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의 소설화 시대 개막
연재 22년만에 책으로 2주만에 3만부 판매
시공 초월한 장중한 표현
몽환적 분위기로 독자 압도
불교의 대표적 경전으로 칭송되고 있는 화엄경을 장편 서사시(敍事詩) 형식으로 소설화하여 비로소 불교경전의 소설화 시대를 열었던 책이 고은(高銀, 1933- ) 선생의 장편소설 화엄경』이다.
이 책은 불교계는 물론 저자와 출판사, 그리고 일반의 예상을 뒤엎고 발매되기 시작한 지 2주일만에 3만 부(6판)가 판매되는 경이적인 기록을 발휘했다. 일조에 베스트셀러가 되었음은 두말할 것도 없지만 모두가 의아해 한 것은 “불교경전을 주제로 한 소설이 어떻게 베스트셀러가 되었을까?”였다. 경전을 소설화 한 것도 처음이었지만 베스트셀러가 됐다는 것은 정말 상상 밖이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사실 이 책은 민음사에서 출판될 때(1991)까지만 해도 장장 22년 동안 『독서신문』(‘어린 나그네’)’, 『대중불교』(‘소년 선재’) 등을 전전하면서 거의 무관심 속에 연재되었던 작품이기 때문이었다.
소설 『화엄경』은 한마디로 작가의 문학적 상상력이 대단히 풍부한 작품이다. 무엇보다도 시간과 공간의 벽이 없고 장중한 서사시적 표현들이 작품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압도하고 있다.
작품의 무대가 되고 있는 인도의 지리 풍토 문화적 묘사가 사실 여부를 떠나서 지극히 몽환적으로 다가온다. 한 장만 넘겨도 금방 무슨 특이한 장면(표현)이 쏟아질 듯한 분위기는 더욱 독자로 하여금 이 책에 몰입하게 한다. 작품의 전개도 박진감 있고 문학적 표현도 매우 아름답다. 언어의 아름다움, 종교적 신비의 아름다움, 그리고 자칫 추잡스럽게 보일 수도 있는 관능의 세계도 아름답게 펼쳐진다.
아마 일반적 소설 기법에 젖어 있던 독자들로서는 매우 감동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또 풍토적 지역적 무대가 인도로서 이국적 색채를 띠고 있다는 점도 색다르게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는 주인공 선재동자와 몇몇 주요인물만 그대로 남아 있고 기타 등장하는 여성이나 장면, 지리 풍토적 묘사 등은 모두 창작 각색된 것이다.
소설의 줄거리. 이제 막 소년의 문턱에 들어선 어린 구도자 ‘선재동자’(9세)는 깨달음(진리)을 구하기 위하여 갖가지 고난을 극복하며 53명의 선지식을 순례한다. 그가 만나는 선지식 중에는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이 있는가 하면 하찮은 창녀도 있고 상인도 있고 뱃사공도 있다.
완숙한 육체적 절정에서 소년 선재와 하나가 되기를 기다리는 30대 여인도 있고 보살행의 성자 보현보살도 있다. 성(聖)과 속(俗)의 갖가지 사람들이 신분과 차별을 초월하여 선지식으로 등장한다. 진리는 반드시 훌륭한 고승한테서만 얻어지는 게 아니라 어떤 사람한테서나 구할 수 있다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부처(진리) 아님이 없다’는 대승불교의 사상, 화엄의 세계가 그대로 형상화되어 있다.
이 책은 『화엄경』 전체를 소설화 한 것이 아니다. 『화엄경』 39품 가운데 마지막 장인 입법계품, 즉 ‘선재동자의 구도 이야기’를 화엄의 무애사상과 결합시켜 문학적 종교적으로 창작 각색한 것이다. ‘선재동자의 구도 이야기’는 화엄경 전체에서는 약 25%를 차지하며 입법계품에서는 거의 전체를 차지한다.
고은(高銀)의 문학인생을 대표하는 소설 『화엄경』의 파고는 다음해까지 출판가를 휩쓸었다. 2년 후(1993) 장선우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었으나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흥행을 보지는 못했다.
고은 선생은 전북 군산 출생으로 20세(1952년)의 나이로 효봉스님의 문하에 입산, 약 10여 년 동안 승려생활을 했다. 법명은 일초(一超), 대표 시집인 『문의(文義) 마을에 가서』를 비롯하여 소설, 수필 등 100여권의 저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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