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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강해(20)*헤롯의 죽음
사도행전 12장18-25절 / 송태근 목사
오늘은 우리 사도행전 12장 마지막 부분을 좀 보면서 12장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지난주 전체 내용이 베드로의 추억의 과정을 다뤄 썼어요. 그리고 그 추억이 무엇 하는가? 그 모든 가정은 하나님이 직접 시작하셨고 하나님이 주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그를 위해서 빌었고 하나님은 그 믿음 없는 기도도 어떻게 응답 하시는가?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반면에 좀 현장을 바꾸어서 헤롯의 궁궐은 난리가 났지요? 발칵 뒤집혔습니다. 이게 한 번도 아니고 두 번도 아니고 세 번씩 이런 일이 어떻게 벌어지는 이번에는 죽이기 위해서 그를 3층하옥에 가두고 병사를 4씩 묶어서 감시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감쪽같이 탈출이 된 겁니다. 그래서 그 풍경을 좀 성경 기록자가 상세히 소개했는데요.
➤“18. 이제 날이 새매 곧바로 군사들 사이에서는 베드로가 어떻게 되었는가에 관해 적지 않은 소동이 있더라. 19. 헤롯이 그를 찾아도 발견하지 못하매 간수들을 심문하며 그들을 죽이라고 명령하고 유대에서 가이사랴로 내려가 거기 머물더라.”
헤롯이 단단히 화가 났던 것 같아요. 너희들은? 뭐 하는 놈들이냐? 어떻게 그거 하나 감시 못하고 이렇게 탈출을 시킬 수가 있느냐? 이제 이게 헤롯의 한계 입니다. 세 번씩 이런 일을 겪으면서 헤롯은 왕로서는 이일이 하나님이 주도 하시는 일이라는 걸 못 보고 있어요. 이것은 육에 사람의 한계입니다. 자 이런 모습은 우리 그리스도인들 내면 해도 사실은 구석구석 단단히 자리 잡고 있습니다.
우리가 명분은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데 영적인 더듬이가 여러 지지 않으면 이걸 자꾸 사람의 인가? 길가로 이해를 해요. 그래서 애꿎은 병사들만 잡아서 죽이도록 명령을 내려 버립니다. 이 명령은 불법은 아니에요. 그 당시는 무슨 법이 있었는가? 하면 이스타니아 법이라고 있었어요. 이것은 병사들이 이런 사고를 당하고 사고를 쳤을 때는 해결이 간단해요. 대신 죽음은 되요. 그리고 대신 벌을 받으면 되요. 베드로를 사형수이지요. 그 대신 죽는 겁니다. 이게 이스타니아 법이에요.
그래서 고대의 그 스토리나 영화를 보면 가끔 친구를 대신해서 가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이법 때문에 가능한 경우들이어요. 그리고 헤롯은 그 병사들을 죽이도록 명령을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어떤 일이건 간에 우리에게는 적어도 영적으로 모든 걸 봐야 되요. 인간적으로 볼게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이것이 나에게 하나님이 무슨 메시지일까? 이걸 예민하게 영적인 더듬이를 세워서 하나님의 목적을 살펴야 됩니다. 그 눈이 열어 줘야 되요. 여러분 혹시 기억나십니까?
구약에 보면 다윗이 아버지 심부름으로 형들 전쟁하는 현장에 갔다가 어쩌다가 전쟁터에 들어가게 되지요. 그 당시 상황은 사울에 군대가 블래셋 골리앗을 앞에 놓고 사시나무 떨듯 벌벌 떨고 있었어요. 그 어마어마한 크기와 규모에 짓눌려서 사실상 이제 패배를 확인하는 일만 남겨 놓고 있을 절대 절명의 위기 때 다윗이 그 현장을 찾게 된 겁니다. 사울은 급하니까 이 어린 소년에게 갑옷을 쉬우고 무장을 시키려고 했지만 당시 불편 했지요. 다 벗어 던지고 애들 장난감 같은 물맷돌 하나 들고 골리앗을 향해서 갑니다. 어마어마한 자이언트에요. 군사의 수는 말할 것도 없고 그런데 당시 딱 한 마디를 해요. 이 할레 없는 백성이 하나님의 군대를 모독 하도다. 사울은 이 싸움을 크기와 규모에 싸움으로 봤어요. 그런데 다윗은 정확하게 이 싸움이 하나님께 속한 싸움이라는 것을 간파했습니다.
이것이 영적인 시각차이요.
지금 헤롯은 아직도 이 모든 역사의 움직임이 하나님이 주도하고 있다는 걸 못 보고 있어요. 여러분들이 그걸 보기를 바랍니다. 근원이 열려 지는 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자 그렇게 명령을 내려놓고 19절에 보니까 이렇게 되어 있어요. ➤“19.. 헤롯이 그를 찾아도 발견하지 못하매 간수들을 심문하며 그들을 죽이라고 명령하고 유대에서 가이사랴로 내려가 거기 머물더라.” 앞을 잠깐 보실까요? 자 한 사람을 개인적인 행적을 성경이 왜 여기다 기록을 해 왔을까요? 이게 뭐 특히 여기서 무슨 메시지가 있을까요? 유대에서 가이사랴로 간 것 같다. 무슨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까? 분명 이건 하나님 말씀 이란 말이에요. 이유 없이 여기 기록될 이는 없고 이 무슨 뜻일까?
지금부터 여러분들은 이 가이사랴의 지역의 그 배경에 대해서 조금 이해를 가지고 오늘 본문을 보셔야 이 전체 방향이 잡힙니다. 가이사랴는 유대 안에 있는 한 지역의 있는데 어떤 지역이 있는가? 하면 어 난지도 같은 어 아주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살던 지역이었습니다. 허름한 다 스러져가는 집들이 가득 찼는데 매일매일 기본적인 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인간적인 되어 받지 못하고 그저 하루 벌어서 하루 겨우 지탱해야 되는 이 고달픈 서민들의 애환이 녹아져 있는 그런 도시였어요. 그 동네도 지저분하고 그랬겠지요.
어느 날 헤롯이 지나가다가
이 지저분 하는 것들이 건 뭐야? 한마디 했겠지요? 야! 아래서 알아서 긴 겁니다. “알았습니다. 각하!” 그리고 오늘날 불도저가 들어오고 싹 밀어버린 거예요. 그런 그가 라는 사람들이 어디로 갔겠습니까? 이런 개발(開發)독재 라는 게 오늘만 있는 게 아니에요. 그때도 개발 독재가 있었어요. 자 그 사람들을 다 싹 밀어 내고 짚다 헐어 버리고 거기에다가 이태리 대리석을 수입해서 어마어마하고 위용스러운 로마 철학과 가치와 문화와 정식에 담긴 도시를 지은 겁니다.
제가 거기에 가봤어요. 지금도 규모가 어마, 어마 그리고 거기에는 황제를 숭상하는 신전이 배치되고 헤롯이 가이사랴에 다 그 짓을 했어요. 그래서 이름을 가이사랴로 바꿉니다. 황제의 이름이지요. 그리고 그 도시를 황제에게 봉혼을 한겁니다. 이것이 헤롯이 사는 방식 이었어요. 이 남자가 인생을 살아가는 원리였어요. 그래서 이 본문에서 등장하는 해롯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성경에는 기본적으로 4명이 헤롯이 등장
첫째 예수님 태어날 때 유아 살해를 명령 했던 헤롯, 둘째 요한의 목을 쟁반에다 바쳤던 헤롯, 오늘 이 헤롯은 세 번째 것입니다. 아그립바 2세였어요. 그리고 아그립바 2세가 바울과 심문 과정에서 맞닥뜨려 떤 그 헤롯입니다. 그런데 왕조 이름만 쓰다보니까 이름이 다 똑같이 보이지요.
그러나 다른 이름이요. 혈통을 같아요, 아시는 대로 이 헤롯 누구의 후손이라고 말씀을 드렸지요. 에서의 후손입니다. 이 맥락은 굉장히 성경적으로 중요한 만남입니다. 헤롯& 에서의 혈통이에요. 이 뿌리가 뭐 이렇게 중요하냐? 우리 자막을 통해서 성경을 보세요. 우리 창세기 25장34절 ➤“34. 이에 야곱이 빵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그가 먹고 마시고 일어나 자기 길로 갔더라. 에서는 이와 같이 자기의 장자권을 업신여겼더라.”
가볍게 야겠다는 말은 망하는 자리에 자기 영혼을 두었다고 말이에요. 그러면 장자의 명분이 모르게 중요합니까? 대한민국에서 장남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부담과 책임 밖에 없던데요. 그런데 히브리인들의 그들은 조금 개념이 달라요. 장자의 명분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그 가계(家系)를 통해서 메시아가 즉 기름 부은 자가 오시도록 되어있기 때문이에요. 그걸 우리는 그리스 말로 [크리스토] 라고 그러지요. [그리스도] 그 의미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 라는 뜻입니다. 야곱은 방법은 틀렸어도 그걸 궁극적으로 붙들었어요. [난 이게 필요하다.] 에서는 그것을 한 끼 음식의 팔아넘깁니다. 이게 에서의 혈통(血統)이 갖는 중요한 이랑 제가 사는 방식 이었어요. 그리고 헤롯이 살았던 삶의 원리였습니다. 이걸 성경의 기록자가 어떻게 평가할 나를 한번 보실까요?
히브리서 12장16절 같이 읽습니다. ➤“16 이것은 음행하는 자나 혹은 먹을 것 한 조각을 위해 자기의 장자권을 판 에서와 같이 속된 자가 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아멘! 여기서 보면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펴라” 이런 전영적으로 헤롯은 그가 사는 원리는 유익이냐? 이익이냐? 앞의 이익을 택했고 대세냐? 대의 앞에 대세를 선뜻 택할 수 있었던 생리적 본질을 담고 있어요. 그런데 이런 모습이 누구 이야기가 아니고 바로 우리 속에 내면 한편에 자리 잡고 있는 삶의 방식이에요. 우리 매일 이것을 떨쳐 해야 되요. 내 속에 헤롯의 요인은 없는가?
그런 이 가이사랴 도시를 건설해서 황제에게 봉혼을 합니다. 이유는 뭘까요? 아시는 대로 이 헤롯은 이런 에서의 후손이라는 혈통적 컴플렉스가 있기 때문에 항상 로마 당국에 줄을 타야 되고 유대인들에게는 배척을 받았어요. 이 양자에서 굉장한 줄타기 명수요. 그래서 부와 그리고 재산을 축적했어요. 어마어마한 땅을 하나씩 하나씩 차지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에서가 사는 방식이고 에서의 본질을 붙들고 있는 인생들이 살아가는 이 땅의 방식입니다. 그가 가이사랴 도시에 사는 스타일이요. 이 도시를 건설한 다음에 헤롯은 여기에다 자기 별장을 하나짓습니다. 그러면 골치 아픈 일이 있거나 쉴 일이 있을 때, 또 로마제국의 중대 안이 있을 때, 이 가이사랴로 내려갑니다.
자 그런데 내려가서 이런 기록을 남깁니다. 성경을 보세요. 20절 ➤“20 ¶ 헤롯이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몹시 못마땅하게 여기더라. 그러나 그들이 한마음으로 그에게 나아와 왕의 시종 블라스도를 자기들의 친구로 삼고 화평을 구하니 이는 그들의 지방이 왕의 지방에서 나는 양식을 먹었기 때문이더라.”
이런 기록이 여기 왜 삽입이 되어 있을까? 우선 두로와 시돈은 유대 땅은 아니에요. 이방 땅에 해당하는데 유대 땅 하고 굉장히 가까이 있어요. 지중에 해변 도시입니다. 항구도시 다 보니까 이 무역로가 발달이 돼서 여기에는 많은 돈이 돌아요. 게다가 이 두로와 시돈은 구약에도 보면 솔로몬의 궁궐을 지을 때 여기에서 모든 물자를 수송해 옵니다. 그만큼 여기에는 어마어마한 풍부한 물자가 생산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사람들은 늘 역사적으로 풍요 속의 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거만 한데다가 뿐만 아니라 물질이 풍요 하다보니까 시간 나고 돈 생기니까 할 짓이 뭐 있겠어요? 귀신이 밖에 없지요.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보면 심판의 상징으로 두로와 시돈을 꼽아요. 그 여긴 우상숭배에 본산지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이스라엘 왕 아합의 아내 이세벨이 여기에서 흘러들어와 결혼을 합니다. 그도 정략적으로 피를 섞지요. 아합도 정권 유지를 위해서, 그래서 역대 이스라엘의 못된 왕들이 이 두로와 시돈과 싫지만 필요를 따라서 붙었다 떨어졌다 해요. 그런데 이 도시가 한 가지 약점이 있습니다. 오만 자원이 다 풍부히 생산이 되는데 딱 알아 안 나는 게 있어요. 식량이 나질 않아요. 식량이 나지 않을 게 식량을 유대인들에게 와서 사먹어요. 그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헤롯이 약점을 알고 소위 경제 목 조르기를 하는 겁니다. 식량을 무기화 시켜서 말 안 들으면 식량 안 팔아! 그 아무 따른 게 아무리 많아도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쌀을 못 사오는데 쉽게 얘기하면 식량을 못 사오는데 그래서 이 때 사람 사는 게 다 똑같아요. 로비스트가 있었어요.
성경에서는 뭘로 나오느냐? 하면 [블라스도] 라고 나옵니다. 20절 다시 보세요. ➤“20 ¶ 헤롯이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몹시 못마땅하게 여기더라. 그러나 그들이 한마음으로 그에게 나아와 왕의 시종 블라스도를 자기들의 친구로 삼고 화평을 구하니 이는 그들의 지방이 왕의 지방에서 나는 양식을 먹었기 때문이더라.”
이런 기록이 여기에 녹아져 있는 이유는?
이것이 헤롯이 살아가는 방식이 있었어요. 서로를 미워하지만 정략적 필요를 따라서 서로 뜯어먹고 사는 관계가 있고 두로와 시돈이고 예수님도 항상 이 드로와 시돈을 고려할 때는 심판의 대명사처럼 거론하고 했습니다. 자 이제 이 가이사랴에 헤롯이 이렇게 와서, 오늘 21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21. 한 정해진 날에 헤롯이 왕복을 차려입고 자기 왕좌에 앉아 그들에게 연설하니” 자 이야기를 조금 풀어서 여러분들의 설명을 드려야 될 이유가 있습니다.
제가 아까 가이사랴 헤롯이 올 때는 휴가차 오거나 골치 아픈 일이 있을 때. 쉬려고 오거나 또는 로마제국의 어떤 중요한 날이 있을 때, 이곳을 찾는다고 말씀드렸어요. 이 기간이 황제의 생일이 있는 기간이에요. 그래서 그는 황제 생일을 황제의 도시에 걸맞게 여기에서 품위 있게 거행하기 위해서 아마 여기에 찾았던 것 같아요. 그럼 지금 그런 날을 정해서 왕복을 입습니다. 여기 왕복이라는 것은 왕의 복장을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왕이 입는 옷이긴 옷인데 연회복을 얘기합니다. 생일이니까 당연히 연회복을 입었겠지요. 그런데 이 연회복이 역사의 기록에 보면 굉장히 재밌어요. 이렇게 팁을 보면 연예인들이 일상에서는 도저히 죽어도 입을 수 없는 옷들 무대에서 입고 올라가지요. 그건 길거리 못 입고 다녀요. 그런 옷은 그런데 무대에 오른 이제 옷들이 있습니다. 아주 이렇게 과장된 그 스타일에 색깔과 옷들을 입고 올라가요.
그리고 이웃은 어떻게 돼 있는가 하면? 전신이 옷 전부가 은빛 색갈의 스팽글 그러나 이것을 반짝이도 뭐라 그래요. 그 스팽글 쫙 연결돼 있어 은빛 비늘로 그 옷을 있고 이제 왕의 자리 않는 거예요. 그리고 연설을 하는데 역사의 기록에 의하면 헤롯은 명 연설가였다고 합니다. 히틀러도 아주 그 지금도 음성 기록을 보면 굉장한 선동가이지요. 아주 그 음성과 이 논조가 탁월합니다.
청중의 마음을 뺏어 버리는데 타고난 천부적인 기질이 있어요. 헤롯이 그랬던 것 같아요. 게다가 이 집안 내력이 다혈질이잖아요. 그래서 막 소리 지르고 선동 하면 청중이 쫙 빨려요. 정치하는 사람들의 중요한 기술 중 하나가 연설이지요. 연설. 그렇게 연설을 하는 겁니다. 자 생각을 해보십시오.
그런데 이 연설할 때 연미복을 입고 나올 때 시간이 언젠가 하면 아침에 이런 시간에 청중들을 불러요. 광장의 모아놓고 그 해가 뜨는 시간에 일을 시작합니다. 그러면 지중해에 그 찬란한 해가 동쪽에서 떠올라요. 떠오를 때 그 햇빛이 왕을 쫙 빛 칩니다. 그러면 그 은빛 스파크가 청중들의 시각에서 볼 때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불 가운데 사람이 서 있는 것 같을 거요. 반짝반짝 하면서 얼마나 찬란할까요?
오래 전에 어느 목사님은 평소에는 검은 가운을 입다가 이런 그 여름만 되면 하얀 모시 적삼을 입고 두루마기까지 차례 있고 나오세요. 그리고 한쪽에 왼쪽의 붉은 장미를 들고 나왔어요. 머리도 하얀 분인데 그건 목소리는 저음에 굵은 바리톤이에요. 그리고 목사님 서셔가지고 할렐루야! 그러면은 다 귀함을 하지요! 오 정말 하늘에서 내려오신 같은 느낌도 들고 그런 거예요.
원래 설교 학 관점에서 보는 좋은 모습이 아닙니다.
설교자는 우리가 배우기로는 이 앞 포케트에 만연필도 못 꽂도록 돼 있어요. 수건도 못하도록 돼 있어요. 그저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추하지 않으면 돼요. 차림이 왜 보급에 시선을 빼앗길 수 있기 때문에 말씀을 듣는데 시선을 빼앗길 수 있기 때문에 여기지 교회 내에 유명한 꽃꽂이 하는 분들이 가끔 꽃꽂이를 해놓을 때가 있어요. 다른 교회들은 그런 교인들이 앉아서 목사 설교는 지루하고 이런 주보 위에다가 그거 그려요. 집에 가자 집에 가서 해본다고 그것은 낭패입니다. 없는 게 좋아요. 꽃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설교를 들을 때 방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늘 하는 얘기지만 목사가 너무 잘생기면 복음의 방해가 돼요. 그 제 얼굴을 보면 아주 복음적인 얼굴이에요. 그런 측면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반응은 한번 볼까요?
➤22절 “22. 백성이 환호하며 이르되, 그것은 신의 음성이요, 사람의 음성이 아니라, 하거늘” 놀랐지요? 백성들이 이 연호하기 시작했습니다. 상상을 해보세요? 지중에 아침 햇빛을 받으면서 그 팍하는 스파크가 달린 은빛 비늘에 옷을 입고 왕 있었는데 그냥 표호를 하면서 불을 뿜어낼 때, 청중들의 입장에서는 헤롯, 헤롯, 헤롯 이렇게 될 거예요. 그런데 역사가는 이 현장을 조금 더 자세히 기록을 했어요. 무서운 얘기를 써 놨어요. 헤롯이 그를 수용 하였더라. 에! 헤롯이 그를 수용 하였더라.
여러분 사람이 그렇게 돼요. 아 내가 왕은 왕인데 청중들의 반응을 보니까 내가 신일 수도 있겠다. 이렇게 된 거예요. 그래서 이건 피차 참 조심해야 될 문제입니다. 교회에서는 한 종류의 사람 밖에는 없어야 돼요. 용서받은 죄인! 한국교회 본인이 원했던 원치 않았던 많은 영광을 받은 목회자들의 말로가 어떻게 되는지 한번 보세요. 하나님이 결코 기뻐하지 않아요. 그 사람을 기뻐하지 않는 게 아니에요. 그 자체를 기뻐하지 않아요. 하나님께만 영광이 돼야 되요.
왜 황제숭배 사상이 가능했습니까?
로마의 법의 부칙에는 모든 로마의 황제는 법률로 부터 자유 한다는 부칙이 있습니다. 법률로부터 자유 하는 인간은 누구란 말입니까? 신이지요. 신이에요. 헤롯이 거기에 넘어갑니다. 이거 피차가 교인도 조심해야 되고 목회자도 물론 두려운 마음으로 조심해야 되요. 이 땅에 큰 영광 받으려고 하지마세요. 그건 저도 마찬가지고 전 영광 받을 것도 없지만, 자 그런데 그 결과를 우리를 한번 무서운 마음으로 볼 수 있어야 됩니다.
➤23절 “23 그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천사가 곧 그를 치매 그가 벌레들에게 먹혀 숨을 거두니라.” 기록에 의하면 5일 만에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벌레에 먹혀 죽어요. 그런데 일을 누가 했다고 성경이 밝힙니까? 주의 사자가 이걸 헤롯이 끝까지 못 봐요. 주의 사자가, 자! 그런데 이제 우리는 결론을 향해서 거의 도달했습니다. 두절을 더 보고 결론을 보고 이야기를 좀 하도록 하겠습니다.
➤“24. ¶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자라고 크게 불어나더라. 25. 바나바와 사울은 자기들의 사역을 마치고 마가라는 이름의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더라.”
아무리 생각을 해도 이게 앞에 절하고 안 맞아져요. 뭐 연결고리가 별로 없어요? 헤롯이 벌레가 먹어 죽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호응하여 더 하더라. 바로 “바나바와 사울은 자기들의 사역을 마치고 마가라는 이름의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더라.” 이게 앞에 얘기하면 무슨 연결 고리가 있어요.
여러분 지금 헤롯이 죽었어요.
교회의 최고 지도자가 지금 게 잡혔다가 신기한 하나님의 능력으로 탈출이 되었어요. 그리고 두 번째 지도자는 목 베임을 당했어요. 이게 제가 한 장에 다 나와 있는 사건이에요. 그렇게 얼마나 어마어마한 충격과 사회적 소용돌이 입니까? 그런데 결론이 어디 끝나지요?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 하더라. 세상을 아무리 뒤집어 지고 실패했다. 죽었다 살았다. 난리쳐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주권으로 하나님이 하실 일을 뚜벅뚜벅 가신 그림이에요.
저는 복음과 그 복음의 역사 아닙니까? 이것은 우리에게 뭘 얘기하고 싶은 걸까요? 사람은 실패가 성공이다 감히 말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실패 보이는 것 같아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실패가 없어요. 실패처럼 보일 뿐이에요. 우리의 은사, 우리의 인생, 우리 눈물, 우리에 관한 우리의 아픔, 이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손을 이루어서 그분의 복음 역사를 위해서 역사를 뚫고 뚜벅뚜벅 가는 겁니다. 그 일을 하나님이 주도하고 있다는 거예요.
우리 늘 이렇게 기도 하지요? 이번에 우리 아이 이 대학이 붙게만 해 주시면 저 예수님 안 믿는 것들 앞에서 본때 있게 주님 영광을 돌리면서 간증을 하고 돌아다닐 수 있지 않습니까? 자기를 속이는 기도를 해요. 하나님은 그럴 수도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아요. 여러분 여러분들이 실패하면 하나님이 실패할 것 같습니까? 성경에 어디 그런 원리가 있습니까? 그런 거 없어요.
여러분들의 실패를 여러분들의 눈물을 여러분들의 절망을 뚫어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복음의 역사를 기록하세요. 이것은 주님 오시는 날까지 여러분들이 붙들고 있어야 될 인생의 내가 뒤집어지고 내가 실패한다고 하나님의 일이 중단되고 하나님의 역사가 중간 되지 않아요. 믿습니까? 이 경계선을 넘을 때 실패 성공이 무의미해 지는 겁니다. 적어도 우리 앞에 서는 하나님의 성공만 있을 뿐이에요.
바울의 그러잖아요. “14. [주] 안에 있는 형제들 중의 많은 이들이 내가 결박당한 일로 인해 확신을 갖게 되어 두려움 없이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 15. 참으로 어떤 이들은 심지어 시기와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또한 어떤 이들은 선한 목적으로 하나니 16. 저들은 내가 결박당한 일에 고통을 더할 줄로 생각하여 성실하지 않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선포하나 17.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호하기 위해 세워진 줄 알고 사랑으로 하느니라. 18. 그러면 무엇이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겉치레로 하든지 진실로 하든지 모든 방법으로 그리스도께서 선포되시나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 참으로 기뻐하리라.” 빌립보 감옥의 갖추어서 그 말을 쓰지요. 그것이 자기중심으로 한 인생의 실패와 눈물과 권한과 성공을 넘어 선 발함이요.
우리는 내가 죽으면 다 끝나는 것 같고 다 실패하는 것 같은 느껴져요. 아니에요. 이렇게 역사가 격동을 치고 세상에 난리가 나도 하나님의 말씀은 뚜벅뚜벅 목적을 이루세요. 그분의 역사를 위해서 진행하고 있잖아요. 믿으십니까? 이분이 누구세요? 하나님이세요. 이것은 우리 교회가 우리교회 성도들이 남은 생애동안 어떤 자기가 의도하는 인간이 주도하는 목적을 이끄는 인생, 목적이 이끄는 교회가 아니라, 말씀이 이끄는 교회, 말씀 이끄는 인생, 믿습니까? 이 원리가 매일 생활 속에 확인되고 헤롯의 삶을 내려놓고 더욱 더 말씀에 붙잡힌 우리 삼일교회 모든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축원합니다. 아멘!💗-ⓗ
-영상녹취 / 김은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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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예수님좋다오 원문보기 글쓴이: (一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