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민간인이 기록한 이순신·원균 이야기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22.09.05ㅣ주간경향 1493호
선비 오희문의 <쇄미록>은 임진왜란 전후로 1591년
선비 오희문이 쓴 임진왜란 피란일기 <쇄미록>이 전하는 한산대첩 승전기록. 국립진주박물관 제공
임진왜란을 기록한 공식 사료는 당연히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이겠죠.
우리 조상들은 그 어떤 이들보다 기록에 진심이었습니다. 진중일기인 이순신(1545~1598)의 <난중일기>, 관리로서 임진왜란을 치른 유성룡(1542~1607)의 <징비록>이 대표적이죠. 그런데 민간인의 신분에서 전쟁 상황을 기록한 일기가 있습니다.
바로 선비 오희문(1539~1613)의 <쇄미록>(7책)입니다. 오희문이 임진왜란 전후로 1591년 11월 27일부터 1601년 2월 27일까지 9년 3개월(3368일)간 쓴 피란일기입니다.
자잘하고 보잘것없는 이의 피란일기
오희문은 임진왜란 5개월 전인 1591년 11월 27일 서울을 떠나 남행길에 올랐는데요. 남쪽에 사는 노비들에게서 신공(身貢·노비가 주인집에 노동력을 대주는 것 대신 내야 했던 현물)을 거둬들이고, 외가(충청 영동)와 처남(전라 장수), 매부·누이(전라 영암) 등을 만나보고자 했습니다.
여행 도중 임진왜란이 일어나 가족과 생이별을 해야만 했죠. 이후 장수~홍주~임천(부여)~평강(아들의 부임지) 등지를 떠돌다가 1601년 2월 26일 서울로 돌아옵니다. ‘쇄미(?尾)’는 “자잘하고 보잘것없이 떠도는 사람이로구나!(?兮尾兮 流離之子)”라고 한 <시경> ‘패풍·모구’에서 따왔습니다. ‘피란일기’라는 뜻이죠.
<쇄미록>은 작자의 피란 생활은 물론이고, 전쟁 중 고통받은 민중의 삶을 생생한 필치로 그려냈습니다. 전쟁과 맞닥뜨린 다양한 인간 군상의 모습도 알게 됩니다. 무엇보다 당대 백성들 사이에 흘렀던 밑바닥 여론의 동향을 살필 수 있답니다.
<쇄미록>이 평가한 원균
요즘 영화(<한산: 용의 출현>)에서 재조명된 한산대첩을 <쇄미록>은 어떻게 다뤘을까요.
“우수사는 이달 초(7월 8일) 전라 좌·우 수군과 함께 나가서 적선 80척을 나포해 700여명의 수급(머리)을 베었다. 초 10일에도 또 적선을 만나 80여척을 사로잡았다….”(1592년 7월 26일)
한산대첩 하면 이순신 장군의 업적으로 알고 있지만 <쇄미록>의 기사는 약간 다른 뉘앙스를 풍깁니다.
전투를 주도한 것 같은 ‘우수사’는 바로 경상우수사인 원균(1540~1597)을 가리킵니다. 원균의 주도 아래 전장에 나서 대승을 도운 것으로 묘사된 전라 좌·우 수군의 지휘관은 바로 이순신(전라좌수사)과 이억기(1561~1597·전라우수사)입니다.
한산대첩 이전에도 <쇄미록>에는 원균 관련 기사가 제법 보입니다.
“들으니 경상우수사 원균이 지난달에 적선 10여척을 불태웠고….”(1592년 4월)
“수군절도사 원균이 또 적선 24척을 불사르고 적병 7명의 수급을 베었다는 소식을… 만나니 근심이 풀렸다.”(1592년 5월 30일)
‘~들으니’로 시작되고, ‘원균의 승전보에 근심이 풀렸다’는 내용은 당대 민간의 여론을 가감 없이 전했다 할 수 있습니다.
오희문은 또 1597년(선조 30) 4월 5일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이 왜선 2척을 포획하고 왜적 65명의 수급을 베었다”면서 ‘참으로 기쁜 소식’을 일기에 적었습니다. 또 그해 7월 29일 원균의 칠천량 전투 대패를 전하면서 “흉적(왜군)이 불의에 야습해 함락됐으며, 통제사 원균 등이 모두 죽임을 당했다”면서 “매우 놀랍고 한탄스럽다”고 했습니다.
“이순신이 죽었으니 바다는 누가 지키겠는가”
이순신은 어떨까요. <쇄미록>은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적선 42척을 불태웠다”는 옥포해전(1592년 5월 7일)과 경상우수사 원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 등과 함께 대승을 거둔 한산대첩(7월 8일)의 전과를 소개한 뒤 “10일에도 적선 80여척 등을 나포했다”고 기록했습니다. 또 1598년(선조 31) 12월 3일자에서 왜군의 철병 소식을 전하면서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이 탄환을 맞아 죽었다고 한다”면서 “나라의 불행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느냐”고 슬퍼했습니다.
“전사한 이순신은 난리 초부터 전라도의 보루가 됐는데 지금 왜적의 탄환에 죽었으니 애석하다. 지금 조정에서 전쟁이 끝났다며 호들갑 떨고 있다. 그러나 이순신이 죽었으니 누가 조선의 바다를 지키겠는가.”(12월 16일자)
오희문이 이순신에게도, 원균에게도 어떤 선입견을 품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쇄미록> 1595년(선조 28) 6월 20일자에 심상찮은 내용을 전합니다.
“충청도 병마절도사 원균은 난리 초기에 경상우수사로서 많은 공로를 세워 2품으로 승진했다. 그런데 전라좌수사 이순신과 사이가 벌어져… 서로 용납되지 못해 충청 병마사로 관직을 옮긴 것이다.”
1597년 7월 29일 원균의 칠천량 전투 대패를 전하면서 “흉적(왜군)이 불의에 야습해 함락됐으며, 통제사 원균 등이 모두 죽임을 당했다. 매우 놀랍고 한탄스럽다”고 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
이순신과 원균은 불구대천의 원수
안타깝게도 이 소문은 사실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갈등은 옥포해전(1592년 5월) 이후 군공 다툼에서 시작됐습니다.
“원균이 이순신에게 구원병을 청해 적을 물리치고 연명으로 장계를 올리려 했다. 그러나 이순신이 ‘천천히 하자’고 말해놓고는 밤에 장계를 올리면서 ‘원균에게… 공로가 없다’고 진술했다. 원균이 대단히 유감스러워했다.”(<선조수정실록> 1592년 6월 1일)
<선조수정실록>은 “이때 두 사람이 각각 장계를 올려 공을 다투었는데, 두 사람의 틈이 그로부터 생겼다”고 밝혔습니다.
두 사람의 반목은 극심해졌습니다. 1594년(선조 27) 11월 12일 선조가 참석한 조정회의에서 두 사람의 갈등을 두고 심도 있는 논의가 벌어집니다. 이때 선조는 “왜적을 포획한 이순신의 공은 가장 크다”고 인정하면서도 “지병(습증)에도 불철주야 해상에서 죽기를 각오한 원균에게 전공과 관련된 불만이 있다면 이 또한 잘못된 것”이라고 원균의 처지도 이해했습니다.
조정회의에서는 “원균도 사졸이 따르니 가장 쓸 만한 장수요, 이순신도 비상한 장수인데 둘이 다투면 큰일”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섣불리 두 사람 중 한 사람이라도 경질한다면 수군이 동요할 것이라는 염려가 통한 겁니다.
<난중일기>의 ‘원균’ 뒷담화
따지고 보면 이순신·원균의 알력에서 원균을 더욱 불리하게 만든 것이 있죠. 바로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입니다.
생각해보면 일기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누구에게 보이기 위해 쓴 글이 아니죠.
그러니 관할권, 작전권, 전공 다툼으로 사사건건 부딪쳤던 원균을 곱게 볼 리 만무하죠. 이순신은 <난중일기>에 원균을 80~120번 정도 언급했는데요. 절대다수가 원색적인 비난입니다.
“원균의 술주정에 배 안의 모든 장병이 놀라고 분개하니 고약스러움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1593년 5월 14일) “원균이 온갖 계략으로 나를 모함하려 덤비니 이 역시 운수다. 뇌물로 실어보내는 짐이 서울 길에 잇닿아 있다.”(1597년 5월 8일)
이것은 빙산의 일각입니다. 어떻든 이순신의 원색적인 비난을 받은 원균은 모함꾼, 비겁자, 술주정뱅이로 전락하고 말았죠.
반면 원균의 치명적인 약점은 일기를 남기지 않았다는 겁니다. <선조실록>이나 <선조수정실록> 같은 공적인 기록 외에는 변명의 수단이 없죠. 하기야 훗날 이순신의 경질(1597년 1월) 후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은 조선 수군을 궤멸 상태로 빠뜨린 칠천량 전투의 패전 책임자인 것은 분명하잖아요. 장수로서 패전의 책임을 져야 하는 건 맞겠죠.
다만 원균을 두고 성웅 이순신을 모함해 밀어내고 그의 자리를 차지했고, 전투에 임해서는 늘 도망만 다니는 겁쟁이라고 마냥 매도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원균은 전쟁 후 이순신·권율(1537~1599) 등과 함께 나란히 ‘선무1등공신’으로 책록됐거든요.
문무관 등 관리나 의병 신분이 아닌 민간인의 신분에서 전쟁 상황을 기록한 선비 오희문의 <쇄미록>. 1591년 11월 27일부터 1601년 2월 27일까지의 피란일기다. 국립진주박물관 제공
“주상께서 도성을 굳게 지켰다면…”
<쇄미록>은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진 사람들의 민낯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임진왜란 발발과 동시에 왜군이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오죠. 오희문은 백성을 팽개치고 줄행랑친 선조 임금을 원망합니다.
“주상께서 도성을 굳게 지키고 장수에게 명해 미리 준비해 막고… 필사의 각오로 길을 끊었다면 적이 어찌 침범하겠느냐. 그런데 먼저 퇴둔(退屯·물러나서 진을 침)하니 몹시 애석한 일이다.”(1592년 4월)
오희문은 선조의 몽진길을 수행하다가 사초를 불구덩이에 던져넣고 도망친 사관 4명(임취정·박정현·조존세·김선여)을 “이런 개돼지 같은 무리…”(1592년 8월 21일)라고 욕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기막힌 ‘드립성 표현’도 나왔습니다.
“경상도관찰사가 백성들을 동원해 농사철까지 ‘지키지도 못할’ 성을 쌓는 바람에 원망이 하늘을 덮었다. 그래서 ‘성을 높이 쌓은들 누가 지키며 싸우랴. 성은 성(城)이 아니라 백성이 바로 성(姓)이라네’ 하는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
왜군의 만행은 필설로 헤아릴 수 없었다. <쇄미록>은 “나무에 사람의 머리를 베어 무수히 걸었는데 부패해서 살과 뼈는 떨어지고 머리털만 걸려 있거나 망건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고 한다. 분한 마음을 이기기 어렵다”(1592년 9월 24일)고 기록했다. 국립진주박물관 제공
끔찍한 전쟁통의 삶
<쇄미록>이 전하는 전쟁의 참상은 끔찍합니다.
“길에서 굶어죽은 사체 곁에서… 두 아이가 울고 있었다. 그 어미라 하는데, 뼈를 묻으려 해도 힘이 없어….”(1594년 2월 14일)라는 내용은 새발의 피였습니다. “굶주림 때문에 심지어 육촌의 친척도 죽여 씹어먹는다고 한다. 요즘 사람을 잡아먹는 일이 잦아 사람의 씨가 다 말라갈 지경”(1594년 4월 3일)이라고 고발합니다.
배고픔 때문에 민심이 돌아서 “성주를 점령한 왜군이 관청의 곡식을 나눠주자 백성들이 ‘새로운 상전(왜군)이 나를 살렸다’고 칭송했다는 얘기까지 전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착각이었습니다. “긴 나무에 사람의 머리를 베어 걸었는데 부패해 살과 뼈는 떨어지고 머리털만 걸려 있거나 망건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고 한다”(1592년 9월 24일)고 했습니다.
여성들은 또 어떤 고초를 겪었습니까. <쇄미록>에는 “왜적은 영남 양반가 여성 중에 얼굴이 고운 자를 뽑아 간음한 다음 일본으로 가는 배편에 보냈다”고 고발했습니다. 또 “왜적의 포로가 된 여인이 적들에게 돌아가며 강간당해 자결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여인의 치마를 들춰보니….”(1592년 5월)
더 이상 옮길 수 없을 정도의 참혹한 내용입니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
<쇄미록> 곳곳에는 부모와 아내,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새벽에 꿈을 꾸니 아내가 집에 있는데 옛날과 같다. 내가 무릎 위에 막내딸 단아를 안고 그 볼을 만졌다”(1592년 7월 3일)는 내용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토록 사랑한 막내딸 단아가 1597년 2월 1일 숨을 거두었습니다. 오희문은 “내가 외출했다가 돌아오면 기다리던 단아가 나와 띠를 풀어주고 옷을 벗겨주었는데 이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애통한들 어쩌겠느냐”고 안타까워했습니다.
<쇄미록>에 요즘이라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아버지상이 있어 하나 소개해보고자 합니다.
“아내와 두 딸, 네 계집종이 모두 학질을 앓고 누워 저녁밥 지을 사람이 없다. 그들이 덜 아프기를 기다려 짓는다면 반드시 밤이 깊을 것이다.”(1593년 9월 7일)
아니 집안 여자들이 모두 학질을 앓고 있는데, 고작 ‘밥을 얻어먹지 못할까봐’ 걱정했다는 얘기가 아닙니까.
요즘 같으면 큰일 날 일인데 당시는 어쩔 수 없는 가부장 사회였으니까요.
평생 과거급제는 못 했지만…
사실 오희문은 평생 과거에 급제하지 못했습니다. 평생을 포의(布衣)로 지냈죠. 하지만 그 어떤 장원급제자도 부럽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한 몸 추스르기도 어려운 시절이었죠. 그분은 꼬박꼬박 그 참혹한 역사(임진왜란)를 기록해 나갔습니다. 그 복이 후손들에게 미쳤답니다.
<쇄미록> 1597년 3월 19일자는 “맏이(오윤겸·1559~1636)가 5대조 이하에서 처음 급제했다”면서 “가문의 경사를 어찌 표현할 수 있냐”고 기뻐했습니다. 오윤겸은 인조 연간에 영의정이 됐습니다. 둘째 오윤해(1562~1629)의 아들인 오달제(1609~1637)는 병자호란 때 충절의 상징인 삼학사(홍익한·1586~1637, 윤집·1606~1637), 오달제) 중 한분이죠.
그러고 보면 오희문은 세상 부러울 게 없는 삶을 산 분이네요. 벼슬 없이도 이름 석자를 청사에 길이 남겼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