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2시 반. 혹시라도 국공(국립공원관리공단)에 들킬까봐 헤드랜턴도 켜지 않고 스틱도 꺼내지 않은 채 조심하며 계곡에 도착하니 물소리가 요란했다.
일명 관터계곡이라고도 불리는 설악산 각두골이다. 예상 못했던 일이어서 그 순간 우리 일행은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엊그제 비가 왔는지 예상보다 계곡에 물이 너무 많아서 난감한 상황에 빠졌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그냥 건너야만 했다.
남자 대원들은 도움을 받으며 그런대로 건넜지만 여성 대원들의 경우 물이 흐르는 바위를 건너뛰기가 간단치 않았기에 슬링(sling)을 이용하는 등 혼신을 다해서 한 명씩 건너갔는데 그럴때마다 칠흙같은 어둠속의 계곡에 헤드랜턴의 불빛이 번쩍임과 동시에 긴장감속에서 터져 나오는 환호성과 기합소리가 물소리와 뒤섞여 흘러 내려갔다.
수백 미터 못가서 다시 원래 방향으로 계곡을 건너 올 수 밖에 없었기에 한 명씩 같은 동작을 반복하던 중 거의 물에 빠지거나 발목을 삘뻔한 염려스런 상황도 발생했다.
적군과의 일전을 앞두고 죽음을 무릅쓴 병사들의 사기가 하늘을 치솟듯이 협동과 배려속에 모두가 용맹무쌍해서 범이라도 나오면 때려 잡을 것만 같은 기세였다.
전망대도 좀처럼 없다 보니 그저 좁은 등로를 헤치고 끊임없이 걸어야 했는데 누군가 일출 시간이 지났는지 물으니 이미 지났다는 대답이 뒤쪽으로 부터 들렸다.
모자와 머리에 덮어 쓴 수건이 나무에 걸려 벗겨지기를 수십 차례 했을 뿐만아니라 나뭇가지에 귀싸대기와 종아리를 얻어 맞기를 수없이 반복했지만 그런 것에 신경쓸 여유가 없이 계속 달리듯이 앞으로 가야 했다.
어떤때는 등산복이 나뭇가지에 걸려 찢어지지 않았는지, 얼굴이나 종아리에 심하게 긁혀서 혹시 피가 나지는 않는지 걱정되기도 했지만 살펴볼 시간이 없었다.
비법정탑방로다 보니 사람들이 거의 다니지 않았기에 등로이긴 해도 사람보다는 기어다니는 짐승들을 위한 길이었는데 나무와 풀을 비집고 속도를 높여 사람이 지나가니 부딪히고 긁히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편하게 걸을 수 있는 산길은 없었고 비지정등산로만 계속 이어졌다.
능선을 따라 올라가기를 서너 시간 쯤 했을 때 가쁜 숨을 몰아 쉬며 힐끗 뒤돌아 봤더니 뒤따라 오던 대원 한 명이 산나물을 뜯어 그대로 입으로 가져다 소가 풀을 먹듯 씹어 먹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자연스럽고 맛이 좋다는 듯이.
그것은 곰취 나물이었다. 스물 여명의 일행중 절반 가량은 각두골을 타고 계속 올라갔고 필자가 포함된 우리 일행 9명은 능선길로 접어들게 되어 의도치 않게 이산가족이 되었다.
인터넷이나 전화도 안되는 지역이어서 아침 해가 중천에 뜰때까지 연락이 전혀 되지 않아서 애를 태웠다.
능선으로 올라선 일행중 앞서 간 한명과 필자를 제외한 7명 대부분이 오늘 산행의 컨셉이라면서 곰취와 참취, 당귀와 풀솜대를 열심히 채취하면서 산을 타고 있었다.
그런데 점심때 필자가 전혀 예상 못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당연히 집에 가져가겠거니 했던 산나물들을 모두 꺼내서 늘어놓고 줄곧 앞서 가던 젊은 여성 대원이 미리 준비해 온 쌈장과 함께 모두가 반찬으로 먹기 시작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필자도 먹어보니 향긋한 풀내음이 나면서 맛이 매우 좋았다. 처음에는 아무리 깊은 산중에 있던 것이라 해도 씻지도 않고 먹는다는 것이 필자는 꺼림칙했지만 그대로 먹는다는 데 대해서 거부감을 가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때때로 비가 와서 숲속에서 세척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아무튼 모두가 산에서 산나물을 맛있게 잘 먹었다.
몸이 뒤로 밀릴 정도로 가파르고 좁은 등로가 한 참 이어진 후 마침내 정상에 올랐는데 아무런 표지석도 보이지 않았기에 화채봉이 어디 있느냐고 같이 올라 간 대원들에게 물었더니 바로 여기라는 대답이 돌아왔고 그곳에는 봉(峰)으로 인식하기 힘든 크지 않은 암반이 두 서너개 있을 뿐이었다.
아침 8시경 대청봉을 불과 얼마 남겨 놓지 않은 지점에서 돌아 내려올때 국공(국립공원관리공단)의 초소가 있었는데 이렇게 이른 아침에는 국공이 근무하지 않는다면서도 발자국 소리도 조심하면서 지나와야 했던 비법정탐방로다 보니 화채봉임을 알리는 표지석 하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사진에서 산악인들이 화채봉이라고 적힌 넓직한 돌이나 나무판을 들고 인증 사진을 촬영하곤 했던 이유를 그제서야 알 수 있었다.
손에 잡힐듯, 한 걸음에 달려 갈 수 있을 듯 목전에 펼쳐진 외설악의 절경을 화채봉에서 굽어보니 감회가 남달랐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필자가 화채봉에 왔다는 것을 멘토 선생님께서 아신다면 얼마나 기뻐하실까.
불의와의 타협을 거부하는 정의롭고 강단있는 성격탓에 약삭빠른 자들의 권모술수와 잔꽤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평생을 돈, 명예, 지위등 소위 출세라고 이름할 수 있는 것들과는 거리가 멀었던 멘토 선생님.
시대를 잘 만났더라면 목숨 바쳐 사회를 개혁하는 혁명이라도 할 수 있는 분이었는데 ...
평생을 어렵고 외롭게 살면서도 결코 비굴하거나 양심에 부끄러운 일을 한 적 없이 꼿꼿하게 자신의 운명과 마주했던 분이었다.
역사, 문학, 종교, 철학등 다방면에 박학다식했을 뿐만아니라 클래식 음악에 심취했으며 산을 진정으로 사랑했던 산악인이자 낭만주의자였다.
돌아보건대 작년 여름에 사후 15년동안 납골당에 계셨던 멘토 선생님을 만시지탄(晩時之歎)이기는 했지만 수목장으로 모셨던 것은 필자가 살면서 가장 잘 한 일중의 하나였다.
이와 함께 석식을 건너뛰는 간헐적 단식의 생활화와 책상을 높여서 항상 서서 일하는 습관, 그리고 그 무엇보다 멘토 선생님의 영향으로 늦게나마 산을 사랑하게 된 것은 누가 뭐라해도 옳은 판단과 결정이었으며 자존감을 높이고 자부심을 가질 만한 것이었다.
어느덧 고인이 되신 지 16년이 된 멘토 선생님이 생전에 화채봉에는 뱀이 많다고 했던 말씀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산길을 막고 똬리를 틀고 있는 뱀을 두 번이나 마주해야 했다.
시간적 여유만 있었다면 살생까지 않더라도 한 방 때리고 싶었지만 일행들이 거의 뛰다시피 등로를 막아 선 나무들 사이로 내달렸기에 그럴 여유가 없었다.
배가 고파서 밭에 내려와 작물을 좀 먹는다고 노루, 멧돼지 등은 유해 조수로 지정해서 일정한 조건을 충족하면 살생과 포획이 가능하고 징그럽기 짝이 없고 사람의 목숨을 앗아 갈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뱀은 유해 조수도 아니고 그래서 긴급 상황이 아니라면 포획이나 살생도 못하고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 실정법이라고 ?
더구나 건강한 생태계의 유지를 위해서 뱀이 필요하다고 ?
성경에서도 저주 받은 그 흉측한 짐승이 생태계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도대체 이해 할 수 없다.
비아그라의 출현으로 땅꾼들이 없어지니 뱀이 살판나서 여기 저기서 사람을 위협하는 상황인데도 괜찮다고 ?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국회와 관계 당국의 직무유기로 현실에 맞지 않는 규정이 버젓이 법의 이름으로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다.
얼마전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에 나타난 뱀 때문에 일대 소동이 있었는데 출동한 119 대원이 뱀을 데려다가 먼 산에 가서 방생했다는 뉴스를 접하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멧돼지가 민가에 내려와서 돌아다니면 사살하고 뱀은 모셔다가 방생을 한다 ? 주거지역에 나타나서 사람을 놀라게 한 것만 해도 죽어 마땅한 백해무익한 짐승인데 살려줘서 다음에 또 시민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도록 방치한다니 제정신으로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산에 있는 뱀을 가능하면 한마리라도 제거할 때 비로소 등산객들의 안전이 조금이라도 나아 질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천적 역할을 하던 땅꾼이 사라져서 산에 뱀이 너무 많으니 개체수 조절을 위해서도 어느정도 뱀을 제거해야 건강한 생태계의 유지와 보존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 더 설득력 있지 않을까.
개인의 영달과 정쟁에 눈 먼 정치 건달들과 복지부동하는 고리타분한 관료들에게 멧돼지와 뱀중에 어느 쪽으로 부터 국민들이 더 많은 피해를 입고 있는지 자료를 찾아보고 확인해 봤는지를 따지는 것은 애당초 부질없는 짓이었을까.
화채봉에 오른 후 하산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앞서가던 40대 후반의 한 여성 대원이 갑자기 등산 스틱을 3미터쯤 깊이의 웅덩이 같은 굴 속으로 휙 던져 넣길래 바로 뒤따라 가던 필자는 스틱이 부러져서 버리는 걸까 아니면 왜 그러지 하면서 의아해 했는데 그녀는 머뭇거리지 않고 바로 토굴 같은 바윗틈 속으로 몸을 집어넣고 쑥 내려가니 일순간에 머리가 땅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왜 그러지 하면서 어리둥절한 순간 어느새 필자의 차례였다. 그렇게해서 지반의 위층에서 아래층으로 내려 가듯 토굴 속으로 빠져 내려간 산행은 지금까지 왔던 것과는 역방향으로 계속됐다.
비법정탐방로 산행에 대한 단속을 피하기 위해서 일부러 잘 다니지 않는 피골능선의 계곡쪽 길로 내려왔는데 경사가 너무 가팔라서 가만히 서 있는 것도 버거울 정도였다.
각도가 심한 지형이어서 발밑의 낙엽들이 밀려서 넘어지기 일쑤였는데 그것이 문제라기 보다는 잘못하면 넘어져서 굴러 갈 것만 같았다.
아슬아슬하게 몸의 균형을 잡으며 한 발 한 발 내려오는데 필자의 앞뒤에 있던 대원들이 연거푸 미끄러져서 엉덩방아를 찧고 있었다.
험한 구간이 빨리 끝났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했을 때 C지구상가에 근접해 있었고 새벽 2시 반부터 시작된 13시간에 걸친 산행은 마침내 가슴 뿌듯하게 막을 내렸다.
여성 대원들이 바위를 무난히 건너뛸 수 있게 남자들이 슬링(sling)을 이용하여 돕고 있다.
마침내 화채봉에 올랐다.
평소 자신의 사진을 포스팅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이날만은 하고 싶었다.
20여년 전에 멘토 선생님과 이야기 했던 화채봉을 선생님 사후 16년만에 올랐다. 이 사실을 그 분이 아신다면 얼마나 기뻐하실까 생각하니 감정이 복받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