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정해철 목사를 기리며
이정화(정해철) 가정
1. ‘환고향’이라는 이름으로
1) 막내아들 손을 잡고 고국에 돌아오다
2018년 8월 21일, 나는 46살에 얻은 늦둥이 막내아들 권복이와 나의 고향땅 한국에서 인생 2막을 출발하려고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지난 21년간의 미국 선교 생활을 접고 우리는 여행 가방 3개를 들고 뉴욕의 케네디공항에서 인천공항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비행기 안에서 포근히 자는 막내를 보며 지난 세월이 가로등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남편과 나는 1982년 6천쌍 축복을 받고 1984년부터 대학 목회를 시작으로, 올해로 37년간 뜻길에서 공직을 함께한 지난날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1984년부터 1990년 대학 순전단장까지 7년간을 대학가에서 목회를 했습니다. 특별한 기억은 기독학생연합이름으로 축복2세들과 초교파운동을 했던 일…. 그리고 대학가에서 운동권과의 싸움, 참어머님과 박보희 총재님을 모시고 대학 순회 강연을 했던 기억들…. 모두 다 아름다운 기억으로 떠오릅니다.
그리고 환고향시절, 경남교구장과 송파교구장으로 5년간의 목회를 하다가 참부모님의 명을 받고 1994년 남편은 홀연히 UTS로 공부하러 떠났습니다. 홀로 남은 나는 4명의 자녀와 함께나름,,참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혼자서 어린 4명의 자녀들과 경제적 어려움과 외로움을 이겨내야 했던 세월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하늘의 은사와 식구님들의 사랑 속에서 160가정 축복을 완성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귀한 식구님들의 따뜻한 사랑으로 그 시간을 극복했던 지난날들 이었습니다.
1998년 남편은 UTS를 졸업하고, 미국에서의 첫 임지인 샌프란시스코 한인교회로 공직을 임명 받았습니다. 우리 가족은 그때 큰딸 예원이가 초등학교 5학년. 둘째 큰아들 권일이 3학년. 셋째아들권선이는 1학년 그리고 넷째가 당시 3살이었습니다. 특별히 넷째 권덕이는 참부모님께서 권덕이라는 이름을 하사 해주셨습니다. 우리 가족은 이제 아빠와 함께 살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미국 샌프란시스코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정말 새로운 각오로 출발했던 그때가 엊그제 같건만 벌써 21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제 다시 환고향이란 이름으로 야곱노정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나는 지금 무슨 승리의 보따리를 가지고 환고향 하고 있는 걸까? 라고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미국에서 목회를 하는 동안 다섯째 늦둥이를 낳아서 이렇게 막내를 데리고 환고향하고 있는 나는 감사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남편이 경상북도 군위라는 조그만 교회에서 다시 목회를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2) 마지막 불꽃을 피우기 위해
사실 남편은 한국에서 2008년 가정당의 공천으로 국회의원에 출마하기 위해 막내를 낳은 지 한 달 만인 2006년 4월 참부모님의 명을 받고 한국으로 가서 활동했습니다. 참부모님 뜻에 재도전을 한다며 혼자 한국에서 생활하다 건강이 악화되어 신장투석을 시작했습니다. 다시 미국으로 와서 7년간의 신장 투석을 하다가 2016년 신장 이식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여생을 한국에서 목회를 하며 살고 싶다고 한국으로 귀국했던 것입니다. 목회는 가족이 함께해야 한다는 협회의 지침이 있었지만 미국 생활을 정리 한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저는 미국에서 조그만 식당을 운영하면서 5명의 자녀를 돌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큰딸 예원이는 잠시 휴학을 한 후 한국에 와서 영어강사로 있었습니다. 둘째는 약사로 2세축복을 받고 손녀까지 두어서 잘 살고 있기에 걱정이 없었습니다. 셋째는 당시 코넬 로스쿨을 다니며 변호사 시험을 준비 중이었고 넷째는 치과 대학원을 막 입학하였습니다. 그리고 막내는 12살로, 미국에서 이제 6학년을 마쳤습니다. 한국말도 익숙하지 않은 막내만을 데리고 한국으로 향해야 하는 이순간 역시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미국에서의 21년 동안 여러 곳의 목회 현장에서 5명의 자녀들을 아무 탈 없이 지켜준 미국에게도 감사한 마음을 전했습니다.
미국 생활을 하면서 가는 곳 마다 길거리에서 열심히 꽃 장사를 하며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했던 지난날들…. 텍사스교구장 시절 식구로 있던 백인을 부교회장인 목회자로 세워서 지금은 미국의 5지구장으로 발탁되어 열심히 목회를 하는 존 젝슨 목사는 그야말로 신의한수 였습니다.
아직도 기억에 또렷이 남는 것은, 2000년 참부모님께서 미국 50개주 순회강연 때 5번이나 참부모님을 모실 수 있었던 은사였고 아울러 참부모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던 시간이었습니다,
우리를 태운 비행기는 조금 지나면 인천 공항에 도착합니다. 2018년 8월 22일, 새벽 4시, 아빠가 마중을 나와서, 우리는 3시간을 달려 경상북도 군위교회에 도착했습니다.
3) 마지막 순간까지 목회의 현장에서
군위는 식구라고는 단지 3가정밖에 없는, 오랫동안 목회자가 없었던 빈 교회였습니다. 당시는 430가정 종족적 메시아를 위한 출정식과 지역복귀를 위해 6개면에 지인들을 찾아 교회장으로 세우고, 주말 예배 후는 물론 시간이 나는 대로 마을회관과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어르신들을 모셔 와서 사진 찍어주는 등 축복행사가 한창이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우리가 경남 밀양교회로 발령이 나 임지가 바뀔 때 우리의 후임자로 군위교회에 한사람을 목회자로 세웠습니다. 지금은 영주교회장으로 시무하고 있는 변승연 교회장을 목회자로 세워서 공작자의 길로 연결시킨 것 또한 하늘앞에 가장 큰 실적 가운데 하나입니다.
2019년 2월, 우리 가정은 경상남도 밀양교회로 부임해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출발을 하였습니다. 천보입적이라는 큰 그림을 그리고자 밀양시 면면촌촌을 방문하여 마을회관에 사람을 모아놓고 축복 설명회를 했습니다. 그렇게 축복행사를 진행하여 약 10여 가정을 천보가정으로 입적시켰습니다.
2020년 코로나로 많은 활동을 할 수 없을 때였습니다. 그동안 제가 무릎이 아파서 밤이면 끙끙거리며 앓는 것을 보다 못한 남편이 코로나 기간에 무릎 수술을 하자며 서둘렀습니다. 그리고 2020년 12월 26일 저는 마산 무룹병원에 입원을 해서 두 무룹을 수술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입원 36일째 되는 날,,,
2021년 1월 30일 토요일 밤, 남편은 홀연히 하늘부모님 품으로 떠나셨습니다.
1월 30일 오전까지만 해도 남편은 밀양교회 스즈끼게이꼬 권사님과 제니 권사님과 함께 밀양 산외면의 식구 집을 심방 다녀오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저에게“당신 퇴원하면 우리 열심히 목회하자.”라며 전화 통화를 했던 남편이었습니다.
1월 31일 새벽 5시가 조금 지나서 , 병원에 누워 있는데, ‘목사님이 숨을 안 쉰다.’는 식구님의 전화를 받았을 때만도 믿기지 않았습니다, 어제까지만도 통화하면서 혼자 사는 것은 안 좋다며, 내가 “퇴원하면 왕비 모시듯 잘해줄게….”라며 농담을 주고받았는데, 그 말이 그만 유언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지금도 믿기지 않는 것이, 남편이 언제나 곁에서 같이 있으며 지켜주는 것 같습니다.
나는 지금 남편이 떠난 밀양교회에서 교회장으로 시무하고 있습니다.
남편은 한국에 다시 돌아와서 2년 반 동안 목회를 하였습니다. 그 기간에 천보입적을 하고, 33년 장기근속 목회자상으로 감사패를 받았습니다. 혼자 남을 나를 위해 그동안 특별하게 지냈던 진성배 원장님 부부를 믿음의 부모로 연을 맺어주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나를 목회자라는 자리에 세워주고 참아버님 곁으로 떠나신 모든 일들을 생각하면,, 이와 같은 꿈같은 일들이 우연일까? 운명일까? 생각되기도 합니다. 더욱이 올해 6천가정 40주년을 맞이하는 지금 저희 가정은 하늘부모님과 참부모님을 모시고 사랑하는 우리 식구님들과 함께 오늘도 열심히 살아보려고 마음을 다잡아봅니다.
마지막으로 [뜻길벗 세상을 품다]라는 남편의 유작을 중심으로 자서전 성격의 문집을 출판해주신 사랑하는 모든 식구님과 형제자매 여러분께 이 자리를 빌어 진심으로…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인사를 올립니다.
2. 남편 정해철 목사가 남긴 자전적인 글
1) <우리 가족 이야기>
나만 홀로 집에 남게 되었습니다. 지금 1시간 30분 거리에 있는 뉴햄프셔 주 주정부가 있는 콩코드시로 아내와 3아들이 출발했기 때문입니다.
뉴햄프셔 주는 미국에서 첫 번째로 생긴 주로서 정치의 바로미터와 같은 곳입니다. 역대 대통령들의 당선은 100% 뉴햄프셔 주에서 택한 사람이 당선이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딸 하나와 아들 넷을 낳은 애들 엄마가 큰 아들 권일이를 보러 가고 있습니다. 둘째 아들 권선은 한국에서 특별 강의를 듣고 집에 3개월 만에 돌아온 지 이틀이 되었습니다. 지금 보스톤에 있는 대학에 4학년인데, 거금을 들여 유명한 대학의 로스쿨에 보내기 위해 선배님들의 조언을 받아 학원 강습을 받고 온 것입니다.
큰 형인 권일이가 8년간의 약학 과정을 6년 만에 끝내고 콩코드 병원에서 연구 박사로 일하게 되어 방을 얻어 자취 생활을 시작한 지 1주일이 지나 보러 가는 중입니다.
첫째가 딸 예원인데, 의대 본과 1년을 마치고 한국에 가서 1년만 살다 온다고 하여 가더니 학원 강사를 하며 보람을 느끼며 지내고 있습니다. 한국의 정 문화에 푹 빠져 한국의 대학에 트랜스퍼하여 의학 공부를 하고 싶다는 카톡 문자가 왔습니다. 한국을 좋아하게 된 것은 좋은 일이다 라며 나는 적극 찬성하는 입장이었습니다.
내일모레 개학을 하면, 셋째 아들 권덕은 12학년에 올라갑니다. 그리고 늦둥이는 초등하교 2학년이 됩니다. 아들 네 명과 엄마가 한 방에 모여 하룻밤을 새우며 왁자지껄 떠들며 보내고 있을 모습을 상상합니다. 나는 지난주에 가서 방을 꾸며 주고 오느라 몸살이 날 정도로 몸의 컨디션이 좋지 않아, 이번에는 집에 머무르겠다고 하였습니다.
집사람이 저 작은 몸으로 다섯 명을 어떻게 낳았을까 생각했습니다. 아들 셋과 함께 떠나는 집사람의 차를 보면서 내가 죽을 때도 이런 기분이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 혼자 단독으로 하늘부모님 앞에 서서 적나라하게 몸과 마음을 평가 받고 나의 삶을 돌아 보겠구나 하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오늘 아침 집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죽으면 제일 찾는 것이 무엇이겠냐고 물으니 집사람은 웃으면서 먹는 것 아니냐고 하길래 “아니야 영원히 같이 살 짝이야” 라고 답을 했습니다. 사랑의 공기로 가득한 저 나라에서 부부사랑의 오관을 가지고 호흡하기 시작하는 곳, 부부가 분리가 되지 않고 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신비로운 곳이라고 답했습니다. 이것은 나의 영적 체휼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참사랑의 체휼입니다. 특히 결혼 생활이 중요한 것입니다.
내일까지 먹을 수 있도록 미역국과 된장찌개를 끓여놓고 밥도 안쳐 놓고 떠나는 집사람을 보내고 나 홀로 이렇게 거울을 보면서 이야기를 해 봅니다. “정해철! 감사하면서 살자. 작은 것에서부터 행복을 찾으며 가자, 여덟 번 죽을 고비를 이미 넘겼던 너, 덤으로 살고 있으니 착하게 살자. 저 나라를 잘 아는 너이니 세속적 욕망에 어두워 시간을 허비하지 말자. 이 아름다운 곳에 살고 있으니 더욱 더 감사하자. 소중한 인연들을 더 거룩하게 만들어 절대추억을 만들어 가자. 8가지 절대 작품의 꿈을 현실화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촌음을 아껴 쓰자.”
이런 이야기를 하며 “그래, 너, 정해철 잘 생겼다. 넌 할 수 있다.”라고 자만자족하며 재출발의 의지를 불태워 보았습니다. 가끔 이렇게 호젓하게 나만의 시간을 갖는 것은 소중한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이제 해가 지려고 하고 있습니다. 자전거 거리로 5분도 안 되는 대서양 바닷가 올드 오챠드 비치를 다녀와야겠습니다. 해가 떠오를 때도 멋지지만, 연보랏빛 노을이 길게 물드는 바다의 모습은 예술입니다. 사람도 황혼녘의 나이가 더 아름다운 것이니까요.
2) <선생님들이 그립습니다>
이제는 나뭇잎 하나 남아 있지 아니한 겨울나무들을 봅니다. 그리고 오히려 여름보다 더 검푸른 솔잎들을 봅니다.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한 새벽에 깊은 기도를 한 후에 책상에 앉았습니다.
겨울나무들이 겨울을 엄숙하고 겸허하게 받아들이며 봄을 맞는 듯 했습니다. 희망의 미래가 도래함을 확신하고 인내하며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는 의연함에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조용히 지나온 삶을 생각해 보며 반성하고, 새해 계획도 하게 되는 12월입니다. 오늘 아침에는 특히 선생님들이 눈앞에 떠오릅니다. 초중고, 대학교 시절의 선생님들이 그립습니다.
초등학교 1,2학년 담임선생님이신 문정순 선생님은 풍금을 연주하며 노래를 가르치신 기억이 납니다. 어머니 같으신 분이었습니다. 가끔 나는 그때의 노래를 부르며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그 때 배울 때처럼 눈물이 났습니다.
초등학교 3,4학년 담임선생님이신 오하영 선생님은 유명한 아동작가이며 시인이셨습니다. 지금도 인터넷 검색을 하면 마술을 하시며 수학여행 기차에 올라 봉숭아 꽃물을 손톱에 물들여 주시는 교장 출신이라고 나오시는 분입니다. 죽으면 자신의 신체를 의대생들을 위해 헌납하겠다는 유언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검색어 1위에 수년간 오르신 분입니다. 제가 추천하여 평화대사가 되신 분이기도 합니다.
초등학교 5,6학년 박창순 선생님은 안타깝게 암으로 유명을 달리하셨는데 유독 나를 많이 사랑해 주셨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수박을 사들고 찾아뵙고 넙죽 절을 하며 옛 이야기에 젖은 기억이 납니다.
중학교 1,2,3학년 담임선생님은 윤재문 선생님으로 국어를 담당하셨습니다. 지금도 일주일에 두 번 이상 메일을 보내주십니다. 청주고등학교 교장선생님으로 정년퇴직한 후에도 문단 활동과 평화대사 활동을 열심히 하시는 분입니다.
고등학교 1학년 송우용 선생님은 윤리 선생님이신데, 강직하고 사리가 밝아 분명한 처세를 가르쳐 주신 분으로 기억이 됩니다. 무언 실천하는 학생이라는 글을 생활 지도부에 써 주신 분입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는 조강득 선생님이신데, 멋진 영국 사람처럼 생긴 분입니다. 그분은 영어 선생님이셨습니다. 칠판에 나와서 쓰라는 말씀을 많이 하신 기억이 납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김동완 선생님으로, 국어를 담당하셨습니다. 고3 봄 5월인데, 우리 집에 오셔서 큰 소리로 기족들에게 말씀하시던 기억이 납니다. 내가 1등을 한 성적표를 들고 오셔서 이런 놈이 대학을 포기하려는 것 같다고 난리가 났었습니다. 나는 그 때 대학 갈 생각이 별로 없었습니다. 오로지 전도사가 되어 목회의 길을 가고 싶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선생님이 날 많이 사랑해 주셨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대학 시절에는 김진한 교수님이 생각이 납니다. 일본에서 학위를 받으신 분인데, 나와 함께 학문의 길을 같이 가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신학 공부까지 겸하면서 목회의 길을 결정한 상태였습니다. 그 분은 나에게 목회를 하더라도 박사학위를 받은 후 전문 분야를 가도 늦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교수님도 내 권유로 평화교수아카데미 회원으로 활동을 하셨습니다. 선생님들이 잘못을 채찍해 주신 것도 기억이 납니다. 고맙고 칭찬해 주시며 격려해 주시어 용기를 북돋아 주셨던 기억도 남아있습니다. 칭찬을 더 많이 하면서 살 일입니다.
지나고 보니 선생님이라는 직업은 목회와 같은 성직임을 깨닫습니다. 교직을 이수하고 교생 실습을 간 적이 있었습니다. 여학생들이 우리 집까지 찾아 온 적이 있습니다. 얼굴이 하얗고 예쁜 김숙희라는 여학생인데, 지금쯤 뚱뚱한 아기 엄마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 목회의 길이 아니었다면 선생님의 길을 갔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리고 사관학교의 길도 생각했습니다. 고등학교 등기들이 벌써 장군이 되어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 친구들보다 공부를 더 잘 했기에 나도 갈 수 있었습니다. 인생은 선택입니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지만 짧은 인생이기에 선택과 집중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목회의 길에 들어선 것을 후회는 안하지만 보다 정성을 들여 제대로 된 목회를 못한 것이 반성이 됩니다. 모든 옷을 훌훌 벗어 버리고 앙상한 가지로 겨울을 이겨내는 겨울나무들처럼 다시 오는 새봄을 위해 나의 정체성과 사명을 깊게 생각하며 준비하는 겨울이 되도록 다짐을 해 봅니다.
나를 사랑해 주시며 지도해 주신 선생님들을 언젠가 반드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고마우신 선생님들에게 선한 실적을 보여 드려야겠습니다. 선생님들이 그리운 날 아침입니다.
3) <1989년 여름방학>
나는 전국의 대학 총학 간부들 중 100여 명을 데리고 미국 연수를 온 적이 있다. 소위 운동권 학생들이었다. 민민투, 자민투, 주사파….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가 디트로이트에 잠시 머물러 세 시간을 머무는 시간이 있었다. 그때 경남대 학생이 지나가는 미국 백인 남자의 하얀 피부에 파란 눈의 아이가 귀업다며 안았고, 고추 좀 보자며 만지며 고추가 귀엽다고 했다.
이 때 몇 미터 뒤 벤치에 있던 젊은 엄마가 놀라며 경찰을 불렀다. 경찰이 수갑을 채웠다. 미성년자 성추행 범죄로 감옥에 가야하고, 최대 무기징역까지 간다는 이야기다. 안내자로 간 나와 또 한 명의 교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찌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아도 디트로이트가 얼마 전 어린이 성폭행 사건으로 떠들썩한 분위기였던 것이다.
운동권 학생들 100여 명은 그 총학 간부 학생이 풀려나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비행기도 타지 않고 풀려날 때까지 데모를 하겠다는 것이다. 공산주의 서적을 읽으며 운동을 하던 그들에게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을 여행하며 눈을 뜨고 비교해 보라는 연수였는데, 그야말로 난감한 일이었다.
순간 나는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나는 군복무 시절에 남자들도 무서워 오줌을 싸게 하는 무서운 인상의 군인이었다. 공수부대에서 8년을 근무하고 전근해 온 함 준위라는 분이 수도사단 정해철처럼 독종은 공수부대에도 없다며 혀를 찼었던 나였지만, 어린 시절 나는 꽤나 귀여웠었나보다.
누나가 말했다. “어릴 때 귀여웠던 네가 왜 이리 징그럽게 우락부락하게 되었냐고.” 어릴 때는 동네 아주머니들이 내가 동네 골목을 지나가면 나를 안고 볼을 비비며, 내 팬티를 내리고 내 고추를 만진 후, “아 맛있다 아 달다.”고 하시며 보내 주었다. 마치 그 학생이 백인 아이에게 한 것처럼 말이다.
내 고추를 만진 아줌마들이 아마 300명은 될 것이다. 기억이 생생하다. 그 때 나는 내 고추에 설탕이 묻어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이와 같은 행위가 큰 범죄였던 것이다. 옛날 한국에서는 귀엽다는 표현이 말이다. 큰일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급히 여행사를 통해 한국 변호사를 찾았다. 다행히 한국인 변호사가 한 시간 만에 공항으로 왔다. 그리고 경찰들과 아이 어머니에게 설명을 했다. 문화의 차이를 이해해 달라고 변호사가 이야기했다.
그때서야 경찰과 아이 엄마가 이해를 하고 운동권 학생을 풀어 주어 가까스로 학생들을 태우고 뉴욕으로 왔다. 그렇게 하여 뉴욕과 워싱톤 디시에서의 세미나와 여행을 마친 일이 있었다.
이제는 내 자신이 손주들 고추를 보며 옛 추억에 잠기는 나이가 되었다. 아들 넷, 딸 하나이니 몇 명의 손주들 고추를 볼 수 있으려나!
4) <워싱턴 모뉴먼트 30만 대회 40주년 기념 축제를 다녀와서>
1976년 9월 18일은 참부모님을 모시고 “미국과 하나님의 뜻”이라는 주제로 대회를 치렀던 날이었다. 벌써 40년 전의 날이 되었다.
메인에서 워싱턴 디시까지는 차로 12시간이 걸리는데, 미국 식구님들과 달려가 참석을 하였다. 미국 초창기 식구들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이번 여행은 참으로 많은 생각과 느낌, 그리고 울림을 준 날들이었다. 40년 전에 20대 청년들의 모습으로 대회를 준비하며 멋지게 치러냈던 분들이 은빛 찬란한 흰머리를 날리며 참석을 한 모습을 보고 깊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변함없이 하늘의 뜻을 져버리지 않고 줄기찬 정성으로 참부모님을 모시며 신앙의 주류를 따라 달리는 위대한 개척자들의 얼굴에선 광채가 났다.
내가 노던 뉴앙글랜드 교구장 시절, 수련회 때 백지를 나누어 주고 유언장을 써 보는 시간을 가졌는데 똑같은 내용이 있었다. 그것은 “아들, 딸들아! 부디 참부모님의 말씀과 전통을 지키며 살라”는 내용이었다.
그 수련 이후 벌써 성화한 분들이 있다. 사회적으로는 똑똑한 님들이 핍박을 받으면서도 뜻길을 가는 이유는 진실의 길이기 때문일 것이다. 참사랑, 참생명, 참혈통의 길이기 때문이다.
예배 후, 조심스럽게 와서 곁길로 가는 남편을 어떻게 하면 되느냐는 질문을 하는 백인 식구들도 있었다. 큰 강을 따르고, 넓은 바다에 계시는 부모님처럼 바다와 같은 큰마음을 품고 기도하며 가자고 답을 했다.
17일 대회날 밤에는 뉴욕 유엔에서 공연을 하고 워싱톤으로 다문화가정 무지개 어린이합창단이 왔다. 어린이 23명과 전직 장관을 포함 스탭 12명이었다. 무지개합창단의 시작은 우리 국제축복가정 자녀들이 주축이 되어 출발한 합창단이었다. 공연 중 아름다운 모습에 기립 박수를 여러 차례 받았다.
스탭들과의 저녁 회동은 아주 유익했다. 그 스탭 중 한 분은 내가 대학 시절에 대자보를 붙이며 몸으로 싸웠던 운동권 출신도 있었다. 민민투 소속이었다. 자기는 공산당이었는데, 이제 돌아왔다고 말했다. 내가 만약 영계를 모르고 원리를 몰랐다면, 나도 운동권 학생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하며 이야기를 풀어 나갔다.
차기 대선을 준비하는 모습들을 보며 젊은 패기가 느껴졌다. 그동안 멀리 있어서 본 지 오래된 식구님들과 만나니 매우 기뻤다. 미국식 허그 인사를 너무 오래하여 조금 당황하기도 했다. 사진 모습을 보고 추억을 되새기며 돌아오는 길에 젊은이들을 길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위대한 1세들의 전통을 젊은이들이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
그렇다면 나는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할 것인가? 인생 2막이 기다리고 있다. 돌아온 후 대서양 바닷가 페리비취 바닷가에서 조용히 나에게 물어 본다.
2016년 9월 20일
보스톤 가까운 메인주 대서양 바닷가 페리비취에서
5) <대서양의 새 해 첫 아침>
어젯밤 철야를 했습니다. 안사람과 아이들과 함께 천일국 성초를 켜고 영시에 하늘 앞에 경배를 하고 훈독을 했습니다. 천력(음력)은 아니지만 양력으로 새 해를 열면서 정성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철야를 했습니다. 철야를 하면서 나를 돌아보고 청마의 모습으로 하루를 천년처럼 살아야겠다고 다짐을 했습니다.
작심삼일이 되지 않는 계획표 실천이 되도록 야무지게 시간을 보내야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침이 되어 떠오르는 해를 보러 바다를 찾아 해변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일 년 내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우리 집 앞을 지나 달리는 할머니가 인사를 먼저 합니다. 할머니의 정신력과 정성이 대단합니다.
바닷가에 다다랐습니다. 화창한 날씨에 바람이 잔잔하니 바닷물결은 비단결 같았습니다. 바닷가에는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늘 하던 대로 퓨리탄들을 태우고 미 대륙으로 안내한 거룩한 대서양을 바라보며 바위섬과 바위섬 사이에 하늘을 모시고 경배를 한 후, 가정맹세를 큰 소리로 암송했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했습니다. 내 보고 기도의 주제는 정오정착 신앙, 가정맹세의 완성, 남북통일실현, 세계평화실현, 8개의 절대 작품의 완성입니다.
원화도 동작을 할 때와 구보할 때 그리고 걸을 때도 마음속으로 20음절을 외칩니다. 정오정착, 가정맹세, 남북통일, 세계평화, 절대작품을 외칩니다.
조금 있으니 연세가 지긋하신 어르신들이 바다를 구경하러 왔습니다. 여기 사람들은 먼저 굿모닝하며 인사를 참 잘합니다. 친절합니다. 나도 올 해는 먼저 인사를 하려고 합니다.
돌아오는 길에 구호를 외치며 달리니 몸도 맘도 뜨거워졌습니다. 올해는 만나는 사람들 속에서 참사랑의 추억을 만들고 싶습니다. 힐러리, 킴, 탐미 부부, 마리, 사라, 케리, 로빈 전도 대상자들을 매일 이름 부르며 기도하려 합니다. 꿈이라도 나타나 역사해 달라는 기도를 할 것입니다.
청마처럼 달리고 싶습니다. 120년 전인 1884년 갑오경장 때와 100년 전인 1914년 때의 1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 때와 비슷한 조국의 현실입니다. 특히 1914년 당시 국제 정세 상황과 비슷해져 있는 극동 아시아 속의 조국의 현실을 염려하는 학자들의 말이 귀를 두드립니다.
이럴 때일수록 똑바로 정신을 추스려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하루를 천년처럼 살자, 구체적인 계획표를 짜서 살자라고 다짐을 했습니다. 하늘부모님을 모시고 참사랑을 실천해 보자고 다짐을 했습니다.
2013년 11월 30일 (천력,음력),2014년 1월 1일 양력)
보스톤 가까운 대서양 바닷가 석불산 기슭에서
6) <소중한 인연>
드디어 한 가정이 이사를 오셨습니다. 한국인 축복 가정이 우리 가정뿐이었는데, 선배 가정 한 가정이 오신 것입니다. 아드님이 우리 동네 소재의 대학 의예과에 합격하게 되어 오시게 된 것입니다. 우리 아들딸의 모교이기도 합니다.
인생은 회자정리라는 말이 있듯이 헤어짐은 만남으로 다시 이어지게 되나 봅니다. 35년 전, 대학 시절에 열정적으로 원리 강의를 해 주시던 학사장님 가정입니다. 반갑고 기뻐서 시간이 흐르는 줄도 모르고 담소를 나누었습니다. 진성배 교수님 가정입니다.
20년 전, 송파교구장 시절에 만나 깊은 인연이 있기도 한 선배 가정이십니다. 총명하고 예쁜 첫째 딸 지혜가 갑작스레 희귀병에 걸려 승화하기 직전, 교수님은 담임 목회자였던 나를 병실에 들어오라는 부탁을 하여 생명줄 호수를 뽑기 전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기도하기 전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몸을 보여주시었습니다. 하나님과 참부모님을 대신한 자리이니 부탁한 것이랍니다.
송파 교회를 헌납하는 데에 교수님 가정이 거금 수천만 원을 헌금하시기도 하셨습니다. 미국에서 공부하러 왔을 땐 장학금도 수백만 원을 주셨습니다.
잊을 수 없는 선배님이자, 스승이신 교수님 가정이 이사 오시어 요즈음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말이 통하고 정서가 통하는 가정이 바로 옆으로 이사를 오셨으니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참사랑과 정이 흐르는 소중한 추억들을 레고 집을 짓듯이 만들어 가고 싶습니다.
이 아름다운 메인에서 거룩한 인연을 계속 이어서 만들어 간다는 생각에 가슴이 부풀어 옵니다. 교수님의 통일 사상에 대한 깊은 통찰, 절대 불변의 통일가 신앙에 대한 신념, 젊은 인재를 기르기 위한 열정과 조국에 대한 이야기 등 대화를 할수록 깨우쳐지는 점들이 많은 스승이십니다.
영혼이 맑고 진실하신 교수님의 청정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 자신도 정화되는 기분입니다.
사람은 반드시 다시 만나게 되는구나! 만나는 사람들 속에서 진실과 사랑이 넘치는 추억을 만들어 나가야겠구나 다짐하게 됩니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생각하니 한 분 한 분들이 소중하게 다가옵니다.
아침저녁으로 여기는 가을바람이 붑니다. 밤에는 귀뚜라미들이 노래합니다. 올 가을은 쓸쓸하지 않고 가슴 들뜨고 기쁜 마음으로 맞이하게 됩니다.
7) <충심봉신 멸사봉공 대스승 김봉태님>
새내기 대학시절
억수 같은 여름비 한창이던 날들
도담삼봉 원리연구회 하계 원리수련회에서
용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길같이 원리를 강의
님으로부터 위대한 스승을 보았습니다.
대학원리연구회에서 공직자로 모시는 시절
님은 부족한 저를 하프 타프 초대사무국장
축복자녀국장, 교육국장, 순전단장으로
임명하여 주시어 젊은 시절 아름다운
추억을 쌓게 하시었습니다.
환고향 시절
고향에서 생계를 위해
막노동을 하며 땀 흘리는 곳에서
경남교구장으로 가라는 명의 전화를
주시었습니다.
님의 간증은
제가 강의할 때 반드시
전하는 간증담이 되었습니다.
중학교 때 버스가 배 위를 지나가는
교통 사고를 당했는데
그 때 영계에서 더 살고 오라고 해 주신 분이
대학교 4학년 때 입교하고 보니 그 분이 참부모이셨다는 간증
장안학사장 시절
참부모님이 새벽 2시에
갑자기 오셔서
너는 내가 누군지 알지? 영계에서 중학교 때 봤지? 하시며
앞으로 될 일을 말씀해 주셨는데,
돌아보니 그 말씀대로 다 이루시었다는 간증의 말씀
님은 나의 스승이요, 목회자였습니다.
충심봉신, 멸사봉공, 참사랑의 위대한 성자이십니다.
영계에 가시어서도 참아번님 모시고
더 큰 일 많이 하실줄 압니다.
님이 남기신 천로역정을 기억하면서
영원히 자랑할 전리품을 만들어 가겠습니다.
하늘나라에서
더 큰 빛을 발하소서!
님이 주신 사랑을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2015년 1월 16일
보스톤 가까운 대서양가 석불산 기슭에서
3. 유고문집 <뜻길벗 세상을 품다>를 간행하며
1) 이길연(효정문화원 문학분과위원장)
오늘 우리는 정해철 목사님의 유고집 출판기념회에 참석을 하였습니다. 이 자리가 있기까지는, 정 목사님의 재세 시 따뜻한 인품과 정리를 잊지 못하고 선후배와 지인들께서 이 자리를 만들어주셨다고 생각됩니다.
2021년 1월 31일 정해철 목사님에 관한 비보가 전해지던 날, 저는 정 목사님이 얼마나 뜨겁게 한 평생을 살았나 하는 것을 실감있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침에 소식이 전해지자 얼마 안 되어 많은 분들이 이와 같은 유고집을 내야 되지 않느냐는 제안이 SNS를 통해서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일주일이 지나고 열흘이 지나고 나서 유고집을 만들자는 이야기가 나온 것이 아닌 바로 그날이었습니다. 특히 ‘행복나눔방’과 ‘심정문학회’에서 정해철 목사님의 책이 발간돼야 한다며 앞장섰습니다. 성화하신 그날 아침부터 유고문집에 관한 뜻을 모았던 것이 남달랐다고 생각됩니다.
일반적으로 유고문집이라고 하는 것은 필자가 살아생전에 남긴 글을 후진이나 자녀들이 출간하게 됩니다. 필자는 당연히 그 책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실 유고집의 출판기념회에서는 성화하신 분에 관한 일화나 회고담을 나누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입니다. 그러나 저는 정 목사님의 유고집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윤동주는 우리나라의 국민 시인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는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유학 당시 독립운동을 했다는 미명 하에 그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사망하게 됩니다. 윤동주 시인은 살아생전 자신의 시집을 발간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육필 원고 19편을 제책하여 세 부를 만들었습니다. 그중에 한 부을 친구인 정병욱에게 전달했습니다. 윤동주가 사망한 후 서울대학교 교수가 된 정병욱은 유작을 정리해 <하늘과 별과 바람과 시>라는 제목의 시집을 출간했습니다. 이렇게 윤동주는 세상에 알려져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이 되었습니다. 윤동주는 유고집이 간행됨으로써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시인이 된 것입니다.
저는 목사님이라는 호칭보다도 시인이라는 호칭이 보다 다정다감하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시인이라 부르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정해철 시인의 유고문집 출판기념회를 간행하고자 함께하고 있습니다. 정 시인께서는 호칭으로 ‘뜻길벗’이라는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이 호칭에 관해 남달리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벗’이란 단순한 친구를 넘어 뜻의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한편 정 시인께서 또 다른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것은 다산 정약용 6대손이라는 것입니다.
정약용은 정조의 총애를 받던 신하로 당대의 문장가이자 혁명가였습니다. 강진의 유배지에서 <목민심서>를 집필하게 됩니다. <목민심서>는 관리가 백성을 사랑하는 규범에 관해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백성의 생활을 직접 체험하면서 쓴 것이 바로 목민심서입니다.
또 하나 정약용은 정약종, 정약전 형제들과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천주교를 받아들이는데 혁혁한 공로가 있었습니다. 당대에는 천주사상을 서학이라고 불렸습니다. 천주교가 전파될 때 선교사가 우리나라에 천주사상을 전한 것이 아니고 당시 청나라로부터 수입된 서적을 통해 학자들이 연구한 가운데 자생적으로 전파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씨 일가의 역할은 그야말로 지대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서 정씨 일가는 멸문지화를 당하는 수모를 겪게 되었습니다.
정해철 시인께서는 그와 같은 정약용의 후손이라는 내용에 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지냈습니다. 정 시인께서는 주변의 동료들과 간단하게 무크지 형식으로 시집을 간행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공식적인 문집으로는 이번 유고집이 처음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책의 말미에 게재된 문집해설에서도 밝혔습니다마는, 이번의 유고문집 편찬이 가능했던 것도 정 시인께서 평상시 쓴 작품을, 마치 민들레 홀씨처럼 SNS를 통해 전파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산파한 작품들을 오히려 역으로 독자들로부터 다시 작품을 모았습니다. 그동안 정 시인께서 쓴 작품을 어디엔가 보관했겠지만 작품을 받아봤던 독자들에게 수집을 한 것입니다. 그 작품 수가 거의 700~800편에 이르렀습니다. 중복된 것을 뺀다하더라도 대략 500~600편 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수집된 작품의 장르도 아주 다양했습니다. 문학적인 측면에서 보게 되면 현대시를 비롯하여 수필, 수상록, 단편소설, 고전 시조에 이르기까지 다층적인 작품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문학을 공부한 입장에서 봐도 정말 다양한 측면에서 문학적인 실험을 했다고 보여집니다. 그런가 하면 신학과 철학 더 나아가 사회 전반적인 분야에 관심을 갖고 글을 남겼습니다. 그 누가도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가운데는 가족뿐만 아니라 교회에 관련된 내용 특히, 참부모님과 교회 섭리에 관해 지대한 관심을 표명했습니다.
정해철 시인께서는 과연 종교가인지 문학인인지 그 본류를 구분하기 어려웠습니다. 천주사상을 전파할 때 천주가사를 활용했듯이 시인께서는 그의 이념과 사상을 전하기 위해 문학을 활용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미사일이 핵탄두를 장착해 목적지까지 전달하듯이 그의 문학은 참부모님과 통일사상을 전달하는 도구와 같은 역할을 하였습니다. 마치 ‘뜻길벗’이라는 필명이 이를 입증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벗’은 공동체인 동시에 섭리 가운데 천일국을 표명할 수도 있습니다. 책 제목을 <뜻길벗 세상을 품다>라고 설정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결국 천일국을 실현하기 위한 문학적인 장치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참어머님을 중심한 천일국의 실현과 안착을 위한 뜻 섭리에 기여하고자 했던 정 시인의 의지가 담겨있다고 여겨집니다.
그렇다고 정 시인께서 순수 문학작품을 구사했던 것도 배재할 수는 없습니다. 가족에 대한 서정적인 작품과 특히 자녀에 대한 글은 강렬한 정서가 깃들어 있습니다. 또한 식구에 대한 많은 사연들이 작품 가운데 담겨 있습니다. 유고문집 <뜻길벗 세상을 품다>는 문학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철학이나 신학적인 측면에서도 연구를 요하는 작품집이라고 생각합니다.
2) 진성배(효정국제학술재단 이사장)
제가 역사편찬위원장을 할 때로 기억합니다. 두 가지 소중한 내용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참아버님의 고등학교 시절 앨범을 와세다 대학의 친구가 보전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일본까지 갔었지만 그 친구가 원본은 주려고 하지 않아 복사를 해서 아버님께 봉헌해드렸던 적이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문윤국 할아버지는 애국자 33인 가운데 들어가셨어야 합니다. 그러나 대신 이수근 씨를 추천하고 자신은 명단에서 빠지셨습니다. 어찌 보면 그런 점에서 문윤국 할아버지는 정말 대단하십니다. 대한민국의 3.1운동 기초가 되는 조상이었고, 또 그런 가문에 아버님이 출생을 하셨던 것입니다.
문윤국 할아버지의 유고집은 제자가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보관한 것이 당시에는 종이가 없어서 낙엽에다 쓴 것을 많이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세월이 지난 다 헐어서 글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내용들이 많았습니다. 당시는 종이나 쓸 가구가 없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마지막 정산에서 서당을 차려 제자를 기르면서 주옥같은 한문으로 시조를 많이 남기셨습니다. 시실 우리나라에는 당대 최고의 문필가이자 한 학자로서 는 서울대학교의 장기근 교수님이 계셨습니다. 우리 식구 교수였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한문을 한글로 이해하기 쉽게 번역하고 그 책을 편찬했습니다. 그것이 제가 역사 편찬 위원장을 할 때 문학과 연관된 두 가지의 업적을 부모님에게 올려드렸습니다. 당시 아버님은 당신의 고등학교 시절에 전교생이 찍은 사진 가운데 굉장히 잘 생긴 모습이었습니다.
고등학교 앨범을 보니까 중앙에 전체 교사들이 서 있었습니다. 사진 속에 당시 선생들은 칼을 차고 있었습니다. 선생들이 있고 거기에서 그 맨 중심에 서 계신 아버님은 정말 아버님이셨습니다. 그렇게 말씀드렸더니 아버님도 굉장히 좋아하셨습니다.
문윤국 할아버지의 그 시도 실제로 살펴보니까 당신의 생애와 제일 걸 맞는 그런 제목이었습니다. 그것이 <끝나지 않은 전쟁>이었습니다. 장기근 교수는 아주 차원 높은 시조라는 찬사를 했습니다. <끝나지 않은 전쟁>이 지금 역편에서 출간되어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참 자녀님들에게도 한 권씩 다 증정을 해 드렸습니다.
오늘 이 책을 조금 전에 받고 살펴보니까 제1장이 ‘거룩한 전쟁’이었습니다. 그래서 문윤국 할아버지의 높은 수준의 직품집과 이 책의 제1부가 ‘거룩한 전쟁’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면에서 우연히 일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전체적으로 읽어봤습니다. 49페이지에 나와 있는 작품을 한번 읽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 정해철 목사가 항상 제일 자랑하는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아버님이 미국에 계실 때 진흙에 빠져 거의 구제 불가능한 위급한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아버님이 뻘에 자꾸 자꾸 들어가시는 상황에서 정 목사가 아버님을 구했습니다. 이렇게 정해철 목사님이 아버님을 업고 나오신 것이 첫 번째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항상 자신이 어머님을 업었다는 것을 자랑했습니다. 어머님을 한번 업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유고문집에 아버님을 구한 내용의 작품은 없고 어머님을 업은 것은 49페이지에 나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한번 읽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보름달이라 물이 빠지니 뻘이 생겨 배가 바닷가로 못 나온다.
모두는 바지를 무릎 위까지 올렸는데 어머니가 몸이 안 좋으시니 아버지가 어머니를 업으시겠다고 어머니 앞에 앉으신다.
어머니는 아버지 무릎이 안 좋으시고 허리 다치면 큰일이라고 소스라치신다.
형님들은 하나같이 덩치 좋은 네가 업으라 한다.
아버지도 그럼 내가 업고 가라고 하신다.
아버지는 역사적인 모습이니 사진을 찍으라고 하신다.
아버지 대신 어머니를 업고 걸으면서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 이제는 많이 늙으시어 힘드시는구나 생각하니 눈물이 하염없이 흐른다.
보름달도 흐느낀다.
이것을 제가 앉아 읽으면서 정해철 목사의 한 생애를 가장 집약적으로 나타낸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아버님을 뻘에서 구한 유일한 하나의 제자이고, 그다음에 어머님을 손수 등에 업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 뻘에서 아버님 대신 어머님을 업고 건너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려 보름달도 흐느낀다는 내용입니다. 이것이 이제 한마디로 우리 정해철 목사의 삶이라고 여겨졌습니다. 아마 그런 역사는 역사 가운데 오직 정해철 목사만이 간직한 역사적인 경험이고 또한 그런 것들을 이제 스스럼없이 얘기하면서 정 목사님을 마음속에 기억하게 됩니다.
정해철 목사와 저와는 굉장히 인연이 깊습니다. 정 목사가 고등학교 때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린 내용이 있습니다. 서울에 있는 선배들이 제일 귀여워했던 것이 청주에서 온 정해철이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선배들을 잘 따랐습니다. 아주 등치가 큰 정 목사가 선배들의 귀염둥이 역할은 했습니다. 그 당시 일본의 레슬러 이우끼 닮아서 그렇게 불리기도 했습니다. 정 목사는 가는 곳마다 저와는 참 인연이 깊어 저희 가정과는 아주 역사적인 경험을 하였습니다.
그다음에 또 미국 메인주에 갔을 때였습니다. 우리 애를 교육시키기 위해서 집사람이 한 13년 동안 미국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매지 비데 폴리에 가니 또 그곳에 있는 겁니다.
정 목사님은 전 생애를 통해서 저희들하고 같이 움직였다고 생각됩니다. 그때 우리 사모님이 자녀 교육과 가정을 건사하기 위해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은 제가 필설로 다 얘기를 할 수가 없습니다. 정 목사님은 현실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사모님은 그 당시 스시집을 운영하면서 레스토랑을 했습니다. 저희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그곳에 가서 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눴는데, 사모님의 수고는 참 말할 수 없이 고된 삶이셨습니다.
그 당시 정 목사님이 일주일에 3번씩 병원에서 투석치료를 받았습니다. 무척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병을 원화도로 고치겠다는 것입니다. 정말 무모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해변가에 가서 오전 내내 원화도를 했습니다. 나는 그런 꿈같은 얘기를 어떻게 하나 의문이 들었습니다.
투석을 원화도로 고치겠다는 생각을 하니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정 목사는 현실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꿈의 사람이었고 이상의 사람이었습니다. 완전히 현상적인 세계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그런 분이었습니다.
당시 정 목사님은 저희 집에 거의 매일 왔습니다. 이야기를 하는데, 그 내용들이 항상 신나는 겁니다. 사모님은 지금 스시 집을 운영하면서 매일 힘이 드는데, 꿈과 희망에 벅차 있는 것입니다. 희망의 노래를 부르는 겁니다. 이 집 아드님들이 대단한 효자들입니다. 셋째 권덕이는 칫과 의사지요. 권선이는 변호사지요. 큰아들 권일이는 병원에서 약사로 이제 어머니를 자주 보려고 괌으로 왔다는 겁니다. 미국 시민으로 미국 영토 내 제일 가까운 데가 괌 아니에요. 막내 권복이가 늦게 태어났지만 복덩어립니다. 미국의 법에 어린 자녀를 낳게 되면 의료비를 무료로 해 주는 제도가 있습니다. 아빠가 치료하는데 큰 혜택을 가져다 준 겁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정 목사는 항상 꿈에 부풀어 있는 겁니다. 지금 이 문집이 나오기 전에 큰딸 예원이가 타이핑을 해 조그마한 시집들이 몆권 나왔습니다.
정 목사님은 마지막 성화 전날까지 목회를 하면서 신방을 다녀왔습니다. 임지에서 거룩한 순직을 한 것입니다. 이를 가상히 여겨 어머님께서 특별한 사랑으로 원전까지 결정해 주셨습니다. 그런 목회자가 없습니다. 참부모님으로부터 그런 사랑을 받은 목회자가 많지 않습니다. 나는 정해철 목사의 한국 목회는 마지막 목회를 하고 성화하기 위해서 왔다고 생각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저와는 믿음의 부자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제가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정해철 목사님은 꿈의 사람이지만은 성화식도 그렇고 원전식도 그렇고 오늘 이 자리까지 귀한 출판기념회가 마련되었습니다. 성화한 지 1년이 되었는데 유고문집을 축하하고 정 목사님을 추모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다고 하는 것은 정말 의미 있는 대단한 것입니다. 늪에서 아버님을 구하고 어머님을 아버님 대신하여 등에 없고 눈물을 흘렸던 그 효의 마음이 오늘 우리들을 한 자리에 모이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정 목사님은 정말 귀하신 분입니다. 이와 같은 기억을 우리의 마음속에 귀하게 간직해야겠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어머님 한 분밖에 안 계시니까 어머님을 어떻게 통일의 어머니와 세계 평화의 어머니로 우리가 모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한 분 어머님을 위해서 모든 생애를 투입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어떤 정 목사님을 기리기 위해 우리들의 삶의 이정표라고 여기며 뜻을 위해서 우리가 매진하는 것밖에 없지 않나 생각을 하면서 오늘 축사를 마치겠습니다.
3) 황선조(선문대학교 총장)
안녕하십니까? 존경하는 정해철 목사 유고문집 출판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김희임 위원장님을 비롯해서 출판위원 여러분 모두에게 진심어린 존경과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는 저에게 늘 형님이라고 불렀고 저는 늘 정교구장이라고 불렀습니다. 오늘 그렇게 편하게 호칭하도록 하겠습니다. 정 교구장께서 정말 갑작스럽게 천성길로 삶의 자리를 옮기고 나서 꿈에 그를 뵌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매우 건강하고 키는 조금 더 크고 몸은 조금 더 빠진 모습이고 정장을 하고 아주 바쁘게 움직였습니다. 저에게 큰 웃음으로 다가온 그였습니다. 천성에 가서 참아버님을 모시고 자유롭게 신나게 일할 수 있다면 그 또한 얼마나 좋은 일인가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되었습니다. 그가 이 땅에 남겨놓은 그 좋은 시들을 모아서 오늘 출판하게 된다니 정말 동료인 저로서 매우 감회가 새롭고 정 교구장 역시 정말 기뻐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저는 정해철 교구장과 40년 이상 가까이 지냈습니다. 함께 유학생활도 했고, 또 함께 동역자로서 일들을 많이 했었습니다. 그는 저에게 동역자이고 함께 뜻길을 가는 친구였습니다. 하지만 또 남다른 형제의 정을 느끼는 그런 관계로 그와 제가, 또 그의 가족과 제 가족이 함께 지내왔습니다. 정해철 교구장께서 첫 번째 시집을 낼 때 축사문을 부탁해서 축사를 써 준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정해철 님이 시를 쓴다는 것은 소가 웃을 일이다.” 그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우리 정교구장께서 시를 쓴다 하면 모두가 고개를 갸우뚱했을 것입니다. 외적으로 풍겨지는 정교구장은 그야말로 장군 스타일, 전형적인 사내 스타일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서 어떻게 시가 나올 수 있을까 하는 점이였습니다. 정교구장은 외적으로는 정말 사내다움이 있었지만 내적으로 보면 정말 정이 많고 다정다감하고 그리고 순수한 그런 열정들이 있었습니다. 정해철 목사에게서 그분의 시 샘, 그분의 시 밭은 아름다운 정서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순수한 인간적인 면, 뜻에 대한 담백한 열정 이런 것들이 그 분에게서 시가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정해철 교구장께서 미국에서 쭉 목회 활동을 하다가 한국으로 귀국을 했습니다. 그리고 지방에 내려가서 정말 순수하게 식구들을 사랑하고 참된 목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매일 지인들에게 그가 느낀 그대로, 그가 갖고 있는 감정 그대로 시를 써서 보내왔습니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정교구장의 시를 받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계산해 보니까 성화한 당일 그는 아침에 짧은 시를 보냈고, 또 저녁 9시가 넘어서 역시 한 마디 시를 보냈습니다. 제가 뒤에 정교구장 핸드폰을 살펴보니까 성화하기 한 20분 전까지 역시 그런 시의 나눔을 했었습니다. 얼마나 시를 사랑하고, 삶의 느낌을 쓰고 나누기를 좋아했는지 그의 생애를 통해서 우리는 알 수가 있었습니다.
저에게 정해철 목사가 누구냐 이렇게 물어본다면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는 깊은 정서가 있는 분이다.’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정해철 교구장은 자연을 보면 느낌을 갖는 사람이었습니다. 느낀 걸 그대로 밖으로 담백하게 표현해내는 그런 장점이 있었습니다. 두 번째로 정해철은 누구냐. 아마 ‘정해철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거다.’ 그는 누구와도 맺히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원수가 없다.’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정교구장은 누구라도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특별히 그가 미국에서 목회를 했었을 때, 우리 미국 식구들이 정교구장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저는 행사 때 오랜만에 미국 식구와 정교구장과 만나는 장면을 옆에서 보았습니다. 매우 기뻐하고 양떼가 목자를 만나는 것처럼, 그런 만남의 광경들을 목격한 적이 있었습니다. 정교구장의 진면모가 정말 저 깊은 인간적 교류, 누구에게도 가식이 없는 진솔한 자신의 모습을 상대를 위해 사랑을 줄 줄 아는 그런 정교구장의 남다른 장점이 있는 것을 저는 느끼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 그는 정말 뜻에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와 제가 약 40년 동안 많은 교류가 있어왔는데 만날 때마다 한번도 뜻에 대한 대화를 놓은 적이 없었습니다. 특별히 뜻길 가운데서도 교육에 대한 관심이 많았습니다. 같이 우연히 어딜 지나가다가 정말 좋은 풍광이 나오면 “아~ 저곳에 아버님 수련소를 지었으면 좋겠다” “원화도를 저기서 한 번 해봤으면 좋겠다” 이런 뜻에 대한 이야기가 늘 생활 가운데 나오는 것을 많이 느끼고 발견하고 교류해왔었습니다.
참아버님을 모시고 같이 알래스카에서 낚시도 하고 또 같이 물놀이도 한 적이 많았습니다. 아버님께서 정교구장을 바라볼 때 그 미소가 참 남달랐습니다. 제가 느끼기에는 아버님께서 ‘야~ 저놈이 다음에 뭐가 될까’ ‘어떤 일을 잘 할까’ 아주 믿음직한 사람을 느끼면서 생각하시는 모습을 뵌 적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알래스카에서 낚시 나갔다가 물이 들어와서 아버님을 등에 업고 모셔야 될 때 정교구장의 등을 딱 댔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절대로 당신의 몸을 함부로 맡기지 아니하십니다. 매우 아버님이 크시지만 섬세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버님이 정교구장의 등에 업혀서 물을 건너려는 그런 장면을 옆에서 보고 있었던 저는 ‘아~ 아버님께서 얼마나 정교구장에 대한 믿음이 컸던가!’ 하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오늘 그의 유고집, 이 땅에 남겨두었던 글들을 모아서 이렇게 출판을 가지니 정말 감회가 새롭습니다. 다시 한 번 김위원장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수고하신 출판위원 여러분 모두에게 정말 깊은 존경과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4) 손병호(다문화평화연합 회장)
오늘 우리 정해철 목사님 유고문집 출판기념회 자리에 서고 보니까, 우리 정 목사님이 같은 친구로서 더 생각이 나고, 특히 가족을 보니까 가슴이 좀 울컥합니다. 책의 내용에 관해 자세히는 모르지만 유고집 제목이 <뜻길 벗 세상을 품다>이었습니다. 저는 행사가 시작되면서 책을 받고 ‘참, 이 제목을 잘 잡았다.’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우리 인간이 소우주다 보니, 우주를 품다 이런 정도가 돼야 하지 않나 생각해 보았습니다.
정해철 목사님은 등이 유달리 넓었던 것뿐만 아니고 정말 가슴이 넓고 깊었던 그런 분이었습니다. ‘세상을 품다’는 것은 우리 정해철 목사님이 어떤 분인가 하는 것을 한마디로 알 수 있다고 생각되어 졌습니다.
저는 정해철 목사님과 고등학교 1학년 때 만났습니다. 서로 고등학교는 다르지만 같은 학년이었습니다. 우리가 활동했던 청주성화학생회는 워낙 우리 선배님들이 후배들을 강하게 지도했기 때문에 동기들끼리는 쉽게 가까워질 수 있었습니다.
청주성화학생회는 거의 날마다 모였습니다. 오후 5시면 모여 집회를 하고 심지어 어떤 때는 성지로 갔습니다. 어떤 때는 한 학년 선배가 아래 후배를 구타를 하며 교육을 시켰습니다. 당시는 선배님들이 혹독하게 지도할 때였습니다. 등치 큰 우리 정해철 목사는 항상 선배님들한테 공손하고 고분고분하며, 그러면서 뭔가를 배우려고 하는 그런 자세였습니다. 그와 같이 모범을 보였기 때문에, 덕택에 우리는 좀 덜 힘들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좀 원활한 성화 활동을 할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정해철 목사님은 오늘 진 교수님이나 황선조 총장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성정이 아주 뜨거웠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원리 말씀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야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자기 스스로는 고등학교 1학년이라 원리 강의를 할 수 없으니 많은 학생들을 교회로 데리고 왔습니다. 모일 때마다 매일 데리고 왔습니다. 하도 많은 사람을 데리고 와 당시청주성학생회가 어느 정도 활성화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덕분에 엄청난 수로 늘어났습니다. 언젠가는 그 반 전체가 다 온 것 같았습니다. 그런 아주 뜨거운 마음으로 열정을 다했던 우리 정해철 목사님이 지금도 친구로 제 마음에 진하게 남아있습니다.
정해철 목사님은 후배나 또는 동료들한테 무언가 헌신적으로 나눠주려고 했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그때 당시 그는 형님 밑에서 생활하다가 상황이 어려우니까 자취집을 얻어 나왔습니다. 교회에 자주 나와 전도도 해야 되고, 선배님들 쫓아서 모임에도 나와야 했기 때문에 눈치가 보였던 것입니다. 교회 옆으로 자취집을 구해 왔는데, 그는 정이 많아 성화학생들이 수시로 그곳 자취방으로 몰려갔습니다.
저도 그 자취집에 종종 갔는데,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 모이면 밥솥 째 내어놓고 식사를 대접했는데 반찬으로는 고추장과 김치였습니다. 그리고 왜간장에 비벼 먹는 정도였습니다. 그는 정이 많다 보니까, 자기가 퍼서 먼저 나한테 한 그릇을 주었습니다. 또 같이 간 친구한테도 나눠주면서 얼마나 남았는지, 자기는 솥에 남은 것을 박박 긁어서 먹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가까운 친구들이나 동료들을 먼저 생각하는 헌신적인 자세로 뜻길을 갔습니다. 큰 덩치에 배고플 텐데도 불구하고 자기는 뒤에 더 적게 먹으면서 퍼주는 그런 친구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희 집으로 가끔 친구를 데리고 갔습니다. 집에 가면 어머니는 친구가 밥을 잘 먹으니까 옛날 말로 고봉이라고, 밥사발에 올라갈 수 있는 대로 밥을 수북하게 많이 퍼주는 것입니다. 하도 맛있게 먹으니까 어머니가 다른 밥을 더 떠주며 많이 먹으라고 권했습니다. 가끔 집에 어떤 특별한 일이 있으면 해철이를 좀 불러오지 그랬냐고 할 정도로 어머니도 친구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당시는 교회도 어려웠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성화학생들에게는 항상 계몽 전도를 나가든지 또 교회를 위해 펀드레이징을 하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우리는 충북뿐만 아니라 외부에까지 전도를 나갔습니다. 당시 많이 했던 사업이 숟가락과 포크와 같은 생활 용품을 비닐에 싸서 차 안에서 고학생이라며 판매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도매로 떼어올 돈이 들고 또한 이익이 생각보다 크지 않아 성미 사업으로 방향을 돌렸습니다.
주로 시골로 가서 사업을 하게 되는데, 문제는 성미가 잘 돼도 걱정이었습니다. 받은 곡식이 무거웠기 때문입니다. 그 무거운 것을 들고 오려면 힘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끙끙대며 힘들어하면, 정해철 친구는 자신이 좀 힘이 세다며 우리 것을 받아가지고 왔습니다. 그것을 어디까지 메고 오다가 다시 또 뒤로 돌아가서 끙끙거리는 사람들의 짐을 또 받아 앞에까지 가져다 주는 등 특별히 배려와 동정심이 많았던 친구였습니다.
나는 우리 정해철 친구를 생각할 때마다 흰 도화지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흰 도화지에는 무슨 그림이든지 그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순박한 사람으로, 저와는 성화 시절부터 많은 추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예비고사가 있었습니다. 성화학생회 활동을 열심히 하다 보니까 공부할 시간이 별로 없었습니다. 청주 성화학생회 회장을 하다보면 매일같이 모여 활동해야지, 전도 나가야지 하니 예비고사를 떨어지는 경우가 많았니다. 그러니까 서로 회장을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에 올라가자 성화학생 회장을 누군가 맡아야 했습니다. 제가 다니는 고등학교 선배들이 거의 줄줄이 회장을 맡다 보니 같은 학교에서 계속 맡게 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정해철 친구가 저한테 와서 너는 대학을 꼭 들어가서 큰 지도자가 돼야 하니까 회장을 맡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정 할 사람이 없으면 자기라도 맡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상대에 대한 배려를 마음 깊이 손수 실행하는 친구였습니다. 상대를 진심으로 생각하는 그런 친구가 바로 우리 정해철 목사님입니다.
원리연구회 시절에 어떻게 해서든지 대학을 먼저 복귀하고, 대학을 복귀하기 위해서는 대학생 40명을 확보를 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그때 김봉태 원리연구회 회장님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했습니다. 청주에서는 대학생 40명을 21일 수련회에 보내는 성과를 거뒀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사람은 바보가 바뀔 수 있다고 합니다. 바보는 그냥 하나만 믿고 요령을 피우지 않고 순수하게 열정을 바치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정해철은 어떻게 보면 그야말로 바보였습니다. 너무나도 순수했고 너무나도 착했습니다. 누구와도 타협이 없었던, 어떤 면에서 보면 바보였던 것입니다. 주변이나 다른 사람들이 약삭 빠르지 못하다고 할 만큼 순수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것부터 챙기는 세태와는 달리 자신부터 희생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항상 확신에 차 있었습니다.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서 한순간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참부모님과 관계가 있거나 뜻길에 대해서는 결코 뒤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한 길로 갔던 사람입니다. 낙관적으로 세계를 보고 한 길만을 고집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정 목사님은 마치 외부에서 온 이방인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앞만 보고 전진했습니다. 주변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형제를 사랑하고 뜻길을 가는 동기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자신이 손수 희생을 선보였던 그러한 친구이자 목사였습니다.
불교의 화엄경에,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을 수 있고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에 이를 수 있다’는 글이 있습니다. 중요한 때에 그는 가족을 남겨둔 채 육신을 버리고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이제 참부모님과 하나가 되어 천상 세계로부터 먼저 뜻을 이뤄야 되겠다는 그 순수한 뜻과 열정을 하늘이 아셨기 때문입니다. 바람에 꺼져가는 촛불도 다시 키우시는 하나님이 우리 정해철 목사님을 천상세계의 천일국 완성을 위해서 먼저 부르신 것입니다.
정해철 목사님이 평상시 남겼던 시와 설교, 그리고 많은 글을 오늘 이렇게 한권의 책으로 묶어서 남기게 된 것은 바로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그의 열정 의지와 순수성을 가진 정해철 목사님을 우리가 다시 한 번 되새길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 유고문집을 출간하게 된 것을 뜻깊게 생각을 합니다. 특별히 수고해 주신 행복나눔방 회장님을 비롯하여 우리 이길연 박사님 그리고 이돈성 교수님에게 정말 고맙다는 인사를 전합니다.
순수하고 열정 어린 패기를 지닌 정 목사님을 생각하며 뜻길을 가는 우리는 누구나 다 동지가 돼야 합니다. 이 유고문집은, 천상 세계에서 정 목사님이 이룩하고 있는 이상세계를 생각하며 우리가 지상세계에서 실천해야 할 지침서로 출간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정 목사님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기는 회고의 시간이 되었으면 하는 차원에서 축사에 가름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