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선물 시대따라 어떻게 달라졌나
80년대 정육 ㆍ 90년대 양주 ㆍ 2000년대 올리브유
옛날에는 어떤 명절 선물이 오갔을까. 어떤 선물이 인기 있었을까. 달걀에서 1500만원짜리 와인까지 추석 선물은 시대에 따라 큰 변화를 거쳤다. 추석 선물에도 트렌드가 있다. 백화점 바이어들은 추석 선물은 시대 흐름을 가늠하는 또 다른 증거라고 말한다. 올해 신세계백화점은 프리미엄 생수와 소금이 매년 각각 40%, 30% 이상 매출이 급증하는 세태를 반영해 피지 생수와 프렌치 소금 선물세트를 내놓았다. 김은구 신세계백화점 바이어는 "최근 차별화되고 기억에 오래 남는 선물을 하려는 수요가 늘어나면서 생수와 소금 세트를 명절 선물로 최초로 기획했다"며 "본점과 강남점을 중심으로 20ㆍ30대 젊은 층이 하는 이색 선물로 인기를 끌고 있다"고 말했다. 피지 생수 선물세트는 23만원(3개월분)으로 만만치 않은 가격이지만 본점과 강남점에서 50세트, 프렌치 소금 세트는 본점과 강남점에서 40세트 이상 팔렸다.
또 2003년부터 불기 시작한 웰빙 열풍으로 건강 관련 상품이 늘어났다. 친환경 청과, 유기농 가공식품 등의 수요가 많아졌고 올리브오일, 포도씨기름 등도 인기를 끌고 있다. 와인과 올리브유는 최근 몇 년 사이 가장 강력한 추석 선물 트렌드 아이템으로 꼽힌다. 와인은 2000년, 올리브유는 2003년 추석 카탈로그에 등장해 가장 높은 성장률을 보이고 있다. 와인은 웰빙 바람을 타고 2004년부터 양주와 전통주를 제치고 주류 부문에서 명절 선물세트 판매 1위에 등극했다. 올리브유는 처음에는 주로 식용유, 참기름 등에 끼워 팔았지만 역시 2004년부터 주요 선물세트로 자리잡았다. 잠시 반짝한 뒤 사라진 아이템도 있다. 2005년 만두 선물세트가 등장해 인기를 끌었지만 배송, 신선도 등 문제로 곧 판매 중단됐다. 2000년대 들어서는 이처럼 백화점을 중심으로 한 고가 제품과 할인점을 중심으로 한 실용적인 중저가 세트로 선물군이 확연히 나뉜다. 올 추석에는 1500만원짜리 와인세트가 등장했는가 하면 할인점에서는 2900원짜리 양말 선물세트가 선보여 큰 대조를 보였다.
2000년대 이전에는 어떤 선물세트가 주목을 받았을까. 90년대에는 선물이 고가품과 실용적 중저가 상품으로 양극화하는 시기다. 정육 갈비 및 과일류, 수삼, 인삼, 민속주 등 건강 관련 상품도 늘어났다. 또 신변 잡화류 및 취미생활 관련 상품, 양송이, 더덕 등 토속 식품도 강세를 보였다. 90년대 중반에는 필요한 물건을 직접 고를 수 있는 상품권이 등장했다. 받는 사람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는 장점이 부각되면서 상품권이 선물로 각광을 받은 것이다. 거품경기가 한창이던 90년대 후반에는 양주가 대세였다. 중요한 사람에게 고급 선물을 하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당시 최고급 선물로 인정받던 수입 고급 양주가 인기를 끌었다. 고가 상품이 부유층의 지갑을 노렸다. 130만원대 레미마틴 루이14세 양주와 100만원대 영광굴비 등이 등장했다. 90년대 후반 외환위기를 겪은 뒤에는 저가 상품이 속속 나타났다. 할인점이 급성장하면서 2만원대 실속형 선물세트도 인기를 모았다.
본격적인 선물문화가 자리잡은 것은 80년대다. 선물 품목도 고급화ㆍ다변화되기 시작했고 선물이 패키지화되기 시작했다. 10만원대 고가 선물도 소개됐다. 70년대 1000종 정도였던 상품 가짓수도 3000여 종으로 크게 늘어났다. 선물의 고급화에 따라 넥타이와 스카프, 정육 세트와 과일 등 고급 식료품이 본격적으로 선물세트로 등장했다. 상품의 대량 생산이 가능해지면서 참치, 통조림 등 규격식품도 새로운 선물 장르로 급부상했다. 인삼, 꿀, 영지버섯 등 건강식품도 등장했다.
산업화가 시작된 70년대 들어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생필품 경공업 제품이 속속 출현하면서 식용유와 치약, 과자가 대량 생산됐고 선물 패턴도 바뀌었다. 밤늦게 찾아오는 손님이 과자 선물세트를 두고 가면 잠자던 아이들이 눈을 비비며 일어나 선물세트 앞에 둘러앉고 이웃들과 나누어 먹기도 했던 추억이 오롯이 배어있는 선물인 것이다. 이 때에는 커피, 콜라 등 기호품이 선물로 많은 주목을 받았고 특히 커피는 설탕과 조미료 세트에 이어 추석 매출로 3위에 오르기도 했다. 드라마 '여로'가 히트치면서 흑백 TV가 선물로 등장한 것도 눈길을 끈다. 합성수지 그릇, 라디오 등이 선물세트로 등장하는가 하면 화장품, 여성 속옷, 과자, 학용품, 양산 등도 인기를 끌었다. 다이알 세수비누, 하이크림 디 비누, 반달표 스타킹, 송월타월, 맥스웰 커피세트, 금성 BF1006 라디오 등이 이 시기 대표적 선물이었다.
60년대는 추석 선물 상품이라는 개념이 처음 등장한 시기다. 여전히 먹고 사는 문제가 가장 큰 관심사였고, 규격화된 상품이 귀했던 시절이기에 밀가루, 설탕, 쌀, 라면, 계란, 토종닭 등의 식품류가 선물의 주종을 이뤘다. 지금에야 지천에 널려 있지만 당시에는 고급 선물로 여겨졌던 상품으로, 시대 변화를 실감케 한다. 60년대 들어 설탕과 미원이 나오기 시작했고 설탕, 조미료, 세탁비누 등이 고급 선물로 여겨졌다. 특히 설탕은 최고의 선물이었는데 설탕이 선물로 들어오면 온 가족이 즐거워했다고 한다. 요리에 꼭 필요하기도 했지만 특별한 간식거리가 없던 시절, 궁금한 입을 달래줄 달고나 같은 것을 해먹을 때도 필수품이었던 까닭이다. 6㎏에 780원, 30㎏에 3900원에 판매되던 '그래뉴설탕' 은 상류층만 주고받을 수 있었던 고가품이었다. 미풍, 통조림 등도 고급 선물이었고 세탁비누와 라면, 맥주 등도 받고 싶은 선물로 꼽혔다. 이 시기는 백화점들도 명절 선물 광고를 내보내고 카탈로그를 제작하는 등 본격적인 선물 판촉을 시작한 때이기도 하다.
6.25 전쟁이 끝난 50년대에는 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았던 때이기에 먹고 살기에도 바빴던지라 특별히 선물이라 할 만한 것이 없었다. 가까운 친척이나 윗사람들에게 달걀, 찹쌀, 고추, 돼지고기, 닭 등 직접 생산한 농ㆍ축산물을 전해주는 정도가 전부였다. 밀가루와 계란 꾸러미도 추석선물로 인기였는데 이 역시 당장 먹고 사는 것이 급했기 때문이다. 요즘은 천만원이 넘는 고가의 명품선물들이 쏟아져나오면서 선물시장에도 양극화 현상이 심하다. 그렇지만 소중한 정성을 모아 보내던 예전의 선물만큼 정감이 있을까? 시대에 따라 선물은 바뀌었지만 그 속에 담긴 정만큼은 변하지 않았으리라 믿어본다. 선물의 가격과 내용보다는 소중한 사람들 사이에 서로의 마음과 고마움 그리고 정을 나누는 것이 선물을 주고 받는 본래의 의미임을 다시금 되새겨야 할 것이다.
<그림 1.> 추석 선물 변천사
<그림 2.> 1960∼70년대 대표적인 명절선물이었던 설탕세트. 대한민국 정부 기록사진집
<그림 3.> 1950년대 인기 선물이었던 짚으로 엮은 계란꾸러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