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네모네
“저 이제 그만 퇴근해보겠습니다. 과장님도 주말 잘 보내시고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집에 도착하기 전에는 골목을 하나 꼭 지나야 합니다. 한 달 전에 그 골목 귀퉁이에 꽃집이 하나 생겼습니다. 지나가면서 보니 꽃집 테라스에 아침에 없던 빨간 꽃 화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저건 분명히 아네모네입니다. 다른 꽃은 몰라도 아네모네는 기억할 수 있습니다. 화분에 끼워진 팻말이 눈에 들어옵니다.
‘꽃말 : 제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웠어요. 나는 당신을 영원히 사랑할 거예요.’
문득 어렸을 때가 떠오릅니다.
“철컥. 끼이이이익… 철컥.”
문 여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엄마가 왔나봅니다. 너무 졸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누워서 엄마를 찾았습니다.
“엄마…….”
“쉿! 코 자자.”
어깨 위로 푹신하고 따뜻한 이불이 절로 올라옵니다. 아, 매일 저녁 일을 나갈 때 엄마가 뿌리고 가는 독한 향수 냄새가 코끝에 맴돕니다. 엄마가 와서 이불을 덮어주신 것이겠지요. 엄마가 왔으니 이제는 이불 속에서 혼자 자지 않아도 됩니다. 엄마가 씻고 나올 때 까지 기다리려 했는데 저도 모르게 잠이 들었나 봅니다. 다시 눈을 뜨니 저기 화장대 앞에 앉아서 묶었던 머리를 푸는 엄마가 보입니다. 이래서 우리 집이 좋습니다. 방이 하나라서 고개만 돌리면 엄마가 어디에 있던지 바로 보이니까요. 엄마가 빨리 와서 같이 이불 속에 눕고 말랑한 품속에 안겨 잠이 들고 싶습니다. 그런데 엄마는 슬픈 눈으로 화장대에 놓인 액자만 바라봅니다.
“엄마……. 안자?”
엄마는 이불 속에 들어오지는 않고 조용히 옆에 와서 머리칼을 쓸어줍니다. 쓰다듬는 손길에 스르륵 잠이 들었습니다.
“준형아, 밥 먹자.”
얼마나 잠을 잔걸까요. 문을 열면 땅바닥이 바로 보이는 하나밖에 없는 우리 집 창문 너머로 자전거 소리가 들립니다. 아! 오늘은 옆집 수현이가 새로 산 자전거를 탄다고 한 날인데!
“엄마! 나 자전거! 가야돼!”
“알아. 그전에 밥 먹고 나가야지.”
엄마가 가져다 준 상에 앉아 숟가락으로 밥을 허겁지겁 뜨기 시작했습니다. 엄마는 화장대 위의 액자를 상 위에 가져다 놓습니다. 엄마가 밥 먹기 전에 꼭 하는 일입니다. 액자에는 더 어리고 더 예쁜 엄마가 서 있습니다. 그리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빠가 서 있습니다. 아빠는 짱구눈썹입니다. 엄마는 눈이랑 코가 나랑 닮았다고 하는데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 엄마랑 아빠 뒤에는 빨간 꽃이 가득합니다. 전에 물었는데 수목원에 놀러 갔다가 찍은 사진이라고 합니다. 거기서 집에 갈 때 아빠가 그 빨간 꽃이 담긴 화분을 선물해줬다고 합니다. 빨간 꽃 이름은……. 분명히 생각이 안 납니다.
“엄마. 이거 꽃 무슨 꽃이라 했지?”
“아네모네.”
아! 지금 이럴 때가 아닌데. 빨리 나가봐야 합니다. 밥을 다 먹고 현관문으로 뛰쳐나갔습니다.
“엄마! 나 오늘 놀다 올 거야! 늦을 거야!”
“엄마 오늘 일찍 나가야하는데 열쇠 가지고 가! 이따가 집 혼자 잘 지킬 수 있지?”
“응! 나, 간다!” 현관문을 나서고 계단을 올라가면서 소리쳤습니다.
수현이를 한참 찾아다니는데 아파트 단지 공원에 수현이가 보입니다. 자전거를 타는 모습이 정말 멋집니다. 저 반짝이는 바퀴를 굴리며 타면 어떤 느낌일까요? 공원 벤치에 앉아 반짝이는 눈으로 수현이와 다른 친구들이 자전거 타는 모습만 바라보았습니다. 잠시 후 수현이와 친구들이 자전거를 멈추고 내려서 물을 마십니다. 다가가서 말을 걸었습니다.
“수현아! 나도 자전거 타보자!”
“싫어!”
“에이, 한 번만!”
수현이의 자전거 손잡이에 손을 슥 뻗었습니다.
“아, 저리 가라고!”
“아!”
수현이가 밀치는 바람에 뒤로 넘어졌습니다. 손바닥에 생채기가 나서 피가 찔끔 보입니다. 도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엄마한테 다 이를 거야!”
“일러봐라! 어차피 너네 엄마 우리 아빠한테 못 이겨! 넌 아빠 없지?”
“나도 아빠 있어!”
“거짓말하지 마! 우리 엄마가 너 아빠 없다고 했어!”
“아니야! 너네 엄마가 거짓말한 거야! 나 아빠 사진 봤어!”
“이게, 아빠도 없는 게!”
수현이의 손에 밀려 한번 더 넘어졌습니다.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옵니다. 수현이는 친구들과 같이 자전거를 타고 가버립니다. 그냥 빨리 집으로 가고 싶습니다. 집골목으로 들어갔는데 우리 집 창문 앞에 윗집, 앞집 아주머니가 서 있습니다.
“어머, 준형이니? 어디 갔다 오니?” 윗집 아주머니입니다.
“네. 놀다가 집에 가요.”
“그래, 어머니는 집에 계시고?”
“몰라요. 오늘 일찍 나간다 했어요.”
“그래. 집에 가서 문 잘 잠그고 있어야 한다.”
“네.”
계단을 내려갑니다. 엄마가 집에 있을 줄 알았는데 현관문이 잠겨있고 쪽지가 하나 붙어 있습니다. 쪽지에 쓰인 글자를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짚어가며 읽습니다.
“...엄마가 장 보고... 밥 해...놨으니까 저...녁에 밥...꼭 먹으...렴.”
장을 보러 갔나 봅니다.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바닥에 엎드려 팔에 얼굴을 파묻었습니다. 어디선가 속삭이는 듯한 소리가 들려옵니다. 창문 너머로 아주머니들이 수다를 떠나 봅니다. 모깃소리만큼 작아서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내 이사 올 때부터 이쁘장한 젊은 애 엄마가 애 하나 딸랑 데려 왔길래 촉이 딱 왔지. 전에는 새벽에 잠깐 밖에 나갔는데 술 냄새가 진동을 해서 오더라니까?”
“에휴. 그래도 죽은 남편 애라고 끝까지 키우긴 하네. 애가 벌써 초등학교 갈 나이인데 하고 다니는 것 보면 옷도 꼬질꼬질 하구. 재혼 같은 건 안하나몰라?”
“그러니까 말이야. 나 같으면 벌써 재혼하고도 남았지. 혼자 애 키우는데 뭐 제대로 되겠어? 돈 벌러 나가면 애 봐줄 사람이 문제지, 애 봐주려면 돈이 문제지. 쯧쯧…….”
엄마는 언제 올까요? 엄마가 보고 싶습니다. 아빠도 보고 싶습니다. 화장대로 기어가 액자를 들었습니다. 백 밤 자면 온다고 한 아빠는 어디에 있는지 기다려도 오지 않습니다. 액자 속의 엄마는 행복해 보입니다. 엄마의 하얀 피부에 빨간 아네모네가 더 빨갛게 보입니다. 아빠가 집에 올 때에는 엄마가 좋아하는 아네모네랑 내가 갖고 싶은 자전거를 사가지고 오면 좋겠습니다.
<수정사항>
1. 저녁시간대로 보이는 단어들을 그렇게 보이지 않게 수정했습니다.
2. 사건을 조금 더 극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수현이와 내가 싸우는 장면을 추가했습니다.
3. 회상에 들어가기 전, 문체가 달라 이질적으로 보였던 도입부의 문체를 회상 문체와 같게 수정했습니다.
4. 마무리에 아네모네를 한 번 더 언급했습니다.
5. 디테일한 부분들을 구체적으로 수정했습니다.(자전거를 수현이만 탔는지, 수현이와 친구들 모두 탔는지. 쪽지를 읽은 건지, 쪽지에 쓰인 부분을 적어준 건지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