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장 70권 째 연재되고 있는 <더 파이팅(THEFIGHTING)>(모리카와 조지 작, 학산문화사)은지극히 단순한 만화다. 줄거리도 간단하다. 왕따였던‘일보’라는 고교생이‘마모루’라는 복서로인해 복싱에 입문, 일본 페더급 챔피언이 된다는 이야기다. 만화를 많이 본 분들 입장에서는 이야기의 분량 상 이미 세계 챔프는 물론 몇 체급 정도는 석권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아심을 가질 만 하다. 그도 그럴 것이 대부분 스포츠 만화가 20∼30권 분량 단위에서 결말을 맺기 때문이다. 야구면 메이저리거가 된다든지 갑자원에서 우승을 해야 하고 수영이나 육상이면 기록을 단축시키든지 올림픽급의 대회에서 우승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존하는 스포츠 만화 중 가장 긴 연재작인 <더 파이팅>의 주인공 일보는 몇 십 권 째 계속 일본 챔피온에 머물러 있다. 그렇다고 이야기의 흐름상 일보가 세계 도전을 하지 않고 끝날것 같지는 않다. 모든 이야기는 정점을 향해 가기 마련이지 않는가. 이렇듯 언뜻 보기에 지루함을 넘어 지겨울 것 같기까지 한 <더 파이팅>의 가장 큰 매력은 오히려 전혀 지루하지 않다는 데 있다. 한번 잡으면 70권을 단숨에 읽게 된다. 다음 편을 기다리다 지쳐, 봤던 것을 또 보는 독자들도 부지기수다. 그만큼 재미로 똘똘 뭉친 작품이다. 이야기의 줄거리가 그렇듯 주인공 일보의 성격도 흔하디 흔한 외유내강형이다. 실생활에서는 왕따가 될 만큼 온순하고 홀어머니를 모시는 효자이지만 가슴 속에서는‘강해지고 싶다’는 일념뿐이다. 단지 이 작품은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데 있어 주인공이 차지하는 비중이 현저히 떨어진다. 대신 그의 주변 인물인‘마모루’, ‘일랑’, ‘청목’, ‘기무라’등의 이야기가 상당히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마모루는 동양인으로서는 특이한 중량급 복서. 세계 미들급을 석권하고 헤비급에 도전 중이다. 실력, 성격 등에서 언젠가 언급했던 일본 격투만화의 일인자‘고바야시 마코토’의 <다 덤벼>주인공, ‘삼사랑’과 필적할 인물이다. 한마디로 세상이 자기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식 인물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실력이 있기 때문에 존재감이 확실한 인물. ‘일랑’은 주인공 일보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인물이다. 그렇지만 적은 아니다. 일보가 소위 김태식(1980년 세계 플라이급 챔피온이 된 국내의 대표적인 인파이터 복서) 류의 파이터라면 일랑은 같은 체급의 레너드(아웃복서의 신, 혹은 아웃복서의 현존하는 교과서)라고 할수 있다. 둘의 재대결 중 승자가 아마도 세계 제패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특히 중요한 인물‘기무라’와‘청목’이있다. 이들이 있기에 <더 파이팅>이 다른 작품과 차별성을 갖는다. 물론 웬만한 다른 작품에서도 오직 웃기기 위해 등장하는 인물들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 작품의 양념, 청목과 기무라는 결코 양념이 되길 거부하는 인물들이다. 자라온 환경이 불우하기는 일보나 마모루와 다를 바 없으나 안타깝게도 이들에겐 재능마저도 없다. 동급생인 그들이 복서로서 살아온 것은 어언 5년여가 훌쩍 지나갔지만 국내 랭킹에 간신히 들었을 뿐, 국내 챔피언 자리에도 오르질 못했다. 그러나 타고난 긍정적인 사고 방식과 서로를 아끼는 우정이 이들을 지탱해준다. 작가‘모리카와 조지’도 이들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듯 하다. 보통의 작품들이라면 양념 같은 인물들의 경기가 등장하기도 힘들지만 이 작품에선 이들의 파이팅이 결코 가볍게 다뤄지지 않고 있다. 별볼일 없는 복서라도 나름대로의 스타일이 있다는 것을 강변하고 더불어 해박한 복싱 지식과 복서들의 근육 움직임이 놀랍도록 세밀하게 그려진다. 특히 기무라가 같은 체급의 국내 챔피온에 도전, ‘마시바’와 타이틀전을 벌이는 장면은 무척 인상적이다. 실력은 2류나 3류이지만 의지만은 1류인 기무라의 끈기와 도전정신은 사실 이 작품이 독자들에게 던져주고 싶은 화두의 핵심이다. 스포츠 만화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다. 그리고 성공을 위해 주변생활을 잊고 앞으로만 향해 간다. 또한 패배도 모른다. 하지만 <더 파이팅>의‘일보’를 비롯한 인물들은 모두 성공을 바라지만 오히려 패배를 알고 두려워한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에 대한 경외심이 깊고 수긍하고 긍정할 줄 안다. 아무리 세상이 날 외면하는 것 같아도 마모루같이 강한 사람이면 어떻게든 잘 살 것이다. 일보처럼 오직 성실로 승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실력이 안되면 변칙을 써서라도 삶이라는 사각의 링에서 살아남고자 하는 사람에게 누가 돌을 던지겠는가? 그것도 그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잘 알아야만 가능한 방법이기에 더더욱 무시할 수 없다. | |
김희재 | 자유기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