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평군 북면 지역은 대부분이 높은 산과 깊은 계곡으로 이루어
져 있으므로 가는 곳마다 자연경관이 수려하고, 아름다워, 사시
사철 나들이 인파가 끊이지 않는 하늘이 준 천혜의 고장이다. 예
로부터 인걸은 지령이라 했듯이 화악산(華岳山 1468m)의 높은 기
상의 맥이 동남쪽으로 뻗어 내리다가 잠시 이곳에 기착하여 범바
위(虎岩)를 수놓으니, 많은 이들이 이르기를 이곳에서 훌륭한 인
물이 출현할 것이라 하였다.
북면사무소가 자리잡은 지역에서 서쪽으로 광활하게 펼쳐져 있
는 제구량(濟救糧)뜰을 바라보노라면 마치 10만 대군이 먹을 양
식을 얻은 것 같고, 멀리 도마치(道馬峙)에서 발원하여 이곳을
지나 흐르는 계곡의 모습을 바라보노라면 가슴이 확 트이는 시원
함을 저절로 느낄 것이다. 그러기에 경기도 유일의 청정지역으
로 고시됨이 예삿일이 아닌 것처럼 맑고 푸른 기상의 이곳 풍광
을 찾아보지 않고서는 느끼지 못할 것이다.
서쪽으로 우뚝 솟은 수덕산(修德山 794m)은 문필봉이자 노적봉으
로 이곳을 빛내 주는 주봉으로 그 자태가 특출하다. 예로부터
이 산에는 옥녀(玉女)라는 선녀가 살았는데, 그 용모가 너무도
아름다워 젊은 총각들의 가슴을 애태웠지만 인연이 없어 아직까
지도 만나 본 사람이 없다고 하니, 어느 날 짬을 내어 찾아 들
고 싶어진다. 목동리(沐洞里)에는 죽둔리(竹屯里), 성황당(城隍
堂), 상목동(上沐洞), 평목동(平沐洞), 소목동(小沐洞)으로 자연
부락이 형성되어 있었다.
죽둔리(竹屯里)는 지금의 면사무소가 있는 지역의 소지명이다.
이 죽둔리의 유래는 아마도 높은 둔덕(언덕)이 연이어 있는 범바
위 일대의 모습과 이 지역이 보편적으로 쭉뻗은 언덕임을 나타내
는 이름이라는 것이다. 소목동(小沐洞)은 범바위 아래 부락으로
서 현재의 목동국민학교 뒤편 마을을 이름하며, 성황당(城隍堂
일명 서낭당) 부락은 죽둔리 고개(서낭당 고개) 넘어 있는 부락
을 이른다.
상목동(上沐洞)은 멱골부락, 평목동(平沐洞)은 싸리재부락이고,
하남종(下楠宗)부락은 서낭당 다리 건너편에 있었다. 멱골은 목
욕골의 준말로서 멱감는다의 뜻이므로 목동이란 말은 멱감는다
는 뜻의 한문식 이름임을 알 수 있다. 이곳 멱골은 계곡이 대단
히 깊고 그 지역이 매우 방대하다. 이곳에는 1970년대 이전까지
만 해도 화전민을 비롯하여 많은 주민들이 살았다. 멀리 앵상골
까지 이어지는 지역에서 한해의 생산되는 두태(豆太 콩)가 제구
령들판에서 생산되는 미곡(米穀)보다 더 많았다는 사실은 이 지
역이 얼마나 방대한 지역인가를 알 수 있게 한다.
목동리는 정신운동 차원이나 교육적인 면에서도 앞서가던 고장이
었다. 1910년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하고 통감부(統監部)를 설
치하여 다스릴 때 이 나라를 지킬 수 있는 대안이 민족심을 일깨
우는 것 밖에 없다고 판단한 기남(沂南) 이규봉(李圭鳳)선생은
서낭당 건너편 고을 어구에 글방(書堂)을 짓고, 학도들을 교육시
키는데 주력한바 있는데, 이때의 학도들 가운데서는 여화생도 끼
어 있었다고 한다. 이 당시 우리나라는 여자는 그저 길쌈이나 하
고 외간(外間)에 출입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던 시기였으므로
선구자의 원대한 뜻을 헤아려 보게 한다.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당시 가평 지역의 거사를 준비한 곳도
멱골과 싸리재였고 왜헌(倭憲)들과 마주쳐 싸우던 곳도 이곳 서
낭당 고개였음을 볼 때, 이 고장이 전통과, 역사와, 애국심이 서
려 있는 지역임을 어찌 모르고 넘어간단 말인가. 이곳에는 또한
각종 설화와 전설, 그리고 사랑방 이야기가 많다.
그 가운데 목동리 유경열(柳敬烈)씨가 들려준 노래 한구절을 소
개한다. 싸리재에 쌀 구하고 멱골가서 미역 사고 서낭당 가서 성
냥 사고 남종에 나무사고 소법리 소금사서 죽둔이가서 죽을 쑤
어 노루목 고개에서 나누어 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