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실습이요?"
"내가 간호학과잖아. 다음주부터는 병원에 나가야돼."
"어디 병원에요? 우리학교 병원이요?"
"응. 3주동안 학교는 못나올거야. 잘지내."
그를 한번 쳐다보고는 미소를 한번 짓고 그들과 헤어질려고 할 때였습니다.
"몇시에 끝나요?"
이 질문은 그가 한 것이에요. 어색한 존댓말...
"네가 그걸 왜 묻냐?"
지희는 퉁명스럽게 말을 했지만 그는 신경도 안썼읍니다.
"6시면 끝이 날거에요. 왜 관심있어요?"
"북쪽학교 옆에 붙은 그 병원...?"
"그럴걸요."
지희는 절 쳐다보더군요. 내가 웃으며 말을 하니까 약간 이상했었나 보죠.
월요일은 학교가 아니라 병원으로 출근을 했습니다. 실습이라지만 그냥 간호사언니들 따라다니며 구경하고 잔신부름해주는게 전부였었죠. 그래도 힘은 많이 들었습니다.
저녁에 일을 마치고 나니 첫날 하루만인데도 녹초가 되어 버리더군요. 친구들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집까지 갈일이 막막합니다. 임시로 기숙사로 간 친구들도 많았습니다.
옷을 갈아입고 저벅저벅 병원을 나왔습니다. 병원은 한창 밝은 조명으로 빛이 나고 있었지만 외례진료가 끝이나 사람들의 모습은 많이 줄어 있었습니다.
밝은 조명. 병원길을 따라 내려 오고 있는데 왠 외제지프가 천천히 내 옆으로 다가 왔었습니다.
"야 탈래?"
야타족이 생겼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무슨 병원까지 와서 지랄입니까? 전 이런 생각을 하며 그냥 모른체 걸었습니다.
"야 임마 타."
차쪽으로 한번 쳐다보았습니다. 해가 완전히 저문것은 아니었지만 첨에는 누군지 몰랐습니다. 그냥 듣지 않은척 조금 빠른걸음으로 걸었습니다.
"너 공주냐? 내가 내려서 문 열어줘야 돼?"
"뭐에요?"
기분이 나빠서 어떤놈인지 자세히 볼려고 그쪽으로 홱 돌아섰었지요. 그였습니다. 그는 차를 세우고는 내렸어요.
"여긴 어쩐일로...?"
"나 차 있다. 하하. 너 왜 모른척하고 그냥 가?"
"이름을 부르지... 놀랬잖아요?"
"체. 너 모르는 사람이 너 그 미모 때문에 타라고 그러는 줄 알았어?"
"네."
"착각이 참 심하구나. 아무리 밥 잘먹고 할일이 없다고 이 미모를 보고 차 태워 주겠냐?"
"말이 심하네요. 여기는 왜 왔어요?"
"너 태워 줄려고. 여섯시에 끝난다면서 일곱시가 다 되어 가잖아."
"정말 나 태워 줄려고 온거에요?"
"그래. 집에까지 태워줄께. 밥 안먹었으면 밥먹고 가도 되는데..."
"고맙네요. 근데 정말 석규씨 차에요?"
"타.!"
차 괜찮던데요. 뭐 체로키라고 했던가? 하여간 지프인데도 승차감이 좋았어요.
"면허증은 있어요?"
"이년이 넘었다. 군대가기 전에 땄어."
"이 차는 누구꺼에요?"
"내차라니까. 산지는 좀 되었는데... 언제 나한테 도움이 될거야. "
"무슨 도움?"
"차는 돈이잖아. 하하."
"우리집 알아요?"
"당연히 모르지."
"근데 이렇게 막가도 되는거에요?"
"과천이라며? 밥은 안먹어? 나는 밥 안먹었는데..."
"오늘은 첫날이라 너무 피곤하네요. 그냥 가요."
그가 운전하는 좌석 옆에서 난 한동안 잠이 들었지요. 한참 잠에 취해 있는데 그가 날 깨웠어요.
"야. 야... 야 신연주. 일어나. 여기서부터 과천인데... 니네집 어디야?"
눈을 떠보니 우연찮게 그곳은 우리집 근처였습니다.
"저기 교회앞에 내려 주세요."
그는 교회앞에 차를 세우더니 문을 홱열고 내리더군요. 전 혹시나 했어요. 내쪽 문을 열어 줄려는 줄 알았지요.
"왜 안내려? 너 문열줄 몰라?"
잠시 내리는데 뜸을 들였던 나는 좀 무안했었습니다.
"왜 내렸어요?"
"저기 포장마차에서 우동하나 사먹고 갈려고 그런다. 저 편의점이 너네 가게야?"
"네."
"잘가. 난 우동먹으러 간다."
"같이 가요."
그가 날 계속 데리러 올지 기대가 되었습니다. 참 편하게 왔거든요. 그리고 그와 함께 온게 기분이 좋았습니다. 비록 잠은 들었었지만 뭐랄까? 좀 황홀했다고 해야 하나요.
"내일도 올거에요?"
그는 우동을 입에 물고는 답을 하더군요.
"병원에? 모르지. 오늘은 학원 빠지고 온거여. 괜히 일찍 와가지고..."
"왜요? 오늘 몇시에 왔는데요?"
"몰라도 돼. 하여간 학원 마치고 가면 일곱시가 조금은 넘을텐데..."
"그럼 그때 올거에요."
"몰라. 내 맘이지 뭐."
조금 더 이야기하면서 우리집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연락처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 조심해서 가요."
"너도 열심히 해."
늦은 저녁 무렵 그는 밝은 표정으로 나를 집까지 태워주고는 자기의 갈길로 갔습니다. 좀 행복하더군요.
이제는... 7
다음날 병원을 마치고 한시간을 기다렸습니다. 그는 나타나지 않았어요. 갈까 말까 고민이 들었지만 전 한시간을 더 기다렸습니다.
병원앞 벤취앞에서 차에서 내리고 타는 사람들을 구경했습니다. 내 옆에서 담배피는 사람들도 보았구요. 한명은 목발을 짚고 한명은 휠체어에 앉아 서로 자신의 서러움을 얘기하며 감싸주는 사람들도 보았습니다. 전조등 불빛이 보일때마다 혹시나 그가 나타날까 일어서 고개를 들었지만 그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날 그는 왔었어요. 8시가 훨씬 넘어서요. 요란한 차소리가 나더니 밝은 전조등 조명... 차에서 내리는 그를 보았습니다. 한참을 두리번 거렸는데 저를 보지 못했나봐요. 저는 잠시 아는체를 안했습니다. 앉아 있던 벤취에서 가만히 앉아 그를 보았습니다.
그는 나를 찾지 못하자 비상등을 켜둔 차는 내버려두고 병원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뭔일일까 따라 가볼까도 생각을 해보았지만 지금까지 기다린 내수고가 원망스러웠는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병원에 들어가서는 그는 자판기 커피를 한잔 뽑아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내가 앉은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의 벤취에 가서 떡 앉더군요.
두시간이나 늦게 왔으면서 내가 가지않고 기다리고 있을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여기서 뭐 하세요?"
난 그에게 다가가서 약간은 퉁명스럽게 말을 걸었습니다.
"어! 안가고 있었네. 커피 마시잖아."
그의 옆에 앉았습니다. 여린 병원의 백열등 조명아래 벤취들은 쓸쓸해 보였습니다. 어둔 불빛속에 숨어서 닭을 뜯어 먹고 있는 어느 환자의 모습이 그의 머리를 건너 보였습니다.
"여긴 왜 앉아. 집에 가야지."
"두시간이나 늦었고 내가 없었으면 그냥 가지 여긴 왜 앉았어요? "
"커피마시잖아. 늦게 끝났냐?"
"아니요. 두시간 넘게 기다린거죠. 저기 앉아 있었는데 못 봤어요?"
"봤으면 여기 앉아 혼자 커피 마시겠냐? 근데 왜 기다렸어? 그냥 가지."
"치. 그럼 석규씬 왜 왔어요?"
"나? 너 데리러..."
그는 내가 실습을 받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나를 데리러 왔습니다. 그래서 나도 한시간씩 꼭 그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어느날 저녁 그와 고급술도 파는 레스토랑을 간적이 있습니다. 그가 날 데리고 간 것이었지요. 그냥 식사만 하러 간곳 치고는 넓고 고급스러웠으며 그곳의 서빙보는 여자들은 요염했었습니다. 룸도 있었습니다.
그는 학원을 열심히 다녔습니다. 한달정도 다녔는데 실력이 많이 늘었나 봅니다. 지희를 보았거든요. 그녀는 나에게 또 자랑을 했습니다. 이번엔 수채물감으로 채색된 그녀의 모습을 자랑했습니다.
"이것도 석규씨가 그려준거야?"
"네. 석규씨 그러니까 좀 우습다."
"수업시간에?"
"아니요. 제가 시간을 좀 내 주었죠."
"시간을 내 주다니?"
"저번주 일요일날 과천 대공원을 갔었어요. 그때 제가 모델을 좀 서 주었죠."
"둘이서만 갔니?"
"예. 그가 미술관 구경간다길래. 따라 갔었어요."
"뭐타고 갔는데?"
"버스타고 갔어요. 어디서 났는지 화구통을 들고 왔더라구요. 학원 다니나봐요."
"응. 그래."
많이 부럽더군요. 짙은 봄빛으로 채색된 배경속에 밝게 웃고 있는 지희의 모습이 담긴 그 그림이...
두번째 실습을 나갔을때는 유월이었습니다. 그때는 그가 날 데리러 온적 보다는 그러지 않은 적이 많았습니다. 시험기간이었거든요. 짧은 옷사이로 사람들의 살색이 눈부시게 짙어만 갔습니다.
이제는... 8편
방학이 되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미술학원을 열심히 다녔습니다. 밝은 모습의 그가 보기 좋았습니다. 그는 학원의 고삼들과 재수생들과도 친구처럼 지냈습니다. 하지만 학교에서처럼 나이는 속이진 않았습니다. 방학이라 그는 낮에 학원을 다녔어요. 내가 종종 학원을 찾아간적이 있었는데 그는 나를 학교에서처럼 모른척 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쁘냐?"
"예. 형 재주 좋네요. 어떻게 오수생이 저런 예쁜 대학생누나하고 사귈수 있어요. 주제를 알아야지...."
"사귀는거 아녀. 쟤가 날 따라다니는거야. 임마."
날 앞에 세워두고 참 자기맘데로 말했습니다. 그가 학원에서는 오수생으로 속이고 있더군요.
"확 불어버려요."
"뭘?"
"관둘께요."
그는 학원을 같이 나오던 학생들과 헤어져 나하고만 있게 되었을때 부탁 한가지를 했습니다.
"내가 유채화 그리는걸 배웠거든..."
"그래서요?"
"내가 좀더 능숙해지면 모델좀 서라."
"무슨...?"
"사진도 찍어야 하는데..."
"혹시..."
"뭘? 누드모델 그런거 안 시킬테니까. 그냥 웃는 얼굴이나 나중에 좀 빌려줘."
"쳇. 아쉽네요."
"왜? 누드모델 안시켜줘서?"
"아니요. 그냥 이제야 그 소리가 나와서요."
"이제야라니?"
"지희는 두번이나 그려 주었더군요. 잘 그렸던데요."
"하하. 그건 아직 습작 수준이야. 내가 잘 그려서 줄테니까. 꼭 모델 서 주어야 돼."
"알았어요."
방학때 그가 엠티를 간적이 있었습니다. 그 엠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전 묘한 감정을 일으키는 말을 들었습니다. 지희에게서요.
엠티를 갔다온 지희를 동아리방에서 만났습니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나에게 묻더군요.
"언니. 나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요."
"그래 잘 되었네. 누군데?"
"언니도 몇번 봤잖아요. 우리과 석규라는 애요."
"응?"
그녀의 입에서 나온 '석규'라는 말이 참 낯설고 당황스러웠습니다.
"왜 그가 좋은데?"
"모르겠어요. 그냥 자꾸 좋아지네요. 오빠같아요. 전 오빠가 없는데... 오빠했으면 좋겠어요."
"단지 그것뿐이야?"
"그것뿐만은 아니에요. 왠지 그늘이 있어보여요. 그래도 웃음짓는 그에게 괜시리 마음이 이끌려져서요."
"그걸 왜 나한테 말하는데...?"
"그냥 같은 여자로서 내맘을 숨기고만 싶지는 않아서요. 그도 날 좋아하는지 묻고 싶었는데... 언니 표정이 그렇게 밝질 않네요."
"내가 왜?"
"얼굴빛이 많이 변했어요. 다음에 물어 볼께요."
그랬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남에게서 듣는것은 기분좋은게 아니었습니다.
그날 저녁 그를 보았습니다. 그는 모르고 있겠지요. 그런 표정이었으니까요.
"엠티 잘 갔다 왔어요?"
"그럼. 근데 밤에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는 모르겠어."
"왜요? 술마시고 잤구나."
"먹기 싫었는데 자꾸 마시라 그러잖아. 나보다 나이도 어린것들이...선배랍시고..."
"쳇 그러길래 왜 나이는 속였어요?"
"일어나니까 내가 지희의 팔을 베고 자고 있더라. 허 참내."
"네?"
"잘 사람들은 방한개를 주고 혼숙을 시켰걸랑. 나는 분명 놀던방에서 잠이 든거 같았는데 일어나보니 딴방에서 그것도 지희 옆에서 잤었다는 거지. 팔베고..."
"잘 하시네요."
"뭘? 난 아무것도 모르고 그랬는데..."
"그러지 마세요. 오해받기 쉬워요."
"그래. 그런데 내가 뭘 오해받을 짓 했다고..."
"딴 여자한테도 저한테처럼 이런식에요?"
"조금은 다르겠지만 그런데 왜?"
"훗. 지희가 그런말 한 걸 조금은 이해가 되는군."
그는 내가 독백처럼 한 말을 듣고는 궁금해 물었습니다. 그의 표정엔 천진난만함이 있었습니다.
"지희한테 잘해주세요."
"잘해주고 못하고가 뭐 있어. 같은과 친군데..."
"지희가 오빠한테 감정이 생기고 있나봐요."
"무슨 감정?"
"좋아하는 감정이요. 그녀가 싫다면 처음부터 맘 아프게 하지는 말구요."
"날 좋아할 수도 있는거지 뭐. 그리고 내가 무슨 맘을 아프게 한다고..."
"풋. 그냥 좋아하는 감정 말구요. 사랑하는 감정이요."
"그 조그만 녀석이 벌써? 요즘 애들 빠르구나."
"걔가 왜 애에요. 대학생인데..."
"근데 네가 그 얘기를 왜 하냐?"
"나한테처럼 지희한테도 그러는게 아닌가 해서요."
"왜 너도 나한테 좋아하는 감정이라도 있냐?"
"네."
참 쉽게 난 그에게 처음 사랑고백을 했던거 같아요. 조금은 장난스럽게 말이죠. 진지해지고 싶었는데 그는 그렇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저도 진지해지고 싶진 않았나 봅니다.
"안되는데..."
"왜 또 안되요?"
"그냥 내가 자신이 없어서... 내 미래는 아직 그려지지 않거든..."
"괜찮아요. 전 사람 잘 잊고 하니까... 책임지려 하지는 말아요."
"야. 신연주. 내가 너한테 책임질 일 저지른거 있냐?"
"아니요. 그렇게 들렸어요?"
"응."
난 그가 내맘속에 있다가 떠나고 또 들어왔다가 떠나고 해서 한 말이었는데 그는 전혀 엉뚱한 대답으로 말을 돌려버렸습니다.
시간이 흐른 여름날에 그는 사진기를 들고 와서는 내 얼굴만 한통을 찍어 갔습니다. 같이 한장쯤 찍을 만도 했지만 내 얼굴만 클로즈 업(close up)해서 찍어 갔습니다.
"야 좀 웃어봐. 살포시 미소짓고..."
"몇장이나 찍을려고 그래요?"
"한통다..."
"왜요?"
"내일 시간 되니?"
"뭐 바쁜일은 없는데..."
"그럼 스케치하러 가자."
"무슨...?"
"너 모델 서준다고 했잖아."
"어디로요?"
"배경좋은데로..."
다음날 그와 함께 야외로 나갔습니다. 그는 A4지 여덟장크기의 캔버스를 하나 들고 왔더군요. 좀 쪽 팔렸습니다. 자연농원으로 갔었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이 가만히 앉은 날 자꾸 쳐다보았거든요. 별로 그리지도 않았어요. 그냥 윤곽만 잡았더군요. 배경만 요란하게 낙서 비슷하게 해 놓구요. 그날 스케치하러 갔다가 놀이기구만 타고 왔던거 같아요.
그해는 그와 그런데로 연인처럼 지냈던거 같습니다.
가을날 난 그가 채색해준 잔잔한 풍경속에 시를 써 시화를 만들어 우리 동아리 전시회때 걸었습니다.
그 시화는 그가 뺏어 갔어요. 그에게 주고 싶었는데 잘 됐지요 뭐. 어느날이 되면 잊을 날 있겠지요. 하지만 그 어느날이 영영 오지 않을것만 같습니다.
이학기가 채 끝나기 전에 그와 또 이별을 했습니다. 저한텐 아무이유도 없었습니다.
초겨울 어느날 집으로 전화가 왔었습니다. 그였습니다. 집앞이라며 좀 나오라고 그러더군요.
그는 교회앞에서 신문지로 포장된 캔버스를 들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교회앞 벤취에서 그와 대화를 했었습니다.
"나 미대 원서 썼다가 들켰어."
그의 입술은 찢어져 있었습니다.
"맞은거에요?"
"한대 맞았지. 접수했던 원서는 찢어졌어."
"오늘 맞은거에요? 아직 피가 나요."
"괜찮아. 맞은거는 하나도 안아파. 이거 너 그린 그림이야. 나중에 집에 가서 봐."
"진짜 미대 갈려고 생각했던 거에요?"
"응. 하지만 포기할래."
그말을 할때 그의 입술은 서럽게 떨리고 있었습니다.
"부모님이 날 분명히 키워주신것은 맞아. 그리고 그 은혜를 잊어선 아니 되겠지. 하지만 내 삶도 있는데...너무 소유하려고 하시는거 같아. 난 소유물이 아닌데...다른 부모들도 나처럼 자식 키워준걸 그렇게 티낼까? 나한테는 이제 티내는걸로 보여."
"예? 무슨말인지...?"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나한테 이럴수 있냐고 그러시는데... 내가 아버지의 의도데로 되지 않는게 순전히 내 잘못일까? 내가 하고 싶은것을 한다는게 그렇게 큰 불효일까? "
"그건... "
"너에게 이런말 해서는 안되겠지만... 우리아버지는 탈세자에다 폭력조직과도 연계되어 있어. 법조계에도 아는 사람이 많은가봐. 내가 법조계로 나간다면 분명 또 갈등할거야. 그것도 싫지만...내가 꾸는 꿈은 왜 무시되어져야 하지. 길러주었다고 꼭 아버지의 의도데로만 살기는 싫은데. 난 진짜 나중에 효도할 자신이 있어. 진짜 내맘은 그런데... 나보고 불효자래... 맘데로 내 갈길을 정했다고... 왜 날 이해해주지는 못하시면서 자길 이해못한다고 야단을 치실까?"
"미안하네요. 아직 난 석규씨에게 뭐라고 말을 못해주겠어요."
"그래. 나 휴학했어. 그리고 집에 안들어갈거야."
"그럼 또..."
"뭘?"
"또 못보는거에요?"
그는 울먹거리다 나를 보더니 미소를 지었습니다.
"왜 못봐. 내가 집나간다고 어디 갈데나 있나? 아버지 보호속에서 살았어. 막막하게 혼자 사회속에 남는거. 그런거 나 못해. 자신도 없을뿐더러 그렇게 하지도 않을거야. 그냥 잠시 바람 좀 맞고... 정신을 가다듬어서 아버지가 하라는거 하면 되는거지 뭐. 효도할려면 흉내라도 내어야지..."
"그렇게 생각하지는 말아요. 다시한번 잘 말씀드리지 그랬어요?"
"뭐? 내가 하고 싶은거? 대화가 안돼. 믿는다면서 때리긴 왜 때리시는지 몰라. 때리시진 않으셨는데...아버지를 이해하자면 할 수도 있지만... 모르겠다. 나 간다."
"정말 예전처럼 나한테서 사라지진 마세요. 정말 그러면 안돼요."
"알았어. 너도 잘해라."
그의 뒷모습이 불안해 보였습니다. 그는 자기차를 타고 나왔더군요. 그 차를 보니까 더 불안해 보였습니다.
그후로 그를 일년 반이상 볼 수가 없었습니다.
캔버스에는 내가 있었습니다. 내가 봐도 사랑스런 미소를 품으며 맑은 하늘을 등지고 있었습니다. 나는 저런 미소를 지어본적이 없습니다. 나조차도 지을수 없는 미소를 그는 그림속의 내모습에 담고 있었습니다. 그는 항상 내 모습에서 저런 미소를 보고 있었던 것이었을까요?
그가 모습을 감춘지 몇달이 지나고 봄이왔습니다. 전 그를 잊을 수 없었지요.
동아리방에서 지희를 보았습니다. 지희는 날 보더니 뜬구름 잡듯 묻더군요.
"석규가 휴학을 했어요. 혹시 어디 갔는지 몰라요? 언니는 알죠?"
그녀의 질문에 당황했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혹시 그를 만나지나 않나 궁금증도 있었습니다.
"응? 내가 뭘?"
"언니. 석규 잘 알잖아요."
"네가 그걸..."
"진짜구나. 말 좀 해줘요."
"석규씨에 대해서?"
"네."
"너 진짜 석규씨 좋아했니?"
"그럼 가짜로 좋아할수 있어요?"
"나하고 연관시킨건 왜니?"
"예전에 엠티가서 석규가 술먹고 언니얘기 한 줄 모르죠?"
"응?"
"석규가 술취하니까 볼만하던데요. 꺼이꺼이 울다가... 웃다가... 그러다 잠이 들었었어요."
"너 팔베고 잤다고 했는데..."
"진짜 아는 사이에요? 그날 잠든 그를 나하고 종석이 선배가 잠자는 방에다 옮겼어요. 그냥 옆에 앉아 있었는데 첨에는 내 다리를 베더군요. 종석이 선배도 술먹은 거 때문에 그의 옆에서 잠이 들었어요. 그도 잠든줄 알았는데 이야기를 시작하더군요. 조금있으니 언니이름이 나왔구요.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물었어요. 연상의 여자 짝사랑하냐고. 고삼때 언니가 이삿짐 내리는거 보고 짝사랑을 시작 했었는데, 우산도 안씌워 주고... 무슨말인지 모르겠더라구요. 집에 올때마다 가게를 쳐다보고 왔데요. 세상에 언니보다 예쁜 여자는 없다고 하면서 날 초라하게 만들었어요. 그리고 요즘은 자주 만난다고 하면서 씩 웃고는 잠이 들었어요. 그때 나도 잠이 들었나보죠. 일어나니 그는 없었고, 아침에 언니이름을 말하며 아냐고 물었더니 모른다고 하길래 딴사람인가 그냥 모른채 했었는데..."
그가 많이 보고 싶었습니다. 하마터면 눈물이 맺힐뻔 했어요. 그는 내가 그를 인식하기도 전에 날 좋아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고맙기도 하고 원망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는 나한테 그때까지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 없었거든요.
"그는 너보다 훨씬 먼저 내가 좋아한 사람이야."
"네?"
"그가 고삼때 난 고일이었어. 우산얘기를 했었어? 그냥 씌워달랬음 조금 더 따스한 말 한마디 더 할 수 있었을텐데..."
"석규가 고삼때 언니가 고일?"
"그의 모습은 자신의 나이보다 오히려 어려보여."
"뭐에요? 비밀이 있는거에요?"
"나중에 말해 줄께. 너 최근에 석규씨 학교서 본적 없니?"
"없어요. 석규 아버지가 석규 찾고 있는줄 모르시나 봐요? 집을 나갔는데 몇달째 연락이 없대요. 그래서 혹시나 언니에게 물어봤는데... "
"정말 집을 나갔데? 나한테는 바람만 쐬고 집에 들어간다고 했는데... 그러면..."
"둘이 사귄거에요? 무슨 말이 그래요?"
"석규씬 너보다 네살이 많아. 그것만 알아둬. 그리고 혹시 보면 나한테 좀 알려줘."
그는 아예 집을 나간거 같았습니다. 그런데 왜 나한테도 연락을 끊었는지 많이도 야속했었습니다.
이제는... 9편
그를 잊기가 힘들었습니다. 아니 잊지 못했습니다. 그가 그려준 그림을 보면서 이제 다시는 이런 미소를 지을 수 없을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다 꿈에서 그를 보게 되면 하루가 온통 그의 모습으로 물들어 멍했습니다. 그래도 시간이 약이더군요. 한동안 아팠던 가슴은 일상의 평온함속으로 숨어들어가 그것을 건드리지 않는다면 아프지 않을것 같았습니다. 일년이 흘러가 버렸습니다. 전 졸업을 했습니다.
졸업을 하고 학교 병원에서 내 간호사 생활은 시작이 되었습니다. 한동안 멋모르는 바쁜생활이 계속 되었습니다. 어떤날은 별을 보며 집으로 향했고 어떤날은 별을 보며 병원으로 갔습니다. 또 4개월이 흘러갔습니다.
낮동안의 꾸는 꿈속에 어느날 그가 나타났습니다. 흐릿한 영상속의 날 보며 어색한 미소를 짓는 고교때의 그의 모습이 날 가슴떨리게 했습니다.
전 유월달에 집을 나왔습니다. 집에서 출퇴근하기가 너무나 힘이 들었습니다. 병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취방을 하나 장만했습니다.
높지 않은 이층의 한곁을 차지한 그방은 별로 채우지 못한 내 짐들로 낯설었지만 내 모습이 담긴 그가 그려준 그림을 걸었을 때 내 곁으로 와 내방이 되었습니다.
내가 그곳에 방을 얻고 난뒤 며칠이 흘렀을 때였습니다. 그날은 기억해요. 내가 자취방으로 언제 이사를 갔는지는 기억하지 못해도... 그날은 6월 24일이었습니다. 그날은 새벽근무를 했던 날이었습니다. 몹시도 졸린 상태로 아침의 시원한 공기를 지나치며 내 방으로 퇴근을 했습니다. 우유나 하나 사먹을까하고 근처 수퍼로 들어갔을 때였습니다.
그때 과자박스를 나르는 트럭이 한대 그 상점 앞에 서 있었고 물건을 배달한 한 청년이 일을 마치고 막 그 트럭에 탔었습니다. 트럭에 별로 눈길을 주지 않은 채 우유를 뜯으며 상점을 나올때였습니다.
'빵. 빵!' 거리는 경적음. 난 고개를 들었고 그 트럭 운전대를 잡고 있는 그를 보았습니다.
조금 더 길었다면 그러지 않았을 겁니다. 조금 더 짧았더라도 그러지 않았을겁니다.
그를 보지 못했던 시간이 조금 더 길었더라면 그리움 속 가물해 지는 그의 모습 때문에 반가웠을터이고 그를 보지 못했던 시간이 조금 더 짧았다면 많이도 그리워 했기 때문에 반가웠을 터인데 그날은 그의 장난처럼 웃는 모습이 싫었습니다. 피곤한 몸상태도 그의 모습에 반가움보다는 원망스러움을 더해 주었습니다.
트럭에서 내리지도 않은채로 창에서 날 보며 웃고 있는 그의 모습은 한동안 저사람 때문에 많이 가슴 아팠던 나를 너무나 실망스럽게 했습니다. 그가 과자 배달하는 차의 운전수가 되어 있었던 사실도...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한 궁금증도 모두 허문채로 모른척 그냥 트럭을 지나쳤습니다.
'빵. 빵!' 몇번 더 울리는 경적음. 그러나 난 그냥 걸었습니다. 걸리는 시동음을 들었습니다. 날 지나치는 트럭속의 어색하게 웃으며 말없이 인사를 하는 그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사라졌습니다.
그날을 후회했습니다. 그 다음날부터 몇날을 혼자 울어야 했습니다. 한순간의 원망스러움 뒤에 너무나 큰 그리움이 숨어 있었던 사실을 그때는 왜 몰랐을까요. 그 상점을 찾아가 그의 소재를 찾으려 했으나 소용없었습니다. 그날의 채 일분도 안되는 짧은 만남으로 그해 여름을 많은 비소리로 내 가슴을 적셔야 했습니다.
그는 왜 과자 배달하는 차의 운전수가 되어 있었을까요? 난 그가 타던 차를 팔아 하고 싶어하던 미술공부를 하는줄 상상했었습니다. 전혀 엉뚱한 모습으로 변해 있었던 그날의 느낌은 어색했습니다.
그해 가을이 왔습니다. 추석도 지난 어느 가을날이었습니다. 아침에 출근을 하는 날이었습니다.
그를 보았던 상점을 지나 마을버스를 타려고 좁은 아스팔트길을 걷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빵. 빵!' 경적음이 내 뒤에서 울렸습니다. 낯익은 경적음이었습니다. 고개를 돌려 보았습니다. 혹시 과자 배달 트럭이 있을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 경적음은 그때 그가 울렸던 투박한 트럭의 경적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야. 신연주. 태워줄까?"
예전에 그가 타고 다니던 외제 지프. 그리고 그가 밝게 웃으며 나에게 손짓했습니다. 한동안 멍한채로 난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또 모른척 할거야?"
그말은 하며 그는 차에서 내렸습니다. 그때의 내 마음을 읽었던 것처럼 차에서 내려 조수석의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타라아..."
애타게 그렸으면서, 그의 모습이 참 반가웠으면서도 난 그때도 이상하게 밝은 표정을 짓지 않았습니다.
"나 알아요? 석규씨."
"그렇게 물으면서 이름은 왜 부르냐?"
"그럼 나 며칠만에 보는 줄은 알아요?"
"좀 오래 되었지. 미안해."
"그런데 이렇게 자연스러울 수 있어요. 석규씨는 항상 그렇나요?"
"자연스러울 수 있어. 타라. 태워 줄께."
"싫어요. 그냥 사라졌다 이렇게 불쑥 나타나면 내가 반가워라도 할 줄 알았어요?"
"우리 아버지가 신고를 해서 도망다녔다. 왜."
"예?"
그는 또 이상한 대답을 했습니다.
"그럼 이거라도 가져가. 저녁에 너네 병원으로 갈께."
그는 나에게 스케치북 하나를 주었습니다.
"내가 어디 근무하는 줄은 알아요?"
"학교 병원 아냐?"
"맞아요."
"내가 집에다 전화를 해 봤더니 너네 아버님이 날 아시더라. 그 비에 젖어 찾아 왔던놈...하하. 이 근처로 이사를 갔다고까지 친절하게 가르쳐 주시던데..."
"그랬어요? 석규씨가 오죽 이상한 모습으로 아빠눈에 들어갔으면 그랬겠어요."
사실은 가족 모두에게 혹시나 석규라는 사람한테서 전화가 오면 꼭 내 연락처를 알려주라고 부탁을 했었습니다. 사는곳도 가르쳐 주라고 당부를 했었구요.
"6시에 끝나냐?"
"아니요. 5시에요."
"그래 그럼 그때 보자."
조금만 더 말했다면 탔을텐데... 그는 조수석 문을 닫더니 그냥 가버렸습니다. 아침 마을버스는 힘들었읍니다.
스케치북에는 여러곳의 풍경들이 스케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각기 다른 모습으로 웃고 있는 내 모습이 그 풍경 여백을 차지하고 있었구요.
하루종일 설레었습니다. 퇴근시간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애써 태연한 표정으로 병원을 나왔습니다. 그리고 밝게 웃을 수 있었습니다. 그가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꽃도 한아름 안고 있었습니다.
차문도 열어주었습니다. 그렇게 하는데 타지 않을 수 있겠어요?
내가 조수석에 앉았을때 그는 씩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 자린 일년 팔개월만에 사람을 앉힌거야. 헤헤. 내가 그 자린 네 자리로 정해 버렸거든..."
그가 한말은 날 조금 감동시켰습니다.
"그동안 어딜 갔었던거에요?"
"도망다녔다니까..."
"무슨..."
"어디로 갈래? 참 너 방 얻은 곳은 어디야?"
"어디로 갈지 정하지도 않고 나를 태웠어요?"
"응. 야. 너 사는방 구경시켜 줄 수 있니?"
"제 방이요?"
"너네 방에 가서 밥 얻어 먹으면 안되겠냐?"
"안될것도 없지만 마땅히 먹을 만한게 없는데..."
"내가 혼자 살면서 참치찌게 끓이는걸 마스터 했걸랑."
"그럼 밥은 내가 할테니까 석규씨가 찌개를 끓여 주실래요?"
"그래. 하하."
"여기서 가까워요."
"그건 나도 알지. 아침 그동네잖아."
"그렇네요."
그를 제방에 초대했습니다. 가족이외의 사람으로는 그가 처음 내 방에 초대된 것이었습니다. 찌개 끓일 재료 몇가지를 사가지고 그는 내 방에 들어왔습니다.
"아담하네."
"혼자 살기에는...커피 한잔 하실래요?"
"밥은...?"
"배고파요? 밥 앉혀 놓을게요. 그동안 차라도 대접해야 되는거 아닌가?"
"그런가? 그럼 한잔 끓여줘."
내가 커피를 끓여 방으로 들어왔을때 그는 그가 그려준 내 모습을 보고 있었습니다.
"누가 그렸는지 잘 그렸다."
"석규씨하고 많이 닮은 사람이 그려주었죠."
"흠. 이 그림을 주면서 고백할려고 했었는데... 괜한 말 한것 같애."
"무슨 고백?"
"그건 비밀이지."
"치... 커피 드세요."
"응. 고마워."
방바닥에 앉아 그를 마주보며 웃었습니다.
"도망다녔다는 말은 무슨 말이에요?"
"응. 내가 우리집 돈을 훔쳤거든..."
"그건 또...?"
"내가 미대원서 쓴거 들켰다가 너 찾아 갔었잖아. 그리고 집에 들어갔어. 아버지가 휴학하고 고시공부 하라고 하면서 절에 들어가래."
"그래요?"
"맞은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한다고 했어. 그리고 다음날 학교 휴학을 했어. 그런데 절에 들어가기는 싫었어. 밝은 기억이 있는 학교 모습을 보았고, 그림 그리는거 포기하고 싶지 않았어. 그리고 네모습이 떠오르더라."
그는 잠시 회상하는 모습으로 커피잔을 입에 갖다 대고는 시간의 여운을 가졌습니다.
"그날 밤 짧은 편지를 하나 남기고 차를 몰고 집을 나왔어. 처음에는 차를 팔면 일년은 버티지 않겠나 생각을 했어. 그림도 그릴수 있을거 같았고... 근데 차는 팔 수가 없었어. 너무나 소중했거든... 그건 너 때문이야. 널 태우고 다녔던 기억이 내딴에는 너무 애틋했어. 조수석에서 네가 잠든 모습을 간직한 차라서 팔수가 없었어."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요."
내 목소리는 조금씩 떨렸습니다.
"밤에 몰래 집에 들어가 금고 문을 열었지. 뭐 딴거는 빼고 현금이 이천 팔백만원이 있더라. 삼백만원은 나두고 이천오백만원을 들고 날랐지. 나 신문에 난거 모르지?"
"예?"
"우리 아버지가 실종신고를 했더라. 현상금을 붙였는데 삼백만원이었어."
"정말요?"
"그럴줄 알았으면 다 들고 나와 버리는건데..."
"그럼 계속 도망 다닌거에요?"
"하하. 부자지간인데 날 경찰서에 잡아 넣기야 할까. 훔쳐온 돈으로 방을 하나 얻었어. 부산까지 내려가 얻었었어. 학생증 보여주며 과외하니까 꽤 돈이 벌리더라. 그리고 다른 잡일도 많이 했지. 불법 운전학원에서 운전도 가르쳤어. 대단하지 않냐? 난 사회에 나가는 것을 참 두려워 했었는데 이겨냈어. 학원을 계속 다니면서 일년만에 천만원이상 모았지. 하하. 일년정도 부산에 있다가 방을 빼고 서울로 올라왔어. 서울서는 월세방을 얻었어 그래서 훔쳐가지고 온 돈 이천오백만원을 집에다 갖다 놓을수 있었지. 편지도 여러장 써서 아버지께 드렸어. 일년만 더 있다가 집에 들어간다고 했어. 그렇게 하고선 한 두달정도 배달일을 했지. 과자 배달... 우연찮게 소개를 받아 일하게 되었는데 또 우연찮게 너를 보았어. 참 많이도 반가웠는데 네가 모른체 하더라. 뭐 모른체 할만도 했지."
나는 맑은 눈빛으로 그말을 하는 그를 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읍니다. 고개를 숙인채 작은 목소리로 머뭇거렸었읍니다.
"그날은... 그냥 그랬어요. 뭐랄까? 근데 왜 그냥 갔어요? 그렇게 반가웠다면서?"
"나도 그냥 그랬어. 너 네가 너를 만났을때 어떻게 그렇게 자연스러울수 있냐고 물었지?"
"네."
"그냥 그랬어. 하하. 그냥 항상 곁에 있다고 생각했고 내 마음곁에 항상 있었으니까..."
그의 대답을 듣고서 난 기쁜 마음으로 목소릴 떨 수 있었읍니다.
"오빠. 나 많이 좋아하죠?"
"하하. 그건 비밀이지."
그날 그가 해주는 찌개는 그의 말데로 맛있었습니다. 제법 늦은 시간까지 그와 단둘이 내 작은 방에서 시간을 공유했습니다.
"네방은 참 깨끗하다. 내방은 지저분하거든..."
"아직 집에 들어간거 아니에요?"
"응. 시험치고 들어갈거야. 난 꼭 미대를 들어가고 말거야. 하하."
"그럼 계속 그때 하던 일 하세요?"
"배달차 운전? 안해. 공부 해야지. 나 등록금하고 생활비 할 돈은 벌어 놓았어."
"어디에 방을 얻었는데요?"
"여기서 그렇게 멀지는 않아. 마포쪽에 얻었어."
"나 언제 한번 가도 되요?"
"지저분한데..."
"그러니까 청소도 좀 해주고..."
"그래 뭐."
그는 자정이 오기전에 자기가 사는곳으로 돌아 갔습니다. 뭔가 알수없는 마음속 파도가 일었습니다. 또 한동안 그를 내 마음에 새겨야 겠네요. 나는 미소지었읍니다. 그를 떠올리며 말입니다. 그 미소짓는 모습이 담긴 거울속 내 모습이 그림속의 내모습과 많이도 닮아 보였읍니다.
그는 그날 나를 찾아 오고 난 뒤 석달은 일주일에 두번정도씩 나를 찾아 왔었습니다.
이제는... 10편
그는 곧 수능을 치루어야 했기 때문에 바빴지만 내가 저녁타임을 하는 날에는 꼭 날 데리러 왔습니다. 사람이 드문 병원의 로비에서 책을 보는 그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정성을 보이는 모습에는 분명 사랑이 있습니다.
그가 나만의 자리라고 말했던 조수석은 아늑했습니다. 십여분의 짧은 시간만으로 내방에 올 수 있었지만 그는 잠시 나에게 쉼을 주었습니다.
가을이 끝나가는 어느 흐린 주말 오후에 그는 나를 그가 사는 방으로 데려갔었습니다. 내가 많이 졸랐던 탓이었겠지요.
그의 방은 생각했던 것보다 작았습니다. 방안에 들어서자 바로 느낄수 있었던 케케한 남자냄새. 별로 좋지는 못했지만 웃을 수 있었습니다. 그의 흔적이 쌓인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불은 개어져 있었지만 방바닥은 깨끗하지 못했습니다. 물감들의 자욱과 제대로 닦지못해 구석구석 먼지가 쌓여 있었습니다. 홀로 이 낡고 작은 방에서 삶을 꾸렸다고 생각하니 그가 가엾게 느껴졌었읍니다.
방모서리 한편에서 참 정겨운 물건을 하나 보았습니다. 예전에 내가 그에게 그것을 사 주었을 때는 참 깨끗했었는데... 물감이 번지고 흘러버린 시간의 때가 묻어 낡아버린 화구통이 내가 눈길을 준곳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새겼던 YJ와 내가 새겼던 SG라는 글자들도 파랗고 시커먼 물감색으로 칠해져 그때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선명했습니다. 그때의 기억또한 선명했습니다.
영영 오지 않는다면
미소 지어야 겠지요.
새겨야 겠지요.
먼훗날이 되어도 잊혀지지 않는다면
그럴바에야
아픈 추억이 되지 않게 눈물처럼 웃어야 겠지요.
그가 뺏어간 내 시화가 또한 그의 방 벽을 장식하며 내 시야에 들어 왔습니다.
"저거 뺏어가더니 겨우 이런 작은 방에다 걸어 놨어요?"
그는 그 시화를 쳐다보며 그냥 웃었습니다.
"원래는 우리집 내방에 걸어 놨었는데... 그 방은 네방보다 훨씬 컸어. 저번에 돈 갖다놓을때 몰래 가져 나왔지."
"집에 들어가세요. 내가 봐도 안되어 보인다."
"뭐가 안되어 보이는데? 괜찮아. 이방이 혼자 쓰기에는 딱 좋아."
"언제 들어갈거에요?"
"집에? 시험은 보고 들어가야지. 내 나이가 점점 힘들어져. 이번에도 꺽이면 완전히 부러질거 같아."
"그럼 청소나 좀 하지."
"지저분하냐? 너 온다고 내딴에는 청소 한건데..."
"어떻게 사는지 대충 상상이 가네요. 빗자루 어딨어요?"
"빗자루는 없어. 걸레만 있는데..."
따뜻한 물도 나오지 않는 그의 자취방 작은 부엌에서 시린손을 참아가며 걸레를 세번을 빨아야 했습니다. 그가 살던집을 생각하면 이런곳에서 그가 잠이나 이룰 수 있었겠나 싶었지만 그는 이곳이 참 아늑하다고 했습니다. 남이 보면 안탔가웁게 느껴질지라도 그래도 그는 그곳에서 미소짓고 있었습니다.
"담배 피워요?"
방청소를 하다가 밥상을 책상삼아 책을 놓아둔 곳에서 꽁초가 남아 있는 재떨이를 보았습니다.
"정물화 그릴려고 갖다 놓은거야."
"이런걸 정물화로 그려요?"
"삶의 흔적이잖아."
그가 이방과 함께한 모습은 재떨이 속 당배꽁초만큼이나 초라해 보였지만 그는 포기할 수 없는 유혹같은 표정을 지어보이고 있었습니다.
그는 개어논 이불에 기대어 담배를 피웠습니다. 그가 담배 피는 모습은 참 오랜만이었습니다.
그의 담배 피는 모습은 어색했습니다. 기침을 했어요. 두가피만 뽑혀져 있는 담배곽이 재떨이와 함께 그의 옆에 있었습니다. 그는 담배를 필 줄 몰랐습니다.
내가 가져온 귤과 그가 타가지고 온 커피를 먹으며 그가 그동안 그려 놓은 그림들을 보았습니다.
'아들의 죽음.' 그렇게 제목을 붙여 놓은 그림은 아까 그가 피던 담배의 곽과 그 곽에서 나온 담배 한가피가 재떨이 속에서 타들어가는 모습이 정물로 그려져 있었습니다.
괜시리 맘이 아팠습니다. 그의 마음고생을 짐작할 수 있었으니까요.
한동안 그림들을 구경했습니다. 어떻게 한번 흘낏 보고는 이렇게 그려 놓을 수가 있었을까요?
그는 모든 그림들에 제목을 적어 놓았습니다.
'시간을 지나치는 여인의 낯설음.' 이란 그림은 내가 그를 모른척하고 지나쳤을때 모습이 담겨져 있었는데 그려진 내표정이 너무나 공감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 표정이 맞냐?"
내가 그 그림을 유심히 보고 있자 그가 내게 물었습니다.
"네."
"알겠다."
"뭘요?"
"그건 비밀이지."
그는 스케치북에서 그 그림을 떼어내더니 내게 주었습니다. 그의 모습이 담긴 그림이나 한장 주었음 했는데 그를 그린 그림은 없었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보여준 그림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그림이었습니다. 무수히 많은 점들로만 채색되어진 유채화였습니다. 화가들은 왜 처음에는 쉽게 그림을 그리다 나중에는 자신만이 알 수 있는 그림들로 바뀌어 가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전 풍경화가 좋아요. 그 풍경속에 내가 있는 기억을 만들어 낼 수가 있어 전 풍경화가 좋습니다.
"이 그림 좋지 않냐?"
"예? 못알아 보겠는데요."
"하하 그렇겠지."
"무슨 그림이 이래요?"
"야. 이렇게 그려야 비싸."
"후후 치..."
그는 그 그림을 만족스럽게 바라 보더니 설명을 했습니다.
"이 그림을 어떻게 그린 줄 아니?"
"그냥 붓에다 물감을 묻혀 뿌린거 같은데요."
"맞았어."
"그럼 그린게 아니네요."
"그린거 보다도 내가 이 생각을 이끌어 내기 위해 많은 시간 고심을 했지. 그래서 비싼거야."
"무슨 생각?"
그는 아주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진진한 설명을 했습니다.
"중간에 점을 하나 찍었어. 그건 나지. 그리고 여러개의 붓에다 색깔별로 물감을 묻혀 뿌렸어. 나라고 생각한 점과 많은 점들이 겹칠수 있었지. 나와 마주친 모든 점들의 색을 섞었어. 나와 마주친 점들은 내인생에 끼어든 사람들이거든. 아직은 완전히 까맣지는 않지? 색을 섞으니 이렇게 되었어. 내가 태어나기 이전에도 내 인생은 있었지. 그건 아버지야. 여기 이 큰점을 아버지라 생각하고 주황과 자주색을 섞어 그려 넣었지. 밝은 하루를 일깨워주는 새벽의 해돋음 같기도 하고 이제는 어둠으로 몰아넣어야 하는 저녁무렵의 노을빛같기도 한 색깔이야."
어렴풋이 어려웠습니다. 그가 마음속에 무엇을 품고 있는지... 그는 그때 갈등하고 있었음을 어렴풋이 알수가 있었습니다.
"그럼 여기 파란 큰점은...?"
"그건 그리움. 이 두점의 연결선상에 그려 넣었지. 그리움은 하늘과도 같은 파랑이야."
"그게 끝이에요?"
"야. 내딴에는 얼마나 생각해서 그린건데..."
"이런 그림이 비싸요?"
"너 미국에서 어느 화가의 그림이 제일 비싼줄 아니?"
"응... 피카소?"
"피카소가 미국 사람이니? 아니야."
"누군데요?"
"잭슨 폴록."
"모르는 사람인데요."
"그사람이 그림을 저렇게 그렸어. 하하."
그의 작은 방에는 나의 웃음과 그의 웃음이 있었습니다. 그날 그의 방을 나올때 비가 내렸습니다. 난 우산이 없었어요. 그는 우산을 씌워 주었고 나를 집까지 태워다 주었습니다.
밝은 모습으로 그는 다시 자기가 사는 방으로 돌아갔습니다. 나도 밝은 모습으로 잠자리에 들수가 있었습니다. 사랑은 그렇게 웃을줄만 알았는데 그날로부터 몇일이 지나고 그는 또 한동안 그리움을 주고 사라졌었습니다.
그가 시험을 보던 앞날 난 엿가락 두개를 사서 주었습니다. 내가 그에게 엿을 받은 후로부터 육년이란 시간이 흘렀을 때였습니다. 한개씩 따로 포장한 엿을 그가 받아 들고는 잠시 동안만 시간을 내게 주었었습니다.
"그래도 너에게 엿을 받아 먹는구나."
"합격하세요."
"수능은 좀 복잡해서... 그리고 나 실기도 봐야돼."
"실기는 뭐 무난할 것 같던데요."
"나 그림에 소질이 있는거 같지?"
"네. 많이요. 어디에 지원할 거에요?"
"**대 회화과."
"그럼 내년에 그곳에서 볼 수 있기를 빌께요."
"하하. 엿 잘 먹을께. 포장지가 파랑색이라 맘에 든다. 나 갈께."
그 말을 듣고 나서 그를 다시 보게 되기까지 몇달의 시간이 또 흘러가야 했습니다. 그는 무난히 합격을 했었습니다. 내가 확인을 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는 등록을 하지 않았습니다.
"무슨 실습이요?"
"내가 간호학과잖아. 다음주부터는 병원에 나가야돼."
"어디 병원에요? 우리학교 병원이요?"
"응. 3주동안 학교는 못나올거야. 잘지내."
그를 한번 쳐다보고는 미소를 한번 짓고 그들과 헤어질려고 할 때였습니다.
"몇시에 끝나요?"
이 질문은 그가 한 것이에요. 어색한 존댓말...
"네가 그걸 왜 묻냐?"
지희는 퉁명스럽게 말을 했지만 그는 신경도 안썼읍니다.
"6시면 끝이 날거에요. 왜 관심있어요?"
"북쪽학교 옆에 붙은 그 병원...?"
"그럴걸요."
지희는 절 쳐다보더군요. 내가 웃으며 말을 하니까 약간 이상했었나 보죠.
월요일은 학교가 아니라 병원으로 출근을 했습니다. 실습이라지만 그냥 간호사언니들 따라다니며 구경하고 잔신부름해주는게 전부였었죠. 그래도 힘은 많이 들었습니다.
저녁에 일을 마치고 나니 첫날 하루만인데도 녹초가 되어 버리더군요. 친구들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집까지 갈일이 막막합니다. 임시로 기숙사로 간 친구들도 많았습니다.
옷을 갈아입고 저벅저벅 병원을 나왔습니다. 병원은 한창 밝은 조명으로 빛이 나고 있었지만 외례진료가 끝이나 사람들의 모습은 많이 줄어 있었습니다.
밝은 조명. 병원길을 따라 내려 오고 있는데 왠 외제지프가 천천히 내 옆으로 다가 왔었습니다.
"야 탈래?"
야타족이 생겼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무슨 병원까지 와서 지랄입니까? 전 이런 생각을 하며 그냥 모른체 걸었습니다.
"야 임마 타."
차쪽으로 한번 쳐다보았습니다. 해가 완전히 저문것은 아니었지만 첨에는 누군지 몰랐습니다. 그냥 듣지 않은척 조금 빠른걸음으로 걸었습니다.
"너 공주냐? 내가 내려서 문 열어줘야 돼?"
"뭐에요?"
기분이 나빠서 어떤놈인지 자세히 볼려고 그쪽으로 홱 돌아섰었지요. 그였습니다. 그는 차를 세우고는 내렸어요.
"여긴 어쩐일로...?"
"나 차 있다. 하하. 너 왜 모른척하고 그냥 가?"
"이름을 부르지... 놀랬잖아요?"
"체. 너 모르는 사람이 너 그 미모 때문에 타라고 그러는 줄 알았어?"
"네."
"착각이 참 심하구나. 아무리 밥 잘먹고 할일이 없다고 이 미모를 보고 차 태워 주겠냐?"
"말이 심하네요. 여기는 왜 왔어요?"
"너 태워 줄려고. 여섯시에 끝난다면서 일곱시가 다 되어 가잖아."
"정말 나 태워 줄려고 온거에요?"
"그래. 집에까지 태워줄께. 밥 안먹었으면 밥먹고 가도 되는데..."
"고맙네요. 근데 정말 석규씨 차에요?"
"타.!"
차 괜찮던데요. 뭐 체로키라고 했던가? 하여간 지프인데도 승차감이 좋았어요.
"면허증은 있어요?"
"이년이 넘었다. 군대가기 전에 땄어."
"이 차는 누구꺼에요?"
"내차라니까. 산지는 좀 되었는데... 언제 나한테 도움이 될거야. "
"무슨 도움?"
"차는 돈이잖아. 하하."
"우리집 알아요?"
"당연히 모르지."
"근데 이렇게 막가도 되는거에요?"
"과천이라며? 밥은 안먹어? 나는 밥 안먹었는데..."
"오늘은 첫날이라 너무 피곤하네요. 그냥 가요."
그가 운전하는 좌석 옆에서 난 한동안 잠이 들었지요. 한참 잠에 취해 있는데 그가 날 깨웠어요.
"야. 야... 야 신연주. 일어나. 여기서부터 과천인데... 니네집 어디야?"
눈을 떠보니 우연찮게 그곳은 우리집 근처였습니다.
"저기 교회앞에 내려 주세요."
그는 교회앞에 차를 세우더니 문을 홱열고 내리더군요. 전 혹시나 했어요. 내쪽 문을 열어 줄려는 줄 알았지요.
"왜 안내려? 너 문열줄 몰라?"
잠시 내리는데 뜸을 들였던 나는 좀 무안했었습니다.
"왜 내렸어요?"
"저기 포장마차에서 우동하나 사먹고 갈려고 그런다. 저 편의점이 너네 가게야?"
"네."
"잘가. 난 우동먹으러 간다."
"같이 가요."
그가 날 계속 데리러 올지 기대가 되었습니다. 참 편하게 왔거든요. 그리고 그와 함께 온게 기분이 좋았습니다. 비록 잠은 들었었지만 뭐랄까? 좀 황홀했다고 해야 하나요.
"내일도 올거에요?"
그는 우동을 입에 물고는 답을 하더군요.
"병원에? 모르지. 오늘은 학원 빠지고 온거여. 괜히 일찍 와가지고..."
"왜요? 오늘 몇시에 왔는데요?"
"몰라도 돼. 하여간 학원 마치고 가면 일곱시가 조금은 넘을텐데..."
"그럼 그때 올거에요."
"몰라. 내 맘이지 뭐."
조금 더 이야기하면서 우리집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연락처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 조심해서 가요."
"너도 열심히 해."
늦은 저녁 무렵 그는 밝은 표정으로 나를 집까지 태워주고는 자기의 갈길로 갔습니다. 좀 행복하더군요.
이제는... 7
다음날 병원을 마치고 한시간을 기다렸습니다. 그는 나타나지 않았어요. 갈까 말까 고민이 들었지만 전 한시간을 더 기다렸습니다.
병원앞 벤취앞에서 차에서 내리고 타는 사람들을 구경했습니다. 내 옆에서 담배피는 사람들도 보았구요. 한명은 목발을 짚고 한명은 휠체어에 앉아 서로 자신의 서러움을 얘기하며 감싸주는 사람들도 보았습니다. 전조등 불빛이 보일때마다 혹시나 그가 나타날까 일어서 고개를 들었지만 그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날 그는 왔었어요. 8시가 훨씬 넘어서요. 요란한 차소리가 나더니 밝은 전조등 조명... 차에서 내리는 그를 보았습니다. 한참을 두리번 거렸는데 저를 보지 못했나봐요. 저는 잠시 아는체를 안했습니다. 앉아 있던 벤취에서 가만히 앉아 그를 보았습니다.
그는 나를 찾지 못하자 비상등을 켜둔 차는 내버려두고 병원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뭔일일까 따라 가볼까도 생각을 해보았지만 지금까지 기다린 내수고가 원망스러웠는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병원에 들어가서는 그는 자판기 커피를 한잔 뽑아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내가 앉은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의 벤취에 가서 떡 앉더군요.
두시간이나 늦게 왔으면서 내가 가지않고 기다리고 있을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여기서 뭐 하세요?"
난 그에게 다가가서 약간은 퉁명스럽게 말을 걸었습니다.
"어! 안가고 있었네. 커피 마시잖아."
그의 옆에 앉았습니다. 여린 병원의 백열등 조명아래 벤취들은 쓸쓸해 보였습니다. 어둔 불빛속에 숨어서 닭을 뜯어 먹고 있는 어느 환자의 모습이 그의 머리를 건너 보였습니다.
"여긴 왜 앉아. 집에 가야지."
"두시간이나 늦었고 내가 없었으면 그냥 가지 여긴 왜 앉았어요? "
"커피마시잖아. 늦게 끝났냐?"
"아니요. 두시간 넘게 기다린거죠. 저기 앉아 있었는데 못 봤어요?"
"봤으면 여기 앉아 혼자 커피 마시겠냐? 근데 왜 기다렸어? 그냥 가지."
"치. 그럼 석규씬 왜 왔어요?"
"나? 너 데리러..."
그는 내가 실습을 받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나를 데리러 왔습니다. 그래서 나도 한시간씩 꼭 그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어느날 저녁 그와 고급술도 파는 레스토랑을 간적이 있습니다. 그가 날 데리고 간 것이었지요. 그냥 식사만 하러 간곳 치고는 넓고 고급스러웠으며 그곳의 서빙보는 여자들은 요염했었습니다. 룸도 있었습니다.
그는 학원을 열심히 다녔습니다. 한달정도 다녔는데 실력이 많이 늘었나 봅니다. 지희를 보았거든요. 그녀는 나에게 또 자랑을 했습니다. 이번엔 수채물감으로 채색된 그녀의 모습을 자랑했습니다.
"이것도 석규씨가 그려준거야?"
"네. 석규씨 그러니까 좀 우습다."
"수업시간에?"
"아니요. 제가 시간을 좀 내 주었죠."
"시간을 내 주다니?"
"저번주 일요일날 과천 대공원을 갔었어요. 그때 제가 모델을 좀 서 주었죠."
"둘이서만 갔니?"
"예. 그가 미술관 구경간다길래. 따라 갔었어요."
"뭐타고 갔는데?"
"버스타고 갔어요. 어디서 났는지 화구통을 들고 왔더라구요. 학원 다니나봐요."
"응. 그래."
많이 부럽더군요. 짙은 봄빛으로 채색된 배경속에 밝게 웃고 있는 지희의 모습이 담긴 그 그림이...
두번째 실습을 나갔을때는 유월이었습니다. 그때는 그가 날 데리러 온적 보다는 그러지 않은 적이 많았습니다. 시험기간이었거든요. 짧은 옷사이로 사람들의 살색이 눈부시게 짙어만 갔습니다.
이제는... 8편
방학이 되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미술학원을 열심히 다녔습니다. 밝은 모습의 그가 보기 좋았습니다. 그는 학원의 고삼들과 재수생들과도 친구처럼 지냈습니다. 하지만 학교에서처럼 나이는 속이진 않았습니다. 방학이라 그는 낮에 학원을 다녔어요. 내가 종종 학원을 찾아간적이 있었는데 그는 나를 학교에서처럼 모른척 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쁘냐?"
"예. 형 재주 좋네요. 어떻게 오수생이 저런 예쁜 대학생누나하고 사귈수 있어요. 주제를 알아야지...."
"사귀는거 아녀. 쟤가 날 따라다니는거야. 임마."
날 앞에 세워두고 참 자기맘데로 말했습니다. 그가 학원에서는 오수생으로 속이고 있더군요.
"확 불어버려요."
"뭘?"
"관둘께요."
그는 학원을 같이 나오던 학생들과 헤어져 나하고만 있게 되었을때 부탁 한가지를 했습니다.
"내가 유채화 그리는걸 배웠거든..."
"그래서요?"
"내가 좀더 능숙해지면 모델좀 서라."
"무슨...?"
"사진도 찍어야 하는데..."
"혹시..."
"뭘? 누드모델 그런거 안 시킬테니까. 그냥 웃는 얼굴이나 나중에 좀 빌려줘."
"쳇. 아쉽네요."
"왜? 누드모델 안시켜줘서?"
"아니요. 그냥 이제야 그 소리가 나와서요."
"이제야라니?"
"지희는 두번이나 그려 주었더군요. 잘 그렸던데요."
"하하. 그건 아직 습작 수준이야. 내가 잘 그려서 줄테니까. 꼭 모델 서 주어야 돼."
"알았어요."
방학때 그가 엠티를 간적이 있었습니다. 그 엠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전 묘한 감정을 일으키는 말을 들었습니다. 지희에게서요.
엠티를 갔다온 지희를 동아리방에서 만났습니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나에게 묻더군요.
"언니. 나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요."
"그래 잘 되었네. 누군데?"
"언니도 몇번 봤잖아요. 우리과 석규라는 애요."
"응?"
그녀의 입에서 나온 '석규'라는 말이 참 낯설고 당황스러웠습니다.
"왜 그가 좋은데?"
"모르겠어요. 그냥 자꾸 좋아지네요. 오빠같아요. 전 오빠가 없는데... 오빠했으면 좋겠어요."
"단지 그것뿐이야?"
"그것뿐만은 아니에요. 왠지 그늘이 있어보여요. 그래도 웃음짓는 그에게 괜시리 마음이 이끌려져서요."
"그걸 왜 나한테 말하는데...?"
"그냥 같은 여자로서 내맘을 숨기고만 싶지는 않아서요. 그도 날 좋아하는지 묻고 싶었는데... 언니 표정이 그렇게 밝질 않네요."
"내가 왜?"
"얼굴빛이 많이 변했어요. 다음에 물어 볼께요."
그랬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남에게서 듣는것은 기분좋은게 아니었습니다.
그날 저녁 그를 보았습니다. 그는 모르고 있겠지요. 그런 표정이었으니까요.
"엠티 잘 갔다 왔어요?"
"그럼. 근데 밤에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는 모르겠어."
"왜요? 술마시고 잤구나."
"먹기 싫었는데 자꾸 마시라 그러잖아. 나보다 나이도 어린것들이...선배랍시고..."
"쳇 그러길래 왜 나이는 속였어요?"
"일어나니까 내가 지희의 팔을 베고 자고 있더라. 허 참내."
"네?"
"잘 사람들은 방한개를 주고 혼숙을 시켰걸랑. 나는 분명 놀던방에서 잠이 든거 같았는데 일어나보니 딴방에서 그것도 지희 옆에서 잤었다는 거지. 팔베고..."
"잘 하시네요."
"뭘? 난 아무것도 모르고 그랬는데..."
"그러지 마세요. 오해받기 쉬워요."
"그래. 그런데 내가 뭘 오해받을 짓 했다고..."
"딴 여자한테도 저한테처럼 이런식에요?"
"조금은 다르겠지만 그런데 왜?"
"훗. 지희가 그런말 한 걸 조금은 이해가 되는군."
그는 내가 독백처럼 한 말을 듣고는 궁금해 물었습니다. 그의 표정엔 천진난만함이 있었습니다.
"지희한테 잘해주세요."
"잘해주고 못하고가 뭐 있어. 같은과 친군데..."
"지희가 오빠한테 감정이 생기고 있나봐요."
"무슨 감정?"
"좋아하는 감정이요. 그녀가 싫다면 처음부터 맘 아프게 하지는 말구요."
"날 좋아할 수도 있는거지 뭐. 그리고 내가 무슨 맘을 아프게 한다고..."
"풋. 그냥 좋아하는 감정 말구요. 사랑하는 감정이요."
"그 조그만 녀석이 벌써? 요즘 애들 빠르구나."
"걔가 왜 애에요. 대학생인데..."
"근데 네가 그 얘기를 왜 하냐?"
"나한테처럼 지희한테도 그러는게 아닌가 해서요."
"왜 너도 나한테 좋아하는 감정이라도 있냐?"
"네."
참 쉽게 난 그에게 처음 사랑고백을 했던거 같아요. 조금은 장난스럽게 말이죠. 진지해지고 싶었는데 그는 그렇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저도 진지해지고 싶진 않았나 봅니다.
"안되는데..."
"왜 또 안되요?"
"그냥 내가 자신이 없어서... 내 미래는 아직 그려지지 않거든..."
"괜찮아요. 전 사람 잘 잊고 하니까... 책임지려 하지는 말아요."
"야. 신연주. 내가 너한테 책임질 일 저지른거 있냐?"
"아니요. 그렇게 들렸어요?"
"응."
난 그가 내맘속에 있다가 떠나고 또 들어왔다가 떠나고 해서 한 말이었는데 그는 전혀 엉뚱한 대답으로 말을 돌려버렸습니다.
시간이 흐른 여름날에 그는 사진기를 들고 와서는 내 얼굴만 한통을 찍어 갔습니다. 같이 한장쯤 찍을 만도 했지만 내 얼굴만 클로즈 업(close up)해서 찍어 갔습니다.
"야 좀 웃어봐. 살포시 미소짓고..."
"몇장이나 찍을려고 그래요?"
"한통다..."
"왜요?"
"내일 시간 되니?"
"뭐 바쁜일은 없는데..."
"그럼 스케치하러 가자."
"무슨...?"
"너 모델 서준다고 했잖아."
"어디로요?"
"배경좋은데로..."
다음날 그와 함께 야외로 나갔습니다. 그는 A4지 여덟장크기의 캔버스를 하나 들고 왔더군요. 좀 쪽 팔렸습니다. 자연농원으로 갔었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이 가만히 앉은 날 자꾸 쳐다보았거든요. 별로 그리지도 않았어요. 그냥 윤곽만 잡았더군요. 배경만 요란하게 낙서 비슷하게 해 놓구요. 그날 스케치하러 갔다가 놀이기구만 타고 왔던거 같아요.
그해는 그와 그런데로 연인처럼 지냈던거 같습니다.
가을날 난 그가 채색해준 잔잔한 풍경속에 시를 써 시화를 만들어 우리 동아리 전시회때 걸었습니다.
그 시화는 그가 뺏어 갔어요. 그에게 주고 싶었는데 잘 됐지요 뭐. 어느날이 되면 잊을 날 있겠지요. 하지만 그 어느날이 영영 오지 않을것만 같습니다.
이학기가 채 끝나기 전에 그와 또 이별을 했습니다. 저한텐 아무이유도 없었습니다.
초겨울 어느날 집으로 전화가 왔었습니다. 그였습니다. 집앞이라며 좀 나오라고 그러더군요.
그는 교회앞에서 신문지로 포장된 캔버스를 들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교회앞 벤취에서 그와 대화를 했었습니다.
"나 미대 원서 썼다가 들켰어."
그의 입술은 찢어져 있었습니다.
"맞은거에요?"
"한대 맞았지. 접수했던 원서는 찢어졌어."
"오늘 맞은거에요? 아직 피가 나요."
"괜찮아. 맞은거는 하나도 안아파. 이거 너 그린 그림이야. 나중에 집에 가서 봐."
"진짜 미대 갈려고 생각했던 거에요?"
"응. 하지만 포기할래."
그말을 할때 그의 입술은 서럽게 떨리고 있었습니다.
"부모님이 날 분명히 키워주신것은 맞아. 그리고 그 은혜를 잊어선 아니 되겠지. 하지만 내 삶도 있는데...너무 소유하려고 하시는거 같아. 난 소유물이 아닌데...다른 부모들도 나처럼 자식 키워준걸 그렇게 티낼까? 나한테는 이제 티내는걸로 보여."
"예? 무슨말인지...?"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나한테 이럴수 있냐고 그러시는데... 내가 아버지의 의도데로 되지 않는게 순전히 내 잘못일까? 내가 하고 싶은것을 한다는게 그렇게 큰 불효일까? "
"그건... "
"너에게 이런말 해서는 안되겠지만... 우리아버지는 탈세자에다 폭력조직과도 연계되어 있어. 법조계에도 아는 사람이 많은가봐. 내가 법조계로 나간다면 분명 또 갈등할거야. 그것도 싫지만...내가 꾸는 꿈은 왜 무시되어져야 하지. 길러주었다고 꼭 아버지의 의도데로만 살기는 싫은데. 난 진짜 나중에 효도할 자신이 있어. 진짜 내맘은 그런데... 나보고 불효자래... 맘데로 내 갈길을 정했다고... 왜 날 이해해주지는 못하시면서 자길 이해못한다고 야단을 치실까?"
"미안하네요. 아직 난 석규씨에게 뭐라고 말을 못해주겠어요."
"그래. 나 휴학했어. 그리고 집에 안들어갈거야."
"그럼 또..."
"뭘?"
"또 못보는거에요?"
그는 울먹거리다 나를 보더니 미소를 지었습니다.
"왜 못봐. 내가 집나간다고 어디 갈데나 있나? 아버지 보호속에서 살았어. 막막하게 혼자 사회속에 남는거. 그런거 나 못해. 자신도 없을뿐더러 그렇게 하지도 않을거야. 그냥 잠시 바람 좀 맞고... 정신을 가다듬어서 아버지가 하라는거 하면 되는거지 뭐. 효도할려면 흉내라도 내어야지..."
"그렇게 생각하지는 말아요. 다시한번 잘 말씀드리지 그랬어요?"
"뭐? 내가 하고 싶은거? 대화가 안돼. 믿는다면서 때리긴 왜 때리시는지 몰라. 때리시진 않으셨는데...아버지를 이해하자면 할 수도 있지만... 모르겠다. 나 간다."
"정말 예전처럼 나한테서 사라지진 마세요. 정말 그러면 안돼요."
"알았어. 너도 잘해라."
그의 뒷모습이 불안해 보였습니다. 그는 자기차를 타고 나왔더군요. 그 차를 보니까 더 불안해 보였습니다.
그후로 그를 일년 반이상 볼 수가 없었습니다.
캔버스에는 내가 있었습니다. 내가 봐도 사랑스런 미소를 품으며 맑은 하늘을 등지고 있었습니다. 나는 저런 미소를 지어본적이 없습니다. 나조차도 지을수 없는 미소를 그는 그림속의 내모습에 담고 있었습니다. 그는 항상 내 모습에서 저런 미소를 보고 있었던 것이었을까요?
그가 모습을 감춘지 몇달이 지나고 봄이왔습니다. 전 그를 잊을 수 없었지요.
동아리방에서 지희를 보았습니다. 지희는 날 보더니 뜬구름 잡듯 묻더군요.
"석규가 휴학을 했어요. 혹시 어디 갔는지 몰라요? 언니는 알죠?"
그녀의 질문에 당황했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혹시 그를 만나지나 않나 궁금증도 있었습니다.
"응? 내가 뭘?"
"언니. 석규 잘 알잖아요."
"네가 그걸..."
"진짜구나. 말 좀 해줘요."
"석규씨에 대해서?"
"네."
"너 진짜 석규씨 좋아했니?"
"그럼 가짜로 좋아할수 있어요?"
"나하고 연관시킨건 왜니?"
"예전에 엠티가서 석규가 술먹고 언니얘기 한 줄 모르죠?"
"응?"
"석규가 술취하니까 볼만하던데요. 꺼이꺼이 울다가... 웃다가... 그러다 잠이 들었었어요."
"너 팔베고 잤다고 했는데..."
"진짜 아는 사이에요? 그날 잠든 그를 나하고 종석이 선배가 잠자는 방에다 옮겼어요. 그냥 옆에 앉아 있었는데 첨에는 내 다리를 베더군요. 종석이 선배도 술먹은 거 때문에 그의 옆에서 잠이 들었어요. 그도 잠든줄 알았는데 이야기를 시작하더군요. 조금있으니 언니이름이 나왔구요.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물었어요. 연상의 여자 짝사랑하냐고. 고삼때 언니가 이삿짐 내리는거 보고 짝사랑을 시작 했었는데, 우산도 안씌워 주고... 무슨말인지 모르겠더라구요. 집에 올때마다 가게를 쳐다보고 왔데요. 세상에 언니보다 예쁜 여자는 없다고 하면서 날 초라하게 만들었어요. 그리고 요즘은 자주 만난다고 하면서 씩 웃고는 잠이 들었어요. 그때 나도 잠이 들었나보죠. 일어나니 그는 없었고, 아침에 언니이름을 말하며 아냐고 물었더니 모른다고 하길래 딴사람인가 그냥 모른채 했었는데..."
그가 많이 보고 싶었습니다. 하마터면 눈물이 맺힐뻔 했어요. 그는 내가 그를 인식하기도 전에 날 좋아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고맙기도 하고 원망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는 나한테 그때까지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 없었거든요.
"그는 너보다 훨씬 먼저 내가 좋아한 사람이야."
"네?"
"그가 고삼때 난 고일이었어. 우산얘기를 했었어? 그냥 씌워달랬음 조금 더 따스한 말 한마디 더 할 수 있었을텐데..."
"석규가 고삼때 언니가 고일?"
"그의 모습은 자신의 나이보다 오히려 어려보여."
"뭐에요? 비밀이 있는거에요?"
"나중에 말해 줄께. 너 최근에 석규씨 학교서 본적 없니?"
"없어요. 석규 아버지가 석규 찾고 있는줄 모르시나 봐요? 집을 나갔는데 몇달째 연락이 없대요. 그래서 혹시나 언니에게 물어봤는데... "
"정말 집을 나갔데? 나한테는 바람만 쐬고 집에 들어간다고 했는데... 그러면..."
"둘이 사귄거에요? 무슨 말이 그래요?"
"석규씬 너보다 네살이 많아. 그것만 알아둬. 그리고 혹시 보면 나한테 좀 알려줘."
그는 아예 집을 나간거 같았습니다. 그런데 왜 나한테도 연락을 끊었는지 많이도 야속했었습니다.
이제는... 9편
그를 잊기가 힘들었습니다. 아니 잊지 못했습니다. 그가 그려준 그림을 보면서 이제 다시는 이런 미소를 지을 수 없을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다 꿈에서 그를 보게 되면 하루가 온통 그의 모습으로 물들어 멍했습니다. 그래도 시간이 약이더군요. 한동안 아팠던 가슴은 일상의 평온함속으로 숨어들어가 그것을 건드리지 않는다면 아프지 않을것 같았습니다. 일년이 흘러가 버렸습니다. 전 졸업을 했습니다.
졸업을 하고 학교 병원에서 내 간호사 생활은 시작이 되었습니다. 한동안 멋모르는 바쁜생활이 계속 되었습니다. 어떤날은 별을 보며 집으로 향했고 어떤날은 별을 보며 병원으로 갔습니다. 또 4개월이 흘러갔습니다.
낮동안의 꾸는 꿈속에 어느날 그가 나타났습니다. 흐릿한 영상속의 날 보며 어색한 미소를 짓는 고교때의 그의 모습이 날 가슴떨리게 했습니다.
전 유월달에 집을 나왔습니다. 집에서 출퇴근하기가 너무나 힘이 들었습니다. 병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취방을 하나 장만했습니다.
높지 않은 이층의 한곁을 차지한 그방은 별로 채우지 못한 내 짐들로 낯설었지만 내 모습이 담긴 그가 그려준 그림을 걸었을 때 내 곁으로 와 내방이 되었습니다.
내가 그곳에 방을 얻고 난뒤 며칠이 흘렀을 때였습니다. 그날은 기억해요. 내가 자취방으로 언제 이사를 갔는지는 기억하지 못해도... 그날은 6월 24일이었습니다. 그날은 새벽근무를 했던 날이었습니다. 몹시도 졸린 상태로 아침의 시원한 공기를 지나치며 내 방으로 퇴근을 했습니다. 우유나 하나 사먹을까하고 근처 수퍼로 들어갔을 때였습니다.
그때 과자박스를 나르는 트럭이 한대 그 상점 앞에 서 있었고 물건을 배달한 한 청년이 일을 마치고 막 그 트럭에 탔었습니다. 트럭에 별로 눈길을 주지 않은 채 우유를 뜯으며 상점을 나올때였습니다.
'빵. 빵!' 거리는 경적음. 난 고개를 들었고 그 트럭 운전대를 잡고 있는 그를 보았습니다.
조금 더 길었다면 그러지 않았을 겁니다. 조금 더 짧았더라도 그러지 않았을겁니다.
그를 보지 못했던 시간이 조금 더 길었더라면 그리움 속 가물해 지는 그의 모습 때문에 반가웠을터이고 그를 보지 못했던 시간이 조금 더 짧았다면 많이도 그리워 했기 때문에 반가웠을 터인데 그날은 그의 장난처럼 웃는 모습이 싫었습니다. 피곤한 몸상태도 그의 모습에 반가움보다는 원망스러움을 더해 주었습니다.
트럭에서 내리지도 않은채로 창에서 날 보며 웃고 있는 그의 모습은 한동안 저사람 때문에 많이 가슴 아팠던 나를 너무나 실망스럽게 했습니다. 그가 과자 배달하는 차의 운전수가 되어 있었던 사실도...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한 궁금증도 모두 허문채로 모른척 그냥 트럭을 지나쳤습니다.
'빵. 빵!' 몇번 더 울리는 경적음. 그러나 난 그냥 걸었습니다. 걸리는 시동음을 들었습니다. 날 지나치는 트럭속의 어색하게 웃으며 말없이 인사를 하는 그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사라졌습니다.
그날을 후회했습니다. 그 다음날부터 몇날을 혼자 울어야 했습니다. 한순간의 원망스러움 뒤에 너무나 큰 그리움이 숨어 있었던 사실을 그때는 왜 몰랐을까요. 그 상점을 찾아가 그의 소재를 찾으려 했으나 소용없었습니다. 그날의 채 일분도 안되는 짧은 만남으로 그해 여름을 많은 비소리로 내 가슴을 적셔야 했습니다.
그는 왜 과자 배달하는 차의 운전수가 되어 있었을까요? 난 그가 타던 차를 팔아 하고 싶어하던 미술공부를 하는줄 상상했었습니다. 전혀 엉뚱한 모습으로 변해 있었던 그날의 느낌은 어색했습니다.
그해 가을이 왔습니다. 추석도 지난 어느 가을날이었습니다. 아침에 출근을 하는 날이었습니다.
그를 보았던 상점을 지나 마을버스를 타려고 좁은 아스팔트길을 걷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빵. 빵!' 경적음이 내 뒤에서 울렸습니다. 낯익은 경적음이었습니다. 고개를 돌려 보았습니다. 혹시 과자 배달 트럭이 있을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 경적음은 그때 그가 울렸던 투박한 트럭의 경적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야. 신연주. 태워줄까?"
예전에 그가 타고 다니던 외제 지프. 그리고 그가 밝게 웃으며 나에게 손짓했습니다. 한동안 멍한채로 난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또 모른척 할거야?"
그말은 하며 그는 차에서 내렸습니다. 그때의 내 마음을 읽었던 것처럼 차에서 내려 조수석의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타라아..."
애타게 그렸으면서, 그의 모습이 참 반가웠으면서도 난 그때도 이상하게 밝은 표정을 짓지 않았습니다.
"나 알아요? 석규씨."
"그렇게 물으면서 이름은 왜 부르냐?"
"그럼 나 며칠만에 보는 줄은 알아요?"
"좀 오래 되었지. 미안해."
"그런데 이렇게 자연스러울 수 있어요. 석규씨는 항상 그렇나요?"
"자연스러울 수 있어. 타라. 태워 줄께."
"싫어요. 그냥 사라졌다 이렇게 불쑥 나타나면 내가 반가워라도 할 줄 알았어요?"
"우리 아버지가 신고를 해서 도망다녔다. 왜."
"예?"
그는 또 이상한 대답을 했습니다.
"그럼 이거라도 가져가. 저녁에 너네 병원으로 갈께."
그는 나에게 스케치북 하나를 주었습니다.
"내가 어디 근무하는 줄은 알아요?"
"학교 병원 아냐?"
"맞아요."
"내가 집에다 전화를 해 봤더니 너네 아버님이 날 아시더라. 그 비에 젖어 찾아 왔던놈...하하. 이 근처로 이사를 갔다고까지 친절하게 가르쳐 주시던데..."
"그랬어요? 석규씨가 오죽 이상한 모습으로 아빠눈에 들어갔으면 그랬겠어요."
사실은 가족 모두에게 혹시나 석규라는 사람한테서 전화가 오면 꼭 내 연락처를 알려주라고 부탁을 했었습니다. 사는곳도 가르쳐 주라고 당부를 했었구요.
"6시에 끝나냐?"
"아니요. 5시에요."
"그래 그럼 그때 보자."
조금만 더 말했다면 탔을텐데... 그는 조수석 문을 닫더니 그냥 가버렸습니다. 아침 마을버스는 힘들었읍니다.
스케치북에는 여러곳의 풍경들이 스케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각기 다른 모습으로 웃고 있는 내 모습이 그 풍경 여백을 차지하고 있었구요.
하루종일 설레었습니다. 퇴근시간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애써 태연한 표정으로 병원을 나왔습니다. 그리고 밝게 웃을 수 있었습니다. 그가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꽃도 한아름 안고 있었습니다.
차문도 열어주었습니다. 그렇게 하는데 타지 않을 수 있겠어요?
내가 조수석에 앉았을때 그는 씩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 자린 일년 팔개월만에 사람을 앉힌거야. 헤헤. 내가 그 자린 네 자리로 정해 버렸거든..."
그가 한말은 날 조금 감동시켰습니다.
"그동안 어딜 갔었던거에요?"
"도망다녔다니까..."
"무슨..."
"어디로 갈래? 참 너 방 얻은 곳은 어디야?"
"어디로 갈지 정하지도 않고 나를 태웠어요?"
"응. 야. 너 사는방 구경시켜 줄 수 있니?"
"제 방이요?"
"너네 방에 가서 밥 얻어 먹으면 안되겠냐?"
"안될것도 없지만 마땅히 먹을 만한게 없는데..."
"내가 혼자 살면서 참치찌게 끓이는걸 마스터 했걸랑."
"그럼 밥은 내가 할테니까 석규씨가 찌개를 끓여 주실래요?"
"그래. 하하."
"여기서 가까워요."
"그건 나도 알지. 아침 그동네잖아."
"그렇네요."
그를 제방에 초대했습니다. 가족이외의 사람으로는 그가 처음 내 방에 초대된 것이었습니다. 찌개 끓일 재료 몇가지를 사가지고 그는 내 방에 들어왔습니다.
"아담하네."
"혼자 살기에는...커피 한잔 하실래요?"
"밥은...?"
"배고파요? 밥 앉혀 놓을게요. 그동안 차라도 대접해야 되는거 아닌가?"
"그런가? 그럼 한잔 끓여줘."
내가 커피를 끓여 방으로 들어왔을때 그는 그가 그려준 내 모습을 보고 있었습니다.
"누가 그렸는지 잘 그렸다."
"석규씨하고 많이 닮은 사람이 그려주었죠."
"흠. 이 그림을 주면서 고백할려고 했었는데... 괜한 말 한것 같애."
"무슨 고백?"
"그건 비밀이지."
"치... 커피 드세요."
"응. 고마워."
방바닥에 앉아 그를 마주보며 웃었습니다.
"도망다녔다는 말은 무슨 말이에요?"
"응. 내가 우리집 돈을 훔쳤거든..."
"그건 또...?"
"내가 미대원서 쓴거 들켰다가 너 찾아 갔었잖아. 그리고 집에 들어갔어. 아버지가 휴학하고 고시공부 하라고 하면서 절에 들어가래."
"그래요?"
"맞은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한다고 했어. 그리고 다음날 학교 휴학을 했어. 그런데 절에 들어가기는 싫었어. 밝은 기억이 있는 학교 모습을 보았고, 그림 그리는거 포기하고 싶지 않았어. 그리고 네모습이 떠오르더라."
그는 잠시 회상하는 모습으로 커피잔을 입에 갖다 대고는 시간의 여운을 가졌습니다.
"그날 밤 짧은 편지를 하나 남기고 차를 몰고 집을 나왔어. 처음에는 차를 팔면 일년은 버티지 않겠나 생각을 했어. 그림도 그릴수 있을거 같았고... 근데 차는 팔 수가 없었어. 너무나 소중했거든... 그건 너 때문이야. 널 태우고 다녔던 기억이 내딴에는 너무 애틋했어. 조수석에서 네가 잠든 모습을 간직한 차라서 팔수가 없었어."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요."
내 목소리는 조금씩 떨렸습니다.
"밤에 몰래 집에 들어가 금고 문을 열었지. 뭐 딴거는 빼고 현금이 이천 팔백만원이 있더라. 삼백만원은 나두고 이천오백만원을 들고 날랐지. 나 신문에 난거 모르지?"
"예?"
"우리 아버지가 실종신고를 했더라. 현상금을 붙였는데 삼백만원이었어."
"정말요?"
"그럴줄 알았으면 다 들고 나와 버리는건데..."
"그럼 계속 도망 다닌거에요?"
"하하. 부자지간인데 날 경찰서에 잡아 넣기야 할까. 훔쳐온 돈으로 방을 하나 얻었어. 부산까지 내려가 얻었었어. 학생증 보여주며 과외하니까 꽤 돈이 벌리더라. 그리고 다른 잡일도 많이 했지. 불법 운전학원에서 운전도 가르쳤어. 대단하지 않냐? 난 사회에 나가는 것을 참 두려워 했었는데 이겨냈어. 학원을 계속 다니면서 일년만에 천만원이상 모았지. 하하. 일년정도 부산에 있다가 방을 빼고 서울로 올라왔어. 서울서는 월세방을 얻었어 그래서 훔쳐가지고 온 돈 이천오백만원을 집에다 갖다 놓을수 있었지. 편지도 여러장 써서 아버지께 드렸어. 일년만 더 있다가 집에 들어간다고 했어. 그렇게 하고선 한 두달정도 배달일을 했지. 과자 배달... 우연찮게 소개를 받아 일하게 되었는데 또 우연찮게 너를 보았어. 참 많이도 반가웠는데 네가 모른체 하더라. 뭐 모른체 할만도 했지."
나는 맑은 눈빛으로 그말을 하는 그를 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읍니다. 고개를 숙인채 작은 목소리로 머뭇거렸었읍니다.
"그날은... 그냥 그랬어요. 뭐랄까? 근데 왜 그냥 갔어요? 그렇게 반가웠다면서?"
"나도 그냥 그랬어. 너 네가 너를 만났을때 어떻게 그렇게 자연스러울수 있냐고 물었지?"
"네."
"그냥 그랬어. 하하. 그냥 항상 곁에 있다고 생각했고 내 마음곁에 항상 있었으니까..."
그의 대답을 듣고서 난 기쁜 마음으로 목소릴 떨 수 있었읍니다.
"오빠. 나 많이 좋아하죠?"
"하하. 그건 비밀이지."
그날 그가 해주는 찌개는 그의 말데로 맛있었습니다. 제법 늦은 시간까지 그와 단둘이 내 작은 방에서 시간을 공유했습니다.
"네방은 참 깨끗하다. 내방은 지저분하거든..."
"아직 집에 들어간거 아니에요?"
"응. 시험치고 들어갈거야. 난 꼭 미대를 들어가고 말거야. 하하."
"그럼 계속 그때 하던 일 하세요?"
"배달차 운전? 안해. 공부 해야지. 나 등록금하고 생활비 할 돈은 벌어 놓았어."
"어디에 방을 얻었는데요?"
"여기서 그렇게 멀지는 않아. 마포쪽에 얻었어."
"나 언제 한번 가도 되요?"
"지저분한데..."
"그러니까 청소도 좀 해주고..."
"그래 뭐."
그는 자정이 오기전에 자기가 사는곳으로 돌아 갔습니다. 뭔가 알수없는 마음속 파도가 일었습니다. 또 한동안 그를 내 마음에 새겨야 겠네요. 나는 미소지었읍니다. 그를 떠올리며 말입니다. 그 미소짓는 모습이 담긴 거울속 내 모습이 그림속의 내모습과 많이도 닮아 보였읍니다.
그는 그날 나를 찾아 오고 난 뒤 석달은 일주일에 두번정도씩 나를 찾아 왔었습니다.
이제는... 10편
그는 곧 수능을 치루어야 했기 때문에 바빴지만 내가 저녁타임을 하는 날에는 꼭 날 데리러 왔습니다. 사람이 드문 병원의 로비에서 책을 보는 그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정성을 보이는 모습에는 분명 사랑이 있습니다.
그가 나만의 자리라고 말했던 조수석은 아늑했습니다. 십여분의 짧은 시간만으로 내방에 올 수 있었지만 그는 잠시 나에게 쉼을 주었습니다.
가을이 끝나가는 어느 흐린 주말 오후에 그는 나를 그가 사는 방으로 데려갔었습니다. 내가 많이 졸랐던 탓이었겠지요.
그의 방은 생각했던 것보다 작았습니다. 방안에 들어서자 바로 느낄수 있었던 케케한 남자냄새. 별로 좋지는 못했지만 웃을 수 있었습니다. 그의 흔적이 쌓인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불은 개어져 있었지만 방바닥은 깨끗하지 못했습니다. 물감들의 자욱과 제대로 닦지못해 구석구석 먼지가 쌓여 있었습니다. 홀로 이 낡고 작은 방에서 삶을 꾸렸다고 생각하니 그가 가엾게 느껴졌었읍니다.
방모서리 한편에서 참 정겨운 물건을 하나 보았습니다. 예전에 내가 그에게 그것을 사 주었을 때는 참 깨끗했었는데... 물감이 번지고 흘러버린 시간의 때가 묻어 낡아버린 화구통이 내가 눈길을 준곳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새겼던 YJ와 내가 새겼던 SG라는 글자들도 파랗고 시커먼 물감색으로 칠해져 그때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선명했습니다. 그때의 기억또한 선명했습니다.
영영 오지 않는다면
미소 지어야 겠지요.
새겨야 겠지요.
먼훗날이 되어도 잊혀지지 않는다면
그럴바에야
아픈 추억이 되지 않게 눈물처럼 웃어야 겠지요.
그가 뺏어간 내 시화가 또한 그의 방 벽을 장식하며 내 시야에 들어 왔습니다.
"저거 뺏어가더니 겨우 이런 작은 방에다 걸어 놨어요?"
그는 그 시화를 쳐다보며 그냥 웃었습니다.
"원래는 우리집 내방에 걸어 놨었는데... 그 방은 네방보다 훨씬 컸어. 저번에 돈 갖다놓을때 몰래 가져 나왔지."
"집에 들어가세요. 내가 봐도 안되어 보인다."
"뭐가 안되어 보이는데? 괜찮아. 이방이 혼자 쓰기에는 딱 좋아."
"언제 들어갈거에요?"
"집에? 시험은 보고 들어가야지. 내 나이가 점점 힘들어져. 이번에도 꺽이면 완전히 부러질거 같아."
"그럼 청소나 좀 하지."
"지저분하냐? 너 온다고 내딴에는 청소 한건데..."
"어떻게 사는지 대충 상상이 가네요. 빗자루 어딨어요?"
"빗자루는 없어. 걸레만 있는데..."
따뜻한 물도 나오지 않는 그의 자취방 작은 부엌에서 시린손을 참아가며 걸레를 세번을 빨아야 했습니다. 그가 살던집을 생각하면 이런곳에서 그가 잠이나 이룰 수 있었겠나 싶었지만 그는 이곳이 참 아늑하다고 했습니다. 남이 보면 안탔가웁게 느껴질지라도 그래도 그는 그곳에서 미소짓고 있었습니다.
"담배 피워요?"
방청소를 하다가 밥상을 책상삼아 책을 놓아둔 곳에서 꽁초가 남아 있는 재떨이를 보았습니다.
"정물화 그릴려고 갖다 놓은거야."
"이런걸 정물화로 그려요?"
"삶의 흔적이잖아."
그가 이방과 함께한 모습은 재떨이 속 당배꽁초만큼이나 초라해 보였지만 그는 포기할 수 없는 유혹같은 표정을 지어보이고 있었습니다.
그는 개어논 이불에 기대어 담배를 피웠습니다. 그가 담배 피는 모습은 참 오랜만이었습니다.
그의 담배 피는 모습은 어색했습니다. 기침을 했어요. 두가피만 뽑혀져 있는 담배곽이 재떨이와 함께 그의 옆에 있었습니다. 그는 담배를 필 줄 몰랐습니다.
내가 가져온 귤과 그가 타가지고 온 커피를 먹으며 그가 그동안 그려 놓은 그림들을 보았습니다.
'아들의 죽음.' 그렇게 제목을 붙여 놓은 그림은 아까 그가 피던 담배의 곽과 그 곽에서 나온 담배 한가피가 재떨이 속에서 타들어가는 모습이 정물로 그려져 있었습니다.
괜시리 맘이 아팠습니다. 그의 마음고생을 짐작할 수 있었으니까요.
한동안 그림들을 구경했습니다. 어떻게 한번 흘낏 보고는 이렇게 그려 놓을 수가 있었을까요?
그는 모든 그림들에 제목을 적어 놓았습니다.
'시간을 지나치는 여인의 낯설음.' 이란 그림은 내가 그를 모른척하고 지나쳤을때 모습이 담겨져 있었는데 그려진 내표정이 너무나 공감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 표정이 맞냐?"
내가 그 그림을 유심히 보고 있자 그가 내게 물었습니다.
"네."
"알겠다."
"뭘요?"
"그건 비밀이지."
그는 스케치북에서 그 그림을 떼어내더니 내게 주었습니다. 그의 모습이 담긴 그림이나 한장 주었음 했는데 그를 그린 그림은 없었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보여준 그림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그림이었습니다. 무수히 많은 점들로만 채색되어진 유채화였습니다. 화가들은 왜 처음에는 쉽게 그림을 그리다 나중에는 자신만이 알 수 있는 그림들로 바뀌어 가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전 풍경화가 좋아요. 그 풍경속에 내가 있는 기억을 만들어 낼 수가 있어 전 풍경화가 좋습니다.
"이 그림 좋지 않냐?"
"예? 못알아 보겠는데요."
"하하 그렇겠지."
"무슨 그림이 이래요?"
"야. 이렇게 그려야 비싸."
"후후 치..."
그는 그 그림을 만족스럽게 바라 보더니 설명을 했습니다.
"이 그림을 어떻게 그린 줄 아니?"
"그냥 붓에다 물감을 묻혀 뿌린거 같은데요."
"맞았어."
"그럼 그린게 아니네요."
"그린거 보다도 내가 이 생각을 이끌어 내기 위해 많은 시간 고심을 했지. 그래서 비싼거야."
"무슨 생각?"
그는 아주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진진한 설명을 했습니다.
"중간에 점을 하나 찍었어. 그건 나지. 그리고 여러개의 붓에다 색깔별로 물감을 묻혀 뿌렸어. 나라고 생각한 점과 많은 점들이 겹칠수 있었지. 나와 마주친 모든 점들의 색을 섞었어. 나와 마주친 점들은 내인생에 끼어든 사람들이거든. 아직은 완전히 까맣지는 않지? 색을 섞으니 이렇게 되었어. 내가 태어나기 이전에도 내 인생은 있었지. 그건 아버지야. 여기 이 큰점을 아버지라 생각하고 주황과 자주색을 섞어 그려 넣었지. 밝은 하루를 일깨워주는 새벽의 해돋음 같기도 하고 이제는 어둠으로 몰아넣어야 하는 저녁무렵의 노을빛같기도 한 색깔이야."
어렴풋이 어려웠습니다. 그가 마음속에 무엇을 품고 있는지... 그는 그때 갈등하고 있었음을 어렴풋이 알수가 있었습니다.
"그럼 여기 파란 큰점은...?"
"그건 그리움. 이 두점의 연결선상에 그려 넣었지. 그리움은 하늘과도 같은 파랑이야."
"그게 끝이에요?"
"야. 내딴에는 얼마나 생각해서 그린건데..."
"이런 그림이 비싸요?"
"너 미국에서 어느 화가의 그림이 제일 비싼줄 아니?"
"응... 피카소?"
"피카소가 미국 사람이니? 아니야."
"누군데요?"
"잭슨 폴록."
"모르는 사람인데요."
"그사람이 그림을 저렇게 그렸어. 하하."
그의 작은 방에는 나의 웃음과 그의 웃음이 있었습니다. 그날 그의 방을 나올때 비가 내렸습니다. 난 우산이 없었어요. 그는 우산을 씌워 주었고 나를 집까지 태워다 주었습니다.
밝은 모습으로 그는 다시 자기가 사는 방으로 돌아갔습니다. 나도 밝은 모습으로 잠자리에 들수가 있었습니다. 사랑은 그렇게 웃을줄만 알았는데 그날로부터 몇일이 지나고 그는 또 한동안 그리움을 주고 사라졌었습니다.
그가 시험을 보던 앞날 난 엿가락 두개를 사서 주었습니다. 내가 그에게 엿을 받은 후로부터 육년이란 시간이 흘렀을 때였습니다. 한개씩 따로 포장한 엿을 그가 받아 들고는 잠시 동안만 시간을 내게 주었었습니다.
"그래도 너에게 엿을 받아 먹는구나."
"합격하세요."
"수능은 좀 복잡해서... 그리고 나 실기도 봐야돼."
"실기는 뭐 무난할 것 같던데요."
"나 그림에 소질이 있는거 같지?"
"네. 많이요. 어디에 지원할 거에요?"
"**대 회화과."
"그럼 내년에 그곳에서 볼 수 있기를 빌께요."
"하하. 엿 잘 먹을께. 포장지가 파랑색이라 맘에 든다. 나 갈께."
그 말을 듣고 나서 그를 다시 보게 되기까지 몇달의 시간이 또 흘러가야 했습니다. 그는 무난히 합격을 했었습니다. 내가 확인을 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는 등록을 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