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손길 페리호가 도착하자 나가시마의 부하들이 배 안 까지 들어와 나가시마 두목을 호위했다. 그는 사내였다. 나를 어떠한 경우라도 보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나는 간섭만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나가시마와 세츠코가 안내하겠다고 자청하고 나섰지만 나는 정중하게 거절했다. 아쉬움을 남긴 채 그들 일행은 떠났다. 나는 그들이 바다에 내던진 표창과 쇠구슬 대신 동전을 한주먹 바꾸어가지고 배 턱을 나섰다. "어디로 갈 거죠?" 병규가 뒤따라오며 물었다. 너무 화려한 무대만 봤어. 형편없는 할렘 거리, 도둑놈과 강도가 득시글거리는 왜놈들의 치부를 눈 앞에 두고 그냥 갈 순 없잖아." "기분 나쁜 곳인데요. 그리고 이대로 가면 시비거리가 돼요." 깔끔한 복장과 단정한 차림새로 니시나리로 들어서면 대뜸 이방인이라는 걸 알고 소매치기나 달라붙거나 시비를 걸어오는 사람들이 생긴다고 했다. 우리는 택시 속에서 아주 편한 차림으로 바꾸어 입었다. 니시나리는 노동자 거리라고도 불리지만 옛날부터 지독한 할렘가로 소문난 곳이었다. 일본의 화려한 무대 뒤에는 이렇게 처절한 곳이 숨겨져 있었다. 나아졌다는 얘기도 있었다. 깡패와 범죄자들과 창부와 시모라고 하는 깡패의 앞잡이들이 뒤엉켜 사는 곳이었다. 범죄자들의 은신처가 될 수 있는 건 일본 사회의 특징 같은 것이었다.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국고에서 하루에 이천 엔이라는 돈을 꿔주기 때문에 알코올 중독자가 끼여들고 얼굴 내밀고 살 수 없는 부류들이 끼어들어 숙박비와 밥을 사먹으며 가까스로 생계를 유지하는 지역이었다. 도둑놈들이 몰려들어 공공연하게 도둑질한 물건을 파는 도둑시장도 형성되어 있고 노동자나 무위도식하는 사람들 등을 쳐서 먹고 사는 조무래기 깡패까지 그 속에 기생하는 곳이었다. 일본의 그 화려한 무대 뒤에 이런 치부를 모른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 근처엔 보통사람들이 지나다니지 못했다고 한다. 여자들을 길거리에서 심하게 희롱하고 자동차 같으면 돌을 던져 유리를 박살내는 횡포가 그치지 않는 곳이었다. 이곳에 들어와 노동자 수첩만 발급받으면 하루종일 술 취해 빈들거려도 이천 엔에서 삼천 엔 정도의 일당을 받는다고 했다. 오전인데도 술 취한 사람들이 비틀걸음으로 우리가 탄 택시의 방향을 방해하고 있었다. "운전사가 안 들어갔으면 좋겠답니다. 골치 아픈 곳이라고 다른데로 가자는 데요." "시간당 삼천 이백 엔씩 대절한 건데 왜 "니시나리는 위험한 곳이라고 다른 곳을 안내하겠대요. 오사카성이나 쓰루바시(鶴橋)구역 같은 곳을 차라리 보랍니다." "그냥 가자고 해. 위험하지 않은 곳에 차를 세우고 기다리면 되잖아." 병규가 내 말을 받아 설명하자 운전사는 할 수 없었던지 니시나리의 복잡한 구역을 통과했다. 허름한 차림새와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사람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이쯤 내리자." 우리는 택시를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곳에 세워두고 간편한 차림대로 니시나리로 향했다. 도둑시장이라고 불리는 골목길엔 일요일 아침인데도 사람들이 많았다. 싸구려 가장 지저분하며 노동자들의 집회장소나 싸움판으로 알려진 삼각공원 옆에는 바닥에 비닐을 깐 좌판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 "어떤게 나와 있는지 좀 보자." 만물상을 차려도 될 만큼 갖가지 물건이 골목 가득하게 쌓여 있었다. "이게 다 훔쳐온 물건은 아니겠지." "그럴 거예요. 상당수는 훔쳐온 거겠지만." "싸구려 시계 하나 사야겠다." 세츠코가 내 몸에 붙은 건 죄 빼다가 바다에 내던져 버려서 당장 시간을 보려면 갑갑했다. 시계 종류만 늘어놓고 파는 좌판에는 먼지와 때를 그대로 뒤집어쓴 시계가 삼백여 개쯤 놓여 있었다. 새것처럼 보이는 포장된 시계도 있었지만 진품 "이거 얼만지 물어봐라." "이천 엔이래요." "천 엔 준다고 해라." "천 삼백 엔 달래요." "에누리해 봐." 우리가 흥정을 하다가 일어서자 늙은이는 손바닥을 펼쳤다. 나는 천 엔짜리 한 장을 내밀고 시계를 받았다. 초침이 어쩐지 느리게 가는 기분을 느꼈다. "속아봤자 천 엔이다." 내가 시계를 차며 이렇게 말하자 병규 녀석이 씩 웃었다. 그 옆에는 오급딸랑이라고 하는 노름판이 벌어져 있었고 그 앞에는 화투판이 벌어져 있었다. 노름꾼들은 핏발 선 모습으로 둘러서서 잔돈푼을 걸고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쪽으로 걸어나왔다. 그들의 비참한 생활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도색영화를 세 편씩이나 상영하고 있는 극장이 여러 개 눈에 띄었다. 입장료는 삼백 엔씩으로 다른 지역에 비해 엄청나게 싼 편이었다. 노동자들이 일 없는 날이면 하루종일 그 영화관에서 소일한다고 했다. 영화관 이름은 그럴 듯하게 '신세계(新世界)'란 간판을 달고 있었다. 택시를 세워두었던 곳엔 운전사도 택시도 없었다. "이새끼 짐 싣고 튄 거 아냐?"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병규는 골목길을 뛰어다니며 택시를 찾았다. 숨차게 한바퀴 돌아 본 병규가 니시나리 쪽을 한번 더 훑어보았지만 택시를 찾아낼 수는 없었다. "분명히 여기지?" "그래요." "그럼 튄 거다. 가방이 먹음직스러웠던 모양이다." "여권 같은 건 가지고 있죠?" "있다." "개새끼......" 병규가 이렇게 욕지거리를 시작했다. 병규와 내 가방 속엔 큰돈이 될 만한 물건은 없었지만 시간당 삼천 이백 엔씩 계약한 택시를 며칠 동안 전세내서 타고 다닐 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들이 들어 있었다. 약이 바싹 치밀어올랐다.택시의 번호를 기억해 두지 않은 우리의 설사 번호를 안다고 해도 쉽게 잃어 버린 두 개의 가방을 찾게 될지는 의문이었다. 나는 여권이나 지갑은 안주머니에 넣었지만 옷가지나 면도기 따위의 필수품이 순식간에 사라진 셈이었다. 병규도 지갑을 뺀 전재산을 잃어 버렸다. "내가 일본놈이 아니라는 걸 알고 그랬겠지. 여행객이니까 돈푼이나 있겠다 싶어서." "그랬겠죠." "그 물건들이 도둑시장으로 나오는 거나 아닌지 모르겠다." "잊어 버려요. 찾기는 틀렸으니까." "잡히면 모가지를 비틀어 놓겠다." "쉽게 잡히진 않습니다. 이 넓은 천지에 어디 가서 잡아요." "가방하고 두어 벌 사죠." 나는 그 조그만 일본 운전사 녀석에게 당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값으로 칠 수 없는 내 물건들이 도둑시장에 나가 헐값에 팔리게 된다는 것도 약 오르는 일이었다. 우리는 어이가 없어서 터덜거리며 걸었다. 지나가는 택시들을 유심히 보았지만 짧은 머리에 땅딸한 그녀석은 아니었다. 멀찍이 도망쳤을 게 분명했다. 미사카가 벗어 주고 간 목걸이니 흑장미 도모코 자매가 정성스럽게 준 물건들을 잃어 버린 것은 그래도 참을 수 있었는데 다혜가 남기고 간 물건들을 잃어 버린 건 디기 어려웠다. 내가 너무 억울해 하자 병규는 귀중한 물건이 가방 속에 있었느냐고 물었다. 기분 나쁜 것은 왜놈한테 당했다는 거다." "형님 심정은 압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어쩔 겁니까? 그자식 찾으려면 택시란 택시를 죄다 뒤져야 하는 걸요." "봐라. 내가 기어이 찾아낼 테니까." 나는 이렇게 응어리진 소리를 했다. 병규가 대꾸 없이 성큼성큼 걸어가 차를 세웠다. 우리는 쓰루바시 구역에서 내렸다. 좁은 길을 사이에 두고 왠지 음울하고 낡아보이는 시장통이 늘어서 있었다. 운전사 녀석이 일본 말로 지껄이는 소리를 들었는데 조센징이 어떻고 하는 낱말이 귀에 거슬려 악을 썼다. 병규가 재빨리 내 팔을 잡았다. "여기 사람들은 그냥 쓰는 말입니다. 그게 입에 붙어서 금방은 안 고쳐져요. 습관적으로 쓰고 있는 저녀석 하나를 팬다고 해결되는 건 아닙니다." 녀석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괜히 쥐어박고 싶은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쓰루바시를 흔히 한인거리라고도 부른다. 일본애들 표현대로라면 조센징 거리인 것이다. 시장통엔 우리나라 시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 많았다. 일본인들도 더러 사가긴 하지만 주로 한인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곳이었다. 갖가지 젓갈과 고추가루나 된장 같은 고유의 음식물에서 선지와 내장류를 파는 곳도 있었다. 시장통을 빠져나와 뒷골목으로 나가자 한국계 학교인 건국고등학교와 금강학원을 소개하는 빈대떡 구워 파는 아주머니는 서울 시장에 나앉은 장사하는 아주머니와 별로 다를게 없었고 마늘과 고추를 더미로 모아놓고 파는 것도 늘 보아오던 것이었다. 떡 파는 아주머니도 왠지 낯설지 않았다. 어딜 가나 어려서부터 길들여진 입맛을 감출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여긴 훤한 곳이지?" 병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때는 이곳에서 공부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계 학교를 다니면 그 졸업장 가지고 취직하기도 어렵고 상급학교에 진학하거나 다른 사회 활동을 하려고 해도 힘겹기 때문에 많은 한국계 사람들은 일본인들이 다니는 학교를 다니고 있다고 했다. "오랜만에 우리 음식 좀 먹어보자. 이놈의 입이 달착지근해져서 못 견디겠다." "조금 더 가면 한국 음식점하고 술집이 있어요." "난 촌놈이라, 이게 어울려. 내가 폼 재러온 놈이라면 벌써 술집에 가서 한판 두들겼을 거다." 우리는 허름한 나무의자에 걸터앉았다. 먹음직스러운 순대와 떡을 우선 집어먹었다. "서울서 오셨수?"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가 물었다. "예. 잘 되세요?" "그럭저럭 밥은 먹지요만." "우리말 잘하시는데요?" "잊어 버릴 수가 있겠수?" 병규 녀석도 오랜만에 통역하지 않아도 떡을 정신 없이 집어먹었다. "놀러오셨수?" "그냥 두루두루 구경 좀 하려고요." "구경할 데 놔두고 이런 델 들어왔수? 보이기 싫은데." "어때요, 아주머니. 이렇게 열심히 사시는 거 보니까 기분 좋은데요. 일본 사람들에게 치여서 고생하는 분이 많다는 얘기도 있었지만...... 뭐든 열심히 해서 사시면 됐죠, 뭐." "글쎄, 그렇게 쉽지 않은 거라우. 까짓거 이렇게 사는 것이야 다 팔자려니 치부하면 그만이지만 새끼들 가르쳐 그눔들 잘 되는 거 보는게 소원 아니겠수. 걔들이 무슨 죄가 있겠수. 못된 놈들이 괴롭히지나 않았으면 싶은데...... 이눔의 나라엔 법도 한숨을 쉬며 국밥을 말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으신가 보죠?" "무슨 일이나마나 떠나고 싶어도 뭐가 잘 안 된다우. 나라 떠나면 이 고생한다는 걸 모르는 바 아니지만서두......" 암담한 사연이 있거나 짙은 향수 때문에 그러는 것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번을 더 물어봐도 주인 여자는 가볍게 웃어넘겼다. 우리는 국밥을 열심히 퍼먹으며 오랜만에 푸짐하고 걸찍한 총각김치를 맘껏 먹었다. 우리가 게걸스럽게 먹는 걸 물끄러미 쳐다보던 주인 여자가 김치 뚜껑을 열어 한주먹 듬뿍 내 주었다. "하두 오랜만이라 정신 없이 먹습니다. 아주머니 김치 솜씨가 그만인데요." 죽어도 내 땅에 가서 죽어야지." "여기서 돈 많이 버셔서 편히 사실 만큼 벌어가지고 오시면 되잖아요." "쳐죽여도 시원찮은 그눔들만 아녔으면 벌써 갔을 텐데......" 혼잣소리처럼 이렇게 말하고 떡함지를 열어 콩고물을 한 주먹 내 주었다. 나는 그 순간에 이 아주머니가 한 많은 사연을 지니고 있다는 걸 짐작했다. "여기도 깡패가 많냐?" 나는 살며시 병규에게 물었다. 이 지역 문제라면 훤하게 알고 있는 병규였다. "좀 있죠. 일본 천지 어딜 가나 그런 건 있으니까요." "애들은 어때?" "여러 질이죠. 링컨 콘티넨털이나 거들먹거리는 애들부터 오토바이나 타고 다니며 잔돈푼 해먹는 애들까지 다양해요." "여기 있는 한국인들만 전문적으로 등쳐먹는 애들도 있냐?" "한국인만 전문적으로 못 살게 구는 게 아니라, 닥치는대로 해 먹고 사는 애들이죠." "뒷줄은 든든한 애들이냐?" "그런 애들도 있지요. 아마 여기 있는 한국인들은 약자에 속할 거예요. 일본애들이 그런 걸 노리죠. 현행범이거나 구체적 증거가 있어야만 잡아들이니까 그런 약점을 이용하면 잡힐 염려도 없겠죠. 일본 경찰도 아무려면 일본애들 편이죠. 귀화한 사람도 마찬가질 거예요. 애들이 교묘하게 등쳐먹기 때문에 쉽게 노출되지는 괴롭히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어요. 꼬드겨서 범죄 행위에 가담시키곤 그걸 미끼로 괴롭히는 거죠. 말을 안 들으면 폭로해서 결국 한국계 학생만 범죄자의 누명을 쓰게 만들어요." 병규가 이쪽 사정을 꽤 아는지 이렇게 이곳 깡패들이 한인 사회를 좀먹는 행위를 꼬집어 얘기했다. 병규 얘기를 귀답아 듣던 주인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한마디 거들었다. "젊은이는 어디서 왔는데 그런 걸 그렇게 훤히 아우?" "얘도 나쁜 짓 좀 하고 돌아다녔나 보죠." "아주 참하게 생겼는데......" "농담예요." "우리 아들눔이 바로 그 짝이라우. 속상해서 칵 죽어 버릴까도 생각했지만 그눔 하나 믿구 사는 년이라 이 꼴로라도 살아 있다우. 내 얘길 엮으면 실히 한 권의 소설은 될 거유." "소설 한번 써보시죠." "글 재주가 있어야 쓸 거 아니우." 우리는 얘기가 나온 김에 바싹 붙어앉아 자꾸 이야기를 캐들어가 보았다. 처음에는 별로 내키지 않는 듯이 말을 꺼내지 않더니 동족을 만났다는 기쁨 때문인지 아니면 병규가 이곳 사정을 너무 환하게 꿰뚫어보고 있으니까 그런 건지 술술 신세한탄하듯 털어놓았다. "우리 아들눔도 잘한 건 아니지만 어쩔 수 없었을 거 아니겠수. 처음엔 물론 모르고 시키는대로 했다나 보우. 여기선 교복 입고 다니니까 학생이 가방 속에다 마약을 담아가지고 다니는지 책을 넣어가지고 다니는지 모르는 걸 이용하지 않겠수. 이거 어디다 하소연할 데가 없으니 답답해서 그냥 해 보는 소리우." "괜찮아요, 아주머니. 이 친구가 그런 일을 잘 알고 해결해 줄 방법도 알고 있으니까요." "그런 것도 같구! 세상이 하두 험하니까 누구를 믿을까마는......" 주인 여자는 답답한 마음 때문인지 이렇게 말하곤 자초지종을 죄다 얘기했다. "맨 처음엔 여자 있는데 데리고 갔나 봅디다. 어린 게 호기심은 있어서 그눔들이 한패거리인 계집애들이 짜고 시켰잖겠수. 임신을 했는데 책임지라거나, 뭐 그렇게 겁을 주다가 나중엔 책가방 심부름 시킨 거 아니겠수. 아들눔이 급하긴 하고 하니까 빠져들었는데...... 집에다 얘기하면 큰일 나겠고 하니 말이우. 한번 한 일이라 계속 따라가게 되고 나중엔 발을 못 빼고 엉뚱한 짓까지 하고 있나 봅디다." 주인 여자는 대번에 눈시울이 뜨거운지 앞치마로 눈물을 찍어냈다. 과부댁으로 아들 하나 믿고 사는 설움이 그렇게 철철 눈물을 만드는지도 모른다. 고향을 등지고 타국에 사는 것도 서러운 여인에게 의지하는 아들에게 뻗친 악마의 손길을 참기 어려운 회한일 것 같았다. "자세히 얘기해 주실 수 있어요?" 그눔이 어쩌다가......" 일본애들은 범죄 조직을 활용하면서 한국인이나 한국계 학생을 교묘하게 끌어들여 함정을 만든 뒤에 문제가 생기면 앞잡이나 방패막이로 내세운다는 얘기는 심심찮게 들어 온 터였다. 그래서 일본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을 마치 준범죄자로 취급하는 사람도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일본의 유명한 텔레비전 방송국에선 그러한 실상을 겉으로 나타난 그대로 보도하여 마치 한국인들이 일본에 와서 잦은 범법 행위를 하는 것처럼 선전하는 경우도 있었다. 일본 범죄 조직이나 조작자 문제는 언제나 가려 버린 이 편파적 보도의 뒤엔 그들의 간계가 숨어 있었다. 나는 끝까지 이런 사실을 밝힐 결심을 했다. "아드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밤이나 돼야 기어들어온다우." "아주머니 말고도 그런 일 당한 분이 많겠네요." "쉬쉬하니까 그렇지, 많긴 많을 거요. 지난 달엔 저 건너 오복집 딸이 나쁜 애들한테 벌건 대낮에 잡혀갔는데 여태 안 왔다우. 그 양반, 착한 양반이 다 죽게 됐지요." "대개 어떤 부류의 깡패들인가요?" "보나마나 아니겠수? 이 근처에서 빈둥빈둥하며 먹고 사는 애들이지. 작년에 우리 한국 학생이 그애들하고 싸우다가 병신만 됐수. 태권도도 잘하고 유도도 죽겠어요. 범죄 소굴에 안 들어간다고 버티다 그 지경이 됐는데 사건이 터지자 그눔들은 도망가고 시내에 있던 깡패두목인지 하는 사람이 찾아와 협박하는 바람에 합의서까지 써 줬답니다." 기반이 약한 외국인을 등쳐먹는 부류들의 속셈은 빤한 것이었다. 위험 부담도 줄이고 범죄 행위도 감추면서 최대의 이득을 얻자는 계획인 것이다. "지난 번에 텔레비전으로 방송된 '일본 속의 한국인'이란 프로그램을 보셨나요? 그때 한국에서 온 위장결혼의 피해자이며 이곳의 범죄며 한국인들의 파렴치한 행위를 낱낱이 고발한 게 있었죠." "봤다우."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사실이니까 했겠지만 해도 너무 했다우. 일본인들의 행위는 어쩔 수 없는 정당성이 부여되었고 얼굴도 감추어 주면서 한국인은 그대로 얼굴까지 내보인데다가 일본 폭력배를 두둔해 준 거 아니겠수. 사람들이 항의한다고 얘길 하기도 한 모양인데 얼렁뚱땅 끝나 버렸수. 설움설움 이런 서러움이 어디 있겠수." 아주머니는 차근차근 얘기를 풀어나갔다. 한국 여자가 일본의 늙은이와 결혼하겠다고 해서 서류와 비행기값까지 다해서 보낸 뒤에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자 소개소를 통해 확인한 결과 일본의 술집에서 호스티스로 일하고 있더라는 내용이 아주 적나라하게 방영되어 한국인들의 죄악상을 폭로한 적이 있었다. 돈을 가로챈 사람은 일본의 폭력배들이며 한국 여인은 속아서 팔려간 신세일 뿐 돈 한푼 쥐어보지 못한 가련한 여인이었다.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는 텔레비전 방송기자가 의도적으로 한국 여인에게 당한 일본의 늙은이 입장만 강조하여 사건을 꾸민 것이었다. 또 비슷한 보도특집에서도 한국계 학생이 마약 밀매를 하는 과정이나 한국계 여학생이 음란한 장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장면, 한국인끼리의 범죄 조직 결성 과정과 일본인에게 피해를 주는 파렴치한 행위를 방영한 적이 있는데 그것도 일본 폭력단의 강압에 의한 행위이며 한국인이 피해자임에도 거꾸로 사건을 설정하여 공신력 제일을 주장하는 텔레비전 방송국이 술수라는 걸 의심치 않을 수 없었다. 특종을 뽑아내기 위한 텔레비전 방송국의 기자와 폭력단 사이의 흥정이 개입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작극의 명수라는 건 여러 가지 과거의 사례에서 볼 수가 있었다. "그 친구들 만날 수 있을까요?" 내가 넌지시 물었다. "모이는 데야 빤하지만 뭐러 만나려고 그러우? 흉한 패거리라 큰일 나우. 못하는 짓이 없는 깡패들인 걸." "저희들도 만나야 할 일이 있어요." "무슨?" "그럴 사정이 있습니다." "이해를 못하겠수. 차라리 짐승을 만나는 게 낫지." 아주머니에게 내가 일본에 오게 된 것이 그런 꼴을 눈여겨보기 위해서라고 설명할 수는 없었다. 아주머니는 답답해서인지 그동안 깡패들이 못 살게 군 사연들을 아는대로 얘기해 주었다. 상당히 오래 전부터 이 지역의 폭력배들은 한국인들을 못 살게 굴어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더러는 행방불명이 된 한국인도 있었고 병신이 되거나 폐인이 되어 일생을 망친 사람도 있었다. 예쁜 여자들은 폭력배들의 횡포를 피해 다른 곳으로 이주하는 경우가 있을 만큼 일본 폭력배들의 횡포는 극심한 편이었다. "다른 대책이 없나요?" "있을 턱이 있겠수?" 타국살이에서 거처를 마음대로 옮기는 일이 쉬울 수는 없었다. 오사카의 일본인들은 그래서 한국인들을 대개 무서운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싸움이 벌어지면 집단적으로 뭉쳐 덤비기 때문에 겁이 난다고 실토하는 사람도 있으며 텔레비전의 특집 프로그램을 본 뒤에 한국인 거리 근처에 살던 일본인들이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저녁 무렵에 다시 오겠습니다." "갈 곳이 마땅찮으면 우리 집에 방이 있으니 걱정은 말아요." 아주머니가 그 사이에 정이 들었는지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행색이 초라해 보였던 모양이었다. 가방 한 개 들지 않은데다 여행객이라면 이런 시장 골목을 구경하러 다니지 않는 게 상식이기 때문이었다. "되도록 그러겠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얘기하고 쓰루바시의 한국인 거리를 나섰다. "어디 가서든 전화부터 걸자." "어디 거시게요." "서울에 연락도 해야겠고." "무슨 일이 있어요?" "연락 안했더니 궁금해서 그런다." "내가 아는 데가 있어요." 택시를 타고 병규 녀석이 자주 다녔던 찻집으로 갔다. 널찍한 정원을 개조하여 만든 것 같은 그 찻집 여주인은 한국 사람이었다. "재미가 좋으니? 연락도 않는 걸 보니 퍽 은주 누나는 연락이 뜸한 나를 이렇게 책망부터 했다. "재미는 무슨 재미, 힘들고 고달픈 게 여행인데. 연락 온 거 없어?" "그래서 전화한 줄 안다. 다혜한테 연락 왔었다. 방학하면 오겠다고. 자세한 날짜는 바로 편지로 하겠다고 하더라. 거긴 방학이 이른 모양이야." "다른 얘기는 없었어?" "유학생이 오래 전화 걸 여유가 있겠니? 왜 일본에 갔느냐고 묻길래 네가 시킨대로 친구가 놀러오라고 해서 갔다고 했다. 별로 믿는 것 같지 않더라. 네 편지 받고 일본에 있는 줄 알았지만 왜 갔는지가 궁금한 모양이더라. 그리고 미나가 요즘 우리집에 와 있다. 집이 텅 빈 것 같아서...... "됐어." "언제 올래?" "일 끝나는대로 바로 갈게." "다혜 올 때까진 안 오곤 못 배기겠지만 네가 없으니까 심심해 죽겠다." "내가 심심풀이야?" "좌우간 후딱 와라." "다른 연락은?" "김포에서도 궁금한지 여러 번 연락이 왔었고 여기저기서 왔었다. 다 메모해 뒀다. 미나가 바꿔 달랜다." "시간이 다 됐어. 다시 연락할께." 나는 재빨리 전화를 끊었다. 은주 누나는 다혜보다는 미나를 훨씬 좋아하는 편이었다. 미나를 아예 집안으로 끌어 들인 것도 은주 누나의 속셈인지 모른다. 때문에 은주 누나는 속이 편치 않은 모양이었다. 다혜 아버지가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에 부아가 솟은 것이었다. 또 다혜는 조금 뻣뻣한 느낌이 들고 너무 깔끔한 성미여서 은주 누나가 부담스러워 하는 편인데 비해 미나는 천성적으로 사근사근하고 귀여움받을 만큼 계집애답기 때문에 은주 누나 마음에 쏙 들었을 것 같았다. 은주 누나는 아예 내놓고 미나 편을 들기도 했었다. 다혜는 너무 콧대가 셀 거라는 기우를 지니고 있었다, 여자 콧대가 세면 남자가 피곤한 법이라고 얘기하기도 했었다, 적적해서 데려다 놨지만 다혜가 방학해서 돌아오면 퍽 서먹서먹한 분위기가 될 것 같았다. "형님하고 우리 누나하고 붙으면 꽤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아서 일부러 이리 왔어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누나예요. 아직 처녀인데 이곳에선 꽤 알아 주는 여자죠. 돈도 좀 벌었고 좋은 일도 많이 하는 여자라, 여기 사교계에서 폼 좀 재죠." "그러다 네 누나를 나한테 빼앗기면 어쩌려고 그래?" "으흐흐흐......" 병규 녀석은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정원 쪽으로 앉아 있는 주인 여자는 귀티가 흐르고 이지적인 얼굴을 소유한 여자라는 걸 담박에 알 수 있었다. "형님이 저 여자를 꼬시면 천하를 얻는 거나 마찬가집니다. 일본에서 난다 긴다 하는 재벌 자식들이 두 손 들고 도망갈 정돕니다." "뻥치지 말고 오라고 해." "그러죠." 병규가 자리를 뜨고 나서 한참 만에 주인 여자가 밝게 웃으며 걸어왔다. 병규 녀석이 침이 마르도록 칭찬할 만한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서 많이 뵌 듯합니다." 내 첫마디였다. "너무 평범하게 생겨두 그런 소리를 듣죠. 평범하게 생겨서 죄송합니다." 손미라. 뛰어난 미모. 어디선가 많이 본 얼굴. "병규가 우리 두 사람이 어울리면 죽이 맞을 거라고, 나더러 꼬셔보랍니다. 그래서 오시라고 했습니다." "저두 같은 얘길 들었어요. 전 이미 소문 들어서 압니다." "내 얘기를 들었다뇨?" "한국에서 알 만한 사람들은 장총찬 씨 다 알죠. 일본에 오셨다는 소문이 있더니 금세 여러 사람 잡아놨더군요. 그렇지 않아도 한번 뵈었으면 했었죠. 어떤 분인가 하고." "보니까 어떻습니까?" "우락부락하고 험악하게 생긴 분인 줄 알았어요. 꽤 미남이란 소문도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무섭다는 분이 미남일 턱이 없다고 믿었죠." "내 소문이 여기까지 퍼진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보슬비 아시죠?" "여기 있을 때 제가 데리고 있었어요. 걔들도 어찌나 장총찬 씨를 좋아하던지 질투나던데요." 보슬비라면 운우의 정을 나눈 여가수 자매의 이름이었다. "그럼, 혹시......"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살포시 웃는 그녀의 미소 속엔 그녀의 과거를 숨기려고 하는 의지 같은 게 들어 있었다. 손미라는 영화계에 진출했다가 혹독한 비판과 이른바 망나니들의 덫에 걸려 시끄러운 파문을 일으키고 잠적했던 여자라는 걸 알았다. "어디 숨어 있나 했더니 여기 숨어 계셨군요. 아무튼 반갑습니다." 손미라는 갑자기 수줍음을 탔다. 아마 내가 그녀의 과거를 줄줄 알고 있는데다가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설쳐대던 때여서 재벌 아들이라고 힘주고 다니던 녀석들을 늘씬하게 갈겨 주던 시절이었다. 망나니 녀석들은 아버지를 잘 둔 덕에 실력파 보디가드까지 거느린 채 별의별 해괴한 짓을 다하고 다녔었다. 여자 탤런트나 배우, 미녀들이나 여대생들, 여자대학에서 미녀로 선발된 학생이나 소문난 여자들을 강제로라도 후려내는 짓을 하고 다녔었다. 나는 어렸지만 망나니 녀석들을 한 녀석씩 물고를 내고 돌아다녔다. 아마 그 무렵에 어떤 묘한 장소에서 얼굴 붉힌 적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손미라는 지금 일본에서 제대로 자리잡은 것이었다. "인연이 참 묘합니다." "그런 것 같애요. 택시가 짐 싣고 뺑소니쳤다니 여행하시기 어려우시겠어요. 여기 계시는 동안 제 집에서 계시는 게 어때요? 괜찮으시다면......" 아주 정색을 한 채 말했다. "돈이야 나가서 벌죠, 뭐." "뭐해서 돈 버시려고요?" "호텔에 가서 손잡이 한번 당기면 먹을 건 만들지 않겠습니까?" "그 실력 여전하시군요." "우리나라에선 안 써먹습니다. 모처럼 왔는데 택시 운전사 녀석이 내 짐을 챙겼으니 그만큼은 나도 챙겨야죠." 손미라는 기분 좋게 웃었다. 내일부터는 여기서 신세 좀 지겠습니다." "대환영입니다. 저쪽 건너가 안채니까 서슴지 마시고 오세요. 대접 잘해 드릴께요." "그러죠. 그러다가 저녀석이 주문한대로 내가 손미라 씨와 사고라도 내면 어쩌죠?" "저도 그 걱정입니다. 장총찬 씨와 사고내면 놀림받겠죠." "저녀석 괜찮습디다. 데리고 다녀보니 눈썰미도 있고...... 특히 손미라 씨를 꼭 꼬셔보라니 말입니다. 내가 꼬시더라도 가능하면 쉽게 좀 넘어가 주십쇼. 나이 먹으니까 여자 꼬시는 데 거짓말을 그럴 듯하게 늘어놓기도 귀찮고 힘겨워집디다. 겁도 나고 용기도 줄고 말이죠." 쉽게 넘어가 주실래요?" "그럽시다 까짓 거." 우리는 마음이 통한 것 같았다. "오늘 관광안내는 제가 맡죠." "바쁜 양반을 괴롭히고 싶진 않아요." "아녜요. 병규도 모처럼 왔기 때문에 볼일도 많을 거예요. 제 일보게 내버려두고 우리끼리 다니죠." "저녀석 질투할 텐데." "할 수 없죠 뭐." 병규가 이곳 저곳에 전화를 걸어 내가 부탁한 표창을 밤까지 만들어오도록 지시하고는 개인시간을 좀 달라고 떼를 썼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 두 사람이 뭉치기로 해서 너를 빼 놓을 참이다. 가능하면 며칠 안 보여도 되니까 걱정 말고 일 봐라." 내가 약 올리듯 이렇게 말하자 병규 녀석은 괜히 어금니를 물었다. "그렇다면 개인시간 취소합니다. 악착같이 따라다니며 방해해야겠어요." "좀 봐 주라. 모처럼 말 통하는 여자 만났다." "그럼 폭로하겠습니다." "뭘?" "형님이 별로 외롭지 않게 일본 여행을 했다는 걸 말입니다." "남이 들으면 진짜인 줄 알겠다." 나는 얼른 이렇게 말을 받았다. 녀석이 일부러 심통을 보여 주는 것 같았다. 그래도 밉지 않은 녀석이었다. 그만큼 재치가 있고 의리가 있는 사내였다. "남이 들으면 거짓말인 줄 진짜 질투의, 타는 가슴의, 분노로 일그러진 한 젊은 혈기로 도망친 줄 아세요. 두 분의 행복을 빌면서 말이죠." 우리는 녀석의 말에 신바람나도록 웃었다. 병규가 나가고 나자 손미라는 안채로 안내하여 면도와 샤워를 하게 해 주었다. 꽤 돈이 들었을 것 같은 집을 갖고 있었다. 실내장식은 거의 모두가 한식이었고 장식품도 골동품 같은 것이 많았다. "왜 여태 혼자 삽니까?" 내가 물었다. "총찬 씨 같은 남자를 못 만나서죠. 그럴 자신도 없구요. 제 과거 아시잖아요? 어려서 정말 아무 것도 모른 채 그런 소문난 여자가 됐었어요. 앞으로의 삶이 나는 손미라의 그런 태도에 왠지 마음이 푸근해졌다. 마음 한쪽은 쓰루바시의 아주머니에게 자꾸 가 있었고 또 한쪽은 다혜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요도가와(淀川) 강을 끼고 펼쳐진 대도시 오사카의 한편엔 오사카 성이 우뚝 솟아 있었다. "풍신수길이 천하통일 근거지로 만들었다는 성이죠." 인공으로 만든 강으로 둘러싸여 적으로부터 성을 보호하려는 대단위 공사를 했다고 했다. 호리(堀)라고 하는 인공 강은 습기찬 계곡 같았다. 어디서 돌을 가져왔는지 큰 돌을 쌓아 성벽을 만들었는데 돌마다 새겨 놓았고 총 쏘는 구멍까지 만들어 놓았다. 놓았는데 일본인들을 우리가 왜놈이라고 부를 만큼 작은 체구라는 게 보였다. 욕심나는 건 칼이었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보존 상태가 좋아서 그런지 일본도의 백동빛 나는 상태는 내 구미를 상당히 자극했다. "저 일본도 하나 훔쳐 버리면 어떨까요?" "괜찮죠. 장총찬 씨라면 저까짓 거 하나 못 빼내겠어요?" 손미라는 이렇게 말했다. "여기 물건들은 아무리 보아도 우리나라에서 훔쳐갔거나 모방한 게 꽤 많은 것 같애요. 성의 형태나 탑의 형태도 말입니다." "일부 양심적인 학자들은 인정하잖아요. 여기 살면서 느낀 건 일본이란 남의 걸 뛰어나다는 걸 알게 됐어요." 풍신수길이라면 임진왜란의 주인공인 셈이었다. 나는 그의 유물들을 ㅎ어보며 당시에 내가 생존했다라면 멋지게 한판 붙어 늘씬하게 두들겨 패서 다시는 칼을 잡지 못하도록 치도곤을 냈을 것 같았다. 단 한 방에 이마에 구멍을 내버렸을 텐데...... 내가 그런 얘기를 장난처럼 말하자 손미라는 배를 쥐고 웃었다. "지금이라도 일 대 일로만 붙으면 일본쯤 못 먹겠어요?" "먹죠. 맨주먹으로만 붙으면. 그래서 총독부를 세우는 거죠. 그러나 왜놈들처럼 남의 나라 사람을 못 살게 굴고 고문을 하진 않을 겁니다. 다만 일본 황손인가 양코배기하고 교배종을 만들어 버려야겠죠. 남의 왕손의 씨를 말려버리는 이런 독종들에겐 나도 마찬가지의 악랄한 짓을 해 보고 싶어요. 동물에게 교미시키듯 말이죠. 천황이라는 작자가 실질적인 전쟁 원흉이고 우리나라 사람을 못 살게 군 친구인데도 아직까지 존경받고 있는 걸 보면 천벌이란 너무나 불공평해요. 언젠가는 천벌을 받겠죠." "맞아요. 사실은 전범 제일호인데도 살아 있고 남의 나라 사람 그렇게 못 살게 굴어놓고 얼굴 두껍게 살아 있죠." "사람 같으면 왜놈들이 항상 주장하는 사무라이 정신으로 칼을 물고 스스로 죽었어야죠. 하늘도 무심하고 천벌도 무심한 거죠." 풍신수길이란 녀석하고 천황인지 천벌받을 친구인지를 싸잡아 두들겨 패며 오사카 성을 내려왔다. 오사카 성 아래의 넓은 길과 잔디밭엔 현란한 옷차림의 사내 녀석들과 계집애들이 오디오 세트를 설치해 놓고 신바람나게 춤을 추고 있었다. "다케노고 족(竹의 族)예요." "말은 많이 들었죠. 왜놈들은 남의 자식이 무슨 지랄하고 다니든지 상관 않는 놈들이니까, 저 정도라면 손뼉 쳐주겠군요." "그렇진 않은 것 같애요. 시끄럽게 비판도 하고 우려도 표명하고 했었지만 늘면 늘었지 줄진 않는 모양이예요." 사내 녀석들은 잔뜩 기름 발라 머리 가죽옷 아니면 스포츠형 머리에 경쾌한 차림이었다. 계집애들은 기기묘묘한 복장이었는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짧고 새빨간 원피스에 속치마가 훨씬 긴 옷에다 빨간 리본으로 머리를 묶고 속옷이 펄렁펄렁 보이게 흔들어대는 것이었다. 더러는 까만 가죽치마와 점퍼 차림도 있었고 가슴을 반쯤 내놓고 잘 처먹었다는 걸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이 온몸을 흔드는 애들도 있었다. 춤사위는 급했다. 트위스트와 고고, 림보와 아프리카 토인들의 춤을 섞은 것 같았다. 이런 다케노고 족은 공원이면 어디든 모여들어 눈요깃거리를 제공한다고 했다. 늘어났고 현장에서 책가방을 열고 새빨간 원피스로 갈아입고 춤을 추는 계집애들도 많았다. "쟤들 모두 어린 것 같죠?" 내가 애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럼요. 대개 중고생학들예요. 열 댓 살 아니면 고작해야 열 여덟이죠." 나는 그들의 인사법이 악수를 세 번씩이나 하며 끌어안고 흔드는 걸 쳐다보며 이상스런 통쾌감을 맛보았다. 그래, 즐기는 일에 얼빠진 녀석들이 일본 천지를 빨리 메우거라. 실컷 즐겨라. 밤낮 없이 즐겨라. 그래서 배배 꼬인 녀석들과 안경 쓴 녀석들과 신나게 붙어라. 다케노고족이 흔들어대는 바로 맞은편 건물은 도경찰부였다. 도경찰부 앞에서 부러운 생각도 들었다. "한번 겨뤄 보시죠?" 손미라가 이렇게 말했다. "저 애숭이들하고 말입니까?" "어때요? 장총찬 씨 춤 솜씨는 여기까지 소문났던데요." "정력이 아까워서 참을랍니다." 우리는 광장을 빠져나와 고라이바시(高麗橋) 쪽으로 차를 몰았다. 오사카 시내를 한바퀴 돌아 들어가자는 손미라의 제안이었다. "여기 있는 재일교포들이 왜놈들한테 꽤 당하는 모양인데 손미라 씨는 괜찮았아요?" "저도 첨엔 혼 좀 났어요." "그놈들 버르장머리 좀 고쳐놔야겠어요. 손목을 못 쓰게 하든지......" "대충요." "아마 들으신 건 빙산의 일각일 거예요.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속으로는 더 심해요. 그럴데다가 일본 텔레비전이나 신문사가 의도적으로 재일교포에게 불리한 보도를 하고 있어요. 심한 경우엔 제일교포 사진이나 가족까지 공개하는데다 한국인이 조그만 잘못이라도 있으면 대서특필해대고 일본인은 감추어 버리는 짓까지도 해요. 한국인이 일본에 와서 나쁜 짓을 하면 얼마나 하며 무슨 힘이 있다고 그런 짓을 하겠어요." 손미라가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 어쨌거나 제일 예쁜 여자였는데 일본놈들이 꽤 못 살게 굴었다는 건 짐작이 가요." 여자들 중에서 뽑혔다는 것 뿐이죠. 정말 예쁜 여자들은 나오지도 않아요. 저도 우연히 나갔다가 뽑혔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죠. 어떻게 사느냐의 문젠데......" "그건 그렇다치고 손미라 씨가 나를 좀 도와 줘야겠어요. 사건을 캐는데 이녀석 저녀석 건드릴 시간도 없고 단칼에 왕초놈을 잡고 싶은데 말예요. 그래서 물고를 낼 작정입니다." "어려운 문제는 아니지만 쉽지도 않아요. 벌써 여기에 소문이 퍼졌을 거고 장총찬 씨가 쓰루바시에 머물게 되면 증거를 대번에 없앨 거니까요. 그리고 여기 야쿠자들 가운데 신사도 있지만 잔악하고 더러운 무리도 많아요. 장총찬 씨가 그 사건을 캐나가다가 그들 일당과 붙는다면 당할 수도 있죠." "보복을?" "그래요. 장총찬 씨는 일을 해결하고 돌아갈 거 아녜요. 그럼 여기 남아 있는 한국인들은 짐을 싸거나 앉아서 계획적인 보복을 당하게 되죠." "그 생각까진 못했어요." "경찰에 고발하지 못하는 것도 그런 사연 때문이죠. 고발했다가 얼마나 큰 보복을 당한 사람이 많은 줄 아세요? 저도 그런 피해자 가운데 한 사람예요. 그러니까 요즘은 아예 마음 놓고 한국인이나 학생들을 범죄 속에 끌어넣어가지고 사건이 터지면 덮어씌우고 저희들은 도주하거나 숨어 버려요. 히로뽕 밀조나 운반이나 밀매에 한국인을 끌어들여 엉뚱한 피해를 허다하죠." "손미라 씨는 그럼 어떻게 견뎠습니까?" 나는 갑자기 손미라가 이런 곳에서 자리잡고 버티는 배경에는 묘한 흥정이나 불결한 상상력의 일들이 벌어졌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운이 좋았던 거죠." 그 이상은 말하려고 하지 않았다. 병규 얘기로는 아주 순탄하게 자리잡은 여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했다. 얼굴 예쁜 것에 비하면 억척스러운 게 이상할 정도로 집요한 성격이며 얼굴 팔아 돈 번 여자가 아니라고 했다. "도와 주실 수 있겠네요. 그런 내용까지 안다면 말입니다." "도와 드릴 수 있어요. 제 청을 들어 "무슨 청입니까?" "나중에 말씀 드릴게요. 무조건 들어 주신다고 약속하세요. 장총찬 씨를 곤란하게 해 드리진 않아요." "좋습니다." "쓰루바시에는 가능하면 가지 마세요. 필요하시면 그 학생을 데리고 올 수도 있어요. 그리고 쓰루바시의 한국인들과는 별개의 사건을 찾아서 엉뚱한 곳에서 치고 들어가야 돼요. 한국인들에게 조금이라도 피해를 줘선 안 되니까요. 그리고 방송국 기자와 프로듀서를 같이 엮어 들어갈 수 있게 해야 돼요. 그 친구들은 말로는 한국통이니 하지만 실제로 지나친 국수주의자들이라, 계획적으로 그런 사건 현장에 뛰어들어가서 한국인을 골탕먹이는 얘길 들으셨는지 모르지만 지난 번에 방영된, 한국 처녀가 일본인에게 사기를 쳤다는 것도 사실은 엉뚱한 피해예요. 일본 지하 조직의 장삿속에 한국 처녀나가 속은 것인 줄 빤히 알면서, 말하자면 더 큰 피해자인데도 텔레비전에선 한국 처녀가 결혼을 빙자한 사기로 경제적 손실을 입히고 계획적으로 농락한 거라고 꾸며냈어요. 그 친구들은 계속 그런 식의 보도를 하고 다녀요. 또 그들 뒤엔 자료를 제공해 준다는 명목으로 지하 조직과 손이 닿아 있어요." "그러니까 방법이 달리 있다, 이거 아닙니까?" "그렇죠. 제가 가진 정보에 의하면 지금 지역으로 팔아넘기는 대단위 장사가 시작됐어요. 또 히로뽕 밀매와 제조작업 때문에 두목은 항상 본부를 지키고 있어요. 차라리 그 사건 쪽으로 치고 들어가는 게 좋다는 생각예요. 정보 제공은 그 지하 조직과 결별하고 일전도 불사하겠다는 구(舊) 요더가와 파에서 나온 거니까 정확할 거고 처음엔 구 요도가와 파의 사주를 받은 것처럼 루머를 퍼뜨리는 거예요." "난 자신 없는 것들뿐이군요."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 마세요." 나는 한참 동안 요도가와 파와 구 요도가와 파의 내력이나 분열에 관한 얘기를 들었다. 기타 노신지 지역의 상업지역을 둘러싼 분배에서 결별을 선언한 요도가와 파의 일원이며 지역 책임자는 바로 요도가와 파의 부두목이 겸직하고 있었다. 작전은 급습과 우회전술 두 가지였다. 급습이라면 무조건 뛰어들어 붕괴작전을 쓰는 거였고 우회전술이라면 계획적으로 쓰루바시 지역의 잔챙이들을 건드려 공개적인 도전을 받은 뒤에 결투를 하는 거였다. 그러나 결투란 결국 그들에서 충분한 무기 제공과 잔악하고 비열한 행동까지 불사하는 구실을 주게 된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무리 악당이라도 명분 없이 급습할 순 없잖아요? 난 결코 뒤통수를 쳐본 적은 없어요. 더구나 아무리 명분이 그럴 듯해도 없지요." 내 말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던 손미라가 궁리 끝에 말했다. "그렇다면 사사로운 제 사연을 얘기해야겠네요. 전 여길 떠나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언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는 입장예요. 제가 이만큼이라도 재산을 늘이고 탈 없이 살 수 있었던 건 사실 구 요도가와 파의 두목 다나카(田中)의 후원 때문이였어요. 다나카는 암흑가에서 불려지는 이름이고 본명은 김인식(金仁植)예요." "그럼 한국인이란 말입니까?" "그래요. 제가 여기 오게 된 것도 그분 덕이고 가난한 저를 뒷바라지하며 나쁜 길로 빠져들지 않게 한 것도 그분입니다. 또 한국인을 못 살게 구는 야쿠자와의 잦은 결투 때문에, 토박이 야쿠자와 다른 야쿠자 조직에서 충동질해서 분열시킨 거죠. 그분은 한국인을 결코 괴롭히지 않아요. 한국인을 보호하기 때문에 지금 곤경에 빠져 있어요. 반대파들은 그분을 아주 없애기 위해 한국인을 더 괴롭히고 있고 텔레비전이나 신문기자를 동원하여 역으로 다나카를 궁지에 몰아넣고 있어요." "그 사람이 아무리 한국인을 보호한다지만 난 편을 들 수는 없습니다. 그가 야쿠자 두목이란 사실은 내 비위에 안 맞아요." "그러니까 제 사정을 말씀 드리는 거예요." "해 보세요." 다나카 주변의 사람을 하나씩 제거해 나가고 있는데 저도 해당자죠. 한국인이라는 사실 하나 때문에 그들은 저를 납치하여 공개적인 집단윤간을 하겠대요. 그래서 여기서 더 이상 살 수 없게 만들 작정이죠. 더구나 제가 하는 사업에 방해공작이 심해요. 앞으로 한 달 안에 이 사업체를 팔지 않으면 폭파하겠다는 협박을 받고 있어요. 더구나 그걸 사려는 사람은 그들의 패거리와 손이 닿아서 헐값에 사겠다는 작전이죠. 그런 식으로 사업을 하다 망해서 이사 간 사람이 여러 명이나 돼요. 한국인이 사업 잘 돼는 꼴을 못 보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진행됩니까?" "안 되면 헐값에 팔 수밖에 없는 없으니까 그렇게라도 빼가지고 한국으로 돌아가라는 겁니다. 그 사람이 불쌍해요. 남의 나라에 산다는 게 이처럼 서러울 수가 있겠어요? 저도 어차피 돌아갈 작정입니다. 그러나 내 피와 땀으로 만든 이 사업체를 헐값에 왜놈에게 빼앗길 순 없어요. 차라리 내 손으로 불을 질러 버리고 보험금이나 타가지고 떠날까도 생각했었어요." "좋아요, 그 일이라면 나서죠. 뿌리를 캐보죠." "저는 그 사이에 다른 사람에게 팔 수 있어요. 그리고 떠나겠어요." "그렇다면 김인식인가 다나카인가 하는 사람은요?" "걱정이지만 그 나름대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예요. 한국인을 보호하는 일만 중지해 "그건 안 되죠." "물론 그 사람은 결코 물러나거나 좌절할 사람은 아닙니다. 죽을 때까지 한국인을 위해 싸울 사람예요." "우리나라에선 일본 사람을 못 살게 굴지 않는데 어째서 이놈들은 그 지랄이죠? 그리고 그 기자란 자식들은 어떻게 잡아야죠?" "시끄러워지면 보나마나 나설 겁니다. 또 일본인을 보호하고 한국인만 범죄자로 몰아ㅂ이겠죠." 우리는 쓰루바시에서 잠깐 머물며 아주머니의 하소연을 더 들어야만 했다. 나는 빈 주먹을 쥐었다 펴는 울화를 삭이지 못한 채 쓰루바시를 나왔다. 요절을 내고 말리라. 하나님. 당신은 도대체 누구 편입니까? 많은 사람들은 당신을 하늘에 계신 정의의 주인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왜놈들의 저런 소행을 보고도 침묵으로, 아니 오히려 그들 편이 되어 악마 짓을 하는 겁니까? 당신은 정말 하늘의 주인이며 진실을 지키는 자가 맞습니까? 여보쇼, 하나님. 그런 하나님이라면 누군들 못해먹겠습니까? 사후의 심판이 어쩌고 하늘의 정의가 어쩌고 천당이 어쩌고 하면서 사람들에게 겁이나 주지 마쇼. 세 살 먹은 꼬맹이가 하나님 해먹는 게 훨씬 낫겠소. 당신, 혹시 악마의 앞잡이 된 거 아뇨? 그렇지 않고서야 천벌을 받아야 할 일본 천황이란 늙은이가 저렇게 힘 주며 살아 있어야 할 이유도 없고 아직도 한국인을 괴롭히는 악독한 무리가 저렇게 살아갈 순 없잖습니까? 하나님, 당신은 언제까지 그렇게 사람을 가지고 놀 거요? 착한 사람들에게 귀싸대기 맞을 짓만 골라가며 하는 그놈의 심보는 도대체 뭐요? 우리나라 고전인 흥부전을 보면 놀부가 오장칠부라 심통이 하나 더 붙어 개차반이었다는 걸 알 거요. 당신 하는 짓이 꼭 그따위 올시다. 흥부전이나 좀 읽으슈, 개차반 양반아. |
첫댓글 즐감 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새해복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