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양왕릉 |
삼척시에서 동해바다를 바라보며 구 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왼편에 근래에 세운 것으로 보이는 ‘공양왕릉 입구’ 라는 큰 표지판이 서 있고 그 길을 따라 궁촌해수욕장 쪽으로 들어가면 궁말(宮村)뒤의 얕으막 한 산 양지 바른 곳에 비석도 없이 봉분만 덩그렇게 큰 세 기의 묘가 있다.
지방행정당국에서 공양왕릉(恭讓王陵)이라고 한다는 전설을 기록해 세운 표지판이 있을 뿐 왕릉이라고 할만한 비석은 고사하고 석물 하나 서 있지 않다. 주변에 간녀린 나무들만 듬성듬성하여 초라하기 짝이 없는 묘역에 보통보다 월등히 큰 무덤이 있어서 그저 예사롭지 않게 느껴질 뿐이다.
제일 큰 앞의 무덤이 공양왕 3부자의 무덤이고 그 옆으로 약간 뒤에 있는 것이 비빈(妃嬪)의 무덤이요 왼편 가에 좀 작은 무덤은 시녀 또는 말의 무덤이라고 전한다.
그러나 공양왕의 무덤이 정확히 어딘지 확실한 기록이 없고, 그의 죽음에는 두 가지 설이 있어서 그를 뒷받침이라도 하는 듯 경기 고양의 원당에 문화재관리국에서 공인하는 고릉(高陵)이 있고, 이곳 삼척에 이 고장 분들이 철석 같이 믿고 주장하는 또 하나의 능이 있는 것이다.
고려 제34대 왕이며 마지막 왕인 공양왕(1389-1392, 3년간 재위)은 21대 희종의 6대손이었는데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한 후 우왕과 창왕을 차레로 폐위 시키고 본인의 의사와 관계 없이 옹립 추대하여 왕위에 오른 임금이다. 그러나 얼마 안가서 덕이 없고 정사에 어둡다는 이유로 다시 이성계 일파에게 추방되고 만다. 그래서 원주로, 간성으로, 다시 이곳 삼척으로 옮기었다가 이곳에서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 그 설의 하나로서 그가 머물렀던 곳이 궁말(宮村里)이고 그의 무덤이 있는 고개가 왕이 살해된 곳이라는 “살해재” 이여서 지금도 그 이름이 그대로 불리고 있다. 또 하나의 설은 공양왕이 개성에서 탈출하여 고양의 고릉 앞에 있는 연못에 왕비와 함께 빠져 죽었다는 것인데 그곳에도 왕이 숨어 지냈다는 다락 골, 누워 잤다는 대궐고개, 왕릉이 자리 잡았대서 왕릉골이라는 마을이름 들이 지금도 전하고 있다.
어느 것이 진위인지 가릴 길 없고, 다만 문화재관리국에서 세종실록의 “안성군 청룡에 봉안했던 공양왕의 초상을 고양군의 무덤 곁에 있는 암자로 옮기라고 명했다” 는 구절에 근거하여 고양에 있는 고릉을 공양왕릉으로 공식 인정하고 사적 제191호로 지정했다.
한편, 공양왕이 삼척에서 죽어 묻혔다가 태종 때의 복위를 전후하여 고양으로 이전된 뒤 봉분을 그대로 남겨 둔 것이라는 설과, 공양왕을 죽인 관리들이 사형시킨 증거로 목을 잘라다가 위에 보인 후 고양에 묻고 몸은 그대로 이곳에 남겨 둔 것이라는 설이 있어서 죽임을 당한 장소만은 삼척이라고 하는 것이 통설로 되고 있는 모양이다. 나라 잃은 왕의 사후 모습이 이런가 하면 나라를 세운 왕은 그 조상까지도 후한 대접을 받고 있어서 대조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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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 그래서 릉이 두곳에 잇다는 말이네요. 그럴듯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