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행자명 | 仁川敎育大學校 初等敎育硏究所 |
학술지명 | 敎育論叢 |
ISSN | 1229-392X |
권 | 18 |
호 | 1 |
출판일 | 2000. 2. 25. |
2-640-0101-03
유구한 문화민족은 그 민족전통의 사상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반만년 문화민족임을 자랑하고 있다. 우리의 역사를 크게 보아 4,000년으로 볼 때 문헌기록이 불확실하고 실증적으로 역사적 사상기록이 뒷받침하기 힘든 전반 2,000년의 상고시대와 문헌기록이 비교적 확실시되는 후반 2,000년의 역사로 나누어진다면 외래사상(유, 불, 도)의 유입사는 지금으로부터 1,600년전의 것으로 되어 있어 4,000년의 문화전통의 바탕 위에 1,600년의 외래문화란 결국 고유전통사상이 완숙된 이후에 덧붙여 흘러오고 있던 것이 외래사상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우리의 전통사상의 정맥을 찾기 위해서는 외래사상이 흘러 들어오기 이전 즉 고유사상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고유사상인 「한」 사상이다.
우리의 고유사상인 「한」 사상은 외래사상(유, 불, 선)에 밀려 그 모습을 내지 못한점도 있었으나 그 사상은 면면히 이어 오고 있으니 삼국시대에는 화랑도정신으로, 고려시대에는 묘청사상으로, 조선시대에는 동학사상과 삼일정신으로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혹자들은 우리의 전통사상을 유교, 불교, 도교에서 찾으려고 하고있는데 그것은 외국에서 온 어머니지 우리의 어머니가 아닌 것과 같다.
본 연구에서는 우리의 고유사상인 「한」 사상에서 연원을 밝히고 한사상이 우리 민족사상에 어떻게 이어왔는가를 알아보고자 하였다
It is said that a long historical cultural nation has had its own national tradition, like the spirit of Chinese In 「仁」 or Do「道」, the spirit of Indians Jabisim [merciful heart], Japanese Shintoism, and Israeli Sionism.
We Koreans are also called a traditional cultural nation by Koreans and various people over the world. Koreans also has a strong long thought in our traditional culture from long ago.
We are proud of our half million long cultural nation. They say Korea has 4000 year long history. We can divide this period by two, the former 2000 years when its historical record is not so correct, and the latter 2000 years when the record is somewhat correct compared to the former period. Foreign thoughts like Yu[儒], Bool [佛] and Do[道] are introduced about 1600 years long foreign thoughts can be said to be introduced upon our concrete traditional thoughts of 4000 year long.
That is the reason why I maintain that we have to seek our traditional thoughts in the period that the foreign thoughts began to be introduced into Korea. And thus the former thoughts is the very thoughts of Han [한].
Our Han thoughts has been called by various names like Hongik[弘益], Gwanfmyong[光明], Poongyou[風流], Gumtap[金塔], Gumchok[金尺] according to the dynasties. Even if it has different names, it meant the same contents connecting its main ideas from period to period.
Our traditional thoughts, Han thoughts, was one time couldn't show itself under the foreign thoughts Yu, Bool, Seon[儒, 佛, 仙], but its main thoughts has been flowing connected dynasty by dynasty, by various names like Hwarangdo spirit, Myochong thoughts, Donghak thoughts, and Samil spirit. Without thinking of this situation, some scholars are trying to seek our traditional from Confusianism, Budism, and Doism. But I think it is not our true 'mother'.
유구한 문화민족은 그 민족전통의 사상이 있기 마련이다. 중국의 「인(仁)」 이나「도(道)」 의 정신과 인도의 「자비심」 과 일본의 신도니즘(shintoism), 이스라엘의 시온이즘(sionism)등이 바로 이것이다. 우리 한민족도 그 예외는 아니어서 자칭 혹은 타칭 전통있는 문화민족이라 일컬어지고 있다. 그런데 전통있는 민족문화 속에는 정통성을 간직한 강한 사상의 맥이 흐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언필칭 반만년문화민족임을 자랑하고 있다. 우리의 역사를 크게 보아 4,000년으로 볼 때 문헌기록이 불확실하고 실증적으로 역사적 사상기록이 뒷받침하기 힘든 전반 2,000년의 상고시대와 문헌기록이 비교적 확실시되는 후반 2,000년의 역사로 나누어진다면 외래사상(유, 불, 도)의 유입사는 지금으로부터 1,600년전의 것으로 되어있어 4,000년의 문화전통의 바탕 위에 1,600년의 외래문화란 결국 고유전통사상이 완숙된 이후에 덧붙여 흘러오고 있던 것이 외래사상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우리의 전통사상의 정맥을 찾기 위해서는 외래사상이 흘러 들어오기 이전 즉 고유사상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고유사상인 「한」 사상이다. 우리의 「한」 사상은 시대와 사람에 따라 다른 말로 표현을 달리하기도 하였으니, 즉 고대에는 「흥익」 이나 「광명」 으로 신라에서는 「풍류」 , 고려에서는 「금탑」 , 조선시대는 「금척」으로 표현을 달리하기도 했으나 내용상으로는 똑같은 의미로 계통적 맥을 이어왔다. (최민층, 「한」 철학, 1984:32)
우리의 고유사상인 「한」 사상은 외래사상(유, 불, 선)에 밀려 그 모습을 내지 못한 점도 있었으나 그 사상은 면면히 이어 오고 있으니 삼국시대에는 화랑도정신으로, 고려시대에는 묘청사상으로, 조선시대에는 동학사상과 삼일정신으로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혹자들은 우리의 전통사상을 유교, 불교, 도교에서 찾으려고 하고 있는데 그것은 외국에서 온 어머니지 우리의 어머니가 아닌 것과 같다. 본 연구에서는 우리의 고유사상인 「한」 사상에서 연원을 밝히고 한사상이 우리 민족사상에 어떻게 이어왔는가를 알아보고자 하였다.
오늘날 지구상에는 많은 민족과 다양한 이종이 흩어져 살고 있으며 이들은 제각기 고유한 문화와 독특한 생활방식을 가지고 있다. 이 중에서 우리 한민족이 보여주는 인종적 문화적 특징들도 다른 민족의 경우처럼 개성있게 잘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특징은 오랜 세월에 걸쳐 이루어진 환경적 요소와 역사적 바탕 위에서 형성된 것들이다.
인종과 민족의 의미는 서로 다른데 인종은 생물학적 개념이고 민족은 문화적 개념이다. 따라서 인종의 범주에 여러 종족과 민족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민족은 공통의 언어, 문화, 혈연의 집단으로 이루어지는 운명공동체로서 대부분의 경우 같은 지역 내에서 생활하고 있다.
현대 인종의 기원이 되는 현생인류를 생물학적으로 분류한 세계 3대 인종군 중에서 한민족은 황색 인종군으로 지역적으로 시베리아, 몽고, 중국대륙, 동남아 그리고 동북 아세아지역은 주로 분포되어 있다. 그 중에서 시베리아 지역에 살고 있던 황색인종의 일부가 2만 5천년 전에 베링해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해 갔는데 이인종이 바로 지금의 아메리카 인디언이다. 북미의 "오리건주에서 발굴된 짚신 75켤레는 동이족의 짚신과 흡사하였는데 이는 약 9,000년 전의 것이라 한다. " 한편 이주 도중 알래스카 지역에 쳐저 극심하게 추운 지역의 생활에 적응하게 된 황색 인종이 바로 에스키모 인종이다.
황색인종이 이러한 지역에 나타나거나 퍼져 살게된 시기는 인종의 진화단계에서 오늘날의 우리와 같은 현생인류가 나타난 이후인 3만 5천년 전으로 보고 있다. 황색인종을 몽고인종(Mongoloids)이라고도 부르는데 여기에는 古시베리아인종, 북몽고인종, 중앙몽고인종(중국화북지역), 남몽고인종(중국화남지역), 인도네시아 인종,에스키모인종, 아메리칸인디언 등이 포함된다.
특히 한민족은 몽고인종 중에서도 북몽고인종에 속하는데 이 북몽고인종은 통구스족, 만주족, 투르크족, 고아시아족, 한족, 몽고족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몽고인종 중에서도 주류를 이루는 인종이다. 따라서 한민족의 인종적 뿌리는 북방계 몽고인종에 관련되어 있다.
그러면 이 땅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때는 언제부터이며 이들이 남겨 놓은 문화의 흔적은 무엇인가, 그리고 오늘날 한국민족의 직접적인 조상은 누구인가, 이러한 의문들은 한국민족의 뿌리를 근원적으로 파악해 나가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질문들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 이 땅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때는 언제부터이며 이들이 남겨 놓은 문화의 흔적은 무엇인가, 그리고 오늘날 한국민족의 직접적인 조상은 누구인가, 이러한 의문들은 한국민족의 뿌리를 근원적으로 파악해 나가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질문들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는 약 3만년 전부터 구석기시대의 사람들이 이 땅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근자의 러시아의 여류 민족학자 자리카시노바의 발표에 의하면 한반도의 구석기시대에 벌써 사람이 살았고 신석기시대에는 일찍이 한민족의 문화의 독창성을 발전시켰다고 말하고 있다. 유럽문화의 발생지인 슈메르(Sumer)문화는 B.C 3,500-4,000년에 지중해 연안의 메소포타미아와 티그리스강의 유역에서 발전하였는데 1897년 영국인 Kremer씨는 슈베르(Sumer)인은 동방에서 왔다는 설을 재확인하는 Daglas(다그라스)씨의 주장에 긍정이 간다. (문정창, 1974:54) 슈메르의 제 1 왕조를 건설한 "엘린영웅(英雄)"이 소호국인(少昊國) 이라는 것은 문정창 선생의 주장이다. 엘린영웅(英雄)의 비문에는 왕위가 하늘에서 내려온 후에 승화된 교권과 왕권이 하늘나라에서 부여된 후에 인간은 예식과 신성한 규범을 완수했도다. 승화된 교권과 왕권이 하늘나라에서 부여된 후에라고 했으니 문화 치화의 권한을 하늘나라(환국:垣國)에서 부여받았다는 것이다. 환웅은 교권과 치권의 신표인 천부삼인을 환국에서 받아가지고 태백산정에 하강했다. 그런데 원동중의 「삼성기下」 와 권덕규의 「조선사」 에도 환인이 다스리던 단국이 있는데 남북이 5만리요, 동서는 2만리라 그 환국은 12분국이 있는데 총칭하여 환국이라 한다고 되어 있는데 그 12분국 중에는 수밀이(須密爾)국과 우루(虞婁)국이 있다. "엘린英雄"(슈메르)이나 환웅(배달)이 각기 환국에서 본국으로 갈려나간 연대(B.C 3,500~4,000)는 거의 동시대일 것이다. 여기서 세계 최초의 문명족으로 알려진 백인학설에 의한 슈메르(Sumer)의 원초지는 "석유환국(昔有桓國)"에서 나왔음을 알 수 있다. (송호수,백산학보27, 1983 : 137)
우리나라에서 구석기시대 유적이 발견되기 시작한 것은 1962년 이후부터인데 남북한 여러군데에서 발견되고 있다. 1963년 두만강 강구 남안인 함북 웅기 굴포리 패총에서 후기 구석기시대의 유물인 외날집게, 쌍날집게 등이 발견되었다. 또 평남 동남방평남 ·상원군 흑우리 동굴에서는 큰곰(Brown bear), 동굴곰(Cave bear), 하이에나, 말,원숭이, 수우(水牛) 등이 발견되어 북방원인과 같이 전기 구석기시대에 인류서식굴이었음을 알게 한다고 한다. 그리고 평남 동남쪽 양원군 양원읍에서는 지금부터 30~40만년 전의 것으로 보이는 문화층이 발견되었으며 남한에서도 1964년 11월 이래 충남공주의 석장리에서 구석기포함층이 발굴되었으며 1973년에는 제주도 어음리 빌레못굴에서 큰곰, 적록(赤鹿), 노루의 화석골과 함께 인공박편과 골제스크레이퍼가 발견되었으며 그 밖에도 서울의 면목동 등에서도 구석기유물이 발굴되었다 그런데 석장리에서 나온 숯을 방사성탄소년대 측정법에 의해 측정해 본 결과 지금부터 3만년 전의 것으로 판명 되었다는 것이다.
그 후 B.C 5,000~4,000년경에 櫛文土器人(즐문토기인 : 빗살무늬인)이 나타나 한국의 신석기문화를 이주게 되었다. 우리나라에 신석기유적에서 가장 오랜 방사성탄소년대가 나온 것은 서울 강남구 암사동에서의 B.C 4,280, 4,100년이고 부산 동산동 총패의 것은 B.C3,940년이다. 이것은 중국의 앙소문화의 연대 B.C 4115, 3955, 3890, 3535등과 비교할 수 있는 연대층을 이루고 있어 흥미롭다. 우리나라도 중국 황하유역에서와 비슷한 시기에(B.C 4000년대) 신석기주민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으로 보여진다. 즐문토기문화는 대단히 넓은 지역에 분포되어 있어서 만주 남부, 한국의 동, 서,남쪽 해안지역과 강변에서 발견되고 시베리아를 걸쳐 북유럽에서까지 연결되고 있다고 한다.
한국의 고고학자들은 이 즐문토기문화를 담당한 주민들은 대체로 당시 시베리아일대에 퍼져있던 선주민인 古아시아족의 일파가 들어온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古아시아족은 현재 동북 시베리아와 예니세이 중 ·하류에 잔존하고 있으며 전자는Chukchi Kamchandal, Karyak, Yukagir, Gilyak 족이 해당되고, 후자는 Ket 족이 소속되는데 이들은 일찍이 시베리아 쪽으로 진출한 古백색인종과 황색인종이 흔혈해서 생긴 인종이라고 한다. 즐문토기인은 후에 나타난 무문토기인보다 수가 많지는 않았던 듯 하다.
그러다가 B.C 15세기를 전후해서 새로운 농경문화를 가진 무문토기인들이 나타나 앞에 들어와 있던 즐문토기인들을 정복하고 동화시키거나 내쫓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 무문토기인들이 계속 남아서 B.C 10~7세기에 들어온 청동문화인와 철기문화까지를 발전시켜 오늘날까지 한국문화의 담당자가 되게 했다고 한다.
즐문토기와 무문토기를 담당한 주민의 성격에 대하여 일찍이 상고의 예(濊)와 맥(貊)을 결합시켜 「예」 가 즐문토기, 「맥」 이 무문토기인이라고 주장한 사람이 있는 가하면 즐문토기를 古아시아족과 결부시키고 무문토기를 예맥족의 문화적 유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위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오늘날은 즐문토기의 주인공들이 古아시아족이었다고 보는 것이 공통적인 견해인 것같다.
이제 고조선이 언제 시작되어서 언제 끝나는 것인지에 대한 자세한 편년은 알 수없는 일이지만 중국측 문헌에서 동이라고 하는 종족이 고고학상의 무문토기인을 지칭하는 것이라면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는 일이다. 여기서 우리는 좀 더 자세하게 즐문토기인과 무문토기인의 생활상을 알 수 없는 것이 유감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연구된 것을 종합해서 고고학적인 자료에 국한해서 말한다면 즐문토기는 이미 언급한 대로 한반도뿐만 아니라 시베리아 핀란드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퍼져 있는 것이 특징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즐문토기는 주로 해안이나 강변에서 발견되고 있는 데 반하여 무문토기는 주로 구릉지대에서 발견되고 있다.
위에서 우리는 고조선사회를 일단 무문토기시대로 추정해 보았다. 이 무문토기인들은 중국측 문헌에서는 「동이족」 (東夷族)이라고 부른 바로 그 민족이며 더욱 구체적으로는 예맥족이었다고 보는 견해에 공감이 간다.
이와 같이 보면 한민족의 민족구성은 직접적으로는 무문토기인들이 직계조상으로 보이지만 간접적으로는 古아시아족의 즐문토기인들도 조상이 될 수 있으니 그것은 고구려의 어휘 가운데 길랴크어와 상통되는 면이 많이 있고 단군신화의 곰이 그들의 문화를 반영하는 것이라 보이기 때문이다.
한민족의 주체성이 정립되려면 그에 앞서 한국사상의 주체성 독자성이 인지되어야 한다. 그러나 막상 한국사상이 무엇이냐 한국전통사상은 어느 정도 독자적이고 어느정도 모방적인 것이냐 또 한국전통사상의 본질과 내용이 무엇이냐 하는 등의 문제에 접하면 학자들마다 한민족의 주체성을 정립되기가 어렵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한국전통사상의 내용과 범위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사고경향이 재검토되어야 한다.
첫째, 한국의 고유사상은 너무나 원시적 신앙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굳이 사상이라고 할 것이 없다. 때문에 한국전통사상은 예외없이 외래종교사상이며 독자성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둘째, 한국전통사상의 중핵을 이루는 것은 유교사상이며, 우리가 앞으로 계승발전할 전통문화는 유교 성리학과 실학사상에서 찾아야 한다는 견해이다.
셋째, 한국전통사상은 유 ·불 ·선의 삼교를 주축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독교사상은 이에 포함시킬 수 없다는 견해이다.
넷째, 한국전통사상은 전통적 농업사회에서 형성되고 유지한 것이기 때문에 현대산업사회나 미래의 과학기술사회에도 적합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한국전통사상에 대한 이러한 견해들은 그 나름의 근거가 있는 것도 같으나 전통사상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주체적 한국사상을 발전시키는 데 지장이 있으므로 이러한 통속개념부터 시정해 나가야 할 것 같다. 어느 민족의 전통사상을 말할 때 자체의 창의적인 능력과 외래사상에 대한 섭취능력의 두 측면이 발전적 요소로 평가된다. 그리고 특히 두 측면의 조화가 강조되는바 창의성이 약하여 고도의 외래사상에 휘말려 버리면 민족의 사상적 주체성이 상실될것이고 반면에 옳게 섭취할 수 있는 수용성이 약하면 폐쇄적이 되어 침체성을 면할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론에 비추어 볼 때 우리민족의 고유사상은 높이 평가될 수 있다고 판단된다. 우리민족과 한족과는 육지로나 바다로 서로 인접하여 있어 세력 다툼으로 많은 우여곡절은 있었으나 그래도 민족의 고유한 전통사상만은 의연하게 유지 발전되었으니 이는 선인들의 높은 창의성과 외래사상을 슬기롭게 진취적으로 수용 섭취한 덕택이라고 하겠다.
한민족의 고유종교사상은 너무 원시적이며 설화적이기 때문에 한국의 전통사상에 포함시킬 수가 없다는 견해가 있다.
고유정교사상이라고 하면 원시적인 무속신앙(shamanism)과 단군신선사상이라 이에 관한 문헌자료가 희소하고 그 자체로서 논리체계를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에 사상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두가지 반론을 볼 수가 있다.
첫째, 단군신앙의 입장에서 볼 때 단군사상의 문헌은 없는 것이 아니다. 「천제환국구전지서」 (天帝恒國口傳之書)라고 하는 「천부경」 (天符經)(조화경)이 있고 천제한국의 가르침을 전하는 「삼일신고」 (三一神誥)(교화경)이 있고 또 신시시대부터 구전되어 내려왔다고 「참전경」 (參佺經)(치화경)이 있다. 그 외에 「단군고사」 「환단고기」 와 중국에는 「역대신선도감」 과 같은 문헌이 있다. 이러한 민족의 고유신앙과 사상에는 관심조차 갖지 않고 문헌자료가 너무 적다는 이유로 학문연구의 대상에서 제외하여왔다. 이처럼 무엇이나 외국인이 기록한 것이라야 진서가 되고 우리나라의 문헌기록은 위서라고 무시하는 것은 문화적 사대주의라고 할 수 있다.
둘째, 단군신선사상이 매우 엉성한 신화적 사상형태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사상으로 성립할 수가 없다. 는 주장이다. 그것이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그러한 사고의 원형을 토대로 얼마든지 한국사상을 발전시킬 수 있는 이점이 있는 것이 아니냐 하는 주장도 나올 수가 있다.
신라말기 고운 최치원은 "국유현묘지도(國有玄妙之道)하니 포함삼교(包合三敎)하며….. 접화군생(接化群生)하다 집에 들어가서는 효도하고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공자의 가르침과 같고 허무(虛無) 일삼고 행하되 말하지 아니함은 도교와 같고 제악(諸惡)을 봉행(奉行)함은 석가의 가르침과 같다"라고 쓰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풍류도는 어떤 사람은 ?도(道)와 결부시키고 어떤 사람은 화랑도, 국선도와 결부시키고 있다.
단군이 지었다는 「천부경」 은 81자로 된 오묘한 교리철학으로서 우주의 생성과 발전의 원리가 그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의 한말 한말이 심오한 내용을 함축하기 때문에 그 뜻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매우 드물다. 그러나 여러 학자들은 그 속에 유교의 주역사상과 불교철학사상 도가사상 등의 최고 정수가 함축되어 있다고 보고 있다.
「삼일신화」 에 의하면 창조의 신 환웅은 인류 ·오족을 낳고 오족를 펴셨다는 것이다. 그의 아들 환웅을 가히 홍익인간 할 수 있는 고지로 보내어 인류를 교화했다. 그렇다면 세계의 어떤 민족도 어떤 종교신앙도 남의 것이 아니라는 논리가 성립된다. 이처럼 한민족의 원시종교와 사상이 처음부터 세계적 성격을 가지고 출발하였다고 볼 수 있다. 세계의 종교사상이 빠짐없이 한국으로 들어오고 또 한국인이 오대주 ·육대양으로 뻗어 나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하였다.
중국문화의 원형을 만든 은나라의 헌법사상이라고 할 「홍범구주」 (洪範九疇)도 동이(東夷) 사람들의 노작이 단군사상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보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종교와 유교사상도 본래 동이족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것이 중국대륙에서 검토되고 발전하고 체계화되어서 한반도에 역수입되었다고 믿고 있다.
불교도 인도에서 발생하고 유포되기 전에 불교사상의 중심지가 한반도였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도 나와 있다.
이러한 주장들이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 것인지 현재로서는 정확히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앞으로 학문연구를 통하여 증명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다만, 한민족의 고유신앙과 사상이 없다는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삼국시대 이후에 들어온 유(儒) ·불(佛) ·선(仙) 삼교와 17세기부터 흘러 들어온 기독교가 외래종교신앙과 사상임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이것이 외래사상일뿐 한국사상이 아니라고 볼 때 여기서 다음 두 가지 태도가 나오게 된다.
첫째, 모든 외래문화의 영향력을 배격하려는 국수주의적 태도이다.
둘째, 한민족은 오랜 역사를 통하여 주체성 없이 강대국의 영향을 받아 그때 그때 종교와 사고형태를 바꾸어온 약소민족이라는 자비(自卑)의식과 사대주의 사상이다. 유 ·불 ·선 · 기독교의 4종교가 한민족의 사상과 행동에 영향을 주어있다면 그것은 한국사상이지 다른 나라의 사상이 아니다. 타인 만든 옷이나 차도 내가 입고 타고 다니면 그것은 나의 옷이고 나의 차이지 남의 것이 아닌 것과 같은 것이나 한민족이 외래종교와 사상을 쉽게 받아들이고 깊이 심취하게 되었다면 그 신앙과 사상이 한민족의 심성이나 사고형태와 부합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우리 한민족에게는 「한」 사상이라는 크고 넓은 사상이 있었기에 받아들여서 배타하지 않고 받아들였다고 볼 수 있다
「한」 사상은 대체로 외래사상이 들어오기 전에 한민족들이 가지고 있던 철학사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최문흥 박사는 「한」 이라고 하는 말은 한국 고유사상에 있어서 깊은 철학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한」 이라고 하는 말은 「크다, 넓다, 우두머리, 전체적 하나」 라는 뜻을 가지고있다. 「한」이 공식으로 우리것으로 표방되어지기 시작한 것은 철기시대부터라는 것이다. 김경학은 구석기시대의 " "신은 환인, 신석기시대의 "
"신은 환웅, 그리고 청동기시대의 "
"신은 환검으로, 구석기시대에는 후음(O,
,ㅎ)이, 신석기시대에는 설음과 치음(ㅅ,ㅈ,ㅊ,ㄷ,ㅌ)이, 그리고 청동기시대에는 순음(ㅂ, ㅍ,ㅁ)이 각각 되어지기 시작했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신라말, 고려초에 비로소 "
"의 3신이 한데 묶여 "한
님"으로 되어 조선시대에 와서 "하
님"이 되었는데 현재의 하나님 개념과 같다고 했다.
「한」 이 문헌에 책어지기 시작한 제일 처음은 기원 후 10세기 초엽에 만들어진「구당열전」 (舊唐列傳), 「고구려조」 (高句麗條)에 의하면 고구려 사람들이 신앙에 다음과 같이 말한 기록이 있다.
그 나라 풍속에 음사가 많다. 영성(靈星)신, 일(日)신, 월(月)신, 가한(可汗)신, 기(箕)신을 섬긴다고 하였다. 이 가운데서 「가한신」 은 고구려왕국을 세운 임금을 신으로 모시고 제사를 드린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가한」 은 물어(勿語) 몽고말 Khan을 한자로 적은 것인데 이 말은 같은 Ural Altai어인 우리 궁대(宮代)어에도 있었다. 즉 Khan은 Kan 또는han으로 변하여 왔는데, 신라에서는 Kan을 간한(간(干邯) 등으로 옮겨썼고, 또 kan을 한자로써 韓,漢, 翰 등으로 옮겨썼다.
이런 의미로 보아 여기서 「가한신」 이라고 한 것은 고구려의 시조인 태양신을 두고 한 말이다.
단군교의 단군철학석의」 (檀君哲學釋義)에 의하면 우주 삼라만상의 근본적 실재를「一」이라고 했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한」을 의미하는 것이다. 「一」은 순환하여 그치지 않는다. 이같은 「一」은 가장 크고 가장 미세하여 그것은 바깥도 안도 없으며, 앞도 뒤도 없는 것으로 모든 만물의 근본적 존재가 된다. 「한」 의 어원을 찾아보면 「한」 은 단순한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고, 우리 한국인의 실존(Korean Existence)이요, 생물학적인 본능에서우러나온 말임을 발견하게 된다.
한글학회 지은 「큰사전」에 보면
·한(옛)환
간(刊)의 원말
한(汗)돌궐, 몽고족속들의 “임금”을 일컫는 말
·한(韓)姓의 하나
대한민국의준말, (역)대한제국의 준말
·한(인)하나의 뜻(옛말 ·), “대략”의 뜻으로 수를 말할 때에 쓰는 말
·한(언)(옛)많은, 뭇, 모든, 여러
한부처 = 多佛
한 행이 무상이라 = 諸行無常
한 걱이 무두어 = 統衆德而
·한(머리)명사 위에 붙어서 “큼”의 뜻을 나타내는 말(한길, 한물), 명사 위에 붙어서 “바른”의 뜻을 나타냄(한낮, 한복판)
또한「한」 개념은 안호상 박사는 어휘로 22개나 지적하고 있다.
①크다(大), ②동이다(東), ③밝다(明, 鮮), ④하나다(單一, 唯一), ⑤통일하다(統一),⑥꾼, 못(大衆), ⑦오래(久) 참음, ⑧일체, 전체, ⑨처음(始初), ⑩한나라, 한겨레(韓民族), ⑪희다(白), ⑫바르다(正), ⑬높다(高), ⑭같다(同), ⑮많다(多),16) 하늘(天), 17)길다(長), 18)으뜸이다(天), 19)위다(上),20) 임금(王), 21)온전하다(全), 22)포용하다(包容)
주시경은 국어문전문학의 서문에서 한없이 넓고 넓은 우주 안에 「一」 이 있다고 했다.
「一」 이란 큰 하나의 「한」 을 의미한다. 주시경은 언어의 법칙도 자기운동을 하는 「一」 의 필연적 법칙으로 보았으니, 발생도 소멸도 없이 처음도 끝도 없는 자기운동을 하는 「一」 , 즉 「한」 을 말하는 것이다. 주시경의 이같은 사상은 「언문」 이란 이름 대신 「한글」 로 고쳐쓰게 되었다.
이윤재는 「한글」 이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하여 한글의 「한」 을 우리의 고대민족의 이름인 환족이나 환국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一」 의 기원을 크다(大) "하나"라고 말하고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한글은 「한」이란 겨레의 글이란 뜻입니다. 한글은 주시경 선생이 "한글배곧"이란것을 세우니 「조선의 강습소」 란 말입니다. 그 뒤로 조선 글을 「한글」 이라 일컬어 옵니다. "
「한」 의 어원을 좀더 집중적으로 연구하며 체계화한 분은 육당 최남선으로서 그의 「불함문화론」 不咸文化論)을 손꼽을 수 있다. 육당은 "푸른 하늘"을 의미하는"Tengri"에서 출발하여 사상 혹은 불함 ·문화론을 전개하고 있다. "
"은 몽고어의"Tengri"에서 유래된 것으로서 "밝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육당은 동북아 일대의 산천이름, 사람이름 등에 "白"(
)자가 들어가는 말이 많다고 했다. 백두산, 태백산, 소백산, 백운대 등 수많은 산천이름이 유달리 백(白)자를 넣은 글자로 구성되어져 있다고했다. 우리의 단군도 원래는 "당굴" 혹은 "당굴애"로서 Tengri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고, Tengri는 동북아 일대에 퍼져 있는 보편적인 종교 개넘임을 입증했던 것이다. 이
사상은 "하늘"과 "태야"과 "신"은 하나로 보는 사상으로,
이 후대에 와서는
(桓,韓) 혹은
(大, 夷)으로, 그리고 한자로는 맥(貊), 발(發), 미리(未里) 다시 와전되어 향(香), 방(方), 부여(扶餘) 등으로 변했다고 했다.
이선근 박사도 우리 민족은 태어나던 그 옛날부터 「한겨레」로 자임하고 나라 이름도 「한」 으로 불러온 적이 많았다. 민족의 시조인 단군의 「姓」 을 「桓垣」 혹은 「韓」이라 했다던가 단군성조의 후예를 「한왕」 혹인 「한씨」 라고 기록했다던가 고대 삼한의 세 나라 이름에 「한」 을 붙여 「삼한」 이라고 불렀다던가 오늘 현재의 우리나라 이름을 「대한」 이라고 제정한 연유들이 모두 이를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여기에 우리말 「한」 의 뜻을 따져보면 「한빛」 은 밝은 빛을 말함이요, 「한울」 의「한」 이나 「한밭」 의 「한」 은 매우 큰 것을 뜻하고, 「한낮」 의 「한」 이나 「한복판」의 「한」 은 「정오」 나 「정중앙」 을 말하고 「한더위」 는 「성하」 를 뜻함이니 이 정도만 가지고도 우리말 「한」 의 뜻이 「광명정대」 는 물론이요, 그 이사의 광범한 뜻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자명한 사실인 것이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은 역사적 유래를 가진 「한」 의 사상은 한국민족의 정신생활에 깊이 스며들었다고 본다. 우리 민족은 자고로 사람이 살아가는데 조그마한 자기 위주의 삶보다는 전체적인 대아를 위하여 사는 것을 큰 자랑으로 생각하였다. 이러한 삶에 뒷받침이 된 것이 「한」 의 정신이다. 이제 「한」 에 근거를 둔 민족사관의 소유자가 된 몇 가지 사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우리나라의 건국이념인 「흥익인간」 (弘益人間)은 인간행동의 가치기준을 틀 하나에 두었다. 즉 자기의 행동이 하나의 전체적인 커다란 하나에 직결되어 잇는 것을 이상적 생활로 보았다. 전체적인 커다란 하나를 위주로 하는 사상은 소승(小乘)을 버리고 대승(大乘)을 중심으로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사회나 국가생활에 소아(小我)를 2차적으로 보고 대아(大我)를 1차적으로 보았다. 고대한인들의 이러한 정신에 밑거름이 된 것이 이미 지적한 「흥익인간」 이다. 이 말은 <삼국유사>에 남을 널리 이롭게 하라‥‥ 는 뜻으로 나타나 있다. 따라서 여기에는 선타후아(先他後我)의 미적정신이 넘쳐 흐른다. 다른 사람을 널리 이익되게 하기 위하여 자유중심의 개인주의나 이기주의는 자연히 지양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한」 은 크다던가 전체적인 하나라는 뜻을 가지고 대립이나 분열성을 허용하지않으므로 통일성이나 조화성 혹은 변증법적인 지양성 등을 내포하고 있다.
통일이란 여러 가지 요소가 어떤 한 점에서 합치되어 커다른 하나의 전체에 속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낱말의 어원은 구별할 부분을 내포하지 않는 단일성이나 숫자로서의 일(一)을 가리키기도 하나 그러나 통일은 여러 가지 부분을 하나로 전제하면서 파악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그것은 항상 종합이나 전체성의 개념과 같은 성질을 지니고 있다. 만약에 서양 사람들이 분석적이고 실험적인 사유를 하는 것을 자랑으로 한다면 「한」 은 종합적이고 통일적 사유를 하는 것을 특색으로 한다 이런 점에서 통일사상은 「한」에 내재되어 있다.
통일은 개념과 해석이 각각 다르다.
독일철학자 Kant(칸트)는 통일은 통각으로 보았고, Bunt(분트)는 통일을 연합으로 보았다.
미국 캘리포니아 웨스턴 대학에 있는 J. Somerville(존. 서머빌) 교수는 그의 저서인 「현대의 철학과 정치」 라는 책에서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는 이데올로기의 상호이해를 통하서 두 개의 체제가 평화적 공존공영을 할 수 있는 통일점을 발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통일은 인식론 상으로 여러 가지 의견이나 또 사물이 대립과 대립을 이룩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 특색이다 그러므로 넓은 대화의 광장에서 백 가지의 의견이 나와도 그것이 전체적인 큰 하나에 귀결되면서 이론이 양립화가 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의 이론의 비합리성을 지양합일 시킬 수 있는 내적 권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내적 권위라 백출의 의견에 거슬리지 않는 타협과 같은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같은 타협에는 큰 하나에 깨끗이 돌아가는 고차적 정신이 있다. 같은 인간이라고 하여 생각하는 것과 듣는 것 등이 똑같을 수 없는 일이다. 특히 사람은 전통성 역사성 그리고 시대적 상황 등에 제약을 받고 살기 때문에 의견이 다른 것이 당연하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통일은 이같은 다른 의견을 대화를 통한 타협에서 큰 하나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통일사상은 배타와 독선을 용납하지 않는「한」 사상에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민족사를 통하여 통일성의 진리를 사상적으로 흘러간 사람은 원효(元曉)와 율곡(栗谷)두사람을 들 수 있다. 원효는 「십문화쟁론」 에서 "법이 오래되면 그 해석과 또 그것을 더하거나 삭제함에 따라 시비와 많은 논쟁이 생기게 된다. 즉 내가 옳다고 하면 다른 사람은 그르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종파와 분파가 나타난다. 유를 싫어하고 공을 좋아하는 것은 마치 개개의 나무를 버리고 깊은 숲을 찾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예컨데 푸른 빛과 남빛은 본체적으로 같은 것이다. 또 물과 얼음은 근본적인 의미에서는 별개적 물건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것들은 한 개의 거울이 여러 가지 물건들을 고루 다 비춰 주는 것과 같은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같은 원효의 통일사상은 「한」 의 사상에서 모든 개체와 전체의 속성으로 보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원효의 화쟁사상은 고려의 원융회통의 통일사상을 거처 율곡에게도 연결됨을 보게 된다
율곡이 우계에게 답한 글에 "이기(理氣)는 이미 이물(二物)도 아니고 또한 일물(一物)도 아니다. 일물이 아니므로 一이면서 二요, 이물이 아니므로 二이면서 一이다. 일물이 아니라 함은 무엇인가 理와 氣가 떨어질 수 없다 하더라도 묘합한 가운데 理는 理 자체가 있고 氣는 氣 자체가 있어서 서로 협잡할 수 없으므로 일물이 아니다. 이물이 아니라 함은 무엇인가. 理는 理 자체가 있고 氣는 氣 자체가 있다. 하더라도 혼논무간(渾論無間)해서 틈이 없고 전후도 없고 이합함이 없어 이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물이 아니다"라고 하여 「이기불상잡(理氣不相雜)」 「이통불상잡(理通不相雜)」 의 두 원리를 하나이면서 둘(一而二), 둘이면서 하나(二而一)의 논리로서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한」 사상은 자기 자체 안에 조화성을 가지고 있다. 다양한 입장에서 커다란 전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데서는 조화가 이루어지지만 조그마한 부분적인 단일적생각만 하고 있는데서는 조화가 형성되지 못한다. 「한」 사상은 전체적인 큰 하나의 입장에서 포괄성을 중심내용으로 한다.
조화란 서로 성질을 달리하는 두 개 이상의 요소가 큰 하나로 모여서 하나의 참이나 미의 꽃을 피우는 것이다. 자연이상이 우리에게 놀라운 경치를 나타내는 것은 단일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다양성에서 오는 것이다. 유럽에 있는 스위스의 자연경치는 꽃과 나무의 호수로서 만들어졌다. 즉 맑은 물, 높은 산, 큰 바위, 아름다운 꽃들이 한데 모여서 절경을 나타낸다.
이러한 조화는 자연현상에서만이 아니라 인간현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음악은 조화의 미에 대한 좋은 보기이다. 교향곡의 미는 실로 조화의 극치를 본다 수십명의 단원들이 각기 자기의 악기를 가지고 자기가 맡은 소리를 낸다. 높은 소리, 낮은 소리 굵은 소리, 가냘픈 소리, 이 소리들은 제각기 분산되는 것이 아니라 큰 하나로 조화된 소리를 낸다.
큰 글이라고 하는 우리의 한글도 조화의 문자이다. 정인지는 훈민정음 서문에서 한글의 형상은 옛 전(篆)자를 모방하고 소리는 7조(調)를 화합하였는데 삼극(三極)의 뜻과 이기(理氣)의 묘(妙)가 모두 포괄되어 있다고 했다. 이것은 「한」 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믿어진다.
이와 같은 조화사상은 단군조선의 개국정신에 구체화되고 있다. 흥익인간 정신은 경천 ·숭조 · 애인의 합일정신을 그 바탕에 깔고 있는 것으로 하늘의 뜻과 사람의 뜻이 하나이며 지상의 이면이 하늘의 이치와 교응 화합한 것을 의미한다. 단군은 천명을 받고 사람을 영접하여 함께 살았으며 하늘에 사는 신도 인간이 되기를 스스로 원하였다. 이것은 天人一和를 뜻하며 인간이 단순한 신의 피조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늘과 인간의 조화를 통하여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민족의 조화사상은 고운 최치원의 「난랑비서」 에도 잘 나타난다. 즉 "우리나라에 현모지도가 있는데 이것을 풍류라 한다. 그것을 설치한 연원이 이미 선사(仙史)에 자세히 적혀 있는데 진실로 삼교(三敎)를 포함하여 모든 이를 감화시킨다. 화랑들은 집에 가서 부모에 효도하고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하니 이것은 공자의 뜻이요, 무자(無子)에 대하여 악을 짓지않고 악을 짓지 않고 선을 봉행하니 이것은 석가의 교회이다. "라고 하여 한민족은 일찍이 유 ·불 · 선 삼교를 풍류도에 주체화시켜 선사(단군 개국신화)의 진리를 잘 받들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또한 화랑도는 문무겸비의 조화생활을 여러 곳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김대문의「화랑세기」 에 "현좌신충(賢佐忠臣)은 화랑도에 따라서 빼어났고 양장용졸(良漿勇卒)도 화랑도로 말미암아 생겼다"고 하였고 「임신서기석」 기록에서도 글과 무술의 조화를 통하여 상무적인 풍류도를 익히는 화랑의 수련방법을 밝히고 있다. 「임신년 6월14일에 두 사람이 같이 빌고 적으며 하늘에 맹세하노라. 지금부터 3년 이후 충도를 지키고 과실이 없기를 비노라. 만약 이 약속이 지켜지지 않을 때에는 하늘이 큰 벌을 내릴 것을 다짐한다. 또 만약 나라가 불안하고 난세가 되더라도 이 약속은 반드시 시,상서, 예기전 등을 차례로 배워 익힐 것을 맹세하되 3년안에 다 하기로 다짐한다. 」 라고 쓰고 있다. 이 두 화랑의 맹세는 묘합(妙合)과 접화군생(接花群生)의 화랑도 기본정신을 나타낸 것이다.
「한」 사상은 협동성을 내포하고 있다. 협동성은 남을 도와주고 또 남의 도움을 받으면서 사는 상부상조의 정신은 미덕이나 미풍의 산모가 된다. 「한」 사상은 이러한 존재체를 我卽汝(아즉여)이고 汝卽我(여즉아)라고 한다. 즉 「나이면 너이고, 너이면서나」 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적 배후에는 전체적인 큰 하나라고 하는 「한」 의 일이관지(一以貫之)의 정신 그 뒷받침을 하여 주고 있다.
우리 민족의 한결같은 생활개넘은 협동정신이다. 단일민족으로 성장하여 큰 우리겨레는 운명공동체로서 또 역사적 공동체로서 역경과 고난을 함께 극복하면서 강한 민족의식을 가지게 되었고 서로 돕고 사랑하는 상부상조의 정신이 뿌리박히게 되'었다.
한민족의 협동심은 우리의식 · 공동의식을 통하여 키워졌다. 우리집, 우리부모, 우리마을, 우리나라, 우리민족이란 말을 즐겨 썼다는 점에서 보아도 한민족은 전통적으로 대아(大我)를 잘 아는 민족이라는 것이 증명되고 있다. 한민족의 훌륭한 미풍으로 전해 내려오는 것으로는 「두레」 와 「품앗이」 「계(契)」 「향약」 등이 있다. 두레는 전 촌락의 모든 농민이 집단적으로 참가하여 협동적으로 경작에 참여하는 조직이었다면 품앗이는 형편 처지가 비슷한 가까운 사람끼리 모여 서로 노동을 제공하는 것으로 시기와 계절을 가리지 않고 모든 농가의 작업에 걸쳐 행해졌었다. 계는 같은 마을이나 문중, 같은 직업을 갖고 있거나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상부상조하면서 생활향상을 꾀했던 것이며, 향약은 덕업을 권장하고 잘못을 서로 바로 잡고 예속을 서로 나누며 재난을 서로 돕는 것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향약은 향촌의 교화, 향당, 상조, 생업의 안전을 목적으로 하는 민간규약으로 조선시대 500년 동안 널리 실시되었던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우리 역사상에 보면 936회의 국난을 당하면서도 민족의 순수성과 전통 그리고 고유의 문화를 상실하지 않고 확보할 수 있었던 힘이 한민족의 정신적 뿌리인 「한」에 있었던 것이다. 대외적인 침략이 있을 때에는 「한」 에서 파생된 협동심을 바탕으로 하여 호국정신과 독립정신을 아낌없이 발휘했고 대내적인 통합이 필요할 때에는 슬기롭게 혈연공동체인 협동심을 발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중국의 후한서에 보면 「동이(東夷)사람들은 말이 어질고 천성이 유순하여 인도가 자연히 확립되어 군자가 살고 있으니 없어지지 않는 나라이다. 」 라고 하였다.
「한」 사상은 항상 평화정신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 하나의 특색이다. 정신적인 화합은 평화와 내면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된다. 그러므로 화합이 있는 곳에 평화가 있고 또 평화가 있는 곳에 자연히 화합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화합이 없는 곳에는 참된 평화를 바라보기 어렵고 또 평화가 없는 곳에서 진정한 화합을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한」 사상은 진리에 대한 기준을 양쪽으로 나누어지는 직선에 두는 것이 아니라 둥근 원(圓)에 둔다. 이러한 원은 화합(和合), 전일(全一), 합일(合一) 등을 의미한다. 다른 말로 하늘, 땅 사람의 삼재합일(三才合一)로 보는 것이다. 원은 분열이나 대립 같은 것을 초월한 것이기 때문에 화합된 상태를 두고 하는 말이다. 따라서 여기에 불화나 싸움 같은 것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한」 은 평화사상을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한」 사상의 길은 사상적 뿌리를 가지고 있었기에 한민족은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평화를 애호하고 있다. 우리 역사상에 단 한번도 외침을 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중국 고대문헌인 「산해경」 에 의하면 '고대 한인들은 마치 군자와 같은 생활철학을 가지고 서로 다투지 않으면 산다'고 했다. 옛날에 한인들이 현재 중국의 하북성과 산동성 일대에서 중국사람들과 같이 살고있을 때 사충공돌(私衝公突)이 있었으나 평화심으로 무마하여 중국인들이 은근히 한인들의 평화정신에 감탄을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정신적 근본을 찾아보면 「한」에 그 뿌리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
한민족의 평화성은 태극기에서도 나타난다. 태극기의 흰바탕은 통일무잡(統一無籍)한 민족의 동질성과 결백성을 상징한 것이며 평화를 애호하는 정신이 한민족의 기질과 이상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고대 동부제독들의 백의를 숭상한 것은 공통된 문화적 특징이나 「위지동이족」 (難志東夷族)에 보면 '나라사람들이 횐 옷을 숭상해 입었다. 상중에는 남녀가 모두 순백으로 입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백색을 숭상하고 평화를 사랑한 것이 한민족의 특징임을 알 수 있다.
한민족의 민요 속에서도 알 수 있는데 노동요 중 모낼 때나 논매고 밭갈 때 농악과 함께 농부들이 부르던 노래는 태평세월을 구가하는 노래의 극치이다. "여봐라 농부야 만들어라 아니 농부야 말들어라 먼데 사람은 듣기도 좋고 가까운데 사람은 보기도 좋게 북장구 장단에 심어보라." 이처럼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은 인정미 넘치는 평화사상이 구체화된 민요는 영미민요의 무법자 영웅 싸움, 파괴, 살인 등의 투쟁적인 주제와도 그 성격을 달리한다.
한민족의 평화애호사상은 긴 역사를 통하여도 볼 수 있다. 고구려 영양왕 23년 수의30만 대군을 싸우면서 을지문덕은 다음과 같은 평화의 시를 적장 우중문에게 보냈다. 「신기한 책략은 하늘의 이치를 다했고 오묘한 계획은 땅의 이치를 다했소, 이제전쟁에서 그대 공이 높으니 족함을 알고 그만두기 바라오」 이처럼 침략군의 적장에게까지 「지족원지운」 (知足願止云)을 종용함으로서 전쟁을 끝내고 평화롭게 살기를 원했던 것이다.
「한」 사상에는 변증법적 지양성이 내재되어 있다. 분열과 대립이 허용되지 않는 것이 「한」 사상의 특색이다. 따라서 진리관이나 가치관에 관한 의견이 한없이 서로 대립될 수 없는 성질의 물건으로 본다. 모든 사람은 제각기 다른 개성을 가지고 있다. 즉 「갑」 과 「을」 이 제각기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으나 깊이 따지고 보면 거기에는 같은 점을 발견할 수 있는 것으로 본다. 마치 물과 얼음은 형태상 다른 것으로 보이지만 본체상으로 같은 것이니 다름이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론상 대립에 대립을 매개시키면 높은 차원의 하나로 발전을 시키려고 하는 것이 「한」 사상이다. 이것을「한」 철학에서는 부정일치(不定一致)라고 부른다.
대립과 대립이 서로 마주서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면서 큰 하나로 지양하지 않고는 참된 진리가 발견되지 않는다고 하는 「한」 의 사상은 일반적인 형식 논리를 부정한다. 「한」 사상에서는 화합과 논쟁의 두 가지 면이 있다. 전자는 어떤 사리에 대한 참과 거짓을 밝히는데 있어서 높은 의미를 지양하는 것을 말하고 후자는 진리상 부정에 부정을 매개하여 보다 높은 차원으로 발전을 시키기 위한 하나의 전체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의 논쟁은 단순한 논쟁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논쟁만을 능사로 하는것이 아니라 진보발전을 의미하는 것이다. 연(然)과 불연(不然)은 양립되는 것이 아니라 일합(一合)으로 지양한다는 것이 「한」 사상에 내재되어 있는 변증법적 지양성 논리이다.
「한」 사상은 여러 가지 개체에 대한 관계를 일(一)과 다(多)로서 설명한다. 다른말로 「한」 과 개체는 하나이면서 많음, 이는 많음이면서 하나라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한」 사상에는 통일성, 조화성, 변증법적 지양성 등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이라고 하는 「한」 은 「一과多」를 분석적인 면과 종합적인면의 두 면으로 본다. 그래서 「一」 은 종합적인 것을 의미하고 「多」 는 여러 가지로 전개되는 것을 의미한다. 전개하면 끝이 없이 큰 세계로 벌어지고 종합하면 고차적인 큰 하나로 뭉쳐지는 것이다. 이것을 「한」 사상에서는 변증법적 지양이라고 부른다.
단군왕검께서 아사달에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조선」 이라 했으며 홍익인간의 이념으로 나라를 다스렸다는 것이 이른바 위군(魏君)의 기록이다. 국조 단군은 우리 겨레의 혈통적 정신적 구심점이다. 혈통적 구심점이 없는 곳에 민족적 일체감이 솟구칠 수 없고 정신적 구심점이 없는 데에 총화적인 뜨거운 애국의식이 치솟을 수 없다 그러면 여기에 단군조선에 직접 관련된 고문헌들을 소개해 보면 다음과 같다.
「삼성기(三聖紀)」 (安含老擺 : 안함로찬)에 보면 "우리 환(桓)은 건국이 가장 오래되었다‥‥ 이로되 환국(桓國)이니 천제는 환인이라 7세(대)를 전하였는데 그 연대가 가고(可考)할 수 없다‥‥ 그 후에 환웅씨가 대를 이어서 백산 흑수지간(黑水之間)에 내려서 천신의 조칙(詔勳)을 받들어 ‥‥ 천부인을 가지고 오사(곡(穀), 명(命), 병(病),형(刑), 선악(善惡))를 맡아 세상을 흥익인간으로 다스리고 신시(神市)에 입도(立都)하여 나라를 배달이라 하였는데 ‥‥ 신시(환웅)의 방이(傍李)에 치우천왕(治尤天王)이 있어 청구(靑邱)를 개척하였으며 그의 전통은 18세 1,565년간이었다‥‥ 단군왕검은 무진(戊辰) ·개국(開國)으로부터 그 국통(國統)이 47세를 전하였고 역년(歷年)은 2,096년간이었다. (안함론 삼성기)
원동중(元童仲)이 지은 「삼성기」 (三聖記)에 보면 "옛적에 환국이 있었다‥‥ 처음환인이 천산에 거하여 득도장생하여 ‥‥ 고기에 이르되 환인씨의 나라가 있었으니 천해이동(天海以東) 지역이었다‥‥ 그 땅의 넓이가 남북이 오만리요 동서가 이만리니 총언(總言)하여 환국이라 하고 분국은 ‥‥ (십이국명(十二國名 )이 다 있었음) 합하여12국이며 천해는 지금의 북해라 하고 전(傳) 7세에 역년은 3301년이었다.
해서(海書)인 「조대기(朝代紀)」 에는 ‥‥ 「서자지부(庶子之部)에 대인환웅이 있어 여정(輿情)을 탐청(探驚)하여 세상에 선명세계(先明世界)를 열고저 하였다. 이에 천부인 세 개를 주어 가서 다스리라 하였다. 환웅은 율도삼천(率徒三千)으로 태백산 신단두하에 내리니 이곳을 신시라 한다. 풍백 우신 ·운신을 거느리고 곡 · 명 · 병 ·형 ·선악을 맡아 인간의 360여사(餘事)를 주관하고 재세이화(在世理化) ·홍익인간(弘益人間)하니 이가 환웅천왕이다 ‥‥ 그 후손에 단군왕검이 있어 아사달(지금 송화강)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 삼한이라 하였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환인(7대 3301)의 나라 환국이 있었고 또 그 뒤를 이어 환웅(18대 1565)의 배달국이 있었으며 그 다음 단군왕검이 다스린(47대 2096) 조선국이있어 부단히 이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三國遣事)의 고조선조(古朝鮮條) 「고기운(古記云)」 에 보면 "고기(古記)에 이르되 옛환웅에 서자 환웅이 있었는데 자주 천하(天下)에 인세(人世)를 식구(食求)하니 부(父)는 그 자(子)의 뜻을 알아 삼위(三危)와 태백(太泊)을 하관(下觀)하니 홍익인간 할 곳이라 천부인 세 개를 두어 다스리게 하였다 이에 환웅은 삼천자를 거느리고 태백관정 신복수하(神福樹下)에 강림하니 신시라 하고 이를 환웅천왕이라 한다. 풍백, 우사, 운사 등을 거느리고 곡 · 명 · 병 · 형 ·선악를 맡아 무릇 인간의 360 여사를주관하여 세상을 다스렸다‥‥ 웅씨 네 딸은 늘 혼배(婚配)자를 원하던 차에 환웅이 짐짓 이와 혼인하여 자식을 낳으니 이가 단군왕검이다(안호상, 단군과 화장의 역사철학, 1978, 9. 25).
이상에서 안함노의 「삼성기」 와 원동중의 「삼성기」 및 발해서인 「조대기」 , 삼국유사의 「고기」 등의 본을 비교해 보았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단군을 거론하는 데에 대개 삼국유사만을 들고 설왕설래하면서 시비하여 왔다.
단군왕검은 배달나라(檀國)의 맨 첫 번째 임금이요, 단군은 단국군(檀國君) 곧 배달나라의 임금이다. 배달나라의 맨 첫째대 임금은 한 분인데 그 분을 「단군한배검」이라 또 배달나라의 여러 임금들을 통틀어 「단군」 이라 부른다. 단군 한배검을 비롯해서 49대 단군을 이은 이분들이 다스리던 시대를 일반적으로 단군시대라 또 나라를 단군조선이라 한배검조선 혹은 옛조선(古朝鮮)이라 하는데 이 시대가 1048년(서기 앞2333-앞1286년) 동안이다.
단군의 사상을 우리는 흔히 한마디로 「홍익인간」 사상이라 말한다. 단군시대에 이홍익인간사상이 얼마나 발전하였는가를 주변국과의 그 수준을 비교해 본다면 「산해경」 (산해경(山海經)에 「東方에 有君子國」 고 했다. 이 말을 검토해 보며 동방에 군자의 나라가 있다고 했으니까 필시 서방사람이 한 말이다 서방이 동방의 대칭이 되기 때문에 서방사람의 말인 것은 틀림없는데 그 서방이란 곧 중국이다. 그렇다면 중국사람이 우리를 동이인이라 했고 따라서 그 동방족인 우리는 중국인이 타칭한 군자국이다. 중국에서 우리 동방국을 군자국이라 했다. 중국의 한족들이 쓴 및 기록들을 보면
① 군자의 나라가 북쪽에 있는데 그 사람들은 서로 사랑하고 다투는 일이 없다(산해경 ' 山海經).
② 동방은 인국(仁國)이라 군자들이 살고 있는데 예절이 바르고 서로 사양하기를 좋아한다(산해경).
③ 그들은 서로 칭찬하기 좋아하며 헐뜯지 않으며 사람이 환란을 당하는 것을 보며 서슴지 않고 죽을 데라도 뛰어든다(동방삭신이경: 東方朔神異經).
④ 부여 사람은 체격이 크고 용감하며 근후(謹厚)하며 무던하며 남의 것을 빼앗는 일이 없으며 밤낮없이 모여 노래부르기 좋아한다(후한서).
⑤ 그들은 인간성이 곧고 굳세고 용감하다(후한서).
⑥ 이(夷)란 근본을 뜻하며 (동이:東夷)생육(生育)의 뜻이다. 중국에서 예를 잃었을 때에는 동이에 가서 배워와야 한다(후한서).
이렇게 서방 한족들이 극찬해 마지 않았던 동방 군자국의 홍익문화는 홍익사상의 알맹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하는 말이다. 홍익인간사상의 본질은 삼대 경서에 집약 대고 있다. 즉, 「천부경」 「삼일신고」 「삼전경」 이다. 「천부경」 은 81자로 된 조화원리요, 「삼일신고」 는 366자로 된 교화원리요, 「삼전경」 은 366조목으로 된 치화원리인것이다.
이 삼대경전을 기반으로 해서 위대한 홍익문화가 만개하였던 것이다. 즉 삼신일체사상을 근간으로 하여 삼론(三論) ·삼근(三根) ·오계(五戒) ·육예(六藝) ·팔조팔계(八條八關) ·구서(九誓) 등의 실천 윤리로 승화되었고 소도(蘇塗)제단(祭壇)의 화랑, 조의(?衣)선도(仙徒)들을 통해서 국가의 동량(棟標)이 되었던 현재, 충신, 양장, 용량, 명사, 덕우(육정)등의 위국인재가 쏟아져 나왔으니 어찌 국세가 신장되지 않으며 사상문화가 발전되지 않을 수가 있었겠는가. 삼대민족 경서의 그 조조목목의 주옥같은 철학적 명리는 감히 타의 어느 교리도 견줄 수 없는 최상인 것으로 확신한다.
우리의 단군사상은 제천사상, 숭조사상, 애인사상을 기본사상으로 하고 홍익인간의 이념과 이상적인 군자상을 추구하는 이념이라고 하였다.
사실 그동안 제천 ·숭조사상은 항상 국가적 제의로서 간단없이 실현되어 왔고, 애인사상 역시 잘 실천되어 군자국이라 불리우리 만큼 국가사회가 잘 유지되었다. 비록 중국의 침략이나 문화 ·사상적인 영향이 크게 이르렀으나 고신도(古神道)사상이 본질적으로 동요되지 않았다. 이리하여 고신도사상은 전통사상의 원류로서 그 지위를 굳혀 갔으니 전통사상의 특징이라면 우선 제천사상, 숭조사상, 애인사상을 기본사상으로하는 고신도사상을 원류로 한다.
제천사상이란 천의(天意)를 따르는 것이 고신도사상의 구성요소이요, 이는 무속신앙적 제천의식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천의를 따른다 함은 순수하고 무구(無泥) ·무협잡(無來雜) 함이 전제된다. 오욕과 기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접신탈아(接神脫我)니 입신이니 하는 무속신앙의 입장에서 이점이 더욱 강조된다. 이 순수함을 연역(演譯)하여 현상윤요氏는 신도사상의 특징을 진실(眞實) ·순선(純善) · 청미(淸美)로 보았다(현상윤. 조선사상사: 4).
숭조사상은 선민적사상인 천손사상으로 하늘과 자기와의 관계를 연결시켜 줌으로씨 제천사상과 비슷한 사상으로 등장한다.
애인사상은 홍익인간 재세이화의 이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인간애 정신을 천의(天意)의 차원에서 강조하고 있다 하겠다.
단군의 염원은 홍익인간을 실현하는데 있다. 그는 「크게 사람을 유익하게 하기」위하여 땅 위에다 「한」 나라(천군, 환국, 한국, 일국, 대국)을 열었다.
그러므로 「크게 온 누리를 유익하게 함」 이란 것은 한얼님의 한울나라(온누리나라)인 「한나라」 를 연 뜻과 목적이다.
홍익인간에서 말하는 인간이란 한민족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전인류를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홍익인간은 한민족만을 유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크게 전인류를 유익하게 하는 인간존중, 인간고귀의 진리이다. 사해동포주의이다.
홍익의 "홍(弘)"은 클 흥, 크게라는 의미로서 무한대(無限大), 무한량(無限量), 무한시(無限時)를 말하는 것인바 이는 곧 「한」 의 무한대, 무한량, 무한시를 말하는 것이다.
유익하게 하심은 전인류가 누릴 수 있는 복과 수(壽)와 낙(樂)을 가질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단군 한배검은 이 지상에서 「광명이세」 또는 「재세이화」 의 진리를 베풀어 지상仙境(神市한얼나라)을 실재하는데 이상을 두었다.
이와 같이 「한」 은 한울님이며, 「한」 의 원류는 동토 단군 한배검에서 나왔으며「한」 사상의 뿌리는 단군의 홍익인간관에 바탕을 두고 있다.
크게 〈인류를 유익하게 함〉은 「한」 의 대아정신이다.
「광명이세」 , 「재세이화」 는 단군 한배검이 세상을 밝게 〈밝음〉과 뜻을 가진 〈이치〉로 세상을 다스리는 것을 의미하는 바 「한」 은 이러한 〈밝음〉과 〈이치〉를 나타내고 있다. 다시 말하면 「한」 은 어두움을 밝게, 투쟁보다는 〈뜻을 가진 이치〉를 포용하고 있다.
「한」 은 또 조화, 통일사상을 갖고 있다. 단군 한배검은 5겨레를 큰 덕으로 기름에 있어 개체와 전체와의 조화를 통한 통일을 강조한다.
단군의 세가지 뿌리 이상인 ①한울을 섬기는 경천사상과 ②조상을 공경하는 숭조사상 ③인간사랑을 제 몸과 같이 하는 애인사상을 지상에 내림으로써 홍익인간의 얼을 심었다. 이 세가지는 우리 민족의 한얼사상이며 천 ·지 · 인 합사상(合思想)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데서 「한」 의 조화 · 합일 대아정신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홍익인간이 지니는 「얼」 이야말로 그것은 비단 우리 배달민족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세계 모든 인류와 국가들에 대해서도 최고의 이념이며 지상의 목적이 되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인류가 살아감에 있어서 종교신앙의 밑바탕과 윤리도덕의 근원을 이루는 사상이기도 한 것이다. 2.「한」 과 화랑도 사상
화랑도가 언제부터 신라에 있어서 국가사회 중앙의 대도로 체계화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문헌의 부비로 인해 추정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화랑도의 설치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진흥왕 37년(576)條에 처음으로 원화(源花)를 받들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화랑도의 창시는 진흥왕 37년(576)으로 봄이 좋을 것이다(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37년조).
화랑은 원화 ·국선 ·선랑 ·풍월도 ·풍류도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화랑의 기원은 신라에 국한하지 않고 고대시대로 거슬로 올라가 찾아볼 수 있다. 즉 화랑은 본래 삼한의 진한의 소도(蘇塗)(솟대) 제단의 무사에서 온 것으로 그때의「仙(선비)」 이라고 칭하는 자이다. 이것을 고구려에서는 조의선인이라고 하였고, 신라에서는 미모를 취한 화랑이라 하였다.
또 화랑은 '부루교단'이라고 하며, 부루는 고대시대에 고유한 신앙인 태양숭배 곧「밝은 뉘」 (태양세계)가 변한 말로서 이 「부루」 가 한자로 적힐 적에 風流라고 적게된다고 보고 였다. (최남선, 고사통, 1943.8)
화랑도의 사상적 특징을 가장 잘 표현한 사람은 단재 신채호로 화랑도에 대하여"조선이 조선되게 하여 온 자는 화랑이다. 화랑의 역사를 모르고 조선사를 말하려는것은 골을 때고 그 사람의 정신을 찾음과 한 가지 우책(愚策)이다"(신채호, 조선상고사라 1955 : 221).
화랑도의사상적 연원이 되는 중요한 사료는 고운 최치원(875~?)의 난랑비 서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 「국유(國有) 현묘지도(玄妙之道) 왈풍류(曰風流) 설교지원(設敎之源) 비상선사(備詳仙史) 실급포함삼교(實及包含三敎) 접화군생(接化群生) ‥‥」
원래 유 ·불 ·도 등 3교와는 다른 현묘지리(玄妙之理) 즉 〈풍류〉라고 하는 훌륭하고 자랑스런 도가 있어서 화랑도의 사상적 연원을 이루고 있어며, 자세한 것은 〈선사〉(仙史)에 적혀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화랑도의 사상이 신라인만의 창조적인 것이 아니고, 민족적으로 오랜 세월동안 지녀온 고유한 전통사상을 바탕으로 한 것이며, 다만 신라인들에 의하여 사상적으로 더욱 가다듬어졌으며, 제도 및 운영 면에서 국가적 차원에서 크게 발전된 것으로 일단 판단하는 것이 좋으리라 믿어진다.
「현묘지도」 는 「한」 사상 그러므로 3교가 들어오기 전에 벌써 우리나라에는「한」 사상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충효에 대한 사상은 외래사상에서 온 것이 아니라 우리 사상에서 온 것이다. 그러기에 공자는 우리나라를 "동방의 예의지국"이라고 하였다.
화랑도는 한국의 고유한 사상인 동시에 신라사회의 청년교육이며 국가적 정신이었다.
김대문도 그의 저 「화랑세기」 (花郎世紀)에서 "어진 대신과 충성된 신하가 여기서 빼어 나오고 뛰어난 장군들과 용감한 군사들도 이로 말미암아 생겨났다"
화랑도는 「풍류도」 「풍선도」 라고도 하는데 이항영은 화랑도의 풍류사상에 세가지 요소가 있음을 지적하였다.
첫째, 자연숭배사상이다.
화랑들는 불교나 유교가 들어오기 이전의 고유신앙인데 그 신앙은 범신적인 것으로 인간과 자연과의 교류를 인정하고 인간의 길흉이 자연에 관계 있다고 생각한 샤아머니 즘의 형 태 이다.
둘째, 풍류사상으로 신라의 화랑들은 특히 가무 ·음악을 좋아하였으나 이 가무음악은 본래 자연을 칭송하는 수단으로 쓰여졌으나 그것이 일상생활화 하여 생활에 혜택을 가져오게 되었다.
셋째, 충 ·효사상으로 애국적 정열을 갖고 있었다. 화랑은 풍류를 즐기었으니 문약하지 않고 일단 유사시에는 조국을 위하여 기꺼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문무 겸전의 호국사상이다.
한편, 화랑도는 샤아먼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영육일치의 종교적 수양단체로 단순한 무사단과 다른 종교적 청년단체이다.
화랑도가 샤아머니즘에 뿌리를 박고 있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로 알 수 있다.
첫째, 화랑도의 네가지 기능인 가무유오(歌舞遊娛), 주술, 군사교육 중에서 가무와 주술은 샤아먼적 성격을 띠고 있다. 본래 한국무속의 기능은 기복, 양재(禳災), 점복과 함께 가무를 곁들인 오락을 들수 있으며, 선령(善靈)과의 교류를 하는 백(白)샤아먼의 전통을 갖고 있다. 실제로 화랑들은 산과 강을 찾아 다니며 가무를 즐긴는 오락성을 갖고 있으며 문헌에는 화랑들이 신령과의 신비로운 대화를 가졌다는 기록을 볼 수 있어 화랑이 샤아머니즘적이라는 것을 입증한다.
둘째, 화랑의 자격을 얻는 수업과정을 볼 때 샤아먼 그것과 같은 점이 있다. 「삼국유사」 의 기록을 보면 김유신은 화랑의 자격을 얻기 위하여 홀로 산악과 깊은 숲 속에서 기도하는 가운데 수업하였다 그리고 거기서 지도자로 나타난 산신령을 만났으며 보검에 영위를 신령들의 수호를 받음으로서 그가 화랑의 자격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화랑의 수업과정은 샤아먼 생활과 같은 것이다.
셋째, 오늘날 박수를 화랑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본래 화랑이 지니고 있던 샤아먼적 성격을 입증한다. 또한 남모나 준정이 여성이었다는 점과 화랑인 남성들이 미남이었고 화장을 하였다는 사실은 모두 샤아먼의 전통을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의 사실들로 미루어 보아 화랑도의 본 바탕에는 샤아머니즘이 흐르고 있다는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화랑도는 우리 민족의 전통인 풍류사상과 원시고유 신앙인 샤아머니즘에서 우러나온 것으로 불교 ·유교 ·도교정신의 조화를 기반으로 하는 우리 민족의 전통사상이다.
「한」 사상은 화랑도에 계승되었다. 화랑들은 「한」 의 사상을 삶의 철학으로 하였다.
첫째, 화랑들은 문무를 조화시키는 것을 하나의 생활 이상으로 생각했다. 그들의 문무 조화생활은 여러 군데서 찾아볼 수 있는데 김대문의 「화랑세기」 에 "현자충신은 화랑도에 따라서 빼어났고 양장용졸도 화랑도로 말미암아 생겼다"라고 쓰고 있어 화랑도의 문무겸비의 조화생활을 엿볼 수 있으며 임신서기석의 기록에도 글과 무술의 조화를 통하여 애국 · 상무적인 화랑도를 익히는 화랑의 수련방법을 밝히고 있는데" 임신년 6월 16일 두사람은 나란히 하늘에 맹세하고 기록하노라. 지금부터 3년 뒤에 충도를 알아가지고 그 실천에 과실이 없기를 맹세하노라. 만약에 이 사실이 실패하면 하늘에 죄를 얻게 되리라. 만약의 경우 나라가 불안하고 또 큰 난세에 처하게 되면 실천에 옮길 것을 맹세하노라. 또 별로로 앞서 신미년 7월 22일에 크게 맹세하였는데 경서, 상서 예기, 춘추 등을 차례로 3년간 공부하기로 맹세하였노라" 위의 글의 내용은 화랑들이 「충도집지」 를 하기 위하여 문무의 겸비를 갖추기 위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일방은 학자로서 진리탐구에 대한 강한 집념을 말하므로 「문인」 다운 성스러운 점을 나타냈고 타방은 나라를 지키는 자로서의 국가안정에 대한 강한 방위의식에 대한 맹세를 말하므로 「무인」 다운 영웅성을 나타낸 것이다. 이런 뜻에서 화랑들은 「한」 에 뿌리를 박은 성스러움과 영웅스러움의 조화성을 찾아서 그것을 구현하려고 했던 것이다. 화랑들은 때에 따라서 군인 같이 보이지만 실은 군인이 아니고 학자 같았고, 또 반대로 학자같이 보이나 실은 학자가 아니고 군인같이 보였다. 이것은「일즉이」 이요, 「이즉일」 이라고 하는 「한」 의 사상적 원리에 뿌리를 박은 조화생활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둘째, 화랑들은 이성적 도덕성과 감성적 놀이의 조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화랑도의 교육방법에는 "도의로서 연마하고 혹은 시와 노래로써 서로 기뻐하고 산수에 유오하되 아무리 먼 곳이라도 가보지 않음이 없었다. " 여기서 도의란 민족 전통신앙을 숭상하면서 오계와 삼미의 정신을 체득 연마하는 것이다. 세속오계는 불승 원광(圓光)이 신자(臣子)가 지켜야 할 도리를 귀산(貴山)과 추항(?項)에게 가르쳐 준 것으로 실제로 화랑도의 계가 되었다. 삼국사기의 귀산전에 보면 귀산과 그의 벗 추항이 당대의 고승인 원광법사를 찾아가 종신(終身)의 계를 일러 달라고 청하니 원광법사가 말하길 불교에 보살계가 있어 그 나뉨이 열 가지가 있으나 너희들은 남의 신하가 되었으니 능히 이를 감당하지 못할까 염려가 된다. 그래서 세속에 알맞은 오계가 있는데 ①임금을 섬기되 충으로 하고 (事君以忠) ②어버이를 섬기되 효로써 하며 (事親以孝) ③벗을 사귀되 신으로써 할 것이오 (朋友有信) ④싸움에 임하여서는 물러남이 없을 것이오 (臨戰無退) ⑤산 것을 죽임에 있어 반드시 가려서 할 것이니 (殺生有擇) 너희들은 이를 행하되 경솔치 말라고 하였다. 세속오계는 불 ·유 양교의 원리가 신라의 고유신앙과 융합하여 새로운 실천윤리로 발전한 대표적인 예이다.
「삼미정신」 (三美精神)은 남의 위에 있는 사람으로 겸손하여 남의 아래 앉는 것이 그 첫째이고, 남보다 돈이 많이 있으면서도 생활을 검소하게 하는 것이 그 둘째이고, 본래 귀한 세력이 있으나 그 위엄을 쓰지 않는 것이 인자 그 셋째이다.
헌안대왕의 물음에 국선(國仙) 응염(瀉廉)이 대답한 「삼미(三美)」 「삼덕(三德)」 을 화랑도의 지도이념으로 했다.
그 다음 노래로써 서로 즐긴다는 것은 음악을 좋아하고 존중하는데 그 이상으로멋이 있는 예술적인 생활을 장려하였던 것이다. 끝으로 명산과 대첩을 유람한다고 하였으니 국토와 대자연에 끝없는 애착심을 갖게 한 것이다 이것은 두말할 것 없이 화랑들의 도의성과 유희성을 조화를 말하여 주는 것이다. 이것은 현재 용어를 빌어 말하면 지(知) · 정(情) ·의(意) 또는 지 ·덕 ·체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같은 조화생활을됫받침해 준 것이 일체다면성을 가지고 있는 「한」 사상의 정신이다.
묘청(?-1135)은 고려 17대 인종때의 중으로 일명 정심(淨心)이라 하며 서경 출신이다. 백수한를 통해 근친들과 접촉하여 도참설(圖識說)로서 중앙 정계에 진출했다. 인종 5년(1127) 왕의 고문에 추대되어 오아의 서경 행차를 건의하여 이를 실현하고 내외정세의 혼란함을 이용, 개경출신 구신들의 세력을 꺽기 위해 서경천도운동을 획책하여 등왕 7년(1129)에 대화궁을 창건하고, 또한 제건원과 금국정벌론을 요청했으나, 김부식 등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그 후 서경천도를 위해 인위적으로 각종 술수를 꾸몄다. 또한 계속 왕의 서신(西辛)을 주청했으나 유신(儒臣)들의 맹렬한 반대로 천도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묘청의 난(인종 13년 1135)을 일으킨 동기는 그의 서경천도운동이 실패케 된 데에서 생긴 것이다. 묘청의 천도운동에 있어서 그가 내세운 사건으로는 풍수도참사상에서 나온 지덕설인 것이다. 원래 풍수도참사상은 고려 초기 이래로 크게 인심을 지배해 내려왔거니와 인종 4년(1126)에 이자겸의 난이 일어나 궁궐이 거의 불타버리고 천변재이(天變災異)가 잦으매 이에 개경의 지덕이 쇠하였다는 사상이 또 다시 일어나게되 었다.
묘청의 난은 인종 13년 정월에 일어나 이듬해인 동와 14년 2월경에 진압되었다. 이 대에 묘청이 내세운 국호는 대위국, 연호를 천개(天開), 그들의 군대를 천견(天遣)충의군이라 하였으나 실패하고 부하인 조광(趙匿)에게 죽었다.
사학자들 간에는 묘청의 난에 대하여 일개 반란으로 규정하는가 하면 한편에서는 이를 〈일천년내의 일대사건〉이라고 하여 정반대의 의견을 내어 놓기도 한다. 그러므로 묘청의 난을 새로운 차원에서 파악하려는데 그 뜻을 두고 있다.
풍수도참사상은 고려 일대를 통하여 세간에 성행한 결과 지대한 영향을 인심에 미쳤다. 특히 국도에 관한 지지쇠왕설, 즉 지덕이 쇠한 곳으로부터 도읍을 옮기자는 설이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벌써 1대 태조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즉 왕건태조의 훈요십조에도 보면 서경(西京)에 중시 사상을 볼 수 있다.
묘청의 사상으로 중요한 것은 서경천도론, 칭제건원론, 금국정벌론, 팔성사상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묘청일파가 음양도참설로서 왕을 움직여 수도를 서경으로 옮기려 한 운동이다. 이때의 중심인물은 묘청을 위시하여 백수한, 정지상 등 서경인이었다. 묘청은 당대를 풍미한 풍수지리설을 이용하여 개경에서 서경으로 천도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 주장으로 이룩된 것이 대화궁이었다. 대화궁에도 팔성당을 짓고 거기에는 팔신을 모시었다. 여기에서 산악숭배 신선사상, 불교신앙 등을 합친 그들의 사상적 경향을 엿볼 수 있다. 이 천도의 근본목적은 정치적 혁신에 있고, 수도를 서경으로 옮김으로 개경귀족을 타도하여 서경인 중심의 정치를 구현하는데 있었다.
묘.청일파의 서경천도운동을 전제로 주장한 것이 칭제건원과 금국정벌론 문제이다. 그러므로 칭제건원과 금국정벌론은 서경천도를 위찰 간접작전이라고 볼 수 있다. 그에게 사대의 예를 갖추어 상표칭신(上表稱臣)하던 인(仁) 이씨 일가가 몰락한 후에도 고려조정(김부의, 김부식)의 부패한 정치와 비굴한 외교는 시정될 수 없었다. 이러한 일련의 모순은 민의(民意)를 크게 어긋나는 처사로 일반 백성들의 대금감정을 고조시켰고, 국권신장과 자주독립성을 회복하자고 칭제건원론을 태동케 하였다. 우리나라 왕도 황제라 칭하고 연호를 따로 제정하자는 주장이었다.
이 주장의 이면에는 중국에 대한 사대의 관계를 청산하고 완전한 자주독립국가로서 대륙으로 진출하려는 강렬한 요구가 있다. 이미 광종때에도 개경을 황도라고 하고 연호를 광덕(光德)이라 하여 자주적인 기상을 보이다가 1년만에 연호로 돌아간 적이 있다.
고려시대 역사상에 있어서 묘청의 사상은 왕조사관에서는 반역으로 규정되어 돌보지 않았으나 단재 신채호의 「조선사론」 에서 처음으로 김부식의 사대주의 사관과 대립되는 민족주의사관 명백으로 재평가되었다. 김부식과 묘청과의 대립을 「조선역사상 일천년 이래 제일 대사건 」으로 사대와 자주의 분기점으로까지 중시되었다.
묘청은 서경천도론과 아울러 팔성사상을 주장한 점이 주목된다.
고려사 묘청조에 보면 「묘청은 서경의 대원역이 풍수설상 가장 길한 곳, 즉 대세라고 해서 그곳에 궁을 지으면 굼나라가 폐백을 가져오고 36국이 모두 신첩(臣妾)이 된다는 참언을 내세웠다. 그 참언에 근거해서 평양의 임원역에 신당을 짓고 그안에 8가지 신앙대상 즉 「팔성」 을 모셔 팔성당이라 했다고 한다. 」
그의 불교신앙에는 팔성의 산신숭배사상이 스며 있다. 즉 고유의 산신숭배와 불교,유교, 도교, 필관, 음양지리 등의 사상을 절충하여 어느 정도 민족적인 고유신앙 성격을 드러내 놓았다. 여기에서 일반적인 불교와는 다른 근본적으로 다른 독특한 민족적 성격을 엿볼 수 있다. 이 종교의 신학적 내용은 제팔성당문에 의하면 음량지리설이란 지력이나 또는 생기를 신격화하여 숭배하고 있었다.
삼국시대의 화랑도사상은 고려에 와서는 묘청사상으로 이어왔다고 보겠다. 그는 서경으로 천도할 것을 주장하면서 대화궁에도 팔성당을 짓고, 거기에 팔신을 모시었는데 여기에는 산악숭배, 신선사상, 불교신앙 등을 합친 것을 볼 수 있는 데 이것은 고유의 산신숭배와 불교, 유교, 도교, 팔관, 음양지리 등의 사상을 절충하여 어느 정도 민족적인 고유신앙의 성격을 내 놓았으니 「한」사상이 내포되었다고 볼 수 있다.
칭제건원론의 자주의식은 당시 한반도 주변은 강대세력이 교체되는 과도기였고, 사대적 명분주의가 자리잡기 전이기 때문에 그 주장은 가능했으나 국력이 이에 미치는 것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묘청의 칭제건원의 주체사상은 명 이후 보편화된 동아시아의 사대적 명분질서로서 중국주의적 사대문화권 형성 이전의 한국민족의 자주적 의지를 대표했다고볼 수 있다. 그러기에 일찍이 단재(丹齋)도
생면부지의 원처(遠處)하람은 졸지에 흥하거나 망하거나 이를 심상히 볼 뿐이지만 자주행방의 불인배(不人輩)가 돌연히 천상인이 된다 하면 이를 볼 때 신경의 앙분을 면치 못할 것이니 이는 거의 보통의 인정이다. 오직 금태조가 중국황제됨에 이르러는 거의 예시(?視)의 태(態)를 가지게 되었다. 금태조가 원래 고려에 조공하던 여진족으로 더구나 윤관에게 패하여 구성 등 천여성지를 빼앗기던 만추(蠻曾)로서 일조(一朝)에 중국 황제가 되어 작일의 정복자인 군신을 도리어 압박하기에 이르니 고려의 군신이 어찌 분개치 않을 것인가
라 하여 당시 고려 칭제건원 또는 금국정벌론이 금의 자극으로 일어난 것임을 설파하였다.
동학은 1860(조선 26대 철종 11년 庚申)년에 수운(水雲) 최제우(1824~1864)에 의하여 창도된 것으로 일설에 의하며 수운은 고운 최치원의 28대손이라 하며 13대조인 최눌(崔訥)은 벼슬이 성균관 사성에 이르고 7대조 최진립은 병자호란에 순하여 충사되었고, 그의 아버지도 또한 이름있는 선비로 경주에 칩거하였다고 한다.
수운이 13세가 되던 해(1836년)에 부친이 돌아가고 가세가 기울어지자 그의 생각 또한 현실에 항상 불만을 품어오던 터이라 출가하여 천하를 주유한 후(1844)에 귀향하였다. 그 후 양산 통도사에서 49일의 기도를 마치고 집에 들어와 용담정을 짓고 이름을 제우라 고치고 흔돈한 천하를 구할 도를 깨닫기에 노력하던 중에 1860년(철종11년)에 그가 37세에 대각(大覺)하여 이 해를 포덕(布德) 원년으로 한다. 이와 같은 득도현상은 한민족의 토속신앙에서 볼 수 있는 신비주의적 요소를 띠운 것임을 부인할 수가 없다.
그가 득도한 이래 동경대전(東經大全:전 4편 부(附) 15편)과 용담유사(龍潭遺詞:전9편)를 지어 극히 현실주의적인 내세관과 치병술을 표방하여 민중의 호응을 얻었다.
이처럼 교세가 점차로 증대하고 또 회중들의 지개가 양반사회에 대한 불만을 품은 데다가 경전에 「천주」, 「상제」, 「한울님」등 당시에 탄압받던 천주교에서 흔히 쓰는 구절이 보이게 되자 수운은 1863년 사(邪)로 몰리어 1864년에 혹세무민의 죄로 대구에서 참형 되었다.
수운을 1860년에 「고금에 들을 바 없는 고금에 비할 것이 없는 법」 으로서 도를 깨달았다.
동학은 사상면에서나 그 운동의 양태상으로나 한국사에서 차지하는 의의는 막중한 것이다. 더구나 동학의 종지(宗旨)인 「인내천」 의 교의는 어떤 형태의 민주주의보다도 깊은 뜻을 포함하고 있다. 한갓 정치적 민주주의로만 국한되지 않고 보다 철저한 논리적, 종교적인 민주주의를 제시하는 종교이다. 현대 사상에서는 humanism이 크게 부각되고 있지만 「인내천」 보다 더 인간의 존엄성이 지적된 예를 찾기란 어렵다.
동학사상적 연원을 이선근 박사는 「화랑도」 에서 동학의 연원을 찾고 그 역사적의의를 근대적 「내셔널리즘」 의 선구로 높이 평가하고 있으며 故 박종홍 박사는 동학이란 종교적 사상에 기반을 둔 가장 고귀한 민주주의의 정화라고 평가하였고 고 조지훈 교수는 동학사상의 원천을 단군신화에서 찾고 그 중 인내천의 인간중심주의와 지상천국의 현실중심주의는 민족적인 주체 사상 및 민중적 생활과 관련이 결부되어 많은 전근대적 요소를 지니면서도 후학들에 의하여 전형적인 한국사상, 첨단적인 근대사상으로 계승 · 발전된 계기를 지닌다고 하였다(조지훈, 한국문화사서설, 1964: 128).
동학혁명은 그것이 민족운동이었다는 점과 사상적으로는 강렬한 민족주체의식에 의거하였다는 점에서 우리의 근대 민족운동에 바른 방향을 제시하여 주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내 東에서 나서 東에서 받았으니 도는 비록 천도라고 하지만 學은 동학이라. 하물며 땅이 동서로 나뉘었는데 西가 어찌 東이 되며 어찌 東을 西라고 말하겠는가. 공자는 노나라에서 나시어 추나라에 도를 폈기 때문에 추로의 풍화가 이 세상에 전해오는 것이어늘 우리 도는 이 땅에서 받아 이 땅에서 폈으니 어찌 西道라고 이르겠는가.
갑오동학 혁명을 일으켜 최근세 조선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인내천(人乃天)주의를 근본으로 하는 종교적, 정치적 세력인 천도교를 발전시킨 동학사상은 소박한 민중 속에서 신앙을 통하여 조직된 구국민족운동이었다는 점에서 그 사상적 배경이 화랑도의 그것과 흡사한 점이 있다.
먼저 동학의 개조인 최수운의 출생과 그가 대각포덕과 경로를 볼 때 화랑의 수련과정과 흡사한 점을 볼 수 있다.
최수운(崔水雲)은 순조 24년에 신라의 고도인 경주 가정리에서 출생하였으며, 그가 화랑도의 귀중한 사료인 「난랑비서문」 의 작자 고운 최치원(崔致遠)의 직계로 28대후손이며, 호(號)까지 고운(孤雲)을 본받아 수운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또한 동학의 교리를 중심으로 살펴볼 때 화랑도와 그 이념을 같이하고 있다.
최수운은 동학을 유교, 불교, 도교의 기본적 원리를 결합하고 재투명한 것이다. 유교에서는 오론(부자, 군신, 부부, 장유, 붕우)의 개념을, 불교에서는 마음을 정화하는 개념을, 그리고 도교에서는 나면서부터의 마음의 불결을사람 몸에서 정화하는 법을 택하였다. 이 점은 화랑도가 유, 불, 선 삼교의 원리를 결합한 것과 동일한 것이다.
한편 동학의 종교적 제도 중 어떤 분야에 대한 그 밖의 원천은 고흉(古兇) 해설의 원리였다. 이 원리는 19세기까지 한민족의 마음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신령의 숭상과 미신이 결합된 일종의 샤아머니즘이다.
이것 또한 화랑도의 성립과 같은 원리이니 화랑도는 유, 불, 선 삼교 위에 우리 민족 고유의 신앙인 샤아머니즘이 융합된 것이다.
동학은 기독교의 이론과 박애주의에는 따르지 못하지만 동학이 그 이념을 빌려온 유, 불, 선의 신앙 중 어느 것과 비교할 때 현저하게 이상주의적이며, 박애주의적이다. 또 동학의 도는 내세적 신비주의이고, 대중을 즐겁게 하여 정신적 공간을 메워주는 역할을 하여 사회개혁에서 오는 어떤 시련도 참아 나갈 수 있는 희생정신을 길러 주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동학의 논리도 그 근본바탕은 화랑도임을 알 수 있으니 독립과 사회정의, 평등과 희생정신은 곧 화랑정신이기 때문이다.
이항령은 그의 논문에서 동학사상이 화랑도에 연유하는 세가지 요소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이항령. 한국사상총서. 1972'70)
첫째, 지기일원론에 입각하는 자연주의적인 범신론에서 있는 동학에는 자연과 사회와 인간을 지기로서 일원적으로 해석하고 이어서 인내천의 교의가 우러나오며, 경천은 곧 경물(敬物) 경인(敬人)이 되며 사람과 하늘을 동일시하는데서 철저한 민주주의적 사상이 우러나온다.
둘째, 풍류, 평화사상이다.
최수운은 알기 쉬운 노래를 지어 이 노래를 통해 인간성의 순화를 꾀하였다. 화랑도의 정취가 풍류에 있으며, 이 풍류가 우리의 인간성이 살벌해지고 말았는데 최수운은 이 풍류도를 재흥(再興)시켰다.
셋째, 개벽사상이다. 최수은은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바로 잡고자 동학을 창시하여 신국민안(新國民安)을 꾀였다. 개벽은 곧 혁명사상이다. 인간을 민족을, 사회를 혁신하여 지상천국을 건설하려는 그 뜻은 바로 신라시대의 화랑도의 원리인 것이다.
이 밖에 최수운이 내세운 3대강령과 최치원의 난랑비 서문에서 보는 화랑도의 해석과는 일맥상통하며 천도교의 교리, 행사, 그리고 조직체계 속에서 화랑도의 그것과 같은 점이 있다.
시대와 환경에 차이는 있었으나 동학과 화랑도는 근본에 있어서 같은 전통과 신앙에서 출발한 우리 민족의 전통적 사상이다.
동학은 1860년 이후의 서세동점의 충격 속에서 반서구적 민족자각운동이었으나 종교적으로는 유, 불, 선을 흡수, 유 ·불 ·선 삼교를 합일치 포용하여 「인내천」 사상으로 발전시켰다는데 그 위대성이 있다. 또한 그 위대성은 동학이 유 · 불 · 선을 포용, 우리 민족의 주체적 고유사상으로 수용 ·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서학(西學)에 반정립(反定)한 최초의 민족종교가 태동하였다는 점이다.
수운 최제우(1824~1864)는 유 불 선을 배척하지 않고 포용하여 「인내천」 의 큰하나로 발전시켜 나간 저은 「한」 의 대아의 삶과 연결된다 유 ·불 ·선 포용정신은「한」 의 대아정신이며, 인간이 곧 한울님이라는 「인내천」 사상은 한의 대아의 극치이다.
동학은 그 근원에 있어 단군의 홍익인간정신을 저변에 깔고 있다. 따라서 동학은 단군의 「한」 의 흥익인간과 연결된다.
「한」 의 대아정신 무조건적으로 유 ·불 · 선을 포용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동학은 대아정신을 바탕에 둔 대(對)외세저항, 민족적 자각의 의식화라는 점에서 중시 된다.
동학은 민족평등의 원칙, 민주주의 의식에의 발전, 「한」 의 저변의 홍익인간적 심성의 발로로써 사회에 표출된 것이다.
수운은 「동학대전」 논학문(論學文)에서 「나는 東에서 나서 東에서 받았으니 도는 비록 천도이나 學은 동학이다」 라고 전제한 것은 분명히 외래의 것이 아니고 우리동방의 「한(韓)학」 이라는 것을 강조한 부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도는 비록 동 ·서의 공간적인 구분이 없고 고(古)와 금(今)의 시간적인 차이가 있을 수 없는 천도이지만 그 도학을 받은 지점은 분명히 동방아국(我國)이니 외래의 종교를 모방했거나 수용한 것은 아니라는 의미를 힘주어 말한 부분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이 점이 동학은 우리 고유사상이라는 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한 곳이다.
수운은 44회 되는 생진일(1862년 10월 28일)에 수제자인 해월을 향해 말하기를 즉「우리 도는 원리 유(儒)도 아니오, 불(佛)도 아니오 선(仙)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 도는 유불선을 합한 것이다. 즉 천도는 유불선이 아니로되 유불선은 천도의 한 부분이다. 」 라고 말한 것은 삼교가 내재해 있는 그 본원체가 곧 천도라는 것이다. 그는 이어서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기를, 「불(佛)의 각성과 유(儒)의 논리와 선(仙)의 양기는 사람의 자연된 품부(品賦), 천도의 고유한 부분이니 오도(吾道)는 그 무극대원을 잡은것이다」 하면서 경고하기를 「후(後)에 도를 용(用)하는 자, 이를 오용하지 말도록 지도하라」 고 했다.
여기서 수운이 말한 "풍류도의 본질"과 단애가 말한 대종교 종경중(倧經中)의 "회삼경(會三經)읫 본질"과 수운이 말한 무극대원인 "천도의 본질"이 삼교의 요소들은 함유한 공통된 본질임을 분석해 보았다. 이를 일러 이 공통된 본질을 학적(學籍)인 명제로서 「한」 사상이라 일컫는다.
수운이 유 ·불 ·선을 배척하지 않고 포용하여 「인내천」 의 큰 하나로 발전시켜 나간 점은 「한」 의 대아의 삶과 연결된다. 유 ·불 ·선의 포용정신은 「한」 의 대아정신이며, 인간이 곧 한울님이라는 「인내천」 사상은 「한」 의 대아의 극치이다.
한국근대(현대)사에 있어서 3 · 1운동이 차지하는 역사적 의의는 가장 크다고 하겠다. 그것은 우리 민족이 일본제국주의와 대항한 최대의 민족독립운동이었으며, 한국사회에 민주주의 발전을 구현시키려는 결정적인 계기를 안겨다 준 면에서도 그러하다.
이처럼 3 · 1운동이 한국근대 역사발전에 있어서 하나의 커다란 분수령을 이루고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며, 오늘날 대한민국의 정통성도 이를 바탕으로 하여 계승 발전하여 온 것도 사실이다.
3 · 1운동은 다 아는 바와 같이 1919년 고종의 인산일을 전후하여 한국민족 전체가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통치에서 벗어나고자 감행한 반일민족독립운동이었다. 일본제국주의는 1910년 한국을 강제로 병합한 뒤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헌병경찰에 의한 무단정치를 실시하여 한민족을 동화, 영구히 자기들의 지배하에 두려는 온갖수단과 방법을 자행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일본제국주의의 압박 밑에서 신음하던 우리 민족이 일시에 폭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으니, 이는 1876년 개항이래 줄기차게 외세와 대항하여 오던 우리 민족의 민족정신의 발로였으며, 자유와 주권을 되찾으려는 민족운동의 소산이었다.
3 · 1운동이 민족운동에서 차지하는 민족사적 위치를 부연해 봄으로써 결론에 대신하려 한다.
첫째, 3 · 1운동은 1910년대라는 구조적 모순 속에서 민족자본가, 중소상인, 지식인,노동자, 농민, 학생 등 각 계층을 망라하는 민족대연합전선을 형성했다. 이러한 사실은 3 · 1운동을 한말이래 지식인운동과 민중운동의 합류점이라고 규정 지을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초기 조직화 단계에서 민중운동화 단계로의 주도권 전이과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모순의 주체가 운동의 직접적 담당자로 나서는 과정이며, 민족운동 속에서 민중이 그 위치를 점해 나가는 과정이다. 3 · 1운동을 계기로 하여 민족해방운동의 질적 심화 양적 확대와 더불어 뚜렷이 나타나는 현상은 전체 민족독립운동 선상에서의 주도권이 점차로 민중에게로 넘어가면서 식민지 억압계층을 근간으로 한 민중 속으로의 운동의 확산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이로써 3 · 1운동은 민족대연합전선의 형성과 민중운동으로의 확산으로 인하여1920년대 일제의 통치정책의 근본적인 방향전환을 가져왔으며, 1차대전 후 승전국 제국주의 세계체제에 대한 식민지 민중들의 저항투쟁의 선봉적 역할을 수행해 냈던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를 정신적으로 굴복시키고, 조국광복을 가져오는데 정신적 기틀이었던 3 · 1운동은 화랑정신의 승화이다. 즉 3 · 1운동의 사상적 요소나 그 지도세력이 민족을 바탕으로 한 최초의 대민중 운동이었던 동학에 근거하고 있다.
월슨의 민족자결원칙에 자극받아 우리민족의 독립을 목표로 일어난 3 · 1운동은 동학혁명과 같이 민중에 기반을 둔 저항운동으로 민주주의 내지 민족주의를 사상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3 · 1운동이 민중에 기반을 둔 저항운동이었다는 것은 3 · 1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의 구성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운동의 참가자가 남녀노소를 막론한 전국각지의 이 나라 국민이었다는 것은 다 알려진 사실이나 3 · 1운동을 직접 지도한 지도층에 과거 이 나라를 지배했던 구 귀족계급의 참여가 극히 소극적이었으며, 특히 유교계의 인사들이 최초의 모의에 참여하지 않은 사실이다.
이 운동의 공판 기록에 의하면 제1단계로 손병희, 최린, 최동진, 오세창 등 천도교계의 모의, 제2단계로 최린을 통한 안진우, 현상윤 등 중앙학교계와 최남선과 제휴,제3단계로 최린, 안진우, 현상윤, 최남선에 의한 행동방안의 구체와 박영효와 윤용구, 한규설, 김윤직 등 구귀족에 대한 포섭(모두 실패), 제 4단계로 이 사인에 의한 기독교 계 이승훈과 제휴, 제5단계로 이승훈에 의한 양전백, 이명룡, 김병조, 등 서북 기독교계와 제휴하여 그 폭을 넓히고 마지막으로 한용운 등 불교계와 제휴, 그리고 박희도, 이갑성 등 기독교계 청년에 의한 강기덕, 한위건 등 학생 대표에 의해 학생 동원이 구체화 되었다. (천관우, 전통과 현대성 1965:207)
따라서 3 · 1운동의 최초의 지도층은 민중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동학사상을 연원으로 하는 천도교와 서구의 자유민주주의를 신조로 하는 기독교 세력이었다는점을 알 수 있으니 3· 1운동은 순수한 민족운동으로 동학혁명과 그 성격면에서 같다.
특히 천도교계의 최린이 직접 일선에 나서서 중앙학교 및 기독교계의 참여를 종용하였으며, 운동방안의 구체적 모의가 천도교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은 3 · 1운동의 실제적 지도세력이 천도교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며, 이 운동은 동학혁명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입증한다.
조국광복후 북한의 공산정권에 반대하여 평화적 조국통일과 자주독립을 외치며, 궐기한 1948년의 3 · 1재현운동의 주동세력이 천도교임을 생각할 때 3 · 1운동과 천도교의 밀접한 관계를 알 수 있으며, 나아가 3 · 1운동의 성격 그 자체가 동학혁명과 깊은 관계가 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3 · 1운동의 이념 내지 사상이 민족주의 내지 민주주의라는 것은 3 · 1운동 후에 나타난 여러 가지 사회의 움직임으로 알 수 있다.
독립선언서에 의하면 민족주의로 일관되고 있어 민주주의는 이 운동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듯하다. 그러나 독립선언서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3 · 1운동의 주목적에 초점을 둔 까닭이라 하겠고, 또 그 처절한 독립만세의 절규 가운데서 장차의 신국가의 규범까지를 염두에 둔다는 것은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이미 독립협회를 통하여 그 원리가 알려져 있었고, 신학문에 접한 경험이 있는 진보적인 지식인들에게는 민주주의는 벌써 상식에 속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3 · 1운동에 앞서 있는 동경 유학생의 독립선언서에는 민주주의를 신국가의 토대로 한다는 것을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으며, 상해 임시정부의 헌법에서도 민주주의를 기본원리로 하고 있다.
특히 3 · 1운동의 최대산물이며, 3 · 1정신에 바탕을 두고 창립된 동아일보의 창간호에서도 민중의 표현기관, 민주주의, 문화주의를 3대사시(社是)로 내놓았고, 민주주의의 정의를 "국체나 정체의 형식적 표준이 아니라 곧 인류생활의 일대 원리요, 정신이다"라고 하였고, "국내정치에 대하여는 자유주의와 국제정치에서는 연맹주의, 사회생활에서는 평등주의, 경제조직에 있어서는 노동본위의 협동주의"라고 하였다.
따라서 3 · 1운동 그 자체에서는 민주주의를 찾기 어려우나 그 배경에는 민주주의가 전제로 되어 있는 것이다.
다음 3 · 1운동의 투쟁방법에서 평화적 시위를 내세운 점이다 평화는 곧 민주주의의 원리이다. 전체주의나 공산주의와 같은 독재체제에서는 평화를 기대할 수 없다.
독립선언의 공약3장에는 "오직 자주적 정신을 발휘할 것이오,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일주하지 말라" "일체의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여·.."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3 · 1운동은 배타적이 아닌 협동정신과 질서의 존중 등 민주주의 원리에 바탕을 둔 평화적 민중운동이었다.
이선근은 3 · 1운동의 사상적 요소를 다음과 같이 체계화 시키고 있다 (이선국. 화랑도. 1971 : 214)
첫째, 화랑도 이래 민족전통과 민족신앙을 계승 수호하여 온 동학사상 즉 천도교의 민족이념이 중요 요소이었으며,
둘째, 개화독립당 이래 수입된 근대민주주의적 독립협회, 기독교를 통하여 3 · 1운동의 중요 요소가 되었고,
셋째,이상의 두 사상적 요소에다 민족의 역사와 기백을 계승하고 다시 현대 민주주의 교육으로 수련된 혁명정신이 가미되어 3 · 1운동이 완성되었고,
넷째, 사대유교사상을 위시하여 보수, 비독립, 비자주사상은 3 · 1운동에서 제외되었다.
따라서 3 · 1운동은 그 주체세력이나 이상면에서 볼 때 우리 민족의 전통사상인 화랑정신의 계승인 것이다.
3 · 1운동은 그 주체세력이나 이상면에서 볼 때 우리 민족의 전통사상인 화랑정신의 계승이며, 동학사상의 계승이라고 볼 수 있다.
3 · 1운동의 독립선언의 공약3절도 "오직 자주적 정신을 발휘할 것이요.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일주하지 말라" "일체의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여·.."라고 기록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에 대아정신이 깃들어 있다고 보겠다. 이 대아정신은 곧 「한」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원칙」 에 자극받아 우리 민족의 독립을 목표로 한 3 · 1운동은 동학혁명과 같이 민중에 기반을 둔 저항운동으로 민주주의 내지 민족주의를 사상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3 · 1운동의 최초의 지도층 민중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던 동학사상을 연원으로 하는 천도교와 서구의 자유민주주의를 신조로 하는 기독교 세력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으니 3 · 1운동은 순수한 민족운동으로 동학사상과 그 성격이 같다.
1. 역사와 민족이 오랜 민족은 그 나라에 알맞은 독특한 고유사상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 한민족은 「한」 사상이라는 고유사상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한다.
2. 우리의 고유사상은 화랑도 사상에서 찾을 수 있는데 우리의 고유사상인 화랑도사상은 유학(즉 신라682년에 당나라에서 국학이 들어오므로)에 밀려 우리의 고유사상인 화랑도 사상은 차츰 퇴폐하여 갔음을 알 수 있다
3. 우리의 고유사상인 「한」 사상은 외래사상에 밀려 유, 불, 도교 사상에 밀려 그빛을 잃었던 적도 있었지만 그 사상은 신라에는 화랑도사상으로, 고려에는 묘청사상으로, 조선조 말에는 동학사상과 민족주의사상(3 ·1정신)으로 꾸준히 이어 왔음을 알수 있다.
4. 해방 후에는 흥익인간을 우리의 건국이념과 교육이념으로 채택하였으나 아직까지 홍익인간의 이념의 기저를 알지 못하고 있기에 홍익인간의 기저는 우리의 고유사상인 「한」사상에 있음을 알게 한다.
지중해는 과거의 바다, 대서양은 현재의 바다. 그리고 태평양은 미래의 바다라고한다. 지중해 연안에서 그리스철학과 기독교문화가 일어났고 이 지중해 문화가 대서양을 건너와 북미주에 이룩한 문화가 지금 세계문화를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이 두문화는 인간의 비인간화, 자연과 인간의 균열에 의한 자원고갈 공해문제로 인류 생존여부에 있어서 심각한 문제를 가져오고 말았다. 이제 맞이할 태평양시대는 비인간화및 기계화로부터 인간의 해방, 자연과 인간의 조화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이를 지향하게 될 것이다. 황하유역의 문화의 주인공은 곧 우리배달 동이계(東夷族)이다. 이 한민족이 창조한 사상이 곧 「한」 사상이다. 「한」 사상은 이 막 문을 여는 태평양시대(the pacific age)를 주도한 사상이다. (김상일. 「한」 칠학.·1984:70).
「한」 사상은 한민족의 뿌리사상으로 단군의 홍익인간정신에서 시작하여 5000년대까지 살아 남아 온 생명력의 원천이다. 그러므로 「한」 의 대아정신은 우리 민족의 전통사상인 동시에 세계 속의 사상으로 승화할 것이다.
우리의 「한」 의 사상은 외래사상인 유, 불, 선에 가리워 그 빛을 발휘하지 못한 때도 있었으나 삼국시대는 화랑도 정신으로, 고려시대는 묘청의 자주사상으로, 조선조에는 동학사상과 민족주의사상으로 면면히 이어 오늘날까지도 계승하고 있다.
해방후 한국은 홍익인간을 건국이념과 교육이념으로 채택하여 시도하여 왔으나 흥익인간의 참뜻과 사상을 알지 못하고 막연히 삼국유사의 「고기운(古記云)」 에 나와있는 고사로만 알고있는데 홍익인간의 이념은 우리의 고유사상인 「한」 사상에 기저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 사상은 우리의 전통사상임과 동시에 앞으로 올 세계 속의 사상임을 알 수있다
강무학, 단군조선의 실종, 서울: 신원사, 1984.
김득광, 한국사상사, 서울: 한국사상연구소, 1973.
김정배, 한국민족문화의 기원, 서울: 고려대출판부, 1974
김상일, 「한」 철학, 서울: 전망사, 1984.
김상일, 「한」 사상, 서울: 전망사, 1986.
김종권 역, 삼국사기, 서울 : 대양서적, 1972.
문정창, 고조선사연구, 서울: 백문당, 1969,
문정창, 단군조선사기연구, 서울: 백문당, 1969.
박선영, 불교의 교육사상, 서울: 동화출판공사, 1981.
박인숙, 한국의 시원사상, 서울: 문예출판사, 1986.
송호수, 한민족의 뿌리사상, 서울 인간연합, 1983.
송호수, 겨레얼삼대원전, 서울 : 겨레얼연구회, 1983.
신채호, 조선상고사, 서울: 종로서관, 1948.
신채호, 신채호전집 4권, 서울: 형설출판사, 1982.
이병도 譯註, 삼국유사, 서울 : 대양서적, 1972.
유동식, 한국무교의 역사와 구조, 서울 : 연세대출판부.
최민홍 한국철학, 서울 : 성문당, 1981,
한국정신문화연구소편, 한국철학사상연구 <연구논집 83-9>, 성남: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2.
Dewey, John, Democracy and Education, Macmillan, New York,1978.
Dray, William H., Philosophy of History, Engelwood Cliffs, N.J, Prenfice-Hall, Inc., 1964.
김중길, 한국교육이념과 교육적 인간상에 관한 연구, 부산대교육대학원, 1977.
김기태, "현대교육철학의 사상적 배경고찰", 교육논총 12집, 인천교대, 1981.
김기태, "홍익인간의 교육이념에 관한 연구", 논문집(교육편), 인천교대, 1981.
김기태, "화랑도의 교육사상에 관한 연구", 논문집(교육편), 19집, 1985.
김기태, "「한」 사상의 역사적 배경에 관한 연구", 해동철학회, 14집, 1984.
김정권, "화랑도 사상에 관한 연구" 성균관대학교대학원, 1981.
박은묵, 한국교육이념의 기원과 문제점, 논문집 2집(대전간호전문대), 1976.
손인수, 문헌상으로 본 홍익인간, 문교부학술연구보고서(인문), 1969.
한기연, 한국교육의 민주화 과정에 대한 교육사상적 연구,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70.
이근철, "한민족의 전통사상에 관한 연구", 논문집. 198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