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나는 기초지자체 무용론에 표를 던질 것이다
그 집안은 작은 고개 양쪽에 있는 어촌정주어항 노곡항과 작진항에 분산 거주한다.
불시에 나타나도 늘 살가워 고향집인 듯 마음이 편했다.
그러나 내가 이 밤을 보내는 중인 작진항 어촌은 지금 완전 해체작업중이다.
작진항뿐 아니라 원덕읍소재지 호산항과 월천항(월천리)까지 LNG생산기지로 바뀌는
중이고 남은 어항마을들(노곡, 비화진)에도 종합발전단지 등이 들어설 예정이란다.
동해안 제2의 온산(울산)이 미구에 윤곽을 들어내게 되겠다.
상전벽해, 개벽에 준하는 변화가 될 것이다.
이 변화가 몰고 올 득실, 손익을 늙은 나그네가 점칠 수는 없지만 온화하게 정든 강원도
동해안의 집들에서 잠자는 기회가 마지막이 되는 아쉬운 밤이 지났다.
길떠나려 하는 이른 아침에 매제(妹弟)가 새벽에 건져올린 고기를 들고 찾아왔다.
오만 정성을 다 쏟았건만 대학 입시에서 낙방한 아들을 데리고 상경하여 재수하도록 내
집에 맡기고 내려가버렸던 어부다.
미등록자의 발생으로 재수를 접고 진학하는 행운이 왔는데 대학졸업후 경찰간부학교를
거쳐 경찰이 된 아들이 승진을 거듭해 총경이 되었다.
장차, 작은 어촌의 인물이 될 것이 분명하며 개천에서 나온 용의 아버지가 될 그가 이른
아침부터 술판을 벌이려 한 것.
막바지 길이 만만치 않아서 뿌리치고 떠나려 할 때 이 집 사위가 차를 몰고 왔다.
공사중이기 때문에 지리멸렬한 해안길을 안내하기 위해 온 고마운 그를 따라 일어섰다.
그 새에 어촌, 산촌에서 나는 갖가지를 챙겨 내 배낭 안에 넣고 있는 누님 부부.
그들의 정에 내 어깨도 감동먹었나 많이 무거워진 배낭이 오히려 가볍게 느껴진데 반해
걸음은 몹시 무겁게 느껴졌다.
늘 고향을 다녀가는 기분이게 하는 정서도 정녕 마지막일 것이기 때문이었을까.
부용(仙女 芙蓉)이 해망산에 하강해 놀았다 해서 부선당(芙仙堂)이었던 마을.
부호(芙湖)와 재산(才山) 두 마을이 묶여 호산(湖山)이 된 읍소재지에 쏟아진 거금(토지
보상비)이 온 마을을 구름 위에 올려놓은 듯 하다 할까.
갑자기 많아진 외제차들이 흥청거리고 남의 횡재를 노리는 꾼들의 덫이 즐비한 것 같다.
덫에 걸려 땅도 돈도 다 잃는 판박이 사례들이 발생하지 않기 바라며 해안으로 갔다.
지방어항 호산항,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하여 해망산(海望)인 아름다운 숲, 1km여되는
왕모래 몽돌의 호산해수욕장 모두 고공크레인들의 캐터필러에 짓발혀 얼신할 수 없다.
호산항은 국가무역항으로 크게 변신하고 해망산은 장차 복원한다니까 만신창이로나마
되살아나겠지만 청정하고 미려한 해변은 흔적마저도 없어지고 말 것이다.
심지도 가꾸지도 않았건만 잘 자라준 월천해변의 멋쟁이 솔섬의 운명도 다를 리 없다.
가곡천을 건너 이미 분탕질을 한데다 테트라포드(TTP/방파제용 블록)가 쌓이고 있는
월천해수욕장을 지나서 고포항까지 갔다.
왕래하는 사람도 차량도 보기 드문 한가롭고 편안한 해안길(고포월천길)의 끝이다.
억겁에 걸쳐 온갖 파도에 시달리며 기묘한 모습으로 변했건만 흔해빠진 이름하나 얻지
못한 갯바위들만이 벗해 주는 길이다.
고포항은 손바닥만한 마을이지만 500년도 더되었다는 고포마을의 미니 어항이다.
이조 선조때 박씨 부부가 자식을 대동하고 와서 정착함으로서 마을이 형성되었다니까.
할머니가 먼저 세상 떠난 영감의 제사를 지낸다 하여 '할무계'라 불리다가 할머니마저
떠난 후 숙종때 부터 고포(姑浦)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단다.
난을 피해 아기를 업고 마을에 온 어느 할머니가 배를 구해 떠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정착하여 살게 되었다 해서 고포(姑浦)라 했다는 전설도 있단다.
그러나 고려때부터 이곳 청정미역이 왕실에 진상되었다는데,그렇다면 지명유래의 시기
보다 훨씬 오래 전에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나라님께 진상했던 명품 돌미역의 생산지로 유명한 고포해안.
동해안에서 조류가 가장 빨라 양질의 돌미역이 자랄 수 있는 천혜의 조건을 갖춘 마을.
20여가구 어촌의 거의 가가호호에 '미역있습니다' 간판이 붙어있는데 높아진 고포미역
명성을 업은 가짜고포미역이 활개쳐서 어민과 소비자에게 피해를 주고 있단다.
1970년대에 비해 1.500% 이상 인상된 이 지역 미역값도 더욱 가파르게 오를 전망이다.
호산항을 중심으로 위 아래 해안의 긴 미역산지가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고포에서 미역따는 여인들뿐 아니라 동해안의 물질하는 여인들은 모두 제주에서 물길
따라 뭍으로 올라온 제주도 비바리(處女) 해녀들이다.
예전에는 섬처녀들이 오매불망 육지를 동경했지만 제주도 비바리들이 특히 심했단다.
그래서 해녀가 되어 뭍에 올라와 육지의 총각과 결혼하면 성공하는 것이고 이 여인들이
동해안의 노령 해녀들이다.
나의 인연인 장씨 집안의 안주인도 바로 그 케이스(case)다.
고포는 우리나라에서 대표적 행정불편마을 가운데 하나란다.
마을 한복판을 흐르는 작은 개울 따라 갈라진(강원도와 경상북도) 행정구역 때문이다.
어이없게도 개울 북쪽은 삼척시 원덕읍 월천2리인데 남쪽은 울진군 북면 나곡6리.
바로 옆집인데도 다른 지역번호(시외전화)를 사용하고 행정업무는 물론 각종 선거때도
삼척과 울진으로 나뉘어 가야 하며 20여호에 불과한 작은 마을에 이장이 둘이란다.
우편물 배달오토바이까지도 먼 양쪽에서 따로 오는 행정낭비마을이다.
작은 어촌에서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초란다.
강원도 울진군이 경상북도로 이속될 때 고포마을 중앙을 흐르는 실개천을 양도, 양군계
(삼척과 울진)로 확정했기 때문이라는 것.
현장의 문제는 고려하지 않고 책상에 앉아 결정한 행정편의주의의 산물이다.
한마을 사람이라는 유대감과 공동체 의식을 갖고 함께 살고 있는데도 삼척쪽 주민들은
울진원자력발전소의 인근마을에 대한 지원금을 한푼도 받지 못한단다.
소속 지자체가 각기 다르기 때문에 애로와 불만이 이처럼 심각한데도 지역이기주의에
매몰되어 외면 일관인 한심한 당국자들.
우선순위도 모르고 빚으로 판을 벌이며 자기네만 흥청거릴 뿐 민초들에게는 전혀 도움
되지 않는 지자체라면 나는 심심찮게 대두되는 기초지자체 무용론에 표를 던질 것이다.
복덩어리에서 애물단지로 전락한 울진원전
해안에 소금굽는 벌이 있었다 해서 나실 또는 나곡리.
나곡 6리인 고포리의 고포항에서 나실(羅谷) 해변으로 가는 해안길은 없다.
마을에서 가파른 비탈길을 타고 올라 옛 7번국도에 합류해 갈재(葛嶺)를 내려가야 한다.
우리의 선인들이 한양길(평해대로)에 반드시 넘어야 했던 재다.
높은 도로에서 내려다보이는 고포마을은 아쩔한 절벽 아래다.
좁디좁은 협곡에 다름아닌 해변에 신기하게 들어서 있는 집들도 어항도 모두 미니어처
(miniature/모형)처럼 보인다.
도로변의 휴게소와 주유소의 버려진 건물과 시설이 날로 더욱 흉물스러워가고 있다.
새 7번국도의 개통으로 옛길은 찬밥신세가 되었기 때문이며 이같은 현상은 전국적이다.
가끔 차마시고 가던 나곡해변의 나곡비치타운, 만남의 광장도 멍드는데 예외일 리 없다.
오가는 모든 차량이 들렀다 가도 성에 차지 않을 만큼 왕래하는 차가 드물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같은 공차증 길손이 걷기는 한결 편해진 길이다.
나곡3리의 소규모어항, 나곡해수욕장~북면(울진군)소재지의 해안에도 길이 없다.
나곡천(나실교)을 건넌 후 장거리 차량들의 이탈로 기능이 상실된 나실 만남의광장에서
한가로워진 옛 7번국도를 따라야 한다.
도로변 나곡1리의 어촌정주어항인 석호항을 지나면 곧 면소재지에 당도한다.
이 지역에도 동해의 석호(潟湖)가 있었던가.
예전의 북면은 해발999m 응봉산록의 국내 유일 용출온천인 덕구온천 덕에 알려졌으나
1980년대 부터는 울진원자력발전소의 건설로 급성장한 지역이다.
덕구온천은 1980년대까지도 현 온천장에서 4km를 오르는 응봉산계곡의 노천탕이었다.
나의 원덕 어촌여정에는 필수처럼 포함되는 코스로 온천은 물론 최고의 야영지였으며
물질하던 어부나 해녀가 몸에 이상이 오면 찾는 일종의 치료소였다.
머구리(潛り)가 작업중 신체에 이상(마비)이 생기면 병원에 가지 않고 이 온천탕을 찾아
가고 말짱하게 회복되어 하산하는 것을 종종 목격했다.
('머구리'는 잠수부를 말하는 일본어 '모구리'의 변음이다.
어촌에서는 무허가 잠수부를 이르는 말로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원자력발전소가 들어서기 전에는 부구천~후정해변~죽변항의 해안길이 있었다.
원전이 해안을 길게 점유하였기 때문에 부구천을 건넌 후 우회하게 되었으나 지역민은
원전에 대해 불만불평은 커녕 환영일색이었으며 매우 고무되어 있었다.
원전의 고용창출 효과와 지역경제에 미치는 긍정적인 면만 보일 뿐 소위 죽음의 방사능
문제가 전혀 거론되지 않을 때였으니까.
상당수의 지역민들은 평생 꿈도 꿔보지 못했던 직장을 갖게 되었고 급격한 인구증가는
빈한한 시골 면을 도시급으로 업그레이드 시켰으니 원전이야말로 복덩이리였다.
그러나, 해외의 핵발전소에서 대소 사고가 간헐적으로 발생하면서 생명권과 건강권을
내세우며 대두한 원전 반대여론이 급격하게 확산되어 갔다.
복덩어리는 한 순간에 아무도 원치 않는 공포덩어리로 전락했으며 마침내 결사적으로
거부하는 애물단지가 되고 말았다.
원전이야말로 마땅한 대안이 없는 최악의 현안이 되었다.
부구리(北面 富邱) 원전에 이어 후정리(竹邊面 後亭)에 들어선 해양과학기술원과 경북
해양바이오연구원이 후정해변길까지 없애버렸다.
일부 토막길이 남아있으나 연결성이 없기 때문에 아무도 이용하지 않는다.
발길이 끊긴 길은 마침내 절로 도태되고 만다.
지금은 번호도 없는 도로로 전락한 옛 7번국도를 따르면 죽변항이다.
대나무가 많은 바닷가라 죽변이라 했다는 죽변리의 국가어항이다.
오징어와 명태잡이로 이름난 어항이며 원양어선들이 잡아온 냉동고기들의 보관항이다.
울진군이 경상북도에 이속됨으로서 경북의 최북단 항이며 중요한 어업전진기지다.
하도 많이 드나들었기 때문인지 경북도기념물 죽변등대(제154호)까지도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해 한동안은 우회도로(bypass/활주로)를 이용했다.
동해안 항해선박들의 뱃길 인도에 크게 기여하며 "이 지역의 랜드마크적 역할뿐 아니라
어민들의 애환과 역사를 담고 있는 근대문화유산"이라는데도.
울진대게의 가장 큰 생산, 유통시장인데도 식도락과 거리가 먼 늙은이라 무관심했는데
다시 들를 기회가 없을 지도 모른다 싶어 일부러 들렀다.
해안따라 뒷걸음으로 죽변등대 뒤에 있는 봉수항은 생략하고.
어항의 복잡한 중심가를 빠져나오면 해안로(죽변중앙로)변에 우람한 향나무가 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가운데 살아왔으며 민속학적·생물학적 보존
가치가 높아 문화재로 지정, 보호받고 있다"는 천연기념물제158호다.
나이 500세쯤으로 추정되며 밑동에서부터 키11m,둘레1.25m와 10m, 0.94m(설명판)인
두 가지(枝)로 갈라져 있다.
울릉도에서 여기까지 떠내려온 것이라는 이 나무를 신목(神木)으로 받드는 마을민들은
나무 옆 성황사(城隍祠)를 통해서 신심을 표하고 있는 것 같다.
상나무로도 불리며 강렬한 향을 발산해서 제사때 피우기도 하며 정원수, 공원수로 많이
활용되고 있는 향나무의 주 분포지는 우리나라 중부 이남과 울릉도, 일본 등이다.
한데, 이 향나무의 소재지가 의아스럽게도 죽변리가 아니고 후정리(3리)다.
북면에서 죽변면 후정리를 이미 지나왔으며 죽변리어항의 남측이므로 죽변리일 것이라
생각했고 문화재청을 비롯해 적잖은 문서에'죽변리향나무'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북쪽과 서쪽은 후정1리와 후정4리에 접하고 남쪽은 봉평2리와 이웃하고 있는데
동쪽이 동해연안을 낀 국도변이고 죽변항내의 남측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후정리,죽변리 등 소재지가 향나무의 문화재로서의 비중에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면
마을의 경계를 대중이 이해하는 쪽으로 조정하는 것이 긍정적 행정서비스일 것이다.
로또 보다 더 땡잡은 신라비와 황당한 비석전시관
잘 정비된 코스모스해안길이 가을의 정취를 느끼게 했다.
죽변항 남측의 대나무를 타고 오르는 대게 조형물을 지나고 초평교를 건넌 후 봉평해변
에서 아침 겸 점심식사를 했다.
평해대로 때 아침 겸 점심을 먹은 바로 그 식당(봉황생고기식육식당)에서 그 때처럼.
그 때 더 나온 밥 한그릇 안에 담겨있는 것은 밥이 아니라 인력이 강한 인심이었으니까.
식당에 배낭을 맡기고 찾아간 곳은 신라비 사적공원, 비석전시관.
평해대로 때 막 공사를 시작한 듯 했는데 완료하고 개원, 개장했다.
1988년에 봉평리 논 객토작업중 발굴,2-3개월 방치되어 있던 것을 마을주민(권대선)이
발견하고 신고하여 국보의 반열에 오른 신라시대의 비를 중심으로 조성한 공원이다.
법흥왕11년(524)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신라비(鳳坪新羅碑)는 장구한 세월 땅속에
묻혀 있었기 때문에 좋은 상태는 아니지만 원형을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단다.
신라23대 법흥왕(法興王/재위514~540)은 한국의 종교사상 최초의 순교자인 이차돈(異
次頓)의 죽음(527/法興大王卽位十四年 小臣異次頓爲法滅身/三國遺事 卷第三 興法第三
'原宗興法 厭髑滅身')으로 불교를 국교로 정했으며 불교정신에 따른 통치로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삼국통일의 사상적 기반을 확립한 왕이다.
"울진지방이 신라의 영토에 귀속됨으로서 거민들의 항쟁이 일어났다.
신라에서는 육부(六部)회의를 열고 대인(大人)을 파견해 응징한 후 재발 방지를 위해서
비를 세웠다"는 내용(문화재청)이란다.
도로변에 초라하게 서있었는데 관광호재로 판단한 울진군이 공원을 조성하고 기념관을
건립하는 등 과감하게 투자한 것 같다.
관광재 발굴(개발)에 혈안이 되어 있는 지자체들인데 논에서 국보(제242호)를 캐냈으니
그럴만도 하며 로또 당첨보다 더 횡재를 한 것이다.
전국에 산재한 유명 비들의 복제품을 제작해 비석 전시관도 만들었다.
신라비가 있는 곳에 고구려와 백제 등 적국(당시)의 비까지 망라되어 있다.
한곳에서 전국의 유명 비는 물론 중국 지린성 지안현 통거우(吉林省集安縣通溝)에 있는
고구려의 광개토대왕비까지 볼 수 있으니 관광객도 속말로 땡잡았는가.
그렇다면 온세계의 비들을 모두 복제해 전시하면 어떨까.
세계여행 가는데 엄청난 비용과 수고를 들이지 않아도 되니 땡중의 땡이겠다.
그러나 견광(見光) 아닌 관광객이라면 이같은 시설에 귀한 시간을 바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상당히 많은 시간을 들였지만 신라비 외의 비석사진은 단 1장도 담아오지 않았다.
나는 견광객이 아니기 때문이다.
울진군은 관광객을 상대하려는 것이 아니라 견광객만 부르고 있는가.
울진군의 의욕이 목을 넘은 것인가 머리가 없기 때문인가.
하도 정교해서 사계의 전문가까지 골탕먹여도 복제품, 모조품이 똥값인 까닭을 모르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과오다.
일월성신이 늘 같은 듯 하나 예외 없이 시간과 공간따라, 사람따라 다르다.
지질학적으로는 같은 성분의 흙이라도 역사의 흙은 사람과 때와 위치마다 다르며 같은
수질의 물이라도 마찬가지다.
같은 흙, 같은 일조량, 같은 비바람을 맞으며 자라지만 맛이 제각각인 과일처럼.
"햇볕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 고 누가 말했지만 같은 햇볕과
같은 달빛인데 왜 같은 역사와 같은 신화가 나오지 않는가.
비석들은 각기 다른 토양에서 각기 다른 풍우를 맞으며 맛이 각기 다른 과일처럼 각기
다른 역사와 신화를 간직하고 서있다.
그러므로 비문들을 아무리 통달해도 제 맛이 나올 수 없다.
그래서 만물은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제 값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울진군은 바로 이 진리를 간과했기 때문에 비석전시관이라는 황당한 작품을 만들었을
것이며 이는 관광객에 대한 인격적 모독 또는 기만에 해당한다.
역사와 지리에 무지한 자는 무국적자에 다름 아니다
식당에서 배낭을 메고 나오려는데 차를 마시고 가란다.
죽변에도 확실한 단골집 하나가 등기(登記)를 마치는 순간이었다.
해안에 밀착되어 있으며 울진북로로 명명된 옛 7번국도가 골장항을 지난다.
죽변면 남쪽끝 골장곶(骨長串/봉평1리) 석벽 남측에 있는 지방어항이다.
골장곶은 200여년 전에 수려한 조망에 반한 울진현령이 망양정 이건을 시도한 것으로
전해질 만큼 빼어난 곶(串)이다.
골장항에서는 울진군이 조성한 '녹색경관길'이다.
일부 구간은 해안 데크로 되어 있는데 보이지 않던 해파랑길도 끼어든다.
이런저런 길 이름이 다 사라지고 단조롭고 한가로운 길이다.
우회도로 신설을 부르짖던 입으로 우회도로 폐쇄를 외치게 되었으나 이제는 그 일마저
필요 없게 된 어촌들이다.
신 국도가 차량들을 몰아가버렸기 때문에 우회도로의 존폐가 무의미해진 것.
골장항 바로 다음 곡해마을(曲海/溫洋2리)부터는 울진읍이다.
정자 '곡해쉼터'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시각은 오후 3시15분.
곡해교를 건너 얼마쯤 가다가 해안을 멀리 하는 울진북로를 버리고 양정동(洋亭/온양1
리) 해안길(대나리항길)을 따랐다.
평해대로 때는 없었는데 그 사이에 신설된 길인가?
온양1리(양정동)에도 어촌정주어항 양정항과 300살 보호수 향나무가 있다.
매년 대보름날(음) 자시에 마을의 안녕과 풍어 풍년 기원 동제를 지내는 성황목이란다.
남행을 계속하면 죽진쉼터(정자)와 죽진마을(연지3리)의 어촌정주어항 죽진항이다.
북쪽의 죽진산밑이라 해서 죽진마을이라는데'대나리'는 대나루(竹津)의 변음일 것이다.
곡해마을, 양정항, 죽진항 어촌 일대에는 오징어 건조대에 오징어가 많이 걸려있다.
이 어항마을들의 주 어종이 오징어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해안을 타고 가던 대나리항길은 죽진에서 방향을 내륙으로 튼다.(해안길공사는계속중)
산을 절개하여 도로를 잇는 공사가 진행중인 가파른 고개를 2번 넘고 7번국도(신) 밑을
가로 질러 서남향 농로를 따라 울진과학체험관(울진읍 연지리)을 지났다.
울진군민의 1급휴식처라는 연호(蓮湖)와 연호정, 연호공원, 울진청소년수련관과 울진
군민체육관 등이 모여있는 곳이다.
연호정은 건축기(蓮湖亭 建築記)에 의하면 “고을 사람들이 기금을 마련하고 군 동헌(東
軒)을 보수할 때 쓰다 남은 목재와 기와를 수습 . . . . . . .중건"한 누정이란다.
울진군이 군민에게 좋은 휴식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정자의 보수와 연호 주변의 정비와
정화를 거듭하고 야외 공연장과 산책로를 조성하였단다.
과학체험관의 건립 목적도 PR하고 있다.
"정기적으로 관내 미취학 아동과 초.중.고 학생중심의 과학체험강좌를 개설해 과학원리
이해와 창의력 개발, 과학실험 및 로봇제작 등을 통해서 과학학습 기회를 제공함으로서
어린이와 학생들에게 과학체험의 동기를 부여하고 있다"고.
매우 고무적이고 바람직한 시설이다.
그렇다면 의무교육 대상 학생들은 무료입장하는 것이 건립목적에 부합될 것이다.
입장료의 징구로 출입을 꺼리게 한다면 그들을 위해 건립했다는 것은 생색일 뿐이니까.
우리나라가 진정 교육복지국가를 표방한다면 의무교육 대상인 학생들을 위해서 비용을
전액 국가가 부담하는 전국적 역사지리 탐방프로그램도 운영해야 한다.
실내의 주입교육을 지양하고 전국의 현장을 개별적으로 자유롭게 방문해 시청각학습을
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산교육인데 경비때문에 제동이 걸리지 않아야 하니까.
거시적으로 보면 무료급식과 무료교재공급보다 더 중요한 일이다.
각급학교의 수학여행이 현장학습을 표방하고 있으나 부질없는 연례행사에 불과하며 그
행사마저도 경비때문에 불참하거나 애로가 많은 학생들이 있는 현실이다.
자국의 역사와 지리에 무지한 자는 국적이 없는 자에 다름아니다.
무국적자에게 애국심을 기대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역사와 지리에 무지한 자들의 집단이야말로 무능 무력한 집단에 불과하다.
역사와 지리가 모든 학문에 우선하며 학문 이전의 필수라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처럼 중차대한 지리와 역사는 두 발로 걸으며 온몸으로 부딛혀서 체득하는 것 이상의
학습효과가 없음을 나는 확신한다.
그래서 국가가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잘 지어졌으나 씁쓸한 여운을 주는 건물을 떠나서 울진남대천의 울진교를 목표로 다운
타운을 지그재그했다.
남대천 건너 있는 읍내리의 동명탕(찜질방)에 들어감으로서 또 하루를 마감했다.
5번째 이용이지만 대안이 없을 뿐 단골집은 되지 못하는 찜질방에서 '이설 관동별곡'길
마지막날 이브를 보내게 되었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