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가 잃어버린 세계 제일의 ‘고인돌’ 유산
전 세계 고인돌 6만여 기 중 3000여 기가 대구에 있었다
대구는 본래 이름 ‘달(구)벌’을 757년(신라 경덕왕 16)부터 잃어버렸다. 경덕왕이 신라의 인명과 지명을 대대적으로 중국화하면서 ‘대구大丘’로 바꾸어버렸기 때문이다.
대구는 1906∼7년에 걸쳐 대구읍성도 잃어버렸다. 일본인 상인들의 철거 청탁을 받은 당시 경상북도 관찰사 서리 겸 대구군수 박중양이 정부의 불허 방침도 무시하고 대구읍성을 뭉개버렸기 때문이다. 대구읍성은 1888년 대구를 방문한 프랑스 지리학자 샤를 바라가 “북경성만큼이나 아름다운 성”이라고 격찬했던 문화유산이지만,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양자’ 박중양은 국가의 중요 군사 시설을 제멋대로 없애버릴 만큼 막강했다.
대구읍성이 없어진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두고 ‘세계 제일의 문화유산’을 대구가 잃어버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대구가 잃어버린 세계 제일의 문화유산은 따로 있다. 대구는 세계 그 어느 곳보다 더 많은 고인돌을 보유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대부분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경북대 고고인류학과 윤용진 명예교수는 〈대구 지석묘 단상〉이라는 글을 써서 그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대구의 지석묘(고인돌)는 일제가 1927년 발굴, 조사한 〈대봉동(유적의 당시 소재지로, 현재는 이천동 위치임) 지석묘 조사 보고서〉를 통해서 일약 유명해졌다. (중략)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석묘 이야기만 나오면 대구를 연상할 만큼 대구 지석묘는 학계에서 유명했다. (중략) 1980년대가 되면서 도심이 급속히 확장되고 이에 따라 장관을 이뤘던 (대구의) 지석묘들이 지상에서 자취를 감춰버렸다.
문화재청과 서울대 박물관이 1999년에 공동 발간한 〈한국 지석묘 유적 종합 조사 연구〉에 따르면, 지구상에는 고인돌이 6만여 기 남아 있다. 그 6만여 기의 82.5%인 4만9510기가 우리나라에 있다. 놀라운 일이다. 그래서 외국에서는 우리나라를 “고인돌의 나라”라 부른다. 그 4만5910기의 고인돌 중 2만9510기는 남한에 있고, 2만여 기는 북한에 있다. 그런데 남한의 2만9510기에는 대구의 3,000여 기가 포함되지 않는다.
대구는 세계 그 어느 곳보다도 많은 고인돌을 보유하고 있다고 해서 “고인돌의 도시”라 불렸는데, 왜 대구의 3,000여 고인돌은 세계 그리고 우리나라 고인돌의 총수에 포함되지 않았을까? 해방 전후와 1970∼80년대 도시 개발 풍조 속에서 거의 대부분이 파괴되거나 땅속에 매장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는 “대구는 고인돌의 도시”라고 말하면 ‘거짓’이 된다. 현재는 고인돌이 100여 기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고, 그나마 뿔뿔이 흩어진 ‘이산가족’ 신세라 주목을 받을 모양새도 못 된다. 그 탓에 “대구는 고인돌의 도시였다”라고 할 수밖에 없다. 대구시가 펴낸 《대구의 향기》의 고인돌 기사도 모두 과거 시제를 쓰고 있다.
대구에는 굉장히 많은 지석묘가 있었다. (중략) 대구역 부근에서 달성공원에 이르는 사이에 지석묘가 (많이) 있었고, 서남쪽으로는 화원(읍)에 이르는 도로 부근에 2km에 걸쳐 이어져 있었고, 동남쪽으로는 봉산동 대봉동에 이르는 사이에 (많이) 있었으며, 신천 너머 수성들에도 남북으로 1km에 걸쳐 늘어서 있었다. (중략) 하지만 시가지의 발전에 따라 지금은 대부분의 지석묘가 없어지고 말았다.
《대구 시사》도 “대구 분지를 흐르는 신천의 유역에 분포한 지석묘군은 일찍부터 알려졌고 (중략) 1920년대 초기만 하더라도 옛 대구읍성 바깥에 분포해 장관을 이루었다”면서 대구 고인돌 군집의 대단했던 모습을 추억한다. 그러나 이 책 역시 “대구의 그 많던 고인돌들이 거의 흔적을 잃어가고 있다”라고 안타까워한다.
일제 강점기 시대, 이 땅을 강제 점거하고 있던 일본인들은 자기네 정원을 꾸미는 데에 우리의 귀중한 문화유산 고인돌을 함부로 가져다 썼다. 1919년 독립만세 운동의 발상지라는 이유로 서문시장을 1928년 강제 이전시키면서 장터 조성용 흙을 충당하기 위해 비산동과 내당동 일대 고분군을 파괴했던 일제가 고인돌들도 대대적으로 훼손했던 것이다.
《대구 시사》는 “(전국 고인돌 중) 첫 지석묘 발굴 조사가 (대구 이천동 고인돌을 대상으로) 1927년에 있었을 때에는 이미 상당수의 지석묘 상석이 일본인들의 정원석으로 많이 이용되어 원위치에서 이동되었다”라고 고발하고 있다. 한편 《대구 시사》는 “일본인들의 행위 후에도 시가지의 확장으로 상석의 대부분이 제거되었다”면서 우리 자신의 잘못도 지적한다. “대구 시역의 확장으로 진천천 유역, 욱수천 유역, 율하천 유역의 반야월 지역 지석묘군마저 최근의 갑작스러운 경제성장에 따르는 대규모 공업단지 조성, 시가지 확장 등 국토개발로 거의 흔적을 잃어가고 있다”는 반성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창과 화순 일대보다도 더 많은 무려 3000여 기의 고인돌이 있었던 대구, 지금도 그것들이 제자리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답사 안내] 대구 시내에서 접근하기 쉽고, 잘 가꾸어져 있고, 답사의 목적을 충분히 달성할 수 있는 최고의 고인돌 유적지는 수성구 청수로4길64 앞의 ‘상동 청동기 마을’이다. 시외로 나가면 달성군 가창면 가창로 774 가창제일교회 뒤편 고인돌이 아주 볼 만하다. 멀리 산들이 정면으로 보이는 넓은 잔디밭에 청동기 시대의 무덤들이 평화롭게 누워 있다. 대구시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그 외 달서구 진천동 유적지(사적), 지하철 대구역 칠성시장 방향 출구에 옮겨져 있는 칠성바위, 대구교도소 담장 바로 아래와 화장사 대웅전 일대의 화원읍 천내리 유적지(대구시 기념물), 시지 보성아파트 단지 내 고인돌 유적지, 수성유원지 남쪽 상동 501 ‘상동 고인돌 유적지’(대구시 기념물) 등에서 고인돌을 볼 수 있다.
그 중에서는 고인돌에 새겨진 선사시대 그림들을 탁본할 수 있도록 모형 입석을 세워둔 진천동 유적, 돌마다 사람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 흥미를 끄는 칠성바위, 사찰 담벼락에 박혀 있기도 한 화원읍 천내리의 고인돌들도 답사자의 발길을 잡아당긴다. 제 각각 특이한 사연을 담고 있는 듯 여겨지는 까닭이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가졌던 고인돌들을 대구가 거의 대부분 잃어버리고 말았다는 안타까움이 새삼 솟아난다. 그래도 고인돌과 같은 과거의 역사문화유산을 찾아다니는 일은 보람 있는 인간 활동이다. 역사는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삶의 교훈과 지혜를 주는 까닭이다.
그런 뜻에서, 대구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고인돌 유적지들의 주소를 일목요연하게 소개해 본다. “당신이 소개한 주소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만나게 되었다”면서 청동기 시대 고대인들이 감사 인사를 해올 날을 기대하면서….
수성구 청수로4길 64 정화빌라 입구
상동 청동기 마을
수성구 상동 501 수성못 유원지 남쪽
상동 고인돌 유적
수성구 신매로 21 보성APT 108동 앞
시지 고인돌 유적
달성군 가창면 가창로 774 가창제일교회 뒤
냉천 고인돌 유적
달성군 화원읍 비슬로522길 41
천내리 고인돌 유적
북구 칠성남로30길 20 지하철역 1번 출구
칠성바위
달서구 진천로3길 85
진천동 사적지
* ‘상동 고인돌 유적’ 현지 안내판
대구광역시 기념물
대구광역시 수성구 상동 501
이곳은 대구 분지의 남쪽 경계를 이루는 팔조령 주변의 산지로부터 발원하는 신천이 대구 분지로 유입되는 구역으로 신천 주변의 대표적인 지석묘군이다. 현재 상석을 중심으로 지하에 30여 기의 다양한 지하 분포가 확인되어 신천변에 분포하고 있는 청동기 시대 고인돌 사회를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 ‘칠성七星바위’ 현지 안내판
대구광역시 북구 칠성남로30길 20
이곳 바위들은 고인돌[支石墓]의 개석蓋石으로서 원래 대구역의 서남쪽에 유존遺存하였던 것인데, 조선 정조 때 경상감사 이태영李泰永은 꿈에 북두칠성北斗七星이 북문 밖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일곱 아들의 이름을 이 바위들에 새겨 복을 빌었으며, 이에 지역민들도 칠성바위로 부르면서 아들을 얻기 위한 기도처祈禱處로 이용하였고, 칠성동七星洞의 지명地名도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그 후 칠성바위는 1973년 시민회관의 신축을 계기로 발굴조사 되었으나, 별다른 유구遺構나 유물遺物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으며, 지금까지 시민회관 남쪽의 화단에 옮겨 보존되었는데, 1998년에 칠성동으로의 이전 요구가 있었고, 이에 대구광역시에서는 문화재위원회의 의결을 거쳐 현 위치로 옮겨 놓았다.
* ‘천내리 고인돌 유적’ 현지 안내판
대구광역시 기념물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비슬로522길41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건축 유산인 지석묘는 흔히 고인돌이라 불린다. 천내리 지석묘는 지하에 판석이나 깬돌, 냇돌 등으로 묘실을 만든 뒤 그 둘레에 지석(받침돌)을 몇 개 놓은 뒤 상석(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 고인돌이다. 과거 화원읍 천내리와 성산리의 진천천 유역에는 많은 지석묘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를 칠성바위라 부르며 기자처祈子處(기도하는 곳)로 신성시하였다.
현재 이곳에는 8기의 지석묘가 북동-남서 방향으로 있는데, 4기는 화원교도소 담 밑에, 3기는 화원교도소의 동남쪽인 화장사 경내에, 나머지 1기는 화장사 담에 걸쳐 있다.
화원교도소 담 밑에 있는 4기의 지석묘 사이에는 후대에 설치된 석조 부도 1기도 유존하고 있다. 이들 8기의 지석묘 중 화장사 극락보전 옆의 지석묘에는 성혈흔性穴痕이 확인된다.
* ‘상동 청동기 마을’ 현지 안내판
대구광역시 수성구 청수로4길 64 정화빌라 입구
상동 청동기 마을의 유적은 청동기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사람들의 주 생활무대로 이용된 곳으로, 현재는 정화우방팔레스가 자리하고 있다.
(재)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에서는 2000년과 20001년 두 차례에 걸쳐서 청동기시대 주거지 20기, 지석묘 6기, 삼국 ‧ 통일신라시대 주거지 15기, 조선시대 온돌시설 및 주거지 11기, 건물터, 우물, 담장터, 도로 등을 조사하였으며, 조사 결과 무문토기, 석촉, 반달돌칼에서부터 고배, 시루, 청자, 백자, 기와 등 실생활에 사용된 유물 600여 점이 출토되었다.
청동기시대 주거지는 평면 방형 또는 원형의 구덩이를 파고 지붕을 얹은 움집 형태이고, 삼국 ‧ 통일신라시대 주거지 역시 움집 형태이나 내부에 외줄고래시설을 설치하여 난방 기능을 강화하였다. 이들 주거지들이 아파트 102동 하부에 주로 밀집 분포하고 있었던 것에 비해 조선시대 유구들은 101동과 102동 사이에 산발적으로 분포하고 있었으며, 파괴가 상당히 심한 상태였다.
지석묘는 단지 내 공원부지 하부에 집중 분포되어 있었고, 상석은 1기만 남아 있었으며 나머지는 하부구조만 유존하고 있었다. 현재 아파트 단지 내 공원부지에 청동기시대 주거지 1동과 지석묘 하부구조인 석곽(관)묘 3기를 이전 ‧ 복원하여 관람하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