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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보기 <2019년을 마무리하는 자리에 절친 3인방이 모였다. 이제 코치로 활약하는 손시헌(왼쪽)과 이종욱 코치, 그리고 여전히 현역 선수인 권오준이 털어 놓는 야구와 우정 이야기.(사진=이영미)> |
말 그대로 ‘죽마고우’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17세 고교 동창들의 우정은 40세가 된 지금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오히려 세월의 흐름과 함께 그들의 우정은 깊이를 더해만 갔다.
“이 자리에 (정)종수만 참석하면 제대로인데, 종수가 못 와서 아쉬워.”
손시헌 코치(NC 다이노스)는 KBO 심판으로 활약 중인 정종수 심판을 떠올렸다. 권오준(삼성 라이온즈)이 한 마디 거든다. “종수가 있었다면 정말 재미있었을 텐데.”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종욱 코치(NC)의 얼굴에는 미소가 한가득이다.
1980년생인 권오준, 손시헌, 이종욱은 선린정보산업고(선린인터넷고) 야구부 출신이다. 권오준과 손시헌은 화곡초-선린중-선린정보고까지 초·중·고 내내 같은 교문을 이용했다. 이들 중 이종욱이 가장 먼저 은퇴했고, 최근 손시헌이 뒤를 따랐다. 투수인 권오준이 지금도 현역으로 뛰고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
지난 12월 중순 경남 창원의 한 음식점에서 진한 우정으로 똘똘 뭉친 3명의 전·현직 야구 선수들이 모였다. 시종 유쾌했고, 때로는 진지했던 3인방의 길고 긴 이야기들을 소개한다.
‘종박’이 나타났다!
권오준(권): 고등학교 시절 야구부 선수들 중 운동 신경이 가장 뛰어난 선수가 종욱이었어요. 대부분 중학교 선수들이 같은 재단의 고등학교로 진학하는데 반해 종욱이는 선린중학교 출신이 아니라 홍은중학교에서 왔거든요. 처음에는 ‘쟤 뭐지?’ 싶었어요. 까무잡잡하게 생긴 애가 발이 엄청 빠르더라고요. 절로 눈이 갈 수밖에 없던 선수였습니다. 종욱이 별명이 ‘종박’인 거 아시죠(영화 ‘옹박’에 나온 배우가 이종욱의 외모와 닮아 생긴 합성어 별명)? 별명 그대로였습니다.
손시헌(손): 탄탄한 체격, 빠른 발, 다부진 외모의 종욱이는 금세 눈에 띄었어요. 본능적으로 친해지고 싶은 생각이 들게 하더라고요. 반면에 종욱이는 낯선 환경, 낯선 선수들과 어울리는 게 힘들었을 겁니다. 적응하는데 애를 먹는 듯 했거든요.
이종욱(이): 고교 1학년 때의 저는 ‘이방인’이었어요. 홍은중 출신이 저 혼자였으니까요. 적응하기가 무척 어렵더라고요. 오준이는 처음부터 야구 잘하는 선수로 보였어요. 2,3학년 선배들이 오준이를 대하는 태도가 달랐거든요. 속으로 ‘쟤랑은 친해져야겠다’라고 생각했었죠. 시헌이요? 시헌이는 그때만 해도 눈에 들어오는 선수가 아니었어요. 키도 작고, 곱상한 외모라서 야구를 잘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우연한 계기를 통해 시헌이랑 친해질 수 있었어요.
원본보기 <3인방 중 가장 먼저 은퇴 후 코치의 길로 접어든 이종욱 코치.(사진=이영미)> |
어떤 계기였을까요?
이: 야구를 못하겠더라고요. 낯선 환경을 감당하는 게 너무 버거웠어요. 저만 외톨이라는 생각에 아예 학교에 가지 않았던 거예요. 그런데 시헌이가 저와 통화하려고 집으로 전화했다가 어머니한테 사실대로 말하는 바람에 탄로 나고 말았어요. 당시 어머니한테는 거짓말로 학교 간다고 말하고 나와서는 거리를 배회했거든요.
손: 종욱이랑 친하지는 않았지만 종욱이의 운동 신경에 감탄했던 터라 그런 친구가 운동을 그만두려고 한다는 사실이 납득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종욱이 집으로 전화를 했던 것이고요.
만약 그때 손 코치가 이 코치 집으로 전화하지 않았다면 선수 이종욱은 존재하지 않았겠네요.
이: 그랬을 겁니다. 누군가 제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면 다시 야구부로 돌아가지 않았을 거예요. 재미있었던 건 어머니의 반응이었어요. 원래 집에서는 제가 야구하는 걸 못마땅해 하셨거든요. 야구 그만둔다고 하면 좋아하실 줄 알았는데 제일 반대하셨던 어머니가 더 화를 내시더라고요.
권: 종욱아, 어머님이 왜 그러셨는지 알아? 네가 공부로는 대학에 못 간다는 걸 아셨기 때문이야(웃음).
이: 맞는 말이야. 어머니가 현실적으로 생각하신 거지(웃음). 시헌이 덕분에 한바탕 난리가 난 후 다시 야구부에서 훈련을 시작했고, 그때부터 시헌이랑 친해지기 시작했어요. 어떻게 보면 그 해프닝으로 진짜 친구를 얻게 된 셈이죠.
클래스가 남달랐던 권오준
3인방의 고교 시절 스승은 정장헌 전 감독이었다. 홍은중에서 이종욱을 가르쳤던 정 전 감독은 3인방이 고2가 됐을 때 선린정보고 야구부 감독으로 부임했다.
손: 감독님은 우리가 연패를 해도 화를 내지 않으셨어요. 당시 체벌이 있던 시대라 야구하면서 맞는 게 큰일이 아니었는데도 감독님은 선수들을 때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딱 한 번 오준이를 크게 혼내신 적이 있었어요. 이 이야기는 오준이가 직접 하는 게 좋겠네요.
권: 고2 때 동국대와 원정 연습 경기가 있던 날이었어요. 제가 팔꿈치 부상을 당해 꼭 챙겨먹었던 약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날 그 약을 챙겨가지 못했고, 감독님이 나중에 이 사실을 아시게 된 것이죠. 감독님이 그토록 화를 내신 건 처음이었어요. 선수들 보는데서 엉덩이를 때리셨을 정도였으니까요. 모든 일이 정리된 후 감독님이 매직을 가져오시더라고요. 그리고 제 모자에다 ‘약’이라고 크게 써주셨어요. 맞은 건 아팠지만 감독님의 마음이 느껴져 오히려 큰 감동을 받았던 것 같아요.
이: 야구는 잘하고 볼 일이에요(웃음). 제가 좀 전에 말했잖아요. 오준이는 클래스가 달랐다고.
손: 오준이 뿐만 아니라 우리 학년이 감독님한테 많은 사랑을 받았어요. 모두 문제 일으키지 않고 성실하게 생활했는데 고3 때 오준이랑 종욱이가 잊지 못할 해프닝으로 멋진 엔딩을 선사했습니다.
원본보기 <손시헌 코치와 권오준. 친구와 함께 있을 때 가장 즐거운 모습을 나타낸다.(사진=이영미)> |
무슨 해프닝이었을까요? 궁금하네요.
권: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헛웃음 밖에 안 나와요. 고3 때 전국대회를 마치고 휴가가 주어져야 하는데 성적을 내지 못했다고 감독님이 휴가를 안주시는 거예요. 그때 이상하게 바다가 보고 싶더라고요. 강원도 정동진 가서 일출 구경하자고 친구들을 설득했었죠. 마침 저랑 종욱이, 그리고 정종수는 졸업 후 진로가 결정된 상태라 3명은 의기투합했고, 다른 친구들은 학교 훈련 마치고 저녁에 합류하기로 약속이 됐어요. 우리 셋은 학교 훈련에 빠진 채 방배동 친구 집에 가 있었는데 그새 학교에서 난리가 난 거예요.
이: 운동 시간이 오후 1시부터였는데 12시부터 여기저기서 ‘삐삐(무선호출기)’가 오더라고요. 오준이 말대로 순수하게 바다를 보고 오려고 했지 우리가 야구를 그만두려고 훈련에 빠진 건 절대 아니었는데 감독님, 코치님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던 것이죠.
권: 거듭 강조하지만 우리는 정말 순수했어요(웃음). 전국대회도 끝났으니 여름에 바다 한 번 보고 오려고 했을 뿐인데 야구부가 발칵 뒤지어질 정도로 대형 사고로 번지고 말았어요.
그런데 손시헌 코치는 왜 합류하지 않았던 건가요?
손: 저는 진로가 결정 나지 않았거든요. 오준이 종욱이처럼 마음 편하게 바다 타령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웃음). 그래도 훈련 마치고 친구들과 함께 바다는 보러갈 생각이었는데 일이 확대되는 바람에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권: 계속 삐삐가 오는데 처음에는 확인하지 말자고 했다가 여러 차례 ‘8282’가 찍히는 걸 보고 그제야 음성 메시지를 확인했어요. 맨 처음에 시헌이가 이런 메시지를 남겼더라고요. “야! 큰일났어! 빨리 학교로 들어와”라고. 그래도 바다 보러 나왔는데 바다도 못 보고 돌아가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자존심도 있는데. 종욱이한테 “우리 돌아가더라도 바다는 보고 돌아가자”라고 말했습니다.
이: 다시 결의를 다지고 있는데 이번에는 코치님이 삐삐에 음성메시지를 남기셨어요. 내용을 확인해 보니 코치님이 “야, 이놈들아! 너희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진짜 가버리면 어떡해”하시며 울먹이시더라고요. 코치님 이야기에 사태가 심각해졌다는 걸 알 수 있었죠.
권: 저녁에 친구들이 오긴 왔는데 2학년 후배들도 따라왔더라고요. 우리를 설득하겠다면서요. 학교에서 집으로 전화를 하는 바람에 아버지는 야구 그만두라며 크게 화를 내셨고요. 우리는 단순히 바다를 보러 가고 싶었을 뿐인데 일이 이상하게 꼬였던 것이죠. 결국 바다행은 취소했고, 친구들이랑 삼겹살을 먹으러 갔습니다. 어차피 학교 들어가서 맞을 게 뻔한 데 고기라도 먹고 들어가서 맞자고 생각할 만큼 철이 없었어요(웃음).
그런데 그 바다는 나중에 가도 되는 거 아닌가요? 무단으로 훈련에 빠지면 문제가 될 거라고 예상했을 텐데요.
이: 어리고 순진했던 시절이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도저히 이해 안 되는 행동이었죠. 저는 정종수, 권오준을 따라갈 정도의 레벨이 안됐거든요. 제가 왜 그 친구들과 한 배를 탔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어요.
손: 저는 친구들과 함께 있지 못했다는 사실에 자격지심을 갖기도 했습니다. 강심장을 갖고 있는 친구들이 굉장히 멋있어 보였거든요. 제가 친구들보다 심장이 작아서 야구를 이 따위로 하고 있나 싶은 자괴감이 들기도 했고요.
이: 아니 거기서 왜 심장의 크고 작음이 나와?(웃음)
원본보기 <2015년 삼성의 권오준이 NC 손시헌을 상대로 몸에 맞는 볼을 던졌던 장면.> |
서로 다른 야구의 ‘길’
선린정보산업고를 졸업한 3인방의 길은 제각각이었다. 권오준은 삼성 라이온즈의 지명을 받고 프로팀에 입단했고 이종욱은 영남대학교로, 손시헌은 뒤늦게 동의대학교 야구부에 들어갔다. 고등학교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그들은 서로 다른 야구 인생을 만들어가야 했다.
손: 3명 중 유일하게 돈을 버는 오준이가 저랑 종욱이를 잘 챙겼어요. 한 번은 오준이가 진한 남색의 옵티마 승용차를 끌고 동의대에 놀러온 적이 있었어요. 어찌나 멋있어 보이던지. 그때 대학 동기들이 오준이가 제 친구라는 사실을 알고 굉장히 부러워했거든요. 오준이가 학교에 와준 덕분에 제 체면이 설 수 있었죠.
이: 그건 저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때 오준이가 저를 중국집에 데려가서 짜장면 뿐만 아니라 탕수육까지 시켜주더라고요. 대학생이 탕수육 사먹기가 쉽지 않았던 시절이었거든요. 탕수육을 주문하는 오준이 모습에서 빛이 나는 듯 했어요. 그때 속으로 다짐했었죠. 나도 오준이처럼 빨리 프로에 가고 싶다고.
권오준 선수 입장에서는 친한 친구들과 프로의 출발선에 함께 서지 못한 부분이 아쉬웠겠어요.
권: 그렇죠. 처음부터 같이 시작하길 바랐는데 둘 다 대학으로 갔으니까요. 종욱이는 대학 졸업 후에 현대 유니콘스의 지명을 받았지만 시헌이가 지명 받지 못해서 안타까웠거든요. 다행히 고등학교 때 인연을 맺었던 김광수 코치님이 두산 코치를 맡게 되면서 시헌이를 이끌어주셨더라고요. 시헌이가 2003년 신고 선수 신분으로 두산에 입단했다가 그해 7월부터 정식 선수로 등록돼 1군 경기에 나섰어요. 정말 기뻤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시헌이가 저를 상대로 굉장히 좋은 성적을 올렸다는 사실입니다. 무슨 공을 던져도 다 쳐냈으니까요.
손: 그냥 대충 친 거야(웃음).
권: 시헌이는 제 공도 잘 쳤지만 삼성 투수들 상대로 통산 타율이 3할이 넘을 정도였습니다. 오승환의 공도 센터로 넘겨버렸으니까요. 나중에는 승환이가 시헌이를 고의사구로 내보내더라고요.
이: 와, 나는 그때 오준이 공에 손도 못 댔는데.
권: 시헌이는 두산 시절, 삼성 투수들 공을 제일 잘 쳤던 선수였어요. 종욱이는 제 공 빼고 다 잘 쳤었고.
손: 제가 오준이를 믿고 타석에 들어선 이유도 있었어요. 사이드로 공을 던지는 오준이가 설마 내게 몸쪽 공을 던지진 않겠지 하는 믿음이 있었던 거죠. 못 쳐도 본전이잖아요. 제가 못하면 친구가 잘 되는 거니까. 한 번은 안타를 쳤더니 오준이가 열이 받았는지 다음 타석에서 150, 151, 150km의 스피드로 저를 상대하더라고요. 그 타석은 3구 삼진으로 끝나 버렸습니다.
권: 제가 시헌이한테 계속 당하니까 나중에는 벤치에서 시헌이 타석이 되면 저를 교체시키더라고요. 옆으로 빠지는 커브볼도 방망이를 집어 던지면서 쳐내는 시헌이를 잡아낼 방법이 없었어요. 오승환이 한 타자 상대하면서 연속으로 6개의 슬라이더를 던진 적이 있을까요? 그런데 시헌이한테는 그렇게 공을 던졌다니까요.
손: 내가 은퇴하지 않았다면 오승환을 한 번 더 상대해 볼 수 있었을 텐데(웃음).
손시헌 코치는 권오준 선수를 상대했을 때 몸에 맞는 볼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겠어요.
권: 제가 먼저 말씀드릴게요. 서른 살 넘어서부터는 2개 정도 몸에 맞는 볼이 나왔던 것 같아요. 그때는 우정이고 뭐고 제가 사는 게 급했거든요.
손: 오준이 공에 처음 맞았을 때는 ‘아, 오준이도 공이 빠지는구나’라고 생각했어요. 두 번째 맞았을 때는 살짝 의심이 들었지만 ‘설마’했었죠. (권오준을 쳐다보며) 오준아, 너 그때 일부러 나 맞춘 거니?
권: 몸쪽으로 던지면 피해야지, 안 피한 네가 문제였어(웃음).
손: 2018년부터 오준이 공을 치기 어렵더라고요. 그래서 그만뒀어요. 오준이 공 못 치면 집에 가야한다고 생각했거든요(웃음).
이: 결국 투수인 오준이가 제일 오랫동안 선수 생활을 하네요.
권: 저는 친구들이 은퇴해서 정말 아쉬웠어요. 종욱이랑 시헌이가 두산에 있을 때 삼성이랑 맞붙게 되면 훈련 시간에 두산 더그아웃으로 자주 놀러갔거든요. 김경문 감독님이 저를 보시면 꼭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오준아, 나는 종종 네가 우리 팀 선수같아”라고요.
이: 오준이가 외모는 강해 보여도 속정이 깊어요. 우리가 대구로 원정가면 오준이가 밥 많이 사줬어요. 오준이가 서울로 원정 왔을 때도 오준이가 밥 사주고. 친구들한테 밥을 많이 사줘서 선수 생활을 오래 하는 것 같아요(웃음).
원본보기 <2018년 애리조나 스프링캠프에서의 손시헌, 이종욱 코치의 모습.(사진=이영미)> |
우여곡절의 야구 인생
오랜 선수 생활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희로애락’의 압축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사람들 기억 속에는 즐겁고 기쁜 순간보다 아프고 실망했던 일들이 더 강렬한 이미지로 남아있기 마련이다. 3명의 친구들도 형태만 다를 뿐 엇비슷한 아픔을 겪었다.
권: 가장 기억에 남는 아픔은 세 번째 팔꿈치 인대 접합 수술을 받고 재활하다 2014시즌 개막 전 팔꿈치 골절 부상을 당했을 때에요. 투수 생명을 담보로 세 번째 수술을 받은 후 2013년을 재활에만 매진했고, 2014년 1월 괌에서 개인 훈련하던 중 자전거 타다 넘어지는 바람에 부상을 당한 거예요. 2014시즌부터 건강한 모습으로 마운드에 서려고 그 힘든 재활 프로그램을 소화했던 건데 다시 부상을 당했으니 그 충격이 얼마나 컸겠어요. 무엇보다 구단에 너무 미안하더라고요. 처음에는 부상을 숨기고 참고 던지려다가 공을 던질 때마다 머리카락이 곤두 설 만큼 통증이 극심해지는 걸 느끼고 감독님한테 사실대로 말씀드렸었죠. 그때는 야구고 뭐고 다 때려 치고 싶더라고요. 구단에서 저를 잡아줬어요. 많이 배려해주셨고요. 그냥 그 손을 놓을 수도 있는 건데 안 놓으시더라고요.
이: 저는 현대에서 방출됐을 때가 생각나요. 구단에서 사무실로 나오라고 해서 갔더니 제게 자유계약선수가 됐다고 말씀하시는데 그게 무슨 의미인지를 몰랐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2군에만 있었고, 연봉 계약을 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 자유계약이 제가 원하는 금액을 이야기하는 건 줄 알고 잠깐 고민도 했었죠. ‘얼마를 불러야 할까? 한 500만 원만 더 달라고 할까?’하고요.
손: 진짜 순진했구나.
이: 구단과 연봉 협상을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나중에 알게 됐어요. 제가 잘렸다는 사실을요. 사무실에서 나오자마자 바로 시헌이에게 전화했어요. ‘나 잘렸다’면서. 그때가 2005년 12월 23일이었습니다.
손: 저는 그때 구단 사무실에서 김태룡 단장님을 만나 연봉 계약서에 막 사인을 하려던 순간이었어요. 종욱이 전화를 받고 “일단 기다려봐”라고 말하고선 김태룡 단장님께 종욱이를 데려올 수 있는 방법이 없느냐고 여쭤봤던 게 기억이 나요.
이: 사실 시헌이한테 전화했던 건 도와달라는 의미보다 하소연이라도 하려고 했던 건데 시헌이는 어떻게 해서든 저를 도와주려고 나선 거예요. 그해 시헌이가 골든글러브를 수상할 정도로 잘 나가는 선수였거든요. 만약 두산에서 테스트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지 못했다면 저는 부천고등학교 코치로 갔을 거예요. 선배가 자리 만들어 둘 테니 오라고 했었으니까. 제가 2군에서 보여준 것도 없고, 상무 제대 후에 팀을 나온 터라 다른 팀에 입단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했어요.
권: 종욱이가 그때 제게 전화했었다면 삼성에서도 종욱이를 데려가려고 했을 거예요. 당시 양일환 코치님이 종욱이가 두산으로 간 사실을 알고 상당히 아쉬워 하셨어요. 삼성이 영남대랑 연습 경기를 많이 했는데 잘 치고, 잘 달리고, 어깨까지 좋은 종욱이가 코치님 눈에 띄었다고 하시더라고요. 만약 종욱이가 팀을 나온 사실이 알려졌다면 삼성에서 바로 데려가려고 했을 겁니다.
이: 그때 내가 삼성으로 갔다면 살아남지 못했을 거야. 돌이켜보면 당시의 두산행은 어떤 운명과도 같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요?
이: 제가 상무에 있을 때 두산이 한국시리즈를 앞두고 상무와 연습 경기를 가졌어요. 당시 제대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였는데 두산과 연습 경기를 하면서 자꾸 두산의 외야를 확인하게 되더라고요. 그때는 현대로 복귀를 앞두고 있었는데 말이죠. 또 연습 경기인데도 최선을 다해 뛰었어요. 그때 왜 제가 중요한 경기도 아닌 상황에서 몸을 던지며 플레이했는지 지금도 의아할 정도예요.
손: 그 연습 경기에서 쉽게 내야 땅볼이 될 수 있는 공에도 종욱이는 마치 만화의 한 장면처럼 베이스를 향해 달려갔어요. 너무 빨라서 다리가 보이지 않았으니까.
이: 시헌이의 부탁 때문인지 두산 구단에서 테스트 받으러 잠실야구장으로 나오라고 했는데 정작 야구장에 나가 보니까 테스트를 안 하는 거예요. 투수들 훈련하는데 같이 달리기만 하라고 할 뿐이었고. 그리고 연말이라는 시기는 프로팀에서 공개 테스트 자체가 존재하기 어려운 시기예요. 그런데 제게 기회가 주어진 것이죠.
손: 사실 그 테스트는 별다른 의미가 없었어요. 이미 구단에서는 종욱이를 입단시키려고 했으니까. 제가 김태룡 단장님께 큰 소리쳤어요. 저보다 더 많은 연봉을 받아낼 선수이니 꼭 잡아달라고요. 그런데 군대 갔다 오니까 진짜 저보다 연봉을 더 많이 받고 있더라고요. 2년 만에요(웃음).
이: 고마운 분들이 많았어요. 염경엽 당시 현대 과장님도 두산에 직접 전화하셔서 저를 적극적으로 홍보해주셨거든요. 팀 내부 사정으로 아까운 선수를 내보냈지만 두산에서 자신의 몫을 해낼 선수라고 소개해주셨으니까요. 시헌이는 물론이고요. 제일 고마운 분은 김경문 감독님입니다.
김경문 감독님은 왜요?
이: 상무와의 연습 경기 때의 제 모습을 기억하신 건지는 몰라도 말도 안 되게 저를 계속 1군 선수단에 포함시켜주셨어요. 테스트를 통해 들어온 선수가 1군 스프링캠프에 가는 게 말이 돼요? 그런데 저를 데려가시는 거예요. 물론 스프링캠프에서 김광림 코치님이랑 연습하다 ‘이러다 죽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지만요.
훈련이 힘들었나요?
이: 말도 마세요. 아침에 훈련 시작해서 밤 12시 전에 숙소에 들어가 본 적이 없었어요. 팀 훈련을 모두 소화한 다음에는 야간에 김광림 코치님과 개인 훈련을 시작했는데 하루 스윙을 1000개씩 50일 동안 반복했어요. 손바닥 전체에 물집이 잡히고 까지고 들려서 방망이를 제대로 돌리지 못할 정도였지만 단 하루도 훈련을 거른 적이 없었습니다. 그걸 버텨냈어요. 2군에 있어야 할 선수가 1군 캠프에서 살아 남을 확률이 1% 밖에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 1%의 확률을 잡기 위해 미친 듯이 훈련에 매달렸습니다. 수차례 손바닥에서 피가 나는 걸 보면서도 그걸 견뎌내니까 시즌을 1군에서 시작하게 되더라고요.
손: 그때 종욱이랑 자주 통화했는데 통화할 때마다 못 버틸 것 같다고 하소연하더라고요. 저는 김경문 감독님의 스타일을 잘 알고 있으니까 무조건 버티라고, 그러다 보면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거라고 말했는데 하루는 종욱이가 자신의 손바닥 사진을 찍어서 보내주는 거예요. 그 사진을 본 순간, “이건 아니지! 종욱아 그냥 못하겠다고 해!”라고 소리쳤어요. 그 손으로 야구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결국 절친 두 사람이 같은 팀에서 야구를 하게 됐네요.
이: 제 자랑 좀 할게요(웃음). 당시 시헌이는 두산의 슈퍼스타였어요. 경기 마치고 야구장을 나서면 팬들이 모두 시헌이한테만 사인을 받았어요. 저는 무명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저한테는 거의 사인 요청이 없었습니다. 이후 몇 개월이 지났어요. 이번에도 시헌이가 앞장 서고 제가 그 뒤를 따라 나가는데 이번에는 시헌이가 아닌 제게 더 많은 사인 요청이 들어온 거예요. 시헌이는 그냥 버스에 올라타고 저는 팬들한테 둘러 싸여 사인을 해주고 있고. 정말 희한한 장면이 연출된 것이죠.
손: 솔직히 그때 좀 충격 받았어요(웃음). 종욱이랑 같이 나가면 항상 제게 사인 요청을 하시던 분들이 어느 순간부터 종욱이한테 몰리더라고요. 군대 다녀오니까 종욱이는 제가 올려봐야 할 정도로 큰 선수가 돼 있었어요. 베어스의 최고 리드오프이자 ‘허슬두’의 선봉장 역할을 맡아 팬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었죠. 친구가 정말 자랑스러웠고 부럽기도 했습니다.
원본보기 <권오준의 선수 생활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
이제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권오준은 2000년대 삼성 왕조를 이끌며 21년간 마운드를 지켰다. 그에게 붙는 ‘원클럽맨’은 자랑스러운 훈장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아무리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해도 마흔 살 넘은 투수에게 현실은 은퇴를 종용하기도 한다.
권: 모두가 제 은퇴를 기다리는 것 같아요(웃음). 구차하게 선수 생활 이어가지 말고 은퇴하라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제가 선수로 계속 마운드에 오르려고 하는 건 자신있기 때문이에요. 자신도 없는데 개인 욕심으로 이 자리에 있는 건 절대 아니거든요. 그동안 좋은 일들만 있었던 게 아니잖아요. 그 어려운 과정을 거친 덕분에 20년 이상을 버틸 수 있었을 것이고요.
이: 오준아, 나는 네가 정말 부럽다. 어릴 때 선배들이 그런 말 많이 했잖아. ‘유니폼 입었을 때가 행복하다’라고. 내가 요즘 그 말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어. 할 수 있을 때까지 해. 숫자에 연연해하지 말고. 몸이 뒷받침된다면 말이야.
권: 고마운 이야기다 정말로. 종욱아, 나는 선배들한테 받은 게 정말 많아. 신인 때 경험한 스프링캠프 생활도 잊지 못할 거야. 새벽 2시 전까지는 절대 잠자리에 들지 않았어. 침대에 양반다리하고 앉아서 대기하고 있으면 선배님들이 이런저런 심부름을 시키셨거든. 라면 끓여 오라고 하면 라면 끓여서 갖다 드렸는데 나는 그 시간이 힘들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어. 내가 존경하는 선배님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행복했던 거지.
이: 개인적인 바람이 있다면 저랑 시헌이가 못한 걸 오준이가 해줬으면 좋겠어요. 저도 선수 생활을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는데 은퇴 후 3개월 지나니까 야구가 다시 하고 싶어지더라고요.
권: 남들 눈에는 제 모습이 구차해보일 수 있어요. 객관적으로 봐도 이미 세 차례의 수술을 했고, 해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절박함으로 승부를 벌였으니까요. 나이를 먹으니까 외부의 시선에 자꾸 신경이 쓰이고 마음이 가요. 그래서 약해지기도 하고. 저는 선배님들한테 받은 게 정말 많아요. 제가 선수 생활하는 동안 그 모든 걸 제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가야 하는데 그걸 다 하지 못해서 선배님들한테 너무 죄송한 마음이 커요.
이: 선수 때는 저만 잘하면 되거든요. 그런데 코치는 절대 그럴 수가 없어요. 코치 첫 해에는 ‘야구 선수 이종욱’을 버리지 못하더라고요. 쉽게 버릴 줄 알았는데 그게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자꾸 선수 시절을 돌아보게 되는 것 같아요. ‘그때가 좋았지’하면서요.
손: 저는 종욱이보다 지도자 세계에 뒤늦게 뛰어들었고, 종욱이의 조언에 많은 도움을 받고 있어요. 아직 선수 시절의 습관들을 버리지 못했는데 시간을 갖고 적응해 가려고 노력 중입니다. 저는 우리 셋이 프로에서 한 팀으로 만나지 못했지만 지도자로는 꼭 다시 한 번 만나고 싶어요. 만약 프로가 안 된다면 ‘베이스볼 아카데미’에서라도 만나야죠(웃음).
이: 심판하고 있는 정종수만 오면 팀이 어느 정도 만들어질 수 있어. 오준이는 투수 코치, 시헌이는 수비 코치, 나는 타격 코치하고 종수가 배터리 코치하면 되겠네.
권: 상상만 해도 기분 좋네요. 설사 현실로 이뤄지지 않는다고 해도 그런 꿈을 갖는다면 오랫동안 야구와 인연을 이어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성적 안 나면 코치들끼리 모여 소주 한 잔 기울이면서 선수 뒷담화도 하고(웃음). 우리가 이제 나이를 먹긴 먹었나보다. 지도자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 보면. 그런데 너희들은 야구가 뭐라고 생각해? 야구란 무엇일까?
손: 공놀이인데 그걸 오래 하다 보면 인간적으로도 성장하는 공놀이.
이: 프로야구가 아니었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야구와 인연을 맺지 못했을 거야.
권: 내가 마흔 살 넘어서까지 야구할 줄 누가 알았겠어.
이: 가장 건강하다는 내가 제일 먼저 은퇴했네.
손: 은퇴 순서가 뭐가 중요해. 야구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는 게 중요하지. 우리가 프로에서 지도자로 만나지 못하면 베이스볼 아카데미에서라도 꼭 만나자!
권오준의 버킷 리스트에는 절친들과 동시에 은퇴식을 치르는 게 포함됐다. 손시헌 코치는 멋있는 일이 될 것 같다고 동의했지만 이종욱 코치는 반대 입장을 나타낸다. 이유를 물었더니 짧고 굵은 메시지가 전달됐다.
“영원히 선수 이종욱으로 기억되었으면 좋겠어요.”
원본보기 <권오준과 손시헌. 31년 우정을 이어가고 있다는 의미에서 손가락으로 3과 1을 표시하는 그들. 이들과 함께 이종욱 코치까지 한 팀에서 지도자로 만날 수 있는 날이 오게 될까. 이 코치는 프로에서 그 만남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베이스볼 아카데미에서라도 만나자고 말한다.(사진=이영미)> |
<창원=이영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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