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론송』귀경게의 번역과 해석
- 구마라집의 한역과 대비해서 -
이 종철(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Ⅰ. 들어가는 말
“논서(論書)를 쓰려는 사람은 자신의 스승이 얼마나 위대한 지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 먼저 스승의 수승한 능력을 찬탄하면서 스승에게 경배를 올린다.”
이 구절은 와수반두(世親, 320-400?)가 지은 『구사론』 첫머리에 나오는 말로, 왜 논서의 첫머리를 ‘귀경게’로 시작하는지 그 필요성을 설명하고 있다. 철학적 논서를 보면 저자는 흔히 맨 처음에 자신의 스승을 칭송하는 게송을 붙인다. 범어로 '망갈라쉴로까(maṅgalaśloka)', 일반적으로 ‘귀경게(歸敬偈)’라고 부르는 이 게송이 언제부터 논서 첫머리에 붙게 되었는지 그 정확한 연원은 확정짓기 어렵지만, 대충 인도에서 여러 학파의 원형이 성립되기 시작한 시점 곧 기원 전후로 추정된다. 어쨌든 2-3세기의 불교사상가 나가르주나의 『중론송(中論頌)』도 스승을 찬탄하는 ‘귀경게’ 두 수로부터 시작하는데, 『구사론』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스승’이란 붓다를 가리킨다.
『구사론』 ‘귀경게’와 대비시켜볼 때, 『중론송』 ‘귀경게’는 스승으로서의 붓다에 대한 찬탄뿐만 아니라 붓다의 가르침의 핵심을 ‘緣起’로 명시한 점, ‘緣起’의 구체적 내용을 소위 ‘팔불게(八不偈)’로 제시하고 있는 점이 두드러진다. 우선 범본 ‘귀경게’와 잠정적인 우리말 번역을 실어보자.
<예시-1>
anirodham anutpādam anucchedam aśāśvataṃ /
anekārtham anānārtham anāgamam anirgamaṃ //
yaḥ pratītyasamutpādaṃ prapañcopaśamaṃ śivaṃ /
deśayāmāsa saṃbuddhas taṃ vande vadatāṃ varaṃ //
<번역-1>
“생기는 것이 아니고 소멸하는 것도 아니며, 상주하는 것이 아니고 단멸하는 것도 아니며, 동일한 것이 아니고 별개의 것도 아니며 나오는 것이 아니고 돌아가는 것도 아닌 연기(緣起)는 희론(戱論)이 끊어진 것이며 길상(吉祥)한 것이다. 이와 같은 연기(緣起)를 가르쳐주신, 설법자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설법자이신 정각자(正覺者=부처님)께 경배합니다.”
나가르주나는 ‘귀경게’에서 붓다를 ‘설법자 가운데 최고가는’ 이, 곧 ‘스승’으로 파악하고 있다. 흥미로운 일은 와수반두도 『구사론』 ‘귀경게’에서 붓다를 ‘일체지자(一切智者)’로, 대비심(大悲心)을 지닌 ‘스승’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와수반두의 설명에 따르면, ‘스승’이란 정법(正法) 곧 진리를 가르침으로써 중생을 윤회의 수렁에서 구제하지, 결코 신통력이나 소위 ‘신의 은총’ 따위를 베품으로써 중생을 구제하는 이가 아니다. 나가르주나가 붓다를 ‘스승’으로 부르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중론송』 ‘귀경게’를 『중론송』 맨 마지막에 나오는 결송(結頌)과 연결시켜보면 나가르주나가 그렸던 붓다의 모습이 좀더 생생하게 다가온다.
“[중생에 대한] 연민으로 말미암아, [윤회의 원인인] 잘못된 견해를 깡그리 끊어버리도록 진리(saddharma)를 설해주신, 그 분 가우따마(Gautama=붓다)에게 귀의한다.”(27-30)
중생을 향한 가없는 대비심(大悲心)에서 진리를 설하여 중생으로 하여금 삿된 견해를 없애도록 도와줌으로써 윤회의 수렁에서 중생을 구제하는 붓다의 모습, 『중론송』의 처음과 끝에는 바로 이러한 붓다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한편 『중론송』 ‘귀경게’는 스승으로서의 붓다가 ‘緣起’를 가르치셨다고 명기한다. 이는 곧 나가르주나 자신의 공사상이 ‘緣起’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자기선언이나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공사상은 그 어떤 논의라 하더라도 결국 ‘緣起’를 구심점으로 삼아 전개하기 마련이다. 게다가 『중론송』 ‘귀경게’는 ‘緣起’에 관해서, 대승불교 경전의 관용구 즉 “생기는 것도 아니고 소멸하는 것도 아니며……”와 같은 구절을 수식어로 사용한다. 이는 대승불교의 공사상이 바로 붓다의 가르침인 ‘緣起’에 부합한다는 자기 확신과 다름없다. 따라서 불교 사상사라는 넓은 관점에서 볼 때, 『중론송』 ‘귀경게’는 초기불교에서 대승불교로 연면히 이어지는 ‘한 맛(一味)’을 ‘緣起’라는 한 단어로 집약시켜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중론송』 ‘귀경게’의 사상사적 의의나 비중을 고려한다면 이를 우리말로 번역하는 과정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팔불게’가 연기의 수식어가 되는 연유는 무엇이며, ‘희론이 끊어진다’든가 ‘길상’이 연기의 수식어가 되는 연유는 무엇인지, 하나하나의 용어의 뜻에 대한 적확한 이해도 있어야 하겠지만 불교 사상사에 대한 전체적 조망 하에서 심층적 의미를 풀어내는 ‘해석학적 지평’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이 글은 409년에 구마라집이 번역한 『중론』을 소재로 삼아 『중론송』 ‘귀경게’의 번역과 해석에 관련된 문제를 검토하고, 필자 자신의 『중론송』에 대한 ‘해석학적 지평’을 ‘귀경게’ 해석에 도입해 봄으로써 좀더 설득력 있는 우리말 번역을 꾀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잘 알다시피 구마라집은 『중론송』 ‘귀경게’를 다음과 같이 한역(漢譯)하였다.
<예시-2>
不生亦不滅 不常亦不斷
不一亦不異 不來亦不出
能說是因緣 善滅諸戱論
我稽首礼仏 諸說中第一
구마라집의 한역을 살려서 번역하면 ‘귀경게’의 일차적 번역은 이렇게 된다.
<번역-2>
不生이고 不滅이며, 不常이고 不斷이며,
不一이고 不異이며, 不來이고 不出이며,
善(=吉祥)하고 뭇 戱論이 寂滅한, 이 因緣을 설하신,
설법자 가운데 으뜸가는 붓다께 머리 조아려 경배합니다.
여기서 일단 잔가지를 먼저 정리해야겠다. 구마라집의 한역 <예시-2>에 등장하는 ‘善滅諸戱論’에 대해서 흔히 ‘諸戱論을 잘(善) 滅한’으로 해석하지만, 그렇게 되면 범문 원전에 나오는 ‘śiva(吉祥)’를 구마라집이 번역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이러한 해석은 아마도 구마라집의 한역이 23-23-23-23-23-23-32-
32와 같이 글자 수가 배열되었다고 보는 데서 나오는 자연스런 착시 현상이겠지만, 한자 ‘善’에 ‘좋은 선’ 이외에도 여러 가지 사용법이 있고 그 가운데 범어 ‘śiva’에 해당하는 뜻도 들어 있음을 감안한다면 굳이 운율을 기준으로 삼아 ‘śiva’의 번역어를 삭제할 필요는 없다. 구마라집의 한역에서 ‘善’을『漢韓大字典』에 그 용례가 나오듯이 ‘길할 선’으로 읽고 ‘상서롭다’는 뜻으로 새기면, 善=善祥=吉祥이다. 즉 ‘śiva’를 ‘善’으로 한역하였다고 보면 되는 것이다. 따라서 ‘善滅諸戱論’은 ‘善(=吉祥)하고 뭇 戱論이 寂滅한’으로 읽으면 된다.
구마라집의 한역 <예시-2>에서 눈에 띄는 특징은 구마라집이 ‘pratītyasam
-utpāda’를 ‘因緣’으로 번역하고 있다는 점이다. ‘緣起’가 ‘pratītyasamutpāda’의 번역어로 본격적으로 정착한 것이 당(唐)대 현장의 공로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구마라집이 ‘因緣’을 번역어로 채택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지금까지도 우리는 ‘緣起’ 대신에 흔히 ‘因緣法’이란 용어를 쓰기도 하는데, 이러한 용례는 그 연원이 구마라집에 있다. 그런데 번역과 관련해서, 구마라집의 한역에서 우리는 두 가지 문제에 맞닥뜨리게 된다. 한 가지는 아비다르마불교나 대승 유식사상에서 전개되는 법상(法相) 체계에 대비시켜볼 때 ‘연기’를 ‘인연’ 또는 ‘인연법’으로 번역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왜냐하면 법상 체계에서 ‘인연/인연법’이란 말은 '다르마(dharma)' 곧 ‘法’에 해당하는 말이기 때문에 ‘인연/인연법’이란 번역어는 ‘연기’를 ‘法(dharma)’과 등치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 가지는 구마라집이 채택한 번역어 ‘因緣’이 일관성 있게 ‘pratītyasamutpāda’의 번역어로만 사용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범문 원전을 하나하나 대조해보지 않으면 그 정확한 문의를 알기 어렵다는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Ⅱ. 구마라집의 한역 『중론』에서 ‘因緣’의 용례
먼저 범본 『중론송』만을 대상으로 구마라집의 한역에서 ‘因緣’의 용례를 살펴보겠다. 필자가 조사해본 바 구마라집의 용어법에서 ‘因緣’은 전부 6가지 용법을 지닌다.(*괄호안 숫자는 게송 순서로 편의상 Poussin 교정본에 따름.) 이를 예와 더불어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pratītyasamutpāda’의 번역어로 쓰이는 경우(‘緣起’를 뜻함):
(1-1) 不生亦不滅 不常亦不斷 不一亦不異 不來亦不出 能說是<因緣> 善滅諸戱論 我稽首礼仏 諸說中第一(‘귀경게’)
(1-2) 汝破一切法 諸<因緣>空義 則破於世俗 諸餘所有法(24:36)
(*『청목소』에서 구마라집은 ‘因緣’을 ‘因緣法’으로 보완한다. “汝若破衆<因緣法>第一空義者 則破一切世俗法.”(34b16-17))
(1-3) 是故経中說 若見<因緣>法 則爲能見仏 見苦集滅道(24:40)
(*‘法’을 뒤에 붙여 ‘因緣法’이란 말이 ‘pratītyasamutpāda’의 번역어로 쓰임)
(2) ‘hetupratyaya’의 번역어로 쓰이는 경우(四緣 가운데 하나인 因緣 곧 ‘본질적 원인’을 뜻함)
(2-1) <因緣>次第緣 緣緣增上緣 四緣生諸法 更無第五緣(1:4)
(3) ‘pratyayāḥ’의 번역어로 쓰이는 경우(‘원인 일반’을 뜻함)
(3-1) 諸煩惱及業 是說身<因緣> 煩惱諸業空 何况於諸身(17:27)
(4) ‘hetu 및 pratyaya’의 번역어로 쓰이는 경우(‘원인 및 조건’을 뜻함)
(4-1) 若衆緣和合 是中無果者 是則衆<因緣> 与非<因緣>同(20:4)
(*여기서 ‘衆緣和合’은 “hetoś ca pratyayānāṃ ca sāmagrī” 의 번역이기 때문에 ‘衆緣’의 ‘緣’도 ‘因緣’과 같이 ‘원인 및 조건’을 뜻한다.)
(4-2) 若先有果生 而後衆緣合 此卽離<因緣> 名爲無因果(20:8)
(4-3) 若從衆<因緣> 而有和合生 和合自不生 云何能生果(20:23)
(4-4) 衆<因緣>生法 我說卽是無 亦爲是仮名 亦是中道義(24:18)
(*衆因緣生法은 ‘pratītyasamutpāda’의 번역어로 緣起를 緣生法으로 바꿔놓은 형태. ‘無’는 空性(śūnyatā)의 誤譯.)
(4-5) 未曾有一法 不從<因緣>生 是故一切法 無不是空者(24:19)
(* 不從因緣生은 ‘apratītya samutpanna'의 번역어)
(4-6) 受諸<因緣>故 輪轉生死中 不受諸<因緣> 是名爲涅槃(25:9)
(*受諸因緣故는 'pratītya'의 번역어. 원문의 ‘upādāya’는 ‘pratītya’의 동의어로 보았기 때문에 별도로 번역하지 않은 듯.)
(4-7) 以諸行因緣 識受六道身 以有識着故 增長於名色(26:2)
(5) ‘prayojana’의 번역어로 쓰이는 경우(‘목적’을 뜻함)
(5-1) 汝今實不能 知空空<因緣> 及知於空義 是故自生惱(24:7)
(*空=空性; ‘空因緣’=‘空性을 설하는 목적’; 空義=空性의 뜻)
(6) ‘以是因緣’이란 관용구 형태로 ‘evam’의 번역어로 쓰이는 경우(‘까닭’을 뜻함)
(6-1) 如是等諸事 皆從生而有 但以是<因緣> 而集大苦陰(26:9)
이상과 같은 예시문에서 보듯이 구마라집은 ‘因緣’을 다양한 뜻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구마라집의 한역만 보게 되면 ‘因緣’이 ‘緣起’(용례(1))를 지칭하는지 ‘緣生(法)’(용례(2),(3),(4))을 가리키는지 헷갈리기 마련이다. ‘pratītyasamutpāda’의 번역어만 하더라도 구마라집은 ‘因緣’(1-1), ‘因緣法’(1-2; 1-3), ‘衆因緣生法’(4-4)‘과 같이 세 가지나 배당하니, ‘緣起’가 쓰이는 정확한 문맥을 잡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여기서 다시 ’연기‘를 ’인연/인연법‘으로 대체하는 <예시-2>로 돌아가 보자. 알다시피 ’法(dharma)‘에는 존재, 현상이란 뜻 이외에도 ‘진리(saddharma)’, ‘(붓다의) 교설(pravacana)’이란 뜻이 있다. 논리학에서 말하는 ‘자비의 원칙’을 살려서 ‘인연법’의 ‘법’을 ‘진리’의 뜻으로 이해해서 ‘인연법’을 ‘인연이란 진리’로 해석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4-4)에서 왜 구마라집이 ‘衆因緣生法’이란 번역어를 할당했는지 설명할 수 없다는 어려움이 있다. (4-4)에 등장하는 ‘法’은 명백하게 ‘존재’, ‘현상’의 뜻으로 쓰이는 ‘dharma’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귀경게’에 대한 구마라집의 한역 <예시-2>에 등장하는 ‘因緣’은 ‘인연이란 진리’를 뜻하는 게 아니고 ‘인연이란 존재’ 곧 ‘dharma’를 뜻한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런 해석이 된다.
흥미로운 일은 구마라집이 (4-5)에서 ‘apratītya samutpanna'의 번역어로 ‘不從因緣生(法)’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衆因緣生法’이나 ‘從因緣生法’이나 ‘dharma’를 가리킨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고, 이는 현장의 번역어에 대비시켜 말하면 ‘緣起’가 아닌 ‘緣生(法)’이다. 공사상에 대해서 명석판명한 이해를 지녔던 구마라집이 ‘pratītyasamutpāda(緣起)’와 ‘pratītyasamutpanna(緣生)'의 차이를 의식하지 않았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한 예로, 『중론송』 제18장 <관법품>에 나오는 한 게송에 대한 구마라집의 한역을 살펴보자.
nivṛttam abhidhātavyaṃ nivṛtte cittagocare /
anutpannāniruddhā hi nirvāṇam iva dharmatā //(18:7)
마음 가는 곳이 끊어져 있을 때 말할 것도 끊어져 있으니 法性(dharmatā)은 不生不滅이요 열반과 같다.
이 게송에 대한 구마라집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諸法實相者 心行言語斷 無生亦無滅 寂滅如涅槃
제법의 실상 [곧 법성]은, 마음 가는 곳과 언어가 끊어져 있으며, 生[相]이 없고 滅[相]이 없으며, [희론이] 적멸한 것이 열반과 같다.
이 한역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듯이, 구마라집은 ‘法性’을 ‘法’과 구별하고 있으며, 이를 ‘諸法實相’으로 번역한다. ‘귀경게’에서 쓰인 ‘不生不滅’이란 번역어도 여기에서는 ‘無生無滅’로 번역하고 있다. 이러한 번역어의 할당으로부터 구마라집이 ‘dharma’와 ‘dharmatā’를 명확하게 구별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나가르주나의 『중론송』에서 法性은 空性이며 空性은 緣起와 같다. 곧 법성=공성=연기의 동격 관계가 성립하는 것이다. 따라서 법성과 법의 개념적 차이를 의식하고 있었던 구마라집이 ‘연기’와 ‘연생’의 차이를 의식하지 못했으리라고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우리의 주의를 끄는 한 가지 묘한 사실이 있다. 구마라집의 한역에서는 ‘연기’와 ‘연생’의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듯이 ‘śūnyatā(空性)’과 ‘śūnya(空)’의 구별도 모호하게 처리된다는 점이다. 앞에서 열거한 예시문만 예로 든다 하더라도 한역에서는 똑같이 ‘空’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범문 원전에서는 (1-2)와 (5-1)에 등장하는 ‘空’은 ‘śūnyatā(空性)’이고, (3-1)과 (4-5)에 나오는 ‘空’은 ‘śūnya(空)’이다. 전자가 ‘연기’라면 후자는 ‘연생(법)’이기 때문에 양자의 차이는 분명한데도 한역에서는 이러한 경계선이 모호하게 처리되고 있다.
그렇다면 다시 ‘자비의 원칙’을 적용해서, ‘귀경게’에 대한 한역 <예시-2>에서 ‘pratītyasamutpāda’의 번역어로 ’因緣‘을 채택한 데는 무언가 구마라집 나름의 의도가 개입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추측해볼 수 있겠다.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아마도 두 가지 대답을 준비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연기와 연생법 사이에 불상리(不相離)․불상잡(不相雜)의 관계가 있기 때문에 구마라집은 불상리의 관계를 중시하여 ’연기‘의 자리에 ’연생법‘을 대체시키는 의역을 꾀했다는 설명이다. 다른 하나는, 범어와 중국어의 차이로 인해 구마라집 당시의 중국 지식인들이 ‘연기’니 ‘공성’이니 하는 추상적인 용어를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연기’보다는 훨씬 구체적인 ‘연생법’을 채택했다는 설명이다. 이러한 대답을 뒷받침해주는 사례가 『중론송』 제24장에 나오는 한 게송에 대한 구마라집의 한역이다.
yaḥ pratītyasamutpādaḥ śūnyatāṃ tāṃ pracakṣmahe /
sā prajñaptir upādāya pratipat saiva madhyamā //(24:18)
‘緣起’ 바로 그것을 우리는 ‘空性’이라 말한다. [‘연기’] 그것은 인연에 따라 설정된 은유적 표현(因施設/假名)이며, 바로 그것이 中道이다.
衆因緣生法 我說卽是無 亦爲是仮名 亦是中道義(24:18)
*‘無’는 空性(śūnyatā)의 誤譯으로, 구마라집의 용례에 따라 후대에는 모두 ‘空’으로 바꾸어 쓴다. 굳이 ‘無’를 살리고자 하면 '無自性'의 약어로 보면 무난하다.
여기서 분명하게 緣起는 緣生法으로 대체되어 있고, 연생법을 중심으로 전체 번역이 재구성된다.
이상과 같이 구마라집의 『중론송』에 대한 한역을 검토해 본 결과, 우리는 구마라집의 한역이 지니는 두 가지 특징을 추려낼 수 있다. 첫째, 번역어에서 ‘법성’과 ‘법’의 구별은 비교적 또렷하게 드러내지만 ‘연기’와 ‘연생’의 구별, ‘공성’과 ‘공’의 구별은 모호하게 처리하였다. 둘째, ‘귀경게’에서 쓰인 ‘因緣’은 ‘연기’보다는 ‘연생법’ 쪽에 가깝다.
Ⅲ. 『중론송』 ‘귀경게’ 번역을 위한 해석학적 지평
1.‘pratītyasamutpāda(緣起)’와 ‘pratītyasamutpanna(緣生)’
구마라집의 한역이 연기와 연생의 불상리 관계를 의중에 두었으리라고 앞에서 추측했다. 그렇지만 『구사론』이나 대승 유식사상의 법상체계에서는 양자의 불상리 관계뿐만 아니라 불상잡 관계를 강조하는 것도 사실이다. 양자의 불상리 관계는 “연기란 무엇인가?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 이것이 생김으로써 저것이 생긴다’가 연기이다.”와 같은 소위 ‘연기의 二句(paryāyadvaya)’에서 전형적으로 드러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양자의 불상잡 관계가 무시되는 일은 없다. 와수반두는 『俱舍論』<세간품>에서 『아함경』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이 구절의 해석을 둘러싼 논란을 통해서 연기와 연생의 불상잡 관계를 해명한다.
utpādād vā tathāgatānām anutpādād vā sthitaiveyaṃ dharmatā
여래께서 이 세상에 나오시든 나오지 않으시든 이 法性은 상주(常住)한다.
한 부파(=야쇼미뜨라의 주석에 따르면 化地部(Ārya-Mahīśāsakāḥ))는 이 구절에 등장하는 ‘法性은 상주한다’는 말을 근거로, “緣起는 無爲[法]이다”는 해석을 이끌어낸다. 법성과 연기의 동일시는 인도의 논사들에게는 상식적인 일이었던 같다. 야쇼미뜨라의 주석에서도 이 구절에 나오는 법성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 ‘법성’이 나올 때도 이를 ‘緣起’와 동치시키고 있으니 말이다. 아무튼 ‘緣起’가 法(dharma)과 法性(dharmatā) 가운데 法性 쪽에 해당한다는 이 지적은 우리의 논의에 좋은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연기는 무위법이”라는 化地部의 『아함경』 해석은 위 인용문에 나오는 ‘sthita’를 ‘nitya-dharma’로 해석함으로써 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화지부의 해석에 대해서 와수반두는 전면적으로 부정한다. 그 논지는 이러하다. 만약 ‘sthita’가 ‘nitya-dharma’와 같은 ‘또 다른 실재(bhāvāntara)’를 뜻하는 것이라면, 연기는 상주(常住)하는 ‘法’이 된다. 그런데 자구만 본다면 ‘緣起’의 ‘起(samutpāda)’는 有爲法의 相이다. 따라서 상주하는 것에 無常하다는 속성을 덧붙이게 되는 오류에 빠진다는 것이다.
여기서 와수반두는 ‘sthita’의 ‘密意(abhiprāya)’를 새롭게 제시하게 된다. 즉 법성 곧 緣起가 ‘상주한다’는 『아함경』의 구절은,
“언제나(nityam) 無明 등으로 말미암아 行 등이 생기하지만, [無明 등에] 말미암지 않고 혹은 [無明 등과는] 별개의 것으로 말미암고서는 [行 등은] 어느 때고 [생기하는 일이 없다.]”
는 뜻이라는 것이다.
화지부나 와수반두 둘 다 ‘sthita’를 ‘nitya’로 이해하는 것은 같다. 그렇지만 이 ‘nitya’를 화지부가 無爲法과 같은 ‘nitya-dharma’로 연결시키는데 반해서, 와수반두는 無明,行 등과 같은 有爲法이 생길 때에 필연적으로 전제되기 마련인 필연적인 인과관계, 달리 말하면 ‘nitya-sambandha’로 이해하는 데 양자의 차이가 있다. 이는 달리 말해서 화지부가 ‘dharmatā/ pratītyasa-
mutpāda’를 ‘dharma’와 등치시키는 데 반해 와수반두는 ‘dharmatā /pratītya
samutpāda’와 ‘dharma’를 엄격하게 구별하고 있다는 말이다.
와수반두에게 ‘法性’과 ‘法’의 구별은 자연스럽게 ‘緣起(pratītyasamutpāda
)’와 ‘緣生[法](pratītyasamutpanna)’의 구별로 연결된다. 한 예로, 『俱舍論』<世間品>에서 와수반두는 緣起를 因(hetu)으로, 緣生을 果(phala)로 보는 설일체유부의 견해를 배척하는 데, 이 때 와수반두의 논지는 緣起와 緣生의 개념적인 구별에 입각해 있다. 요컨대 ‘緣起’는 緣生하는 有爲法의 보편적인 존재방식이고, ‘緣生’이란 인연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諸有爲法을 통칭하는 표현이라는 것이다.
『구사론』 이후 대승 유식 논서인 『緣起経釋』에서도 와수반두는 緣起와 緣生에 관한 구별을 견지한다.
“無明 등은 緣起가 아니다. 그러면 무엇인가? 緣生[法]이다. 세존께서는 다른 경전에서 그와 마찬가지 뜻으로 “緣起란 무엇인가?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기 때문에 저것이 생긴다’는 것이 [바로 緣起]이다. 緣生이란 무엇인가? 無明, 行, 내지 生, 老死이다”라고 말씀하시고 계신다. 이 [경전의] 密意는 무엇인가? ‘緣起’란 諸[緣]生法의 共相(sāmānya-lakṣaṇa)이며, 이전에 없다가 지금 생기는 것(abhūtvā-bhāva)이다.
이상과 같은 전거를 통해서, 와수반두의 해석학적 지평에서는 연기=법성, 연생=법의 관계가 성립하고 있으며, 이러한 해석학적 지평은 연기와 연생 이 양자가 불상잡의 관계라는 점을 드러내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연기와 연생의 불상리, 불상잡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불상잡의 관계를 중심에 두면 구마라집의 한역 <예시-2>는 연기와 연생을 명확하게 구별하지 않았다는 과실 때문에 문제 있는 번역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불상리의 관계를 중심에 두면 연기에 관한 언명은 얼마든지 연생법의 관점에서 풀어낼 수 있는 일이기에 전적으로 틀리다고만 볼 수도 없다. 게다가 구마라집의 역풍(譯風)이 전반적으로 직역보다는 자유로운 의역에 가깝다는 점을 고려하면 구마라집 나름의 번역 스타일이라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한다. 어쨌든 『중론송』 ‘귀경게’를 번역하는 데도 정공법만을 따지면 ‘緣起’를 중심에 놓는 게 옳겠지만 구마라집과 같이 ‘緣生’을 중심에 놓는 다른 갈래도 있을 수 있음을 확인하는 것으로 만족하자.
2. 희론(戱論)과 본질주의자
우리는 이제 다시 『중론송』 ‘귀경게’의 번역 문제로 돌아가야 한다. 우선 정공법을 택해서 범본 『중론송』에 충실한 번역을 시도해보자. <번역-1>에서 보듯이 “연기는 희론이 끊어져 있는” 것이다. 연기의 수식어로 ‘팔불게’도 있지만 『중론송』 전체를 해독하는 열쇠는 바로 이 ‘연기’와 ‘희론’에 대한 해석에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팔불게’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물론이고, 『중론송』에 보이는 일관된 언어분석적 방법론의 의의도 이 두 개념을 통해서 여실하게 드러난다고 보기 때문이다.
연생과 연기의 관계를 고려해서, 나는 ‘緣起’를 ‘존재의 인과관계’라고 풀이하겠다. 이 때 ‘존재’는 ‘다르마(dharma)’의 현대적 풀이이다. 범어 ‘dharma'에는 다양한 의미가 있지만 아비다르마 불교, 중관, 유식 등 철학적 논서에서는 주로 ‘현상적으로 있는 것’ 곧 ‘존재’를 뜻한다. ‘존재’라 하면 상당히 정적인 분위기를 지닌 말이지만 불교에서는 이 존재에 ‘연기’라는 빛을 쪼이기 때문에, 존재는 흐르고 흘러 가만히 머물러 있지 않는다. 게다가 ‘연기의 二句’에서 보듯이 존재는 중층적인 인과관계의 관계망 속에서 서로 역동적으로 관계 맺는다. 헤라클레이토스는 “같은 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는 없다”고 해서 세상의 부단한 변화를 말한다. 그렇지만 존재와 존재가 끝임 없이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인과관계를 말하지는 않는다. 모든 존재가 인과관계에 얽힌 채 생성 소멸의 흐름에 합류되어 쉼 없이 흘러간다. 이렇게 보면 존재는 하나의 ‘흐름’이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이러한 존재의 모습을 불교에서는 ‘상속(相續, santāna/santati)’이라고 표현한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끊임없이 흘러가는 존재의 모습. 상존한다고 할 수 없으니 ‘불상(不常)’이고, 그렇다고 해서 단절된다고도 할 수 없으니 ‘부단(不斷)’이다. 상존도 단절도 아닌 시계(視界)에서 존재의 모습이 그려진다. 다시 말해서 존재를 하나의 과정(process) 또는 사건(accident)으로 바라보면서, 동시에 인식까지 포함해서 존재 일반을 ‘인과관계내 존재’(das Sein in der Verhltnisse)로 바라본다는 말이다. 이러한 ‘인과 관계내 존재’가 ‘연생법(緣生法)’으로 표현된다.
긴장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러한 흐름으로서의, 인과관계내적 ‘존재’는 언제나 ‘무상(無常)의 相 하에서’ 성립하기에, 생성소멸의 과정을 초월해 홀로 실재하는 그 어떠한 본체(本體)도 부정된다는 점이다.
서양철학의 현상-본질 구도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존재 저 너머에 또는 존재 저 안에 불변의 실체로서 도사리고 있는 존재론적 본질 또는 본체를 상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상사에서 본체는 여러 가지 이름으로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인도 같으면 창조주 브라흐만, 내 안에 유령처럼 도사리고 있는 아뜨만 등의 이름을 붙일 터이고, 서양 사상 같으면 제일원인, 유일신, 영혼, 절대정신 등으로 이름 붙일 것이다. 중국 사상계에서도 위진 현학과 같은 경우는 ‘공(空)’을 본체로서의 ‘무(無)’로 이해한 적이 있다. 그렇지만 관계성을 중시하는 연기적 사고에서 관계망에서 벗어난 또 하나의 초월적 본체를 인정한다는 것은 자기모순적인 언명에 지나지 않는다.
같은 맥락에서 나가르주나는, 아비다르마 불교 시대 때 각 부파가 의심 없이 받아들였던 법체(法體: 존재의 자성 또는 존재의 본체)에 관해서 예리한 메스를 들이댄다. 나가르주나의 용어법에 따르면, ‘자성’(自性, svabhāva)도 자기 원인적 존재를 가리킨다는 점에서 본체와 매한가지이기 때문이다.
svabhāvaḥ kṛtako nāma bhaviṣyati punaḥ katham /
akṛtrimaḥ svabhāvo hi nirapekṣaḥ paratra ca //(15:2)
“또한, 어떻게 自性이 [인연으로 말미암아] 만들어지는 것이 될 수 있겠는가? [본질주의자의 정의에 따르면,] 自性은 [인연으로 말미암아]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며, [자신의 존립을 위해서]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게송에서 나가르주나가 부정하고 있는 ‘自性’은 ‘자기 원인적’인 존재론적 본질을 가리킨다. 존재의 배후에 본체를 상정하는 사유 경향을 한 묶음으로 통틀어서 <본체론적 사고>라 명명해 볼 수 있을 것이고, 이와 같은 사유 경향을 고집하는 입장을 <본질주의자>로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반해 공사상에서는 자성이 없는 다르마의 세계, 곧 본체가 비어있는 존재의 세계만을 이 세계의 전부로 제시한다. 연기 또는 공사상과 <본질주의자>는 이러한 맥락에서 양립할 수 없다.
자연과학이나 서양철학에서 쓰이는 ‘인과관계’와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연기에 관해서 ‘불교적’이라는 수식어를 덧붙여 ‘불교적 인과관계’로 표현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원인과 결과 양항에 본체가 배당되는 일이 없고, 언제나 ‘인과관계로 얽힌 존재’가 배당되기 때문이다. 어떻게 표현하든 흡족한 풀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별다른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므로, 확실한 대안이 나올 때까지 우선 ‘존재의 인과관계’로 풀이하고 넘어가겠다.
『중론송』 ‘귀경게’에서, 이상과 같은 ‘연기’는 ‘희론이 끊어진’ 자리로 묘사된다. ‘희론’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연기’의 대극(對極)에 놓이는가?
‘희론’은 범어 ‘쁘라빤짜(prapañca)’의 한역으로, 어근 pra-√pañc 또는 pra-√pac (상세히 설명하다;흩뜨리다)에서 나온 명사형이다. 원래는 현시, 전개, 확장, 확산, 확대, 다양화, 상세한 설명을 뜻하는 말인데, ‘흩뜨리다’는 뜻이 우세했는지 점차로 철학적 영역에서는 ‘현상’, ‘현상계’, ‘환상’을 뜻하는 말로 쓰이고, 희곡에서는 ‘어리석은 말’을 뜻하게 된다. 대승불교를 주요한 모태로 삼은 한역에서는 ‘희론(戱論), 허위(虛僞), 망상(妄想)’과 같이 좋지 않은 뜻으로만 쓰인다. 아마도 ‘흩뜨린다’는 어근의 뜻을 살려서, 무언가 진상을 꿰뚫지 못하고 언저리로만 얼쩡거리는, 알갱이를 꿰차지 못하고 모호하게 흩뜨리는 말이라는 뜻으로 ‘희론’이라 옮긴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연기’를 왜 ‘희론이 끊어진’ 자리로 표현했는지 『중론송』의 다음 게송을 대비시켜 생각해보면 그 연유가 좀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karmakleśakṣayān mokṣa karmakleśā vikalpataḥ /
te prapañcāt prapañcas tu śūnyatāyāṃ nirudhyate //(18:5)
“업과 번뇌가 소멸함으로써 해탈이 있다. 업과 번뇌는 분별심(分別心, vikalpa)에서 생기고 분별심은 희론(戱論, prapañca)에서 생기지만, 희론은 공성(空性)에서 소멸한다.“
저 유명한 소위 ‘三諦偈’(24:18)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 게송에서 ‘공성’은 ‘연기’와 같고, 업이나 번뇌는 생사윤회 세계를, 희론은 생사윤회의 원인을 가리키기 때문에, 희론은 연기와 대극적인 자리에 놓인다.
‘분별심’에 관해서 유식사상과 대비시켜 볼 때 그 뜻이 잘 드러난다. 잘 알다시피 유식사상에서는 우리 마음을 표층적 영역과 심층적 영역으로 나눈다. 심층 영역에 해당하는 마음이 소위 ‘알라야식’이다. 그런데 유식사상의 용어법을 보면, 표층마음과 심층마음을 같이 싸잡아서 곧 우리의 오감각과 의식, 마나식, 알라야식을 전부 '위깔빠(vikalpa)' 곧 ‘분별심’이라고 부른다. ‘분별심’은 생사윤회의 대해에서 헤매고 있는 우리 중생의 마음을 뜻한다. 흥미로운 일은 ‘분별(分別)’이란 말로 중생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 마음의 현 상태까지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다. ‘분별’이라 하면 여자-남자의 분별, 적-친구의 분별 등 수많은 차별상이 언급되겠지만 이 모든 분별은 나와 대상의 분별 곧 주관-객관의 분별로 통합될 수 있다. 유식사상에서는 이 분별심을 근본적으로 변혁시키지 못하는 한, 주관과 객관으로 경계선이 그어진 분별심이 있는 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없고 이 때문에 업과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한다.
그런데 나가르주나는 이 분별심이 희론에서 생긴다고 한다. 왜 그럴까? 이 문제에 대해서 해결의 실마리를 던져주는 것이 바로 짠드라끼르띠이다. 그는 ‘희론은 말(vāc)’이라고 풀이하여, 희론이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와 무언가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 즈음에서 언어의 어떤 점이 생사윤회와 관련되는지 캐묻지 않을 수 없다.
언어는 보기에 따라 여러 가지 기능 및 속성이 있다. 인간을 ‘호모 로퀜스(homo loquens, 언어적 인간)’라고 해서 다른 동물 종(種)과 확실하게 구분하는 표식으로 언어를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언어에 관해서, 불교 사상은 무엇보다도 언어의 분절(分節) 기능에 주의를 기울이다. ‘분절’이 말 그대로 대나무를 마디마디 쪼개나가는 것을 뜻하듯이, 언어의 분절기능이란 온전한 존재의 세계, 통짜인 존재의 세계를 갈래갈래 나누어 ‘갈라진 세상’으로 만드는 기능이다. 좀 까다로운 이야기가 될는지 모르지만 언어의 분절기능은 ‘의미’의 형성과정에서 잘 드러난다. 한 예로 ‘희다’라는 말의 의미가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보자. 유명한 불교 논리학자 디그나가의 설명을 따라가 보면, ‘희다’라는 말은 우선 ‘희지 않은 것’을 동시에 내세우게 되고, 그 다음에 노란 것이 아니다, 까만 것도 아니다, 붉은 것도 아니다 등등 다른 색을 배제함으로써 ‘희다’의 의미를 드러내게 된다. 이같이 언어는 일차적으로 자타(自他)의 분절을 꾀한 뒤, 차례대로 ‘타자를 배제(anyāpoha)’함으로써 자신의 의미를 구축한다. 나가르주나가 말한 ‘희론’이 언어와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은 바로 이러한 언어의 분절 기능 때문이고, 이 점 때문에 희론은 주관-객관의 분별로 대표되는 분별심의 토대로 자리 잡는다.
유식사상에서는 알라야식을 ‘일체종자식(一切種子識)’이라고도 한다. 말 그대로 종자란 종자는 모두 알라야식 안에 내장되어 있기 때문에 알라야식을 일체종자식이라 한다. 그런데 종자 가운데는 ‘업종자(業種子)’라고 부르는, 전생에서 행한 업의 과보를 때가 되면 싹틔울 씨앗도 들어있지만, ‘명언종자(名言種子)’라고 불리는 특이한 씨앗도 포함되어 있다. 이 명언종자가 바로 언어능력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의 마음은 하얀 도화지 같이 그 안에 아무것도 칠해져있지 않은 백지로 보기는 어렵다. 태어날 때부터 이미 선천적으로 다양한 종자들을 지니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알라야식 안에 명언종자가 있다고 한다면 이는 표층마음에서뿐만 아니라 심층마음에서도 언어활동이 존재한다는 말이 된다. 심층마음에서 진행되는 언어활동을, 유식사상에서는 ‘의언(意言, manojalpa: 마음의 속삭임)’이라고 표현하여, 조용히 속삭이듯 진행되는 것으로 묘사한다. 표층마음에서처럼 그렇게 확연하게 언어의 분절 기능이 드러나지는 않지만 언어의 분절기능은 여전히 마음 저 깊숙한 곳에서 묵직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표층마음에서 심층마음에 이르기까지 우리 마음속에는 언어의 분절기능이 깊이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삶에 관한 그 어떠한 말도 언어의 분절 기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결국 통짜인 존재의 세계를 갈가리 찢어놓는 꼴이 되기 때문에, 깨달은 이의 눈으로 보면 ‘놀고 있네!’ 라는 한마디밖에 들을 수 없게 된다. 구마라집의 역어(譯語) ‘희론(戱論)’의 배후에는 이러한 숨은 맥락이 있다.
희론이 사라질 때, 언어의 분절기능을 벗어나 존재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통째로 바라볼 수 있을 때, 우리는 분별심을 떨쳐버리고 다람쥐 쳇바퀴 돌리는 듯한 생사윤회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 ‘희론 적멸’이라 할 때 나가르주나의 의중에는 아마도 그런 생각이 있지 않았을까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가르주나가 ‘희론이 끊어진다’고 표현한 ‘연기’는, 연기를 깨달음으로써 증득하게 되는 ‘해탈’, ‘열반’과 다른 것이 아니다. 『중론송』 ‘귀경게’에는 연기에 관한 또 다른 수식어 ‘吉祥(śiva)’이 나온다. 구마라집의 한역에서는 ‘상서로울 선(善)’으로 간략하게 번역되어 있는 말이다. 이 말이 ‘연기’의 수식어로 등장하는 이유도 연기를 깨달음으로써 얻게 되는 열반의 세계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모든 말이 다 희론일까? 그렇지는 않다. 희론이 ‘언어의 분절 기능에 얽매인’ 말인 이상, ‘언어의 분절기능에 얽매이지 않는’ 말은 희론이라 할 수 없다. 불교에서 최고가는 지혜를 지닌 이는 연기를 깨달은 이이다. 대승불교적인 표현을 빌리면 공성을 깨달은 이가 된다. 그런 이의 지혜는 분별심이 끼어 들 여지가 없기 때문에, 아니 이미 분별심이 남김없이 없어져 버렸기 때문에 ‘무분별지(無分別智)’라고 불린다. 따라서 그런 이의 말은 ‘언어의 분절기능’이 지니는 역기능에서 자유로울 수밖에 없다. 여기서 우리는 무분별지와 분별심의 대극적 구도를 상정할 수 있게 되고, 더 나아가 양자의 상징으로, 나가르주나와 같은 공 사상가와 본질주의자를 그 대극적 구도 안에 설정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대극적 구도 안에서 『중론송』 ‘귀경게’에 등장하는 ‘팔불게’도 해석할 수 있겠다. 즉 ‘아니다, 아니다’로 연이어지는 생멸(生滅), 단상(斷常), 일이(一異), 내출(來出) 등은 분별심에서 나온, ‘연기’와 ‘연생법’에 관련된 갖가지 본질주의자의 속설들을 네 쌍의 8가지 유형으로 정리한 것일 뿐이다. 따라서 ‘생멸’ 등의 말은 본질주의자의 말 곧 희론이고, 반면에 ‘불생, 불멸’등의 말은 무분별심에서 나온 말로 희론이 아니다. 언어라 해도, 언어의 분절 기능에 얽매인 사람의 말과 언어의 분절 기능에서 벗어난 사람의 말, 이 두 차원이 있는 것이다. 그릇된 언어관에 현혹되어 언어를 깡그리 부정해서는 안 될 일이다. 구정물을 버리려다 옥동자마저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 점에서 구마라집이 번역한 『중론』<청목소>에서 ‘귀경게’를 ‘궁극적 진리의 약설’로 파악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해석학적 지평을 넓히는 데 좋은 시사를 준다.
Ⅳ. 『중론송』 ‘귀경게’의 번역문
앞에서 개진한 해석학적 지평을 밑천 삼아 이제 필자 나름의 ‘귀경게’에 대한 번역문을 제시해보겠다. 범문 원전에 나오는 ‘anutpāda’, 'anirodha'와 같은, 팔불게의 하나하나의 어구의 의미에 관해서도 일일이 해석이 필요하겠으나 지면 관계상 생략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한 가지만 추가하자. 한역에서는 팔불게에 관해서 ‘不生’, ‘不滅’과 같이, 범어의 부정사 ‘an/a’을 ‘不’로만 번역하고 있으나, 『중론송』(18:7)에 대한 한역에서 보듯이 ‘無生’, ‘無滅’과 같이 ‘無’로 번역하는 경우도 있다. 한역 자체에서 엄밀한 번역어의 통일성을 찾기는 어려우나, 범어의 부정사 ‘an/a’에는 이러한 두 가지 의미가 다 있기 때문에 이를 살려서 전자는 ‘연생’에 관련된 번역으로, 후자는 ‘연기’에 관련된 번역으로 채용하기로 한다.
연기와 연생 가운데 어느 쪽을 중심어로 삼느냐에 따라 번역의 어감이 달라지겠지만 내용상 큰 차이는 없다. 먼저 범문 원전과 같이 ‘연기’를 중심어로 삼은 번역은 일차적으로는 <번역-1>의 모습이었지만, 이는 다음과 같이 <번역-3>으로 다듬을 수 있겠다.
<번역-3>
“緣起에는 [본질주의자가 말하는] ‘생성’이니 ‘소멸’이니, ‘상주’니 ‘단멸’이니, ‘동일’이니 ‘별개’이니, ‘유출’이니 ‘귀환’이니 하는 갖가지 언어적 규정이 적용되지 않는다. 연기는 이러한 [본질주의자의] 갖가지 언어적 규정이 끊어진, 완전한 해방의 영역이다. 이와 같은 연기를 가르쳐주신, 설법자 가운데 가장 위대한 설법자이신 부처님께 경배합니다.”
마지막으로 ‘연생법’을 중심어로 삼는 구마라집의 한역 <번역-2>는 다음과 같이 <번역-4>로 다듬을 수 있겠다.
<번역-4>
“緣生法은 [본질주의자가 말하듯이] [영원불변한 원인에서] 생기거나 [완전한 無로] 소멸하는 것이 아니며, [영원불변한 실체로서] 상주하거나 [결과에 상관없이] 단멸하는 것도 아니며, [원인과 결과가 서로] 동일하거나 [서로 무관한] 별개의 것도 아니며, [영원불변한 원인에서] 나오거나 [영원불변한 원인으로] 돌아가는 것도 아니다. 緣生法은, [연기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으므로] [본질주의자의] 갖가지 언어적 규정이 끊어진, 완전한 해방의 영역이다. 이와 같은 緣生法의 세계를 가르쳐주신, 설법자 가운데 가장 위대한 설법자이신 부처님께 경배합니다.”
Ⅴ. 맺음말
이제까지 구마라집의 한역과 대비시켜 보면서 『중론송』 ‘귀경게’의 번역에 관련된 몇 가지 의문 사항을 검토해 보았다. 그 과정에서 『중론송』 ‘귀경게’의 번역을 위해서는 연기와 연생의 관계, 『중론송』의 주된 논적(論敵), 희론의 의미와 같은 몇 가지 해석학적 지평이 필요함을 드러냈으며, 이를 근거로 두 가지 유형의 번역을 마무리 삼아 제시해 보았다.
이러한 작업이 『반야경』 계통의 대승불교 경전의 정확한 해독에 일조를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잘 알려진 예를 하나 들어보자. 현장이 번역한 『반야심경』의 한 구절에 “諸法空相 不生不滅 ……”이 있다. 구마라집의 한역도 역시 마찬가지로 “諸法空相 不生不滅”이다. 흔히 ‘諸法空相’을 ‘諸法實相’ 곧 法性으로 해석하고 이의 수식어로 ‘不生不滅’을 연결시키는 경우를 자주 본다. 자연스런 한문 독법상 능히 그럴 수 있는 일이다. 그렇지만 범문 원전에는 “sarvadharmā śūnyatālakṣaṇā”로 되어 있어 그 뜻이 “공성(空性)을 [共]相으로 삼는 뭇 法은”이 된다. ‘不生不滅’의 주어가 ‘법/연생’이 되느냐 ‘법성/연기’가 되느냐 하는 선택치를 놓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이럴 때 번역자는 먼저 문제점을 있는 그대로 제시한 뒤 자신의 선택을 설득력 있게 해명해야 할 것이다. 『중론송』 ‘귀경게’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얻어내는 ‘성찰적 반성’ 가운데 하나이다.
약호
대정장:『大正新脩大藏経』
AKBh(P):Vasubandhu : Abhidharmakośabhāṣya, Pradhan, Prahalad(ed.), TSWS Vol.8, Patna,1967; rev. 1975.
PP:Candrakīrti : Mūlamadhyamakakārikās de Nāgārjuna avec la Prasannapadā commentaire de Candrakīrti. de La Vallée Poussin, L.(pub.). Bibliotheca Buddhika 4. St.-Pétersburg. 1903-13.
PSVy: Vasubandhu : Pratītyasamutpādavyākhyā(=Pratītyasamutpādādivibhāgani-
rdeśa) P.Vol.104, No.5496, Chi 1a-71a.; D.No.3995, Chi 1b-61a.
SA(W):Yaśomitra :Sphuṭārthā Abhidharmakośavyākhyā by Yaśomitra. Wogihara, U.(ed.). Tokyo, 1932-1936 ;repr. Tokyo, The Sankibo Press, 1971.
주제어
와수반두(Vasubandhu), 나가르주나(Nāgārjuna), 구마라집(Kumarajīva), 중론송((Mūla-)Madhyamakakārikā), 구사론(Abhidharmakośabhāṣya), 연기경석(Pratītyasamutpādavyākhyā), 귀경게(maṅgalaśloka), 연기(pratītyasa-
mutpāda), 연생(법)(pratītyasamutpanna(-dharma)), 희론(prapañca), 본질주의자(essentialist).
On some hermeneutical problems regarding
maṅgalaśloka of Madhyamakakārikā
Lee, Jong-chul
The present article deals with the hermeneutical problems regarding the maṅgalaśloka of Madhyamakakārikā.
This article is divided into five sections. Section I and II discuss the diverse usage of chinese buddhist term `因緣 yin yuan` into which Kumarajiva translated 'pratītyasamutpāda'. It state that it is difficult to distinguish 'pratītyasamutpāda' from 'pratītyasamutpan
-na' in Kumarajiva's chinese translation, and that Kumarajiva adopted 'pratītyasamutpanna' intentionally to interpret the Sanskrit technical term 'pratītyasamutpāda' into Chinese. Here we can see that there is a hidden hermeneutical horizont in Kumarajiva's chinese translation.
Section III refers to the hermeneutical horizons which are necessary for interpreting the maṅgalaśloka of Madhyamakakārikā. The first is to draw a clear line between 'pratītyasamutpāda' and 'pratītyasamutpanna'. The former refers to co-relation between cause and effect, but the latter refers to the concrete being or things under the co-relation. The second is to define opponents of Madhyamaka-
kārikā.. This paper fixes that the main opponents of Madhyamaka-
kārikā are essentialists who set forth beforehand ontological essence or self-originated being(svabhāva) in corelational world of beings. The third is to grasp the correct meaning of 'prapañca'. This paper suggestes that prapañca means the articulation fuction of language.
Section IV suggestes two possible korean translations for the maṅgalaśloka of Madhyamakakārikā on the basis of the hermeneutical horizons referred by section III. One is from the standpoint of 'pratītyasamutpāda', and the other is from the standpoint of 'pratītyasamutpanna' which is also the standpoint of Kumarajiva.
As a result, It is also clear that there is inseparable and unmixable relation between 'pratītyasamutpāda' concept and 'pratītyasamutpan-
na' conce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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