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상석 회장 류 기룡 총무 정 숙자 총무 010-5446-7954 010-3630-6066 010-5246-9910
임하호의 물결에 비친 임동 백두대간 큰 줄기 아래 해발 591m의 학나래처럼 펼처진 아가산 진품 안에 임동이 자리잡고있다, 안동 용상동 선어대에서 34번 국도를 타고 영덕방향으로 가다보면 임하땜, 수곡신단지 다음이 임동이다, 임동을 빛내주신 분들을 보면 최초장군 이상철 예비역소장, 류정기 교수, 류혁인 공보처장관, 류안진 서울대교수, 이상석 이학박사, 김종길 명예교수, 이영화 전 대전지방청장, 류승번 전 국회의원, 류목기 (주)풍산 총괄부회장, 류성걸 기획재정부 차관, 류종탁 전 농림부 차관, 김종갑 전 산자부차관, 류필계 전 정보통신부 차관보 등 무수한 인재들이 임동 출신이다.
고향을 떠나온 임동인들의 모임 ●재경 임동향우회 출향인사들을 중심으로 1993년 11월3일 류동일,김정대,박무일,류목기 등 50여명의 뜻있는 향우들이 광화문 동해음식점에서 초대 회장으로 최동섭씨를 추대하고 총무 류창석으로 임원진이 구성 되었다. 재경 임동향우회의 창립이었다. 2대 박무일 회장이 8년간 향우회를 맡았으며, 2006년 부터 류필휴 회장이 2012년 까지 이끌었다. 2대부터 류기현, 최후남 씨가 2011년4월까지 총무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며 회장을 보필하였다, 그공로로 사무국장,여성국장으로 보직이 조정되고, 류기락, 남금옥씨가 류필휴 회장을 보필하고, 현제에는 이상석 회장(2013~) 과 류기룡 총무,(2015~) 정숙자 총무(2013~)가 향우회를 맡고있는 중이다. 창립당시 재경 임동향우회는 50 여명으로 시작하여 현제에는 500 여명의 향우회 회원조직과 행사시 약 200 여명이 모이는 큰 조직으로 발전하여 어느 향우회보다 결속력이 강한 향우회로 평가받고 있다.
●재경 임동산우회 향우회 산하에 재경 임동산우회가 9년전 발족되어 짝수월 셋째 일요일에 정기 산행을 실시하고 있다, 매년 2월이면 산우회 시산제가 성대하게 거행되고있다.
●재경 임동향우회 카페 사이버공간 모임으로 다음카페에 임동향우회가 개설되어 전국의 임동인들이 참여하고 있으며 회원수가 1,000 여명에 이르고있다, 사이버공간 모임이 잘 되는 이유는 카페지기 김은희씨 의 세심한 보살핌과 류필휴 고문님의 탁월한 신세대감각 그리고 물심양면 의 지원 및 향우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그 비결이다. <자료출처: 안동향우회 20년사>
재경 임동면 향우회 전 회장 총무
임동면 세거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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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동면 소재지 중평리 일대<사진출처 : 20세기 안동의 모습>
- 임동면 세거지 소개 -
임동면(臨東面)은 안동시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으로 청송군 진보면, 영양군 입암면과 접하고 남으로는 안동시 길안면, 북으로는 안동시 예안면과 접하고 있다. 임동면의 면적은 151.07㎢이며 인구는 2,924명이고 1,115세대가 살고 있다. 임동면은 원래 임하현에 속해 있다가 조선 숙종 때 임하현이 분할되면서 안동에 편입되었다. 안동의 읍지(邑誌)인 영가지(永嘉誌)를 보면 임동면에 관한 부분이 언급되어 있는데 “본디 고구려의 굴화군(屈火郡)이다.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곡성군(曲城郡)으로 고쳤는데 고려 초기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현종(顯宗) 때에 본부(本府)에 예속되었다.”라고 기록되었다. 근대에 들어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8개 법정리로 개편되었으며 1974년 7월 1일 안동댐 준공으로 마리(馬里) 외 5개리가 편입되면서 13개리가 되었다. 그 후 1993년 임하댐 건설에 따른 행정구역 조정으로 지례리와 수곡리의 일부가 폐지되고 1995년 1월 1일 안동시와 안동군이 통합되어 안동시 임동면으로 개칭되었으며 현재 12개 법정리와 20개 행정리로 구성되어 있다. 임동면의 소재지는 중평이다. 임하댐 건설로 인하여 수몰되어서 1989년 신단지를 조성하여 이주하였다. 지명은 옛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이주하기 전 중평은 챗거리라고도 불렀는데 이는 옛날 여기에 동해안의 해물과 내륙의 산물들을 거래하는 큰 장터가 있었으며 이 장터에 인마가 끊이지 않고 우마에 채찍질하는 소리가 끊이질 않아서 챗거리라고 하였다. 임동면은 비옥한 토질로 다양한 농작물이 경작되고 있으며 주요 농작물로는 전국적으로 이름난 임동사과와 고추, 담배, 참깨 등 산지형 농업이 발전하였으며 천연기념물, 유·무형문화재 13종을 소재하고 있다. 그리고 아기산 등산로, 안동·임하호 낚시터 등 가족 휴양지로서도 각광을 받고 있다.
갈전리
갈전리는 안동시에서 청송군으로 넘어가는 가래재 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원래 임하현에 속하였으나 고종 23년(1895)에 지방관제 개정에 의하여 안동군 임동면에 편입되었다. 그 후 1914년 행정구역 정리에 따라 추곡과 신곡을 병합하여 오늘에 이른다. 갈전리는 1리와 2리로 구별되어 있다. 갈전리는 갈전, 갈밭으로 부르는데 칡덩쿨이 일대에 무성하게 번져있는 것을 개척하여 이룬 마을이라고 한데서 유래하였다. 갈전리에는 현재 87가구에 216명의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
▶ 못밑·못밑마·지하촌(池下村)·상촌(上村)
이 마을은 갈전의 여러 자연마을 중에서 위쪽에 위치하였던 관계로 상촌(上村)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1943년 마을 위에 갈전못이 완공되자 못 바로 밑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현재는 주로 못밑 또는 못밑마로 불리고 있다. 이 마을은 원래 장씨(張氏)가 많이 살았다고 하며, 그 후 한씨(韓氏)가 주성을 이루며 살았다가 지금은 한씨 1가구, 이씨 1가구가 살고 있다.
◇ 불 밋 골:못밑마에서 갈전못 쪽으로 올라가는 길 서쪽에 있는데 이곳에 불을 당기는 풀무가 많았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이다.
◇ 큰가시골:가시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것으로 못밑마 서쪽에 위치한다.
◇ 작은가시골:큰가시골과 인접하여 있으며 종가시골이라고 하기도 한다.
◇ 갈 전 못:1943년에 조성된 것으로 마을 끝에 있는 계곡을 막아서 제방을 쌓았다. 저수지의 규모는 상당히 큰 편이다.
▶ 조산마·조산촌(造山村)
조산마는 못밑마 아래에 위치한 마을로서 규모는 그리 크지 않다. 이 마을 앞쪽에 당이 있었는데 이 당을 만들 때에 흙과 돌을 모아서 조산을 형성한 후 만들었다고 하며 이런 흙과 돌로 이루어진 무더기가 산처럼 많이 쌓여 있다는 데서 조산촌(造山村)으로 불리었다. 현재는 주로 조산마로 칭하고 있으며, 그전의 흙과 돌무더기는 전답(田畓)으로 변하였다. 류씨(柳氏)가 주성으로 20가구가 농업에 종사하고 살았으나 현재는 전주류씨를 비롯한 여러 성씨 8가구가 살고 있다.
◇ 곳 집 들:조산마 동쪽에 있는 들로서 들 가운데 마을 상여를 보관하는 곳 집이 있어서 붙여진 명칭이다.
◇ 진 다 물:다물 즉, 돌무더기가 길게 늘어져 있었어 붙여진 명칭으로 조산마 뒤쪽에 위치하고 있다.
▶ 금마·항리(港里)
이 마을의 명칭은 이곳에 물이 흐르는 깊은 지대가 있었다 하여 금마, 항리라고 부른다고 한다. 마을 가구수는 40여호 정도이고 갈전1·2리에서 가장 큰 자연마을이다. 조산마 아래에 마을이 있으며 계곡을 따라 1km 정도 가옥들이 늘어서 있다.
◇ 봉산골:금마 동쪽 산에 위치한 골로서 봉산사(鳳山寺)라는 절이 있었던 계곡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나, 현재 절은 없으나, 옛날 탑이 있었다는 탑밭에는 현재도 탑의 기단 일부가 남아있다. 옛날 탑 해체 때 흰 항아리에 은구슬 15개, 은수저, 명주천이 나왔다고 전하여 온다.
◇ 봉산사지(鳳山寺止):봉산골 입구 평지에 위치하고 있다. 서북으로 낮아지는 경사지는 밭으로 경작되고 있으며 군데군데 돌무더기가 산재하여 있다. 형태는 원형으로 쌓아 올린 제단 위에 자연석을 올려 놓고 신위를 만들었다. 제단의 크기는 직경 160cm이고 높이는 80cm이다.
◇ 때백장골:봉산골에서 갈려져 나온 작은 계곡으로 큰 계곡에 붙어 있다고 하여 명칭이 유래되 었다.
◇ 수 구:금마로 들어서는 입구에 조성된 것으로 소나무와 상수리나무, 느티나무 등으로 구성 되었다. 약 30년 전에 마을주민들이 뜻을 모아서 조성한 것이다. 도로에서 마을이 너무 훤하게 보여서 이것을 막고자 조성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마을이 번성한다고 믿고 있다.
◇ 번답들:수구 앞쪽에 위치한 넓은 들이다. 들이 비교적 넓어서 번답들이라고 붙여졌으며 수구 가 조성된 후로는 수구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음식골:농사를 짓기 위한 물을 대기 위하여 음보를 팠다고 하여 붙여 진 것으로 금마 서쪽에 있다.
◇ 학봉선생유허비:수구가 있는 곳의 길 건너에는 학봉선생유허비가 조성되어 있다.
▶ 납실·신곡(申谷)
청송방면의 국도 변에 있는 마을이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께서 이곳을 지나시다가 마을의 지세가 원숭이 형상과 유사하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현재 임하댐 건설로 인하여 마을 대부분은 수몰되었으며 마을주민들은 아랫대수리와 금마 아래의 자뭍골에 이주하였다고 한다. 납실의 수몰되지 않은 터에는 현재 휴게소가 세워져 있다.
▶ 가랫골·추곡(楸谷)
안동과 청송 사이를 왕래하는 산중턱에 위치한 마을로, 가래나무가 많았다 하여 가랫골 또는 추곡이라고 불리었다 한다. 현재 15가구 정도 살고 있으며 갈전2리에 속한다.
◇ 가래재:가래골에 있는 높은 고개로서 주위에 가래나무가 많아서 생긴 명칭이며 안동과 청송 의 경계지점이 되기도 한다.
▶ 대실·죽실(竹實)·대수리
원래 정씨(鄭氏)의 죽실파(竹實派)가 1960년대 자리잡고 살아 이곳을 죽실(竹實)이라고 불렀으나, 그 후 이곳에 이주한 사람들이 한자(漢字) 죽(竹)자의 훈(訓)을 따서 대실이라고 불렀으며 주로 대수리라고 많이 부른다. 대수리는 윗대수리와 아랫대수리로 나뉘어져 있는데 윗대수리는 갈전1리에 속하며 현재 2가구가 살고 있다. 그리고 아랫대수리는 갈전2리에 속하며 5가구가 살고 있다. 마을 위치는 납실과 금마 사이 뒤쪽 계곡을 따라 약 3km 정도 올라간 산 위에 위치하고 있다.
대곡리
대곡리는 임동면의 동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은 1리와 2리로 구성되었으며 임동면 위리와 예안면과 접하여 있다. 대곡리는 원래 임하현의 지역이었으나 고종 32년(1895)에 안동군 임동면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복수천, 해천, 신평, 고도, 금수천, 고사, 갈마곡과 위리 일부를 병합하여 대곡동(리)이라고 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대곡리의 가구는 모두 130호이며 295명의 주민들이 있다.
▶ 강변마을, 새마을
이 마을은 새로 만든 마을이라는 의미로 새마을이라고 하였으며 옛날 수해로 피해본 강변에 있던 마을 주민들이 형성하여 강변마을이라고 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대곡리와 위리의 경계지역에 있는 마을로 대곡1리에 속하며 대곡리의 첫동네이다. 현재 7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 새들·신평(新坪)
이 마을은 새마을에서 북쪽으로 1.5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마을 명칭은 복수천(福受川), 해천(海川)에 이어 새로 들 가운데 마을이 개척되었다 하여 붙여진 명칭이라고 한다. 이 마을도 대곡1리에 속하며 현재 9가구가 산비탈에 촌락을 구성하며 거주하고 있다.
▶ 바드래·해천(海川)·상수천(上受川)
이 마을은 새들에서 북쪽으로 1km 정도 가다가 오른쪽으로 난 작은 도로를 따라 1km 정도 가면 나타난다. 이 마을은 대곡1리에 속하며 현재 15여 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의 모양이 바다에 배가 떠 있는 형상이므로 해천이라고 하였으며 또 산마루에 위치한다고 하여 상수천이라고도 한다. 이 마을에는 용굴과 굴터가 있어서 장수와 용마(龍馬)가 났다는 전설도 있다. 또 장수가 말을 타고 달리다가 세운 곳에 말발굽 자국과 윷놀이판이 바위에 새겨져 있으므로 왕우재라는 이름도 전해지고 있다. 또 옛날 농기구를 제작했다는 곳으로 소부전골이란 이름도 전해오고 있다. 옛날에 기우제를 올렸다는 천혜당이라는 곳이 있어서 날씨가 흐린 날은 산 속에서 물이 흐르는 소리와 베틀소리가 들린다는 전설이 있다.
◇ 동암사 석불:바드래 서쪽에 있는 사찰에 있다. 동암사의 대웅전에 모셔진 이 석불은 동암사의 주존불로 높이가 94cm이다. 좌대는 8각이고 두 조각으로 합쳐져 있으며 12지신상이 양각되어 있다. 목은 굵고 코는 시멘트로 붙여져 있고 눈은 파여져 있다. 예안 신림에서 1975년에 현재 의 위치로 옮겼다.
◇ 두 름 산:해천의 뒷산이다. 산의 지형이 둥그스름하게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이 산에서 새들로 내려오는 길목에는 장수굴이라는 굴이 있다고 한다.
▶ 복바드래·복수천(福受川)
이 마을은 새들의 북쪽에 있다. 복바드래는 대곡1리이며 그 끝자락에 있다. 옛날 마을 뒷산의 큰 고목(古木)에 여러 사람이 소원을 빌면 복을 받는다는 전설이 있어 복바드래로 붙여졌다고 한다. 현재 대곡1리에 속하며 13여 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 샛마·간촌(間村)
이 마을은 대곡2리에 속하며 대곡리의 한 가운데 자리잡고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 마을은 대곡리에서 가장 큰 자연마을로 옛날 안동에서 영양으로 통하는 지름길목이었으며 소장수 등이 쉬어가던 곳이라고도 한다. 이 마을에는 대곡참나무라고 하는 유명한 나무가 있다. 이 나무는 마을 북서쪽 300m 정도 떨어진 산비탈 언덕에 위치하고 있으며 자연생으로 참나무과에서는 보기 드문 노거목으로 높이는 약 15m, 가슴 높이 둘레는 5.1m, 터진 가지의 길이는 사방 15.5m나 된다. 농사일이 조용한 음력 7월 하순이 되면 남정네들은 농로를 보수하고 길가의 잡초를 베며 아낙네들은 집집마다 성심껏 음식을 장만하여 이 나무그늘에서 주연을 베풀었는데, 이때 마을의 화평을 비는 제를 올리고 흥겨운 하루를 보낸다. 여름철 마을의 크고 작은 모임은 모두 여기에서 열리며 마을 사람들의 좋은 휴식처가 되고 있다. 옛날에는 여름 한 철에 나무그늘이 서당의 역할을 하였다고도 한다. 봄이 되고 잎이 무성해질 때면 온갖 새들이 날아드는데, 특히 소쩍새(두견새)가 와서 울면 그 해는 풍년이 든다고 하여 온 마을이 기뻐했다고 한다. 이 나무는 인심 좋은 대곡의 오랜 역사를 상징하며 주민들의 자부심이기도 하다.
◇ 구 통 골:간촌의 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영양군과 연결되는 것으로 영양군 청기면 구매리 구통마을과 연결된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 굿마·고사(庫舍·古舍)·학교마을
이 마을은 간촌에서 남쪽으로 바로 인접하고 있으며 대곡2리에 속한다. 마을 명칭은 옛날 대곡리의 중심 마을이었으며 마을 모퉁이에 곳집을 지어 상여를 보관하였기에 붙여진 명칭이다. 학교마을이라는 명칭은 여기에 대성초등학교가 있어서 붙여진 명칭으로 현재 초등학교는 폐교가 되었다. 그리고 곳집도 없어졌다고 한다. 현재 이 마을에는 5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 한실·대곡(大谷)
이 마을은 간촌에서 북쪽으로 1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이 마을은 대곡2리에 속한다. 마을 명칭은 마을을 형성할 당시 큰 골짜기라고 하여 붙여진 것이다. 옛날 한실마을과 굿마마을이 잡귀를 쫓기 위해 음력 정월 대보름날 횃불놀이가 남녀노소 없이 참여하여 치열하게 벌어졌는데, 어느 한쪽이 패할 기색이면 이 두 마을의 중간에 있는 샛마사람들이 약한 마을을 도와주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 갈 골:한실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목마른 말이 물을 마시던 곳이란 뜻에서 명칭이 유 래된다고 한다. 또 골이 깊고 좁아 맑은 물이 흘러 땀을 씻고 쉬던 곳이기도 하여 유래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갈매골, 갈마곡(葛馬谷, 渴馬谷)이라고도 한다.
◇ 도 수 골:한실 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여기에서 돌나물이 많이 난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 이다.
◇ 배 나 무 골:가르점 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배나무편달, 재산박골이라고도 하는데 돌배나무 가 있어서 붙여진 명칭이다.
▶ 가르점·가리점·점못·갈어점(葛於店)
한실 북쪽에 있는 지역으로 한실에서 북쪽으로 영양과 봉화로 통하는 산마루의 분기점이므로 가르점이라 한다. 현재 사람이 거주하고 있지 않으나 전에는 살고 있어서 한때는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 돌목이·돌매기·석항(石項)
이 마을은 간촌에서 서쪽으로 1.5km 정도 떨어진 대곡2리의 자연마을이다. 마을 뒤쪽 고개 마루에 큰 돌 두 개가 마치 성문처럼 놓여 있어서 돌목이라고 했다. 현재 4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 고들마·고도(古道)
이 마을은 간촌에서 남쪽으로 1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마을 명칭은 옛날 상인들이 영양과 봉화방면으로 통하던 길이라 하여 붙여진 것이다. 근대에까지 소장수들이 영양(英陽)에서 안동으로 다니던 유일한 통로였으나 지금은 화물 수송의 발달로 발길이 끊어졌다. 이 마을은 바드래, 금바드래, 간촌, 새들로 이어지는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재 9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 금바드래·금수천(錦受川)
이 마을은 고도에서 서쪽으로 1.5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이 마을에 장수가 칼을 든 형세의 산이 있다. 그리고 마을이 산마루에 위치하며 마을의 지형이 금수장갑형상(錦繡藏甲形像)이라고 하여 마을 명칭이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현재 4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령리
이 마을은 임동면의 동북쪽에 위치한다. 임동면의 소재지인 중평리에서 청송방면으로 2km 정도 가다가 왼쪽에 난 길로 접어든다. 이 길을 따라 가면 마령교라는 다리가 나오고 이 다리를 건너서 좌측으로 5km 정도 가면 우측에 마을이 나타나는데 이것이 마령단지이다. 수몰되기 전의 이 마을 명칭은 맛재, 마령이라고 하였다. 마을 모습이 우마(牛馬)가 짐을 싣고 있는 형국, 또는 말발굽 형상이라 한데서 유래되었다. 수몰되기 전 이 마을에는 전설이 전해지는데 옛날 이 마을 뒷산에서 노승이 내려와 마을 정자 앞에서 급사하니 동네 사람들이 장례를 치러 주었다. 그 날 밤 그 노승이 마을 사람들에게 현몽하여 사당을 지어 달라고 했다. 그래서 말발굽 모양이 갈라진 자리에 승당(僧堂)을 짓고, 매년 음력 정월 대보름날 제사를 올리고 굿을 하여 영혼을 위로하는 행사를 행하였다고 한다는 것이다. 마령리는 1리, 2리, 3리로 나누어진다. 1리는 현재 마령단지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임하댐 건설로 인하여 마령리의 수몰민들이 새로 형성한 마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2리는 이식골이라는 자연마을로 되어 있으며 3리는 지리실, 한내골, 골마 등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마령리는 원래 임하현에 속하였으나 고종 32년(1895)에 행정구역 변경에 의하여 안동군 임동면에 편입되었다. 그 후 1914년에 인근의 쇠랑실, 우무골, 이식골, 송골, 지리실, 한내골 등을 병합하여 근래에까지 오다가 임하댐 건설로 인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변하였다. 현재 마령리에는 99가구에 257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수몰되기 전에는 운곡(雲谷), 가르편, 쇠랑실, 이식골, 새터, 후생촌, 용점, 송골, 한내골, 지리실, 골이식골, 골마 등이 있었으나 대부분 수몰되었다. 지금은 행하여지지 않지만 수몰 전 마령리에서는 매년 지내는 당고사와 달리 10년 만에 한번씩 별신굿을 가졌다. 이 별신굿은 보통 동해안 영해 지방에서 대여섯 명의 무당에 의해서 행하여진다. 정월 대보름 새벽에 일반적으로 다른 마을에서 올리는 것과 비슷하게 당고사를 올리고 날이 밝으면서 행해지는 별신굿은 풍물의 지신밟기와 걸립, 몇 개의 작은 마을 앞에서 벌어지는 호랑이와 허수아비 잡기, 당에서의 당내림 그리고 무당굿으로 되어있다. 마을 사람들이 치는 풍물은 대보름날 아침부터 망대를 앞세우고 각 마을을 돌아가며 집집마다 지신을 눌러주고 관람한다. 당대는 큰 소나무를 새로 베어 만든 것으로 여기에 창호지 조각, 종이꽃 등을 매어단다. 그리고, 집을 다니며 걸립할 때마다 사람들은 당대에 울긋불긋한 인조 헝겊 조각이나 작은 주머니를 달기도 하며, 방울을 사다가 달기도 한다. 작은 주머니 속에는 일·이백원 정도를 넣는다. 걸립이 끝나면 솔잎이 안보일 정도로 달려 있다. 이 때 걸립한 돈으로 별신굿의 경비를 충당한다. 대보름날에 걸립이 끝나고 이튿날에는 다른 작은마을 입구에서 호랑이를 잡는 놀이를 한다. 호랑이는 짚으로 만들고, 겉에는 종이를 발라서 물감으로 그린다. 풍물을 치는 가운데, 포수가 총으로 호랑이를 잡는 시늉을 한다 포수는 호랑이를 잡으러 가다가 신발이 떨어졌다고 신발값을, 담배가 떨어졌다고 담배값을, 물건을 잃었다고 물건값을 달라고 하면, 사람들은 돈을 조금씩 준다. 호랑이를 모두 잡으면 큰마 입구에서 허수아비 두 마리를 같은 방법으로 잡는 놀이를 벌인다. 허수아비를 잡으면 당대를 앞세우고 풍물을 치면서 당집으로 간다. 당집에서 무당의 축원에 의해 당내림이 시작된다. 깨끗한 사람이 당대를 들고 무당은 정성을 올린다. 호랑이나 허수아비를 모두 잡았으니 내려오십사하고 축원을 올리며 정성을 드린다. 무당의 정성이 지극해서 잘 들으면 신이 쉽게 내린다고 한다. 내림이 안되면 내릴 때까지 계속해서 다른 사람이 당대를 잡는다. 신이 내리면 당대를 잡은 사람은 그 무거운 소나무 당대를 어깨에 메고 춤을 출 정도로 뛴다. 당대가 내리면 다시 풍물을 치고 당터의 지신을 누른다. 그리고 무당은 마을의 깨끗한 사람의 소지를 올린다. 이 당대 내림은 신에게 굿을 해도 좋은가를 허락받는 표적이라고 한다. 이어서 무당이 굿을 하는데, 자세한 내용은 안 밝혀지고 있다. 호랑이와 허수아비는 그 다음날 동공사에서 모든 결산을 본 다음에 불에 태운다. 이 때에도 풍물을 계속 친다. 이 별신굿은 수몰되기 전까지 행해졌으나 현재는 하지 않는다. 이것은 마을의 제사와 함께 치러지는 행사로서 새해를 맞이하여 마을에서 앞으로 일어날 모든 사악한 일들을 호랑이와 허수아비로 대신해서 물리치거나 없앤다는 뜻에서 생긴 주술적인 놀이로 보인다. 또한 산골이기 때문에 입은 들짐승들의 피해를 예방한다는 의미에서 생겼을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마을의 안녕과 가축 보호라는 생활의 필요성과 10년 만에 한번씩 즐겨 노는데서 생기는 일상생활의 변화를 얻고자 행하여지는 마을 공동행사의 하나인 것이었다.
▶ 마령단지
이 마을은 수몰된 후 맛재와 쇠랑실 주민들을 비롯한 수몰민들이 새로 형성한 것이다. 현재 20여 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 이식골·유곡(有谷)·노곡(露谷)·만천(萬川)
이 마을은 마령2리에 속하며 골이식골에서 이주한 주민 등 18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 앞을 흐르는 대곡천변(大谷川邊)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포촌(浦村, 包泉)이라 하다가 다시 노곡(露谷)으로 개칭하였으나, 이슬은 하루 아침에 반짝거리다 곧 없어진다 하여 만천(萬川) 또는 유곡(有谷)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하천을 사이에 두고 양짓마와 음짓마(골이식골)의 마을로 나뉘어졌었는데 음짓마가 수몰되자 주민들이 이곳으로 이주하였다. 남평문씨가 주민들의 절반을 이루고 있다.
▶ 한내골·한천곡(韓川谷)
이 마을은 마령3리에 속하는 지역으로. 마령교에서 우측으로 난 길을 따라 영양방면으로 2km 정도 가면 나타난다. 마을 명칭은 마을 주위에 험한 산과 계곡이 많고 또 큰 내가 있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현재 이 마을에는 19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 지리실·경곡(經谷)
이 마을은 한내실에서 동쪽으로 1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골의 길이가 길다는 뜻으로 지리실이라 하였으며 임동면과 영양군과의 가장 빠른 지름길이라 하는 뜻도 있다고 한다. 마을 남쪽에는 지리실 약수탕이 있다. 현재 20여 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 동산재:지리실에서 영양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영양의 입암면 산해리의 동산마을과 연결 된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 분통골:지리실 동쪽 골마로 가는 길에 있는 골짜기이다. 여기에서 분토(粉土)가 난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또 골짜기의 지형이 오목하여 화장품의 분통처럼 생겼다고 붙여진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초상이 많이 나서 분통이 터진다는데서 유래한다는 이야기도 전해진 다.
◇ 활당골:지리실 바로 위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옛날 영양군으로 왕래하던 길목인 등사티재(동 산령:東山嶺)의 바로 밑에 위치하고 있다.
▶ 골마·곡마(谷馬)
이 마을은 지리실에서 동쪽으로 2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지리실의 끝자락에는 동쪽으로 난 두 갈래의 길이 있는데 오른쪽으로 가면 영양이고 왼쪽으로 2km 정도 가면 골마가 나타난다. 마을 명칭은 말 모양을 한 천마산(天馬山) 계곡에서 물이 흘러 내려온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다. 골마의 동쪽 산 아래에는 질좋은 약수터가 있다. 현재 이 마을에는 6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박곡리
박곡리는 임동의 동남쪽에 있다. 박곡리로 들어가는 길은 여러 개 있는데 가장 많이 이용하는 길은 수곡리를 거쳐서 가는 것이다. 수곡리에서 마을을 관통하는 도로를 따라 4km 정도 가면 마을이 나타난다. 박곡리는 원래 임하현에 속한 지역이었다. 고종 32년(1895)에 지방관제 개편에 따라 안동군 임동면에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의하여 석현, 오잠을 통합하여 박곡동(리)이라고 하였다. 임하댐이 건설되기 전 박곡리에는 박실(아랫박실, 하박), 웃박실(상박), 돌고개(석현), 오잠, 매삿골, 쇳골(셋골, 우곡) 등의 자연마을이 있었으나 수몰로 인하여 박실, 돌고개, 쇳골 등은 사라지고 오잠은 망천리로 편입되었다. 현재 박곡리를 구성하고 있는 자연마을은 웃박실, 매삿골 그리고 지례리에서 이건한 예술촌, 감당 등이다. 박곡리라고 행정명칭을 따 온 것은 수몰된 박실에서 유래한 것이다. 마을이 큰 골짜기에 위치하면서 그 지세가 항아리와 유사하다고 하여 호곡(壺谷)이라 하였다가 다시 박모양과 같다고 하여 호곡(瓠谷)이라 하였으며 또 박곡(博谷)으로 부르다가 박곡(朴谷)으로 변하였다고 한다. 또 이 마을에 처음 들어온 염씨 중 정승을 지낸 사람이 벼슬에서 물러나 박을 가꾸면서 지냈다고 하여 유래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박곡리를 처음 개척한 성씨는 염씨였으며 후에 권씨, 류씨가 들어와 살았다고 하나 현재는 여러 성씨들이 살고 있다. 현재 박곡리에는 38가구에 74명이 살고 있다.
▶ 웃박실·상박(上朴)
이 마을은 임하댐이 건설되기 전 박실(원박)에서 남동쪽으로 약 2km 떨어진 마을로서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이었다. 그러나 박실이 수몰되어 사라진 후 현재 박곡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 되었으며 수곡리에서 넘어오면 바로 나타나는 박곡리의 첫 마을이다. 박실의 위쪽에 있다고 하여 웃박실, 상박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다고 한다. 마을의 가옥들은 언덕배기에 모여 조성되었으며 가구수는 현재 25여 가구이다.
◇ 논실골:상박의 동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로 현재 2가구가 살고 있다.
◇ 뒷 골:상박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있는 골짜기로 수몰되었으나 꼭대기 부분만 남아있다.
◇ 애기골:상박의 남쪽에 1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데 지형이 어금니 모양과 비슷하다고 하여 아곡(牙谷)이라고 한다.
◇ 산달골:산답곡이 변하여 산달골이라고 하는데 산 아래에 좋은 논이 있어서 붙여진 명칭이다. 상박의 원골짜기이다.
◇ 지리골:상박의 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예술촌으로 가는 길목 좌측으로 들어간다. 골짜기가 길어서 붙여진 명칭이다.
◇ 큰 골:지리골 위쪽에 있는 것으로 골이 깊고 커서 붙여진 명칭이다.
◇ 고명곡:상박으로 들어오는 길목 좌측에 있는 것으로 상박의 북쪽이다. 마을 주민들은 고민골이라고도 한다.
◇ 쇳골·셋골·우곡(牛谷):아래 박실 남서쪽에 있는 골짜기에 위치하고 있으며 과거에는 3, 4가구 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마을 앞이 트여 지세가 세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라 하며 현재 이 마 을은 터만 남아있고 주민은 살고 있지 않다고 한다.
▶ 매삿골
매삿골은 웃박실 남쪽으로 2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박실못이라는 저수지가 있다. 또 마을에 45여 년 전에 건립된 사찰이 있는데 처음 건립하였을 때에는 매화사라고 하였다가 지금은 삼보사라고 명칭을 바꾸었다고 한다. 이 마을에는 현재 3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 예술촌
이 마을은 상박에서 동남쪽으로 7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에는 지촌종택(芝村宗宅) 등이 자리잡고 있으며 다른 인가는 없다. 원래 지촌종택이 있었던 곳은 임동면 지례리였으나 임하댐 수몰로 인하여 원래의 위치에서 200m 정도 떨어진 산기슭에 올라와 이건한 것이다. 현재 지촌종택을 비롯하여 지촌제청, 지산서당 등 고가옥이 있으면 예술인을 위한 예술촌으로 개방하고 있다. 이로 인하여 마을 명칭을 예술촌이라고 한다.
▶ 감 당
박곡과 지리의 경계지점인 감당이재 아래에 있는 작은 마을로 빗바들이라고도 한다. 이 마을은 원래 상감당과 하감당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하감당은 임하댐 건설로 수몰되어 현재는 상감당만 남아있다. 이 마을에는 3가구가 살고 있다.
수곡리
수곡리는 전주류씨의 동성마을이다. 조선 명종(明宗) 때 류성(柳城) 선생이 이곳에 입향하였으며 당시 마을 뒤 아기산(峨岐山)에서 물줄기가 마을을 둘러싼 형상으로 흐르고 있다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현재 수곡리는 임하댐 건설로 인하여 신단지를 만들어 마을을 새로이 형성하였다. 그리고 수몰민 일부는 구미의 해평면 일선리에 새로운 정착지를 만들어 이주하였다. 수몰되기 전 수곡리에는 한들, 원두들, 늘침, 도골, 밤나무골 등의 자연마을이 있었으나 거의 대부분이 사라지고 일부분만 남아있다. 수곡리는 원래 임하현의 지역이었다. 고종 32년(1895) 지방관제 개정에 따라 안동군 임동면에 편입되었고 1914년 대평, 원파, 늘치미, 독골, 박곡리 일부와 중평리 일부를 통합하여 수곡리가 되었다. 현재 수곡리에는 57가구에 130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 광산(匡山)·가구(佳丘)·개두들
수곡리가 임하댐 건설로 인하여 수몰되자 주민들은 마을 뒷산인 아기산 기슭에 신단지를 만들어 이주하였는데 개두들이 그 곳이다. 원래 이곳은 사람이 살지 않았다고 한다. 마을 명칭은 예전부터 사용하던 것인데 아기산 기슭의 아름다운 언덕이라는 뜻에서 가구라고 하였으나 그 음이 변하여 개두들이라고도 한다. 마을에는 전주류씨 종택과 기양서당, 수애당, 무실정려각 등 고가옥이 함께 이건되어 동성마을의 면모를 간직하고 있다. 현재 이 마을에는 55가구 정도가 살고 있다.
◇ 황 산 골:개두들 뒷편에 있는 골짜기이다. 신라시대의 고찰인 봉황사가 있어서 붙인 명칭이 다. 봉황사를 황산사라고도 하는데 이것으로 인하여 유래된 명칭이다.
▶ 독골·도곡·구수동
독골은 옹기굴을 차렸던 마을이라 하여 유래되었다. 그러나 임하댐 건설로 인하여 대부분 수몰되고 뒷산의 일부분이 남아있어 이곳에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 선생의 종택과 만우정(晩愚亭)을 이건하였다. 종택이 있는 곳을 구수목, 구수동이라고 하는데 여기의 땅을 파면 군데군데 구멍이 있는 공간이 있어서 붙인 명칭이라고 한다. 현재 이곳에는 다른 민가는 없고 종택 1가구만 있다.
◇ 청류쉼터:구수동으로 들어오는 입구에 있는 공터로서 휴식처로 만들었다. 원래 이 아래에는 구미 해평으로 옮긴 동암정(東岩亭)이 있었다고 한다.
중평리
중평리는 임동면의 소재지이다. 안동시내에서 청송방면의 국도를 따라 25㎞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중평리는 원래 임하현의 지역으로 두 하천이 합치는 중간 지역이라 하여 중드루, 또는 중평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고종 32년 지방관제 개편에 의하여 안동군 임동면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편기리, 신평, 구마골을 병합하여 중평동(리)이라 하였다. 그 후 임하댐 건설로 인하여 옛터는 모두 수몰되고 현재의 신단지로 이주하여 새로운 마을 형성하였다. 따라서 기존의 자연마을은 사라지고 단지 행정명칭인 중평1리와 2리가 있다. 현재 중평리는 임동면에서 가장 큰 곳으로 211가구에 604명이 거주하고 있다. 수몰되기 전 중평리에는 챗거리, 웃챗거리, 말뚝소, 굴매골, 새들, 쑥쟁이 등의 자연마을이 있었다. 챗거리는 중평리의 원마을으로서 편항리(鞭港里), 중평이라고 하였는데 영덕 등의 동해안의 산물과 안동 등 내륙의 산물이 통과하는 관문으로 이것을 운반하는 우마차와 우마의 채찍소리가 밤낮으로 끊기지 않았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또 우마의 채찍을 마련하는 거리(마을)이라는 뜻도 있다고 한다. 임동 챗거리의 장날은 5일과 10일이다. 웃챗거리는 우책걸, 상평이라고도 하는데 챗거리의 윗쪽에 위치한 마을이라는 뜻이다. 옛날 우마차를 사용하던 시대에 상인들의 속박과 편마(片馬)의 축사가 운집된 마을이라 하여 웃챗거리라고도 했다. 말뚝소는 웃챗거리 앞 냇가를 이르는 말인데, 옛날 소나 말의 고삐를 매워두던 곳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굴매골은 구마곡(九馬谷)이라고도 하는데 지세가 아홉마리의 말을 채찍질하는 형용이라 하여 구마곡(九馬谷)이라 했는데, 음이 변하여 굴매골로 되었다. 이 마을 앞에 임동중학교가 있었다고 한다. 새들은 신평이라고도 하는데 챗거리 마을이 형성된 뒤에 새로 조성하여 마을을 두었다고 하여 새들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쑥쟁이는 쑥재라고도 하는데 옛날 말을 마동(馬洞)으로 몰아 넣어 쉬게 하였는데 그 말을 지키며 숙직한다고 하여 쑥재라고 불렀다.
고천리
고천리는 안동에서 청송으로 넘어가는 가래재 아래에 위치한다. 갈전교를 지나 가래재를 오르기 전 우측에 난 도로를 따라 산굽이를 돌아서 3km 정도 들어간 동쪽에 위치한다. 고천리는 1리와 2리로 나뉘어져 있으며 현재 145가구에 359명의 주민들이 거주한다. 임하댐 건설로 인하여 수몰되기 전 고천리에는 양지마, 독점, 평지마, 모시골, 어신골, 덜갱이, 다릿골 등 7개의 자연마을이 있었다. 그러나 현재 양지마와 독점, 다릿골은 수몰되었거나 일부만 남아있다. 양지마는 고천리에서 가장 큰 자연마을이었으며 양지 쪽에 위치하였다고 해서 양촌(陽村), 양지마라고 불렀다고 한다. 독점은 양지마 서쪽에 위치하였으며 옹기를 제작하기 위해 만든 독굴이 있었다고 해서 명칭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다릿골은 마을 주위에 다리가 있어서 불리워진 명칭이다. 수물된 지역에 살았던 주민들은 고천리의 다른 자연마을에 이주하여 살거나 아예 고천리를 떠난 경우도 있다. 그리고 일부 주민들은 고천리에서 새로운 마을을 형성하여 살기도 한다.
▶ 평지마·평촌(坪村)
이 마을은 넓은들 가운데 있는 평화스러운 마을이라 해서 평지마, 평촌이라고 불리었다. 국도에서 고천리로 가는 지방도로를 따라 들어와서 처음 맞이하는 곳이 이 마을이며 마을 중앙에는 고천에서 유일한 예배당이 있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지방도로를 경계로 하여 예배당이 있는 동쪽은 고천2리에 속하며 반대편인 서쪽은 고천1리에 속한다. 그러나 같은 평지마라는 동질의식이 있어서 마을에 행사가 있거나 특별한 일이 발생하면 양쪽 주민이 합세하여 행사에 참여하거나 일을 해결한다. 가구는 모두 30여 가구이다.
◇ 고천리고분군 1:평지마 뒷산에 있는 것으로 동북쪽으로 낮아지는 완만한 경사지를 따라서 산재되어 있다. 능선 윗부분은 직경 7m, 높이 140cm 이상의 봉토분 6기가 드러나 있으나 도 굴로 인하여 원형이 훼손되어 있다. 봉토분의 아랫부분은 경작으로 삭토되었으며 능선을 따라 군데군데 토기편과 할석이 노출되어 있다.
◇ 큰 못 골:평지마 마을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골짜기이다. 골짜기 주위에 작은 연못이 있어서 못골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 작은못골:큰못골 옆 골짜기이다. 큰못골과 사이에 연못이 있다.
▶ 독점·독굴·도구리(陶邱里)·새터
이 마을은 옹기를 제작하기 위해 만든 독굴이 있다고 하여 독점, 독굴, 도구리라고 하였다. 현재 임하댐 건설로 인하여 마을이 수몰되어서 여기에 살던 주민들이 평지마 윗쪽에 새터를 만들어 살고 있다. 수몰 전의 지명을 따서 독점이라고도 하며 또 새로운 터를 만들었다고 하여 새터라고도 한다. 가구수는 다릿골에서 이주한 주민들을 합하여 10여 가구이다.
▶ 어신골·어사(於仕)
이 마을은 마을의 지세가 선비를 많이 배출할 모습이라 하여 칭하였다고 하며 또 선비가 은신하던 곳이라는 설도 있는데 1700년 경 류선호(柳宣鎬)라는 선비가 은거하였다는 것이다. 이 마을은 고천1리 평지마에서 1km 남짓 떨어졌으며 고천2리에 속한다. 현재 마을의 가구수는 30여 가구이며 주민의 절반은 전주류씨이다.
◇ 당거리:어사 마을 앞 삼거리를 말하는 것으로 이 삼거리에 있는 작은 언덕에는 당집이 조성 되어 있다. 이 당으로 인하여 당거리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당집 주위에는 수령이 오래된 고목 들이 즐비하게 서 있다.
▶ 모시골·정곡
이 마을은 모시를 많이 생산하던 곳이라 하여 모시골이라는 명칭이 붙여졌으나 현재는 가꾸지 않고 있다. 또 모시골 마을 뒤쪽에 못을 조성하여 이때부터 못이 있다고 하여 모시골이라고 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모시골은 어사 마을에서 동쪽으로 1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모시골에는 모두 8가구가 살고 있다.
◇ 모시골못:모시골 뒤쪽의 계곡을 막아서 조성한 것으로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에 조성되었 다.
◇ 아 산 골:모시골에서 북서쪽에 있는 골이다. 옛날 골이 깊어서 호랑이가 출몰했는데 이곳에 서 아이가 호랑이에게 먹혀서 붙여진 명칭이라고 한다.
▶ 덜갱이·덕강(德江)
덕강은 고천리의 남쪽에 위치하는 마을로서 고천2리에 속한다. 옛날 신선이 현명하여 우물터를 정해주고 이 우물물을 먹으면 부락이 성하고 자손이 번창한다는 이야기에서 마을 이름이 연유되었다고 한다. 또 산이 높고 물이 맑아 인심이 온후하고 인덕(人德)을 갖춘 마을이라는 뜻도 있다. 특히 마을 어귀의 느티나무는 이 마을의 수호신으로 매년 음력 정월에 제사를 올리고 있다. 마을 가구수는 8가구이다.
◇ 덜갱이들:덕강 마을 뒷편에 위치한 넓고 평평한 들이다. 덕강 마을과 인접하다고 하여 덜갱이들이라고 한다.
▶ 다 릿 골
독점 동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부터 피난터로 유명한 곳이라 한다. 마을 한가운데 안심사(安心寺)라는 절이 위치하고 있는데 옛날 이 절을 세울 때 안씨(安氏)라는 분이 세워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현재는 임하댐 건설로 수몰되어 주민들은 이주하여 사람들은 살고 있지 않으나 땅은 일부분만 남아있다. 남아있는 터에 고분군이 있다.
◇ 고천리고분군 2:고분군은 동북쪽으로 낮아지는 능선을 따라 3기가 이어져 있다. 고분의 주위는 경작으로 훼손되어 있으며 민묘 주위에 분포되어 있다. 크기는 폭 420cm, 길 이 480cm, 높이 170cm이다. 고분은 도굴로 인하여 함몰되어 있으나 일부 노출된 할석으로 보아 소형 석곽분으로 추정된다.
마리
안동시내에서 청송방면의 국도를 따라 가면 망천교라는 다리가 나온다. 이 다리를 건너 좌측으로 난 도로를 따라가면 망천2리가 나온다. 마리는 망천2리에서 성진재라는 고개를 넘으면 나타난다. 안동댐 건설로 인하여 예전의 마을은 거의 대부분 수몰되어 사라지고 수몰지역에 살았던 주민들이 이주하여 마리의 여러 자연마을에 분산하여 살고 있다. 마리에는 현재 30가구에 71명의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 마리를 구성하고 있는 자연마을은 모두 5개이다. 마리는 원래 안동군 임북면의 지역이었으며 삼한시대에 마읍군(馬邑郡)이 있었다고 하여 마읍, 맛골, 마읍촌이라 하였다. 그 후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세천, 도수곡, 신기, 사곡을 병합하여 마동이 되었고 1934년에는 월곡면에 편입되었다. 그리고 1973년 안동댐 건설로 인하여 일부가 수몰되고 나머지는 일부는 1974년 월곡면이 폐지되자 임동면에 편입되어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 뱀실·사곡(巳谷)·못골
안동댐 건설로 수몰민 일부가 이곳에 정착하면서 마을을 조성하였다. 수몰되기 전에는 이곳에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았다고 한다. 마을 뒤쪽 계곡에는 30여 년 전에 조성한 작은 못이 있다. 이로 인하여 못골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나 주민들은 아직도 옛 이름인 뱀실로 더 많이 부른다. 뱀실이라는 명칭은 마을의 형상이 뱀처럼 길게 늘어졌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다. 마을의 가구수는 12가구이며 각성이다. 이 마을이 마리에서 가장 큰 마을에 해당된다.
◇ 터 골:뱀실 동쪽 산너머에 있는 골짜기이다. 옛날 사람들이 터를 잡아서 살았다고 하여 터골이란 명칭이 붙여졌다.
◇ 바 른 골:뱀실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골이 곧게 뻗었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이다.
▶ 절골·사곡(寺谷)
절골은 마리의 원마을인 뱀실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재 5가구가 살고 있다. 이 마을 역시 안동댐 건설로 인하여 이건한 주민들이 용덕사 주변에 자리를 잡아 생긴 것으로 사찰이 있다고 하여 절곡 또는 사곡이라는 명칭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마을에 있는 용덕사는 30여 년 전에 조성된 것이다.
◇ 용 방 우 재:마리와 중평리의 경계선으로 중평리 쪽에 용모양을 한 바위가 있다고 하여 붙여 진 명칭이다.
▶ 가느래·세천(細川)
가느래 마을은 뱀실에서 북쪽으로 5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마을 앞에 폭이 좁고 맑은 시냇물이 계속 흐른다고 하여 가느래, 세천이라고 한다. 또 가는 골짜기에 마을이 있다고 하여 그렇게 부르기도 한다. 옛날부터 사람이 거주하였던 곳이었으나 안동댐 건설로 수몰민 일부가 재정착하여 한 때는 20여 가구가 거주하였다. 그러나 현재는 5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 제궁실·제궁골(祭宮谷)
제궁실은 재령이씨 제궁이 있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며 안동댐 건설로 수몰민 일부가 정착하였다고 한다. 제궁은 수몰 후 밑에 있던 것을 이건하여 지은 것이다. 제궁골은 뱀실에서 서쪽으로 1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현재 살고 있는 가구는 4가구이다.
▶ 땅골·지곡(地谷)
땅골, 지곡이라는 명칭은 깊은 골짜기에 마을이 있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다. 이 마을 역시 마리에 있는 대부분의 자연마을과 같이 안동댐 건설로 수몰된 지역의 주민들 일부가 이곳에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의 위치는 망천리와 경계선인 성진재를 넘어와서 왼쪽에 난 길을 따라 작은 재를 넘으면 있다. 현재 이 마을에는 3가구 살고 있다.
◇ 성 진 재:마리와 망천2리의 경계되는 고개로 이곳에 성진도사가 거주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망천리
안동시내에서 청송방면의 국도를 따라 15km 정도 가면 오른쪽에 임하댐의 본댐으로 들어가는 길이 나온다. 여기부터 망천리로 접어드는데 여기서 조금 더 가면 망천교라는 다리가 나온다. 망천교를 건너서 바로 좌측 길로 접어들면 망천2리로 가는 길이 나온다. 그리고 망천교를 건너서 직진을 하면 다시 대평교라는 다리가 나오고 이 다리를 들어서기 전 좌측에 길이 있다. 이 길로 접어들면 망천1리가 나온다. 망천2리는 입구에서 도로를 따라 2km 정도 따라 들어가면 나타난다. 망천1리는 국도변을 따라 쭉 이어지는 지역부터 대평교 밑에서 들어간 마을까지이다. 현재 망천1·2리에는 63가구에 164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망천리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임당리와 통합하면서 망천동이라 하였고 1932년 임하현에 속하였다가 다시 임동면에 속하게 되었다. 망천리는 망지내라고 한다. 임하댐 건설로 인하여 원래의 마을은 수몰되고 현재의 위치로 이건되었으나 마을 명칭은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망천이란 명칭은 이 마을의 명칭일 뿐만 아니라 행정리의 명칭이기도 한다. 마을 명칭에 얽힌 전설이 있는데 고려말에 염흥방이란 자가 있었는데 그는 사병을 길러 그 세력이 막강하자 약탈을 일삼았다. 나라에서 관군을 보내어 마을 앞 반변천(半邊川)에서 토벌하니 그 사병들이 이곳에서 전멸되었다고 한다. 그 후 이곳을 망지내(亡地川)라 칭하였다. 그러나 그 후 지명에 망(亡)자가 있어 좋지 않다고 하여 망천으로 고쳤다.
▶ 빗골
망천과 임하면 천전리의 경계지역으로 2개리에 걸쳐 있다. 망천 쪽에 속한 지역에는 8가구가 살고 있다. 이 마을은 우곡(雨谷)이라 하기도 한다.
▶ 면우실
마을의 형국이 소가 누워 있는 형상이라고 하여 붙여진 명칭으로 빗골 너머 골짜기에 있다. 현재 8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 오잠(梧岑)
마을 주위에 오동나무가 많아서 거문고를 많이 생산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원래 이 마을은 임동면 박곡리에 속한 곳이었으나 임하댐 건설로 인하여 망천리로 편입되었다. 현재 12가구가 거주하고 있으며 대평교를 건너기 전 좌측의 길로 들어가면 마을이 있다.
▶ 숲댕이·숲당·임당(林塘)
망천교를 지나서 좌측에 난 길을 따라 2km 정도 가면 임당 마을이 나타난다. 이 마을은 마을 개척 당시 숲이 우거지고 연못이 있었다고 하여 임당, 숲당, 숲댕이라고 하였다. 이 마을에는 당집이 있는데, 옛날 하늘에서 쌍방울이 날아와 지금의 당집 자리에 앉아서 신기하게 여겨 이곳에 당집을 짓고 마을의 수호신으로 삼아 보호하고 있다고 한다. 마을에서는 말을 타고 이 당집 앞을 지나면 말발굽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는 향언이 전해지고 있다. 임당을 처음 개척한 성씨는 전주류씨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현재는 전주류씨, 진성이씨를 비롯하여 여러 성씨가 비슷한 분포를 보이면서 35가구 정도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 안에는 전주류씨의 재사(齋舍)가 있다.
◇ 안 마:임당 마을 안쪽에 있어서 붙여진 명칭으로 임당의 가장 큰 마을이다. 안마 앞에는 안골이라는 골짜기가 있다.
◇ 예시당골:안마에서 작은 개을을 건너 있는 마을이다. 현재 5가구가 살고 있다.
◇ 건 능 골:예시당골 뒤쪽 산에 있는 것으로 안마 건너편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 아 래 마:안마에서 북쪽으로 조금 들어간 마을이다. 아래쪽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현재 10여 가구가 살고 있다.
◇ 버 절:계곡이 넓게 펼쳐져 있어서 붙여진 명칭이다.
◇ 분 통 골:안마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전주류씨 문중의 산과 여러 묘소가 있는 곳이다. 전주류씨 수곡파는 매년 이곳에서 시사를 지낸다. 분통골에는 임당의 당집이 있다.
◇ 피락고지:바위가 많고 산밑에 동굴이 있다. 이 동굴은 난리가 나면 피난처가 되어서 피락고지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 모개나무골:임당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모과나무가 많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사월리
사월리는 임하면 소재지가 있는 중평리의 뒤쪽에 난 도로를 따라 4km 정도 가서 금당이재라는 높은 재를 넘으면 나타난다. 원래 안동군 임북면의 지역으로서 마을 지형이 달과 같이 생기고 강에 모래가 많았어 사월, 사드레, 사들, 사월천, 사평 등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부여동, 미질리 일부를 통합하여 사월동(리)이 되었다. 그 후 1934년 동후면과 통합하면서 동후면의 소재지인 도곡과 사월을 합쳐 월곡면이 되었다가 1974년 월곡면이 없어지면서 임동면으로 편입되었다. 현재 사월리에는 87가구에 199명의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
▶ 새마을·새마·신촌(新村), 원사골
이 마을은 1973년 안동댐 건설로 인해 새로 생긴 마을이다. 사드레, 사월(沙月)이 수몰되자, 옛날 성황당이 있었다는 서낭댕이골 기슭에 새마을을 개척하였다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 주민들은 원사골이라는 명칭을 많이 사용한다고 한다. 중평리에서 6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데 사월리의 북쪽에 위치한다.
◇ 서 낭 댕 이:수몰되기 전 사드레 마을에 있는 산이다. 이 산의 골짜기에 성황당이 있어서 붙여진 명칭이다. 현재 성황당은 없다.
◇ 장기메깃골:원사골에서 서쪽으로 1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지형이 장구의 목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 사 두 골:장기메깃골과 인접한 곳에 있으며 골짜기의 지형이 뱀머리와 유사하다고 하여 붙 여진 명칭이다.
▶ 베티·성현(星峴)
베티는 사월리의 끝에 있는 마을로 원사골에서 북쪽으로 2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이 마을에는 미내산(味 山)이라는 산이 있다. 이 산에는 옛날 절과 미륵부처가 있었는데 손님이 찾아오면 절의 스님이 손님 수만큼 주문을 외우면 국수가 나왔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 후 절과 미륵불이 없어지고 국수가 나오는 영험이 없어지자 사람들은 성현이 변했다고 해서 별티라고 불렀다가 음이 변하여 벼티로, 또 베티로 되었다고 한다. 베티는 윗베티와 아래베티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아래베티는 수몰되어 이전한 주민들이 형성한 마을이며 윗베티는 원래 있었던 마을이라고 한다.
◇ 미 내 산:이명산, 미명산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에 제궁이 있어서 붙여진 명칭이다.
◇ 잔 눈:철석지라고도 하는데 양지 쪽이여서 눈이 적게 오고 눈이 와도 쌓이지 않았다고 하 여 붙여진 명칭이다. 윗베티의 골짜기에서 1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현재 1가구가 살고 있다고 한다.
◇ 도 골 령:이명산에 있는 것으로 이곳이 명당인데 묘가 거꾸로 돌려져 있다고 하여 붙여진 명 칭이다.
◇ 미륵산골:미럭산골이라고 하는데 이곳에 미륵부처가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이명산 줄기로 윗베티와 잔눈 사이에 있다.
◇ 명 당 재:명당이 있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으로 잔눈에서 위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 중벵이·중방(中防)
이 마을은 원사골의 남동쪽에 있으며 금댕이 마을의 동쪽에 인접하고 있다. 중평리에서 넘어오다 5km 정도에서 우측으로 난 소도로를 따라 가면 마을이 나타난다. 마을의 입구는 협소하나 들어가면 넓은 터가 나오는데 이것이 넓은 중간방과 같다고 하여 중방, 중뱅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다고 한다.
▶ 금댕이·금당(錦塘)
이 마을은 사월리의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중평리에서 금당이재를 넘어 오면 처음 나타나는 사월리의 자연마을이다. 이 마을은 처음에 마을이 발전하지 않고 줄어든다고 하여 오그랭이라고 불리었으나, 마을 안에 아름다운 못이 있고, 또 발전하라는 뜻으로 금당이라고 했다.
◇ 금댕이재:중평리에서 사월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금댕이 마을에 속한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 낙숫골(落水谷)·낙싯골
이 마을은 사월리의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금당이재에서 시작된 작은 시냇물이 마을 앞을 흐르는데, 이 계곡 중간에 있는 용추폭포의 낙수 광경이 아름답다 하여 낙숫골, 낙싯골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다고 한다.
◇ 용추메기:용추폭포가 있는 골짜기로 현재 도로가 생겨서 폭포는 형상만 남아있다.
▶ 보매골·보마골(步馬谷)
이 마을에 안동댐 건설 직후 사람이 살았으나 마을이나 현재는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다. 마을로 통하는 길이 없어 배로 드나들어야 한다. 그러나 예전에는 예안으로 통하는 소로 옆에 위치한 마을로 재가 높아서 말을 쉬게 하기 위해 말에서 내려 걸어서 재를 넘었다는 이야기에서 전해오고 있다. 이런 연유로 보매골, 보마골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다고 한다.
위리
위리는 임동면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예안면과 접하고 있는 지역이다. 위리는 원래 임하현에 속하였으며 마을이 위쪽에 있다고 하여 윗골, 위곡, 위동촌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위리 앞에 흐르는 작은 하천이 있는데 현재의 대곡천이다. 대곡천이라 하기 전에는 위천(渭川), 위수(渭水)라고 하였는데 수원이 풍부한 위수가 흐르는 마을이라서 그렇게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도 있다. 고종 32년(1895) 지방관제 개혁에 의하여 임하현에서 안동군 임동면으로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신기를 병합하여 위동이라고 하면서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현재 위리는 임하댐 건설로 인하여 수몰된 지역에서 이주한 주민들이 새로 형성한 1리와 기존의 자연마을로 구성된 2리로 나뉘어져 있다. 위1·2리에는 91가구 232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 윗골·위동(渭洞)·상산마을
상산마을은 위1리에 속한 마을로 임하댐 건설로 인하여 수몰된 윗골 주민들이 이전하여 형성한 새로운 마을이다. 현재의 마을 위치는 수몰 전 윗골이 있었던 자리의 뒷산에 터를 잡은 것이다. 수몰되기 전의 윗골은 위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위리의 본동(本洞)이었다. 위리란 행정명칭도 이 마을의 이름에서 따 온 것이며 상산마을은 윗골과 인접한 상산골이라는 곳에 터를 잡았어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 마을은 상산마을이라는 명칭과 함께 예전의 명칭인 윗골이나 위동을 함께 사용한다고 한다. 상산마을은 위마와 아래마로 분리되어 있으며 이것은 수몰되기 전 윗골에 있을 때도 분리된 것 그대로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옛날에는 아랫마와 윗마가 서로 나누어 정월 보름날에 햇불싸움을 하여 액운을 떨쳐버리기도 하였다고 하나 지금은 전하지 않고 있다.
◇ 큰봉재:주위의 산봉우리 중에서 제일 큰 봉우리라고 하여 붙여진 것으로 상산마을의 서쪽에 있다.
◇ 천변들:상산마을 앞쪽에 넓게 펼쳐진 들이다. 들이 넓게 펼쳐져 있고 물이 좋아서 붙여진 명 칭이다.
◇ 대곡천(大谷川):대곡리로부터 물줄기가 시작하여 위리까지 흘러내리는 하천으로 옛날에는 위 수(渭水) 또는 위천(渭川)이라고 불렀다. 이 하천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오는데 옛날 이 마을에 권씨 성을 가진 부자가 있었다. 손님의 방문이 잦아 고민하던 중 지나가는 대사(大師)에게 많은 시주를 한 후 다시는 손님이 찾아 올 수 없는 비방을 묻자 골짜기에서 권부자 집으로 흐르는 물 길을 산 아래로 돌리면 된다는 말을 듣고 즉시 물길을 돌려 버렸다. 그 후 얼마되지 않아 권부 자는 망하게 되어 버렸다 것이다.
▶ 새터·신기(新基)
새터는 위2리에 속한 마을로 윗골에서 살던 주민들이 이곳으로 이주하여 새로 개척한 마을이라는 뜻으로 새터, 신기라고 하였다. 이 마을은 모두 3개의 작은 마을로 구성되었다. 대곡천을 경계로 하여 서쪽에 있는 마을을 양지마, 동쪽에 있는 마을을 음지마라 하였으며 2리로 들어오는 입구의 소나무가 많이 있는 곳을 솔밭이라고 한다. 양지마는 명칭 그대로 햇볕이 많이 드는 지역에 있어서 붙인 것이고 음지마는 뒤에 있는 산에 막혀 햇볕이 늦게 들어서 붙인 것이다. 그리고 솔밭이라는 마을이 형성된 것은 임하댐 건설 후이며 거주하고 있는 가구도 3가구이다. 솔밭이라는 명칭은 마을에 소나무 숲이 있어서 붙인 것인데 이 숲은 마을입구에 소나무를 심으면 마을이 번성하고 좋다고 하여 조성하였다고 한다.
◇ 여우네:새터에서 서북쪽으로 2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예전에는 5가구 정도가 살았는데 현재는 거주하는 가구가 없다. 이곳에 여우가 많이 살았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 구룡재:새터와 예안면 구룡리의 경계가 되는 고개이다. 고개가 깊고 구비가 많아서 구룡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 연삭제들:새터에서 서쪽으로 1km 정도 떨어진 산등성이에 있는 들이다. 이곳 지형이 연을 날리는 형국이라 해서 붙여진 명칭이다.
지리
지리는 원래 임하현의 지역이었다. 그러나 고종 32년에 임남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상지동, 하지동, 검단리 일부 지역을 통합하여 지동이라 하고 길안면에 속하였다. 그 후 1974년에 다시 임동면에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지리의 자연마을은 현재 2개 마을만 남아있는데 원래는 갓골, 새밤, 밀미, 갈바들, 논실 등 모두 5개이었다. 그러나 임하댐 건설로 인하여 3개 마을은 없어지고 갓골과 새밤만 남아있다. 현재 지리에는 46가구에 97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지리는 임동면의 동쪽에 위치하며 청송군과 접경지역으로 마을에 있는 다리를 건너면 청송지역이다.
▶ 갓골·가지골·지동(枝洞)·원지(元枝)
반변천이 두 곳에서 합류하여 가지처럼 보이는 지형 때문에 가지골로 불렀다. 또 산의 형세가 갓 모양과 같이 생겼다 하여 갓골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옛날 오승(吳昇)이라는 장수가 이 마을을 개척할 당시 인근에서 제일 큰 나무가지가 있다고 하여 원지라고도 불렀다. 또 지동의 본동이라는 뜻이라고 하여 원지라고도 한다는 설도 있다.
◇ 갓골재:고천리에서 지리로 들어오는 길목으로 갓골의 입구에 있다.
◇ 움실골:갓골재 밑에 있는 것이다. 이곳에 작은 샘터가 있어서 물이 좋다고 하며 지형이 움푹 들어간 형태여서 붙여진 명칭이다.
◇ 운천신도비(雲川神道碑):갓골에서 새밤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이 비석은 선조 때 문신인 운 천(雲川) 김용(金涌) 선생의 신도비로서 고종 29년(1892)에 세워졌다. 비석의 총높이는 180cm이며 가로 72cm, 세로 114cm인 좌대 위에 오석의 비신(碑身)을 세웠 으며 이수의 높이는 64cm이고 재질은 화강석이다. 비문은 권연하(權璉夏) 선생이 짓고 김한락 선생이 썼다.
◇ 운천재사(雲川齋舍):운천신도비 뒤쪽에 있는 것으로 운천 선생과 선생의 부인인 이씨의 묘소 를 관리하기 위하여 인조 17년(1639)에 건립되었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4칸, 측면 5칸이다. □자형 팔작지붕과 박공집의 전형적인 재사 형태의 건물 양식으로 매우 검소한 느낌을 지니고 있다.
▶ 새밤·조야(鳥夜)·신야(新夜)
마을 뒷산에 밤마다 새들이 놀다가 간다고 하여 새밤, 조야로 불렀다가 신작로가 만들어지자 나무가 없어지고 새들이 오지 않는다고 하여 새밤(新夜)으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현재 18가구가 살고 있다.
◇ 지촌교:새밤 끝에 있는 다리로 이것을 건너면 청송이다. 다리 이름은 마을 명칭에서 따 온 것 이다.
◇ 딱박골:밀미에 속한 것이었는데 밀미가 수몰되고 꼭대기 부분만 남아있다. 이 골짜기에 닥나무가 많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자료출처:안동시청 홈페이지>
첫댓글 임동면향우회 역대 회장/총무 명단 올려주시고, 소개글 검토 바랍니다,
지기님 임동향우회 신임 총무로![~](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8.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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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기룡님이 추대 되었습니다.
정정 부탁 드립니다
@김은희(임동) 류기룡 신임총무 전화번호도 알려주세요
(향우회 산하에 재경 안동산우회가 9년전 발족되어..... ) 이 부분은![^0^](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50.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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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3.gif)
재경 임동산우회로 정정 부탁 드립니다
그리고 지기님
여기에다 직접 사진을 올릴순 없구요
위에 향우회 가입하신 회원님들 얼굴 코너 사진을
쓰시면 안될까요
아니면 제가 다시 사진을 찾아서
메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다음주일날 임동면 납회 산행이 있으니
역대 회장님들 명단도 알아보고 이후
곧 보내 드리겠습니다.
많은 작업 하시느라 수고 하셨습니다
검토 감사합니다, 임동면 관련 upgrade가 있으면 연락 주십시요,
고,이상철 장군은 현 임동 향우회장 이상석 박사님과
가까운 집안간이며 수몰전 마령3동에 살았습니다.
저희 외갓집안 경주이씨 대소가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죠.
그리고 초대 재경임동 발기인중 한분이신 저강은 알고있다 작사가
복합 예술인 고,류동일씨도
우리카페 소국 류지영 회원의 부친이시기도 합니다.
현 대구 국회의원인 고천 양짓마 출신 류성걸의원,
박실 출신 류안진 교수(시인)등 기타 많은 인재를 배출해 냈지요~~~
모처럼 오늘은 마음 먹고 자료 자세히 들따봅니다.
이 많은 방대한 자료 찾아 정리 하시느라 지기님
욕 보셨습니다. 더불어 감사 드립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잘 계시지요? 수정 하였습니다,
이원갑,김은희운영자,지기님들 늘~수고많습니다.
임동 세거지 소개란에 마령리중 용점과 송곡(일명 송골)이 빠져있네요.
이상철 장군님과 이원섭검사(현 변호사)도 송골 출신이지요.
류기룡 총무님 폰 번호는
010~3630~6066 입니다.
`
지기님 임동 소개에
마령3동에 용점과 송골이 빠졌다고
지적을 받았습니다.
올리신 지기님이 수정가능하기에 부탁드립니다
죄송하지만 시간될때
수정 부탁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