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세 문혜공 휘 강(康) ▣
문혜공(文惠公)의 휘(諱)는 강(康)이시고, 초휘(初諱)는 경(璟)이고, 字는 자안(子安)이시다. 고려 시대 고종 15년(1228년)에 태어나시었고, 고종 30년에 16세 소년으로 국자감시(國子監試)에 장원으로 발탁되고 곧이어 문과에 등제(登第)하셨다.
관직에 오르신 후에 거듭 승진하시어, 광정대부도첨의중찬수문전태학사감수국사판전리사사세자사(匡靖大夫都僉議中贊修文殿太學士監修國史判典理司事世子師)를 역임하셨다.
일찍이 금주(현 김해) 군수로 부임하셨을 때, 그곳은 전부터 부과된 세액을 충당하지 못하여 군수가 파면당한 예가 많은 곳이었다. 그런데 부군(府君)께서는 군용지(軍用地)로 두었다가 버린 토지를 이용하여 2천여 석의 곡물을 수확했다. 그리하여 백성들에게 세금을 더 부과하지 않고서도 세액을 충당하고도 여유가 있었다. 그리하여 백성들도 안정을 찾고 잘 살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선정의 공적으로 예부시랑(禮部侍郎)으로 발탁되었다가 공부시랑(工部侍郞)을 역임하고 삼사판사(三司判事)로 전임되었으며, 충렬왕이 국사를 논하는 기관으로 재추소(宰樞所)를 설치하고, 공에게 그 실무를 주관하도록 하셨다. 그 후 첨의시랑 찬성사로, 또다시 중찬으로 승진하시고 연로하시어 사임했다.
부군(府君)께서는 충렬왕 29년(1303년)에 76세로 돌아가셨으며, 시호(諡號)는 문혜(文惠)이시다. 공은 천성이 인자하시어 재상으로 계실 때에도 온유하시며 겸손하셨으며, 근검한 생활을 하셨다. 유학의 교풍을 바탕으로 충렬왕을 보필하여 많은 공훈을 세우셨다.
부군(府君)의 묘소는 전남 영광군 묘량면 덕흥리 산 80-1번지 노인봉 아래에 있다. 부군(府君) 묘소 역시 보존되지 못했었는데, 옛날부터 이곳에는 한시랑묘(韓侍郞墓)라고 구전되는 큰 무덤이 있었다. 예빈경 부군(禮賓卿府君) 묘소와 불과 이십 리 거리에 있으며, 묘소 아래에는 한시랑제(韓侍郞堤)라고 부르는 제당(堤塘)도 있다. 법성포 남방에 유허(遺墟)가 있는데, 지금도 그 고을 이름을 한시랑동(韓侍郞洞)이라 부른다. 부군께서 일찍이 공부시랑(工部侍郞)을 역임하신 바 있는데, 우리 한씨 문중(韓氏門中)에는 시랑(侍郞)을 역임하신 다른 분은 안 계신다. 따라서 한시랑묘(韓侍郞墓)라 구전되는 큰 무덤이 바로 문혜공의 묘소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누군가에 의해서 비문(碑文)도 부서졌고, 지석(誌石)도 파헤쳐져 찾을 수 없는 상황에서 무조건 부군의 묘소로 단정 지을 수는 없는 일이어서 분명한 신표(信標)를 찾으려 많이 노력했다. 그곳에 묘를 쓴 서시원(徐始遠) 등을 문초하여 묘소 부근에서 발견된 비석 조각에서 ‘韓’자만을 찾았을 뿐 정확한 신표를 찾지 못했다.
그 후 순조 22년(1822년)에 후손(後孫)인 영광군수(靈光郡守) 한기유(韓耆裕)와 무안군수 한익상(韓益相) 그리고 한경철(韓慶喆)이 그 동리에 가서 극력(極力) 탐색하여 정확한 신표를 찾았다. 그리하여 위토(位土)와 제실(祭室)을 마련하였고, 1828년에 법성 첨사(僉使) 한도유(韓道裕)와 전라수사(全羅水使) 한응호(韓應浩)가 표석(表石)을 건립하였고, 1946년에 모원제(慕遠齊)를 중건하고, 매년 3월 1일에 제사를 모신다.
후손으로 3남 3녀를 두셨는데, 제학공 휘 사기(謝奇), 전교령 휘 사보(謝譜), 직사관 휘 사수(謝壽)가 아드님들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