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직구산업의 성장이 국내 제조, 유통업에 미칠 영향은 상당하다. 유통 국경이 사라지면서 국적을 뛰어넘어 업체 간 무한경쟁 시대가 도래하기 때문이다. 이런 때일수록 업체들로선 불필요한 유통 구조를 개선해야 하는 것이 과제다. 해외직구 산업이 일으킬 생태계 변화를 짚어봤다.
해외 유명 의류 브랜드를 수입하는 A기업 상담원 B씨는 올 들어 여러 차례 고객으로부터 “똑같은 제품이 해외 온라인 쇼핑몰에서 반값에 팔리고 있으니 국내 판매가를 내려 달라”는 내용의 항의성 이메일을 받았다. 그럴 때마다 그는 “국내 유통가는 미국 본사와 협의 하에 결정된 것이며, 해외에서 구입한 제품은 국내 애프터서비스를 받을 수 없다”는 회신을 보내고 있다. B씨가 근무하는 A기업은 이 같은 한국 내 해외직구(직접구매) 열기를 우려해 지난해 미국 본사에 한국으로부터의 온라인 접속을 차단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돌아온 답변은 “특정국가 접속을 차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온라인 쇼핑사 해외직구 행사 적극 벌여
해외직구에 대한 관심이 커진다는 것은 그만큼 소비자 위상이 예전보다 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급 채널이 다양해지면서 가격 결정권은 공급자에게서 소비자로 이동하고 있다. 지난 2012년 블랙프라이데이 기간에 한국으로부터의 인터넷 접속을 차단해 소비자들의 원성을 샀던 의류브랜드 갭(GAP)이 지난해에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이 단적인 예다. 국내 해외직구족들이 애용하는 유아의류브랜드 C의 경우 2000년대만 해도 연중 단 한번도 할인행사를 실시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지만 지금은 아웃렛이나 백화점에서 종종 30~40%씩 할인행사를 벌이고 있다.
반대로 해외에서 제품을 수입해오는 유통사들의 고민은 깊어지고 있다. 한 대기업 계열 의류회사 관계자는 “통관세, 유통수수료 등을 감안할 때 해외직구 수준으로 값을 내리기 힘든 구조인데, 소비자들의 가격 인하 요구가 커 회사차원에서 고민이 많다”면서 “장기적으로 수입유통업을 계속할지부터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관련업계에서는 폴로 랄프로렌을 수입하던 두산그룹이 지난 2010년 라이선스 계약을 끝낸 것도 미리부터 이런 변화를 예측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현재 폴로 랄프로렌은 한국법인인 랄프로렌코리아가 물건을 들여와 판매하고 있다.
해외직구 열풍에 대해 국내 유통사들은 표면적으로 “수요층이 겹치지 않아 별 타격이 없을 것”이라는 반응이다. 한혜원 랄프로렌코리아 마케팅팀 대리는 “해외직구 수요를 의식해 판매가를 낮출 계획은 없다”면서 “지난해 10월 전용 온라인 쇼핑몰을 열어 한국 내 배송시간을 줄이는 등 고객 서비스 개선에 치중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타미힐피거를 수입하는 SK네트웍스의 김지은 과장도 “우리가 들여오는 제품은 유럽산 라인으로 미국쇼핑몰에서 구입한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기 때문에 소비자들에게 이를 적극 알릴 계획”이라고 밝혔다. 애프터서비스 강화를 통해 ‘맞불경쟁’을 준비 중인 업체들도 있다. 삼성에버랜드 패션부문 관계자는 “구두나 잡화는 애프터서비스를 얼마나 잘 받느냐가 제품 수명과 직결되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한 서비스를 강화해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 국내 대형 백화점들은 온라인 쇼핑에 익숙하지 않은 고소득자, 4050세대를 타깃으로 명품 할인행사를 자주 열 계획이다. 사진은 지난해 12월 롯데백화점이 서울 중구 롯데호텔 사파이어불룸 행사장에서 연 ‘2013년 총결산 패션잡화 브랜드 패밀리 세일’
온라인 쇼핑업체들도 발 빠르게 준비하고 있다. 11번가, G마켓, 옥션 등 오픈마켓들은 홈페이지 내 해외쇼핑 공간을 마련, 고객들의 구매 편리성을 높이는 전략을 펴고 있다. 11번가는 해외직구 제품에 한해 ‘110% 보상제’를 실시, 구매 상품이 만약 위조품으로 확인되면 결제대금을 100% 환불해주고 10%는 포인트로 적립하는 소비자보호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소셜커머스 업체들도 구매대행 업체들과 손잡고 해외 유명브랜드 할인전을 기획하고 있다. 쿠팡은 지난 1월17일부터 27일까지 ‘2014 S/S 명품 컬렉션 기획전’을 열었다. 박은교 쿠팡 홍보팀 대리는 “128개 상품 중 83개 제품이 품절됐다”면서 “앞으로도 이탈리아 등 유럽 현지에서 상품을 지속적으로 직접 들여와 고객들에게 제공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위메이크프라이스는 아예 해외배송대행 서비스 ‘위메프박스’를 선보였다. 우정균 세븐존 대표는 “병행수입업체나 구매대행 업체들이 대형 오픈마켓이나 소셜커머스업체 아래 모이는 쪽으로 시장구조가 재편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삼성, 1년 무상 수리 결정 후 TV 직구 급증
새로운 유행은 또 다른 산업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수요가 있는 곳에 돈이 따라간다는 자본의 속성처럼 해외직구시대 개막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산업을 만드는 촉매제 역할을 하고 있다. 무엇보다 해외직구의 가장 큰 단점으로 지적받아온 애프터서비스 산업이 크게 달라지는 모습이다. 최근 해외직구를 통해 국내로 들어오는 가전 중 TV판매량이 크게 늘어난 배경에는 삼성전자가 지난해부터 해외에서 구매한 TV, 노트북, 카메라에 한해 1년간 무상보증을 해준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 됐다. LG전자도 PC노트북에 한해 1년 동안 무상으로 수리해주는 월드워런티 정책을 펴고 있다. 김명일 해외구매대행협회장은 “과거 동네마다 있던 전파사 같은 종합가전수리업체가 최근 용산 전자상가 주변에서 등장하고 있는 것이나 대형 백화점 근처에 해외명품이나 시계만을 수리하는 전문점이 생겨나고 있는 것도 병행수입과 해외직구 증가가 만든 생태계 변화”라고 설명했다.
동호회가 중심이 돼 물건을 공동구매하는 방식도 점차 늘어날 전망이다. 경기도 김포에 사는 정명수씨는 자동차 동호회 회원들과 함께 엑슨모빌이 만든 자동차 합성윤활유 ‘모빌’(5ℓ기준) 30개를 개당 35달러(약 3만7200원)에 구입했다. 정씨가 구매한 이 제품은 현재 11번가, G마켓 등 국내 오픈마켓에서 개당 12만원에 판매되고 있다. 경기도 분당에 사는 김정택씨는 자신이 타는 수입자동차 정품 부품을 해외직구로 구입한 사례다. 김씨는 “전문 카센터에 수리비를 내고 맡겨도 해외직구로 물건을 구입하는 것이 훨씬 싸다”고 설명했다.
CJ대한통운, 현대로지스틱스 등 대기업 계열 물류회사들은 미국, 유럽, 일본, 중국에 위치한 배송대행 업체들과 제휴, 배송시스템을 더욱 확대해나가고 있다. 해외배송시스템 이하넥스(eHanEx)를 구축한 한진은 해외직구족이 늘자 최근 고객이 현지 물류센터 발송일부터 3일 이내 한국에서 물건을 받아볼 수 있는 ‘The(더) 빠른 서비스’를 출시했다. 관련업계는 연내 한국 진출을 준비 중인 아마존이 어떤 기업과 손잡고 국내 배송을 벌이느냐에 따라 물류 서비스 판도가 크게 요동칠 것으로 보고 있다.
BC카드는 지난해 11월 블랙프라이데이를 맞아 ‘아마존 무료배송 프로모션’을 실시했다. 국내 해외직구 인터넷 카페에서 선풍적인 관심을 모은 이 행사는 BC글로벌카드로 아마존에서 결제할 경우 한국으로 들여오는 배송비를 무료로 해주는 서비스다. 아마존에서 직배송 받을 경우 발생하는 배송비가 전체 물건의 10%임을 감안할 때 상당히 파격적인 서비스였다는 것이 관련업계의 공통된 설명이다. 지난 1월19일까지 진행된 이 행사는 해외직구의 파괴력이 금융시장에까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김지은 VISA(비자) 홍보팀 과장은 “현재 배송대행업체 몰테일과 제휴해 배송비를 할인해주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으며 직구족을 겨냥한 획기적인 상품 기획도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해외직구가 만든 유통 패러다임 변화는 미국, 일본, 유럽 등 해외 교민사회에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 내고 있다. 미국의 경우 주마다 부과되는 판매세율이 제각각인데, 이 중 뉴햄프셔, 오리건, 알래스카, 델라웨어 등 4개 주는 판매세를 면제받는다. 상품별로도 부과되는 세율이 달라 가령 뉴저지주는 의류, 신발 구입에 부과되는 세금이 없다. 이 때문에 뉴저지주는 뉴욕, 델라웨어는 워싱턴DC, 오리건주는 시애틀공항을 통해 항공기 국제특송으로 물건을 배송해주고 있으며 이들 지역 한인사회에서는 현재 배송산업이 크게 성장하고 있다. 김재균 오마이집 팀장은 “미국 서부 오리건주만 해도 포틀랜드 정도에나 약간 한인들이 모여 살았지만 최근 해외직구 수요가 늘면서 한인물류 기업들이 상당히 늘어났다”고 말했다.
수출기업에게 가격 인하 부담 줄 수도
해외직구 수요는 국내 유통시장에 적잖은 영향을 줄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 1월23일 한국투자증권은 유통보고서를 통해 “해외직구 시장 규모가 커질수록 가전전문점과 백화점이 가장 큰 타격을 받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보고서를 작성한 여영상 애널리스트는 “가전제품과 잡화, 의류, 화장품이 해외직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이라면서 “현대백화점과 신세계, 롯데하이마트에 대한 투자의견을 중립으로 하향한다”고 밝혔다. 또 신세계 미래정책연구소는 지난해 11월 펴낸 2014년 유통업 전망 보고서에서 “해외직구 증가는 경쟁 심화로 온라인 업체들의 수익성 악화로 이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일단 롯데, 신세계, 현대 등 백화점 3사는 해외직구 시장 확대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대신 온라인 쇼핑에 익숙하지 않은 고객들을 위한 명품 할인 이벤트를 자주 마련한다는 계획이다. 장대규 신세계 과장은 “해외직구와 백화점 고객은 연령대나 소득수준이 정확하게 겹치지 않기 때문에 큰 영향은 없을 것”이라면서 “고객 응대 서비스와 품질에 대한 신뢰를 토대로 마일리지, 포인트 적립 등 다양한 고객 서비스를 제공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아울러 파주, 성남, 이천 등 경기도 일대에 프리미엄아울렛을 대거 지어 합리적 고객층 수요를 충족시킨다는 전략도 병행하고 있다.
그러나 해외직구가 경우에 따라서는 유통시스템 전체를 획기적으로 개선시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최근 국가 간 무역 장벽이 낮아지거나 점차 사라지고 있는 것은 예사롭게 볼 부분이 아니다. 한·미, 한·EU FTA(자유무역협정) 체결 시 수입 유통업계는 관세가 내려가면 국내 판매가 또한 동반 하락할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실제로 효과는 미미했다. 지난해 8월 대한상공회의소가 실시한 설문조사에 참여한 인터넷쇼핑족 1650명 중 16.3%는 ‘FTA 발효 후 해외브랜드 상품의 국내 수입가가 올라갔다’고 응답했으며 75.0%는 ‘그대로’라고 답했다. 응답자 10명중 9명이 관세 인하가 수입가 하락과는 별다른 상관이 없었다고 본 것이다.해외직구 열풍은 FTA 효과를 톡톡히 볼 것이라고 자신하던 B2C수출 기업에게는 국내 판매가 인하 압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한 무역업계 관계자는 “현대차나 삼성전자는 그동안 국내 고객들에게는 제값을 다 받고 해외고객들에게는 대대적인 할인행사를 벌여 시장점유율을 높이는 전략을 펴왔는데, 이는 국내 소비자 입장에서 볼 때 역차별적인 요소”라고 말했다. 해외시장 확대를 위해 적극적으로 판촉행사를 벌인 것이 해외직구 확대라는 역풍을 맞아 국내 유통가 인하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명품 수입업체보다는 국내 기업들이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함승희 KDB대우증권 애널리스트는 “해외직구로 국내 유통가격이 내려가면 그동안 이 가격대를 차지하고 있던 우리 기업들의 설자리가 작아지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으며 특히 의류산업이 상당한 피해를 볼 것”이라고 전망했다. Tip | 수입가 왜 이렇게 비싸나
유통 수수료 마진 탓, 국내 소비자는 봉?
미국 잡화 브랜드 코우치(Coach)가 만든 ‘매디슨 카페 캐리올 인 핀턱 레더가방’의 국내 판매가는 91만5000원(한국 공식 홈페이지 판매가)이다. 그러나 이 제품을 미국 공식쇼핑몰 코우치닷컴(www.coach.com)에서는 438달러(48만4000원)에 구입할 수 있다. 여기에 국제배송료 17달러와 관세 38달러, 부가세(10%) 등 배송비용 51달러30센트를 합친 해외직구 제품값은 60만9900원이다. 약 30만원 차이가 난다. 왜 이렇게 국내와 해외 판매가가 큰 차이를 보이는 걸까. 수입업계는 국내 복잡한 유통구조와 높은 수수료를 원인으로 지목한다. 이탈리아에서 중고가 잡화 브랜드를 국내로 들여오고 있는 J씨는 얼마 전 홈쇼핑 관계자로부터 해당제품을 판매하는 조건으로 매출의 41%를 수수료 조로 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현재 해당 제품을 이탈리아 현지 판매가의 반값에 들여와 여기에 3.5배를 붙여 국내에서 판매 중이다. J씨는 “부가세 10%에, 창고관리비, 직원 인건비, 사무실 운영비, 애프터서비스 비용 등 수수료로 30%, 여기다 백화점 편집매장 입점 수수료로 35%로 내려면 조달가보다 3.0~3.5배 비싸게 팔아야 한다”고 말했다. J씨는 그러면서 “이는 수입제품이 모두 팔린다는 것이 전제조건이며, 물건이 다 팔리지 않아 재고관리에 들어가는 비용까지 감안하면 수입가는 더 올라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관련업계는 지금의 비싼 유통수수료 구조가 깨지지 않으면 수입가 인하는 불가능하다는 데 공감을 표시한다. 정부가 지난 1월 물가관계부처회의를 통해 병행수입활성화 방안을 마련한 것도 고가의 수입브랜드를 공산품 물가상승의 주범으로 보고 있어서다. 서정연 신영증권 애널리스트는 지난 1월29일 쓴 ‘병행수입&해외직구의 모든 것’이라는 보고서에서 “지난 2011년 공정거래위원회가 대형 유통업체들을 상대로 중소업체에 대한 납품수수료를 인하해줄 것을 요청한 것과 비슷하게 전개될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