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오신 하나님: 그의 족보(마 1: 1-17)
족보의 중요성
저의 청소년 시절 친한 친구로부터 늘 주눅이 들던 한 가지 핸디캡. 공부도 낫고, 생긴 것도 나은데(?) 한가지만은 꼬리를 내려야 했습니다. 그의 집에 놀러 가면 장롱 속에 있던 족보를 꺼내 침이 마르도록 자랑했습니다. “잘 봐. 이분이 우리 증조 할아버지 성함이시다. 김좌진 장군. 너, 청산리 전투 알지. 그 전투를 승리로 이끈 분이 우리 조상 아니냐! 이분들은 이조 시대 때 정승들의 성함이고. 우리 집은 안동 김씨 가문이야. 너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저의 집은 족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급한 김에 “우리 황씨는 ‘황희’ 정승 집안이다.”라고 둘러댔습니다. 나중에 알아본 결과 황희 정승은 저의 평해 황씨의 조상이 아니었습니다. 저의 가문에는 눈 씻고 봐도 유명인이 없습니다. 그저 ‘평이한 황씨’인 모양입니다. 족보에 의하면 저는 별 볼일 없는 평범한 가문의 후손입니다.
족보는 한 사람의 내력을 설명하고, 그 가문의 선조의 기원과 역사를 밝혀줍니다. 조상부터 내려온 땅과 지위에 권리를 입증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족보는 가계(家系)를 밝혀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선민의 일원으로서의 위치를 증거해 주는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위대한 랍비 힐렐(Hillel)은 자신의 족보가 다윗 까지 올라간다는 사실을 아주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자서전에서 자신의 혈통을 제일 먼저 소개했습니다. 산헤드린은 족보를 공식 기록으로 보관했습니다.
예수님의 세계(世系)
신약의 첫 부분은 예수님의 긴 족보로 시작합니다. 이 족보는 아브라함에서 시작해서 예수님으로 끝납니다. 등장인물의 수가 총 46명, 대수(代數)로 42대입니다.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14대, 다윗부터 포로기까지 14대, 포로에서 예수님까지 14대입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이 성취하신 구원의 일대기를 기록한 책입니다. 마태복음 첫 장은 신약의 서두일 뿐만 아니라 신구약의 징금다리 역할을 하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그런데 왜 마태는 신학자들까지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포함된 족보로 시작할까요? 예수님이 주인공인 그분의 족보에 말입니다. 족보를 통해 마태는 예수님의 무엇에 대해 말하고자 했을까요?
1. 예수님은 역사적인 참 인간이십니다.
여기 족보의 등장인물들은 역사적 실존 인물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의 믿음의 조상이고 다윗은 이스라엘의 중흥을 이뤘던 왕입니다. 여자들도 실제 생존인물이었습니다. 족보에는 기원전 2,000년부터 예수님이 탄생하신 A. D. 1세기 전까지 살았던 인물이 망라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땅에 정말로 살았습니다. 이들의 후손으로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참 인간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실존인물
예수님은 가공의 인물이 아닙니다. 싸이보그가 아닙니다. 단순한 이념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땅에 몸을 부비고 살았던 사람들의 후손입니다. 족보의 인물들이 살과 뼈가 있는 참 인간이었던 것처럼 예수님은 참 인간이셨습니다. 마리아의 자궁을 통해 출생하셨으며, 키와 지혜가 자라는 유년시절이 있었습니다. 성년이 되어서는 우시고, 기뻐하시고, 주리시며, 졸리고, 피곤해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 같은 참 인간이셨습니다.
성육신
요한복음이 말씀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 14).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분으로 이 땅에 오셨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이것을 성육신이라고 합니다. 영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참 믿음
왜 이 사실이 중요합니까? 우리 신앙의 진정성을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허구의, 날조된 대상을 믿지 않고 실존했던 역사적 인물인 예수님을 믿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관념이나 감정에 기초하지 않고 역사에 뿌리박고 있습니다. 단군 신화같이 실재하지 않은 인물을 믿으라고 하면 그 믿음은 옳지 않고 오래가지 못합니다. 기독교는 이스라엘의 유구한 역사적 뿌리 속에서 이스라엘의 혈통을 갖고 태어나신 예수님을 믿는 사실적인 종교입니다.
체휼
또 이 사실이 왜 중요합니까? 예수님이 참 인간이어야만 우리의 사정을 듣고 도와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려움에 빠졌을 때 누가 헤아려 줍니까? 애완용 동물? 바비 인형? 인터넷의 아바타? 가상현실은 소외감만을 가져올 뿐입니다. 예수님은 참 인간으로서 인생의 모든 고난을 실제로 경험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정을 잘 아시고 능히 도와주실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가 약속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2).
말시온
초대 교회 시절에 말시온(Marcion)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영적 세계만 인정하고 물질(육신)을 더럽다고 배격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사실을 부인했습니다. 그러면 제자들 눈에 보인 예수님은 뭐란 말입니까? 그는 제자들이 헛것을 보았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을 가현설이라고 합니다. 명백한 이단입니다. 예수님은 육체로 이 땅에 오셨으며 부활 때에도 살과 뼈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인간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분을 친구로 부르거나,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라고 찬양할 수 없을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약속된 메시야이십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직계 후손’입니다. 본문의 족보는 ‘다윗’을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의 이름이 가장 많이 등장합니다. 세 시대를 구분하면서 각 시대의 대수(代數)를 14로 의도적으로 수정한 것도 다윗을 연상시킵니다. 왜냐하면 ‘다윗’의 히브리어 철자의 숫자를 합하면(4+6+4) 14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전 역사는 다윗과 그 왕조를 중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즉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다윗부터 포로되기 전까지, 포로기에서 예수님까지의 역사가 곧 이스라엘 역사입니다. 이렇게 세 시대로 구분한 기준도 다윗(왕국)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아브라함을 통해 시작됐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은 다윗을 통해 성취됐습니다. 다윗을 통해 이스라엘 왕국이 형성됐고 다윗 자손이 끊어짐으로 말미암아 왕국은 멸망했습니다.
왜 마태는 예수님의 족보를 이스라엘 역사와 다윗 왕조와 연관시켰을까요? 예수님이 이스라엘 역사와 다윗 왕조의 이상을 완전히 성취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언약
다윗은 이스라엘 왕조의 가장 이상적인 군주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왕조)은 실패했습니다. 다윗도 간음죄를 지은 한계성이 있었고, 그의 왕국이 분열되어 망했기 때문입니다.
역사와 왕조에서 실패를 경험한 이스라엘은 다윗 같은, 아니 다윗보다 더 완전한 왕이 와서 이스라엘에 참 번영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고대했습니다. 이것이 메시야 사상입니다. 하나님은 이상적인 왕(메시야)을 보내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다윗언약’을 통해서 말입니다.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삼하 7:16).
약속된 메시야
‘다윗 언약’은 궁극적으로 메시야의 출현과 메시야 왕국을 예언한 것입니다. 그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 안에서 새 이스라엘의 운명이 회복되고 ‘다윗 언약’이 성취됐습니다. 그래서 아모스는 예수님을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는 분’(암 9:11)이라고 했습니다. 다윗의 직계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좌절된 꿈을 성취시킨 다윗보다 큰 다윗입니다.
평강의 왕
이사야는 왕으로 오실 예수님을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께에는 정사를 매었고 ...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사 9:6-7).
새 다윗, 새 나라
예수님은 새 이스라엘의 왕(목자)이 되시고 새 나라(하나님 나라)를 세우셨습니다. 세상 군주와는 달리 겸손하게 오셨고, 칼이 아닌 사랑으로 천국을 세우십니다. 메시야의 나라 백성들은 그리스도가 왕이시라는 사실과 십자가를 믿는 사람으로 채워집니다.
예수 우리 왕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예수님의 왕되심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사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왕이 되어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로마 황제가 아니라 예수님을 왕으로 경배하다가 고난당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는 일은 그분이 나의 왕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왕 되신 예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분의 통치에 순종하는 길입니다. 우리에게는 왕의 왕이신 주님이 계시며, 그분은 천지를 주관하실 뿐만 아니라 나 개인의 삶도 친히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영적 미아가 아니라 왕 되신 주님을 경배하고 그 나라를 이 땅에서 확장하고 완성될 하늘 왕국을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3. 예수님은 만인의 구주입니다.
족보에 나오는 다섯 명을 눈 여겨 보십시오. 다말, 라합, 룻, 우리야의 아내(밧세바), 마리아.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여자
첫째. 여성입니다. 헬라와 유대 문화에서 여성은 법적 권리가 없습니다. 재산을 상속할 수 없습니다. 증언할 권리가 없었습니다. 남편의 권한 아래 있었습니다. 사람이라기보다 물건으로 취급받았습니다. 유대 남자는 자신이 여자로 태어나지 않는 것을 날마다 감사했습니다. 이런 여인들이 예수님의 족보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이방인
둘째, 이방인입니다. 다말은 가나안 출신입니다(창 38:11). 라합은 여리고 사람입니다(수 2, 6장). 룻은 모압 출신입니다(룻 4:1). 우리야의 헷 남자를 남편으로 둔 여자였습니다(삼하 11-12장).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지옥의 땔감 정도로 여겼습니다. 개라고 불렀습니다. 모압인들은 여호와의 회중에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이 예수님의 족보에 등장합니다.
부정한 자
셋째, 부정한 자입니다. 다말은 시아버지와 근친상간 했습니다(창 38장). 라합(5절)은 이교 지역인 여리고의 창기였습니다(수 2:1-7). 밧세바(6절)는 다윗과 간음했습니다(삼하 11-12장). X 파일에나 나올 법한 인물아닙니까? 더 놀라운 사람은 마리아입니다(16절). 그녀는 결혼도 하기 전에 아기를 가졌습니다.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여자, 이방인, 부정한 자. 왜 마태는 거룩한 예수님의 족보에 함량미달의 사람을 올렸을까요? 죄인들의 리스트를 빼면 족보가 더 빛나지 않겠습니까? 마태는 족보를 통해서 단순한 역사적 기록 이상의 의미를 전달하려고 했습니다. 즉 예수님을 통해 기존의 차별과 고정관념이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마태는 예수 안에서 남녀의 장벽이 철폐됐음을 보여 줍니다.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의 차별도 사라졌습니다. 전통적인 선인과 악인의 구별도 소용없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 10:13).
죄인의 친구
마태의 족보는 예수님이 죄인들을 위해 오셨음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 같은, 다윗 같은 믿음의 영웅들만을 위해 오시지 않았습니다. 성격 이상자, 이방인, 우상숭배자, 비정상적인 결혼생활자, 중독자, 그래서 선천적 장애나 후천적 범죄로 인해서 구원에서 제외된 것으로 여겨졌던 무자격자를 위해 오셨습니다. 성공과 실패, 선과 악, 합법과 비합법으로 일그러진 인류의 모든 역사를 끌어안고 그 역사 속에 들어오셔서 역사를 새롭게 하고 인간을 구원하신 분, 그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께서 정상적이지 못한 결혼 경력이 있는 여인들, 천대 받던 이방인들, 돌에 맞아 죽을 죄인들과 연관을 갖고 오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죄인들의 구세주이심을 알려 줍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특권층의 친구’가 아니라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고, 그분의 나라는 ‘당신들만의 천국’이 아니라 ‘만인의 천국’이 되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 9:13)고 했습니다.
죄인의 줄에 선 의인
감기에 걸려서 보건소에 갔는데 환자들이 진료를 받기 위해 길게 줄을 서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한 쪽 줄은 감기 환자, 다른 줄은 에이즈로 환자. 당신은 이 사실을 모르고 에이즈 환자 줄에 섰습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보겠습니까? 나중에 당신이 사실을 깨닫고 얼마나 당황하겠습니까? 재빨리 줄을 바꿀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의인이신 예수님은 죄로 점철된 인간의 줄(족보)을 마다하지 않고 그 속에 참여하셨습니다. 여자, 이방인, 부정한 자의 줄에 서신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죄인의 줄에 서 있던 모든 사람들의 에이즈(죄)를 자신이 친히 지시고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은 ...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사 육신에 죄를 정하사 ...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3-4).
빅 뉴스
복음이 무엇입니까? 나 같이 잘못된 과거를 가진 자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 아닙니까? 족보에서 우리는 46명의 사람을 만납니다. 그들의 생애는 2,000년에 걸쳐 있습니다. 인격, 영성, 경험이 다양합니다. 어떤 이는 아브라함, 이삭, 다윗처럼 믿음의 영웅들입니다. 어떤 이는 다말과 라합처럼 평판이 좋지 못합니다. 헤스론, 람, 나손, 아킴 같이 아주 평범한 사람도 있습니다. 므낫세, 아비야 같은 악인도 있습니다. 파렴치 범, 성범죄자, 포로, 왕, 평민, 여자, 남자, 유대인, 이방인. 예수님은 이들 모두를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주님은 모두를 사랑하고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어떤 것도 하나님의 사랑을 막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죄 씻음과 자비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새 족보를 써라
마태의 족보에는 평범한 사람, 심지어 죄인들까지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내치지 않고 자신의 아들을 세상에 오게 하기 위해 사용하셨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온갖 종류의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당신과 나 같은 사람까지도!
그러므로 배경이 어떠하건, 당신이 죄에서부터 돌이키기만 한다면! 여성이건 남성이건 하나님의 명령에 마음을 열고 매일 순종한다면! 어떤 재능을 가졌건, 목사건 목수건 상관없이 당신의 생을 하나님께 맡김으로 충성한다면! 당신도 쓰임 받을 수 있음을 믿으십시오.
스타가 아니면 어떻습니까? 나쁜 뉴스의 주인공이어도 상관없습니다. 뼈아픈 과거가 현재를 결정짓게 하지 마십시오. 역기능적인 과거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면 삶은 새로운 활력과 새로운 목적 새로운 사랑으로 다시 시작됩니다. 기도로 시작하고 말씀을 따라 사십시오. 과거를 바로잡고 극복하기 위해 하나님과 동료를 의지하십시오. 그리하면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라이프 스토리(족보)를 쓸 수 있습니다.
지금 있는 곳에서
헤롯 대왕은 유대인과 에돔인의 피가 반반씩 흐르는 혼혈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이름이 공식 족보에 올라가지 못하자 매우 분노했습니다. 그는 어느 누구도 자신보다 더 높은 혈통적 순수성을 내세우지 못하게 하려고 족보들을 파기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잘못된 족보, 즉 잘못된 과거 - 악습, 학대, 가정 문제, 성차별, 인격 결함 - 를 그냥 버려두지 않고 그 속에 들어오셔서 고치시고 새롭게 하십니다. 당신도 이제 새 족보를 가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빅 뉴스입니다. 우리는 좋은 소식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싶어 좀이 쑤셔야 합니다. 세상이 알게 하십시오. 마태처럼, 그 흥분을 나누십시오. 어디서든 하나님이 당신이 있게 하신 곳에서 선교사가 되십시오. 당신의 삶과 말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말하십시오. 참 인간이시요, 약속된 왕이시며, 죄인의 구주인 예수님이 오늘 여기에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이것이 당신과 나를 위한, 그리고 세상을 위한 복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