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지방 특유의 전통적인 마을 모습을 고스란히 지키고 있는 섬이 있다. 초가집, 돌로 쌓아올린 벽체와 담장, 짚으로 만든 무덤 초분. 도초도 마을에는 이런 모습들이 그대로 살아 있다.
짭짜름한 바다 내음을 맡으며 목포항에서 출발하는 도초도행 페리호에 오른다. 하루 세 번 도초도까지 운항하는 페리호는 버스로 치자면 완행버스와 같아서 안좌도와 비금도를 거쳐 도초도에 닿는데, 약 2시간 40분이 걸린다. 2시간이 넘는 뱃길 여행은 자칫 지루해지기 십상이지만 도초도행 뱃길은 주변이 온통 섬 천지여서 마냥 망망대해를 보며 가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편이다. 해풍에 머리칼을 쓸어 넘기는 섬자락의 해송들. 선상에 나앉아 눈앞을 스치는 섬들의 실루엣을 바라보는 것도 훌륭한 관광이 된다. 이윽고 뱃머리가 도초도 불섬항에 닿았다. 지형이 고슴도치처럼 생겼다 하여 도초도라고 불리는 섬. 이 곳은 남쪽으로는 하의도, 북쪽으로는 비금도와 이웃해 있고, 멀리 서쪽으로는 흑산도와 홍도가 위치해 있다. 과거 도초도는 하의도, 암태도와 더불어 소작쟁의로 항일투쟁에 앞장선 역사적인 장소로도 손꼽혔다. 도초도가 소작쟁의의 전면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신안군에서 가장 넓은 고란평야가 있어 예부터 농사를 주업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초도가 넓은 들을 가졌다고는 하나 이웃해 있는 비금도에 비해 훨씬 가난했다. ‘돈이 날아 다닌다’는 뜻을 지닌 비금도는 국내 최초로 천일염전이 들어서면서 순식간에 부자 섬으로 탈바꿈했지만 도초도는 뒤늦게 비금도의 소금 제조방법을 전수받으면서 가난의 굴레를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했다. 흔히 빈곤을 벗어나면 옛 모습을 간직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나 도초도는 도서지방 특유의 전통적인 마을 모습을 여전히 지켜오고 있다. 곳곳에 초가집이 남아 있는 것도 그렇고 돌로 쌓아올린 벽체와 담장, 각종 세간들, 곳곳에 전하는 초분도 옛 모습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도초도에서도 이런 민속적인 유물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곳은 고란리와 외남리라 할 수 있다. 특히 고란리는 섬에서 가장 안쪽에 자리한 마을로 초가와 초분, 돌장승을 모두 만나볼 수 있는 곳이다. 고란이라는 이름은 ‘골짜기 안쪽에 자리한 마을’이라는 데서 비롯됐다는 설도 있고, 옛날에 이 곳에 난초가 많이 피었다고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는데, 주로 장흥 고씨가 모여 사는 집성촌으로 알려져 있다. 고란리 마을 들머리에는 돌장승이 수호신처럼 버티고 있다. 돌장승은 본래 당집의 기운을 죽이기 위해 1938년에 세웠는데, 높이가 3m에 이른다. 옛날 고란리에서는 매년 정월 대보름날 마을 앞 팽나무 옆에 있는 당집에서 마을의 액을 물리치기 위해 제를 지냈다. 이 때 제주는 3일 전부터 당집에 금줄을 치고 부정한 사람들의 접근을 막았다. “옛날에넌 저그 팽나무가 수십 그루 섰는디, 나무를 싹 비고 지금 있는 저 팽나무를 빌라니까 막 피가 나. 지금 장성이 팽나무 보고 안있습디야. 장성 세우기 전에는 저 장성 있는 데서 팽나무를 보고 오줌을 누면 여자고 남자고 그것이 퉁퉁 붓고 그랬지라. 그래 거기 장성을 세우니까 괜찮습디다요.” 고란리에 사는 고순동 할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다. 고순동 할아버지는 일제시대 때 수풍댐까지 노무자로 끌려간 적이 있다. 해방이 되고 3개월 동안 걸어서 목포까지 와서 배를 타고 고향에 돌아왔다고 한다. 초분에 대해 물어 보자 할아버지는 아예 따라 오라며 초분이 있는 곳까지 안내를 했다. 5년 전만 해도 고란리에는 젖터골에 3기, 큰 잔둥이에 2기의 초분이 남아 있었고, 2년 전에도 큰 잔둥이에 2기의 초분이 남아 있었지만, 이제는 큰 잔둥이에 한 기의 초분밖에 남지 않았다. 초분이란 것이 본래 가묘이므로 사라지고 새로 생겨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초분은 주검을 묘지에 묻기 전에 목관(목관조차 할 수 없는 경우 도초도에서는 대나무로 이엉을 엮은 대발쌈을 이용했다)에 넣어 일정한 장소에 안치한 뒤, 짚으로 이엉을 덮어 비바람을 가린 무덤을 일컫는다. 이렇게 해서 주검이 다 썩은 후에는 뼈만 추려 다시 묘지에 이장하게 된다. 하지만 선산을 가지지 못했거나 이장할 비용을 마련하지 못한 경우에는 10~20년 동안 내내 초분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보통 초분을 하면 1년 정도가 지나야 완전히 주검이 썩는다고 한다. 주검이 완전히 썩은 뒤라야 파묘를 하게 되는데, 대개 2~3년 정도 초분에 모신 뒤 이장을 하는 것이 상례였다. 어떤 이는 초분이 비위생적인 매장 형태라고 비난하기도 하지만, 신안군을 비롯한 도서지역에서는 초분을 하는 것이 조상에 대한 가장 극진한 효도였으며 예의였다. 부모나 친지가 돌아가셨다고 곧바로 주검을 땅속에 파묻어 버리는 것은 후손의 도리가 아니라고 여겼다. “높으신 분이 선산에 계시니 어뜨케 날송장을 거기다 모시겄소. 살과 물이 다 빠진 뼈로 깨끗하게 모셔야제. 그렇게 모시는 게 여그 예의고 전통이요.” 고란리에 사는 황한윤 씨의 이야기다. 섬에서는 곧바로 날송장을 땅에 파묻는 것을 매정하고 야박한 장례라 하여 ‘박장’이라 불렀다. 황씨는 대대로 조상들을 초분에 모셨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초분에 들고 싶지 않다고 한다. 이유인즉, 다시 이장을 해야 하니 자식들이 너무 번거롭고 돈도 이중으로 들 것이기 때문이란다. “뭣할라고 자식들 여기까지 와서 풀 뜯게 하고, 귀찮게 만들어요. 시상에 죽어서 뭣을 할 것이요. 깨끗한 뼈로 선산에 못가도 그냥 펜한 곳에 가면 되는 거지.”
고란리에서는 초가도 여러 채 볼 수 있다. 그러나 살림채는 대부분 사라지고 헛간채와 뒷간 등의 부속채만 남아 있다. 살림채를 유지해 오는 경우도 마을의 고꽃님 할머니 댁처럼 이제는 천막을 씌워 비가림을 해놓았다. 마을에 노인들만 있다보니 새로 마름을 엮을 만한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자식들은 모두 대처에 나가 있고, 새로 이엉을 올릴 때마다 자식들이 올 수도 없는 처지여서 아예 초가지붕에 천막을 씌워버린 것이다. 도초도에 있는 대부분의 초가는 구조가 엇비슷하다. 세 칸 내지 네 칸 집에 툇마루는 큰방에 달려 있고, 한결같이 마당을 건너 재막 화장실을 두고 있다. 지붕에는 다른 섬 지방의 초가와 마찬가지로 마름모로 줄을 매어 ‘마람’(마름의 사투리로 이엉을 엮어 놓은 것)이 날아가지 않도록 보듬고 있다. 간혹 헛간채를 따로 두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 잿간 하나로 헛간과 화장실을 겸하고 있다. 고란리 이연옥 노인 댁에서는 건물에 들이치는 비바람과 눈보라를 막는 노릇을 했던 ‘뜸’이라는 보기 드문 것을 볼 수 있다. 이 뜸은 띠풀이나 억새, 짚, 부들 따위를 거적처럼 엮어서 만드는데, 바람이 심한 바닷가 마을에 많았다. 과거 경기도에서는 ‘떼날래’라 하여 건물에 빙 둘러 짚이엉을 씌워 눈·비를 막았고, 제주도에서는 띠풀을 엮어 만든 뜸으로 눈·비를 막았다. 고란리에서 볼 수 있는 뜸은 마을에서 ‘풍채’라 불리며, 띠풀과 산죽을 섞어 엮은 것이다. 본래 풍채는 억새나 띠풀로 엮은 거적을 추녀 끝에 차양처럼 떠받들어 놓은 것을 일컫는데, 그 쓰임은 뜸과 별다를 게 없다. 외남리에 있는 초가도 사정은 고란리와 비슷해서 천막을 씌웠거나 아예 폐가로 방치돼 있다. 외남리에도 마을이 보이는 언덕에 초분이 한 기 남아 있다. 외남상리 초분에 어머니를 모셨다는 김영복 씨는 옛날부터 초분을 모시는 까닭에 대해 이런 견해를 밝혔다. “옛날에는 사람이 죽어도 사망진단을 내릴 수가 없었지라. 혹시 살아날지도 모르는 거고. 그래서 삼년상 치르고 옮기는 게 상례였소.” 물론 다른 견해를 밝히는 사람도 있다. 섬 지방에서는 대부분의 남자들이 고기잡이를 떠나게 되는데, 출어 중에 갑자기 상을 당하는 경우 상주가 없는 관계로 초분을 씌웠다는 것이다. 즉 출어를 나갔던 자식이 돌아와 부모의 주검을 볼 기회를 주기 위한 것이었던 셈이다. 외남리는 지남리 바깥에 있어 외남이라 불렸으며, 고개를 사이에 두고 상리와 하리로 나눠진다. 현재 돌장승을 한 기 볼 수 있는데, 높이는 2m가 넘고 머리에 커다란 갓을 쓰고 있는 모양이다. 하단에 적힌 연도가 일부 지워져 세워진 때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940년대 쯤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옛날 마을 앞 발매리에 있는 진가바위 때문에 운세가 꺾여 마을이 흥하지 못할 것이라는 어느 도인의 말을 듣고 세웠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장승은 정확히 발매리 진가바위를 지켜보고 서 있다.
도초도 가는 길 ●도초도에 가려면 우선 서해안 고속도로를 이용해 목포까지 간다. 목포항(061-243-1082)에서 07:50, 13:20, 14:20분에 운항하는 쾌속선(50분, 1만4,500원)이 있으며, 07:20, 13:20, 15:00시에 운항하는 차도선(2시간 30분, 6,200원)도 있다. 북항에서 출발하는 비금농협(061-244-5251) 카페리 차도선도 1일 3회 운항(2시간 40분)하며, 요금은 농협배가 훨씬 저렴하다. 선착장 주변엔 잘 곳도 있다. 장안장(061-275-2020), 수도장(275-2175), 신흥장(275-2143). 성수기에는 배편이 늘어날 수 있으므로 문의가 필요하다. 차를 가지고 갈 경우 비금도에 내려서 갈 수도 있다. 문의: 신안군 061-240-1246, 1254.
첫댓글 곧 제비가 날아 오겠지???
제비는 지금 이시간 지하에서 발빠닥에 땀나도록 비벼데고 있을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