌이 물씬 났고 봉긋하게 솟은 오름들이 멋진 병풍이 되어 주었다. 시내 풍경을 깨끗이 보려면 맑은 날 태양의 남중고도가 높은 정오 전후로 오르는 게 가장 나을 것이다.
이날 어승생악의 날씨는 초겨울에 가까웠다. 게다가 바람도 심하게 불어 체감 온도는 더 낮았다. 고도가 높아 지상보다 기온이 더 낮고, 일교차가 큰 데다 해 질 무렵이라 추위는 더 크게 느껴졌다. 겨울 한라산을 오를 때만큼 준비를 안 했던 터라 일몰까지 남은 50분을 견디기 힘들다고 판단해 결국 하산했다. 하지만 일몰이 없어도 한라산 전체를 가까이에서 조망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매력 있는 곳이었다. 대자연 한라산 앞에선 어승생악 탐방로 자체는 결코 만만한 코스가 아니지만, 백록담으로 직접 향하는 다른 코스들과 비교하면 목적지까지 거리도, 걸리는 시간도 현저히 짧아 부담이 훨씬 덜하다. 하지만 풍경은 그 적은 노력에 반비례한다. 곧 겨울이 오고 한라산에 소복이 눈이 하얗게 쌓이면 어승생악에서 눈꽃 구경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