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장 도화도의 사랑
진현풍과 매초풍을 데리고 동해에 온 황약사는 배를 하나 얻어 주산(舟山)으로 향했다.
한참 가다가 황약사는 사공에게 말했다.
"키를 돌려 도화도로 향해 주시오."
사공이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만 도화도는 갈 수 없는뎁쇼."
"갈 수 없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황약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손님께서는 아마 모르고 계시는 모양인데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도화도엔 마귀가 있답니다요. 눈이 네 개나 달렸는데 생사람을 잡아먹는대요. 힘이 얼마나 센지 사람을 잡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사지를 쭉쭉 찢어 먹는다지 뭡니까? 이 연해 일대 사람들은 모두 그게 알고 있지요. 그런데 도화도를 가다니요? 억만금을 준대도 거기는 못 갑니다요."
함께 타고 있던 사람들도 모두 맞장구를 쳤다.
잠자코 귀를 기울이고 있던 진현풍과 매초풍이 황약사를 바라보며 키득키득 웃었다.
"웃긴 왜 웃나?"
황약사의 말에 둘은 찔끔 웃음을 거두었다.
황약사는 빙그레 웃으며 또 물었다.
"그래 사공께서 보시기에 나는 어떻게 보이시오? 도화도의 그 마귀와 비슷하게 생기지 않았소?"
사공은 황약사를 보고 크게 웃었다.
"손님이야 미남이신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 악마는 지독한 악마랍니다. 생사람을 벙어리로 만들어 갖고 도화도에 데려다가 온갖 고생을 다 시킨답니다. 접때 제 동생이 말도 못하는 벙어리 하나를 배에 태웠는데 글쎄 자꾸만 도화도로 가자고 하더랍니다. 누가 감히 거길 가겠다고 나서겠수? 그래 동생이 못 가겠다고 하니까 그 벙어리가 지랄발광을 하더랍니다. 배를 부수고 사람을 막 치고, 그 바람에 사공이 넷이나 죽었지요. 동생은 겨우 목숨은 부지했으나 이틀
이나 바다에서 떠다니다가 구출이 되었지요. 동생이 말하기를 도화도의 그 악마가 이름 모를 약을 먹여서 벙어리가 그런 광기를 부렸다고 합디다."
황약사는 그저 허허 웃었다. 그러자 사공은 신명이 나서 입에 게거품을 물며 도화도 악마에 대해 욕을 퍼부어 댔다.
"천하에 그런 악마가 어디 있단 말이오? 멀쩡한 사람을 병신을 만들다니, 하늘이 가만있지 않을 거외다."
"그러다가 정말 그 악마가 눈앞에 나타나면 어쩌려고 그러오?"
황약사가 빈정거렸다.
"어쩌긴 어째요? 내가 무서워할 줄 아시우? 기껏해야 그 놈 손에 죽기밖에 더 하겠소?"
사공은 자기 가슴을 툭 치며 호기를 부렸다.
"이 놈! 내가 바로 그 악마다!"
황약사가 갑자기 버럭 소리쳤다. 사공은 움찔하여 황약사를 바라보았다. 그는 황약사의 기색이 추상 같을 뿐만 아니라 눈에 살기가 번뜩이는 것을 보고 더럭 겁이 났다.
"소…… 손님두 무슨 농담을 그렇게 하십니까?"
"내가 무슨 할 일이 없어 네 놈과 농담을 하겠느냐?"
황약사는 코웃음을 치며 사공에게 다가섰다.
"게 서라, 게 섰거라! 한 발짝만 더 다가서면 물에 처넣을 테다!"
사공은 급히 노를 거머쥐고 소리쳤다.
황약사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계속 다가갔다.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사공은 이를 사려물고 황약사의 허리를 노로 후려갈겼다. 어찌나 힘이 센지 바람이 씽 일었다. 황약사는 두 손가락을 뻗쳐 노를 잡았다. 순간 노는 마치 작두에 잘린 듯 싹뚝 잘려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사공은 반만 남은 노를 쥐고 마치 도깨비라도 만난 듯 얼빠진 얼굴이 되었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말릴 엄두도 못 내고 공포에 질려 두 사람을 지켜 볼 뿐이었다.
황약사는 다가가 동강난 노를 빼앗아 마저 박살을 내서는 바닷물에 집어 던졌다.
사공은 겁에 질린 눈을 휘둥그래 뜨고는 부들부들 떨며 황약사를 바라보았다.
황약사는 사공의 두 손을 등뒤로 모아 쥐고는 배 난간으로 끌고 가서 그의 머리를 바닷물에 처박았다.
"말해 봐. 그 악마란 놈이 생사람을 어떻게 찢어 죽였다던가? 나도 한번 그대로 해봐야겠다."
"아이고, 살려 주십쇼, 제발 목숨만……."
사공은 급히 소리치다가 머리가 바닷물에 박히는 바람에 몸만 버둥했다. 황약사는 사공의 머리를 몇 번 물 속에 잠갔다 꺼냈다 한 뒤 다시 말했다.
"내가 바로 네 놈이 말하던 그 악마다. 그러니 냉큼 우리를 도화도로 모셔라. 조금만 지체했다간 네 놈의 사지를 찢어 바다에 처넣을 테다."
사공은 부들부들 떨면서 찍소리도 못하고 뱃머리를 돌려 도화도로 향했다.
도화도에 도착하자 황약사는 사공의 뒷덜미를 잡아 거의 끌다시피 하여 배에서 내렸다. 그는 배에 남은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너희들은 이제부터 알아서 돌아가도록 해라. 이 사공 놈은 내가 끌고 가서 버릇 좀 고쳐 줘야겠다."
그러자 사람들 셋은 덜컥 무릎을 꿇더니 머리를 조아리며 제발 사공을 놓아 달라고 애걸했다. 황약사는 은전 몇 닢을 배 위로 휙 집어 던졌다. 은전들은 쏜살같이 날아가 배의 바닥에 깊이 박혔다.
"그것을 가지고 냉큼 돌아들 가!"
황약사는 더는 말하지 않고 사공의 뒷덜미를 쥔 채 몸을 돌렸다. 세 사람은 쫓아올 엄두도 내지 못하고 멀어지는 황약사 일행을 멍청히 바라볼 뿐이었다.
황약사는 몇 발자국 가다가 사공에게 물었다.
"넌 여기서 죽어도 한이야 없겠지?"
강직한 성격의 사공은 이를 악물고 대꾸했다.
"악마 같은 놈? 무고한 인명을 마음대로 해치는 네 놈을 하늘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 말에 황약사는 히죽 웃음을 떠올렸다.
"또 아가리 질을 해봐. 네 놈의 혓바닥을 도려내고 귓구멍을 파서 이 섬에서 귀양살이를 하게 할테니!"
"과연 틀림없군. 동생 말이 틀림없어! 난 그래도 동생 말이 다분히 꾸며 낸 말인 줄 알았더니 바로 네 놈의 그 악마로구나."
사공은 계속해서 황약사를 욕하며 심기를 건드렸다.
진현풍과 매초풍은 황약사의 기색을 살피며 사공은 이제 죽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들은 사공이 죽는 것이 불쌍했지만 그 말을 입 밖에 낼 수가 없었다.
이때였다. 갑자기 황약사가 큰소리로 너털웃음을 웃었다. 그는 웃다 말고 사공을 번쩍 들어올리더니 바다를 향해 내던졌다.
바닷물에 첨벙 떨어진 사공은 간신히 헤엄쳐서 자기가 몰고 왔던 배 위에 기어올랐다. 사공이 죽지 않고 돌아가게 되자 사람들은 감지덕지하여 황약사를 향해 몇 번이고 절을 하더니 부랴부랴 노를 저어 달아나기 시작했다.
도화도에는 소문대로 벙어리 노복들이 많았다. 그들은 모두 기이한 무공들을 한 가지씩 가지고 있었으나 하나같이 침울한 기색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무림 세계의 망나니들이었는데 황약사한테 붙들려 그 꼴이 된 것이다.
매초풍과 진현풍은 도화도에서 무예를 배우기 시작했다.
어느새 여러 달이 지나갔다.
둘은 무공을 익히는 솜씨가 매우 빨랐다. 내력은 아직 많이 약하지만 무술 동작은 어디에 내과도 손색이 없을 만큼 무학 대가의 틀을 확실히 갖추었다. 두 사람은 오로지 부모님의 원수를 갚겠다는 일념만으로 무예를 배우는 데 전념했다.
때가 바로 복숭아꽃이 만발할 때라, 어느 날 수련을 마친 매초풍은 복숭아꽃을 꺾어 들고 사부의 처소로 향했다. 곱게 핀 꽃을 가져다가 사부의 서재와 침실을 장식해 드리자고 생각하니 마음이 여간 즐겁지 않았다.
황약사의 서재는 엄청나게 컸다. 서재에는 책상자와 책 광주리가 아주 많았는데 책상자에 새겨져 있던 글은 황약사가 손가락으로 모두 후벼 파내 버렸다.
황약사는 책상자에 새긴 '금수문장(錦袴文章)'이니 '학부사해(學富四海)'니 '진사급제(進士及第)'니 하는 글들이 딱 질색이었다. 그래서 심심하면 손가락으로 그것을 후벼 파내 버리곤 했던 것인데 그로 인하여 책 상자에는 구멍이 숭숭하였다. 창가에는 대나무 탁자가 하나 있었고 그 위는 문방사보(文房四寶) 지필묵이 놓여 있었다.
꽃들을 꽃병에 꽃아 놓고, 매초풍이 즐거운 마음으로 그 꽃을 들여다보는데 갑자기 뒤에서 악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벙어리 노복 하나가 손짓발짓을 해 가며 뭐라고 말하는데 눈치로 보아 어서 이곳을 나가라는 것 같았다.
매초풍은 마땅치 않다는 듯 벙어리 노복을 쏘아보았다.
"네가 무슨 상관이야? 네 일이나 해, 남의 일에 참견 말고."
매초풍이 말했다.
그러나 벙어리 노복은 물러서지 않고 여전히 손짓발짓을 해 가며 황약사께서 이곳에 다른 사람을 절대 출입시키지 말라는 엄명이 있었음을 전달했다.
매초풍은 그 뜻을 알았지만 모르는 척하고 웃으며 말했다.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잖아."
그녀는 벙어리 노복을 골려 먹는 것에 은근히 재미를 느끼며 남은 복숭아꽃을 들고 황약사의 침실로 들어갔다. 침실에 들어서는 순간 매초풍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부의 침실은 상상 밖으로 매우 간소했다. 나무침대 하나에 침대 휘장이 하나, 괴상한 검이 한 자루, 그리고 벽에는 옥소가 걸려 있고 바닥엔 책상이 하나 있었는데 그 위에 책이 몇 권 놓여 있을 뿐이었다.
'사람들은 이렇게 검소한 사부님을 알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나쁘게만 말하다니…… 아, 사부님은 정말 훌륭하신 분이야. 선비같이 문장도 좋고 금기서화(琴樵書畵), 기문술수(奇門術數) 어느 하나 정통하지 않은 것이 얼지 않은가?'
매초풍은 황약사가 고금에 없는 천하 제일의 기인이라고 탄복을 금치 못했다.
그러다가 그녀는 사부의 침대머리에 걸려 있는 그림 한 폭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옷의 주름 하나 빠뜨리지 않고 정밀하게 그린 인물화였는데 아주 잘 그려진 그림이었다. 그림의 여인은 선녀처럼 아름다웠다. 생긋이 웃고 있는 눈이며 입매가 성미 부드러운 여인의 다정다감한 마음을 보여 주는 듯하여 사랑스러웠다.
'이 그림의 미인은 도대체 누굴까? 이렇게 침대머리에 걸어 놓은 걸 봐서는 사부님과 아주 가까운 사람이 틀림없는데 사부님의 어머님이실까? 아니면 사부님의 사랑하는 사람일까?'
매초풍은 이런 생각을 하며 자기도 모르게 그림 쪽으로 점점 다가갔다.
가까이가 올려다보니 그림의 미인은 살아 있는 사람처럼 미목(眉目)이 움직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림은 보는 각도에 따라 매번 달라 보였는데 발뒤꿈치를 들고 보니 아래에서 올려다볼 때와는 아주 달랐다.
'그러니 사부님 키로는 언제나 이렇게 생생하게 보이겠구나. 침대에서 보면 머리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또 달라 보이겠지? 그렇다면 이 그림의 여인은 사부님의 어머님은 절대 아니야. 아무리 어머님을 사랑한다 해도 이렇듯 매일 침대 위에 걸어 놓고 보는 사람은 없을 거야. 분명 사부님이 자나깨나 잊지 못하는 연인임에 틀림없어. 그렇다면 이 여인은 도대체 누구일까? 이렇듯 사부님의 열렬한 사랑을 받고 있는 행복한 여인은 도대체 누구일까? 모르긴 해도 사부
님은 매일 이 그림을 보며 사랑하는 사람과 마음속의 정담을 나누곤 하겠지…….'
생각이 이쯤 미치자 매초풍은 어쩐 일인지 자기 얼굴이 확 달아 오름을 느꼈다.
매초풍은 그림을 좀더 똑똑히 보려고 이번에는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보면 볼수록 그림의 미인은 총명하고 아름다웠다. 매초풍은 손바닥으로 그림을 쓸어 보면서 중얼거렸다.
"도대체 누구지? 무슨 재주로 우리 사부님을 이렇게 반하게 했을까? 눈동자가 맑고 고운데 무슨 수로 우리 사부님을 홀렸을까?"
이때였다. 갑자기 엄한 목소리가 귓전에 울렸다.
"넌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냐?"
"어머나!"
매초풍은 기겁을 하여 몸을 일으키려다가 도로 주저앉았다.
"초풍이!"
등뒤에서 들리는 음성엔 노기가 가득했다.
매초풍은 앉은뱅이처럼 궁둥이를 움직여 미끌어지듯 침대에서 떨어져 내렸다. 그녀는 침대에 등을 기댄 채 벌벌 떨며 황약사의 큰 키를 올려다보았다.
"사, 사부님…… 저는 꽃, 꽃을 꽂아 드리려고
"뭐? 어쨌다고?"
황약사가 매섭게 되물었다.
황약사의 노기 가득한 얼굴을 바라보던 매초풍은 갑자기 낯을 붉히며 키득 웃었다.
"사부님, 저는 방금 저 그림을 봤어요."
그 말에 황약사는 무심코 벽에 걸린 그림을 힐끗 돌아보았다. 순간 황약사의 눈길에 부드러운 정이 내비치다 사라지는 것을 매초풍은 놓치지 않았다. 이에 담이 커진 매초풍이 물었다.
"사부님, 저 그림의 미인은 누군가요? 저렇게 아름다운 분은 처음이에요."
황약사는 흠칫하며 매초풍을 돌아보았다. 황약사는 잠시 말이 없었다. 황약사가 다소 누그러지는 기미를 보이자 매초풍은 마음놓고 말했다.
"사부님, 저 그림 좀 보세요. 사람도 아름답지만 사부님께서 그리기도 잘하셨어요. 막 살아 있는 것 같잖아요."
이 그림의 여인은 다름아닌 황약사가 자나깨나 잊지 못하는 아형이었다. 황약사는 매일 이 그림을 보면서 아형을 그리워했던 것이다.
'아, 아형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다시금 아형의 생각에 답답한 심정이 되었다. 아형은 십중팔구 죽었을 것이었다. 학 영감에게 안겨 태호에 떨어졌는데 무슨 수로 살아날 수 있겠는가? 생각이 이쯤 미치자 황약사는 괴로운 듯 다시 고함을 쳤다.
"썩 물러가거라, 어서!"
한동안 제 흥에 겨워 말을 늘어놓던 매초풍은 돌변한 황약사의 태도에 눈이 휘둥그래졌다. 매초풍은 몸둘 바를 몰라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눈에는 눈물이 글썽해졌다. 사부의 뇌성벽력 뒤에는 무슨 일이 닥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매초풍이 우두커니 선 채 움직일 줄을 모르자 황약사는 더욱 성이 났다. 그는 갑자기 차디찬 미소를 흘리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래, 그냥 버틸 셈인가?"
매초풍은 가슴이 뛰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저, 저는……."
"어서 썩 나가지 못해!"
황약사는 소맷자락을 걷어 올리며 다시 한 번 소리치고는 매초풍의 몸을 번쩍 들어올려 마당에 내던졌다. 이어 복숭아꽃 몇 가지도 허공을 날아 매초풍을 스치며 그녀의 주변에 내리꽂혔다.
매초풍의 귀에 문닫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 왔다.
매초풍은 억울하고 분한 생각이 들었다. 사부가 자기를 이처럼 거칠게 대하는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나를 헌 물건 집어 던지듯이 창 밖으로 내던지다니. 단순히 사부님 침대머리에 있는 그 그림을 보았다고 그러는 걸까? 아니면 또 다른 무슨 까닭이 있는 걸까? 내가 그림을 보고 사부님 비위 상할 소리를 한 건가? 그림의 여인이 예쁘다는 말을 했을 뿐인데 도대체 뭘 잘못했다고 날 이렇듯 천대하는 거야? '
매초풍은 눈물을 흘리면서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았다. 그녀는 얼빠진 사람처럼 오랫동안 움직일 줄을 몰랐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던 매초풍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사부가 내던진 복숭아꽃 가지가 주위에 가지런히 꽂혀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복숭아꽃 가지는 모두 열두 개였는데 아직 꽃봉오리 상태인 것과 활짝 핀 것을 어쩌면 그렇게 순서대로 꽃아 놓았는지 일부러 그렇게 꽂으려 해도 어려울 것만 같았다.
매초풍은 넋을 잃고 꽃들을 바라보노라니 황약사에 대한 원망의 마음이 눈 녹듯 사라짐을 느꼈다.
'사부님을 노엽게 만든 것은 모두 내 탓이야. 벙어리 노복이 나에게 사부님의 서재와 침실에 들어가지 말라고 그렇게 말렸는데도 내가 듣지 않고 부득불 들어가지 않았는가? 꽃을 꽃아 드린다는 핑계로 사부님의 서재와 침실을 구경하고 싶었던 거지. 어쨌거나 사부님을 탓할 게 아니야. 모두 내 잘못이지…….'
매초풍이 이렇듯 슬픔에 잠겨 자신을 나무라고 있는데 문득 진현풍이 부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매초풍, 매초풍!"
진현풍은 매초풍이 보이지 않자 여기저기 찾아다니다가 사부님 처소에까지 이른 것이다. 진현풍은 매초풍이 사부님 서재 앞뜰에 맥없이 주저앉아 땅에 꽂혀 있는 복숭아꽃 가지를 멍청히 바라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매초풍, 여기서 뭐하는 거야? 내가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알아?"
매초풍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진현풍을 쳐다보지도 않고 쏘아 붙이듯 말했다.
"정말 귀찮게 구네. 사부님 명대로 함께 무공을 수련할 때도 시끄럽게 굴더니만 뭣 펌에 날 그렇게 찾아다녀요?"
진현풍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얼떨떨해서 말을 얼버무렸다.
"매초풍과 같이…… 바다 구경을……."
"비켜요. 누가 바다 구경을 가겠다나? 당신 아버지는 진백만이고 어머니는 부호집 딸이시고 집에는 재산이 얼마가 있고, 또 이따위 집자랑이나 하려구요?"
진현풍은 쩔쩔매며 얼굴에 애써 웃음을 담으며 말했다.
"매초풍, 우리 바닷가에 나가 돌 던지기를 하자. 누가 더 멀리 던지는가 내기를 하자구."
"아이고 시끄러워. 세 살밖이 어린애도 아니고, 내가 이 나이에 그런 장난이나 하고 놀 것 같아요? 도대체 날 뭘로 보는 거예요?"
매초풍은 있는 대로 성질을 부리더니 갑자기 얼굴을 싸쥐고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진현풍은 황당해졌다.
"아니, 왜, 왜 그래? 싫으면 그만이지 뭘 울고 그래?"
그는 속으로 여자애들이란 이 나이가 되면 금세 웃다가도 울고 울다가도 웃는 식으로 변덕이 많은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우는 매초풍을 달래기 위해 그녀에게로 다가가다가 곁에 가지런히 꽂혀 있는 복숭아꽃 가지를 발로 쓰러뜨리려 했다.
"그건 왜 건드려요?"
매초풍이 성을 발끈 내며 진현풍을 한 장 내리쳤다. 낙영장법이었다. 평소 매초풍과 무예를 익히면서 이에 숙달된 진현풍인지라 얼른 매초풍의 공격을 막았다. 진현풍의 장력도 보통이 아니어서 바람이 씽 일었다.
"아니, 나한테 손을 대?"
매초풍은 악이 나서 진현풍에게 달려들어 닥치는 대로 주먹질과 발길질을 해댔다.
둘이 한바탕 싸우고 있는데 갑자기 황약사의 휘파람 소리가 들려 왔다. 둘은 하는 수 없이 싸움을 멈췄다. 황약사가 천천히 둘에게로 다가왔다. 잠시 후 열 여섯 명의 노복들도 뒤따라 왔다. 하나같이 귀먹고 혀가 없어 말을 못하는 벙어리 노복들이었다. 황약사 옆에까지 온 그들은 벌벌 떨며 허리를 굽혔다.
"매초풍, 네가 내 서재에 들어왔을 때 벙어리 노복이 있었느냐?"
황약사의 물음에 매초풍도 허리를 굽히며 얼른 대답했다.
"예, 있었습니다. 벙어리 노복이 들어가지 말라고 말리는 것을 제가 뿌리치고……."
"난 벙어리 노복이 있었는가만 물었다!"
황약사가 꽥 소리쳤다.
"예, 있었습니다."
매초풍은 심상치 않은 기미를 느끼며 하는 수 없이 대답했다.
황약사가 싸늘한 표정으로 노복 하나를 손가락질하자 그 노복은 새우등같이 허리를 굽히고 잔걸음으로 나와서는 황약사를 향해 몇 번이고 머리를 조아리며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토해냈다. 아마도 목숨만 살려 달라고 애걸복걸하는 것 같았다.
"내 서재와 침실에 사람을 들여놓는 놈이 이 다음 나쁜 놈이 와서 칼로 위협하면 무슨 짓을 못할까? 내 집에 들여놓는 건 물론이고 나를 독살하라면 독살까지 할 것이다. 너같이 간악한 놈을 내가 살려 두어 어디다 써 먹겠느냐?"
황약사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손가락을 탁 튕겼다. 그러자 자갈 두 개가 튕겨 나와 벙어리 노복의 눈에 깊숙이 틀어박혔다. 벙어리 노복은 몸서리치는 비명을 내지르며 그대로 쓰러졌다. 황약사가 튕긴 자갈은 그 힘이 어찌나 대단한지 벙어리 노복의 눈을 꿰뚫고 들어가 골 속에 틀어 박혔던 것이다.
황약사가 이렇듯 사소한 이유로 사람을 죽이는 바람에 매초풍은 몹시 충격을 받았다. 자기가 잘못하지 않았으면 벙어리 노복이 저런 죽음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매초풍은 벙어리 노복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진현풍은 진현풍대로 매초풍의 거동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담대하던 그녀가 오늘따라 사부님 앞에서 안절부절 가만히 서 있지를 못하는 게 평소의 매초풍과는 너무도 달라 보였던 것이다.
"현풍과 초풍은 듣거라. 내 명이 없이는 누구도 내 서재와 침실을 들어와서는 안 된다는 걸 명심하도록 해라!"
"명심하겠습니다."
매초풍과 진현풍은 정중히 대답했다.
어느 날, 바다에 배 두 척이 갑자기 나타났다.
모두 튼튼하고 큰 배들인데 돛대를 높이 올리고 도화도를 향해 다가왔다.
그것을 본 진현풍은 나는 듯이 집으로 돌아와서 황약사에게 알렸다. 자초지종을 들은 황약사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진현풍과 매초풍을 앞세우고 바닷가로 나갔다. 배가 서서히 기슭에 닿자 닻이 내려졌다. 한 사람이 뱃머리로 걸어 나와 이쪽을 향해 소리쳤다.
"여기가 도화도입니까?"
"그렇소. 대체 무슨 일입니까?"
평소 외지 사람이 오는 것을 보기가 극히 드물었던지라 진현풍은 공연히 기쁜 마음이 앞섰다.
"태호 귀운장 무학 후배인 육승룡 등이 황 선배님을 배알하러 왔습니다."
매초풍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생긴 걸 봐서는 우리 사부님보다 젊지 않은데 왜 무학 후배로 자칭할까? 우리 사부님의 명성이 강호에 크게 났기 때문일까? 그런데 우리 사부님을 만나려는 이유는 뭐지? 사부님더러 자기네 원수를 갚아 달라고 모시러 온 걸까?'
잠시 후 세 사람이 배에서 내렸다. 그들 육승룡, 무천웅, 곡영소는 황약사 앞에 이르러 일제히 무릎을 꿇고 인사를 올렸다.
"세 분은 무슨 연고로 이런 큰 예를 차리시오?"
황약사가 물었다.
"우리 형제 셋은 강호에서 몇 년 무공을 배우기는 하였습니다만 도주 선배님의 무공을 보고서야 그 몇 년 배운 것이 아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래 선배님을 찾아왔으니 아무쪼록 이 천한 것들을 선배님께서 제자로 받아 주십시오."
옥승룡의 말이었다.
"말씀이 너무 과하시구려, 나와 여러분은 우연히 태호의 싸움에서 단 한 번 손을 잡은 적이 있을 뿐이오. 그때 나를 도와준 은정을 생각해서 세 분을 도화도에 모시겠으니 며칠 동안 섬 구경이나 하시며 이야기나 나누다가 돌아가시오."
황약사는 담담한 기색으로 말했다. 그 뜻인즉, 육승룡 일행과는 사제지간의 연분이 없으니 그런 마음은 아예 먹지도 말고 그저 섬에서 며칠 묵기나 하다가 가라는 것이었다.
육승룡과 곡영소는 서로를 쳐다보았다. 뭔가 할말이 있으나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세 분께선 달리 더 하실 말씀이 있으시오? 그렇지 않으면 내 하속을 따라 섬 구경이나 하시오. 난 일이 있어 들어가 봐야겠소."
황약사의 말에 육승룡은 곡영소를 돌아보며 말했다.
"과연 홍칠 선배님의 말이 맞긴 맞군 그려."
황약사는 가려다가 그 말을 듣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홍칠공이 뭐 어쨌다는 거요?"
"우리가 태호에서 홍칠 선배님을 만났댔는데 홍칠 선배님 말씀이, 도화도 무공이 천하 제일인 것은 아니니 도화도로 가지 말라더군요. 그러면서 우리가 가도 헛고생만 하지 선배님이 우리를 받아 들이지 않을 거라고 하시면서……."
육승룡의 대답에 황약사는 덤덤한 어조로 한마디했다.
"그래?"
"그리고 천하에 가장 센 것이 자기의 강룡십팔장과 타구봉법이라면서……."
황약사의 얼굴에 대뜸 노기가 어렸다. 자존심이 강한 그가 이런 말을 듣고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제깐 놈이 감히 내 무공을 얕잡아 봐?'
하지만 속이 깊은 황약사는 분노를 잠시 눌러앉히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반문했다.
"그래? 그런데 난 어째서 그런 말을 못 들었을까?"
그 말에 육승룡과 곡영소는, 황약사가 드디어 자신들의 꾀에 걸려든다고 생각하여 내심 기뻐하였다.
"홍칠공의 말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우린 황 도주님만 사부님으로 모시고자 천리 뱃길을 멀다 않고 이렇게 도화도로 찾아왔습니다."
육승룡의 말에 황약사가 물었다.
"왜 홍칠공을 찾아가지 않고?"
셋은 그만 불길한 예감이 들어 급히 대답했다.
"홍칠공께서는 자기네 개방의 절기는 외인에게 전수하지 않는다면서 우리를 받아 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우리 도화도 절기는 외인에게 전수하는 것으로 알았나?"
황약사의 말엔 가시가 돋쳤다.
셋은 그만 말문이 막혔다.
사실 그들이 황약사를 찾아온 것은 홍칠과는 상관이 없었는데 홍칠공 운운한 것은 순전히 황약사를 자극하여 자기네를 제자로 받아 들이게 하려는 수작에 불과했다. 그런데 황약사가 이에 걸려들지 않고 냉정하게 나오자 여간 난감하지 않았다. 그들은 섬에 올라가 기회를 봐서 황약사에게 또 사정해 보는 것이 좋을지 아니면 이 자리에서 그대로 떠나가는 것이 좋을지 결정을 할 수가 없었다.
황약사가 자리를 떠나려 하자 곡영소가 갑자기 소리쳤다.
"황 도주님, 잠깐 내 말 좀 들으십시오!"
황약사는 서서히 몸을 돌려 매섭게 쳐다보았다.
"내 뜻을 이미 분명히 말했거늘 또 무슨 할말이 있소? 다른 말이 없으면 난 가겠소."
곡영소는 황약사의 매서운 눈초리에 겁이 났으나 용기를 내어 한 걸음 나서며 말했다.
"선배님의 구명지은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황약사는 헛기침을 했다.
"저희 형제 셋은 도주님을 사부님으로 모시고자 여기까지 왔지만 도주님께서 한사코 마다하시니 섭섭해도 하는 수 없군요. 그러나 저희들 배에 도주님과 가까운 분 한 분이 동승하여 오셨으니 도주님께서 한 번 만나보시지 않으시겠는지요?"
곡영소는 말을 마치고는 배를 향해 휘파람을 획 불었다. 그러자 한 여인이 뱃머리에 나와 서며 손으로 햇빛을 가리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황약사는 가슴이 뛰었다. 그 여인의 모습은 아형과 너무도 흡사했던 것이다.
여인은 배에서 사뿐사뿐 내려왔다. 그녀는 사람들과 가까워지자 황약사를 향해 웃어 보이며 고개를 다소곳이 숙였다.
"여러 번 저를 구해 준 공자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황약사는 얼빠진 사람처럼 아형을 바라보며 입을 열지 못했다. 방금의 차갑고도 사나운 기색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곁에서 지켜 보고 있던 매초풍은 짚이는 바가 있어 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틀림없이 그 그림 속의 여인이야. 예쁜 눈동자도 그렇고 줄곧 웃는 것 같던 저 입매도 그렇고…… 이제 보니 사부님은 이미 마음속에 그리는 여인이 있은 지 오래였구나.'
이때 황약사가 읍을 하며 말했다.
"육 장주께서 아형 낭자를 모셔 와 줘서 정말 고맙소. 자, 모두들 어서 제집으로 갑시다."
황약사는 사람들을 데리고 앞장서 걸어갔다. 몇 발자국 걷다가 그는 매초풍을 향해 눈짓을 했다. 눈치 빠른 매초풍은 냉큼 황약사에게로 다가갔다. 황약사는 귓속말로 분부했다.
"어서 내 방에 가서 그 그림을 때어 내 어디 깊숙이 잘 두도록 해라."
매초풍은 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고 나는 듯이 뛰어갔다.
아형은 황약사 뒤에서 빙긋이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황약사는 마음속에 할말이 수두룩하였으나 어쩐지 한마디도 입 밖에 낼 수가 없었다.
둘은 복숭아꽃밭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온 섬에 만개한 복숭아 꽃! 복숭아꽃처럼 아리따운 아형의 얼굴!
"아형 낭자, 그 사이…… 무고, 무고하셨소?"
드디어 황약사가 한마디했다.
정다운 눈매로 자기를 바라보는 황약사의 눈길에 아형은 콧등이 시큰해짐을 느꼈다.
"황 공자님도 그간 편안……."
아형은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둘은 말없이 눈길만 주고받았다. 그동안의 그 파란만장했던 일들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황약사를 따라 서재에 들어간 아형은 가슴이 뛰었다. 창 너머 바라보이는 복숭아꽃밭, 그리고 그 너머 먼 곳에서 출렁이는 푸르른 바닷물…… 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가!
서재는 조용했다. 황약사는 아형에게 의자를 권하고는 하인을 불러 차를 따르게 했다. 노복 하나가 정교한 찻잔을 들고 들어왔는데 유명한 경덕진(景德鎭)에서 나는 무의 있는 사기 찻잔이었고 차도 '천목우첨 (天目雨尖)'이라고 하는 고급차였다.
벙어리 노복이 차를 따르려고 하자 아형이 갑자기 피식 웃었다.
"무어 그리 우습소?"
황약사가 이상한 듯 물었다.
"이렇듯 좋은 찻잔에, 게다가 이렇게 좋은 차를 하필이면 왜 저런 노복을 시켜 따르게 하십니까? 황 공자님네는 시녀가 없나요?"
아형의 말에 황약사는 웃었다.
"사실 말이지, 우리 섬엔 몇십 년 동안 여성이라고는 저희 어머님밖에 없었지요. 그러다가 최근에 내가 여자애 하나를 제자로 받아들이긴 하였습니다만……"
그 말에 아형은 적이 놀라며 벙어리 노복에게 말했다.
"그만두고 나가요. 내가 직접 따를게요."
그러나 말을 듣지 못하는 벙어리 노복은 그냥 주전자를 들고 차를 따랐는데 찻물이 튀어 찻잔 밖으로 흘러 나왔다. 벙어리 노복은 기겁하여 황약사를 쳐다보았다. 기분이 좋아진 황약사는 벙어리 노복을 나무라기는커녕 도리어 빙그레 웃었다. 그러나 벙어리 노 복은 이 웃음에 가슴이 섬뜩하여 주전자를 놓고 덜컥 무릎을 꿇으며 황약사에게 무어라고 웅얼거렸다.
그제야 아형은 이 노복이 벙어리인 줄을 깨닫고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허리를 굽혀 노복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그런 불구의 몸으로 와서 차를 따르니 내 마음이 불안하군요. 여긴 걱정 말고 나가 보도록 해요."
그러나 노복은 황약사의 눈치만 살필 뿐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황약사는 갑자기 험상궂은 낯으로 소리쳤다.
"어서 물러가지 못해!"
황약사가 화를 내자 노복은 오히려 기뻐하며 몇 번 굽신거리고는 냉큼 일어나 달려 나갔다.
아형이 의아하여 그 까닭을 물었다.
황약사가 대답했다.
"아형 낭자는 모를 겁니다만, 우리 도화도는 아버지가 계실 때부터 지금까지 일가친척 외에는 여성이 없었지요. 도화도의 노복들은 모두 아버지나 내가 중원에 가서 못된 짓을 일삼는 놈들만 잡아 다가 귀를 멀게 하고 혀를 잘라 벙어리로 만들어 데리고 온 놈들입니다. 방금 낭자가 본 그 놈도 강남 건강부에서 잡아온 강호의 악한인데 대력 허패라고 합니다."
아형은 황약사의 말에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공자님, 아무리 그렇다지만 그건 너무 잔인하지 않습니까?"
아형의 말에 황약사는 허허 웃더니 책을 한 권 꺼내 보였다.
"이것 보시오!"
아형은 대력 허패의 죄상을 쓴 부분을 들여다보았다. 대력 허패가 사람을 죽이고 나쁜 짓을 한 죄상이 낱낱이 적혀 있었는데 그의 이름 아래에는 굵게 쳐진 밑줄과 함께 '차(茶)'라는 글자가 씌어 있었다.
"이 대력 허패란 놈은 사람을 무수히 죽였소. 강남에서 소문난 악한이었지요. 난 그 놈을 잡아다가 꽃을 가꾸게 하였는데, 알고 보니 차에 대해 퍽이나 조예가 있더군요. 그래 서재에 불러다가 차심부름을 시키지요."
황약사의 말을 듣는 동안 아형의 심정은 착잡해졌다. 당당하고 깔끔한 인품의 공자로만 알았던 황약사가 이렇듯 사람 죽이기를 식은 죽 먹듯하고, 멀쩡한 사람들을 잡아다가 귀머거리, 벙어리로 만들어 노복으로 부리고 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아형도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겪은 터라 간악한 무리들이 있으면 선량한 사람들이 살지 못한다는 섭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녀는 황약사처럼 세상의 관악한 자들을 잡아다가 죽
여 버리는 것도 선량한 사람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방법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형 낭자, 이렇게 오신 김에 오래오래 놀다 가십시오."
황약사의 말에 아형은 또 가슴이 뭉클해졌다.
"전 이젠 호심장에 집도 없어지고 부리던 계집애도 죽었어요. 저 혼자 그 호심장으로 돌아가서 뭘 하겠어요? 어디서든 머물 수만 있다면 그로써 족하지요."
아형은 말을 마치며 길게 한숨을 몰아쉬었다.
황약사가 다시 말했다.
"아형 낭자, 그러면 이 섬에서 아예 사시지요. 온 섬에 만개한 복숭아꽃이 얼마나 좋습니까? 이곳은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한 정토입니다. 이런 곳이 또 어디 있습니까?"
"그래요. 이렇듯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곳은 또 없을 거예요. 하지만 이 섬엔 외인이 오래 머물 수가 없고 여인은 얼씬도 못하게 하는 율이 있다 하니 어쩌겠어요. 저도 육 장주님을 따라 돌아가야지요.
황약사는 자신의 심정을 몰라주는 아형을 답답한 심정으로 바라 보았다. 아형이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지었다. 그제야 아형이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자기를 떠보고 있음을 깨달은 황약사는 탁자를 탁 쳤다.
"율은 무슨 율이오? 아형, 근심 말고 여기 있으시오. 일년이고 이 년이고 얼마든지 머물고 싶은 만큼 머무시오. 아 염려할 것은 없소."
황약사는 몹시 즐거운 마음이 되었다.
이때 창 밖에서 인기척 소리가 났다. 황약사가 나는 듯 창가로가 내다보니 남녀 둘이서 소리내어 웃으며 손을 잡고 달아나고 있었다.
"율은 무슨 율이오? 얼마든지 머물고 싶은 만큼 머무시오……."
멀어지는 두 사람으로부터 황약사를 흉내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 왔다. 진현풍과 매초풍이었다.
황약사는 대청에 나가 앉았다.
그의 뒤에는 벙어리 노복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고, 좌우에는 진현풍과 매초풍이 서 있었다.
"육 장주님을 모셔 들여라."
황약사가 분부했다.
육승룡과 곡영소, 그리고 무천웅 세 사람은 황약사가 축객령(逐客令)을 내리려는 줄 알고 좋지 않은 기색으로 들어왔는데, 막상 들어와 보니 상황이 좀 달랐다. 앞에는 의자가 두 개 놓여 있었는데 한 의자에 황약사가 앉아 있었고 다른 한 의자는 비어 있었다.
셋의 태도가 냉담하고 말도 없이 읍도 하지 않는 것을 본 황약사는 또다시 분부했다.
"이젠 아형 아가씨를 모셔 들여라."
"네."
매초풍이 얼른 대답하고는 나는 듯이 집 안으로 달려 들어가 아형을 데리고 나와 의자에 앉혔다.
육승룡네 셋은 영문을 알 수가 없어 물끄러미 황약사만 쳐다보았다.
"육 장주, 배에 따라온 다른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배를 몰고 돌아갈 수 있소?"
황약사가 문득 물었다.
셋은 그만 속이 뒤틀렸다. 그들은 황약사가 자기들 셋을 제자로 받아들이기 싫어서 돌려보내지도 않고 그냥 억류시키려는 것만 같이 여겨졌다. 황약사가 무슨 일이든 마음 내키는 대로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셋은 겁이 났다. 황약사가 그들 셋을 남겨 앞의 벙어리 노복 같은 노복을 만들지 누가 알겠는가?
얼굴이 하얗게 질린 곡영소가 황약사에게 허리를 굽히며 한마디 했다.
"황 도주님, 우린 도화도에 있는 율을 모르고 일편단심 도주님을 사부님으로 모셔 보고자 온 몸들입니다. 더불어 아형 아가씨도 모시고 와서 공자님과 만나게 해드리려는 뜻도 있었구요. 속언에 '부지자부죄(不知者不罪)'라 하였거늘 황 도주님께선 부디 우리를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성미 급한 무천웅도 소리쳤다.
"황약사 어른, 우리를 제자로 받기 싫으면 놓아주면 그만이지 해코지할 건 뭐요? 그리고 아형 아가씨도 이 섬에 여인은 들어오지 못한다는 율을 모르고 온 건데, 나 참, 그 무슨 개떡 같은 율이 다 있소? 여인들의 출입을 막는 율이 있는데 어떻게 제자는 여자를 두었소?"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황약사는 갑자기 몸을 일으키더니 셋을 바라보며 폭소를 터뜨렸다. 그가 웃으며 가까스로 말했다.
"승룡이, 자네들 셋이 태호 귀운장에서 여기까지 천리 뱃길을 멀다 않고 오로지 나 황약사를 스승으로 모시기 위해 왔단 말이지?"
셋은 그 말에 서로 눈길을 주고받았다. 그중 눈치가 가장 빠른 곡영소가 얼른 무릎을 꿇었다.
"사부님, 제자 곡영소 인사 올립니다."
육승룡도 꿇어 엎디었다.
그런데 무천웅은 아직도 눈치를 모르고 투덜댔다.
"우리가 싫다는데 자꾸 절은 해서 뭐해?"
곡영소가 얼른 소매를 당겨 그도 무릎 꿇게 했다.
"승룡이, 자네들을 제자로 삼게 된 것은 순전히 이 아형 아가씨의 덕일 줄 알게. 그러니 절은 나한테 할 게 아니라 아형 아가씨에게 해야지."
황약사가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자 셋은 또 부랴부랴 아형에게 절을 올렸다.
아형은 당황하여 급히 손을 내저었다.
"이러지 마세요. 이러지 마시라니깐요."
"감사합니다, 아형 아가씨."
셋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린 채 일어날 줄을 몰랐다.
"아가씨가 뭐야? 사모님 감사합니다, 이래야지. 사모님 감사합니다, 이래요."
매초풍이 옆에서 소곤거렸다.
황약사는 매초풍을 향해 밉지 않게 눈을 흘겨 주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들은 나이가 많지만 내 문하에 늦게 들어왔으니 현풍과 초풍을 사형으로 모셔야 하네. 그리고 자네들 이름도 듣기 좋고 기억하기도 좋게 승풍, 영풍, 천중으로 고치는 게 좋겠네,"
"당장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셋은 너무나 기뻐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