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九章 북막랑인(北漠狼人)
계동평은 그만 흠칫하며,
"과연…"
하고 말을 맺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곧 진지하게 다음 말을 이었다.
"주인! 노복이 당신을 배반할 생각이라면 이런 말씀을 드리지 않습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소."
대답하는 백장청의 안색은 차갑게 굳어가고 있었다.
계동평은 정색을 하며 다시 말을 꺼냈다.
"주인, 노복이 소문은 나쁘지만 정과 사를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백장청은 차가운 시선으로 뚫어져라 그를 응시하며 칼날같이 날카롭게 대꾸했다.
"그럼 내가 진리와 정의 편에 섰다면 당신도 나와 함께 모험할 것을 원하겠소?"
계동평은 힘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원합니다. 그러나 노복은 먼저 주인의 진실한 신분을 알고 싶습니다."
"좋소!"
백장청은 결심한 듯이 품에서 한 물건을 꺼내어 히죽 웃으며 보여 주었다.
"자, 알아보겠소?"
계동평은 앞에 내민 물건을 보자 그만 가슴이 철렁하여 몸이 와들와들 떨려왔다.
그는 두 눈에 이채를 번쩍이며 제대로 나오지 않는 말을 더듬거렸다.
"다… 당신께선… 바로 철판영주이시군요."
원래 백장청이 꺼낸 물건은 바로 그 위엄이 무림을 떨게 하던 철판령이었다.
백장청은 영패를 회수하고 엄숙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그렇소. 철판령은 본래 똑같은 것이 두 개요. 그런데 전에는 불로쌍선이 보관했고 현재는 나하고 내 사매가 각기 한 개씩 보관하고 있소."
계동평은 아직도 격동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었다.
"노복이 영주를 모시게 된… 것은 참으로… 지나친 영광이옵니다. 너무나 큰 영광입니다."
그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나서 다시 말했다.
"주인! 당신께선 비밀 임무를 지니셨는데 노복은 평소의 소문이 매우 나쁘니… 당신께서는 노복이 혹시 배반할까 두렵지 않으십니까?"
백장청은 흰 이빨을 드러내고 히죽 웃었다.
"감히 할 수 있소?"
말을 잠깐 끊고 그는 눈썹을 꿈틀 치켜올리더니 다시 말했다.
"그리고 통천교의 내력에 대해선 나는 벌써 일부를 알고 있소. 그러므로 당신이 슬며시 나를 배반하고 내 손에서 달아난다 해도 두렵지 않소. 덕분에 나는 신분을 공개하고 마음껏 그 사람과 대결할 수 있을 게요."
계동평은 쾌활하게 한바탕 웃어젖혔다.
"노복이 개과천선할 마음을 먹은 이상, 어찌 감히 다시 딴 마음을 품겠소이까? 더구나 매우 영광스럽게도 천하가 다 앙모하는 철판영주의 종이 되었는데 어찌 딴 마음이 들겠습니까? 이런 자리는 구하려고 해도 구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백장청은 무거운 소리로 분부하였다.
"우리 사이와 칭호는 예전대로 하시오. 내가 신분을 공개하기 전에는 다시 영주라는 말을 입에 올려서는 안 되오!"
"네! 노복은 다만 명에 따를 뿐입니다."
백장청은 말씨를 한층 누그러뜨리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계노인, 이제는 계속해서 당신의 주인을 놀라게 하는 소식을 말씀하시오."
계동평은 한층 밝은 안색으로 공손히 대답했다.
"사정은 이렇습니다. 어젯밤 노복이 혼자 술을 마시러 나갔을 때, 통천교의 한 호법급의 인물이 노복에게 슬며시 접근해 왔습니다. 그들은 우선 교주의 명을 받고 왔다고 밝히고 호법직을 주겠다면서 노복더러 주인의 진실한 마음과 암암리에 접근하는 인물을 탐지하라고 했습니다."
"그래 계노인은 그 녀석에게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그때 노복은 이 일이 너무 크니 고려할 시간을 달라고 했습니다. 사흘 후에 대답하겠다고 말입니다."
"음… 좋소. 사흘 후에 계노인은 그에게 그 일을 맡고 싶다고 말하시오."
계동평은 움찔하며 말을 더듬었다.
"주인! 그건…"
"계노인! 안심하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하십시오. 꼭 필요하다면 우리에게 손해가 없고 그들이 당신을 굳게 신임할 만한 정보를 하나 제공하시오. 잘 알아들으셨소?"
계동평은 길게 한숨을 지으며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노복은 잘 알았습니다."
말을 일단 그쳤다가 그는 돌연 눈을 빛내며 물었다.
"주인! 언제 신분을 공개하시겠습니까?"
"글쎄… 그건 지금 대답하기 어렵구려. 내가 사해표국에서 형편을 봐서 정하는 것이 중요하오. 그런데… 왜 그러는 거요? 내 신분을 공개하고 안하고의 여부가 당신에게 매우 중요하단 말이오?"
계동평은 멋쩍은 듯 히죽 웃었다.
"물론 매우 중요합니다. 주인! 이 노복은 친구들 앞에서 더구나 과거에 나를 비웃던 사람들 앞에서 자랑하게 되기를 얼마나 고대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주인님은 제 마음을 잘 모르실 겁니다."
백장청은 참다못해 웃고 말았다.
"계노인은 아직 동심이 남아 있습니다."
계동평도 얼굴에 가득 웃음을 띠었다.
"이런 것을 두고 바로 노인이 다시 어린애가 된다는 말일 것입니다."
이때 갑자기 백장청이 계동평에게 눈을 찔끔 감아 보이며 음성을 높였다.
"보십시오. 계노인, 낙양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오래된 도읍지요. 명승고적은 이루 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소. 우리는 여가를 만들어 표국으로 보고하러 가기 전에 우선 사흘 정도 실컷 노는 것이 어떻소?"
계동평은 물론 백장청의 속셈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의외의 동정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하였던 것이다.
자기도 모르게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얼굴이 붉어졌으나 그도 역시 음성을 높여 대꾸했다.
"주인께서 그런 흥취를 내시니 노복은 편히 모셔야겠습니다. 그리고 노복은 십 년 안에 낙양에 왔던 일이 있으므로 어느 정도 길이 눈에 익었습니다."
"아하! 정말 잘됐구려, 정말 잘되었소. 우리 조반을 먹고 곧 출발하도록 합시다."
"노복이 시중을 들겠습니다."
그로부터 반 시진이 지난 뒤, 백장청과 계동평 두 사람은 주종 신분으로 마차에 올라 성남을 향해 출발하였다.
관림(關林)의 고적을 답사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계동평은 하인의 신분을 나타내기 위해 마부와 함께 마부석에 앉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백장청도 굳이 말리지 않았다.
마차는 두 사람을 태우고 천천히 길을 떠났다.
삐각삐각 말발굽 소리와 삐걱거리는 마차바퀴 소리가 어울려 귀가 따가왔다.
백장청이 슬며시 전음입밀의 수법을 써서 계동평에게 말을 건네었다.
"계노인, 나는 진심으로 몇 말씀 드리겠소. 잘 들으시오."
계동평은 전음으로 대꾸했다.
"네, 주인께서 어서 분부하십시오."
"계노인! 당신과 나는 이미 흉금을 털어놓았소. 지금부터 나는 당신을 나의 심복으로 대하고 여러 가지 고난을 함께 하겠소."
"네, 노복은 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계노인은 강호의 경험이 깊고 기지가 뛰어나니 금후 내가 신세지는 일이 매우 많겠습니다. 계노인께서는 이 몸이 나이가 어리고 천박하여 변변치 못하다 마시고 보좌해 주시기를 바라오."
계동평은 매우 감동된 듯 목소리까지 떨렸다.
"주인! 그 말씀에 이 노복은 복종합니다."
그리고는 잠깐 끊었다가 다시 전음술로 말을 이었다.
"노복의 이 마음은 하늘이 잘 알고 계십니다. 주인께서 무엇이든지 분부하시면 노복은…"
"허허 됐소. 계노인, 이 몸은 몇 마디 당연한 말을 해야겠소. 듣고 너무 책하지 말기 바라오."
"원… 노복이 어찌 감히…"
"다름이 아니라… 철판영주의 가장 친근한 심복이 되려면 기지와 강호의 경험 외에도 초인적인 무공이 필요하오."
계동평은 잠시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하였다.
"그건… 노복이…"
"핫하… 방금 나는 무공삼식의 초도(草圖)를 그려 놓았소. 계노인이 짬짬이 연습하면 열흘이나 보름 후에는 그런 대로 응용하실 수 있을 것이오."
계동평은 금방 입이 벙긋 벌어졌다.
"주인께서 가르쳐 주시는 초식은 반드시 고절한 절예일 것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것은 노영주(老令主)께서 수십 년의 심혈을 기울여 연구 창안하신 것이오. 초식은 절묘하기 짝이 없으나 아직 명칭을 정하지 못했소이다. 그 노인이 내게 전해 주신 후, 내가 스스로 공전삼식(空前三式)이라고 이름 지었소. 이 공전삼식의 원래의 뜻은 장래에 이것보다 더 훌륭한 절예가 나타나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으나, 아직까지는 이보다 더 훌륭한 절예가 없다는 뜻이오."
계동평은 매우 감격해 아! 하고 탄성을 질렀다.
백장청은 빙그레 웃으며 말을 계속했다.
"그때 노영주께서는 내가 너무 교만하다고 하시면서 선배의 업적을 말살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계노인! 그때 이 몸이 뭐라고 대답했는지 아시오?"
"글쎄올시다. 노복은 주인의 대답이 틀림없이 매우 완벽한 이유를 들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하하… 그때 나는 그 노인에게 세상의 일, 특히 무공초식은 절대로 규칙을 고수할 수 없다고 했소. 만일 규칙을 맹목적으로 지키기만 한다면 결코 그 무공은 진보가 없을 것이라고 말이오. 후배의 업적은 물론 간단히 말살할 수 없으나 그들의 초식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오. 어떤 간단한 초식을 점차적으로 개량하고, 또 연구 창안해서 나온 것이 아니겠소? 방금 말한 공전삼식은 고인의 업적을 초월하는 만큼 공전삼식이라 불러도 마땅하다고 대답했던 것이오."
계동평은 연방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의 그 이론은 정말 완벽한 것입니다."
"원 별 말씀을… 과찬이시오."
백장청은 다시 전음술로 말을 계속했다.
"그 공전삼식은 삼 초(三招)라고도 부르는데 사실은 초마다 아홉 가지의 변화가 있으니까 이십칠 초와 같소이다. 그리고 장(掌)이고 검이고 간에 그 현묘한 보법(步法)을 배합해 연성한 후에는 아무리 무공이 높은 상대를 만났다 해도 몸을 지킬 수 있고, 기회를 봐서 몸을 뺄 수도 있는 것이오."
계동평은 너무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주인께서 이렇게 후사(厚賜)하시니 노복은 목숨을 바쳐도 다 갚을 길이 없습니다."
백장청은 여전히 빙그레 웃는 얼굴이었다.
"계노인의 말씀이 너무 겸손하구려. 이제 완전히 한집안 사람이니 그런 말씀이 뭐 필요하겠소?"
이렇게 두 사람이 전음으로 얘기를 주고받는 사이에 마차는 벌써 낙하(洛河) 부근에 도착하고 있었다.
관림(關林)은 낙양성 남쪽 관새산(關塞山)으로 가는 도중에 있었다.
용문의 한가운데로 난 길을 따라가다가 낙하를 건너서도 십오 리 길을 걸으니 비로소 관림이 나왔다.
관림이란 삼국시대의 한수정후(漢壽亭候) 관운장의 능을 말한다.
역사에 빛나는 공원(公元).
이백십구 년, 운장이 강릉을 지키다가 패하여 서쪽의 맥성(麥城)으로 가다가 오나라 장수 여몽(呂蒙)의 계략으로 생포되었으나 끝까지 굴하지 않고 죽어갔던 곳이다.
전설에 의하면 오나라의 손권이 촉나라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관운장의 머리를 조조에게 보내 공을 돌렸다고 한다.
그리하여 후일의 화를 그에게 전가시키려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조조는 오히려 그 계략을 이용해서 침향목(沉香木)으로 시체 모양을 만들어 관운장을 왕후의 예로 후하게 낙양에 장사지내 주었다.
후에 역대의 왕조들이 이를 더 수리하고 건축하여 묘실은 더욱 웅휘해져 서호의 악묘(岳廟)보다 훨씬 더 커졌다.
주위에는 늙은 소나무들이 하늘에 닿을 듯 울창하였으니 사람들은 이곳을 관림이라 칭하였던 것이다.
관운장은 부녀와 유아까지도 다 아는 충과 의가 두터운 영웅이라고 할 수 있다.
전국의 여러 크고 작은 성읍에도 거의 관제묘의 건물이 있었다.
그 무덤은 둘이 있는데 하나는 맥성(지금의 호북성, 당양현 동남)의 의관총이고, 또 하나는 낙양성 남쪽의 관제총인데 이곳이 바로 관운장의 머리를 묻은 곳이다.
낙하의 나룻배는 상당히 커서 사람을 태운 마차가 그대로 올라갈 수가 있었다. 백장청 등을 태운 마차가 나룻배에 오르자 배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문득 백장청은 품속에서 종이 두루마리를 꺼내어 계동평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낙하의 도도히 흐르는 물결을 바라보며 전음입밀의 수법으로 계동평에게 말을 했다.
"이것은 이 몸이 임시로 그린 초도(草圖)요. 외우신 뒤에는 곧 없애 버리시오. 기회가 있을 때에 내가 연습해 보여 드리겠소."
계동평도 전음으로 대꾸했다.
"노복은 잊지 않겠습니다."
이들이 관림에 도착한 때는 벌써 점심때였다.
백장청과 계동평 두 사람은 관묘에서 간단히 소찬을 먹은 뒤 잠시 여가를 만들었다.
계동평이 공전삼식을 공부할 시간을 갖기 위해서였다.
백장청은 계동평이 묘 뒤의 웅장한 노송의 그늘로 들어가 공전삼식을 공부하는 동안, 묘 안의 이곳저곳을 한가롭게 구경할 수 있었다.
관제묘의 건물은 참으로 울창한 옛 모습을 그대로 지닌 채 위엄을 부리고 우뚝 서 있었다.
묘는 모두 세 채로 되어 있는데, 대문 앞에는 거대한 돌사자가 당장 포효할 듯 웅크리고 있었고, 대문 안쪽에는 적토마(赤兎馬)의 동상이 높이 서 있었다.
공교(拱橋)를 건너 대전에 이르면 관제의 문관 차림의 신상이 떡 버티고 있다.
또 둘째 전(殿)에 이르면 무관차림의 신상(神像)이, 그리고 셋째 전에는 각기 다른 세 개의 신상이 있었다.
관제의 모습이나 기타 여러 개의 상이나 모두가 위엄이 넘치며 엄숙하였고 마치 당장에라도 숨 쉬며 크게 호령할 듯이 보여 보는 사람의 옷깃을 여미게 하였다.
넷째 전의 뒤에는 바로 관제의 능이었다.
묘문은 크고 견고한 돌로 만들어져 있었고, 좌우 양쪽에 각기 정교한 팔각정이 있었다.
이곳 앞뒤에 하늘을 찌를 듯 빽빽이 들어선 노송들은 더욱 장엄하고 엄숙한 기분을 자아내게 하였다.
백장청은 한가롭게 구경하며 후전으로 들어갔다.
수없는 신상이 늘어선 가운데를 걸으며 그는 열심히 신상을 올려다보았다.
이때 왼쪽에서 누군가 소곤소곤 속삭이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여인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자지러질 듯 연이어 일어났다.
백장청은 미간을 찌푸리고 혼자 중얼거렸다.
'이 장엄하고 신성한 관제묘에서 어떻게 이런 소리가 들릴까…'
문득 언짢은 기분이 일자 공연한 의심까지 생겼다.
순간, 왼편 측실(側室) 안의 두런대던 소리가 뚝 그쳤다.
백장청은 더욱 의심이 생겨 재빨리 그 측실을 향해 걸음을 옮겨갔다.
바로 이때였다.
한 사미승(沙彌僧)이 뒤에서 다급하게 외쳤다.
"시주는 걸음을 멈추시오."
백장청은 우뚝 멈춰 서서 돌아보며 물었다.
"스님! 이곳은 귀묘의 금지 구역이 아니잖소?"
사미승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합장으로 예를 취하며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시주! 그… 금지 구역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할 수 있기도 합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사미승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왜냐하면 이 왼쪽 측실은 어느 시주 공자가 전부 빌리셨기 때문입니다."
"응… 그렇군요. 그러나 그 공자는 혼자서 이 거대한 집을 빌려 무엇에 쓰오?"
"그 공자는 이렇게 조용한 곳을 좋아하시어 글을 읽기 위해 과거 때까지 빌리신 것입니다."
백장청은 일부러 소리 높여 크게 말을 했다.
"네! 그러면 나는 방해하지 않겠소이다."
이어서 계속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스님! 귀묘에 또 빌릴 만한 빈 방이 있소이까?"
"없습니다. 본래 후전(後殿)의 왼쪽 측실은 유람객이 투숙하시도록 제공해 오던 방이었는데 지금 그 상공께서 빌리신 뒤로는 다시 빌려 드릴 만 한 객방이 없습니다."
백장청은 일부러 느릿하게 시간을 끌어 보려고 생각했다.
"그러면…"
한참 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정말 안 되겠구려…"
말을 끝내자 백장청은 천천히 오른쪽 문으로 해서 후전의 능쪽으로 걸어 나왔다.
이 관묘의 주위를 둘러싼 빽빽한 숲은 깊이가 한 마장 가량이나 되었다.
한편 계동평은 한 고승의 등걸에 기댄 채 정신을 모아 공전 삼식의 초식변환를 연습하고 있었다.
그런데 계동평이 있는 곳에서 오십여 장쯤 떨어진 곳에는 송아지만큼이나 큰 늑대가 코를 널름거리며 천천히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늑대의 뒤에는 고동색 장삼을 입은 키가 훌쩍 큰 노인이 따르고 있었다.
노인은 숱이 많은 눈썹이 시꺼멓게 돋아 있었는데 번쩍이는 눈은 매우 컸다.
구레나룻은 뺨을 온통 덮고 있었고 나이가 얼마쯤 됐는지는 어림되지 않았다.
그 큰 눈이 끔벅일 때마다 번개 같은 정광이 번득이니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위압당하게 하는 위엄이 넘치고 있었다.
더구나 이렇게 흉맹하고 거대한 늑대를 거느리고 있으니 더욱 남의 주목을 끌었다.
계동평은 거리가 먼 탓인지 또는 전 신경을 그 공전삼식의 정묘한 변화에만 쏟은 탓인지 도무지 늑대와 노인의 출현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고동색 장삼의 노인은 생각에 잠긴 듯 발이 내키는 대로 아무렇게나 걷고 있었다.
그 흉맹한 늑대도 앞서 어슬렁거리며 걷다가는 잠깐씩 멈추어 서서 주인을 기다리곤 하는 것이었다.
마치 잘 훈련된 개가 집주인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정말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모두가 아는 것처럼 이 늑대란 짐승은 사나운 야생동물로서 결코 사람이 길들일 수 없는 동물 중의 하나인 것이다.
노인과 늑대가 계동평의 삼 장 거리까지 접근했을 때에야 그는 후딱 깨달았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곧 그 공전삼식의 초도를 품에 넣는 동시에 슬쩍 노인과 늑대를 눈여겨보았다.
순간 그는 가슴이 철렁해짐을 느꼈다.
노인은 걸음을 멈추고 삼 장 밖의 계동평은 본 체 만 체하며 늑대의 머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청아! 잠깐 쉬자!"
이어서 노인은 혼자 중얼거렸다.
"청아, 너는 모양이 더럽다고 부끄러워 말아라. 세상에는 염치없는 사람들이 툭하면 늑대 같은 심보를 가졌다고 욕을 하지만 사실은 금수만도 못한 작자들이 얼마든지 있단다. 그 따위 인간들이 너를 빗대어 욕을 하는 것은 천하의 못된 녀석들이다. 청아! 그렇지?"
계동평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 늙은 괴물은 공연히 또 무슨 불평이람…'
노인은 숲의 깊은 곳을 주시하며 여전히 혼자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내가 사람들과 왕래하지 않고 부득부득 너하고만 있다고 나를 괴상하다고 한단다. 그래서 내게 북막랑인(北漠狼人)이라던가 뭐라는 별호를 붙였구나…"
그는 쓸쓸히 웃고 나서 가만히 한숨을 쉬고는 늑대의 머리를 쓸며 다음 말을 이었다.
"청아, 너만이 나를 이해할 수 있을 게다. 망망한 인해(人海) 중에 너의 인자한 마음에 비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느냐?"
원래 이 노인은 현재 팔대 고수 중의 한 사람인 북막랑인 신천토(申天討)였던 것이다.
이 북막랑인으로 말하면 현재 무림 팔대 고수 중 그의 무공이 가장 높은 것으로 꼽혔다.
위인 됨이 괴상하며 악을 버리고 선만을 지향하는 노인이었다.
정(正)과 사(邪)의 가운데에 처신하며 언제나 늑대와 짝하고 다닐 뿐 결코 어떤 사람과도 교제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그가 모종의 극단적인 상심이 있어 그처럼 사람들과 완전히 절교하고 늑대만을 짝하는 것이라고도 하였다.
그러나 도대체 어떤 일로 상심했는지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고, 심지어는 그의 출신내력조차 이러쿵저러쿵 세상 사람은 말하지만 하나도 맞는 것은 없었다.
다만 그의 신천토라는 이름과 방금 세상 사람들을 모두 증오하는 듯한 혼잣말로써 그의 성격을 대충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었다.
그토록 무림인들의 추측이 분분하고 또 비판이 따르는 것도 무리는 아닐 성 싶었다.
계동평은 벌써부터 이 북막랑인 신천토를 알고 있는지 또는 공력이 고심하기 짝이 없는 주인 백장청이 지척에 와 있을 것을 믿어서인지 처음의 놀란 얼굴을 곧 완화하고 도리어 태연히 못 본 척하였다.
신천토는 여전히 깊숙한 숲 속을 바라보더니 곧 시선을 거두어 늑대에게로 옮겼다.
그는 손으로 늑대의 머리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청아, 배고프지?"
늑대는 마치 사람의 말을 잘 알아듣는 지 꼬리와 머리를 흔드는 것이었다.
신천토가 조용히 말했다.
"여기 갖고 온 점심이 있단다. 본래는 네게 먹여 줘야겠지만 너는 배고프지 않다니 더구나 상대는 너와 동류(同類)이다. 나는 네가 동류끼리 상잔케 하고 싶지 않다. 동시에 나는 그에게 꼭 물어봐야 할 말이 있으니 이따가 보기로 하자…"
계동평은 북막랑인 신천토가 처량하게 뇌까리는 것을 듣고 안색이 변하여 속으로 생각했다.
'늙은 괴물 같으니라구… 결국 나를 두고 하는 소리였군.'
그렇지만 겉으로는 내색하기도 거북스러워 못 들은 척 태연히 있었다.
신천토는 계동평의 그런 눈치를 챘는지 코웃음을 치며 비꼬았다.
"흥! 자넨 꽤 마음이 넓어졌구먼. 기분대로 하지 않는 수양이 많았던 모양이지?"
그제서야 계동평은 몸을 돌려 신천토에게 포권을 했다.
"허허… 과장이 심하시군요. 뭐 이렇다 할 수양을 못했지요. 신 대협의 안중에 이 계동평이라는 존재는 없는 것이니까 잘난 척하지 못했을 따름이오."
계동평이 공손한 말투로 말했다.
"…"
신천토는 계동평의 얼굴을 말없이 쳐다보았다.
"신 대협은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지요?"
신천토가 이윽고 냉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