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 도 |
내 용 |
1928년 |
영국 런던 쉐파스 부슈에서 출생 |
1942년 |
14세 아돌프 콘헨 선생을 만나 미용에 입문 |
1948년 |
이스라엘 군복무를 마치고 실비오 까미요를 만나 예술이 시작되는 꿈을 갖게 되었으며 그 다음 스승으로는 래이먼트를 만나 최상의 무대에 자신의 예술을 공들이게 됨 |
1954년 |
26세 본드 거리 108번지에 미용실 개점 ‘손님들이 동의하지 않으면 그냥 내보낸다’라는 법칙을 가지고 독재적인 연예인, 모델들, 억만장자들을 조금씩 끌어들임 |
1958년 |
본드 거리 살롱을 보다 새롭게 꾸며171번지 미용실 이전 새로운 커트를 유행시킴 |
1959년 |
나이트 브릿지에 최초의 미용학교 개교 그의 테크닉의 결정체인 shape를 선보여 패션계를 지배함 |
1962년 |
그로스 모보브에 살롱 오픈, bob이 창조되고 타임지는 비달사순을 훌륭한 헤어 디자이너로 인정함 |
1963년 |
최초의 기하학적 커트 “낸시콴” 발표 |
1964년 |
화이브 포인트 커트 발표 |
1965년 |
갈리츠의 랑방-샤를르와 함께 첫번째 살롱을 뉴욕에서 오픈 |
1966년 |
획기적인 불균형 커트 발표 미국, 독일, 이태리, 캐나다 등 지구 규모의 미용실 전개 |
1967년 |
로저 톰슨과 안니 험브리스에 의해 그리크 고디스 발표 |
1968년 |
토론토에 첫번째 살롱을 오픈하고 같은 해에 ,sorry I kept you waiting, madam> 책 발표 |
1970년 |
크리스토퍼 부루커에 의해 헤이로 발표 |
1971년 |
뉴욕에 남성들을 위한 살롱 오픈 |
1972년 |
헤나 사용한 컬라링 테크닉 선보임 |
1974년 |
다로 벤존이 콘케이브 이론 발표 |
1980년 |
홀문 콜렉션 발표, 미국채널에 <you new day>안 TV프로그램 만듦 |
1985년 |
두번째 책<A year of Beauty and health> 출간 뉴욕타임지 베스트셀러 3위 차지 |
현재 |
비달사순 사실상 은퇴 |
런던에서 필립 로저를 선두로 안니 험브리스, 타임하트레이, 사이몬 애리스, 폴 뉴란드에 의해 운영 |
이제부터는 1960년대부터 비달사순의 대표작을 만나보고자 한다. 발표되는 작품마다 시대의 이슈가 되었던 그의 작품들 중 가장 대표적인 작품들을 중심으로 따라가 보자~~
1) 1960년대
1955년부터 1965년까지는 아프리카와 아시아 국가들의 반식민지 운동, 알제리와 베트남에서의 전쟁, 쿠바의 위기, 베를린 장벽, 후르시초프의 세력 출현, 존F 케네디의 승리와 암살 등의 정치적 위기와 현대 세계의 불안정한 시기였다.
반면, 역사적 혼란에도 불구하고 서방세계는 안락과 복지의 봄으로 접어들었고,
문학은 누보로망, 영화에서는 누벨바그, 실존주의와 추상적 표현주의 등이 예술계를 동요시켰다.
인간과 사상의 교류, 항공운송의 발전과 라디오, TV의 발달로 세계화로 발돋움하고, 시몬느 보봐르의 ‘제 2의 성’의 발표로 여성 해방 운동이 촉발되었다.
이 시대에는 기하학적 모티브와 비쉬 흑체크가 유행하였는데, 비달 사순은 이를 영감으로 하여 극히 정확하고 조각적인 커트라인을 선보였는데 얼굴선과 골격구조가 돋보이는 절제미를 유행시켰다.
이 때의 퍼머넌트 웨이브는 머릿결을 부드럽고 윤기나게 유지시키는 역할만을 하였다.
1963년에 발표 된 ‘Nancy Kwan’은 최초의 그라데이션 보브로 후에 클래식 보브라 하였으며 비달사순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작품의 하나로써 헤어스타일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다. 1964년에 발표 된 ‘The Five Point’는 다섯 개의 포인트로 구성된 헤어 커트로 기하학적인 헤어 커트의 원점이며 이 후 비달사순의 작품에 큰 영향을 주었다.
< Nancy Kwan > < The Five Point >
2) 1970년대
1965년에서 1975년까지는 전쟁 후 베이비붐 시대를 맞이하여 60년대의 자유를 향한 모든 이상이 구체화 되는 시기이다.
체코의 침공으로 인한 핵전쟁 공포에서 탈피, 베트남 전쟁 종결, 뮌헨의 올림픽 테러, 군부의 쿠테타와 지역적 분규, 개발도상국의 내부 위기와 외교 분쟁이 있었으나 서방 세계는 순조로운 경제적 성장과 안정 쪽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문화적 측면에서 살펴보면 기존의 성 의식과 관습에 대항하는 페미니스트들의 항거가 있었으며 팝송의 유행, 미국 내 인종 차별에 반대, 히피의 움직임, 마약 소비의 시작이 있었으나 달 착륙에 성공하였으며 사람들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자유를 얻어가고 있었다.
비달사순에게는 1970년대는 많은 변화의 시기로 기하학적인 스타일의 엄격함이 모발의 유연함과 유동성에 의해 약화 되었고 염색은 커트의 효과를 더 강조하였다. 또 커트는 더 짧아지고 볼륨이 강조 되었으며 미용은 더 이상 액세서리가 아니라 모든 부분에 대해서 우선시 되어야 한다고 생각되었다. 비달사순은 그의 헤어디자이너로서의 작업이 예술로 인정받으면서 전 세계의 유명한 예술가, 코미디언, 배우, 영화감독, 디자이너들과 함께 작업을 해나갔다.
1970년에 발표한 ‘The Veil'은 이마 언저리에 길이를 그대로 남기고 톱 쪽에 짧은 레이어를 넣음으로써 이름 그대로 베일과 같은 효과를 내는 스타일로 60년대 엄격한 기하학적 스타일에 반하여 시적 효과를 되찾았으며 두 가지 길이의 혼합이 인기를 얻어 세계적인 유행을 불러 일으켰다. 1974년의 ’The Halo'는 이사도라 못지 않게 완벽한 라인을 내기 어려운 스타일로써 부드러운 라인을 터득한 로저톰슨에 비해 정확하고 강한 라인을 중시하는 크리스토퍼 부루커를 일거에 유명인으로 만든 작품이다. 선풍적인 인기를 끈 이 스타일은 손질이 간편하고 눈매를 강조해 주어 얼굴선이 돋보이게 한다.
< The Veil > < The Halo >
3) 1980년대
중동전쟁과 석유파동이 일어났던 시기로 이 시기의 산업국가에서는 실업과 경제 후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미개발 국가에서는 경제공황으로 인해 쿠테타와 혁명을 일으키는 분위기였으나 전 세계적으로는 무역의 국제화, 이스라엘과 이집트 사이의 최초의 평화협상, 환경운동, 태양에너지에 관한 연구, 매킨토시의 독보적인 전기/ 전자/ 정보의 지배로 세상이 변화하였으며 이는 미래를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개인의 개성을 중시하고 집단행동으로 자신들의 의지를 표현하였으며 여성의 변화는 계속되는 반면 남녀평화주의자들의 활동은 부진한 때이기도 하다.
헤어스타일에서는 길이와 볼륨, 컬러 등 다양한 기법이 적용되어 기하학적 커트 스타일이 재현되었으며 이 시기에 비달사순의 커트의 조각선이 유행을 이루었다.
1983년에 발표된 ‘The Under cut’는 80년대 유행이 된 스타일로 갸르손느의 보이시 스타일에서 영감을 얻었다. 네이프는 짧게 자르고 앞머리는 옆으로 길게 늘어뜨린 스타일로 시각적인 강조를 원하는 고객의 개인적인 개성과 욕구를 표현한 작품이다.
1985년의 ‘Veer’는 새로운 보브 스타일로 여배우 로이스 부룩에게서 영감을 얻어 창조된 작품으로 오리지날 보브 스타일보다 자유롭고 파격적인 느낌을 준다.
<The Under cut> <Veer>
4) 1990년대
1990년대는 희망과 절망, 개인주의와 연대의식이 교차하는 과도기의 시기이며 테러리즘의 퇴각, 최초의 평화협상, 베를린 장벽의 붕괴, 소련의 종말, 걸프전 등 다양한 양상이 공존하는 시기로써 이 시대의 헤어스타일은 커트, 펌, 컬러링 등이 서로 보완적인 작용을 하여 보다 새롭고 다양하며 감성적인 스타일로 창조되었다.
비달사순의 90년대 작품들은 1970년대 히피 스타일을 토대로 하여 1980년대와는 또 다른 스타일로 창조되었으며 유행을 뛰어넘는 새로운 시각에 의한 관찰방식의 사고를 추구하였다.
1991년에 발표된 ‘Summer`91’은 남녀 공용의 아주 짧은 커트로 디자인한 것이며, 92년의 ‘Coupe Jeanne d`arc’는 영국의 고급상류 미용분야에 잔다르크를 형상화 하여 제시된 새로운 스타일로 잔다르크의 천사적 이미지를 표현하기 위해 네이프 선 위의 풍성한 볼륨을 강조하였다.
<Summer`91> <Coupe Jeanne d`arc>
비달사순은 현재의 유행과는 다른 자기 자신의 스타일 표현을 위한 미용기술을 각자의 개성과 문화에 맞게 보편화시킴으로써 자신감 넘치는 다양한 스타일을 추구 하게 된 것이다.
비달사순 등장 이후 세계적으로 명성을 날리는 헤어 아티스트들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그의 작품을 모티브로 수많은 헤어스타일들이 창작되고 있다.
비달사순의 시대를 초월하는 작품들은 유연함과 보편성을 강조한 ‘참다운 머리를 위한 참다운 머리’로 개성과 독창성을 추구하고자 하는 열정의 표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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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기
트위기(Twiggy, 결혼 후 이름은 트위기 로슨(Twiggy Lawson), 본명 레슬리 혼비(Lesley Hornby), 1949년 9월 19일 영국 런던 북부 출생)은 몸무게가 50kg도 채 안나가 트위기twiggy(잔가지처럼 연약하다는 뜻)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어린애 같은 몸매는 1960년대의 새로운 분위기에 완벽하게 부합했다.
그녀는 바달 사순이 손질한 기하학적인 커트 머리에 어울리는 커트의 새 미니 스커트를 유행시켰다.
그녀는 1990년대의 슈퍼모델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해서, '타임지'의 표지 모델이 되기도 했다. 1966년의 얼굴이라 불린 그녀는 개성 있는 메이크업, 의상, 양말 영역을 개척했으며 그녀의 이름을 딴 인형도 생겼다.
41kg밖에 안 나가는 트위기는 1960년대 최초의 슈퍼모델이다.
약력
17세에 데뷔해, 1960년대를 뒤흔들었던 영국출신의 톱 모델로 봉제공장에 일했고 미용실에서 샴푸질 하는 일을 하다가 모델에 발탁된 인생역전의 산 증인이다.
야무진 눈매, 웃음기 없는 입술, 주근깨, 깡마른 체형 , 중성적인 매력을 가진, 그리고 오랜 모델 활동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여공 분위기도 나는 그녀는 무릎 위로 올라오는 아주 유아틱한 짧은 A라인 원피스, 굽낮은 구두와 함께 보브컷 헤어스타일로 전 세계에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는데, 그 결과 단지 이름에 불과했던 트위기라는 단어를 60년대의 얼굴 (The Face of'60)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몇 세대를 뛰어넘을 전설로 만들었다.
1990년 초, 패션계에 케이트 모스가 등장했을 때 언론은 굉장히 야위고 짧은 컷의 그녀에게 90년대 트위기라고 종종 얘기하곤 했다. 마른몸매를 위해 많은 소녀들이 다시 거식증에 걸리게 만들었고 전 세계적으로 다시 트위기룩이 유행했던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런 그녀는 4년 이라는 짧은 모델 생활 에도 불구,40년이 지난 지금까지 건재함을 자랑하는 스타일을 남긴 그녀는 일찌감치 모델 계에서 발을 빼고 평범한 주부가 되어 지금은 지극히 건강한 삶을 살고 있다.
생계를 위해 옷걸이가 될 수 없다는 이유로 정상의 자리에서 과감히 내려온 트위기는 예명을 버리고 본명은 '레슬리 혼비'로 돌아갔다.
60년대 후반에 등장한 트위기의 파장은 엄청났다. 여성스러움을 중시했던 60년대 패션계에 보이쉬한 스타일을 지닌 트위기의 등장은 가히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왔다. 기존의 패션계에서 추구 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빼빼 마른 체구를 가진 그녀 하지만 그 마른 체구가 바로 그녀를 유명하게 만든 존재의 이유였다.
키 167cm 몸무게 40kg 허리둘레 22인치 당시 수많은 여성을 다이어트의 공포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덕분에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수많은 슈퍼모델들이 그녀를 본보기로 삼아 오늘도 다이어트에 열중이라는 웃지 못 할 비유전적 붐을 남겼다.
패션화보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 그녀는 현재의 모델들이 보여주는 패션 화보의 콘셉트와 형식을 처음으로 만든 인물이기도하다. 지난 수많은 화보에서 보여준 그녀 특유의 몽환적 표정과 포즈는 지금도 많은 모델들에게 가이드라인이 되고 있다.
'트위기컷'은 60년대 패션 아이콘 트위기(Lesley Hornby)의 짧은 헤어스타일에서 유래됐다. 당시 모델이던 트위기는 생머리를 과감히 커트, 긴 머리 여성이 아름답다는 편견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물론 트위기의 반란은 대성공. 전 세계가 트위기의 짧은 매력에 푹 빠졌다.
개성이 중요시되는 메이크업 트렌드가 나타났으며, 문신도 유행했다. 1960년대 중반으로 갈수록 메이크업은 더욱 장식화 되고 더욱 대담해졌으며, 트위기 메이크업이 대표적이다. 인조 속눈썹으로 눈을 한 층 강조했고, 입술 선을 강조했으며 흐린 펄 립스틱이 인기를 모았다.
아주 유아틱한 짧은 A라인 원피스와 굽 낮은 플랫 슈즈, 미니멀한 패턴에 강렬한 포인트 대비는 일명 트위기 스타일 이라 불리어지며 비틀즈와 함께 60년대 모즈(mods)룩을 상징하는 패션으로 전 세계에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또한 미니스커트는 당시 모델이었던 트위기(twiggy)의 가냘픈 몸매와 천진난만한 모습의 단발머리(bob hair) 가 함께 선보였다. 당시 미니는 노동계급과 중간 계층 출신의 여성들이 즐겨 입었는데, 패션 전문가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자신을 위한 새로운 패션으로 창조되기도 하였다. 1965년, 66년을 통해 스커트는 점점 더 짧아졌고, 스커트 총 길이가 18인치밖게 안 되는 가장 짧은 미니스커트가 대량생산되어 판매되었다
1971년 보이프렌드 주연 1980년 블루스 브라더스 조연 1986년 지상의 낙원 조연 1988년 마담 소사츠카 조연 1993년 옴니버스 공포영화 body bage 조연 1998년 17세의 혼돈 단역
도전! 슈퍼모델 심사위원
83년 브로드웨이 뮤지컬 '마이 원 앤드 온리'-토니상 후보에 오름
트위기는 유명해졌다. 당시 보이쉬한 그녀의 스타일은 트위기를 런던을 대표하는 모델로 만들었다. 잠깐 사이에 몸값이 60달러에서 200달러로 올랐고, 엘르, 보그, 하버스 바자, 룩, 세븐틴, 맥컬츠, 태틀러 등 유명잡지의 표지를 장식했다. 런치박스, 부자연스런 속눈썹, 스웨터, 손가방과 종이인형, 미니원피스, 플랫슈즈-이모두가 트위기가 유행시킨 것들이다.
물론 약간의 문제가 있긴 했다. 트위기의 날씬한 다리와 수접어하는 말괄량이 소녀의 모습은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보였으나, 그녀의 빼빼마른 체형이 십대 소녀들에게 우상과 본보기가 되는 것이 뜨거운 논란거리가 되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마른 체형이 오히려 트위기를 더욱 유명하게 했다.
단발머리에 왜소한 체격의 17세 소녀는 다른 모델들과 무척이나 상반된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당당하게 자기만의 것으로 소화해냈다.
그녀는 긴 머리에 건강한 몸매의 모델들만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당시의 고정관념을 철저히 무너뜨렸고, 곧 60~70년대 최고의 패션 아이콘이자 세계적인 슈퍼스타의 자리에 올랐다.
그녀는 2번의 결혼을 하기도 하고, 아이를 낳기도 했다. 25세 때 자서전을 쓰기도 하고, 간간히 모델일 을 하기도 했다. 현재의 트위기는 그녀의 젊은 시절과 명성에서 본적 없었던 더없이 밝은 빛을 발하고 있다. (출처:www.geocities.com)
1972 미국골든글로브시상식 여우주연상, 신인상
첫댓글 감사합니 다
네~~^^
앗.. 올리고 다음날인가? 사진 업뎃해놨는데 진짜 비달할배랑 트위기할매 사진있는게 더 잼있어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