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날에 붙여...>
일생에서 운명적인 만남이 있다. 그 첫째가 부모님과의 만남이고 둘째가 스승과의 만남이라고 생각한다.
시대가 변하여 스승의 은혜에 대한 모범적인 사례를 잘 찾아 볼 수 없는 것이 못네 안타깝고 슬픈 일이다.
선생은 많으나 진정한 스승은 없다는 말이 사회 통염으로, 회자 되는 것이 오늘 날 이 시대의 상황에, 우리 모두는 반성하고 되 돌아 봄은 나만의 생각인가?
이 또한 물질 문명의 극치가 사제 지간의 숙명적인 관계를 소홀히 하고 자녀들 앞에서 예사로 선생을 폄하하고 못 쓸 사람으로 치부하는 오늘의 사태가 못 네 서글픈 일이다.
지난해 여러 명의 교사가 학교에서 또는 집안에서 스스로 삶을 포기하면서 극단적인 생을 마감한 사례가 여러 명 있었다.
이 모든 원인은 학부모들이 자기 자녀에 대한 지나친 욕심과 교사와의 불신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한나라의 희망과 발전은 교육과 종교가 똑바로 서야 된다는 것이 나의 한결같은 믿음이다.
최근에 의료계의 의사 증원 문제를 잘 살펴보자.
오늘 아침 신문에 보니 보건복지부 통계에서 우리나라, 평균 의사의 연봉이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지난 2020년 기준으로 국내 종합병원 봉직의(월급 의사)의 연간 평균 임금 소득은 우리 돈으로 약 2억6000만원이었다.이는 19만5463달러 수준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봉직의 평균 임금 소득 10만8482달러보다 8만6981달러 즉, 1억1600만원 정도 더 많았고, OECD 국가 중에는 가장 연봉이 높고, 심지어 독일이나 네들란드 의사보다도 연봉이 높다는 것이다.
안과, 정형외과, 피부과 등은 연봉이 6억에 달한다는 발표도 있었다.
의사는 어떤 사람인가? 우선 학교에서 줄곧 반이나 전교에서 1등을 한 학생이 자라서 의사가 된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들이 환자를 돌보는 것을 사명으로 삼고 의사가 되고자 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요즘은, 미국에서 시작 된 환자 중심의 봉사 활동이였던 청십자 운동이란 말이 전혀 들리지 않는다.
이 운동은 한국에서도 1968년 5월에 시작되었다.
부산복음병원 원장 장기려박사 등이 주축이 되어 전개했는데, 1970년 김명선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기독교의 사회, 교계 지도자, 사회사업가 등 각계에서 참여했다. 병원으로는 연세대학교 부속 세브란스병원, 국립의료원, 적십자병원, 이화여자대학교 부속병원 등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고 알고 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생명을 다루는 의사들도 대부분 자기 개인의 이익을 위한 이기심이 오늘의 의료 대란을 키우고 있는 것같이 보인다. 이 또한 부모나 학교의 교육의 문제에서 그 원인을 찾고 싶다.
오늘 스승의 날을 맞이하여 나는 민족의 스승을 떠 올리게 된다.
3.1. 독립 선언서에 기독교 대표로 서명하신 남강 이승훈 선생님이 그립다. 선생은 머숨 출신으로 놋그릇 공장에서 일하다가 주인의 배려로 놋그릇 가게를 차려서 돈을 많이 벌었다. 하루는 평양 시내에 나갔다가 1907년, 도산 안창호 선생님의 연설을 듣게 되었다. 연설 요지가 “우리가 일제로부터 독립을 앞당기기 위해서는 청년들을 교육 시켜야 된다는 것”이었다. 이 연설을 듣고 집에 돌아 와 3일간 밤낮으로 고민하다가, 가산을 정리하여 오산학교를 세우게 된다. 오산학교는 우리나라에서 독립운동가가 가장 많이 배출 된 학교이다.
남강 이승훈(1864~1930)은 평안북도 정주 오산에서 태어난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이다. 민족혼을 가진 인재를 양성하는 데 힘쓴 것뿐만 아니라, 1919년 3 · 1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에 참여하며 독립을 위해 앞장선 분이기도 하다.
학교 지붕에서 비가 세면 자기 집 기와를 뜯어다가 가져와서 수리했다고도 한다. 대부분의 학교가 일장기가 펄럭 일 때도 오산학교만은 우리 태극기가 휘날렸다고 한다.
돌아가실 때 유명한 유언을 하신다. “내가 죽으면 내 시체를 생물 표본으로 만들어서 우리 학교 중앙 현관에 전시하도록 하여라“ 제자들이 선생님의 유언에 따라, 선생님의 시신을 서울 대학병원으로 옮겨서 뼈와 살을 해채하는 작업을 할 때, 일본 경창이 찾아와서 회유와 협박을 해, 다시 봉합을 하여 오산학교가 잘 내려다 보이는 산에 매장을 하였다고 한다.
남북으로 갈라져 있으니 선생님의 묘소를 가볼 수 없는 것이 못에 안타깝다.
이후 안창호 선생의 권유로 신민회에 참여하게도 되었다.
또 다른 민족의 스승은 한서 남궁억 선생님을 꼽고 싶다.
1863년에 태어나셨다. 집안이 좋아서 1883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관립 영어학교에서 영어를 배웠다. 후일 영어에 능통하여 ”독립신문 영문판“을 발행하여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미국 등에 알리는데 크게 기여했다.
독립협회창립, 황성신문사 사장, YMCA이사 들을 거쳐 배화여학교 역사 선생을 9년간 하면서 ”꽃 핀 무궁화의 한반도 지도를 디자인하여 여학생들에게 수 놓게하여 무궁화 수예를 통하여 독립정신을 고취 시켰으며 전국으로 전파 되어 각 가정에 장식이 되기도 하였다.
1918년에 고향인 강원도 홍천군 보리울로 낙향하여 모곡학교를 세워 기독교 신앙을 토대로 청소년 교육과 민중 교육에 열정을 쏟으셨다. 학교 교정에 무궁화 묘포장을 만들어 약10만 주의 무궁화를 삽목하여 길렀다. 봄이면 무궁화 모종을, 꼴 망태에 지고 학교와 교회에 나누어 주었다. 무궁화 묘목을 널리 보급 한다는 사실이 일본 경찰에 탐지 되어 1933년 11월에 70세의 나이로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 되었다. 투옥 시키 후 일본은, 전국의 무궁화 나무를 뽑아서, 불태웠다고 한다. 내가 다녀 본 봐로는 우리나라에 무궁화 노거수를 그의 찾을 수 없었다. 일본 경찰의 손이 미치지 않은 백령도에 무궁화 노거수 천연기념 물 제 521호로 한그루 있었는데, 백령도 연화리 무궁화는 2012년 태풀 볼라벤의 피해로 급격한 수세 약화로 고사 되어 2019년11월1일에 천년기념물에서 해제 되어 안타까움을 더 하고 있다. .백령도내 1930년대 건립된 중화동 교회 앞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수형이 우수하고 높이가 6.3m로 국내 알려진 무궁화 중 가장 크며 꽃이 홍단심계로 순수 재래종의 원형을 보유하고 있었다.]
무궁화 나무의 높이는 6.3m, 가슴높이 둘레는 북쪽가지 0.69m, 남쪽가지 0.72m이다. 수관폭은 동서 6.3m, 남북 6.3m, 근원둘레는 1.23m, 수령은 90~100년으로 추정된었던 무궁화였다.
1년간 모진 고문과 옥고를 치르다가 풀려나, 그 휴유증으로 1939년 11월에 통일을 보지 못하시고 세상을 떠나셨다.
돌아가시면서 유명한 유언을 남기셨다.“ 나는 비록 독립을 못보고 죽게 되나 너희들을 반드시 독립 된 대한 민국을 보게 될 것이다. 내 시체를 학교 무궁화 나무 아래에 묻어서 무궁화의 거름이 되게하라”
해마다 스승의 날이면 위 두 분의 민족 스승이 그립고 보고 싶어진다.
나에게 공부한 많은 후학분들도, 선생님으로 살아가는 분이 많이 있다. 오늘 같은 스승의 날에 함께 자축하고 싶다.
그리고 다시 한번 더 나 자신부터, 반성하는 날이 되기를 바랄뿐이다.
스승의날 5.15 여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