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몇년전부터 한국 서울 지역과 미국에 흩어져 살고 있는 우리 큰 집-작은 집 사촌형제들이 단체카톡방을 만들어 연락을 취하며 가까이 지내려 노력하고 있었으나, 벌써 착수되어 진행중에 있는 해산공파 족보수단작업은, 특히나 우리 네명의 남자 사촌 형제들이 (치원, 승원, 주원, 석원) 수시로 연락을 (더) 주고 받으며 각자들의 소식 및 삶의 정보를 나누게 적지않은 모터베이션 및 동기를 직간접적으로 부여한, 중요한 가족친목 촉진제의 한 역활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물론, 족보수단작업에 있어선 선대때부터 긴밀한 유대관계를 계속 이어 온 가까운 안동일가 해은 대원 아우님이 여러모로 많은 도움을 주고 있어서, 이 지면을 빌어 감사의 맘을 전한다.
우리 사촌들, 안동의 당숙네와 6촌 형제들, 대원 일가님 및 나의 삶을 스쳐 지나간 일가님들 모두께, 비록 태평양을 가운데 두고 멀리 떨어져 살고 있지만 맘은 가까이에 늘 있고, 걱정-염려하며 위하고 격려하는 맘으로 생각날 때마다 기도한다는 말을 잊지 않고 추가로 하고자 한다.
연안부사 이희백공은 해산공파 및 창곡공파의 할아버지가 되시는 분이신데, 조선조에 들어서 대대로 벼슬살이하며 현 서울의 인사동에 본가를 두었던 가문의 후손으로, 휘 귀지 (貴枝, 1493~1527) 중훈대부 풍저창 직장 (中訓大夫 豊儲倉 直長) 증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贈 通政大夫丞政院左承旨) 와 함종현령 (咸從縣令) 변희달 (邊希達) 의 따님 숙부인 원주변씨의 아드님이셨다. 조부는 문과를 거쳐 가선대부 사간원 대사간 (嘉善大夫 司諫院 大司諫) 에 오른 휘 윤번 (允蕃, 1460~1539) 이며 조모는 사직 (司直) 윤사연 (尹師淵) 의 따님 숙부인 파평윤씨이다.
***가계도 참조:
14세. 희백 (希伯), 1513~15??)
관직: 가선대부 연안부사 (嘉善大夫 延安府使) 증 이조참판.
배위: 사간원사간 증 영의정 야천 (冶川) 박소 (朴紹) 의 5남2 녀중 맏이며 장녀 정부인 반남박씨 (1511?-). 이조정랑 (吏曹正郞) 박조년 (朴兆年) 과 단성현감 (丹城縣監) 윤자선 (尹孜善)의 따님 파평윤씨 (坡平尹氏)의 손녀. 상주 목사 (尙州牧使)/첨지중추부사 (僉知中樞府事) 박임종 (朴林宗)과 재령군수 (載寧郡守) 증 보조공신 양천부원군 (贈 補祚功臣 陽川府院君) 허손 (許蓀)의 따님 양천허씨 (陽川許氏)의 증손녀. 부사 (府使) 박병문 (朴秉文)과 판사? (判事) 박지 (朴?) 따님 밀양박씨 (密陽朴氏)의 현손녀. 평안도/영남 감사 (監司) 박규 (朴葵)와 통훈대부 판봉상시사 (通訓大夫 判奉常寺事) 변현 (邊顯)의 따님 원주변씨의 5대손. 좌의정 평도공 (平度公) 조은 (釣隱) 박은 (朴訔) 선생 (목은선조의 생질. 가정선조의 외손자)과 태학사 (太學士) 겸 전법판서 (典法判書) 정주군 (定州君) 주언방 (周彦邦) 따님 초계주씨 (草溪周氏)의 6대손. 판전교시사 (判典校寺事) 박상충 (朴尙衷) 반남선생 (=목은선조의 매부)과 가정선조님과 함창군부인 (咸昌郡夫人) 함창김씨 (咸昌金氏)의 1남4녀중 장녀 한산이씨 (韓山李氏)의 7대손. 부사 (府使) 남양인 (南陽人) 홍사부 (洪士俯)와 판사? (判事) 한절 (韓岊)의 딸 청주한씨 (淸州韓氏)의 외손녀. 대사헌 (大司憲) 홍흥 (洪興 )과 광주이씨 (廣州李氏)의 외증손녀. ( 영의정 홍응 (洪應)은 한성부윤 홍심의 아들로 큰/작은 외증조할아버지. ) 경기도관찰사 (京畿道觀察使 )/한성부윤 (漢城府尹) 홍심 (洪深)과 경승부윤 (敬承府尹) 윤규 (尹珪; 태종의 과거급제동기)의 따님 파평윤씨의 외현소녀. 의영고사 (義盈庫使) 홍덕보 (洪德輔)와 영천이씨 (永川李氏)의 5대외손녀.***
부사공 희백 할아버지는 문집, 유고를 남긴 후손만해도 서른명이 넘는 대표적인 관료선비가문인 해산공파와 창곡공파의 조부로서, 보학적인 측면에서도 그 위치가 명실상부 확고하다고 할 수 있으니, 비단 뛰어난 학자들이 대거 배출되었을 뿐 아니라, 희백 할아버지 계열 가계도에서는 3품, 2품이상의 높은 벼슬아치 관료들 및 충신, 애국자, 효자들 또한 빠지지 않고 많이 나왔었다. (필자의 직계 선조들중에서는 휘 희백 할아버지가 마지막으로 가장 높은 벼슬을 살은 분이신데, 종2품인 가선대부 품계에 오르셨던 것이다. 희백 할아버지 후론, 필자의 직계조중에서 3품, 4품, 5품, 6품 등이 주를 이루었슴.)
희백 선조님은 반남인 야천 박소 선생의 맏사위셨다; 야천 선생은 일찌기 8살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불운하게 잃고 외가인 합천의 파평윤씨 가문 뿐 아니라 성주의 터줏대감인 외외가 벽진이씨에 기대며 어린 시절을 보낸 적이 많았었다. 사실, 외가 친척들의 주선으로 야천 선생은 한양에 적을 두었던 남양홍씨집안에 사위가 되었었다.
야천 선생의 부인 남양홍씨는 야천선생의 외외가 먼 친척이 되는 이광을 '오빠'라고 불렀을 정도로, 야천 선생내외와 벽진이씨네는 친밀하였는데, 이광의 친형되는 이환의 외손자가 바로 "영남5현"으로 추앙받는 대현 한강 정구 선생인 것이다. [관련글: http://cafe.daum.net/hansanlee.s.h/FBNd/58 ] (야천 선생의 외외가 할아버지 집안은 임진왜란때 거의 전멸하다시피 하였다 하는데, 오직 후손 한 명만이 살아남아서 계보를 이었다 함.)
야천 선생은 부인 남양홍씨와의 사이에 5남2녀를 두었으며, 7남중 제일 맏이가 따님이었고, 그 따님의 남편이 바로 부사공 희백 할아버지이였던 것임. 야천 선생과 맏사위 부사공은 그 사이가 굉장히 친밀하였으니, 나중 야천 선생이 정적들의 탄핵과 음모로 벼슬살이에서 물러나 향리에 은거할 때에, 사위 희백공이 야천 선생을 자주 찾아와 말년에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며 뒤를 돌봐줬던 것으로 기록에 보인다. 희백 할아버지 또한 장인 어른되는 야천 선생과 연좌되어 관료생활이 결코 순탄치 아니 했던 것으로 보이며, 일찌기 낙향하여 유유자적하며 서적과 시로 벗삼아 울분을 삼켰던 것으로 유추되어진다.
야천 선생은 어린 나이때부터 총명함과 뛰어난 인품으로 집안 어른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었는데, 결국 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이 장원급제는 야천 선생의 5대조되는 평도공 박은에 이어 반남박씨 문중에선 두 번째의 문과장원이었으며, 부친 이조정랑 박조년에 이어 2대째 이룬 업이었던 것. 5대조 평도공 박은은 또 누군가--바로 목은 할아버지의 생질되는 인물로, 일찌기 아버지 반남 박상충 선생을 여읜 어린 평도공을 가엾이 여긴 목은 선생이 어린나이때부터 극진히 보살피며 뒤를 봐주었던, 우리 한산이문관 아주 가까운 관계에 있던 분이다.
가정-목은과 반남 선생에서부터 시작된 이 가까운 한산이문과 반남박문과의 인척관계는 야천, 희백 선조님대에 이르러 또 다시 혼맥으로 이어졌고, 나중 당색을 같이 한 경기일원의 소론계 창곡공파 후손과 야천 선생의 후손 서계 박세당 가문들은 조선중-말엽뿐 아니라 오늘날에까지 친목계를 통하여 그 끈끈한 인연을 계속 수백년 넘게 이어오고 있다.
이희백 부사공은 부인 증 정부인 반남박씨와의 사이에 5남2녀를 두셨으니, 아드님들은 현감 대추 (大秋), 군수 대화 (大禾), 군수 대수 (大秀), 찰방 대형 (大馨), 대년 (大年) 으로, 창곡공파는 3남 군수 증 좌찬성 휘 대수 선조님의 후손들이며, 해산공파는 4남 찰방 증 사복정 휘 대형의 후손들이다.
***이희백 할아버지 이력: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a_1540_003407&category=dirSer ***
2. 야천 박소 (朴紹) 선생 총론
[1493년(성종 24)~1534년(중종 29) = 42세]. 조선 중기 중종(中宗) 때에 활동한 문신. 행직(行職)은 사간원 사간(司諫)이고, 증직(贈職)은 영의정이다. 자는 언주(彦冑), 호는 야천(冶川)이다. 본관은 반남(潘南)이고 주거지는 경상도 합천(陜川)이다. 아버지는 이조 정랑(正郞)박조년(朴兆年)이고, 어머니 파평윤씨(坡平尹氏)는 현감(縣監) 윤자선(尹孜善)의 딸이다. 조부는 상주목사(尙州牧使) 박임종(朴林宗)이다. 선조(宣祖)의 국구(國舅) 반성부원군(潘城府院君) 박응순(朴應順)의 아버지고, 선조비(宣祖妃) 의인왕후(懿仁王后)의 조부이다. 송당(松堂) 박영(朴英)의 문인이다. 조광조(趙光祖)의 사림파(士林派)로서 활동하다가, 훈구파와 척신(戚臣) 김안로(金安老)의 박해를 받고 귀향하여 여생을 마쳤다.
중종 시대의 활동
1518년(중종 13) 가을 향시(鄕試)에 1등을 차지하고, 1519년(중종 14) 봄 사마시(司馬試)에 생원(生員) 2등으로 합격하였다. 그 해에 치러진 식년 문과(文科)에서 갑과(甲科) 장원(壯元)을 하였는데, 회시(會試)에서 고강(考講)할 때 강석(講席)에 나아가서 시관(試官)의 질문에 차분하고 상세하게 응대하니, 여러 시관들이 입을 모아 칭찬하기를, “오늘 홍문관(弘文館)의 정자(正子)에 임명할 적임자를 얻었다” 하였다. 그때 사헌부 대사헌(大司憲) 조광조가 시관으로서 강석에 참석하여 말하기를, “그 인품을 보니, 남의 밑에 있을 사람이 아니다. 하필이면 정자(正字)에만 임명되리라고 기대하는가?” 하였다. 당시 과거의 대과(大科)에 을과나 병과에 합격하면, 대개 정9품의 홍문관 정자나, 예문관 검열(檢閱)에 임명되는 것이 상례(常例)였기 때문이다. 박소가 대과에 장원 급제하자, 여러 시관들이 모두 말하기를, “과연 조광조가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있다” 하였다.
중종 때 조광조가 과거의 개혁을 주장하여,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하여 문장으로 사람을 뽑는 것보다 인품으로 사람을 추천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박소는 이미 현량과에 추천된 인물 속에 들어가 있었으므로 굳이 과거의 3과(科)를 볼 필요가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향시·사마시·회시를 정식으로 치루고 대과에 갑과 1등으로 합격하였다. 그해 10월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서 조광조 등 사림파가 몰락하였는데, 『해동잡록(海東雜錄)』에 따르면 그는 현량과에 뽑혔지만 식년과(式年科)에 정규적으로 응시하여 장원 급제하였기 때문에 <기묘사화>에서 화를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1520년(중종 15) 1월 성절사(聖節使) 박영(朴英)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갔다가 돌아왔다. 1522년(중종 17) 9월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이 되고, 그해 11월 수찬(修撰)으로 승진하였다가, 사간원 정언(正言)으로 옮겼다. 1523년(중종 18) 4월 이조 좌랑(佐郞)이 되고, 1525년(중종 20) 1월 세자시강원 문학(文學)이 되었으며, 그해 7월에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었다. 1527년(중종 22) 6월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이 되고, 그해 8월 의정부 사인(舍人)이 되었다. 1528년(중종 23) 1월 다시 세자시강원 필선이 되었다가, 도로 의정부 사인이 되었다.
그는 조광조를 추종하는 신진 사류(新進士類)와 함께 조광조의 왕도정치(王道政治)를 구현하려고 노력하였다. 1529년(중종 24) 10월 평안도 어사(御史)로 파견되었고, 다음해 1530년(중종 25) 4월 사간원 사간이 되었으나, 전한(典翰)조종경(趙宗敬) 등과 함께 척신 김안로 일당을 탄핵하려다가, 사전에 일이 김안로에게 누설되면서, 도리어 성균관 사성(司成)으로 좌천되었다. 그 뒤에도 그는 여러 번 권신 김안로 일당을 탄핵하였으므로, 그들의 미움을 사서 그해 12월 파직당하였다. 그때 마침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이 밀양(密陽)에서 어명을 받고 서울로 올라와서 그 대신 사간원 사간이 되었는데, 그는 이언적에게 누를 끼칠까 염려하여 언행을 삼가고 그와 만나는 것조차 꺼리고 피하였다. 그러나 결국 이언적도 사간에서 파직되고 말았다. 당시 박소는 이미 사림파의 중심인물이 되었으므로, 남곤(南袞) 등 훈구파의 견제를 받고, 척신 김안로 일파의 시기를 받아, 중앙 정계에서 활동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므로 그는 경기도 남양(南陽)의 시골집으로 은둔하여, 사람을 만나는 것을 피하였고, 겨우 1년 만에 다시 가족을 이끌고 경상도 합천(陜川)으로 내려가, 세상과 인연을 끊고 오로지 독서에 정신을 쏟았다.
1534년(중종 29) 8월 21일 병약했던 그가 돌아가니, 향년 42세였다. 온 나라 사람들이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 슬퍼하였다. 유작(遺作)으로 『반양이선생유고(潘陽二先生遺稿)』가 남아 있는데, 그의 조상인 박상충(朴尙衷: 좌의정 박은의 아버지)과 박소(朴紹)가 지은 글을 합쳐서 편찬한 책이다. 두 사람은 반남박씨 중에서 가장 뛰어난 유학자였다.
성품과 일화
박순(朴淳)이 지은 그의 비명(碑銘)에는 그의 자품이 특이한데다가 학문까지 몸소 실천하고 터득하여, 마음이 밝고 모습이 한가로웠는데, 관대하면서도 절제하였고, 화합하면서도 시류(時流)에 흔들리지 않았다고 하였다. 또 『해동잡록(海東雜錄)』에는 그에 관하여 참되고 솔직하여 거짓이 없이 한결같았으므로 모두 그를 옥 같은 사람이라고 칭찬하였다고 전한다.
그는 8세 때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따라 서울에서 경상도 합천(陜川) 야로현(冶爐縣)으로 내려가서 외가(外家)에서 자랐다. 어려서부터 빼어난 기질과 특출한 품성으로 사람들이 이미 큰 사람이 될 만한 그릇으로 여겼다. 나이 겨우 10여세 때 외조부 윤자선이 병을 앓았는데, 그가 밤에도 옷을 벗지 않고 곁에서 간호하자, 외조부가 칭찬하기를 “이런 손자 하나를 두었으니, 나의 병이 낫고도 남겠다.”고 하였다.
그는 어린 나이에 유학의 도(道)를 탐구하려는 뜻을 지녔다. 조광조의 스승 한훤(寒喧) 김굉필(金宏弼)이 일찍이 합천 야로현 말곡촌(末谷村)에 거주한 적이 있었는데, 고을 사람들이 그의 훌륭한 인품을 자주 이야기하자, 그 말을 들은 박소는 김굉필을 사모한 끝에 그 문하에서 수업한 제자들을 찾아가서 그 언론과 행실을 일일이 기록하고 체득하였다. 그때가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에서 김종직·김굉필 등이 연산군에게 살륙(殺戮)을 당한 직후였으므로, 유학자들의 사기(士氣)가 꺾여서 모두 학업을 포기하였으나, 박소는 혼자 낙망하지 않고 뜻을 기울여 학문을 갈고 닦았다. 어린 나이에 가야산(伽倻山)의 절로 들어가서, 주자(朱子)의 『근사록(近思錄)』과 『성리대전(性理大全)』 등의 책을 읽으면서 사색하고 궁리하느라고 침식(寢食)을 잊을 정도였다. 25세에 과거에 응시하기 전까지 산사(山寺)에서 혼자 수학하면서 어머니에게 문안드리는 일 이외에는 7~8년 동안 산에서 나간 적이 없었다. 그 뒤에 송당(松堂) 박영(朴英)의 학문이 깊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서 가르침을 받았는데, 식견이 더욱 넓어지고 행실이 더욱 독실해져서 주자학의 깊은 경지에 도달하였다. 한 시대의 젊은 유학자들이 모두 그와 사귀기를 원하였고, 스승 박영도 칭찬하기를, “그대는 나의 스승이지, 나의 제자가 아니다.” 하였다.
그는 일찍이 말하기를, “사람들이 『맹자(孟子)』를 읽으면 문장에 능하다고 말하지만, 나의 생각에는 『논어(論語)』가 더욱더 절실하다고 여긴다.” 하고, 매달마다 반드시 『논어』를 한 차례 읽었다. 그가 일찍이 동료 학자들에게 말하기를, “학문하는 방도는 먼저 흩어진 마음을 수렴하여 근본을 함양하고 의리와 이끗을 분변하여 대체를 수립해야 한다. 그러면 나머지는 따라서 이루어질 것이다. 성현(聖賢)의 한마디 이야기나 한마디 말씀이 모두 지극한 가르침이다. 그에 따라 나아간다면 형이상학(形而上學)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그 문장은 평이(平易)하고 전아(典雅)한데다가 이치가 정연하고 문법이 순조로운가 하면 시(詩)도 온후(溫厚)하고 평담(平淡)하여 화려한 것을 숭상하지 않았다. 일찍이 그가 지은 시를 보면, “마음이 없으면 망각하기 일쑤이고, 뜻을 두면 도리어 부자연스럽게 된다, 긴장과 휴식이 적절하면 효과가 있는데, 이것이 망령의 인연을 없애준다.[無心每到多忘了 着意還應不自然 緊慢合宜功必至 寔能除得妄中綠]” 하였는데, 학자가 학문을 할 때 마음가짐을 어떻게 가져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또 그가 파직되어 배를 타고 남쪽 시골로 돌아가다가 도중에 읊은 시를 보면, “앞에는 명리(名利) 길이 몇 천 개나 있는데, 강상(江上)으로 돌아오니 고기잡이배만 있구나. 물과 같은 한 마음을 몸 안으로 거두고, 구름 같은 세상 만사를 하늘에다 부치노라.[名利前頭路幾千 却來江上有漁舡 一心似水收吾內 萬事如雲只付天]” 하였는데, 그는 세상의 명예와 이익을 버리고 작은 배를 타고 낙향하는 심정을 읊고 있다.
영남학파의 태동
1517년(중종 12)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이 경상도 관찰사(觀察使)로 부임하여 왔다. 박소와 인척 지간이었던 김안국은 평소 젊은 박소의 판단력을 존중한 나머지 모든 일을 반드시 자문한 뒤에 시행하였다. 어느 날 김안국이 한 편의 글을 지어서 박소에게 보이며, “내가 도내(道內)의 선비들로 하여금 이것을 모범의 기준으로 삼도록 하고 싶은데, 그대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박소가 말하기를, “이는 상공(相公)께서 인재를 육성하려는 아름다운 뜻이므로, 초학(初學)인 저로서는 감히 무어라고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다만 이 글이 주자의 ‘십훈(十訓)’과 비교해 볼 때 어느 것이 더 나을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김안국이 깨닫고 웃으며, “내가 관찰사로 부임하고부터 주야(晝夜)로 생각하여 이 글을 만들었다. 그런데 지금 내가 그대의 말을 듣고 비로소 별로 긴요하지 않은 데에 공력을 들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고, 자기가 지은 글을 찢어버리고 주자의 ‘십훈(十訓)’과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의 규약(規約)을 써서 군현(郡縣)으로 내려 보내어 도내 모든 고을의 학교 벽에다 이것을 게시하여 영원히 법도로 삼도록 하였다.
박소는 관찰사 김안국을 도와서, 경상도에 주자학의 학풍을 진작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때 경상도 각 고을의 향교(鄕校)에 『소학(小學)』을 가르치면서, 반드시 주자의 훈육(訓育)을 체득하게 하고, 서원에 규약을 마련하여 유생들에게 주자의 성리학을 학습하게 하였다. 경상도에서 이처럼 유풍(儒風)을 진작시킨 결과 안동(安東)에서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김해(金海)에서 남명(南冥) 조식(曺植)이 나타나서 영남학파를 일으켰던 것이다.
묘소와 후손
1616년(숙종 22) 7월 나라에서 문강(文康)의 시호를 내려주었다. 비명은 박순(朴淳)이 지었다. 1534년(중종 29) 12월 경상도 합천 야로현 서쪽 화양동(華陽洞) 괘산(掛山) 남쪽 산등성이에 외조부 현감 윤자선과 나란히 묻혔다. 그보다 44년 뒤에 향년 85세로 돌아간 부인 남양홍씨(南陽洪氏)는 경기도 양주(楊洲) 풍양현(豊壤縣) 남쪽 금촌리(金村里)에 따로 묻히었는데, 묘표(墓表)가 있다.
자녀는 5남 2녀를 두었는데, 2남 박응순(朴應順)은 선조의 국구(國舅)가 되어 돈녕부 영사(領事) 반성부원군(潘城府院君)이 되었고, 3남 박응남(朴應男)과 4남 박응복(朴應福)은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이 되었다.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에는 그의 손자 박동로(朴東老)·박동현(朴東賢)·박동선(朴東善)·박동량(朴東亮)·박동설(朴東說)·박동망(朴東望)과 증손자 박원(朴垣)·박엽(朴燁)·박정(朴炡)·박황(朴潢)·박의(朴漪)도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재상이 된 자가 많았다고 하였다.
그는 일찍 죽었으나, 그 자손들이 출세하여,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고 전라도 나주(羅州)의 반계서원(潘溪書院)과 경상도 합천(陜川)의 이연서원(伊淵書院)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중종실록(中宗實錄)』
『명종실록(明宗實錄)』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숙종실록(肅宗實錄)』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사마방목(司馬榜目)』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
『상촌집(象村集)』
『송자대전(宋子大全)』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연암집(燕巖集)』
『임하필기(林下筆記)』
『잠곡유고(潛谷遺稿)』
『해동잡록(海東雜錄)』
3. 야천 박소 (朴紹) 의 신도비명(神道碑銘) [박순(朴淳]
박소(朴紹)의 신도비명(神道碑銘) [박순(朴淳)]
야천박공신도비명 冶川朴公神道碑銘
박씨(朴氏)는 그 비롯된 유래가 있다. 양산(楊山)의 신인(神人, 혁거세(赫居世))이 왕위에 올라 신라(新羅)의 시조가 된 뒤에 그 후손들이 삼한(三韓)에 흩어져 살았는데, 금성(錦城)의 반남(潘南)에 사는 후손이 대대로 큰 벼슬을 하여 가장 번창한 씨족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휘(諱) 상충(尙衷)이란 분이 고려(高麗)에서 벼슬하여 우문관 직제학(右文館直提學),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가 되었고 충직(忠直)함을 끼쳐 후손을 계도(啓導)해 도왔으며, 그의 아들 휘 은(訔)은 우리 태종(太宗)을 섬겨 벼슬이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에 이르렀고 공훈으로 금천 부원군(錦川府院君)에 봉해졌다. 부원군이 형조 참판(刑曹參判) 휘 규(葵)를 낳고 참판이 사직(司直) 휘 병문(秉文)을 낳았는데, 사직이 공의 증조이다. 사직의 아들 휘 임종(林宗)은 통정 대부(通政大夫) 상주 목사(尙州牧使)로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으며, 판서의 아들 휘 조년(兆年)은 벼슬이 이조 정랑(吏曹正郞)에 이르고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되었는데, 공은 좌찬성의 큰아들이고 둘째 박관(朴綰)은 진사이며 그 다음은 박집(朴緝)이다. 어머니 증(贈) 정경 부인(貞敬夫人) 윤씨(尹氏)는 현감(縣監) 윤자선(尹孜善)의 딸로서 그 또한 파평(坡平)의 큰 성씨인데, 홍치(弘治) 계축년(癸丑年, 1493년 성종 24년) 2월 14일에 공을 낳았다.
공의 휘(諱)는 소(紹)이고 자(字)는 언주(彦胄)이며 스스로 부른 호는 야천(冶川)인데, 대대로 한양(漢陽)에서 살았다. 공이 8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자매(姉妹) 및 두 아우와 같이 모두 정경 부인의 슬하에서 자랐다. 연산조(燕山朝) 때 민가(民家)가 많이 철거되어 정착할 곳이 없자 부인이 아들들을 데리고 합천(陜川) 야로현(冶爐縣)으로 남하하였는데, 그곳은 바로 공의 외가(外家)였다. 공은 빼어난 기질과 특출한 품성으로 인품이 혼연히 이루어져서 어렸을 때부터 걸음걸이가 법도가 있었으므로 이미 위인(偉人)과 대기(大器)가 될 줄로 알았다. 나이 겨우 10여 세에 (외조부) 현감 윤공(尹公, 윤자선)이 병환을 앓자 게을리하지 않고 곁에서 모시며 밤에도 옷을 벗지 않으니, 현감 윤공이 감탄하며 말하기를, “이런 손자 하나를 두었으니, 나의 병이 낫고도 남겠다.”고 하였다. 머리를 땋기 이전의 어린 나이에 문득 도(道)를 탐색하려는 뜻이 있었다. 한훤 선생(寒暄先生, 김굉필(金宏弼))이 일찍이 야로현 말곡촌(末谷村)에 산 적이 있었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아직도 그 풍렬(風烈)을 이야기한 자들이 있었는데, 공이 그 말을 듣고 사모한 끝에 매양 한훤 선생의 문하에서 수업한 제자들을 찾아가 보고 언론과 행실을 반드시 기록하였다. 그때 무오 사화(戊午士禍, 연산군 4년(1498)에 일어난 사화(士禍))의 살육(殺戮)을 치른 뒤여서 사기(士氣)가 꺾였으나 공만 혼자 뜻을 기울여 갈고 닦으며 쉬지 않고 학문을 강론하였다. ≪근사록(近思錄)≫, ≪성리대전(性理大全)≫ 등의 책을 가지고 가야산(伽倻山)의 절로 들어가 옷깃을 여미고 꿇어앉아 사색하고 연구하느라 침식(寢食)을 잊기도 하였는데, 어머니에게 문안드리는 일 외에는 7, 8년간 산에서 나갈 겨를이 없었다. 그 뒤에 송당(松堂) 박영(朴英)의 학문 연원이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마음을 쏟아 가르침을 받고 의리를 궁구하자 견식이 더욱더 넓어지고 실천이 더욱더 독실해져 깊은 경지에 도달하여 순수하게 우뚝 섰으므로, 일시의 또래들이 모두 사귀기를 원하였고 송당도 말하기를, “그대는 나의 스승이지 나의 벗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김안국(金安國) 공이 영남 관찰사(嶺南觀察使)로 왔을 때 공과 인척의 사이었으므로 평소 존중한 나머지 모든 일을 반드시 자문한 뒤에 시행하였다. 어느날 김안국 공이 한 편의 글을 꺼내 보이며 말하기를, “내가 도내(道內)의 선비들로 하여금 이를 모범의 기준으로 삼게끔 하고 싶은데, 자네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공이 말하기를, “이는 상공(相公)께서 인재를 육성하려는 아름다운 뜻이므로 초학(初學)인 저로서는 감히 간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만 이 글이 주자(朱子, 남송(南宋)의 대유(大儒) 주희(朱熹))의 십훈(十訓)과 비교해 볼 때 어느 것이 더 낫습니까?”라고 하였다. 김안국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관찰사로 부임하고부터 주야로 생각하여 이 글을 만들었다. 그런데 지금 그대의 말을 듣고 비로소 별로 긴요하지 않은 데에 공력을 들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고 이내 주자의 십훈 및 백록동 서원1)(白鹿洞書院)의 규약을 써서 두루 고을의 학교 벽에다 게시하여 영원히 법도로 삼도록 하였다.
공은 일찍이 말하기를, “장중하고 경건하면 날로 강해지고 안일하고 방종하면 날로 투박해지는데, 이는 옛사람의 격언(格言)이다. 학자(學者)가 어찌 감히 조금이라도 나태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사람들이 ‘≪맹자(孟子)≫를 읽으면 문장에 능하다.’고 말하지만 나의 뜻에는 ≪논어(論語)≫가 더욱더 절실하다고 여긴다.” 하고 매월마다 반드시 한번씩 읽었으니, 그 스스로 가다듬는 정밀함이 이와 같았다. 그리고 과거 공부에 힘을 분산한 적이 없었으나 재주가 뛰어나 무인년(戊寅年, 1518년 중종 13년) 가을 향시(鄕試)를 보아 삼과(三科)에 모두 제1등을 차지하였고 그 이듬해 봄에 사마시(司馬試)를 보아 제2등으로 합격하였다. 회시(會試)에서 강석(講席)에 나아갈 때 거동이 차분하고 응대함이 상세 민첩하였으므로 제공(諸公)들이 입을 모아 말하기를, “오늘날 옥당(玉堂, 홍문관(弘文館))의 정자(正字)를 얻었으니, 축하할 만하다.”고 하였다. 그때 조 정암(趙靜庵, 조광조(趙光祖))이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강석에 참석하여 말하기를, “그의 인품을 보니, 남의 밑에 있을 사람이 아니다. 왜 꼭 정자로 기대하는가?”라고 하였다. 과연 대과(大科)에 장원 급제하자 제공들이 모두 말하기를, “효직(孝直, 조광조의 자(字))이 사람을 알아보았다.”고 하였다. 이때 공의 이름이 이미 현량과(賢良科)의 추천 속에 들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곧바로 대과를 보았으므로 식자(識者)들이 옳게 여기었다. 전서(典書)에 임명되었다가 전중(殿中)으로 전직되었고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에 임명되었다.
공이 이미 과거에 합격하자 지방의 수령을 요청하여 어버이를 봉양하려고 하였으나 갑자기 큰 애통을 당하여 본래 마음먹었던 뜻을 이룩하지 못하게 되자 슬픔을 가슴에 안고 매우 마음 아파하며 일생을 보냈다. 영남에서 상여(喪輿)를 모시고 김포(金浦) 선영으로 돌아와 장례를 치르고 나서 시묘(侍墓)살이를 하면서 안으로 뜻을 다하고 밖으로 제수(祭需)에 힘을 다 쏟으니, 향리의 사람들이 그 순수한 효성에 감동하였다. 상복(喪服)을 벗자 시강원 사서(侍講院司書)에 임명되었다가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으로 전직되었고, 또 수찬(修撰)으로 옮기었다가 이조 좌랑(吏曹佐郞)이 되었다. 누차 전직되어 시강원 문학(侍講院文學)에 이르렀고 병조 정랑(兵曹正郞),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예조 정랑(禮曹正郞), 이조 정랑(吏曹正郞), 의정부 검상(議政府檢詳)을 역임하고 얼마 안 되어 사인(舍人)으로 승진하였다가 시강원 필선(侍講院弼善)으로 전직되었다. 그 뒤로 품계의 연한이 차지 않아 여러 번 봉각(鳳閣, 의정부)과 춘방(春坊, 세자 시강원)에 드나들었다. 이때에 여러 현인(賢人)들이 화를 입은 뒤여서 사람들이 성리학(性理學)에 대해 말하기를 꺼리었으므로 서연(書筵)에 나아가 강론할 때 다만 관례에 따라 책임만 때울 뿐이었다. 마침 문원공(文元公) 이언적(李彦迪)이 교서관(校書館)에 침체되어 있었으므로 공이 이조(吏曹)에 있을 때 극력 추천하여 시강원 설서(侍講院說書)에 임명되었는데, 이때부터 공과 문원공이 번갈아 문학(文學)과 필선(弼善)이 되어 비로소 정자(程子, 북송(北宋)의 정호(程顥) 또는 그 아우 정이(程頤))와 주자(朱子) 등의 여러 글을 가지고 정성을 쏟아 계도(啓導)하였다. 빈객(賓客)과 사부(師傅)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세자(世子)의 나이가 어리므로 이것이 급무(急務)가 아니라’고 하였으나 두 분이 주저하지 않고 더욱더 힘을 다해 토론하였다. 인종(仁宗)의 성스러운 자질이 하늘에서 타고나긴 하였으나 도덕(道德)이 일찍 성취된 것은 어찌 소양이 없이 그렇게 되었겠는가?
사복시 부정(司僕寺副正)으로 승진하였다가 시강원 보덕(侍講院輔德)으로 옮기었고, 다시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이 되었다가 대사간(大司諫) 박광영(朴光榮)과 인척이 된 혐의로 사직하여 통례원 상례(通禮院相禮)로 교체되었으며, 군자감 부정(軍資監副正)으로 전직되었다가 다시 사간이 되었다. 그때 박홍린(朴洪鱗)이 헌납(獻納)이 되었고 채무택(蔡無擇)이 정언(正言)이 되었는데, 그들은 모두 김안로(金安老)의 당이었다. 김안로가 축출되어 외방(外方)에 있자 소인배들이 다시 그를 등용하려고 도모하여 사특한 의논이 크게 일어나니, 온 조정이 입을 꽉 다물었다. 공이 분연히 몸을 돌아보지 않고 극력 저지하자 그 무리들이 노하여 밀어내 사성(司成)으로 좌천되었다가 이윽고 배척하여 파직시켰다. 이회재(李晦齋, 이언적)가 밀양(密陽)에서 부름을 받고 올라와 공 대신 사간이 되었는데, 공이 이 회재에게 누(累)가 미칠까 염려하여 그가 재삼 찾아왔으나 그때마다 피하고 만나보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그도 연좌되어 파직되고 말았다. 공이 이미 사림(士林)의 중대한 명망을 지니고 있어 소인배들이 더욱더 시기하였으므로 이내 남양(南陽)의 시골집으로 회피하여 겨우 1년간 살다가 가족을 이끌고 다시 합천으로 돌아가 세상의 일에 뜻을 끊고 오로지 독서에 정신을 쏟아 비록 조석거리가 누차 떨어져도 태연하였다. 갑오년(甲午年, 1534년 중종 29년) 봄에 병환이 나 가을 8월 21일에 정침(正寢)에서 졸(卒)하였다. 세상을 떠날 때에 평소와 다름없이 얼굴과 손을 씻었는데, 향년 42세였다. 온 나라 사람들이 공이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 상심하였다. 그의 벗 김취성(金就成) 공이 애도한 시에, “크나큰 사업은 심지 속에 잠기었고 편파 없이 원만하여 체용이 완전했지. 세상을 떠난 날 상심이 된 것은 하늘이 수명을 더 주지 않아서지.[大業潛心地 圓融體用全 傷心觀化日 天不假之年]”라고 하였는데, 지기(知己)의 말이라고 이를 만하다. 그해 12월 24일에 야로현(冶爐縣) 서쪽 화양동(華陽洞) 괘산(掛山) 남쪽 산등성이에 묻히었는데, 현감 윤공(尹公, 윤자선)과 같은 자리였다. 공 및 공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뒤에 반성 부원군(潘城府院君, 박응순(朴應順))으로 인해 차등 있게 벼슬을 추증(追贈)받았다.
공은 자품이 이미 특이한데다가 학문까지 곁들여 몸소 실천하고 스스로 터득하여 마음이 밝고 모습이 한가로와 관대하면서도 절제한 바가 있고 화평하면서도 유동한 바가 없었다. 그런가 하면 어버이를 섬길 적에는 지극한 효성이 있었고 형제간에는 우애의 정이 독실하였으며, 가정에서는 은정과 의리의 정도를 얻어 순리대로 행하여 여유가 있었으니, 노력하여 배운 선비처럼 조금씩 쌓아서 성취한 것이 아니었다. 평생 동안 ≪대학(大學)≫, ≪논어(論語)≫와 정자(程子), 주자(朱子) 및 서산 연의(西山衍義, ≪대학연의(大學衍義)≫임) 등의 글을 진학(進學)의 단계로 삼아 깊이 연구하고 힘써 탐색하는 등 싫증을 내지 않고 부지런히 하였다. 이미 두텁게 축적되자 밖으로 영화(英華)가 발로되어 용모를 바라보고 말씀을 접해보면 어진 이는 그 마음에 감복하고 불초(不肖)한 자는 그 덕에 감화되었으므로, 사람들이 ‘정 명도(程明道, 명도는 북송(北宋)의 대유(大儒) 정호(程顥)의 호)의 기풍을 듣고 흥기한 것과 같다’고 말하였다. 공이 일찍이 학자(學者)들에게 말하기를, “학문하는 방도는 먼저 흩어진 마음을 수렴하여 근본을 함양하고 의리와 이끗을 분변하여 대체를 수립해야 한다. 그러면 나머지는 따라서 이루어질 것이다. 성현(聖賢)의 한마디 이야기나 한마디 말씀이 모두 지극한 가르침이다. 그에 따라 나아간다면 형이상학(形而上學)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문장은 평이(平易)하고 전아(典雅)한데다가 이치가 정연하고 문법이 순조로운가 하면 시 또한 온후(溫厚)하고 평담(平淡)하여 화려한 것을 숭상하지 않았다. 일찍이 지은 시에, “마음이 없으면 망각하기 일쑤이고 뜻을 두면 도리어 부자연스럽다네. 긴요 한만 적절하면 효과가 있으니 그래야만 망령의 인연이 제거되지. [無心每到多忘了 着意還應不自然 緊慢合宜功必至 寔能除得妄中緣]”라고 하였는데, 공이 학문을 할 때 마음을 정밀하게 간직하고 실질적인 경지를 밟아 이미 스스로 겸손해져 속이지 않는 곳에 도달하였다. 그리고 파직되어 남쪽으로 돌아가다가 도중에서 읊은 시에, “앞에는 명리 길이 몇 천 개나 있는데 강상으로 돌아오니 어선 하나 있구나. 물과 같은 일심은 몸 안에 수습하고 구름 같은 만사는 하늘에다 부치었지. [名利前頭路幾千 却來江上有漁舡 一心似水收吾內 萬事如雲只付天]”라고 하였는데, 영욕(榮辱)에 담담하고 주어진 환경에 안주하여 원망이 없다는 것을 또한 상상할 수 있다.
공이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끝없이 육아(蓼莪)의 슬픔2)을 안아 상복(喪服)을 입은 사람을 볼 때마다 반드시 ‘어버이 나이가 얼마냐?’고 물으면서 오열(嗚咽)하기를 마지않았다. 여러 숙부(叔父)들을 섬길 때 사랑과 공경을 극진히 하였으며, 막내 숙모(叔母)가 늘그막에 홀로 궁하게 살자 맛있는 음식을 계속 제공하였고 비록 멀리 떨어져 있어도 퇴청하면 반드시 찾아가 문안 인사를 드렸다. 재산을 나눌 적에 한결같이 큰누이의 처분대로 따랐으며, 기거(起居)를 살피고 봉양하되 어머니를 섬기듯이 하였다. 두 아우 박관(朴綰)과 박집(朴緝)이 강보(襁褓)에 있을 때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공이 기르고 가르치되 은정과 의리를 극진히 하여 결국 모두 성취시켰다. 녹봉이나 벗들이 준 선물을 반드시 원근의 씨족들에게 나누어주는 등 친목을 도모하고 두루 보살피는 독실함이 처족(妻族)에게도 그러하였다. 친구 중 돌림병을 앓아 사람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한 사람에게 약을 써서 구제해 주었고, 상(喪)을 당하여 장사를 치르지 못한 궁한 이웃 사람에게 널을 제공해 주었다. 비록 매우 어리석고 미천한 사람이라도 반드시 공경과 정성으로 대하여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았는가 하면 심지어 곤충과 같은 미물도 가엾게 여기었다.
공이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의정(議政) 이계맹(李繼孟)에게 시호를 하사하는 임무를 띠고 호남(湖南)의 금성(錦城)으로 내려갔을 적에 공의 선배인 그 고을 목사(牧使) 눌재(訥齋) 박상(朴祥)이 영접할 때 공이 조금도 겸양하지 않았으므로 박상 공이 처음에 공이 연소(年少)하여 기를 부린 줄로 알고 의아해 하였다. 그런데 사명의 임무가 끝나자마자 공이 친절하게 이야기하면서 예의와 존경이 극진하였으므로 박상 공이 비로소 공의 아량에 감복하였다. 사람이 도리에 어긋난 일을 하였을 경우 볼 때마다 간곡하게 규계하였다. 그런데 허항(許沆) 형제는 공의 인척으로서 평소 서로 왕래하며 교분이 두터웠다. 그러다가 그들이 누이동생의 집 앞을 지나면서 들리지 않았다는 말을 듣기에 미쳐 준엄하게 책망하고 관계를 끊자, 허항 형제가 매우 앙심을 품어 공을 배척하고 모함하는 등 온 힘을 다 쏟았다. 그리하여 결국 공으로 하여금 시달리다 미끄러져 먼 지방에서 일생을 마치게 함으로써 재능이 세상에 쓰여지지 않고 도덕이 시대에 시행되지 않았으니, 아! 매우 통분하다.
부인 홍씨(洪氏)는 사섬시 정(司贍寺正) 홍사부(洪士俯)의 딸인데, 또한 정숙한 덕이 있어 아내와 어머니의 역할이 모두 본받을 만하였다. 향년 85세로 공보다 44년 뒤에 세상을 떠나 양주(楊州) 풍양현(豐壤縣) 남쪽 금촌리(金村里)에 묻히었는데, 별도로 묘표(墓表)가 있다. 5남 2녀를 낳았다. 큰아들 박응천(朴應川)은 계묘년(癸卯年, 1543년 중종 38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사재감 정(司宰監正)이 되었는데, 마음가짐이 자연스러웠으나 실로 법도가 있었고 누차 고을의 수령이 되어 치적(治績)이 특별히 드러났다. 사옹원 참봉(司饔院參奉) 김희려(金希侶)의 딸에게 장가들어 6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박동현(朴東賢), 박동호(朴東豪), 박동로(朴東老), 박동준(朴東俊), 박동민(朴東民), 박동선(朴東善)이다. 둘째 아들 박응순(朴應順)은 을묘년(乙卯年, 1555년 명종 10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반성 부원군(潘城府院君)인데, 순수하고 근신하며 효도하고 우애하여 세상에서 장자(長者)로 일컬었다. 문천정(文川正) 이수갑(李壽甲)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박동언(朴東彦)이고 딸은 바로 지금의 중전(中殿, 선조비(宣祖妃) 의인 왕후(懿仁王后))이다. 셋째 아들 박응남(朴應男)은 계축년(癸丑年, 1553년 명종 8년) 과거에 합격하여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을 지냈는데, 충성스럽고 고결하여 우뚝 서서 동요하지 않은데다가 학문의 힘까지 곁들여 조예가 매우 높았으므로 사림(士林)들이 의지해 국가의 주석(柱石)으로 여기었으나 불행하게 일찍 죽었다. 장원서 별좌(掌苑署別坐) 윤화(尹和)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박동도(朴東燾), 박동휴(朴東烋), 박동점(朴東點)이다. 사재감 정(박응천)과 반성 부원군(박응순)은 뒤에 모두 서로 잇따라 죽었다. 넷째 아들 박응복(朴應福)은 갑자년(甲子年, 1564년 명종 19년) 과거에 급제하여 지금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가 되었는데, 인후(仁厚)하고 독실(篤實)하여 규각을 드러내지 않고 지키는 바가 매우 확고하였다. 금화사 별제(禁火司別提) 임구령(林九齡)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박동윤(朴東尹), 박동열(朴東說), 박동망(朴東望), 박동량(朴東亮)이다. 다섯째 아들 박응인(朴應寅)은 무오년(戊午年, 1558년 명종 13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지금 장단 부사(長湍府使)에 임명되었는데, 가정의 교훈을 잘 따라 여러 형들의 미덕을 계승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이것을 훌륭하게 여기었다. 창락 찰방(昌樂察訪) 변희눌(卞希訥)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4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박동기(朴東紀), 박동적(朴東績), 박동위(朴東緯)이다. 공의 큰딸은 사도시 정(司寺正) 이희백(李希伯)에게 시집가 5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이대추(李大秋), 이대화(李大禾), 이대수(李大秀), 이대형(李大馨), 이대년(李大年)이다. 둘째 딸은 진사(進士) 박성원(朴誠元)에게 시집가 1녀를 낳았다. 안팎의 손자들이 1백여 명인데, 이처럼 문벌이 융성한 가문은 옛날에도 없었다. 그런데 모두 가문의 법도를 이어받아 겸손(謙遜)하고 충후(忠厚)하여 귀한 세력을 믿고 변하지 않았으니, 박씨의 경사가 끊임이 없을 것이다. 아! 인자(仁者)는 반드시 후손이 있는 법이니, 하늘의 보답은 오래 되어야 정해진다고 한 말의 징험이 아니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아득한 옛날 신인(神人)의 계통 그 발원(發源)이 깊디깊도다. 대대로 미덕에 힘써 한없이 뻗치었도다. 우뚝 뛰어난 공이야말로 사실 발로된 꽃이었도다. 천구(天球)처럼 순수한 자질은 다듬지 않아도 정밀했도다. 어진 스승에게 훈도(薰陶)되어 그 학문이 순수했도다. 일찍 도(道)를 깨달으니 그 식견이 컸도다. 뿌리가 깊으면 가지가 무성한 법이어서, 그릇이 혼연히 이룩되었도다. 단아하고 고상하며 화평하고 통투(通透)하였도다. 치국(治國)에 뜻을 두어 벼슬길에 나가 드날리었도다. 과장(科場)에 나가 응시하여 문장을 발휘했도다. 이름은 방목(榜目)에 높이 걸렸고 문장은 사책(射策)에서 으뜸이었도다. 관직을 두루 역임하면서 아름다운 명성이 혁혁했도다. 홍문관(弘文館)에 두 번 들어갔고 시강원(侍講院)에 세 번 들어갔도다. ≪주역(周易)≫을 강론하여 왕도(王道)를 협찬했도다. 사간원에 들어가 간언을 드렸고 사헌부에 들어가 기강을 바로잡았도다. 엄숙한 안색으로 반열에 서니 솔처럼 곧고 옥처럼 강했도다. 성인(聖人)의 무리가 되기를 바라니 임금을 요순(堯舜)처럼 만들려는 뜻이 끝없었도다. 때아닌 때에 태어나니 결국 틈이 생기고 말았도다. 곧은 도를 펼쳐보지 못하고 아름다운 계책을 시행해 보지 못했도다. 갑자기 날개를 움츠리고 장도(長途)에서 미끄러졌도다. 외딴 시골에 살면서 거친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했도다. 문을 닫고 글을 읽으니 세월이 여러 번 바꿨도다. 소연(蕭然)히 속세를 벗어나니 그 즐거움이 끝없었도다. 곤궁해도 변하지 않으니, 군자(君子)의 굳셈이었도다. 의당 장수의 보답을 받았어야 할 터인데 천리(天理)가 또 까마득했도다. 난초가 꺾이고 혜초가 시드니 지금은 떠나고 없도다. 정도(正道)를 지키다가 곤궁하니 죽은 뒤에도 사람이 사모했도다. 요행히 복을 누린 사람은 살아서 도리어 사람들의 비웃음을 받았도다. 공이 얻은 바는 어찌 반드시 장수에 있겠는가? 평소 찬란하게 쌓은 바는 기(夔)와 설3)(卨)처럼 이행하는 것이었도다. 외로운 표상이 무리에서 뛰어나니 온갖 행실에 결함이 없었도다. 고인(古人)에 비해도 손색이 없으니 후세 명철한 이의 모범이 될 만하였도다. 유구하게 전해져 일월(日月)처럼 찬란하도다. 그 누가 길고 짧은지 식자들이 분별할 것이도다. 더구나 하늘이 후손에게 보답하니 위대하고도 번창했도다. 벼슬아치가 대대로 계승하여 충효를 돈독히 하였도다. 때문에 깨끗하고 성스러운 기운이 모이어 상서가 성헌4)(星軒)에 어울리었도다. 임금의 왕비가 되니, 나라 터전의 명맥이 끝없도다. 촉도신지5)(蜀塗莘摯)처럼 집안이 아울러 번창할 것이도다. 향기가 자욱하게 퍼지고 광채가 찬란히 빛났도다. 괘산(掛山)에 심어진 소나무와 잦나무 곧게 서 있도다. 덕을 기록하고 찬양하여 이 비석에 새기었노라.
각주
1) 백록동 서원(白鹿洞書院) : 강서(江西) 성자현(星子縣) 북쪽 여산(廬山) 오로봉(五老峯) 밑에 있음. 당(唐)나라 정원(貞元, 당 덕종(唐德宗)의 연호) 무렵에 이발(李渤)이 그의 형 이섭(李涉)과 이곳에서 은거(隱居)하고 독서하면서 흰 사슴 한 마리를 길렀기 때문에 백록동이라고 하였음. 오대(五代) 시대 때 남당(南唐)이 이곳에다 학관(學館)을 세웠고 송(宋)나라 함평(咸平, 송 진종(宋眞宗)의 연호) 무렵에 서원(書院)을 세웠는데 나중에 폐지되었음. 남송(南宋) 때 주자(朱子)가 남강군(南康軍)을 맡았을 때 중건(重建)하여 학문을 강론하는 장소로 삼았음.
2) 육아(蓼莪)의 슬픔 : 육아는 ≪시경(詩經)≫의 편명인데, 부모가 낳아서 길러 준 은혜를 추모하는 시임. 왕부(王裒)는 진(晉)나라 영릉(營陵) 사람으로, 학문이 높고 재능이 많았는데, 그의 부친이 사마소(司馬昭)에게 피살되자 진나라의 신하가 되지 않겠다고 맹세하였음. 부친이 죽은 뒤로 ≪시경≫의 육아장을 읽을 때마다 눈물을 흘렸으므로, 문인들이 육아장을 배우지 않았음.
3) 기(夔)와 설(卨) : 옛날 요순(堯舜) 시대의 훌륭한 신하임.
4) 성헌(星軒) : 헌원성(軒轅星)을 가리킨 것으로, 고대 천문학자들이 헌원성을 여주(女主)의 상징으로 삼았기 때문에 시문(詩文)에 딸을 시집보내는 수레로 일컬었는데, 여기서는 선조비(宣祖妃) 의인왕후(懿仁王后)의 일을 말한 것임.
5) 촉도신지(蜀塗莘摯) : 촉도는 우왕비(禹王妃)의 탄생지이고, 신(莘)은 탕왕비(湯王妃)의 탄생지이며, 지(摯)는 왕계(王季, 문왕(文王)의 부)의 처 탄생지임.
冶川朴公神道碑銘 幷序
惟朴氏。其來有始。楊山神人。立爲新羅鼻祖。其後裔散居三韓。而居錦之潘南者。世服大僚。最以茂族著稱。有諱尙衷。仕高麗。爲右文館直提學,判典校寺事。遺以忠直。啓佑後胤。其子諱訔。事我太宗。位至議政府左議政。勳封錦川府院君。生諱葵。刑曹參判。參判生諱秉文。司直。司直於公爲大王父。是生諱林宗。通政大夫。尙州牧使。贈吏曹判書。生諱兆年。官止吏曹正郞。贈議政府左贊成。公。贊成之長子。亞曰綰。擧進士。次曰緝。妣尹氏。贈貞敬夫人。縣監孜善之女。亦坡平大姓。弘治癸丑二月十四日。生公。公諱紹。字彦胄。自號冶川。世居漢城。八歲而孤。與姊妹二弟。俱育於貞敬膝下。燕山朝多撤人家。靡所止。夫人率諸孤。南歸陜川冶爐縣。卽公外家也。公秀氣孤稟。德宇渾成。自在孩稚。步趨有度。已知其爲偉人遠器也。年僅十餘。値縣尹公感疾。侍側不懈。夜不褫衣。縣尹公歎曰。有此一孫兒。足療吾病矣。未及覊貫。便有求道之志。寒暄先生嘗住同縣末谷村。邑人尙有能稱道其風烈者。公聞而慕之。每詢先生及門弟子言論擧措。必籍而識之。時當戊午殺戮之餘。士氣蕭然。公獨注意鑽礪。講學不輟。携近思錄,性理大全等書。入伽倻山寺。整襟危坐。沈潛玩繹。至忘寢食。覲省之外。不遑出山者七八年矣。後聞朴松堂英學有淵源。遂往從之。專心承誨。硏窮義理。見識益廣。踐履彌篤。深造極詣。粹然卓立。一時輩行。咸推仰願交。松堂亦曰。子乃我師。非我友也。金公安國。觀察嶺南。於公戚聯。雅敬重之。凡事必咨。一日。出示一編書曰。吾欲使一道士子。有所模準。於子意何如。公曰。此相公作成美意。非初學所敢與。但此書孰與朱子十訓。金公笑曰。自忝本職。晝夜覃思。以成此書。及聞子言。始覺用功之閒漫也。遂書十訓及白鹿洞規。遍揭州縣學壁。永爲矜式。公嘗曰。莊敬日强。安肆日偸。此古人格言。學者何敢少怠。又曰。人言讀孟氏書則能文。吾意論語尤切。每月必讀過一遍。其自飭精密如此。且未嘗分力於擧子業。而才高亦能擢戊寅秋鄕貢三科。皆居第一。翌年春。中司馬第二。赴會試。入就講席也。擧止雍容。應對詳敏。講畢。諸公皆曰。今日得玉堂正字。可賀。時趙靜菴。以憲長在座曰。觀其精彩。非屈於人下者。豈必以正字爲期乎。果魁大科。諸公皆曰。孝直知人矣。是時。公名已在賢良科薦中。而徑赴恒試。識者韙之。授典籍。遷殿中。拜弘文館修撰。公旣登第。方欲乞縣以便親養。而奄罹創鉅。未就本意。茹感沈痛。以之沒世。自嶺表奉柩。返葬金浦先壠。仍廬墓下。內盡其志。外盡其物。鄕人感其純孝。服闋。除侍講院司書。遷司諫院正言。又轉修撰。改吏曹佐郞。累遷至侍講院文學。歷兵曹正郞,司憲府持平,禮,吏二曹正郞,議政府檢詳。俄陞舍人。轉侍講院弼善。此後緣資級未滿。出入鳳閣,春坊者屢矣。是時。羣賢被禍之後。人諱性理之學。書筵進講。但循例塞責而已。適李文元公彦迪。淹滯芸閣。公在天曹。力薦除說書。自此。迭爲文學弼善。始以程朱諸書。竭誠啓迪。其爲賓師者。以世子幼沖。此非急務。兩公不沮。討論益力。仁廟聖質。雖曰出於天。而道德夙成。豈無所養而然歟。陞司僕寺副正。薦侍講院輔德。改司諫院司諫。以大司諫朴光榮連姻。辭遞爲通禮院相禮。轉軍資監副正。復授司諫。時朴洪鱗爲獻納。蔡無擇爲正言。皆金安老之黨也。安老屛黜在外。羣小方圖復用。邪議大興。擧朝結舌。公奮不顧身。力主沮遏。其黨怒而擠之。左遷司成尋加斥罷。李晦齋自密陽府使。代公爲司諫。公慮累及晦齋。再三來訪。而輒避不見。然竟亦不免。坐罷。公旣負士林重望。羣小尤忌之。遂出避南陽村舍。纔一年。携家復歸于陜川。絶意世事。專精讀書。雖屢空。晏然如也。甲午春。遘疾。秋八月二十一日。卒于正寢。易簀之時。靧面盥手。無異平日。春秋四十有二。國人聞而傷之。其友金公就成。哭之以詩曰。大業潛心地。圓融體用全。傷心觀化日。天不假之年。可謂知己之言也。其年十二月二十四日。葬于冶爐縣西華陽洞掛山南崗。與縣尹公同兆。公曁祖考。後以潘城推恩。贈爵有差。公姿稟旣異。而加之以學問。躬行自得。方寸瑩然。儀表閒雅。寬而有制。和而不流。事親有至孝之誠。兄弟篤友愛之情。處閨門得恩義之正。順理而行。沛然有裕。非如困學之士。積分累寸而成之者也。平生以大學,論語,程朱及西山衍義等書。爲進學階梯。深賾力探。亹亹不厭。充養旣厚。英華發外。望其容貌。接其辭氣。賢者服其心。不肖者薰其德。人謂聞明道之風而興起者也。嘗語學者曰。爲學之方。先收放心。涵養本源辨別義理。立其大者。則餘可馴致。聖賢之訓。一話一言。無非至敎循是以進。可以上達。其摛文。平易典雅。理勝字順。詩亦溫厚平淡。不尙華靡。嘗有詩曰。無心每到多忘了。着意還應不自然。緊慢合宜功必至。寔能除得妄中緣。公之爲學。操存精密。脚踏實地。已到自慊不欺之地矣。其罷歸南中。路吟一絶曰。名利前頭路幾千。却來江上有漁船。一心似水收吾內。萬事如雲只付天。其恬於榮辱。素位無怨者。亦可想矣。公早失嚴顔。長抱蓼莪之悲。每見衰麻者。必問親年幾何。嗚咽不已。事諸叔父。盡其愛敬。季叔母窮老寡居。繼供甘旨。雖居住隔遠。而仕罷必省。其折産也。一聽其伯姊處分。起居奉養。有若慈闈。二弟綰緝。襁褓而孤。撫養訓誨。恩義極盡。皆終有所成就。俸祿及明友餽問。必分遠近諸族。其睦姻周恤之篤。雖婦黨亦然。有故舊染疫。人不敢近者。投藥餌而濟之。隣里有喪。窮不能克葬者。與之棺槨。雖至愚至賤之人。待之必敬必誠。不敢少慢。至如肖翹微物。亦加矜憐焉。其爲吏郞。以李相繼孟賜諡官。赴湖南之錦城。州牧乃朴訥齋祥。於公先進也。凡祇迎公禮。不爲少讓。朴公初訝其年少挾氣。及使事旣畢。公卽晤語款洽。禮敬備至。朴公始服其雅量。見人非道。輒懇懇規切。許沆兄弟。於公爲戚屬。相與往來。契分素厚。及聞其過妹家而不入。峻責而絶之。許深銜之。排擯傾陷。無遺力焉。至使困頓跋躓。終於遐裔。材不爲世用。道不行於時。嗚呼痛哉。夫人洪氏。司贍寺正士俯之女。亦有貞淑之德。爲婦爲母。咸可法式。享年八十有五。後公四十四年而卒。葬于楊州豐壤縣南浦村里。別有墓表。生五男二女。長曰應川。癸卯。司馬。司宰監正。處心自然。實有規範。屢爲字牧。殊著聲績。娶司饔參奉金希呂之女。生六男二女。男曰東賢,東豪,東老,東俊,東民,東善。次曰應順。己卯。司馬。領敦寧府事。潘城府院君。醇謹孝友。世以長者稱之。娶宗室文川正壽甲之女。生一男。曰東彦。誕一女。卽當代坤殿。次曰應男。中癸丑制科。司憲府大司憲。含忠履潔。特立不撓。濟以學力。所造甚高。士林倚以國家柱石。不幸早卒。娶掌苑別坐尹和之女。生三男二女。男曰東壽,東烋,東點。正及潘城。後皆相繼而歿。次曰應福。中甲子制科。今爲承政院左承旨。仁厚篤實。不露圭角。而所守甚確。娶禁火別提林九齡之女。生四男一女。男曰東尹,東說,東望,東亮。次曰應寅。戊午。司馬。今授長湍府使。恪遵庭訓。踵美諸兄。人以是善之。娶昌樂察訪卞希訥之女。生三男四女。男曰東紀東績,東緯。女長適司䆃寺正李希伯。生五男二女。男曰大秋,大禾,大馨,大秀,大年。次適進士朴誠元。生一女。內外諸孫。百有餘人。門閥之盛。古未之有。咸能奉承家範。謙恭忠厚。不爲貴盛所移。朴氏之慶。蓋未艾也。嗚呼。仁者必有後天之報施。久而乃定。玆非其驗歟。銘曰。
逷矣神系。發源淵淵。世懋懿美。式亘式延。卓彼夫子。實惟其英。天球粹質。不琢而精。薰以賢師。醇于厥學。見道卽早。有大其識。根深末茂。器宇渾成。端莊高嶷。愷悌通明。志存匡濟。資仕乃揚。進試主司。奮藻摛章。名高題塔。文冠射策。更歷周行。休聞用赫。再直鑾坡。三入春坊。紬繹姬孔。贊述皇王。門下納誨。南臺摠綱。正色在列。松貞玉剛。希聖爲徒。致君意長。生之不辰。竟與釁俱。直道未展。嘉謨罔敷。還垂逸翮。處跌長途。介居窮鄕。藜菽不給。閉戶陳書。星霜屢易。蕭然塵表。浩浩其樂。困而不變。君子之强。宜報以壽。理又茫茫。蘭摧蕙秋。今也云亡。以正而屯。歿亦人思。以幸而福。生反人嗤。在公所獲。何必期頤。犖犖所蘊。履夔蹈契。孤標拔萃。百行無缺。不愧古人。可法來哲。傳之悠久。燦如日月。孰脩孰短。識者能別。矧天惠後。孔碩且蕃。簪組相承。忠孝是敦。故鍾淑聖。祥協星軒。貳政震極。基命無疆。蜀塗莘摯。允與竝昌。鬱乎其馨。韡乎其光。掛山丸丸。植松與柏。紀德薦辭。鏤玆貞石。
첫댓글 다음 사이트에서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를 운영하시는 인동인 장달수 선생님께 감사의 말을 또 남기니, 장 선생님이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암튼 우리 선조님들에 대한 기록들을 본인 카페에 많이 올리셔서, 보학/역사/인물 공부하는데에 큰 도움이 된다. 참고로, 장달수 선생님 선조님들과 소호문중과는 선대에 혼맥/학맥으로 얽혀있는 가까운 사이임.
역사나 보학을 공부하신분들은 정말 대단 하세요^^
주원일가도 포함이요^^ㅎㅎㅎ
@유정(구) 저는 뭐 솔직히 그저 그런것 같아요. 언제부턴가는 보학공부에 큰 진전도 없고, 사실 옛날에 좀 익혀서 알던 얄팍한 지식을 재탕-삼탕하는 식이랄까요.
우리 평범하다고 할 수 있는 보통 남자들 4촌형제를 카페의 회원들께 간단히 소개하자면, 치원 형님은 현 워싱톤 디시 지역 메릴랜드 주 사랑의 침례교회 담목으로, 메릴랜드 지역 쉐마교육원 학장직을 역임하고 있고, 워싱톤 지역 신대원에 강사로 자주 나가신다. 승원 형님은 서울지역의 중요 중견기업에서 오랜 세월 엔지니어로 성실하게 재직하고 있고, 필자는 프렌차이즈 사업을 거쳐서 미국소재 법인회사의 구매부서 바이어/나중 부장직 승격 및 패밀리 비즈니스 VP (부사장) 경력 등을 지나 현재 신대원에 만학도로 재학중이며, 막내 석원 아우님은 한국의 굴지 모 대기업에서 오랜 세월 몸 담으며 모범사원으로 여태 열심히 살고 있다.
명종실록을 보면 휘 희백 할아버지에 관한 짧막한 언급이 하나 있는데, 그리 긍정적으로만은 보여지진 않는 대목이다. (어느 정도) 사실성도 있을 수 있으나, 한 편으론 당시의 정치상황을 잘 고려해서 읽어야 할 것이니, 16세기 중엽에도 당색에 찌든 조정내에서 반대파 인사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깎아내림이 벌어 지고 있던 터였다: http://sillok.history.go.kr/id/kma_10702014_002
1552년 희백 할아버지가 40세때, 문과급제후 벼슬살이 5년차에 접어들던 해에 5품 벼슬인 정언에 임명된 일을 기록한 실록의 대목: http://db.itkc.or.kr/inLink?DCI=ITKC_JT_M0_A07_02A_12A_00040_2005_007_XML
인물검색으로 찾아보는 이희백 할배: http://thesaurus.itkc.or.kr/search/view?dataId=2195
(글을 포스팅하고 테라스에 나가서 이리저리에 떨어져 뒹구는 낙엽들을 블로워로 불어서 말끔히 "뒷뜰" 정리를 했다 싶었는데...
우리 집 테라스 뒤를 끼고 올라와 있는 두 그루 큰 나무들에 열린 빨간 먹음직한 과일을 노리는 청설모 1:)
(큰 덩치의 도둑넘(?) 청설모 녀석(?) 2:)
청솔모가 정말 크네요^^
@유정(구) 청설모도 문제지만 토실토실 살찐 새떼들이 부대를 이뤄서 습격해 오지요.
언제 한국에 한번 오시려나^^서울화수회 송년회나 총회때 시간 맞춰 한번 온가족 모임 해 보셔요.^^
저희 아버님 살아 생전에 서울서 사실땐 숙부님과 같이 화수회 모임등에 참석하신 걸로 아는데, 핵가족인 저희 세대는 쉽지 않군요.
***알림: 옥에 티?, 위의 희백 할아버지 상세가계도에서 평도공 박은을 목은 할아버지의 "외조카"라고 하였으나, "생질"이 맞는 표현입니다. 곧 정정하도록 하지요. 양해를 구합니다.***
(어젯밤에 하얀 첫 눈이 살포시 내렸는데, 엄청 우량한 몸집의 새떼들이 우리 집 테라스에 습격해 나무과일 서리 테러를 저지르고 있네요 1:)
(나무과일 서리 테러 2:)
(나무과일 서리 테러 3:)
위에 언급된 명종실록의 기록보다 2년앞선 1550년의 또 다른 기록을 보면, 휘 희백 할아버지에 관한 기록이 한 건 더 보이는데, 이 또한 좋은 내용이 아니다; 당시 휘 희백 할배는 38세, 문과에 36세때에 급제하여 조정에서 벼슬살이한지 3년차 되던 해였다. 벼슬은 예문관 검열로, 비록 9품의 말직이긴 하였으나, 검열되기가 쉽지 않았고, 임금님을 가까이에서 항시 뵙는다는 차원에서 임금님의 비서(실장)격인 승지들과 함께 중요한 직책이였는데, 무능력하다고 탄원이 들어간 것임...
암튼, 이 문제의 탄핵과 체직이 있은 후 휘 희백 할아버지는 2년후에 5품 벼슬인 정언직에 올라 있었던 것임: http://db.itkc.or.kr/m/dir/view?gubun=book&itemId=JT&dataId=ITKC_JT_M0_A05_12A_22A_00010&solrQ=query%E2%80%A0%EC%9D%B4%ED%9D%AC%EB%B0%B1$solr_sortField%E2%80%A0%EA%B7%B8%EB%A3%B9%EC%A0%95%EB%A0%AC_s
한 가지 지적하고 넘어갈 사실은 여기서 휘 희백 할아버지와 같이 탄핵을 받은 남궁희는 휘 희백 할아버지의 4남되는 찰방공 휘 대형, 즉 필자의 14대조의 처갓댁 어른으로, 휘 대형 찰방공 할아버지의 장인되는 남궁혜의 당숙되는 분이셨다. 즉, 부사공의 바깥사돈의 당숙. 휘 대형 할배가 전북 익산 지역 토성인 함열남궁씨 집안에 장가든 것은 이 탄핵이 있은지 10여년후에 이뤄졌었을 것으로 유추됨. 당시 휘 대형 할배 집안이나 함열남궁씨나 한양에서 벼슬살이하며 살고 있던 터였다.
휘 희백 부사공의 여러 뛰어난 증손자들 중에서도 아마 세상에 그 이름이 제일 많이 알려졌던, 2대 명재상 호암공파 파조 충간공 휘 기조 선조님을 기린 만사 하나: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337A_0270_010_0260_2017_005_XML
반남박씨 족보(대종회) 사이트에 의하면, "반남박씨 문강공 야천 박소 가문은 문과급제자 197건명을 비롯하여 당상관 35명, 종2품 35명, 정2품 18명, 대제학 2명, 상신 6명 등을 배출 하였습니다. 이것은 1위인 안동김씨 약136명에 이어 2위의 기록이며, 3위인 달성서씨 약105명 보다 많은 숫자입니다. 이정도 되니 안동김씨 김생해 가문과 함께 반남박씨 좌의정 박세채의 高祖 문강공 야천 박소 가문은 조선조 후기 최대 벼슬 곳간이라 불릴만 합니다," 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