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광역시 충청남도 동남부에 위치한 광역시. 동쪽은 충청북도의 보은군·옥천군, 서쪽은 충청남도 공주시·논산시, 남쪽은 충청남도 금산군, 북쪽은 충청남도 연기군·충청북도 청원군과 각각 접하고 있다. 동경 127°21'∼ 127°28', 북위 36°16'∼ 36°22'에 위치하며, 면적 539.73㎢, 인구 136만3546명이다(1999년 현재). 5개 구 177개 동으로 되어 있으며, 시청 소재지는 서구 둔산동이다. 자연환경대전은 갑천(甲川) 유역의 거대한 침식분지에 자리하고 있다. 분지의 동쪽에는 계족산(鷄足山, 423m)·식장산(食藏山, 598m)·약해산(221m)·함각산(314m), 남쪽에는 보문산(寶文山, 537m)·안평산(470m), 서쪽에는 우산봉(雨傘峰, 574m)·관암산(525m)·도덕봉(道德峰, 534m)·금수봉(532m) 등이 솟아 있다.
시계(市界) 밖의 대둔산·계룡산 등에서 흘러내리는 탄동천(炭洞川)·지족천(之足川)·건천(乾川) 등을 합쳐서 이뤄지는 갑천이 분지의 서반부를 관류해 신탄진에서 금강으로 흘러든다. 갑천은 분지의 동반부를 관류하는 대전천과 유등천(柳等川)을 합하는데, 대전의 중심가는 분지 동쪽 주변을 흐르는 대전천 연안에 형성되어 있다.
이 곳의 고도는 해발 약 50m이다. 대전분지는 대략 화강암지대의 침식분지로 형성되었으며, 옥천군층의 변성암이 주변에 일부 분포한다. 대전천·유등천·갑천 사이의 분수계는 낮은 언덕으로 되어 있다. 시의 북서쪽에 있는 족산 너머에는 대청호(大淸湖)가 위치해 있다.
대전은 내륙분지에 위치해 한서의 차가 큰 전형적인 대륙성기후를 보인다. 연평균기온은 12.8℃이며, 1월 평균기온 -3℃, 8월 평균기온 26.9℃로 여름과 겨울의 연교차가 30℃에 이른다. 연강수량은 1,120mm 정도이며, 70%가 여름에 집중적으로 내린다. 역사〔고 대〕 구석기시대와 관련 있는 유적이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당시 구석기인들이 대전과 공주지방의 금강 유역을 내왕하며 살았을 것이므로, 대전지방도 공주 석장리와 마암리의 구석기문화권에 속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신석기시대에도 뚜렷한 유적이 발견되지 않았으나, 부근에 선돌·고인돌이 분포하고 마제석기와 동검파두식(銅劍把頭飾)이 함께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청동기문화를 형성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괴정동의 돌무지 밑 석묘에서 출토된 세형동검·다뉴세문경·동탁(銅鐸) 등의 청동기류와 석기, 토기, 옥으로 만든 장신구 등의 유물로도 증명할 수 있다.
그리고 삼국시대 신라·백제의 격전지로 보이는 성터가 대전 부근에 수없이 흘어져 있는데, 이들은 백제의 수도인 공주와 부여를 방위하는 산성이 있던 곳으로 생각된다. 대전지방은 백제 때는 우술군(雨述郡, 또는 朽淺郡)이라고 했고, 통일신라 때는 비풍군(比豊郡)으로 개칭했다. 〔고 려〕
고려 초기 비풍군을 회덕군(懷德郡)으로 개칭했고, 현종 때는 공주에 속했으며, 1172년(명종 2) 감무를 두었다. 무신난 이후의 농민봉기 중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것은 1176년 대전지방을 중심으로 일어난 ‘망이(亡伊)·망소이(亡所伊)의 난’이었다.
그 뒤 이 지역은 몽고의 침략을 받았으며, 공민왕 때부터는 왜구의 약탈로 큰 피해를 입었다. 고려조에는 신라에 이어 불교가 더욱 융성했는데, 대전지방 부근에는 보문사(普門寺)를 비롯한 많은 사찰이 있었다. 지금의 대사동(大寺洞, 한절골)은 큰 절이 많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조 선〕
1413년(태종 13) 전국을 8도로 하여 군현을 개편할 때 대전지방은 공주군·진잠군의 일부에 속하고 대전(大田 : 한밭)이라고 불렸다. 임진왜란 중 왜군의 후류부대(後留部隊)가 주둔하고 있는 금산을 목표로 하여 의병이 조직되기도 했다.
권시의 손자이고 송시열의 외손인 권이진(權以鎭)은 유형원(柳馨遠)의 실학사상을 계승하였다. 이 밖에 문장가로서는 송인수(宋麟壽)·송기수(宋麒壽) 등이 있으며, 신흠(申欽)은 당시 시문학계의 중심을 이뤘다.
1862년(철종 13) 삼정의 문란으로 인해 일어난 철종 연간의 민란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는데, 충청도지역의 민란 중 가장 규모가 컸던 것은 대전지방을 중심으로 한 회덕·공주·은진(恩津)·연산(連山)의 민란이었다. 〔근 대〕
1894년 동학농민운동은 이 지역에 영향을 미쳐 그 해 6월 회덕·진잠 두 현이 농민군에게 습격당하고, 10월 대전벌에서 청주진 남영(淸州鎭南營) 병사 70여 명이 몰살당했다. 그러나 곧 전세는 바뀌어 회덕의 농민군이 청주진에서 나온 관군과 격전 끝에 패배함으로써 이 곳은 평화를 되찾았다.
한편,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됨에 따라 척사위정운동이 고조되었다. 이 곳에서는 송병선(宋秉璿)·병순(秉珣) 형제와 그 일문(一門)인 병엽(炳燁)이 앞장섰다. 러일전쟁에서 승세를 잡은 일본은 1904년 제1차한일협약을 체결하고 대전지방에 일본군을 주둔시켜 호서지방을 제압하였다.
이 때 송병선은 한일협약에 항거해 약을 먹고 순사하였다. 송병엽은 문하생들과 더불어 의병투쟁에 가담하려고 했으나 일본군대와 영사관 경찰의 감시 때문에 좌절되었다. 따라서, 이 지역에서 독자적인 의병운동은 쉽게 일어날 수 없었고, 다만 뜻있는 몇몇 사람이 다른 지방의 의병조직에 뛰어들 뿐이었다.
한편, 이 곳이 대전으로 불린 것은 1905년 일제가 경부선을 부설해 ‘한밭’마을을 그 통과지점으로 삼았을 때이다. 이와 동시에 일본인 거류민이 증가해 신사(神社)를 설치하고 일본불교를 들여오는 등 일본풍의 시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경술국치 때 송병순이 자결, 순절하고 송씨 일가가 은사금(恩賜金)을 거절한 것은 대전지방의 항일민족정신이 드높았던 것을 나타낸다.
1910년 경술국치 후 회덕군청을 한밭으로 이전하고 한밭을 기점으로 호남선 철도공사가 시작되어 1913년에 완공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회덕·진잠·공주 3개 군을 폐합해 대전군을 신설하고 군청을 대전에 두었다. 1917년 면제 실시 때 대전면이 신설되었으며, 대전이 군사기지화되어 일제의 대륙침략의 거점이 되었다.
이처럼 철도 부설로 서울과 영호남을 연결하는 교통중심지가 됨으로써, 1932년 충청남도도청이 대전으로 이전되었고, 일본인이 정착한 대전읍이 확장되어 각종 산업시설이 들어섰다. 1935년 10월 대전읍은 대전부로 승격했으며 1940년 다시 행정구역이 확장되어 32개 동을 관할하게 됨으로써 24개 부 중 열일곱번째로 큰 도시가 되었다. 〔현 대〕
1948년 대한민국정부 수립 후 부제(府制)에서 시제(市制)로 개편됨에 따라 대전시가 되었다. 6·25사변 때는 철도망·도로망의 중심지인 대전시를 방어하기 위해 한미 양군이 공동작전을 폈으나 북괴군에 함락되었다가 9월 29일에 수복되었다. 이 때 피난민의 전국적인 대이동으로 대전을 경유하던 사람들이 그대로 머물러 살면서 인구가 급증하였다.
그 뒤 도시지역 확장에 따라 1984년 9월부터 유성 일원과 진잠·회덕 일부가 대전시로 편입되어 동구 30개 동, 중구 65개 동의 2구 95개 동을 갖게 되었다. 1988년 1월 1일에는 중구에서 14개 동을 분리하고 서구를 신설해, 3개 구가 되었다.
1989년 1월 1일 지방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서해안 개발시대를 맞아 중부권의 중추기능을 수행하는 성장거점도시로서의 구실을 담당하기 위해 직할시로 승격되었다. 직할시 승격과 함께 기존의 대전시지역에 진잠면을 제외한 대덕군 일원을 편입하고, 유성구(儒城區)·대덕구(大德區) 등 2개 구를 신설해 5개 구가 되었다. 1995년 1월 1일 대전광역시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유물·유적고인돌은 서구 가수원동과 유성구 관리동에 내동리지석묘(대전광역시 기념물 제3호), 교촌동에 칠성당지석묘군(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2호)과 대정동 등에 분포해 있다. 서구 괴정동의 돌무지 아래 석실묘에서는 세형동검·다뉴세문경·동탁 등의 청동기류와 민무늬토기·간석기 등의 유물이 출토되어 청동기 제작기술의 정교함과 세련됨을 보여준다.
이 밖에 탄방동에서는 세형동검과 동모가, 문화동에서는 세형동검 등이 나왔으며, 대덕구 오정동에서는 백제와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토기·철제류가 발굴되었다. 중구 무수동에 국사봉유적(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8호)도 있다.
산성으로는 대덕구 장동의 대덕계족산성(大德鷄足山城, 사적 제355호), 중구 대사동의 보문산성(寶文山城, 대전광역시 기념물 제10호), 소정동의 사정성(沙井城, 대전광역시 기념물 제14호), 동구 가양동의 능성(陵城, 대전광역시 기념물 제11호), 용운동의 갈현성(葛峴城, 대전광역시 기념물 제12호), 판암동의 삼정동산성(三丁洞山城, 대전광역시 기념물 제17호), 직동의 노고산성(老姑山城, 대전광역시 기념물 제19호)·성치산성(城峙山城, 대전광역시 기념물 제29호), 호평동의 태두산성(太頭山城, 대전광역시 기념물 제20호), 신하동의 백골산성(白骨山城, 대전광역시 기념물 제22호), 삼괴동의 계현산성(鷄峴山城, 대전광역시 기념물 제24호), 이사동의 비파산성(琵琶山城, 대전광역시 기념물 제25호), 마산동산성(馬山洞山城, 대전광역시 기념물 제30호), 유성구 덕진동의 적오산성(赤鰲山城, 대전광역시 기념물 제13호), 안산동산성(案山洞山城, 대전광역시 기념물 제16호), 성북동산성(城北洞山城, 대전광역시 기념물 제18호), 신동의 소문산성(蘇文山城, 대전광역시 기념물 제23호), 구성동의 구성리산성(대전광역시 기념물 제6호), 서구의 월평동산성(대전광역시 기념물 제7호), 대덕구 비래동의 질현성(迭峴城, 대전광역시 기념물 제8호), 읍내동의 우술성(雨述城, 대전광역시 기념물 제9호) 등이 있다.
불교문화재로는 동구 대성동의 고산사대웅전(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0호), 유성구 성북동의 진잠성북리 석조보살입상(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제 5호), 중구 정생동의 중암사부도(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1호), 석교동의 보문산마애여래좌상(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9호), 무수동의 보문사지석조(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0호)·보문사지(대전광역시 기념물 제4호)가 있다.
유교문화재는 대덕구 읍내동의 회덕향교(懷德鄕校)·회덕향교대성전(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5호), 유성구 교촌동의 진잠향교(鎭岑鄕校)·진잠향교대성전(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6호)을 비롯해, 서구 탄방동의 도산서원(道山書院,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호), 중구 안영동의 창계숭절사(滄溪崇節祠,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호), 동구 용운동의 문충사(文忠祠,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4호), 이사동의 월송재(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1호)·은진송씨승지공파재실(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5호)이 있다.
고가옥은 서구 송촌동의 송용억가옥(宋容億家屋, 대전광역시 민속자료 제2호), 괴곡동의 파평윤씨서윤공파고택(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4호), 대덕구 송촌동의 회덕동춘당(懷德同春堂, 보물 제209호)·회덕동춘선생고택(懷德同春先生古宅,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호), 동구 소제동의 송자고택(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9호), 대덕구 중리동의 회덕쌍청당(懷德雙淸堂,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호) 등이 있다.
송시열이 건립한 가양동의 남간정사(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호)는 송시열의 제자들이 ≪송자대전 宋子大全≫을 발간한 곳이다. 또한 동구 석교동의 봉소루(鳳巢樓,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5호), 대덕구 미호동의 취백정(翠白亭,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9호), 비래동의 옥류각(玉溜閣,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7호)은 송준길이 창건해 학문을 연마하던 곳이다.
이 밖에 유성구 원내동의 기성관(杞城館,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9호), 대덕구 중리동의 송애당(松崖堂,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8호), 읍내동의 제월당 및 옥오재(霽月堂-玉吾齋,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9호), 서구 변동의 수정재(水晶齋,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0호), 동구 가양동의 삼매당(三梅堂,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호)도 유명하다.
대덕구 법동의 은진송씨정려각(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4호), 송촌동의 이시직공정려각(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6호), 중리동의 고흥유씨정려각 및 비(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5호), 동구 가양동에는 송시열의 문집인 송자대전판각(宋子大全版刻,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호) 등이 있다.
대덕구 중리동의 초려이유태유고(草廬李惟泰遺稿,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1호)·농암진적(農巖眞蹟,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6호)을 비롯해 권준(權樽)의 호구단자(戶口單子,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2호)와 사전인 운부군옥(韻府群玉,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3호), 윤돈(尹暾) 등이 재산을 분배받은 것을 기록한 윤돈 등의 동복화회입의(尹暾等-同復和會立議,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4호), 서구 탄방동에 만회집탄옹문집판목(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7호), 흑성동에 상제집략판목(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1호)·용천련고판목(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2호), 중구 무수동에 유회당판각(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0호), 동구 이사동에 금암집판목(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3호), 서구 변동의 동국사략(東國史略,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8호)·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9호)·청구풍아(靑丘風雅,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0호)·양성당제영(養性堂題詠,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1호)·문정공왕고간독(文正公王考簡牘,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2호)·화산세가필적(花山世家筆蹟,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3호)·박인년교지(朴引年敎旨,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4호) 등이 있다.
능묘 및 비로는 동구 가양동에 박팽년선생유허(朴彭年先生遺墟, 대전광역시 기념물 제1호)·박팽년선생유허비(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8호), 유성구 가정동에 김익희(金益熙) 묘(대전광역시 기념물 제5호), 전민동의 김반 묘(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7호), 서구 원종동의 송준길 묘(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5호), 과곡동의 김여온 묘(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6호), 평촌동의 유혁원 묘(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8호)가 있다.
이 밖에 웃다리농악(대전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호)·대전의 앉은굿(대전광역시 무형문화재 제2호)·상모제작(대전광역무형문화재 제3호), 대덕구 법동의 대덕법동리석장승(대전광역시 민속자료 제3호)이 있다. 교육·문화정절서원은 1684년(숙종 10) 계양동에 세워졌으며, 도산서원은 1711년 탄방동에 세워져 지방유생들의 교육에 힘썼으나, 고종 때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철폐되었다. 이 밖에 개인이 설립한 서당과 강학당을 통해서도 많은 교육이 행해졌다.
1585년(선조 18) 남분붕(南奮鵬)의 봉소재(鳳巢齋)가 석교동에 건립되었으며, 인조 때 회덕2동에 김경여(金慶餘)가 송애당을, 숙종 때는 송시열이 남간정사를, 그리고 조선 말기 송병선이 성남동에 석남재(石南齋)를 설립해 학문 연마와 후학 교육에 큰 공헌을 했다.
근대 교육기관으로는 1911년 회덕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었으며, 1913년 대전공립보통학교가 세워진 뒤 각 면에 보통학교들이 설립되었다. 중등교육기관으로는 1920년에 와서 대전공립상업보습학교가 세워졌으며, 그 뒤 각급 교육기관이 점차 증설되었다.
교육기관으로는 1999년 현재 초등학교 106개교, 중학교 68개교, 고등학교 51개교, 특수학교 4개교, 전문대학은 대덕대학·대전보건대학·우송공업대학·우송정보대학·혜천대학 등 5개교, 대전산업대학교·대전대학교·목원대학교·배재대학교·우송대학교·을지의과대학·충남대학교·침례신학대학교·한남대학교가 있다.
이 밖에 시립도서관이 있어 시의 교육·문화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다. 또한, 1954년에 설립한 대전문화원은 각종 문화예술행사를 주관해 향토문화의 계승과 개발에 공헌하고 있으며, 매년 가을에 시민들의 민속·문화·체육행사인 한밭제가 열리고 있다. 종교기관은 1997년 현재 불교사찰 192개, 천주교성당 32개, 개신교교회 1,246개, 유교교당 2개, 천도교교당 1개, 원불교교당 6개, 기타 33개가 있다. 민속〔민속놀이〕 이 고장의 민속놀이로는 유희와 오락을 주로 들 수 있다. 어린이들의 유희인 닭잡기놀이와 이거리저거리놀이를 들 수 있다. 닭잡기놀이는 10세 내외 아이들의 집단놀이이다. 먼저 살쾡이(술래)와 닭을 정하고 나머지 아이들은 서로 손을 잡고 원형을 이룬다.
그 원 속에 닭을 넣고 원 밖에서는 살쾡이가 닭을 노리며 “닭아 닭아 달걀 몇 개나 있니?” 하고 물으면 “열 개 있다.”고 대답한다. 그러면 살쾡이가 닭에게 “달걀 하나만 주면 안 잡아먹지.”라고 제의하는데, 이 때 “못 주겠다.”라고 대답하면 살쾡이가 “야아!” 하고 소리치며 닭을 잡으려고 원 안으로 달려든다. 이 때 원형을 이룬 아이들은 빙빙 돌며 살쾡이가 원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놀이이다.
이거리저거리놀이는 남녀 아이들의 방안놀이로서 몇 사람이 양쪽으로 마주앉아 두 다리를 섞어 뻗고 한 사람이 다리를 짚으면서 “이거리 저거리 밥거리 인사만사 두만사 주머니끝……”의 노래를 하는데, 그 노래가 끝날 때 짚은 다리를 빼내게 된다. 이렇게 몇 번을 되풀이해 먼저 두 다리를 빼내는 사람이 이기는 놀이이다. 〔동 제〕
이 고장에서 지내는 동제는 산신제로 시행되며, 동제를 지내는 모든 마을은 거리제를 지낸다. 제일은 대부분 정월 열나흗날이며, 거리제는 노신(路神)을, 산신제는 보문산 산신을 대상으로 지낸다. 제장은 산사당·석장승·누석단(累石壇) 등이며, 제주는 부정이 없는 사람 중에서 선정하고 제주의 금기는 그리 엄격하지 않은 편이다.
삼정동의 거리제는 100여 년 전 농사에 방해가 되는 큰 느티나무를 베어내자 마을에 청소년 10여 명이 급사하는 변이 일어난 뒤 나무신에게 제를 지냈던 데서 유래한다. 삼정동은 큰삼정·골삼정의 두 마을에 누석단이 축조되어 있고 큰삼정의 할아버지신과 골삼정의 할머니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제관은 생기복덕한 자로 10일 전에 선출해 문전에 황토를 깔고 금줄을 치고 어육식을 금하고 새로 떠낸 정화수를 이용한다. 제는 정월 열나흗날 밤 11시 전후해 거행된다. 제일 전야에 주민들이 마을 입구의 거목 아래 모여 굵기 2㎝, 길이 200여m의 새끼를 꼬아 5m 간격으로 길지(吉紙)를 매달아 제주의 집에 보관한다.
다음 날 청년들이 거목에서 야산까지 전날 꼬아놓은 금줄을 매달고 누석단의 동서남북 중앙에 오방장군기를 세우고 누석단에도 여러 줄의 금줄을 걸어놓는다. 제전에는 부정이 없는 사람이면 누구나 참례할 수 있다. 그리고 제단 곁에는 ‘달불’이라 부르는 모닥불을 제의가 끝날 때까지 피운다.
제차는 강신분향·사배·참신·진찬(進饌)·독축·헌작·사신(辭神)·분축·소지·철찬·음복 등 유식 제례로 진행된다. 이 때 소지는 만동소지(萬洞燒紙)·제주소지가 올려지고 나면 마을의 최고령자로부터 시작해 연령순으로 10세 소년까지 각자의 소지를 올려준다. 제의가 끝나면 주민들은 제전이나 제관의 집에 모여 제관의 노고를 위무한다. 설화·민요〔설 화〕 이 고장은 산·방죽·바위 등 자연물에 관한 설화가 주류를 이루며, 역사적 인물에 관한 설화도 많다. 지금부터 50년 전만 해도 장자정(長者井)이라 하여 소제동에 큰 방죽이 남아 있었는데, 여기에는 장자못 유형의 설화가 남아 있다.
옛날 장씨라는 부자가 이 곳에 살고 있었는데 심술궂고 인색해 보문산에서 시주를 구하러 온 도승에게 쌀 대신 쇠똥을 퍼주었다. 이를 본 장씨의 부인이 쫓아나가 아무 말 없이 돌아가는 도승에게 잘못을 빌었다.
그러자 도승은 부인에게 뒤를 돌아보지 말고 따라오라고 하며 보문산으로 향했다. 나지막한 고개에 이르렀을 때 뒤따르던 부인이 깜박 뒤를 돌아보고 말았다. 이 순간 벼락과 천둥이 치며 장씨의 집은 물바다가 되었고 부인은 그 자리에서 돌이 되고 말았다.
유등천 근처에는 아들바위가 있다. 옛날 이 곳에 아기를 못 낳는 며느리가 살고 있었는데, 5대 독자인 아들을 둔 시부모는 대가 끊어지는 것을 염려해 며느리를 쫓아내려 했다. 이에 남편이 사정해 3년의 말미를 얻고 기다렸으나 끝내 아들을 낳지 못했다. 남편은 아기를 낳으면 끓여주려고 준비한 미역 한 다발을 쫓겨나는 부인에게 주어 보냈다.
며느리는 쏟아지는 눈 속을 걸어 비구니가 되려고 절로 향했는데, 날이 어두워져 바위 밑에 미역 다발을 숨겨놓고 걷다가 쓰러지고 말았다. 쓰러진 며느리의 몸 위로 눈이 수북이 쌓였으며, 겨울이 가고 봄이 와 눈이 녹으니 사람 형상의 바위가 나타났다. 그 뒤 이 바위를 아들바위, 미역을 숨겨둔 바위를 미역바위라 부르게 되었다.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인들이 지금도 아들바위에 와서 정성을 들인다고 한다.
은행동의 목척교에는 명명(命名) 유래담이 있다. 다리가 놓이기 전에는 돌로 놓은 징검다리가 있었는데, 아침 저녁으로 그 곳을 지나는 새우젓장수가 있었다. 그는 꼭 징검다리 한가운데에 지게를 받쳐놓고 쉬고는 했는데, 받쳐놓은 지게가 꼭 목척(木尺) 같아 그 뒤 다리가 완공되어 다리 이름을 목척교라고 했다 한다. 이 밖에 대전의 동쪽을 에워싼 식장산에 관한 다양한 설화와 송시열과 보문산 설화는 대덕에서와 같이 이 곳에서도 널리 퍼져 있는 설화이다. 〔민 요〕
이 고장에 구전되고 있는 민요는 비기능요가 주류를 이룬다. 노동요는 도시의 발달로 노동현장과 유리되어 기능을 잃고 잘 불리지 않지만, 근교에 모내기노래·논매기노래 등이 일부 남아 있다.
“해다갔네 해다갔네/골골마다 저녁연기가 나는구나/오늘해는 여기서 놀고/내일해는 어느곳에서 놀까나.”라는 〈모내기노래〉는 모내기가 끝나가는 저녁 무렵에 부르는 저녁노래로, 모두 소리를 모아 느리고 애수적인 가락으로 부른다.
“장구배미 다매고/북통배미로 넘어가나/어럴럴럴 상사디야//북통배미도 다매고/반달만큼 남았구나/어럴럴럴 상사디야//저건너 갈미봉에/비바람 들어온다/어럴럴럴 상사디야//우장을 둘러치고/삿갓을 써라/어럴럴럴 상사디어.”는 ‘상사디어’계 여음을 사용하고 있는 〈논매기노래〉이다.
사설은 〈모심기노래〉와도 비슷한 것이 있고 전라도 민요인 〈육자배기〉 사설을 사용하기도 한다. 가창방식은 선창자가 메기면 여음을 모두 부르는 선후창방식이고 곡조는 느리며 매우 애수적이다.
여성들이 일하면서 부르는 〈시집살이노래〉가 있고 어희요계인 〈나물노래〉도 있다. 또, “오라버니 오라버니/오라버니 있어서/누룩으로 담을치고/명지전대 울띠맸나/내집에는 없어서/나무전대 울띠맸나/포록포록 뜯은나물/옴솥에 삶어서/입벌리고 더넣드니/첫숟갈에 온(溫)기돋고 두숟갈에 숨이도네/아홉아들 아들인가/외딸이 딸이지……”라는 〈오라버니노래〉가 여성들이 부르는 서사민요로 전하고 있다. 이 노래는 생명수나 저승꽃으로 사람을 살린다는 무가 계통의 노래와 비슷한데 뜯어온 나물로 오빠를 살리는 내용이다.
동요로는 “까치는 깍깍/동애줄은 독독//너어디 가나/금산에 간다//뭣하러 가나/새끼치러 간다//몇마리 쳤나/열두마리 쳤다.”와 같이 유희를 하면서 서로 주고받는 〈까치요〉가 있으며, 〈파랑새요〉와 〈불무요〉 등도 있다. 이 밖에도 타령류인〈사랑가〉·〈범벅타령〉·〈흥타령〉 등이 불린다. 산업·교통이 시는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2·3차 산업도시로서 이는 산업별 사업체수 구성에서 잘 나타난다. 전체 산업체 2,731개는 농업 15개, 광업 6개, 제조업 892개, 건설업 264개, 도소매업 541개, 숙박·음식점업 54개, 운수·창고·통신업 197개, 금융·보험업 252개, 부동산임대업 358개, 교육서비스업 91개, 보건사회복지업 61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를 산업별로 구분해 보면, 1차산업 15개 0.54%, 2차산업 1,162개 42.54% 및 3차산업 1,554개 56.90%로 나타난다. 제조업은 대전 제1·2·3·4공업단지, 대전과학산업단지 등 5개의 공업단지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대전 제1·2·3·4공업단지는 대덕구의 갑천변에 입지한다. 대전과학산업단지는 유성구 관평동에 입지하며, 150개의 기업이 입주해 있다.
대전 제1·2공업단지는 대덕구 대화동과 읍내동 일대에 입지하며, 금속·석유화학·섬유·식품·제지 업종 등의 103개 업체가 입주해 있다. 대전제3공업단지는 대덕구 문평동·신대동 일대에 입지하며, 기계금속·섬유·화학·제지 업종 등의 41개 업체가 입주해 있다. 대전제4공업단지는 대덕구 신일·목상·문평동 일대에 입지하며, 기계·전자·자동차 업종을 중심으로 90개 업체가 입주해 있다.
제조업은 이 외에도 경부선 신탄진역과 경부고속국도 신탄진인터체인지 일대에서 1960년대 이래로 공업지역을 형성하고 있다. 1965년에 설립된 동양 굴지의 연초제조창인 한국담배인삼공사 등 자동차타이어·방직·제지·식품 등의 공업이 발달했다.
대전에는 모두 154개의 유통시설이 있는데, 사설시장 60개, 슈퍼마켓 87개, 백화점 7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유통시설은 기존의 중심지인 중동·원동·인동·은행동을 중심으로 입지해 있다.
유통시설 가운데 동양백화점·대전백화점·무궁화백화점·유락백화점, 중앙데파트, 홍명상가, 중앙로지하상가, 대전농수산물도매시장 등이 핵심을 이룬다. 최근에는 새로 개발되고 있는 둔산신시가지에 동양타임월드, 한신코아백화점을 비롯한 대형 유통시설이 입지하면서 새로운 상업지를 형성하고 있다.
한편, 대전은 상업지역이 너무 적어 국토의 중핵도시로 성장하는 데 저해요인이 되고 있다. 대전의 상업지역 면적은 총 5.83㎢로 전체면적의 1.08%에 불과하다. 이는 서울의 3.5%, 부산의 3.17%, 대구의 3.4%, 인천의 3.46%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크게 뒤지는 면적이다.
대전은 시의 동북부를 관통하는 경부고속국도와 서부를 관통하는 호남고속국도가 회덕에서 분기하고, 경부선 철도와 호남선 철도가 홍도동 일대에서 분기해 수도권·영남권·호남권간의 교통의 결절지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교통중심성은 대전 발전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경부고속국도 구간에는 신탄진·대전인터체인지, 호남고속국도 구간에는 북대전(엑스포)·유성·서대전인터체인지가 설치되어 시내 교통망에 연결되고 있다. 경부선 철도 구간에는 신탄진·회덕·대전·세천역, 호남선 철도 구간에는 서대전·가수원·원정역이 설치되어 있다.
대전은 충청남도의 공주·연기·금산·논산, 충청북도의 옥천·보은·청원 등지로 통하는 국도와 지방도도 개설되어 있어 고속국도 및 철도와 연계되고 있다. 최근에는 유성구지역과 동구지역을 동서로 관통하는 한밭대로가 완공되어 시가지 교통혼잡을 크게 줄여주고 있다. 또한 동쪽의 경부고속국도변의 세천동과 서쪽의 호남고속국도변의 관유동을 연결하는 남부순환도로가 건설되고 있다.
유성구와 서구·대덕구 사이를 흐르는 갑천에는 원촌교(院村橋)·둔산대교·대덕대교·유성대교·만년교(萬年橋)·가수원교(佳水院橋) 등이 개설되어 시내교통을 원할히 해주고 있다. 최근에는 시내교통난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동구 판암동과 대전역·도청·서대전사거리·신시청·정부·제3청사·유성사거리·동학사 등지를 거쳐 유성구 외삼동에 이르는 지하철 건설이 시작되었다.
고속버스터미널은 대전인터체인지 부근의 용전동과 유성에 입지해 있다. 용전동터미널에는 서울·인천·천안·부산·대구·전주·광주 등지로 연결되는 노선이 개설되어 있고, 유성터미널에는 서울 노선만이 개설되어 있다.
일반버스터미널은 동부·서부·유성 등 3곳에 입지해 있다. 동부터미널에는 천안·아산·금산·청주·충주·보은·무주 노선, 서부터미널에는 공주·논산·부여·예산·홍성·서산·대천 노선 등이 개설되어 있다.
한편, 경부선·호남선 철도는 시가지를 관통하고 있어 도시개발, 환경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장애가 되기도 한다. 경부·호남고속국도 역시 개발제한구역과 더불어 시가지의 외연적 확장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관광대덕구 미호동 일대의 대청다목적댐, 유성구 봉명동 일대의 유성온천, 중구 대사동 일대의 보문산공원, 유성구 도룡동의 엑스포과학공원, 유성구 갑동의 대전국립묘지·유성컨트리클럽 등이 대표적인 관광거리이다. 특히 유성온천은 수온 42∼55℃의 알칼리성 라듐 온천으로 유명하다. 유성구에 있는 엑스포과학공원·대덕연구단지·한국과학기술원·국립중앙과학관 등은 새로운 과학테마 관광거리로 떠오르고 있다.
많은 유물·유적도 관광거리로 유명하다. 대덕구 송촌동의 동춘당, 중리동의 쌍청당, 동구 가양동의 남간정사, 유성구 교촌동의 진잠향교, 동구 대성동의 고산사대웅전, 대덕구 장동의 계족산성 등이 대표적이다.
한편, 대전관광은 충청남도 천안시의 독립기념관·공주시의 계룡산국립공원·금산군의 대둔산도립공원, 충청북도 보은군의 속리산국립공원, 충주시의 수안보온천 등지와 연계되어 이뤄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구〔대덕구 大德區〕 시의 동북부에 위치한 구. 면적 68.46㎢, 인구 22만4211명(1999년 현재). 구청 소재지는 오정동이다. 1989년 대덕군의 진잠면 남선리를 제외한 전역을 편입해 신탄진·석봉·덕암·목상·오정·대화·회덕1·회덕2동의 8개 행정동을 관할하는 대덕구가 설치되었다. 1990년 회덕2동을 회덕2동과 중리동으로 분동해 9개 행정동이 되었고, 1991년 중리동을 중리동과 법동으로 분동해 10개 행정동과 25개 법정동을 관할하게 되었다. 1995년 대전광역시 대덕구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구의 서쪽 경계부를 갑천이 흐르고 있다. 북동부 및 동부는 대부분이 100∼400m의 산지를 이루며, 계족산(鷄足山, 423m) 일대가 가장 높다. 구의 북서부, 중서부 및 남부는 대체로 저평한 지형을 이루고 있다. 구의 북동부 끝부분은 대청호와 접해 있다.
구내에는 총 437개의 공장에 2만4451명이 고용되어 있다. 업종별로는 기계공업이 205개 공장에 7,074명, 화학공업이 70개 공장에 6,867명, 섬유공업이 46개 공장에 4,405명 등으로 구성되어 기계공업이 중심을 이룬다.
지역별로는 대화동이 163개 공장 1만1047명, 회덕1동이 45개 공장 1,638명, 신탄진동이 18개 공장 1,178명, 덕암동이 86개 공장 2,799명, 목상동이 30개 공장 4,990명, 석봉동이 6개 공장 1,656명으로 구성되어 대화동이 중심공업지역을 형성하고 있다.
시장은 모두 17개가 있다. 종류별로는 공설상설시장 1개, 일반사설시장 1개, 사설시장상가 7개, 슈퍼마켓 8개 등이다. 지역별로는 법동 6개, 오정동 4개, 중리동 3개, 회덕1·회덕2·석봉·덕암동 각 1개로 구성되어 있다. 금융기관은 15개가 있다. 지역별로는 중리동 4개, 오정·신탄진동 3개, 법동 2개, 대화·석봉·덕암동 각 1개로 구성되어 있다.
농가 1,165호에서 4,893명이 농업에 종사하며, 전업자가 1,600명, 1종겸업이 857명, 2종겸업이 2,436명이다. 경지면적은 총 934.5㏊이며, 논이 550.3㏊로 58.8%, 밭이 384.2㏊로 41.2%를 차지하고 있다. 가구당 면적은 0.8㏊이다. 경지가 가장 넓은 곳은 228.8㏊의 회덕1동이고, 그 다음은 목상동 223.3㏊, 신탄진동 211.6㏊, 덕암동 93.7㏊ 등의 순서를 나타낸다.
가축은 한우·젖소·돼지·개·닭·오리 등이 사육된다. 한우는 회덕1·신탄진동, 젖소는 덕암·회덕1동, 돼지는 회덕1·회덕2·덕암동, 개는 회덕1동, 닭은 회덕1·목상동, 오리는 회덕2동에서 주로 사육된다. 임산물은 밤·호두·잣·대추·은행 등의 야생종실·버섯·산나물·연료·약용작물 등이 주종을 이룬다.
시가지는 도심 시가지와 연결된 오정동 일대와 법·중리동 일대, 신탄진역과 신탄진인터체인지를 중심으로 한 석봉동 일대, 대전 1·2공업단지를 중심으로 한 대화동 일대, 비래동 일대에 발달했다. 오정동 일대와 법·중리동 일대가 규모가 크다. 도시계획면적 66.99㎢ 가운데, 자연녹지가 50.015㎢로 74.6%를 차지하고, 나머지는 주거용지 8.776㎢, 공업용지 7.713㎢, 상업용지 0.418㎢로 구성되어 있다.
주거상황을 보면, 총 3만8565가구 가운데 법동에 23.5%에 해당하는 9,084가구가 입지해 있고 회덕동에 12.9%에 해당하는 4,994가구가 입지해, 이들 두 지역이 주요 주거지를 형성하고 있다. 주거형태는 아파트가 2만10가구로 51.8%, 단독주택이 1만2426가구로 32.2%를 차지해 두 형태가 주종을 이룬다.
경부선 철도가 서부의 갑천 연변을 따라 남북 방향으로 내려오다 당산(堂山) 북쪽에서 꺾어져 대화동 시가지와 법·중리동 시가지 사이를 남북 방향으로 지난다. 경부고속국도는 시의 북서부로 진입해 산지와 평지 사이의 경계부를 따라가다 남동부로 빠져 나간다. 경부선 철도에는 신탄진역과 회덕역이 설치되어 있고, 경부고속국도에는 회덕·신탄·대전인터체인지가 각각 설치되어 있어 대전 내에서도 대외적 교통접근도가 가장 높다. 특히 회덕인터체인지는 경부고속국도와 호남고속국도가 연계되는 우리 나라의 주요한 교통결절점의 하나이다. 경부선의 대전공업단지 부근에는 ‘93대전엑스포(EXPO) 개최기간 동안 엑스포 임시역도 개설되었다.
시내 도로교통은 북부의 신탄진 석봉동에서 시작되어 봉선암 일대에서 분기해 남부의 법·중리동 시가지와 오정동 시가지로 향하는 ○자형의 도로가 간선축을 형성하고 있다. 최근에는 중리동에서 오정동을 지나 유등천의 한밭대교를 지나 서구의 둔산 시가지로 향하는 한밭대로가 동서 방향으로 개설되어 종횡의 간선교통망이 형성되었다. 구청이 구의 남쪽 끝에 위치해, 주민들의 구청 접근에 형평성을 잃은 상태이다.
관광지로는 대청호, 계족산, 갑천연변, 경부고속국도 대전터널 옆의 더퍼리공원, 대전인터체인지의 대전탑 등이 있다. 문화유적은 회덕동춘당·계족산성 등이 있고, 쌍청당·동춘선생고택·옥류각·송애당·제월당 및 옥오제 등의 유형문화재, 석장생·송용억가옥 등의 민속자료, 질현성·우술성 등의 기념물, 회덕향교 대성전·취백정 등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1999년 현재 초등학교 16개교, 중학교 10개교, 고등학교 5개교와 한남대학교가 있다. 오정(梧井)·대화(大禾)·읍내(邑內)·연축(連丑)·신대(新垈)·와(瓦)·장(長)·송촌(宋村)·비래(比來)·중리(中里)·법(法)·신탄진(新灘津)·용호(龍湖)·이현(梨峴)·갈전(葛田)·부수(芙水)·황호(黃湖)·삼정(三政)·미호(渼湖)·석봉(石峰)·덕암(德巖)·상서(上書)·평촌(坪村)·목상(木上)·문평(文坪)·신일(新一) 등 26개 동이 있다. 〔동구 東區〕
시의 동부에 있는 구. 면적 136.81㎢, 인구 25만5215명(1999년 현재). 구청 소재지는 원동이다. 백제시대에 우술군, 신라시대에 비풍군이었으며, 전원을 이뤄 농경에 주력하였다. 고려시대에 회덕현 공주부, 조선시대에 회덕현으로 많은 선비를 배출하는 향학의 명문지였다.
1971년 대전시 출장소를 실시로 동부·북부출장소를 통합해 동구청을 설치하고 20개 동을 관할하였다. 1983년 대덕군 회덕면 전역을 편입하고 2개 동을 신설해 행정구역 24개 동을 관할하였다. 1989년 대전직할시 동구가 설치되었으며, 오정·대화·회덕1·회덕2 등 4개 동이 분리되었고, 동면 및 산내면 일부 등 2개 면이 편입되었다. 1995년 대전광역시 동구로 개칭되었다.
북부는 대덕구의 남부 시가지와 연결되어 있고, 서부는 대전천에 연해 있으며, 남부와 동부는 300m 내외의 산지를 형성하고 있다. 동북부에는 대청호가 있다. 경부선 철도가 서부·남부·동부를 U자형으로 지나고, 대전역이 중심업무지역의 핵심주변부에 자리잡고 있다.
서부에는 인효로와 삼성로가 대덕구 오정동에서 한밭대로와 연결되어 교통이 편리하다. 용전동에는 동부시외버스공용터미널과 고속버스터미널이 인접해 개설되어 있다. 시가지 부분과 남단부 일부를 제외하면 나머지 전지역에 개발제한구역이 설정되어 있다.
산업구조는 종사자수를 기준으로, 총 12만7628명 가운데 농·축산업이 2,953명(2.3%), 제조업이 5만1810명(40.6%), 상업 및 서비스업이 7만2865명(57.1%)로 구성되어, 서비스업과 제조업이 주종을 이룬다.
제조업의 구성은 총 234개 중 섬유·의복 및 가죽산업 70개, 조립식 금속제품·기계 및 장비제조업 39개, 종이 및 종이제품제조업·인쇄 및 출판업 25개, 음식료품 및 담배제조업 22개, 화학·섬유·석탄·고무 및 플라스틱제품 제조업 18개, 나무 및 나무제품제조업 15개, 제1차금속산업 13개, 비금속광물제품 제조업 6개, 기타제조업 26개 등이다. 따라서 섬유·의복 및 가죽산업이 제조업의 주종을 이루고 있다.
시가지의 서쪽 지역은 시의 중심업무지구의 핵심주변부에 속해 많은 수의 의료기관·식품위생업소·환경접객업소가 입지해 있다. 식품위생업소는 총 2,669개에 이른다. 환경접객업소는 호텔 7개, 여관 183개, 여인숙 156개, 목욕탕 71개, 이용실 224개, 미용실 545개, 전자유기장 168개 등 총 1,354개가 있다. 의료기관 가운데는 약국, 식품위생업소 가운데는 대중음식점, 환경접객업소 가운데는 미용실이 수위를 차지하고 있다.
문화유적은 가양동에 가양공원과 남간정사, 대성동에 고산사(高山寺) 대웅전 등이 있다. 교육기관은 1999년 현재 초등학교 20개교, 중학교 12개교, 고등학교 8개교와 대전보건대학·우송공업대학·우송정보대학과 대전대학교·대전산업대학교·우송대학교가 있다.
원(元)·인(仁)·효(孝)·천(泉)·가오(加午)·신흥(新興)·판암(板巖)·삼정(三丁)·용운(龍雲)·대(大)·자양(紫陽)·신안(新安)·소제(蘇堤)·가양(佳陽)·용전(龍田)·성남(城南)·홍도(弘道)·삼성(三省)·정(貞)·중(中)·추(秋)·비룡(飛龍)·주산(注山)·용계(龍溪)·마산(馬山)·효평(孝平)·직(稷)·세천(細川)·신상(新上)·신하(新下)·신촌(新村)·사성(沙城)·내탑(內塔)·오(梧)·주촌(舟村)·낭월(郎月)·대별(大別)·이사(二沙)·대성(大成)·장척(長尺)·소호(所好)·구도(九到)·삼괴(三槐)·상소(上所)·하소(下所) 등 45개 동이 있다. 〔서구 西區〕
시의 중서 및 남부에 위치한 구. 면적 95.34㎢, 인구 47만1871명(1999년 현재). 구청 소재지는 갈마동이다. 1953년 대덕군에 속해 있다가, 1963년 유천면 8개 이가 대전시에 편입되고, 1977년 대전시 중구에 속했다. 1988년 대전시 서구로 개편되고, 1989년 대전직할시 서구로 승격되면서 대덕군 기성면을 편입했다. 1995년 대전광역시 서구로 개칭되었다.
북쪽과 서쪽에 갑천이 흐르고 동쪽에 유등천이 흘러, 전역이 하천으로 둘러싸여 있는 마치 하중도(河中島)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갑천에 근접한 중서부 일대에는 100∼200m의 저산성 산지가 남북 방향으로 발달해 있다. 이 산지에는 마봉재·승적고개 등이 높은 부분을 이루고 있다. 북부와 동부의 대부분의 지역은 범람원 지형을 이루며, 그 위에 기존 시가지와 둔산신시가지가 조성되어 있다.
기존 시가지와 둔산신시가지는 대체로 격자형(格字型)을 이루고 있으나, 기존 시가지는 구역의 규모가 작고 둔산신시가지는 구역의 규모가 상대적으로 크다. 기존 시가지는 중구에 형성되어 있는 중심업무지구의 주변지역에 해당되며, 둔산신시가지는 뉴타운에 해당된다.
둔산신시가지는 과거에는 군사시설지역이었다. 이 곳에는 최근 한밭대로를 비롯한 여러 간선도로들이 건설되었다. 갑천에는 유성구와 연결되는 둔산대교·대덕대교·유성대교 등이 건설되어 있다. 둔산신시가지는 갑천 대안의 엑스포구역과 둔산대교·대덕대교 등으로 연결된다.
둔산신시가지와 가수원 일대에는 최근 대단위 아파트단지들이 입지해 새로운 거주지역을 형성하고 있다. 특히, 둔산신시가지에는 정부제3종합청사를 비롯해 시청·시교육청·상공회의소·백화점 등이 입지해 급격히 발전하고 있다.
중남부지역은 대부분이 개발제한구역이다. 이 지역은 시의 농업생산 및 시민의 식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지역의 하나이다. 1,418㏊의 경지면적(시전체의 16.9%)을 차지하며, 논과 밭의 비율은 6:4 정도이다.
주민의 2.2%가 농가인구이며, 가구수로는 2.1%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가구당 경지면적은 0.9㏊이며, 경영방식은 자영과 임대의 비율이 4 : 6 정도이다. 이 지역에는 148개 제조업체가 있다. 업종별로는 섬유 57개, 기계 41개, 화학 13개, 기타 37개 업체로 구성되어 있다.
상업 가운데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식품접객업소는 총 2,197개이며, 이 중에서도 대중음식점이 1,446개로 주종을 이룬다. 식품접객업소 다음으로 많은 수를 차지하는 공중위생업소는 총 971개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미용실이 가장 많다.
문화유적은 용문동에 도산서원(道山書院)과 세등선원(世燈禪院)이 있다. 둔산신시가지의 갑천 연변은 자연경관이 수려하다. 교육기관으로는 1999년 현재 초등학교 30개교, 중학교 23개교, 고등학교 11개교, 혜천대학과 배재대학교가 있다. 〔유성구 儒城區〕
시의 북서부에 위치한 구. 면적 177.14㎢, 인구 15만3501명(1999년 현재). 구청 소재지는 어은동이다. 백제시대에는 우술군, 신라시대에는 여사지현(如斯只縣), 고려시대에는 회덕현에, 조선시대에는 회덕군에 속해 있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유성·구즉·탄동면이 대전군에 통합되었다. 1935년 대덕군에 편입되었다.
1973년 유성읍으로 승격되었다. 1983년 다시 대전시로 편입되면서 중구 유성출장소가 설치되었고, 1984년 대전시 직할출장소로 승격되었으며, 1989년 대전직할시 유성구로 승격되었다. 1995년 대전광역시 유성구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남부 일부를 제외하면 갑천을 경계로 대덕구 및 서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갑천 연변에는 범람원성 평지가 넓게 발달해 있다. 서부 경계 일대는 100∼200m의 저산성 산지를 이룬다. 대덕연구단지 후면에도 저산성 산지가 있다. 서부의 저산성 산지 가운데 중서부에 박산(朴山, 199m)·성재 등이 있고, 북부 저산성 산지에는 우성이산(179m) 등이 있다. 시가지는 주로 갑천 연변과 산록완사면에 형성되어 있다. 온천1·2·3동 일대는 갑천 연변의 범람원 평야에 형성된 시가지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다.
서부 산지와 동부 평지의 경계부에는 호남고속국도가 남북 방향으로 지나며, 유성인터체인지가 설치되어 호남지방으로 가는 관문 역할을 하고 있다. 유성 시가지에는 유성시외버스터미널과 고속버스터미널이 개설되어 있어 교통이 아주 편리하다. 갑천 연변의 시가지와 4곳의 도상(島狀)지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은 개발제한구역으로 설정되어 지역 발전에 장애가 되고 있다.
이 구는 시의 농업생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경지면적은 4,261㏊로 논이 2,592㏊, 밭이 1,669㏊로 구성된다. 농가호수 3,565호, 농가인구 1만134명이다. 공장은 29개 업체에 6,511명이 고용되어 있다.
현재 구즉동 일원에 건설되고 있는 137만 평 규모의 첨단과학산업단지는 산·학·연 협동에 의한 첨단공업발전의 중심지가 될 것이다. 신성·전민·온천2동 일대에 입지한 대덕연구단지에는 현재 60여 개의 연구기관이 있어 대전이 세계적 과학기술도시로 성장하는 견인차가 되고 있다.
시가지는 우리 나라 유수의 온천휴양관광지이기 때문에 시가지 규모에 비해서는 많은 식품접객업소와 숙박시설이 입지해 있다. 식품접객업소는 총 1,028개인데 이 중 대중음식점이 846개로 주종을 이루며, 숙박시설은 77개소에 2,346실이 확보되어 있다. 이 지역은 교외지역에서 이뤄지는 근교농업, 대덕연구단지와 첨단과학산업단지를 중심으로 한 첨단과학산업, 온천관광업이 지역경제의 주축을 형성하고 있다.
유성온천지구는 밤이면 불야성이 장관을 이루며, 온천욕을 하러 연중 많은 사람들이 이 곳을 찾는다. 유성 시가지 유성관광호텔 앞에 조성되어 있는 분수대·조각공원은 유성의 상징거리가 되고 있다.
국립묘지와 유성컨트리클럽 일대는 자연경관이 수려하고, 이 일대에 조성된 무궁화거리도 유명하다. 유성인터체인지의 만남의장소에도 많은 사람들이 다녀간다. 매년 9월 25일 온천의 날을 전후해 열리는 유성온천문화제는 유성관광의 백미를 이룬다. 교육기관은 1999년 현재 초등학교 17개교, 중학교 10개교, 고등학교 13개교, 대덕대학과 침례신학대학교·충남대학교 등이 있다.
성북(城北)·세(細)·송정(松亭)·방(芳)·원내(元內)·교촌(校村)·대정(大井)·용계(龍溪)·학하(鶴下)·계산(鷄山)·구암(九巖)·봉명(鳳鳴)·덕명(德明)·원신흥(元新興)·상대(上垈)·복룡(伏龍)·장대(場垈)·갑(甲)·노은(老隱)·지족(智足)·죽(竹)·궁(弓)·어은(魚隱)·구성(九城)·하기(下基)·추목(秋木)·자운(自雲)·신봉(新峰)·신성(新城)·가정(柯亭)·도룡(道龍)·장(長)·방현(坊峴)·화암(花巖)·덕진(德津)·반석(盤石)·수남(水南)·안산(案山)·외삼(外三)·전민(田民)·문지(文旨)·원촌(院村)·봉산(鳳山)·탑립(塔立)·용산(龍山)·관평(官坪)·송강(松江)·금고(今古)·대(垈)·금탄(金灘)·신(新)·둔곡(屯谷)·구룡(九龍) 등 53개 동이 있다. 〔중구 中區〕
시의 중남부에 위치한 구. 면적 61.98㎢, 인구 25만8748명(1999년 현재). 구청 소재지는 대흥동이다. 백제시대에는 우술군, 신라시대에는 비풍군, 고려시대에는 회덕군 진잠현·덕진현과 함께 공주에 속했다가 조선시대에는 지방제도의 개혁으로 공주목에 속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대전군이 되면서 대전면과 산내면 일부, 유천면이 지금의 중구에 해당되었다.
1949년 지방자치제 실시로 대전부가 대전시로 개칭되었다. 1977년 28개 동을 관할하다가 1983년 1개 출장소 35개 동을 관할하였다. 1988년 10개 동을 분할해 24개 동을 관할하였다. 1989년 구 대덕군 산내면 일부가 편입되어 25개 동을 관할하고 자치구로 승격했다. 1995년 대전광역시 중구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유등천이 북단부의 대전천에서 분기해 서쪽에 유등천, 동쪽에 대전천이 흐르고 있다. 구의 상반부는 거의 전역이 시가지를 형성하고 있고, 하반부는 보문산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보문산의 절반 정도는 개발제한구역이다.
상반부 시가지의 오른쪽은 시의 중심업무지구를 형성하고 있어 시청을 비롯해 호텔·신문사·백화점·대학병원 등 각종 중심업무 기능체들이 많이 들어서 있다. 시가지의 서쪽에는 호남선 철도가 지나며 서대전역이 설치되어 있어, 호남지역으로 통하는 관문 역할을 한다. 시가지의 남서부에는 서부시외버스터미널이 개설되어, 충남 서부지방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를 이룬다.
시청에서 정림동에 이르는 계백로는 시내 간선도로망의 기능을 갖고 있으며, 호남고속국도의 서대전인터체인지를 거쳐 논산 방면으로 연결되어 이 일대에서 교통량이 가장 많다. 서대전역 일대의 태평동에는 삼부·삼성아파트 등의 대규모 주거단지가 형성되어 있다.
공장수와 종업원수를 보면, 시내 총공장수 485개 중 46개, 총종업원수 3만7950명 중 1,340명으로 다른 지역에 비해 적은 편이다. 이 지역은 대부분이 중심업무지구에 속해 제조업은 비중이 작고, 상업 및 각종 중심업무기능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상업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식품접객업소는 시 전체 1만305개 중에서 36.14%인 3,725개, 환경위생업소는 전체 5,336개 중에서 32.58%인 1,739개가 입지해 있다. 식품접객업소의 주종을 이루는 것은 대중음식점업으로 2,784개이고, 또 환경위생업소의 주종을 이루는 것은 이·미용업으로 768개이다. 이 지역은 중심업무지역에서 동양·대전백화점, 중앙데파트, 중앙로지하상가 등이 유통업의 근간을 이룬다.
대전역에서 2.5km 남서쪽으로 대사동과 석교동·사정동·무수동에 걸쳐 있는 보문사공원은 전설에 의하면 이 곳에 보물이 묻혀 있다고 해서 보물산이라고 불리다가 보문산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1965년 대전시가 이 곳에 공원부지를 마련해 식수를 심고 유원시설을 만들었으며, 전망대인 보문대 및 야외음악당을 설치하는 등 시민공원으로 조성했다.
이어 그린랜드와 푸푸랜드의 설치로 시민 휴식공간으로 자리잡았으며, 사정국민관광단지 내에는 체육시설을 비롯한 각종 휴식시설을 갖추어 시민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공원 내에는 이북 5도민의 망향탑이 실향민들의 망향의 한을 달래주고 있으며, 정상에 오르면 백제의 숨결이 담긴 보문산성이 있다. 이 곳에는 장수약수터·보석천·고촉사약수터 등을 비롯한 21개소의 약수터가 유명하다.
중구에는 유등천 상류에 속하는 안영동과 침산동에 위치한 안영수영장이 있으며, 침산 청파정도 여름철에 수영장으로 시민들의 인기를 끌고 있다. 또 무수동에는 유희당·권이진·삼근정사·별묘·기궁재 등이 있다. 보호수목으로 보문4∼5거리 구 대사동사무소 자리에는 수령 500년 된 느티나무가 있고, 사정동 원사정리에는 수령 300년 된 은행나무가 있다.
지금은 없어진 목척교(木尺橋)는 새우젓을 진 지개를 받쳐놓은 모양이 꼭 목척과 같다 하여 목척교로 부른 것으로서 대전의 발전과 도시면모를 갖추는 데 한몫 하며 민족의 얼을 지켜온 다리이다. 1930년대 콘크리트로 변하면서 그 모습은 사라지고 이 곳에 목척교 유래비가 세워져 옛 사연을 전해주고 있다. 교육기관은 1999년 현재 초등학교 23개교, 중학교 13개교, 고등학교 14개교, 을지의과대학과 목원대학교가 있다.
은행(銀杏)·선화(宣化)·목(牧)·중촌(中村)·대흥(大興)·문창(文昌)·석교(石橋)·옥계(玉溪)·호(虎)·대사(大寺)·부사(芙砂)·용두(龍頭)·오류(五柳)·태평(太平)·유천(柳川)·문화(文化)·산성(山城)·사정(沙亭)·안영(安永)·무수(無愁)·구완(舊完)·침산(砧山)·목달(木達)·정생(政生)·어남(於南)·금(錦) 등 26개 동이 있다. 참고문헌新增東國輿地勝覽, 大東地志, 擇里志, 大田大觀(大田面事務所, 1928), 朝鮮各道邑誌(博文社, 1929), 忠南의 觀光資源(忠淸南道觀光協會, 1966), 한밭승람(邊平燮, 湖西文化社, 1972), 忠淸南道誌 上·下(忠淸南道誌編纂委員會, 1979), 韓國民俗大觀 1∼6(高麗大學校民族文化硏究所, 1980), 한국의 발견-충청남도-(뿌리깊은나무, 1983), 韓國地名要覽(建設部國立地理院, 1983), 韓國地誌-總論-(建設部國立地理院, 1983), 忠南의 脈絡(忠淸南道, 1983), 韓國地誌-地方編 Ⅱ-(建設部國立地理院, 1984), 大田市誌 上·下(大田市誌編纂委員會, 1984), 忠淸南道觀光開發案(忠淸南道觀光協會, 1964), 大田市周邊部落의 民俗信仰硏究(朴桂弘, 文化人類學 6, 1973), 大田市史(大田直轄市史編纂委員會, 1992), 韓國地理-地方編-(權赫在, 法文社, 1996), 地方行政區域要覽(行政自治部,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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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자세히도 적어놓았네요 참고많이하것습다 광역시 가한눈에보이네~~~~~~
ㅎㅎㅎㅎㅎㅎㅎㅎㅎ 저는 읽다가 포기혓어요. 나중에 애들 숙제한다고 하면 퍼가야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