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곳곳에 계시는 벗 님들 :
11 월 21 일, 서해에 있는 섬 강화도로 향하였습니다. 작년 4 월에 초지대교를 넘어 주로
강화도 남쪽에 있는 초지진과 전등사와 마니산을 둘러보았는데, 이번에는 강화대교를 넘어
강화도 북쪽을 걸어 보기로 하였습니다.
시청 앞에서 김포 가는 631번 버스를 타고 고촌에 내려, 다시 88번 강화도로 가는 버스에
올랐습니다. 가는 길 주변에 김포 신도시 아파트공사가 여기저기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경기도의
대표적인 김포평야가 이제 서서히 아파트로 채워지기 시작하는군요. 축협 앞에서 내려 강화도
걷기를 시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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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로 꺾어 들어가 龍興宮으로 갔습니다. 이곳은 조선 25대 철종이 왕이 되기 전 살던 곳에
강화유수가 철종 4년에 지은 건물입니다. 살던 자리에 지은 집이지 실제 살던 집은 아니군요.
들어가 구조를 보니 규모는 작지만 전통형식을 따른 예쁜 우리네 집이었습니다. 그날은 전통차
모임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행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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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흥궁의 후문을 나서니 바로 “성공회강화성당”이 있었습니다. 성공회 초대주교인 고요한
(Corfe) 주교가 1900년에 건립하였는데, 당시 경복궁건립을 하였던 도편수들이 참여하고
압록강을 거쳐 내려온 백두산 나무를 사용하여 아주 잘 지은 건물이라고 합니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왼쪽에 우리 절에 걸려 있는 범종을 교회종으로 사용하고 있고, 교회본당은
“天主聖殿” 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는 이층으로 된 우리 전통가옥 모양을 한 성당이었습니다.
성공회가 당시 조선에 선교를 하기 위해 조선의 양식을 따라 성당을 지은 것을 보니, 어떻게
보면 영국인의 합리적인 사고를 읽을 수 있는 것 같았습니다. 뒤편에는 완전히 한옥으로 지은
사택 한 채가 붙어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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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성당을 나와 북쪽으로 오르막길을 조금 더 가니 고려궁지가 나왔습니다. 1231년 1 차
침입한 몽골군을 협상을 통해 일단 물러나게 하고, 그 다음해인 1232년 이곳 강화로 수도를
옮겨 몽골에 대항을 하게 됩니다. 얼마 전 읽은 “항몽전쟁 그 상세한 기록”을 보면 당시 고려
조정에서 화평파와 항쟁파간에 치열한 논의가 전개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당시 무인정권 2 代
집권자였던 최우가 천도와 항쟁을 결정하였습니다. 이 후 1254년 시작한 6차 침입의 와중에
최씨 정권 4 代 집권자인 최의가 1258년 피살되면서 왕정이 복고되고 고종의 태자였던 왕전이
중국의 전쟁터로 몽케를 찾아 가 항복을 하고(실제는 몽케의 사망으로 쿠빌라이에게 항복)
1260년 6차에 걸친 몽골의 칩입을 끝내게 됩니다. 이 곳은 이 후 10년을 더 버티다가 1270년
왕궁을 다 파괴하고 개경으로 다시 돌아 갈 때까지 총 39년 간 고려의 수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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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지로 들어가면 고려 때 것은 하나도 없고 조선 때 지은 건물의 복원된 건물인 강화유수동헌,
강화동종, 강화부吏房廳 그리고 외규장각이 복원되어 있습니다. 고려궁은 주로 평지에 건립된
조선궁과 달리 약간 오르막에 건립되었던 것을 개성의 고려궁 그리고 진도의 용장산성안
고려궁지를 보면 그 유사성을 알 수 있습니다. 강화도가 북방에서 침입하는 유목민에게는
방어처로 유용하였기 때문에 조선 正祖 때 이곳에 왕실서적창고로 외규장각을 설치하였지만,
1866년 북방유목민이 아니라 서방 洋夷인 프랑스가 침입하여 바로 침입 첫 목표가 되 버렸으니
… , 조선의 대외 방어전략이 한 조각 무용지물이 되 버렸었지요. 조선의 두 영민한 군주 중 한
분 이셨지만 84년 후 배를 타고 서해에서 오랑캐가 강화도부터 먼저 쳐 들어 올 줄이야 어떻게
알 수 있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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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궁지를 나와 더 북쪽으로 오르막길을 올라 가니 강화성의 북문인 鎭松樓가 복원되어
있었습니다. 성문 좌우로는 성벽도 새 돌로 복원되어있었지만 저 멀리 산 위에는 옛 성벽이
그대로 있어 오히려 정겹게 하더군요. 북쪽 해안에 있는 월곶돈대와 연미정을 가려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었더니 그 쪽은 東門으로 나가 한참을 더 가야 한다고 하여, 다시 돌아 나와 시내로
들어가 택시를 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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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으로 택시요금 5 천원 거리에 연미정을 포함하고 있는 월곶돈대에 도착하였습니다. 주변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 흐르는 모양이 제비꼬리를 닮아 燕尾停이라고 이름 지었다고 하네요.
안내판에 燕尾停의 역사가 간략하게 쓰여 있었습니다. 고려 때 처음 지어졌고 조선 영조 때
중건되었는데, 1627년 인조 5년에 있었던 정묘호란 때 後金과 강화를 바로 이 燕尾停에서
맺었다 하는군요. 그렇게 한 번 혼이 나고도 정신차리지 못하다가 1636년 병자호란을 또
당했으니 당시 西人정권의 지도부는 우리 역사상 가장 무능했던 지도층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월곶돈대의 성벽에 서니 저 강 너머로 북한의 개성 지역이 보이고 우리 해안에는 해병대 초소가
보이는군요. 현재 대한민국의 위치가 바로 이곳에 있군요.
돌아 올 때, 88번 버스를 다시 타고 9호선으로 환승하려고 검문소에서 내려 걸어가 보니 바로
개화산역 즉 김포공항 다음에 있는 9 호선 시발역이더군요. 갈아타지 않고 반포까지 와 오늘의
걷기를 마쳤습니다.
백학 드림
심도란 강화도의 옛 이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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