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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 모임을 시작합니다.
오늘도 고린도 전서에 대한 강의를 하겠습니다.
지난 주에 상을 통한 인식행위와 상을 통하지 않는 인식행위의 차이점에 대해 강의를 했습니다. 거기에 따라 하느님의 지혜와 인간의 생각의 차이점에 대해 언급했지요? 하느님의 지혜는 직관에 의해서만 파악이 됩니다. 이 지혜는 요철의 원리에 의해 파악이 되어지기 때문이지요. 요철의 안에는 시차가 없습니다. 어둠 즉 빛이기 때문이지요. 또한 다른 공간이 없습니다. 둘은 함께 조화를 이루고 현존할 뿐이지요. 그런게 상을 가진 인식행위는 시차가 있고 공간이 따로 존재해야만 이루어진답니다. 경험하자마자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야만 파악이 되고 변화속에 있는 바깥 사물의 공간과는 달리 불변하는 내면의 인상이라는 다른 공간이 필요한 것이지요.
이에따라 생각을 통해 파악된 인식은 실재(reality)와는 거리감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인식할 때 그분은 살아 계시는 분이시랍니다. 따라서 실제 만남속에서 당신의 인식이 이루어져야 하지요. 보고 들은 인상을 가지고 당신을 파악한 지식은 아무래도 실제와는 많이 다르지요. 실제 사람을 만나는 것이랑 사진을 통해 그 사람을 만나는 것의 차이라 할 수 있겠지요. ^^여러분이 내 목소리를 듣지도 않고 나를 만나보지도 못한 채 인터넷에서 글로만 나를 만날 때 가진 나에 대한 인상이랑 실제 나를 만나보고 목소리를 들어본 후의 인상이랑의 차이점과 같지요. 많이 다르지요?^^ ^^예수님같은 모습으로 상상했다가 동네 아저씨 같은 모습을 보고는 많이 실망했을 것입니다.
영적인 인식은 모두 직관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직관을 방해하는 것은 상을 통한 인식습관 때문이고 상을 통한 인식습관은 상을 통하지 않을 때 인식이 일어나기까지 겪어야 하는 어지러움과 혼란때문이라고 했지요? 또 이런 인식의 고정된 틀 때문입니다. 고정관념은 어느 것에 치우쳐진 견해지만 고정틀은 사물을 상대성의 비교에 의해 파악하는 인식습관이지요.
가령 빛을 인식할 때 어둠의 반대로 이해하고 어둠을 인식할 때 빛이 없는 것이라 인식하는 식이지요. 빛의 결핍이 어둠이라 배워왔지요? 그것은 관념적으로 빛을 정의한 것이랍니다. 그러나 실제 인식행위안에서는 빛과 어둠은 불가분의 관계로 분리시킬수가 없답니다. 빛과 어둠이 하나로 있으면서 비로소 밝음이 존재하기 때문이지요. `밝다`는 인식행위안에는 빛과 어둠이 조화를 이루고 있답니다. 어둠만이 있을 때나 빛만 있을 때 인식행위가 일어나지 않는답니다. 의식조차 되지 않으니까요. 둘이 어우러져야만 무언가가 의식이 되고 질문이 되고 인식이 일어나는 것이랍니다. 빛의 요소가 어둠보다 더 많을 때를 낮이라 하고 어둠의 요소가 빛보다 더 많을 때를 밤이라 합니다.
그러니 태초에 하느님이 빛을 창조한 이래 빛과 어둠은 둘이 하나가 되어 한번도 나눠진 적이 없다 이 말이지요. 이원론적인 사고방식이 바로 상을 통한 인식행위의 틀이랍니다. 그러나 실제에서는 이처럼 둘이 하나로 조화롭게 현존하지요. 매우 다양한 양상으로요. 미술에서도 명도라는 것이 있지요? 밝음의 정도 말입니다. 그럼 어찌됩니까? 어둠의 세력과 빛의 세력도 확 이분법적으로 갈라지는 것입니까? 생각으로는 그렇게 되지요. 그러나 우리가 실제 경험상으로볼 때 둘이 확연히 구분되던가요? 서로 뒤섞여 있지요. 착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고 어떤 땐 천사같은 사람이 어떤 땐 악마처럼 돌변합니다. 뭐가 뭔지 판단하기 곤란하지요.
우리가 가끔 이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내가 정말 착한 일을 했을 때, 아, 더 이상 죄짓지 말고 여기서 죽어 천국으로 갔으면 좋겠다! 하고 말입니다. 흔히 수녀님들이 잘 하는 얘기중의 하나가 이런 것이 있지요. 세례받는 사람들에게 여러분이 지금 죽는다면 천당으로 직행한답니다. 라는 말요. 들어보셨나요?^^ 웃는 그 순간을 사진으로 찍어놓으면 언제나 그 사람은 웃는 사람이지요. 반면에 인상찌푸린 사람을 사진으로 찍어놓으면 그 사람은 언제나 불만스런 사람이지요. 상이란게 이렇답니다. 그러나 사람은 울다가 웃다가 화냈다가 화해하지요.
의식과 인식에서 하느님의 지혜는 의식한 것을 인식하는데 시차간격이 없고 딴 것에 기대어서 그것을 파악하지 않습니다. 어둠즉 빛으로 즉각 각성되는 앎입니다. 어둠을 이해하기 위해 빛을 끌어들여 어둠을 정의하지 않고 어둠이 지나면 빛이 오겠지 하고 인식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이해되는 것이 인간적 지식입니다. 오늘은 여기서 더 나아가서 관심과 의식의 차이점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이 부분에서는 이미 여기저기서 서너차례 강의를 했습니다. 오늘 좀 더 다루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공생활은 빛의 시간이고 예수님의 수난시기는 어둠의 시간이지요. 그러나 내가 이렇게 얘기한다고 해서 공생활은 빛만 있고, 수난은 어둠만 있다 여기지는 않겠지요? 명도로 알아들어야 한다 이 말입니다. 흑백논리가 아니라 밝다, 어둡다로 알아들어야지요. 밝을 때도 어둠이 그 아래 깔려 있고, 어두울 때도 그 아래 빛이 깔려 있는 것이랍니다. 어리석은 질문이 없다면 현명한 대답이 나올리 없겠지요? 모두 현명해서 질문할 것이 없다면 지혜란 것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병이 있어 약이 있듯이 공생활때 보면 백성들의 가난을 통해 하늘나라의 부가 드러나기도 하고 바리사이나 율법교사들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지혜가 드러나기도 합니다.
반면에 수난에서는 어둠의 세력이 판치는 세상이지만 그 안에 빛도 있답니다. 바로 예수님의 행동이 어둠을 인식하게 하는 빛이지요. 극장에 들어갈 때 캄캄해서 하나도 안 보이다가 조금 적응이 되면 보이기 시작하듯이 우리에게 수난이 닥칠 때도 느닷없이 닥치기에 처음에는 캄캄하니 아무 것도 안보입니다. 그래서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허둥대다가 말려들기도 하지요. 그러나 차차 어둠에 적응되기 시작하는데 그 이유는 주님이 그 상황안에 빛으로 현존해주시기 때문이랍니다. 그래서 어둠속에서도 잘 보게 되는 것이지요. 오늘 강의하는 관심과 의식이 바로 이 어둠속에 놓인 어둠의 원리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어두워서 잘 보지 못하는 틀이지요.
관심과 의식은 시소의 양쪽과 같답니다. 시소가 한쪽을 누르면 반대쪽이 올라가듯이 관심가진 쪽의 것과 반대쪽의 것이 더 의식되게 되어 있답니다. 가령 입시시험을 치룬 학생이 꼭 합격해야 한다고 여겨보십시오. 그럼 그 학생은 발표일까지 불합격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잠시도 편하지 못할 것입니다. 절대로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여기면 여길수록 그렇게 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에 휩싸이는 것이지요. 관심을 기울이면 기울일수록 그 반대편의 것이 의식이 되면서 불안은 가중됩니다. 이것이 시소게임입니다. 나의 주장을 꼭 관철시켜야겠다고 여기면 여길수록 상대방은 더 강하게 반발하지요.
누군가 여러분에게 다가와서 부탁이 있는데 꼭 들어줘야해요 하고 말을 걸어올 때 여러분은 긴장하지 않습니까? 들어주려 합니까? 아니면 어떻게 빠져나가지 하는 생각이 듭니까? 내가 대신 대답할까요?^^ 어떻게 빠져나갈까 하는 생각이 들기 마련이랍니다. 시소의 원리때문이지요.
대상에 따라 다르긴 합니다.^^
대상에 따라 다르다고요? 하느님이 우리에게 부탁할 때도 우린 빠져나갈 궁리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부탁할 때는 어떻게 합니까? 상대방이 긴장하지 않도록 좋은 얘기를 나누는 가운데 마음을 들뜨게 만들어놓고 부탁하지 않습니까? 나도 이렇게 여러분들에게 많이 당한답니다.^^
시소게임중에 특히 지독한 것이 바로 수난상황이랍니다. 바로 죽음의 널뛰기지요. 서양의 시소와 같은 것이 우리 나라의 널뛰기랍니다. 차이점은 서양사람들은 그래도 시소를 더 이상 높이 올라가지 않도록 고정시켜두었지만 우리 나라의 널뛰기는 무한정 높이 올라갈 수 있게 되어 있답니다. 한번 시소게임이 불붙었다고 하면 우리 나라 사람은 하늘 끝까지 올라갑니다. 그래서 둘 중 하나가 떨어져 죽어야만 끝나는 게임을 하려들지요.^^ 도중에 적당하게 타협보는 법이 없습니다. 수난상황에서의 널뛰기는 `난 아니야!` 라고 하면 할수록 더욱 더 말려드는 널뛰기랍니다.
그저께 월피정때 이 문제를 깊이 다루었지요. 아주 좋은 케이스를 아침에 경험한 도반이 있어서 설명하기 매우 좋았답니다. 자주 일어나는 수난의 널뛰기는 자동차로부터 오지요. 주차문제로 시비가 붙는다든지, 천천히 가다가 봉변당한다든지, 잠시 정차했다가 뒷차 운전자에게 온갖 욕설을 다 들어야 한다든지 하는 경우지요. 느닷없이 상대방이 욕설을 해대면서 나의 인격을 모욕하고 달려듭니다. 미처 사리분별할 여유도 없습니다. 속에서 분함이 치밀어오르지요. 억울함이 가득합니다. 아니라고 하면 할수록 열이 더 받습니다. 꽉 막힌 상대방을 더욱더 확인하게 되니까요. 도대체 말이 통하지 않지요. 무조건 자기주장만 펴는 상대방에게 상식이고 뭐고 아무 것도 통하지 않습니다. 자기 주장도 없이 아예 기분 상하게 하려고 작정한 것인지 온갖 욕설을 퍼붓는 상대방앞에서 당황하고 화가나서 결국은 나도 이성을 잃고 같이 널뛰기를 하고 있는 나를 보게 됩니다. 서로 한번씩 해 댈수록 높이 올라갑니다. 상대방을 어떻게 하면 더 약올릴까 생각밖에 없지요.
그럼 상대는 가만 있습니까? 또 열통터지는 행동을 하지요. 화날수록 상대방을 더욱더 몰아붙여 높이 올리지만 그 상대도 내려오면서 나를 더 높이 올려버립니다. 이 널뛰기의 끝은 둘 다 인격이 걸레처럼 너덜너덜해져 그후 그로부터 오는 후유증을 오랫동안 겪게 된다는 것입니다. 돌아서면 멍합니다. 부끄럽고 창피합니다. 명상한다는 내가 이게 뭔가 싶지요. 주님을 찾는다는 내가 뭘하고 있는지 참담하지요. 그런데 이런 수난상황에서 그리스도는 침묵하신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때 침묵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압니다. 침묵이 이 어둠속의 빛이랍니다. 그러나 우린 느닷없이 당하느라 눈앞이 캄캄할 뿐입니다. 한참 어둠속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나중에 가서야 그 안에 계신 분이 보인답니다. 그분은 침묵하고 계셨고 온갖 모욕과 욕설을 다 받으시고 가만히 계셨던 것이지요. 그분처럼 되고자 할 때만 그 어둠은 실제상의 어둠이 되어 단지 밤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분을 전혀 의식하지 못할 때 그 어둠은 관념속의 어둠으로 현존하지요. 빛과 정반대 개념의 캄캄한 어둠말입니다. 이런 수난적 어둠속에서의 길이 바로 그리스도의 침묵이랍니다.
침묵에는 두가지 의미가 있답니다. 하나는 침묵하므로써 그 죽음의 시소게임에 말려들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표현이구요. 거기 말려들면 게임하는 두 사람 모두 영적으로는 피폐해지고 말지요. 다른 하나는 그렇게 침묵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께 드리는 번제사랍니다. 그러니 나를 모욕하는 자는 곧 하느님 자신을 모욕하게 되는 것이랍니다. 이때 왜 침묵하기 힘이 들까요? 다른 사람들이 나의 침묵을 오해할까 두려워서지요. 가만 있으면 나를 욕하는 저 사람의 주장을 내가 시인하는 듯 비춰지기 때문이구요.
이제 고린도 전서 3장으로 돌아가서 봅시다. 여러분은 자신이 하느님의 성전이며 하느님의 성령께서 자기 안에 살아 계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만일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을 멸망시키실 것입니다.(3,16-17)
이 시소게임은 인간안의 성소를 파괴시키려는 것이 목적이랍니다. 인격이 거칠어지고 그 싸움을 통해 점점 인간이 짐승처럼 변해갑니다. 마음은 삭막해지고 황폐해집니다. 거기 어떤 생명도 살아남지 못하는 황량한 광야가 되고 말지요. 자신이 공허해지기에 으르렁거리며 먹잇감을 찾아 헤매는 이리처럼 됩니다. 누구든지 조금만 빌미를 주면 시비를 걸고 달려들려고 합니다. 세상이 삭막해보이고 인간들이 비겁해보이고 악이 판치는 듯 보입니다. 강해지지 않으면 안되겠다 싶어집니다. 그리고는 명상과 멀어집니다. 그 길은 너무 수동적인 것같고 현실적인 것 같지 않기때문입니다.
달려들어야 시원해서 그런다는 사람이 있더라고요. 그게 자기 타고난 성격이라고...달려들어야 시원해서 그런다는 사람이 있더라고요. 그게 자기 타고난 성격이라고...
그게 성격이 아니라 중독증세지요. 그런 싸움에 자주 노출된 사람은 그런 싸움이 안 일어나면 심심해합니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군인이 평시에 잘 적응을 하지 못하듯이 일단 저 광란의 널뛰기에 맛을 들인 사람은 그맛 자체를 즐긴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안에는 생명이라곤 찾을 수가 없지요. 자기 논리로 무장해 있지만 그 논리는 사람을 살리는 논리가 아니라 오로지 상대방을 죽이기 위한 논리랍니다.
그러니 정말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지혜는 하느님이 보시기에는 어리석은 것입니다.(3,19) 침묵할 줄 아는 바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어둠속에 난 길이고 진리랍니다.
오늘은 여기까지합시다. 다음 시간에도 이 주제를 가지고 계속 하겠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 모임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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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 무지님, 감격스럽습니다. ^^ 넘 빠르시고 또 깔끔하시고요.^^ 제가 갈무리 하고 안심하고 게시판을 본께 벌써 정리글이 올라 있네요!^^*
무지님 !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 무지님!
무지님 늘 수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에님, 쌀자루님, 좋아라님, 기쁨님 한 분씩 불러보는 기분도 참 소중하고 좋으네요. 고맙습니다.^^
무지님...요약해주시니 또렷이 각인됩니다.어제보다 훨~ 더웁지요? ^^
침묵하는 바보...아멘~
무지님, 정리의 달인이 되셨습니다. 감사합니다.^^