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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희 우리춤 움직임원리 연구회. 밀양검무보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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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의 風(풍) 스크랩 ◈ 조선시대가무 (朝鮮時代歌舞) - 민속무용 (民俗]舞踊) - 밀양 백중놀이 (密陽百中-) - 하보경
김은희 추천 0 조회 217 14.08.07 02:17 댓글 5
게시글 본문내용

 오북춤 ♣ 밀양백중 (密陽百中)놀이 中 (중요무형문화재 제68호) 46분 부터 오북춤

http://blog.daum.net/dhrdl6343/908?srchid=BR1http://blog.daum.net/dhrdl6343/908

 

 신명으로 80년 살아 온 영원한 걸립패 밀양백중놀이 하보경


“내 나이 아흔이 가깝다 보니 친구들이 다 죽었소. 참 신명나게 놀던 옛 친구들이었는데 이젠 말벗할 사람조차 없어……. 어떤 땐 낮잠 꿈속에서 잠깐 만나 회포를 풀고 눈물짓기도 하지……. 이젠 갈 날이 가까워졌나 봐.”


한 인간의 삶에 있어서 나이(세월)가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밀양백중놀이> 중 <북춤>, <양반춤>, <범부춤>의 제1인자 하보경(河寶鏡·86, 1906년 8월 24일생, 무형문화재 제68호) 옹은 100년 전 사람들을 이야기하며 이렇게 심약해져 있었다.


경남 밀양시 내이동 992-3통 10반 그의 자택은 넉 달 전 집값을 줄여 이사 온 방 두 개짜리 전세였다. 한때는 머슴을 둘씩이나 두고 보리 70석 하던 중농이었지만 놀기 좋아하다 몰락하고 이 지경이라고 힘겨운 노구를 추스린다. 밀양에서 나고 살아오기를 86년 세월. 5대 전부터 이곳서 살아오며 아들, 손자도 밀양을 못 떠나게 하고 있다. 한평생 집구석에 밥이 익는지, 죽이 끓는지를 모르고 신명으로만 살아 온 한량 일생. 그래서 하옹은 자신의 말년이 젊어 방탕한 죄값이라 생각하며 달게 받는다고 했다.


큰북 치는 아버지 하성옥(下聖玉) 씨를 바라보며 “어쩌면 저렇게 잘 칠 수 있을까.”하고 의아해 했다는 하옹의 어린 시절. 아버지는 농악패(걸립패)를 모아 동네굿을 하러 다녔고 한번 나가면 7~8개월씩 걸렸다고 한다. 걸립꾼이 쉬는 동안 이들이 치던 악기는 하씨집 헛간에 보관됐다. 아버지가 없는 동안 큰북, 장구, 꽹과리, 징까지 마음놓고 쳐 댔다. 그러고는 아버지 하던 대로 큰북을 가슴에 안고 손놀림, 고갯짓과 함께 춤도 춰 보았다.


이 때가 밀양보통학교 다니던 여덟 살 적. 부전자승으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었다. “애비 하는 짓거리 니도 할거냐.”고 노발대발이었지만 그게 어디 말려서 될 일인가.


꼼배기(7월중 논농사 다 짓고 2~3일간 날을 받아 노는 것) 먹는 날이면 하씨가 나서 난장판을 휘어 잡았다. 훤칠한 키에다 때깔 좋은 얼굴, 여기에다 아버지가 추던 큰북춤은 그야말로 압권이고 일품이었다고 노안에 생기를 띤다. ‘덩 더쿵, 땅 따당 땅땅’의 기본 4박자에서 ‘다당 다당 당 다당, 다당 다당 다당’의 자진 가락으로 넘어가는 6박, 8박의 하씨 북 장단은 억지로 흉내내서 칠 수 있는 가락이 아니다.


밀양 지방의 백중(음력 7월 보름)놀이는 머슴들이 끝물(논매기의 맨 마지막) 매 놓고 몸을 풀기 위해 신나게 놀던 동네 잔치였다. 지주들은 머슴들 사기를 위해 뒷전에서 후원했고, 건너 마을 처녀들은 건장한 일꾼들 힘자랑에 벙어리 냉가슴 앓기도 했다. 그 당시 웬만한 중농가에선 한두 명 머슴은 꼭 두어야 했고 농사처가 많은 대농은 4~5명도 거느렸다. 이 때 상머슴 하나의 새경(의식주 제공 외에 연말에 주는 보수)은 쌀 여덟 가마니. 이토록 힘겹게 살아가는 머슴들이 허리띠를 풀어 제치고 신명나게 놀아나는 ‘굿판’이 바로 백중놀이였다.


밀양 군내 수백 명 머슴이 모인 가운데 왕(상)머슴이 수건을 질끈 동여매고 황소 탄 채 놀이판으로 들어온다. 이 때 하씨가 큰북을 메고 들어가면 동네 구경꾼들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흥에 겨워 더덩실 어깨춤을 추었다. 설거지 손을 놓고 나온 아주머니는 자배기에 바가지 엎어 놓고 물장구를 치며 사장구(옹기로 만든 장구)도 동원됐다. 키가 작은 사람은 목마 타고도 아우성이었다고 하옹은 그 때 기억을 되살린다.


이 신명으로 평생을 살아 온 하옹이다. 이 놀음판에서 흥을 이기지 못해 우러난 춤이 <양반춤>이고 <범부춤>. 그래서 하옹이 서울 등 전국의 무대에 서면 모여든 관중은 열광한다. “춤은 마음으로 추는 것이지 몸으로 추는 게 아닙니더. 가만히 서 있어도 춤사위가 들어 있어야 돼. 한참 서 있다 북 한 번 두들겨도 관객이 춤춘 것 같아 하지…….”


여기에다 하옹이 추는 <휘쟁이춤>은 가히 일품이다. <휘쟁이춤>은 호상(수를 다한 죽음)에 상여 나갈 때 앞가림하는 춤으로 원귀들을 양손칼로 쳐 정지해 주는 것이다. 망나니(휘쟁이) 가면을 쓰고 천방지축으로 날뛰며 억눌려 온 서민의 한을 후련하게 씻어 낸다.


덧붙여 <병신춤>까지 춰 대면 그야말로 백중놀이패(50~55명)는 놀이의 절정에 다다른다. 구경꾼들은 용신대(색색 주머니 100여 개가 달린 3미터 정도의 두루마리)에 각자 자기 소원을 빌며 쌈짓돈을 꺼내 담는다.


이런 놀이는 머슴들을 위안하면서도 더 많이 부려먹자는 지주들의 속셈도 있었다. 백중놀이 외에 여름에 모심고 나서 호미씻이 전과 추수 후에도 한 차례씩 놀며 한데 어우러졌다.
동네 당산나무 밑에서 ‘들독’ 들기 힘자랑으로 상머슴과 새끼머슴을 가리던 일. 이 때 머슴들은 힘에 겨운 바윗돌을 무릎에 얹었다가 어깨 너머로 던지면서 용을 썼다고 하옹은 말한다.
“상머슴은 밤중에 낫을 갈아도 날을 제대로 세워....... 날이 매끈하면 덜 갈린 거고 까칠까칠해야 날이 선 거야. 쟁기질은 말할 것 없고…….”


오북(다섯 명이 치는 북) 중 수(首)북을 치며 살아 온 8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집안에는 먹을 것 걱정 없어 돈 한푼 안 보태 줬다고 뒤늦게 미안해한다. 젊어서는 한 달에 이레(7일) 정도 집에 들르면 족했었다니 재취로 들어온 강송아(姜松阿·76)씨조차 ‘조선 한량’이라고 말을 막는다.


1983년 3월 1일 <밀양백중놀이> 예능 보유자로 지정된 이래 월 45만 원씩의 생활 보조비로 말년을 보낸다. 이동안(李東安·86), 박홍도(朴洪道·86, 고성 출신, 문둥이북춤) 옹과 함께 현역 최고령 전통 예인인 하옹도 이젠 숨이 목까지 차 오르고 수족이 냉해져 무대 서기가 겁난다고 한다.


스스로 창제해 낸 한국 전통의 <양반춤>을 제대로 넘겨받을 사람이 적어 근심이 태산 같다. 다행히 손자 하용부(河龍富·37, 연극인) 씨가 할아버지 춤에 관심 갖고 배우며 김상용(76, 상쇠 인간문화재), 권재엽(76, 큰북·병신춤), 임순희(66, 문화재 후보자, 병신춤·징), 조병완(58, 양반춤), 박동영(34)씨 등이 하옹의 뒤를 잇고 있다.


보봉계(걸립패 일원)를 조직, 경상도 일대를 구석구석 누볐던 하옹은 그 덕에 미국과 일본도 구경했다면서 푹 꺼진 눈자위를 치켜올린다.
“젊어서는 부모 덕에 살고 늙어서는 정부 덕에 산다.”는 선비 한량 하옹은 86년을 입어 온 ‘육신의 옷’이 지겨워질 때도 있다고 했다.

 

 재인-전통예맥을 이어가는 사람들, 세계일보 이규원 기자1991.12.7 
   
 자타가 공인하는 가장 뛰어난 춤꾼 양반 범부춤 정립, 후진양성에 혼신  
 
백중놀이는 우리나라 어느 고을에서나 행해지던 서민적인 농경 민속놀이였다.
여름날 땀 흘리며 농사일에 시달렸던 농부들이 하루를 쉬면서 음식과 술은 먹고 즐겁게 하루를 노는데서 유래되었다. 음력 7월 보름쯤이면 농사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 되는 때이다. 이때쯤이면 세 벌 논매기도 끝내기 때문에 호미는 더 이상 쓰이지 않으므로 씻어서 헛간에 걸어두고 하루를 논대서 호미씻이라고도 하는데 백중날(음력 7월15일)이나 이 날을 전후해서 논다고 해서 百中놀이라고 하는 것이다.


백중놀이는 말하자면 여름내 땀 흘린 농부들을 위로하고 풍년을 기원하는 한 판의 축제마당인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풍장을 치며 춤판이 어우러지기 마련이었다. 각 지방마다 행해지던 백중놀이 가운데 유독 밀양백중놀이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각종 풍물가락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뛰어난 춤사위와 다양한 민속놀이가 잘 어우러져 전승되어 오고 있기 때문이다.

 

밀양백중놀이의 짜임새는 농신제, 작두말타기, 춤판 뒷풀이로 되어 있다. 농신제는 먼저 나팔을 길게 서 너 번 불면 놀이꾼들이 풍물을 치며 놀이판으로 모여들어 놀이판 가운데에 있는 농신대를 중심으로 서 너 차례 돌다가 고축터를 깨끗이 하는 뜻으로 오방신장을 불러 일으켜 잡귀 막이 굿을 하고 덧배기춤으로 한바탕 놀다가 農神에 대한 고축풀이를 한다. 겨릅대 360개를 묶어 만든 農祥대를 중심으로 원형으로 서서 북을 궁궁 세 번 울리면 봉신했다며 삼배하고 엎드려 누군가 축문을 읽는다.

 

“하늘 위 상제님, 천상천하 용왕님,
바람기 순조롭고, 멸구 잡충 없이하여
금년농사 잘도 해서, 천지착한 어진백성
걱정일랑 덜어주고 총각신세 면케 하소.”

 

고축을 마치고 술과 안주를 먹고는 흥에 겨워 어사영·모심기노래·논매기노래·타작노래·쾌지나칭칭을 부르고 작두말 타기를 한다. 작두말 타기는 머슴들 중에서 뽑은 농사장원을 작두말(작두마, 지게 목발로 만든 말)에 데친 풍물을 울리며 놀이판을 돌면서 시위하는 놀이이다. 작두말놀이를 하면서 떠들썩하게 놀다가 춤판으로 이어진다. 춤판은 양반춤과 병신춤·범부춤·오북춤·뒷풀이 순으로 이어지는데 밀양백중놀이는 바로 이 춤판이다.


밀양백중놀이는 춤이 많고 춤들의 개성이 뚜렷하며 야성적이고 동작이 크며 활달하고 생명력이 넘친다. 그 중에서도 범부춤과 오북춤은 이 지방에서만 전승되는 춤으로, 범부춤은 두 사람이 번갈아 가면서 춤판을 휘돌아 장고잡이를 향해 몸을 내던지며 활달하게 개인기를 보이며 오북춤은 다섯 사람의 북잡이들이 북끈을 느슨하게 매고 원무하면서 북을 치고 춤을 추는데 박력이 있고 멋들어진 춤이다.

 

밀양백중놀이를 전승하고 춤들을 복원 정립한 사람이 바로 하보경옹이다. 옹을 만나기 위해 밀양시 내일동의 언덕배기에 있는 밀양민속예술전수회관으로 찾아갔다. 하얀 머리, 흰 눈썹, 흰 수염. 흰 옷차림이 첫눈에 흡사 신선같기도 하고, 마치 춤을 통해 신의 경지에 이른 도인의 모습과도 같아 보였다.
하옹은 1908년 밀양 내일동에서 논 40마지기의 부잣집 맏아들로 태어났다. 부친 하경택씨는 농악패의 모가비(우두머리)로 그 자신 북을 치고 춤을 추는 한량이었다. 따라서 어린 시절의 하보경은 줄곧 농악패의 놀이판에서 북장단과 춤사위를 보고 들으면서 자랐다.


밀양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자연스레 놀이판에 이끌리게 되었다. 장단과 흥이 넘쳤던 그의 환경이 빚어 낸 탓인지 선친의 한량끼가 그의 몸에 전이되었는지. 신명과 흥이 체득해 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저 좋아서 한 기라. 누가 갈쳐주는 사람도 없고. 첨에는 북을 배왔지. 북을 들고 나가 칠라카먼 어른들이 몬 치라카고. 그래서 어른들이 하는 걸 보고 숨어서 혼자 배완기라, 그래 배와 가지고 내가 북춤을 댕기 메 친 거는 열여덟 묵어서 치게 됐어. 춤도 배우자고 해서 배운 거이 아이고 넘 추는 거 보고 배완거지. 꼭 배울랴고 한 거도 아이라. 그저 어째 어째 하다보이 이렇게 돼가 있어.”


말하자면 특별한 동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곡이 누구에게 사사해서 배운 것도 아니다. 그저 천성으로 배워 몸으로 체득한 것이다. 그래서 하옹의 춤에서 신명과 흥이 절로 표출 되는지도 모른다.


머슴들과 농사꾼으로 이어져 오던 밀양백중놀이는 1900년대에 접어들면서 보본계라는 놀이계에서 연희하게 되었다. 보본계의 구성원이던 선친이 작고하자 24세 때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대물림 받아 이 보본계의 북치는 고수가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집안일을 부인에게 내 맡긴 채 씨름판, 윷판, 소싸움판, 장기판, 투전판 등 놀이판을 찾아서 유랑생활을 했으며 특히 춤판이라는 춤판은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찾아다녔다. 그 때문에 선대로 물려받은 가산은 모두 거덜나 버렸다.


해방 전 해에는 집안에 남아있던 마지막 소 한 마리를 장에 내다 팔고 그 돈을 가지고 만주로 훌쩍 건너가기도 했다. 만주 땅에서 그가 춤을 추면 이역만리 동포들은 눈시울을 적셔가며 자리를 뜰 줄 몰랐다고 한다. 그의 인기가 대단하자 집회가 금지된 시절에 사람들을 모이게 한다는 이유로 독립운동을 돕는 게 아니냐는 혐의로 일본경찰에 쫓기게 되어 고향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해방이 되고 6·25의 전란이 가라앉아 놀이판이 되살아나자 보본계를 오삼 친목계로 발전시켜 그의 신명을 되살리기 시작했다. 보본계가 스스로 즐기고 노는 춤판이었다면 오삼 친목계는 친목을 목적으로 관광여행을 하면서 관광지에서 춤판을 벌여 보여주는 춤판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이후 66년에는 국악협회 밀양지부를 결성하여 이 고장의 민속놀이 발굴에 투신하는 한편 73년에는 밀양민속예술보존협회를 결성하여 밀양아랑제의 무대행사로 참가하는 동시에 부산지역의 동래야류와 수영야류 등의 행사에 초청받아 찬조출연도 자주 가졌으며 79년에는 경남지역 민속경연대회에 출전도 하였고 80년에는 경남도 대표로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나가게 되었다.

 

전국대회 출전을 계기로 그 동안 병신춤·북춤, 농신제 등 일부만이 이어져왔던 것을 하옹이 중심이 되어 양반춤, 북춤, 오북춤 등을 추가로 복원하여 집대성했다. 이 대회에서 국무총리상을 받은 것이 밀양백중놀이가 중요무형문화재로 공인받게 된 계기가 되었으며, 하옹의 춤사위와 노고가 인정되어 그해 11월에 인간문화재가 되었다.


하옹은 인간문화재가 된 이후로 더욱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81년에 미국국회의사당 초청으로 한 달 동안에 걸쳐 7개 도시를 순회 공연한 것을 비롯하여 매년 20여 회에 걸친 발표공연과 초청공연에 참가해 왔으며, 80이 넘은 지금도 젊은이들과 함께 춤판에 뛰어들어 어우르고 있으며 한 달에 두 차례씩 직접 북을 치며 제사들을 가르치고 있다. 춤사위가 틀린다든지 북을 잘못 칠라치면 북채로 때릴 정도로 지성이다.


무용학계의 정병호 교수는 “하옹의 춤은 자타가 인정하는 우리나라 춤꾼으로서 가장 뛰어난 명무자임은 틀림이 없다”고 그의 춤사위를 극찬하고 있다.
하옹은 이제 자기가 평생 갈고 닦은 춤사위를 제자들에게 남기는 데에 혼신의 힘을 쏟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옹의 춤사위가 훌륭한 제자에게 남겨지길 바랄 뿐이다.

 

자료제공 월간 문화재 (1990년 11월 
 
 

북춤

민속무용 제1집/명무전 공연 실황

일시: 1979.12.08

장소: 서울예고 강당

출연: 하보경

 

*내용
북을 치면서 추는 춤으로 북은 수렵할 때나 전투·제의(祭儀)에서 신악기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북춤의 유래는 북을 연주하며 춤을 추는 데서 찾아야 한다. 본격적인 북춤은 역시 농악에서 볼 수 있다.

 

농악에서의 북춤은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발달하였는데, 경상도형의 북춤은 철저하게 원박에 맞춘 집단무용적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전라도형은 북치는 가락이 섬세하고 다양하며 맺고 얼렸다 푸는 묘사가 뚜렷이 나타난 개인 무용적인 성격을 가진다. 북춤의 기본 가락을 연주하는 것과 가락 사이에 춤을 추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유형은 외북채로 치면서 추는 춤과 쌍북채로 치는 춤이 있다. 북춤으로 유명한 곳은 밀양지방의 외북채와 진도북춤의 쌍북채를 꼽는다.

밀양백중놀이 오북춤 - 판편기, 농신제, 작두말타기, 춤판, 범부춤, 오북춤, 뒷놀이로 구성된 밀양백중놀이중 마지막부분 오북춤입니다.

한민동 오북춤 공연실황

 

 

경상남도 밀양지방에 전해 내려오는 백중놀이.

두레농사가 파한 후 음력 7월 15일경에 행하던 호미씻이놀이를 말한다. 이 놀이는 농촌에서 힘겨운 세벌 논매기를 끝내고 나서 백중을 전후한 용날[辰日]을 택해 머슴들이 풍년을 비는 뜻으로 농신(農神)에 대한 고사를 지낸 다음 '꼼배기참놀이'를 할 때 여흥으로 여러 가지 놀이판을 벌여온 데서 비롯되었다.

놀이의 줄거리는 세도가 당당한 양반들에게 시달림을 받아오던 서민들이 서로의 애환을 달래는 풍자놀이로 엮어진다. 첫째 마당인 앞놀이는 저릅대[麻芋]로 만든 농신대를 세우고 고사를 드리는 농신제마당, 둘째 마당은 농사 장원이 된 머슴을 작두말에 태우고 돌아다니며 병신들이 몰려나와 병신춤을 추는 놀이마당, 셋째 마당은 북잡이들이 오북춤을 추면서 오곡이 번성하길 기원하는 신풀이마당이다. 쇠가락은 농악가락으로 이끌고 나가며, 장단은 덧배기·중모리·중중모리·단모리·휘모리 등이 각 마당에 따라 적절히 구사된다. 출연자로는 지주와 상쇠·영각·부쇠·수징·부징·수북·중북·종북·끝북·수징고·부징고·기잽이·일꾼·모심기앞소리꾼·논매기앞소리꾼·사장고·물장고·좌상·무상·숫총각·우상·벙어리양반·중풍쟁이·뜰것이·휘둘리기·난쟁이·문둥이·꼽추·배불래기·봉사·꼬부랑할미 등이 등장한다. 중요무형문화재 제6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오북춤과 병신춤, 범부춤과 민요 〈어사용〉이 유명하다.

 

 1992년 국악당소극장에서 열린 '김은희 발표회' 공연 중 밀양백중놀이 

하보경, 김은희, 하용부 외 밀양백중놀이보존회 회원 출연

머슴들이 양반을 쫓아 내다, 밀양백중놀이

病身舞 Byung shin chum 병신춤

병신춤으로 양반을 놀리는 권경도 할머니

 

 이 사진은 병석에 누워계실때 촬영한 사진입니다.(1997년)



보유자하보경의북춤


관련사진

하용부씨는 "한국인 특유의 심성과 몸짓을 외국인들은 내게서 발견한 듯 하다"며 해외의 뜨거운 반응을 해석한다. 딸 윤희씨는 "관객과 함께 호흡하는 아버지의 솜씨야말로 나의 영원한 숙제"라고 말했다. 조영호 기자 youcho@hk.co.kr

[장병욱의 쪽빛보다 푸르게] <4> 밀양백중놀이의 하용부 부녀

"조부 놀이판 따라다니며 어깨 너머로 배워 딸까지 5대 춤꾼… 피는 못 속이나 봐요"

범부춤


출처 :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01_02_04

하늘 위에 상제님 천하 용왕님
바람기 순조롭고 벌구잡충 없이 하며
금년 농사 잘도 해서 총각 신세 면케 하고
앞논에 용신님 뒷논에 용신님
들쥐도 막아 주고 나는 새도 막아 주고
회기종도 막아 주고 흰무리도 막아 주소

 

농신제 축문을 읽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 백중놀이는 힘겨운 세벌 논매기를 끝낸 백중날, 곧 9월 보름을 전후한 용날에 동네 머슴들이 모여서 벌이는 놀이였습니다.

마당 한가운데에 저릅대로 만든 '농신대'를 세우고 동네 사람들이 쌀이나, 콩, 돈, 축원문을 넣은 주머니를 주렁주렁 매달고 둥그렇게 둘러서서 세 번 절하며 그 해의 풍년과 복을 빈 다음, 그 해에 농사를 제일 잘한 장원을 지게 목발로 만든 ‘작두말’에 태우고 머슴들끼리 놀이판을 벌입니다.

그 판에 양반이 끼어들어 거드름을 부리며 '양반춤'을 추면 머슴들과 부엌 일하는 여인들인 '정지꾼'들이 여기 저기서 나타나 병신춤으로 양반을 놀리고, 쫓겨난 양반은 범부 차림으로 다시 나타나 서민들과 어울려 '범부춤'을 흥겹게 춥니다.

그런 다음 북잽이들이 큰 북을 메고 나와 밀양 백중놀이에만 유일하게 전해오는 '오북춤'을 춥니다. 이 오북춤은 '오행'과 '오기'가 순조롭기를 빌며 '오체'가 성하고 '오곡'이 잘되고 '오복'을 누릴 수 있기를 비는 뜻이 담겨 있는데, 이 오북춤이 끝나면 모든 놀이꾼과 구경꾼이 한데 어우러져서 마지막 뒤풀이를 합니다.

하보경 명인은 밀양 읍내에서 이 놀이를 제일 오랫동안 놀아온 춤꾼입니다.
자신의 나이가 몇 살인지도 정확하게 기억 못할 만큼 오래 살다 돌아가신 그는, 나이는 잊어버렸어도 백중놀이에 대해서만은 어느 것 하나 잊어 버린 것이 없을 만큼 뼛속 깊이 이 놀이가 배어있는 분이었습니다.

 

출처 : http://www.gallerywa.co.kr/column1.asp%...dx%3D864

1909년인가 1905년인가에 하성옥의 큰아들로 그가 태어났을 때, 그의 부친은 이미 밀양 읍내에서 이름난 북잽이였습니다.

부친은 놀이를 좋아해서 읍내에서 놀이가 벌어질 때는 앞장을 서서 놀았고, 어느 때는 풍물패를 조직해서 이 동네 저 동네 떠돌아 다니며 서너 달씩 집을 비우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단체가 해산되면 집에다 악기를 풀어놓고 흩어지는데, 돈을 못 벌었거나 갈 곳이 없는 사람은 열흘이나 보름씩 그의 집에서 쉬어 가기도 했습니다. 하보경 소년은 어려서부터 늘상 그 어른들이 치는 풍물소리를 듣고 그 어른들이 추는 춤을 보며 자랐고, 틈만 나면 그들에게서 춤과 악기를 배우기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밀양보통학교를 다닐 무렵에는 이미 웬만한 장단이나 춤은 따라할 수 있는 실력이 되었지만 아버지의 눈이 무서워 드러내 놓고 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은 놀이를 좋아할 망정 아들만은 공부를 착실히 해서 면서기 같은 훌륭한 인물이 되어주기를 바랐던 아버지는 아들이 남 앞에서 북치고 노는 것을 엄하게 금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명절마다 벌어지는 푸짐한 마을 놀이 때면 그는 엉덩이가 들썩거려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밀양은 산이 좋고 들이 넓고 물이 좋고 하니께네, 보리도 잘되고 나락도 잘돼, 소 없는 집이 없고, 머슴없는 집이 없는 기라. 백중날 날받이 옷도 해주고 음식도 해주고 푸짐하게 노는데, 우째 신이 나는지 하루 종일 따라 다녀도 재미가 있는 기라.”

천성이 춤과 놀이에 무한히 끌려 들어가도록 되어 있는 데다가,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친구들의 영향으로 악기와 춤의 기초를 다진 그가 얌전하게 학교 공부나 하길 바란다는 것은 고양이 앞에 생선을 놓고 먹지 말라는 것과 같은 요구였습니다.

결국 그는 열여섯 살 무렵에 아버지 몰래 놀이판에서 북을 치고 말았습니다.

솜씨를 인정받은 그는 스무 살 무렵에는 춤까지 출 수 있게 되었는데, 같은 쪽의 손과 발이 함께 움직이는 '걸음새'와, 퉁기는 듯한 느낌을 주는 '배김새'와, 턱을 묘하게 끄덕거리는 독특한 '고개놀림'과 같은 양반춤의 진한 맛이 그의 몸 구석구석에서 배어 나오자, 보는 구경꾼들이 탄성을 올렸습니다. 그 뒤로 그는 일약 멋진 춤꾼으로 읍내에서 유명하게 되었습니다. 그 덕에 장옥도라는 처녀와의 혼담도 쉽사리 이루어져 장가도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춤 잘 추고 놀기 좋아하는 밀양 멋쟁이로 이름이 드높아져 친구들과 어울려 놀러다니는 재미에 맛을 붙일 무렵, 아버지가 병에 걸려 쓰러지게 되었습니다. 그가 스물네 살쯤 되었을 때에 부친이 세상을 뜨자,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보본계’ 계원이 되었습니다.

보본계는 백년이 넘게 내려오는 밀양 읍내의 놀이계로, 마흔 명쯤 되는 계원들이 정초에 읍내를 돌아다니며 지신밟기를 해주고, 봄에 한차례 모여서 걸판지게 노는 단체였습니다. 이 계원들은 저마다 악기나 노래나 춤에 재주가 있어 인기가 높았기 때문에 읍내 한량들이 서로 다투어 계원이 되고 싶어했지만, 웬만큼 솜씨가 없으면 계원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계에 젊은 계원이 되었으니 한량인 그로서는 대단히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그때부터 그의 ‘나쁜 짓’은 시작되었습니다.

이제는 무서운 아버지도 안 계시겠다, 물려받은 재산은 넉넉하여 부농 소리를 듣는 살림이니 의식주 걱정없겠다, 얼굴 잘생기고 젊고 멋있겠다, 춤 잘 추고 놀기 좋아하겠다, 아무튼 그에게는 '방탕'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이 완벽하게 갖추어진 셈이었습니다.

어디에 놀이판이 벌어졌다 하면 불원천리하고 달려가고, 씨름판이 벌어졌다 하면 다시 바람같이 달려가서 심판을 보며 신나게 놀고, 어디에 예쁜 기생이 있다 하면 부리나케 옷 빼입고 놀러가는 통에 그 많던 재산이 조금씩 없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윷놀이에 미치지만 않았어도 부친의 재산을 다 날려버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밀양의 하보경, 삼칸집 너머로 던져도 모가 난다.”는 말이 나올 만큼 이름난 내기 윷꾼이던 그는 결국 재산을 다 날린 다음 손을 톡톡 털었습니다.

일본 식민지 말기의 전쟁 바람은 밀양에도 불어 닥쳐 놀이판은 금지당하고, 술 마시고 놀음을 하면 잡혀가고, 쇠로 된 악기는 모두 전쟁물자로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고생스럽고 재미없는 시절을 간신히 넘긴 그는 해방이 되자마자 친구들과 ‘5.3 친목계’를 조직하여 마음껏 놀기로 작정했습니다.

보본계의 뜻을 이어받아 조직된 5.3친목계에는 타관 객지에 흩어져 있던 재주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는데, 북춤 잘 추는 김상용 명인, 권채입 명인, 이재원 명인, 김달수 명인과 꽹과리 잘 치는 정한목 명인, 김타업 명인과 징 잘 치는 김석화 명인 등이 중심이 되어 정초에 지신밟기 하고 봄에 한차례 크게 놀았습니다.

그 단체가 점점 발전하여 1960년에 한국사단법인 밀양국악협회가 탄생되었고, 1980년에는 민속예술보존협회가 생겨났습니다. 그해 10월에 제주시에서 벌어진 전국 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국무총리상을 받은 뒤 중요 무형 문화재 68호로 지정받고 하보경 명인이 <양반춤>과 <범부춤>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받게 되자, '밀양백중놀이'는 갑자기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 여기 저기 초청공연을 갖게 되고, 1981년 8월에는 미국의 국제 무용단 초청으로 하보경 명인이 대표로 미국에도 갔다오고, 1982년에는 김타업 명인이 상쇠 예능보유자로 지정 받게 되고, 거의 해마다 두세 번은 민속제나 예술제에서 가장 인기있는 종목으로 사람들의 찬사를 받았습니다.

백중놀이의 참가자들은 모두 저마다 재주가 뛰어나고 신명이 넘쳐 흘러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흥겨움에 겨워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 중에서도 하보경 명인의 춤은 보는 사람의 넋을 빼앗아버릴 만큼 뛰어났습니다.

백발이 성성한 머리에 하얀 띠를 맵시있게 두른 그가 십 년이 넘게 기른 하얀 수염을 바람에 휘날리며 하얀 도포를 입고 검은 관을 쓰고 미투리 신고 하얀 부채를 손에 들고 '양반춤'을 추거나, 하얀 중의적삼에 상투를 꼽고 웃댕기를 매고 미투리 신고서 '범무춤'을 추거나, 흰 중의적삼에 상투 꽂고 짚신 신고 큰북을 메고 북채를 손에 들고 딱딱딱 하면서 '북춤'을 출 때면 그의 말대로 “미국 처녀도 반해서 볼따구에 뽀뽀를 할” 지경이었습니다.

출처 :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01_02_04

그의 춤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의 춤이 “삶 속에서 우러나온 생활의 멋과 소박함과 흥겨움이 조화를 이룬 건강한 춤”이라고 찬미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잘 짜여진 무대무용과 교태가 가득한 기방춤에 맛들인 사람들은 그의 춤이 “촌스럽고 세련되지 못하고 투박하다.” 고 혹평하기도 합니다.

그런 예술가들의 현란한 말에 주눅들린 그는 그래서 누가 자기 춤에 대해서 물어보면 자신을 낮추며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내 춤은 춤도 아닌 기라. 서울서 춤추는 사람들 얼매나 잘 추나? 그런 사람들한테 비하모 내는 춤춘다꼬 말도 몬하지.”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이렇게 반문함으로써 일침을 놓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우리 춤은 예전부터 내려오는 것을 그대로 추는 춤이라. 사람들이 그걸 알아주고 소중하게 생각해주는 건데 우리 춤이 엉터리라 카모, 우리 조상님들이 추던 춤들이 전부 엉터리란 말이가?”

오늘날 이 나라 춤의 대부분이 일제시대의 권번에서 추어오던 기방춤의 변형인 현상을 걱정해 온 사람들에게는 그의 춤이 가진 토속성과 소박함을 찬미합니다.

본디 삶과 일 속에서 나왔으면서도 예술은 지금 그것들과 엄청나게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 중에서 아직도 일과 놀이 속에서 멋들어지게 춤이 추어지고, 거기서 얻어진 신명이 다시 삶 속으로 되돌아가 삶에 생기와 활력을 불어넣는 멋진 삶의 현장에서 평생 동안 춤을 추며 살아온 그의 춤은 사위 하나하나의 세련미와 예술성을 따지기에 앞서 이미 몸으로 전해오는 진한 땅 냄새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고고한 예술의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끈끈한 삶의 정서인 것입니다.

젊어서부터 가정을 돌보지 않고 멋과 흥에 취해 살아 온 그이지만 그래도 아들 둘과 딸 셋을 모두 번듯하게 키워 놓았고, 큰 아들이 낳은 손자 용부는 할아버지의 피를 이어 받아 그의 북춤 전수자가 되었습니다.

성격이 느긋하고, 골치아픈 일 싫어하고, 신나는 일만 있으면 만사를 제쳐 놓고, 걱정거리가 있어도 껄껄거리고 웃으며 넘긴 낙천성과 대범함이 그의 춤을 푸지고 신명나게 만들어주고, 1997년 90여세가 다 될 때까지 장수하다 돌아가시게 한 비결인지 모르겠습니다.

 

 

미국 처녀도 반해서 뽀뽀한 춤, 하보경 명인
경상도 지방에 전해 오는 민요 중 가장 유명한 민요는 <밀양 아리랑>일 것입니다.

날좀 보소 날좀 보소 날조곰 보소
동지섣달 꽃본 듯이 날좀 보소
아리랑 닥궁 스리랑 닥궁
아리리가 났네
아리랑 어절시구 잘 넘어간다

담 넘어 갈 때는 큰 맘을 먹고
문고리 잡고서 발발 떤다
아리랑 닥궁 스리랑 닥궁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어절시구 잘 넘어간다

 

이 <밀양 아리랑>은 전라도 지방에 전해 오는 <진도 아리랑>과 강원도 지방에 전해 오는 <강원도 아리랑>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아리랑으로 꼽힙니다.

그런데 다른 지방의 아리랑에 견주어 <밀양 아리랑>은 특히 가락이 흥겹고 장단도 빠르며 경쾌합니다. 각 지방의 민요가 그 고장의 풍토나 인심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때 <밀양 아리랑>이 이렇듯 흥겹고 경쾌한 것은 밀양 지방의 땅이 풍족하고 인심이 넉넉한 데서 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동국여지승람>의 <밀양도호부>편에 보면 밀양이 “긴 내를 굽어 당기고 넓은 들을 팽팽히 얼싸안고 있어,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것을 숭상하게 되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실제로 밀양군은 오늘날에도 경상남도 안에서 가장 농업이 성한 곳으로 꼽힐 뿐만 아니라, 갖가지 민속놀이가 다양하게 전해 내려오는 곳이기도 합니다.

<밀양 백중놀이>나 <밀양 새터 가을굿>이나 <감내의 줄당기기>나 <용호놀이> 같은 놀이들이 새롭게 발굴되어 소개되었고, 그 중에서도 <백중놀이>는 밀양의 이름을 나라 안에 널리 떨치게 만들어서 밀양하면 백중놀이를 연상할 만큼 유명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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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4.08.07 07:59

    첫댓글 역시 멋진 우리의 문화입니다.
    밀양 백중놀이 ~ 직접 본적은 없지만 아주 좋을듯 합니다.

  • 작성자 14.08.08 01:52

    ㅋ ~~~
    부끄럽지만 저도 범부춤을 추면서 출연한게 있으니 찾아 보셔요...^^*

  • 14.08.11 12:00

    회장님
    소개 고맙습니다.^^

  • 작성자 14.08.12 01:41

    네 ~~
    만강님 !!
    항상 관심 가져 주셔서 감사 합니다...^^*

  • 15.01.15 19:54

    신나는 북장단에 어깨 절로 얼쑤~~~고맙습니다 귀한 자료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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