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김인주(金仁珠) - 파란중첩의 생애 - 2. 선생님과 만남 1 나는 결혼 생활을 하면서도 교회 생활은 열심이었다. 그러던 중 평양서문외교회(西門外敎會) 부인회장이며 나의 내종 사촌 언니 되는 김종화(金宗嬅) 씨로부터 “서울서 훌륭한 선생님 한 분이 오셨는데 같이 가서 은혜받자”라고 하여 1946년 6월 10일에 찾아갔다. 그날 뵙게 된 분이 문선명 선생님이시다. 2 당시는 나최섭 씨 방에서 예배를 보았는데 선생님께서는 온갖 정열을 다 쏟으시면서 기도하셨고, 그 인자하신 모습과 또 눈물로 호소하시는 설교에 나 자신도 모르게 통곡하고 말았다. 3 설교 말씀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뜻을 다 이루지 못하시고 억울하게 돌아가신 서러움과 하나님의 심정을 토로하시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다음 날부터 장로교회와는 발을 끊고 선생님을 계속 모시면서 말씀을 들었다. 4 선생님께서는 처음에 경창리 상수구(景昌里 上水口) 다리 밖의 나최섭 씨 댁에서 집회를 하시다가 방도 좁아 정명선(鄭明善) 오빠(김종화 언니 남편) 댁에 모여 예배를 보게 되었다. 5 나는 이 뜻을 알고 난 첫날 밤에 꿈을 꾸었다. 내가 어느 큰 동굴을 지나가야 되는데 들어가기 전 어떤 분이 ‘이 동굴을 지나가려면 너무나 힘이 들고 고통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가던 길을 멈추지 말고 앞으로 전진하라’라고 말했다. 6 동굴 속으로 한참을 걸어갔는데도 너무 캄캄하고 험하여 더 갈 마음이 없어서 되돌아가려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문득 ‘전진만 하라’라는 말이 생각나서 험한 길이지만 한 발자국씩 전진했더니 환한 빛이 멀리서 보였다. 7 계속 전진하여 동굴을 빠져나오니 그곳에는 나를 인도해 준 언니와 선생님께서 놋대야에 물을 가득 담아 놓고 계셨는데 그 옆으로 큰 상여가 나가면서 나의 하반신에 더러운 물을 끼얹었다. 얼마나 더러웠는지 울고만 싶었다. 8 그때 선생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물로 나를 깨끗이 씻어 주시고 앞을 가리키며 저기 보이는 동산으로 가라고 하셔서 그곳을 향해 갔다. 처음엔 쑥밭이더니 헤치고 들어가니 갖가지 꽃들이 만발한 동산이었다. 그 동산에는 항상 그립고 보고 싶었던 예수님이 나의 손목을 잡고 동산을 거니시면서 이름 모를 갖가지 꽃들을 다 구경시켜 주셨다. 9 그 동산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천국이었다. 꿈을 깨고 나서도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그때부터 내 입에서는 오늘에 될 일들이 말로 다 나와지고 영화 보는 것 같이 환상으로 누가 나를 핍박할 것인지 전날 다 보게 되었다. 10 그리고 내가 예언하고 환상을 본 그대로 모든 것이 다 되어졌다. 이같이 하늘은 나에게 가르쳐 주시고 역사해 주심으로 점점 하늘과 가까워질 수 있도록 인도하셨다. 11 차상순(車相淳) 목사의 부인이었던 김종연(金宗姸) 씨와 김종화 씨는 친형제이다. 이 두 형제가 선생님을 지성껏 모셨다. 더욱이 정명선 오빠는 얼마나 선생님을 지성껏 모셨는지 모른다. 선생님께선 꼭 흰옷만 입으셨고 식구들(여자)도 흰옷을 입었다. 종화 형님은 식모도 안 두고 손수 식사 일체와 빨래, 다듬이질, 옷 짓는 일까지 하면서 바쁘게 지내셨다. 12 나는 지금도 가장 보람되게 느끼는 것은 김원필 씨를 교회에 인도한 것이다. 1946년 7월 당시 원필 씨를 찾아가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곳이 있으니 가보자”라고 하여서 인도해 가니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받아 선생님을 하늘 아버지와 같이 생각하고 순종 굴복하는,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모범 식구가 되었다. 그러자 집에서 핍박이 대단하여 매를 맞게 되고 나중에는 내어쫓기어 옥씨(玉氏) 어머님 댁에 와서 기거하면서 내적 신앙을 쌓아 나갔다. 13 앞서도 기술했지만 예배보러 올 때에는 흰옷을 입었다. 예배 시간 1시간 전에 도착하여 준비기도를 드려야만 하였다. 준비기도 없이는 예배를 드릴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기도가 부족하면 선생님께서 말씀하러 안 내려오실 때도 있었기 때문이다. 14 그러면 말씀하실 제목을 받으시고는 내려오셔서 말씀을 하시면 은혜가 쏟아졌다. 불 받는 이, 몸이 진동하는 이, 별별 형태로 은혜 역사가 있었다. 많은 목사님들의 설교도 들어보고 부흥회도 참석해 보았지만 비할 수 없는 은혜와 신비감이 우리들의 심금을 울렸다. 15 선생님의 말씀은 너무나 고차적인 말씀이셨다. ‘엘리야의 재림이 세례요한으로 나타난 것 같이 인자도 그러하리라 하셨으며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도 그 모습으로 오시지 않고 딴 모습으로 오신다’라는 설교 말씀을 듣고 주님은 한국으로 육신을 쓰고 언제 오신다는 것까지 알았는데 한국 어느 곳으로 오시겠는가 하는 문제에 걸렸다. 16 예배를 끝마치고 선생님께서 기도하시는 골방에 올라가 “하늘 아버지여, 주님 찾게 해주시옵소서. 내 주님은 어디로 오시나이까? 부산인지요, 대구인지요, 서울인지요, 아니면 평양인가요” 하고 더듬어가며 자꾸 울며 정신없이 기도드렸는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문을 여시고 내게 올라오시는 것을 보았다. 17 나는 기뻐서 예수님의 옷 자락을 쥐고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그때 예수님은 내 머리에 손을 얹으시고 기도를 해주시는데 “이 딸의 가는 길은 너무나 험한 길이오나 아니 갈래야 아니 갈 수도 없는 길이오니 말 못할 십자가의 길이라도 끝까지 변치 말고 가게 해 달라”라고 하시면서 우셨다. 18 나도 울다가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아멘’ 하고 정신을 차려 보니 누군가가 내 옷자락을 쥐고 있었는데, 예수님은 간 곳이 없고 내 앞에 서 계신 분은 바로 선생님이셨다. 19 그때부터 내 마음속에는 각오한 바가 있었다. 그만한 은혜를 받고 나니 더욱 불붙는 마음 누가 막을 수 없었다. 하루는 사탄이 내게 나타나 총과 칼을 가지고 넓은 길과 좁은 길 사이에 서서 넓은 길을 가리키며 “이 길로 가라. 이 길은 넓고 많은 사람이 가는 곳이니 이 길로 가면 쉽고 평탄하다”면서 넓은 길로 가라 하기에 나는 “좁은 길은 진리를 찾는 자만이 갈 수 있는 길이므로 나는 좁은 길로 가겠다”라고 했더니 “큰 길로 가면 큰 재산을 줄 테니 큰 길로 가라”라고 사탄은 말했다. 20 나는 “금강석을 한국 땅덩어리만큼 주어도 이 진리와는 바꿀 수 없고 큰 길로 안 가겠다” 했더니 사탄은 불쾌해 하며 “너는 내 총 칼에 죽을 수 밖에 없다”면서 나를 죽이려고 하였다. 나는 “하나님 아버지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기도를 드리고 깨어나니 베개는 땀과 눈물로 흠뻑 적셔 있었다. 21 이 같은 시련이 지나자 어머니의 핍박이 시작되었다. 어머니가 3·8선을 넘어 서울의 아들에게 돈을 갖다주고 오니 친구 한 분이 내가 “살림은 안 하고 교회에만 가 있고 춤을 춘다”라고 어머님께 일렀다. 그 후로 어머님은 나를 교회에 못 나가게 하기 시작했다. 나는 계시와 몽시 받은 것을 선생님께 보고하고 싶은데 못 나가게 하니 죽을 지경이었다. 22 하루는 환상으로 보여 주시는데 각 나라 임금들이 좋은 차들을 타고 와서 선생님께 경배 드리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각 나라에서 십일조라고 하면서 한국으로 좋은 물건들을 기차를 통해 들여오는 것을 보았다. 앞으로는 각 나라에서 한국으로 십일조를 보내지 않으면 그 국가는 축복을 못 받는다고 계시해 주셨다. 23 이렇게 가르쳐 주시니 선생님께 가고 싶어서 ‘시댁에 간다’라고 하여 별식을 해가지고 음식을 갖고 가서는 동서에게 주고 장독대에 올라가 의자를 놓고 동서에게 들어 올리라 해서 큰 벽돌담을 기어 올라가 두 길쯤 되는 밑으로 뛰어내리곤 하였다(시댁이 바로 교회 옆이었다). 그때 나의 딸 혜영이가 태중에 있었는데도 아무 이상 없었다. 24 선생님은 늘 골방에서 기도드리지 않으면 성경을 보고 계셨다. 그러던 중 하루는 대동보안서(大同保安署)에서 선생님을 붙잡아갔다. 평양의 목사, 장로들의 투서 때문이었다. 내무서원들은 우리에게까지 손을 뻗쳤다. 선생님은 유정(柳町) 보안서에서 얼마나 매를 맞으셨는지 피 묻은 옷을 종화 형님이 가져오셨다. 25 다음엔 대동보안서에 이송되었는데 보안서는 기림리(箕林里) 모래터라고 하는 곳에 있었다. 이곳에 갇혀 있는 허호빈 씨 집단(‘주님은 육신으로 오신다’라는 집단)의 주인공인 허호빈 씨가 이곳 감옥에서 ‘주님과 견우와 직녀가 만나듯이 만난다’라는 계시를 받고 주님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선생님께서 ‘어떻게든 감옥을 나가라’라고 하는 쪽지를 보냈는데 받고도 듣지 않아 그 일파가 많은 고초를 겪었다. 26 선생님은 그곳에서 며칠 동안 심문을 받고 계셨다. 박씨 어머님과 나는 보안서에 갔으나 면회도 시켜 주지 않았다. 박씨 어머님은 나더러 “보안서를 일곱 번 돌면 선생님이 나오신다”라고 하여 일곱 번을 돌며 기도하였다. 27 그때 내무서원들은 선생님께 1주일간 음식도 안 주고 잠도 못 자게 교대로 지키면서 고문을 하여 이(齒)가 부러지고 더 이상 때리다가는 죽을 것 같아 내보냈는데 종화 형님은 “선생님은 이제 다시 소생 못 할 것 같다”라고 하였다. 누워계신 선생님의 얼굴은 창백했고 정신도 차리지 못하셨다. 문을 열어 보이는데 대야에 토해 놓으신 피는 하나 가득하여 운명 직전같이 보였다. |
金仁珠 - 波乱の多い生涯 ② - 先生との出会い 私は結婚生活をしながらも教会生活には熱心だった。そうした中、平壌の西門外教会婦人会長であり、私のいとこにあたる金ジョンファ氏に「ソウルから立派な先生が来られたので一緒に行って恩恵を受けよう。」と誘われ一九四六年六月一〇日に訪ねていった。その日お会いしたのが文鮮明先生だった。 当時は羅チェソプ氏の部屋で礼拝をしていた。先生は全ての情熱を注いで祈祷され、そのやさしいお姿と涙で訴えられる説教に私自身も知らぬ間に慟哭してしまった。説教の御言はイエス様は、この地上に来られて御言をすべて成就できずに無念な思いで死んで行かれた悲しみと、神の心情を吐露される内容だった。私は翌日から長老教会には足を運ばず、先生にずっと侍りながら御言を聞いた。 先生は最初のころは景昌里上水口の橋の近くの羅チェソプ氏の家で集会をされていたが、部屋が狭くて鄭明善氏(金ジョンファ氏の御主人)の家に集まり礼拝をするようになった。 私はこのみ旨を知ってはじめて夢を見た。私がある洞窟の中を通らなければならないのだが、ある人が「この洞窟を通るのは大変で苦痛も多いことだろう。でも行く道を止まったりせず前に進みなさい。」と言われた。洞窟のなかをどこまで行ってもまだ暗く険しいので、それ以上行く気がせず振り返ろうとすると、ふと、「前進だけしなさい。」と言われたあの言葉が思い出され、険しい道も一歩ずつ前進して行ったところ、輝かしい光が遠くに見えた。続けて前進し洞窟を抜け出たところ、そこでは私を導いてくれた金宗 氏と先生がたらいに水を一杯に入れて置いておられ、その横からは大きな霊柩車が出てきて、私の下半身に汚い水をかけていった。泣きたいぐらい汚かった。 そのとき、先生が準備して置かれた水で私をきれいに洗ってくださり、前の方を指しながら、あそこに見える園に行きなさいと言われその方に向かって行った。最初はよもぎ畑だったのが踏み分けて入って行くと、いろんな花が咲き乱れる園だった。その園にはいつもお慕いしお会いしたかったイエス様が私の手を握って園を散歩されながら、名前も分からないいろんな花を見せて下さった。その園こそこの世で見ることのできない天国だったのです。 夢がさめてからもとても気分がよく、私の口からは今日起きる出来事がすべて言葉になって出てくるようになり、映画を見るように幻想で誰が私を迫害するのか前の日に全部見えるようになった。そして私が予言し幻想で見たものがそのまま現実となった。このように天は私に教えてくださり役事されることによって徐々に天と近くなれるよう導かれた。 車相淳牧師の夫人だった金宗妍氏と金ジョンファ氏は実の姉妹である。この二人の姉妹が先生に精誠を尽くして侍った。鄭明善氏もどんなに侍ったかわからない。先生は必ず白い服をおめしになり、食口たち(女性)も白い服を着た。ジョンファ氏は女中を置かず、自分で食事一切と洗濯、砧打ち、服を作る仕事までやりながら忙しく過ごした。 私は今でも一番心に残っているのは、金元弼氏を教会に導いたことです。一九四六年七月、金元弼氏を訪ね、「神霊と真理で礼拝する所があるので行こう。」と行って連れていったところ、先生の御言を聞いて恩恵を受け、先生のことを天の父のように思い従順屈伏し、他の誰にも負けない模範食口となった。しかし、家で迫害が大きく、打たれ、最後には追い出されてしまい玉氏のお母さんの家に来て身を寄せながら内的信仰を築いていった。前にも言ったが、礼拝に行くときは白い服を着た。 礼拝の一時間前に到着し準備祈祷を捧げ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準備祈祷無しに礼拝をする事ができなかった。なぜならば私たちの祈祷が足りないと先生が御言を語りに降りて来られないときがあったからだ。私たちが準備祈祷をすると、先生に御言の題目が与えられた。そして降りて来られ、御言を語られると恵みが満ち溢れた。体が振動したりさまざまな形で恩恵の役事があった。 多くの牧師の説教も聞いてみたし、いろんな復興会にも参加してみたが、今までにない偉大な恵みと神秘感が私たちの心を打ち鳴らした。 先生の御言はあまりにも高次元的な内容だった。エリヤの再臨が洗礼ヨハネに顕れたように人の子もそうなるだろうと言われたので十字架について行かれたイエス様もそのお姿で来られるという御言を聞き、主は肉身を持って来られるということまではわかったのだが、韓国のどこに来られるのかということが気にかかった。 礼拝を終えてから、先生が祈祷される小部屋に上がり、「天のお父様、主に会わせてください。私の主はどこに来られますか? 釜山なのか、大邱なのか、ソウルなのか、でなければ平壌なのでしょうか」と探りながら、しきりに泣きながら懸命になって祈祷したところ、十字架につかれたイエス様が門を開けられ私に近寄ってこられるのが見えた。私は嬉しくて、イエス様の衣の裾を握り、感謝の涙を流した。 そのとき、イエス様は私の頭に手を置かれ祈祷をされたのだが、「この娘の行く道は、あまりにも険しい道であるが、どうしても行かねばならない道なので、言葉にできないような十字架の道であっても、最後まで変わることなく行かせてください。」と言われ泣かれた。私も泣き、どれほど時間が経ったのか「アーメン」と言って気が付いてみると、誰かが私の服の裾を握っていたのだ。イエス様は行くところもなく私の隣に立っておられたのはまさに先生だったのだ。 そのときから私は心の中で覚悟するところがあった。あまりにも多くの恵みを受け、更に燃え上がった心の炎は誰も止めることはできなかった。あるときはサタンが私に現れ、銃と剣を持って、広い道と狭い道の間に立ち、広い道を指しながら「この道を行け。この道は広く多くの人が行く道なのでこの道を行けばやさしくそして平坦だ。」と言いながら、広い道を行けというので私は「狭い道は真理を求める者だけが行ける道なので私は狭い道を行きます。」と言ったので、サタンは不快そうに「おまえは私のこの銃と剣によって死ぬほかない。」と言いながら私を殺そうとした。私は、「天のお父様私の魂を受けてください。」と祈祷を捧げ、目が覚めたのだが、枕が汗と涙でびっしょり濡れていた。 このような試練が過ぎると、母の迫害が始まった。母が三八度線を越えてソウルに居る息子にお金をあげるために来たとき、私の友達の一人が私の事を「家事をやらずに教会にだけ通い踊りを踊っている。」と母に告げ口した。 その後、母は私を教会に通わせないようにした。私は啓示と夢で教えられたことを先生に報告したいのに外に出してくれず、死ぬほど辛い思いをした。 あるときは幻で、各国の王が立派な車に乗り、先生のところに来て敬礼をするのを見させて下さった。それで各国から一〇分の一献金だといって韓国へ高価な品物が汽車で送られてくるのも見た。将来は世界各国において韓国に一〇分の一献金を送らなければその国は祝福を受けることができないことが啓示された。このように夢を通して教えてくださったので先生の下に行きたくて「夫の実家に行く。」と言ってごちそうを拵えて行き義弟の嫁にあげてから塀の高台に登り椅子を置いて義弟の嫁にお尻を持ち上げてもらい、大きな塀をはい上がり背丈の二倍はある高さを飛び下りた。(夫の実家は教会のすぐ横だった。)そのとき、私の娘、恵英がお腹にいたのだが、全く異常無かったのです。 先生はいつも小部屋で祈祷されそれ以外は聖書を読むことに費やされた。 そうしたある日、大同保安署から先生を捕まえ連れ去って行ってしまった。平壌の牧師、長老等の投書のせいだった。内務署員らは私たちにまで手を出した。 先生は柳町保安署でどれほどひどく鞭打たれたのか、宗 さんが持ってきた血のついた服を見て分かった。 それから、大同保安署に移送されたのだが、そこは箕林里砂場と言うところにあった。ここには、許浩彬集団(「主は肉身をもって来られる。」と言う集団)の主人公である許浩彬がこの監獄で「主と牽牛と織姫が会うように会う。」という啓示を受けて待っていたのだが、先生が「何が何でも監獄を出なさい。」と書いた紙切れを渡し、受け取ったのにそれを聞き入れず、その一派はあらゆる苦難を受けるようになった。 先生はそこで何日間も尋問を受けていらっしゃった。朴お母さんと私は保安署に言ったが面会もさせてはくれなかった。朴お母さんは「保安署を七回回りながら祈祷した。そのとき、内務署員たちは先生に食べさせず寝させずで交代で見張りながら拷問を行い、歯が折れこれ以上鞭打てば死ぬというところで外に放り出してしまった。そのときジョンファ氏は「先生はもう生きられないだろう。」と言った。横たわっていらっしゃる先生の顔は蒼白で気を失ったままたった。戸を開けてみるとたらいに吐いた血がいっぱいになっており死ぬ寸前のようだった。 |
첫댓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