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수긍하지 않는 사람을 아느냐?
한 스님이 물었다.
“그처럼 당당하심이 큰스님의 참모습(正位)이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수긍하지 않는 자가 있음을 아느냐?”
“그렇다면 다른 모습도 있습니까?”
“누가 다른 사람이냐?”
“누가 다르지 않은 사람입니까?”
“마음대로 불러라.”
한 수행인이 조주에게“ 그처럼 당당하심이 큰스님의 참모습(正位)‘이라고 한 말은 큰 스님의 가풍은 이토록 드높으시니, 옛 부처(古佛)로서 명성을 떨치는 게 아니겠습니까? 하고 아부하는 꼴이다. '정위(正位)'의 위(位)는 사람(人)이 선(立) 모양을 말하니, 바르게 선 사람, 생사(生死)를 벗어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조주의 참된 모습이다.
조주는 ‘그래도 수긍하지 않는 자가 있음을 아느냐’라고 되물었는데, 이 말은 ‘그대의 말을 긍정하지 않는 자가 하나 있긴 있는데, 그대는 그 사실을 아느냐?'라고 묻는 것이다. 그 누가 조주 선사를 부정할까? 한 물건이라고도 할 수 없는 바로 이 괴물(?)이다. 땅속을 마음대로 휘저으며 뛰어다니고, 하늘 꼭대기에서 꽁지를 흔들면서 구름을 쫓는 놈이다.
‘그렇다면 다른 모습(位)도 있습니까?'란 말은 '그러면 큰스님 말고 다른 높으신 분이 계신가요?' 하고 묻는 꼴이다. 조주는 '그대가 아는 다른 사람이 있느냐(누가 다른 사람이냐)?' 하고 다시 그 스님을 놀린다. 여기서 퍼뜩 눈을 떠야 하는데, 애재라! 엉뚱하게 이제 '다르지 않은 사람이 누군지'를 찾는다. 이미 버스는 저 멀리 떠나가 버렸다.
조주는 이제 '그대 맘대로 불러라!'라고 허탈해 한다. 참회할 마지막 기회를 줬는데도 다시 도둑질에 골몰하는 장발장의 모습이다. 여러분은 이제 '그 다른 사람'을 발견했는가. 반드시 이 사람을 찾아야 한다. 깊이 깊이 마음으로 의심(참구)해야 한다.
95. 이야기의 주인공을 찾아라
한 스님이 물었다.
“상상근기(上上人)라면 한번 건드리기만 해도 깨닫겠지만 하하근기의 사람(下下人)이 올 때는 어찌해야 합니까?”
“그대는 상상근기냐? 하하근기냐?”
“스님께서 대답해 주십시오.”
“이야기에 주인공이 없구나.”
“저는 7천리를 달려왔습니다. 스님께서는 심통 부리지 마십시오.”
“그대가 이렇게 묻는데 어찌 심통 부리지 않을 수 있겠느냐?”
그 스님은 하룻밤만 자고 바로 가버렸다.
이번 수행자는 '매우 영리한, 근본 바탕이 밝은 사람이라면 손가락 한번 튕기기만 해도 바로 깨닫겠지만, 둔하고 어리석은 사람의 경우에는 어찌해야 합니까?'하고 조주에게 묻는다. 조주는 '그렇게 묻는 너 자신은 어떠냐? 바로 깨달을 수 있느냐? 아니면 어둠에 그대로 파묻혀 있을 셈이냐(그대는 상상근기냐? 하하근기냐?)' 하고 되묻는다.
이런 질문을 받았으면 아무리 조주라도 한번 들이받던가, 그 흔한 고함이라도 한방 질려야 하지 않겠는가. 또 기회를 놓친다.
'스님께서 제대로 밝혀 주십시오(대답해 주십시오)' 하고 맥빠진 소리를 하니, 조주는 '그대의 주인공을 나더러 밝혀 달라고 하느냐', 라는 뜻으로 "이야기의 주인공이 없구나?"라고 대답한다. 이것은 선도 악도 생각하지 않을 때의 자신의 본래면목을 드러내라고 에둘러 하는 말이다.
7천리 밖, 저 먼 곳에서 일부러 찾아왔는데 하찮은 박명수로 여기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니까, 조주는 ‘이 눈먼 놈아! 눈 뜨고도 못 보는 봉사인데 난들 어떻게 해야 하느냐? 네가 눈을 바로 떠야지!’ 하고 성철 스님처럼 말한다. 불쌍한 그 스님, 하룻밤 만리장성 쌓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떠나버렸으나 제대로 된 수행인이라면 달밤에 길을 걷다가 자라코 뱀에게 크게 한번 물렸을 것이다. 악!
96. 방계를 잇지 않는다
한 스님이 물었다.
“방계를 이어받지 않는 자(不紹傍來者)는 어떻습니까?”
“누구 말이냐?”
“저 혜연(惠延)입니다.”
“무엇을 묻느냐?”
“방계를 이어받지 않는 일 말입니다.”
조주선사는 손으로 그를 어루만져 주었다.
한 수행인이 이번에는 '방계를 계승(繼承), 즉 이어받지 않는 자는 어떻습니까?'하고 물었다. 방계(傍系)라고 하면 직계(直系) 또는 적통(嫡統)과 반대되는 말로서, 집안에서는 서자(庶子) 취급을 받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선(禪)에서 방계라면 조사의 여럿 제자 중에서 정식으로 법(法)을 잇지 못한, 곁가지의 스님을 일컫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방계, 곁가지의 법을 잇지 않는 자, 즉 직계라고 자칭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이겠는가? 이런 질문을 할 정도이면 이 스님도 보통내기는 아닌 것 같다.
조주는 '그런 사람이 누구인가?'라고 되물어 본다. 곁가지, 곧 얕은 깨달음에 만족하지 않고 구경(究竟)에 목말라 하는 그런 자가 누구인지 묻는 말이다. 이것도 이름 지을 수 없는 그 한 물건이다. 그런데 그 수행자는 자기 이름을 대며, '저 혜연입니다.'하고 대답한다. '혜연'이라면 임제종의 문을 연 임제의현 선사의 직계 제자인, 삼성 혜연선사가 떠오른다. 이 스님이 삼성 혜연인지, 아닌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그럴 가능성이 높다.
조주의 의도는 곁가지가 아닌 진짜 자신의 본래면목은 무엇인지 말해 보라는 뜻인데, 혜연의 대답은 자기 이름을 묻는 것으로 잘못 이해한 것처럼 오해를 불러올 수 있다. 질문은 제대로 했는데 뜻도 모른 채 들은 풍월을 그대로 읊은 것을 스스로 폭로한 셈일까? 조금 아리송하다. 차라리 '저 조주입니다' 했으면 보다 명확하게 자신을 드러냈을텐데.
조주는 다시 한번 시험해 본다. '무엇을 말하는 것인데?' 그러자 끝까지 '방계를 이어받지 않는 일 말입니다'하고 자기 목소리 내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방계를 이어받지 않는 일을 정말로 아는 듯하다. 이 짧은 대화로서 그 스님의 경지를 정확히 판단하기는 힘들다. 차라리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 스님의 멱살을 부여잡고, '방계를 이어받지 않는 자가 누구냐? 빨리 말해라, 말해!'하곤 그의 다음 행동을 주시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미꾸라지라도 그물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고 혀를 쏙 빼놓았을 텐데 이렇게 애매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래도 조주는 제 목소리라도 지키는 그 스님이 기특했는지 손으로 어루만져 준다. 이 손이 쓰다듬는 것, 이것도 바로 방계를 이어받지 않는 일에 포함된다는 것을 암시하면서 말이다. 이 말을 바로 확실히 깨달아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거듭 의심해라. '참외밭에서는 신발 끈을 묶지 않는 게 좋다.‘
97. 스스로를 속이지 말라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납승 문하의 일입니까?”
“자신을 속이지 말라.”
한 수행자가 납승(衲僧), 즉 불문(佛門)에 든 승려가 할 일이 무엇인지 물었다. 참 별 싱거운 질문도 다 있다. 이런 것도 조사 어록에 수록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 때도 있다. 마음공부 하려고 세속을 떠난 사람이 무엇을 할 지 모른다니, 우습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제대로 공부가 되지 않은 수행자는 정말로 무엇을 할 지 갈팡질팡하는 게 현실인 것 같다.
그 유명한 임제종의 문을 연 임제의현 선사도 처음에는 3년 동안이나 수행을 했는데도 스승인 황벽대사에게무엇을 물어봐야 할지를 몰라 사형인 목주선사가 '불법의 큰뜻이무엇입니까?' 하고 질문해라고 가르쳐준 일도 있다.
조주는 '승려가 할 일은 자기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질문에 걸맞게 쉬운 대답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로서는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수행 중에 계속 자신을 점검해라'는 뜻이다. 깨달음은 알음알이(知識)에 있지 않다. 아무리 청산유수 같이 설법을 잘하고, 온갖 경전에 대해 박식하다 해도 스스로 내면을 살펴보아 맑고 깨끗하지(淸淨) 못하면 제대로 선수행한 것이 아니다.
무상(無相), 무념(無念), 중도(中道)의 이치를 분명하게 밝혀 알아야만 한다. 그렇다고 교(敎)에 밝은 사람을 폄하해라는 소리는 아니다. 특히, 현시대에서 선(禪)은 제 길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선(禪)과 교(敎)의 허물없는 융합을 통해서 새로운 가르침의 세계를 개척해야 한다.
둘째, '제 자신의 참모습을 드러내라'는 뜻이다. 선(禪)을 공부했다고 하는 수행인들의 말을 들어 보면 옛날 조사, 선사들이 사용한 격외구(格外句)를 앵무새처럼 읊어대는 사람들도 많다. 뜻을 확실히 아는지 모르는지 애매하게 말하면서 그냥 침묵을 지킨다든지, 고함을 친다든지, 방망이를 휘두르는 자는 이전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제 자신은 속일 수 없다. 제 참모습을 드러낼 줄 알아야 하고, 그렇지 못하면 반성하고 계속 정진해야 한다.
셋째, '끝장을 보라'는 의미이다. 깨달음의 경지도 한 가지(一種)라고 말할 수 없다. 석가의 경지가 다르고, 가섭, 아난이 다르고, 달마, 임제의 경지가 다르다. 경허, 만공, 성철의 경지가 다른 것처럼 말이다. 깨친 후에도 온전히 무심(無心)이 되고, 모든 습기, 때가 다 벗겨져 나가 정말로 옛사람 말대로 수백 개의 해가 한꺼번에 밝게 비추는 정도의 경지가 될 때까지 지속해서 수행해야 한다는 말이다.
조주는 20세 이전에 깨달아 60여년을 더 연마한 후, 80세가 되어서야 관음원에서 설법하기 시작했다. 공부가 일천한 나로서도 아직 부끄러운 경지임을 자인한다. 그래서 계속 공부, 또 공부할 것이다. 쉬운 말로 익은 벼는 머리를 숙이는 법이다. 결국 조주선사의 말씀대로 한 점도 자신을 속여서는 안된다.
천재시인 윤동주는 '서시(序詩)'에서 이렇게 읊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작가라면 마땅히 자신을 되돌아보아 한 점 부끄럼이라도 있으면 아니 될 것이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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