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신장 위그루 자치구 견문기(3)
손오공이 요괴를 물리치고 삼장법사를 구한 화염산의 전경
화염산 천불동계곡
아찔한 천불동 계곡
고창고성(高昌故城)
어제 사막체험을 하느라 문명을 벗어나서인지 호텔로 가서 제대로 샤워도 하고 싶고, 화장실도 가야 했다. 트루판 시내로 들어가 저녁에 숙박할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미룬 일들을 모두 보았다.
오후 관광은 당나라 시절 고창왕국의 역사유적지인 고창고성을 첫순서로 잡았다.
499년 한나라 출신 국문태가 세운 고창국의 유적으로 트루판 남동쪽으로 46km 떨어진 곳에 있는 이 성터는 둘레가 5.4km 면적이 200만 제곱m로 방대한 크기를 느낄 수 있었다. 뒤쪽으로 붉은 화염산과 누런 황토빛 고성이 대조를 이룬다. 고창국은 트루판을 중심으로 후한이 멸망한 후 번성했다가 당나라에게 멸망했다. 당나라의 침공 위협에도 장안의 군사가 이곳까지 쳐들어 올 수 없다며 방심했다가 감숙성 돈황에 주둔했던 이광휘장군의 10만대군에게 결국 패망하고 말았다.
627년 인도로 불경을 구하러 가던 현장법사는 이 곳을 지날 때 국왕의 부탁으로 두 달간 머물면서 설법을 행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인도에서 돌아오는 길에 다시 들렀을 때 고창국은 이미 멸망하고 없었다. 사원의 정면에 있는 사각의 방형탑은 작은 감실이 뚫려 있는데 불상들은 대부분 없어지고, 벽화는 흔적만이 있었다. 탑 주변을 돌면서 불공을 드렸을 것이다. 오른쪽에 있는 복발탑은 천정에 원형의 구멍이 뚫려 있는데 현장 법사가 400명을 모아두고 설법하던 강의실로 유명하다. 인도에서 발흥된 불교가 이곳 신장에 전파된 것이 최초이며 그 후 점차 동쪽으로 이동되어 한국과 일본으로 전파되었다.
너무나 광활한 유적지라 걸어서 보기가 힘들었다. 당나귀가 끄는 두대의 마차에 나누어 타고 옛고성을 둘러 보았다. 400년간 불교가 흥행했던 고창국은 흙먼지만 나는 고성터로 변했지만 대불사(The Big Temple),방형탑 등 많은 유적지를 남겨 수많은 외국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고창고성 매표구
기념품점
마차를 이용하여 고성터를 돌아보게 된다.
70만평이나 되는 광활한 고창고성 유적지
대불사지
현장법사가 불공을 드렸던 사각의 방형탑과 강의실인 복발탑
아스타나 고분
인근에 있는 아스타나 고분에서는 첫날 우루무치 박물관에서 본 3천년된 미이라. 바로 발굴된 현장에서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아스타나 고분군(阿斯塔那古墓群)은 고창국과 당나라 귀족들이 500년간 사용한 공동묘지인 셈이다. 아스타나는 위구르어로 '휴식의 장소'라는 뜻이다. 죽음을 생의 끝으로 보지 않고, 잠시 쉬는 휴식으로 보는 것이다. 1914년 영국탐험대가 발견한 이 지하무덤 군에서는 당나라의 역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인 대량의 유물, 벽화,문서 외에도 묘표, 토우, 견직물, 그리고 미이라가 출토
됐다. 특히 216호에서 나온 풍만하고 화려한 당대 미인의 모습을 조각하여 채색한 여인의 목상, 종이로 만든관, 관을 덮을 때 쓰던 수십 점의 복희여와도가 대량 출토되었다.
아스타나고분군/1914년 영국탐험대가 발견한 이 지하무덤 군에서는
문서 외에도 묘표, 토우, 견직물, 그리고 미라가 출토됐다.
입구의 기념관 건물에는 12지상과 남녀신상이 서있다.
216호분묘실 정면에는 유교의 윤리적 가르침을 풀이한 6첩 병풍이 그려져 있다.
고향이 그리워 고향의 동식물을 그렸다는 당 장군의 그림
서유기에 나오는 화염산이 보인다.
베제크릭 천불동
베제크릭이란 위구르어로 ‘아름답게 장식된 집’이라는 뜻이다. 아름답게 장식된 집을 찾아 무르툭 계곡으로 들어선다. 양쪽으로 붉은 화염산 절벽에 싸여 있는 협곡의 오른쪽에는 천산의 눈 녹은 물이 황토와 함께 흐르고 있다. 협곡 절벽의 중턱을 따라 석굴이 구축되어 있다. 붉은 화염산과 무르툭 강과 어우러져 절경을 이룬다. 이곳은 6세기 국씨 고창국 시대부터 13세기 원나라 때까지 성지역할을 하여 불교 관련 벽화가 화려하게 조성되었다. 특히 위구르인들이 투루판을 지배했던 9-12세기에 가장 번영하였다.
당시 석굴 중에는 가운데에 주로 예불공간인 중당이 놓이고, 이를 회랑이 둘러싼 구조로 된 것이 많다.
중앙의 천장은 둥근 돔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펜으로 그린 그림처럼 섬세한 선으로 묘사한 중국 미술의영향을 받은 그림과 명암과 양감을 강조하는 위구르 및 서역양식의 그림이 있었다.
그러나 위구르인들이 이슬람교를 받아들인 후 이슬람 세력들이 들어와 벽화를 칼로 긁고 또 파괴했으며, 심지어는 눈알을 파내어 버렸다. 게다가 1898년 러시아학자 클레멘츠가 석굴을 발견한 이래, 20세기에 이르러 독일 고고학자 르콕과 그륀베델의 탐험대가 1902년부터 네 차례 조사하며 위구르인 공양도, 사천왕도 같은 수백 상자 분량의 벽화조각들을 칼과 톱으로 무자비하게 떼어갔다. 그러나 이 벽화들은 베를린박물관에 있다가 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의 폭격으로 파괴되었다.
뒤이어 일본 승려 오타니 탐험대와 아스타나 고분을 발굴한 영국의 스타인도 이 곳에 들러 남아있는 유물들을 하이에나처럼 쓸어갔다. 벽에는 아직도 약탈의 잔인한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있다.
일본이 약탈한 천불도 한 점이 우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석굴의 수도 원래 82개였다고 하나 지금은 42개만 남아있고 그나마 6개만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다.
뜯겨진 부분을 제외하면 남아있는 부분의 색채는 세월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뚜렷했다.
베제클릭 천불동 입간판
무르툭 계곡과 베제클릭 천불동 전경
39호실의 석가모니불은 도굴되고 앞 향 피우는 곳이 보수 중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중인 천불도
베제클릭 천불동과 무르툭 계곡
베제클릭 천불동 전경
베제클릭 천불동 관람을 마치고 나오다가 카메라에 잡힌 고추말리기
조글조글 주름진 모습의 화염산
저녁식사는 사천식 샤브샤브
석식을 하고 잠시 포도원 거리 산보를 마치고 예정된 위그루 민속공연을 보게 되었다. 호텔 내에 공연장이 별도로 있었는데 시간이 되어도 관람객이 우리밖에 없어 좀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포도원 거리 - 선인장 조명이 시선을 끈다.
전통 민속춤
호텔내 민속공연장에서
다음날 아침 포도원거리에서의 체조
교하고성
투루판시 북서쪽으로 10km쯤 떨어져 있는 교하고성(70만제곱km)은 글자 그대로 두 물줄기가 만나는지역에 만들어져서 천연요새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절벽 전체를 요새로 만든 모양이 기다란 항공모함과 흡사하다. 두 하천사이로 치솟은 30m 높이의 벼랑 위에 가로 300m, 길이 1650m의 고성터가 서 있다. 다리를 건너고, 비탈길을 오르면 350m에 이르는 벽돌길이 남북에 걸쳐 일직선으로 나 있다.
대로가 끝나는 곳에 광장과 거대한 사원지, 대불사가 있다. 고창고성이 흙을 쌓아서 만든 성이라면
교하고성은 흙을 파서 만든 성이라는 점이 확연히 다르다. 교하고성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신청 중이다.
대불사는 크기가 5,100평방m로 4면이 부처로 조각되어 있는데 모두 파괴되고 오직 한군데만 남아 있다. 불탑, 전망대,관서,문서저장고,카레츠(지하우물),아기묘,민가 등을 구경하고 350m나 되는 거리를 걸어 나왔다. 묘한 흙덩이 모양의 스피커에서는 중국어로 안내방송이 계속된다.
교하고성 입구
교하고성 둘레를 두 강이 휘감아 천연요새를 이루고 있는 모양이 항공모함 같다.
교하고성은 흙을 깎아 만든 성이다.
뜨거운 여름철에도 양산과 모자를 쓰고 많은 관광객이 찾는다.
중국어로 안내방송되는 스피커 200~300명의 아기가 떼죽음을 당했다.
카레츠/지하우물
집터
동서 도로
개축공사 중인 대불사지
우물
대불사 사면불
불탑
전망대
남북 주통로
기원전 250년부터 차사전국의 도읍이었던 이곳 교하성은 흉노와 한나라의 지배를 번갈아 받다가 당나라 때 도독부가 설치되면서부터 크게 발전하였다. 그러나 징키스칸의 손자에 의해 멸망되었다.
민간6천과 군 3천의 병력으로 요새를 8개월간이나 잘 지켰으나 석포에 의한 불공격으로 마침내 무너지고 말았다.
장안에서 교하성까지는 몇만 리의 먼 길로 병역 의무를 치르는 젊은 군병들이나 처자를 떼어놓고 온 장수들의 외로움은 항수병을 깊게 하였을 것이다. 당나라의 전쟁시인이라 불리는 이기는 이러한 교하성을 소재로 하여 <고종군행(古從軍行)>이란 시를 지었다. 기다리는 병사는 돌아오지 않고 서역의 특산품인 포도만 들어온다는 애달픈 시다.
낮에는 산에 올라 봉화를 바라보고
해질녘에는 교하에서 말에 물을 먹이네.
행인의 밥솥에는 모래바람이 짙고
공주의 비파 소리에는 원한이 깊다.
야영하는 만리에는 성곽 하나 없고
눈비 분분하게 대사막에 연이었네.
북쪽의 기러기 슬피 울며 밤마다 날면
오랑캐 아이 눈물은 두 줄기로 떨어진다.
듣건대 옥문관은 아직 막혀 있다는데
마땅히 목숨 걸고 경차를 따라갈까.
해마다 병사들의 뼈는 황량한 사막에 묻히는데
포도만 부질없이 한나라로 들어오네.
중식시간에도 민속공연이 --
건포도 농가
오후시간에 이 지방의 특산물을 구매할 수 있는 포도재배 농가를 찾았다. 더운 8월에 여행하는 이유도지금이 포도의 계절이기 때문이다. 건포도에도 종류가 많았다. 색갈도 다양하고 크기도 달랐다.
씨가 없는 것이 특징이나 씨가 있는 건포도도 있었다. 요즘 포도씨가 몸에 좋다는 보도가 난 후 씨있는건포도를 많이 찾는다고 한다. 씨까지 씹어도 맛이 괞찮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이제 우루무치로 돌아간다. 투루판에서 우루무치까지 3시간반이 걸린다.
가는 차창 밖으로 소금이 난다는 사해도 보이고 풀밭에는 양떼들이 작별 인사를 한다.
바람이 세차게 부는 곳에 수백개의 풍력발전기가 돌고 있다. 해외에서 본 풍력발전기 중 가장 규모가
큰 것 같다. 과연 중국의 거대한 힘을 보는 것 같다. 뜨거운 사막에 뭉게구름이 둥실 떠 있다.
8박9일의 대장정이 모두 마감이 되고 있다. 낯선 이국- 탈레반들이 나올 것 같은 흙산,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에서의 하룻밤 사막체험, 고소증으로 힘이 들었던 4,200m의 트레킹,손오공과 삼장법사의 화염산,고창고성과 교하고성의 유적지탐방,22시간의 기차여행, 42도나 되는 불볕의 트루판--모두가 머리에 남는 아름다운 추억의 장면들이다. 처음 몹씨도 궁금했던 신장성이 이제 내 몸에 녹아든 것 같은 기분이다. 고생한 만큼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는 것이 여행의 결과물이다. 평생 잊지못할 멋진 여행이었다.-e-
건포도
멀리 양떼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다.
사해의 소금밭
수백대의 풍력발전기
뭉게구름이 작별의 손짓을 한다.
-장문의 여행기 읽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첫댓글 멋진 풍경 잘 구경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