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대한 결심
성경본문 에스라 7:8-10
8. 이 에스라가 올라왔으니 왕의 칠년 오월이라
9. 정월 초하루에 바벨론에서 길을 떠났고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 오월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이르니라
10.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
오늘 본문의 배경은 주전 457년 아닥사스다 왕 제 7년에 바벨로니아로부터 해방의 명령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 약 2,000명이, 그들이 그토록 못잊어 하던, 사랑하는 조국, 유대 땅 이스라엘을 향해서 찾아오는 귀환의 여정 가운데 오르게 되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서 고레스 원년 B.C 536년 경에 제 1차 귀환이 있었습니다. 그때 5,000명 이상 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든 고향에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고향에 돌아오자 마자 제 1차 적으로 착수한 작업이 성전 건축 이었습니다. 이것이 일차 귀환 때 일어났던 첫 번째 사역입니다.
그 후에 에스라를 중심으로 2차 귀환이 이루어지고, 그 후 B.C 445년에는 느헤미야를 중심해서 3차 귀환이 있게 되고 그래서 드디어 그들이 간절히 원했던 성벽 재건을 완성 하게 됩니다. 이제는 삶의 터전인 성전도 건축 되었고, 삶의 안전 보장을 위한 성벽도 완성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아직 완성되지 않았던 귀한 사역이 남아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심령의 건축 이라는 것 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쓰임 받은 인물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 <에스라> 였습니다. 이것을 에스라의 성서 비젼이라고도 합니다.
바벨로니아에서 예루살렘 까지의 거리는 약 520마일쯤 됩니다. 이것은 토로토에서 뉴욕 정도의 거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뉴욕 까지 운전하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열악 하고 불편 했던 그 당시 시대에서는 이런 귀환의 결단은 굉장한 결단을 요구하는 작업 이었습니다.
본문 8절에 보시면 에스라와 그 일행이 돌아 오는데 약 5개월의 시간이 필요 했습니다.
스 7:8 “이 에스라가 올라왔으니 왕의 칠년 오월이라 9 정월 초하루에 바벨론에서 길을 떠났고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 오월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이르니라”
그 먼 길을 돌아 오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 중에 어떤 사람은 자기의 고향에 돌아오면서 정치에 대한 꿈을 가지고 돌아오던 애국지사들도 있었을 것 입니다.
그들 가운데는 <페허가 된 조국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경제적인 건설>이라는 생각 속에서 <경제부흥의 비젼과 청사진>안고 돌아오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 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나라의 발전을 위해서는 <과학의 발달>처럼 시급 한 것이 없다는 생각으로 과학발전에 대한 비젼을 갖고 오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 입니다. 이런 모든 비젼은 한 나라의 건설을 준비하면서 꼭 필요한 것들 이었습니다.
그러나 <에스라>라는 사람은 다른 비젼을 가지고 이 먼 길을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5개월의 험준한 여행의 여정 속에서도 끊임없이 에스라의 가슴을 불태우고 있었던 하나의 비젼이 있었다면 그것을 우리는 <성서 비젼, 말씀비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 새로운 문화,새로운 경제, 새로운 정치, 이 모든 것이 필요하지만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하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삶의 혁명없이 새로운 삶은 결코 가능할 수 없었다고 믿었던 에스라, 그는 한가지 중대한 결심을 안고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오늘 본문은 에스라의 이런 <결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스 7:10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에스라의 결심은 무엇 입니까? 말씀을 연구하며, 준행하며, 말씀을 가르치고자 하는 결심 이었습니다.
첫째로,에스라는 율법을 연구하기로 결심 했습니다.
여기서 연구라는 단어는 <관심을 갖고 구하고, 알아보고, 캐어 묻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편기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시 111:2 “여호와의 행사가 크시니 이를 즐거워하는 자가 다 연구하는도다”
여러분 하나님을 연구하고 계십니까? 말씀을 연구하고 계십니까?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연구하고 계십니까? 그냥 교회에 왔다 갔다하는 식의 신앙생활은 대단히 무서운 것 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언제라도 교회를 떠나고 바뀔 수 있는 사람들 입니다.
사도행전 17장에 나오는 모범적인 두 교회를 생각해 보십시오. <데살로니가 교회> 와 <베뢰아 교회> 불과 1년 미만의 어린 교회들이 그 당시 수많은 교회들의 모본이 되었고, 믿음의 소문이 각처로 퍼질 수 있었던 비밀이 무엇입니까? 이들은 성경을 받아 들이는 자세가 달랐습니다.
살전 2: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행 17:11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사도행전 18장에 보면 <아볼로>라는 유능하고, 성경에 능하며, 언변도 뛰어난 사람이 소개 되고 있습니다.그런데 이 사람의 설교를 듣던 사람 가운데 <브리스가와 아굴라>라는 부부가 있었는데 그들은 아볼로의 설교가 논리적이고, 웅변적 이고, 성경적 이긴 하지만 <중요한 복음의 핵심>이 빠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를 불러 덕스럽게 지혜롭게, 가르쳐 주므로 아볼로를 훌륭한 설교자로 만들었습니다.
이런 평신도가 필요합니다.
한국교회의 강단이 변화가 없고, 강단의 권위가 없어지는 이유는 대부분의 책임이 평신도에게 있다고 생각 합니다.
무책임한 얘기가 발표 되어도 아무런 근거 없이 <아멘>을 연발하는 사람들이 문제 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런 잘못된 메시지 앞에서는 그것을 부정 할 수 있는 용기도 때때로 필요하다고 생각 합니다.
초대교회는 말씀 연구에 헌신 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직분을 수여 한 적이 없습니다.
초대교회에는 <교육의 다섯 단계>가 있었습니다.
1.하나님께 영광 돌리면서 은헤의 시간을 갖는 <카리스마>가 있었고,
2.말씀 안에서 죄를 회개하는 <케리그마>가 있었고,
3.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교육 즉 <디다케>가 있었고,
4. 말씀을 나누는 친교의 <코이노니아>가 있었고,
5.성례전에 참여했던 성도들이 다시 세상에 나아가 봉사하는 <디아코니아>가 있었습니다.
카라스마,케리그마,디다케,코이노니아,디아코니아 ….이것은 다 성서연구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종교개혁 이후 약해진 교회를 다시 부흥 시켰던 <모라비안의 경건주의 운동>의 배후에는, 철저하게 성서교육을 시켰던 <필립 스펜서 , Philp Spenser> 가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 할 수가 없습니다.
이 영향을 받고 회심한 웨슬리는 <속회운동>을 일으켜 성서연구를 철저히 실행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되버린 자기의 조국 덴마크를 일으키기 위해 범국민 운동을 일으켰던 그룬두비 목사님은 전 국민이 공부할 수 있는 고등공민 학교를 만들었는데 그 교과 과정 중에 60%가 성서연구였다고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텐마크의 기초를 쌓았다는 사실을 아무도 부인 할 수 없습니다.
한국교회의 성장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모두 <한국교회는 사경회와 함께 성장한 교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옛날 사경회는 하루에 3번 씩 일주일 동안을 말씀 연구에 헌신 했습니다.
교회가 약해지는 이유는 강단이 약해졌기 때문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보다는 인간의 지식이 강단에서 판을 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는 새 성전 건축이라는 엄청난 과제를 앞에 두고 어떤 결심을 해야 하겠습니까? 이제부터 라도 성서를 공부하기로 결심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서연구가 없는 교회 출입은 성전 땅만 밟는 것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신자들을 보시면서 한탄 하실 것 입니다.
사 1: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